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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토리 지그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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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DDFF><colcolor=#000> 트란실바니아 제3대 공
바토리 지그몬드
Báthory Zsigmond
파일:바토리 지그몬드.jpg
이름 바토리 지그몬드
(Báthory Zsigmond)
출생 1572년 3월 20일
트란실바니아 공국 너기바라드(현재 루마니아 오라데아)
사망 1613년 3월 27일 (향년 41세)
보헤미아 왕국 리보초비체
재위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보이보드
1581년 5월 15일 ~ 1586년 12월 13일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공 (1차)
1586년 12월 13일 ~ 1598년 3월 23일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공 (2차)
1598년 8월 22일 ~ 1599년 3월 21일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공 (3차)
1601년 4월 3일 ~ 1602년 6월 29일
배우자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1595년 결혼 / 1599년 결혼 무효)
아버지 바토리 크리스토프
어머니 보치커이 에르제베트
형제 그리셀다, 발타자르(이복 형제), 미클로시(이복 형제)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트란실바니아 공국 제3대 .

2. 생애

1572년 3월 20일 트란실바니아 공국 너기바라드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겸 트란실바니아 공인 스테판 바토리의 형제이며, 보이보드로서 스테판 바토리를 대신해 트란실바니아 공국을 다스린 바토리 크리스토프이며, 어머니는 헝가리 귀족 보치커이 죄르지의 딸인 보치커이 에르제베트였다. 친형제로 그리셀다[1]가 있었고, 이복 형제로 발타자르[2], 미클로시[3]가 있었다. 아버지와 삼촌 스테판 바토리는 가톨릭 신자였지만, 어머니는 칼뱅교회 신자였다. 그는 예수회 신부 안토니오 포세비노의 가르침을 받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1581년 초, 크리스토프는 두번째 아내 보치커이 에르제베트가 사망한 직후 중병에 걸렸다.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코스탄티니예에 퍼지자, 오스만 대재상 코차 시난 파샤는 크리스토프가 추방했던 헝가리 귀족 마르카지 팔에게 트란실바니아 공에 오르는 걸 제안했다. 이 소식을 접한 의회는 미르카지 팔이 트란실바니아 공에 선임되는 걸 막기 위해 크리스토프가 죽기 전인 1581년 5월 15일에 그의 아들 바토리 지그몬드를 보이보드로 선출했다. 아버지 크리스토프는 그 해 5월 27일에 사망했고, 오스만 제국 파디샤 무라트 3세는 1581년 7월 3일 바토리 지그몬드의 선출을 인정했다. 그 대신, 매년 15,000 플로린의 공물을 코스탄티니예에 납부하도록 했다.

그러나 마르카지 팔은 트란실바니아 공이 되려는 야심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오스만 궁정에 자기를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세워주 다면 공물을 2배로 늘리고, 100,000 플로린에 달하는 추가 세금을 납부하겠다고 제안했다. 무라트 3세는 바토리 지그몬드에게 마르카지 팔의 제안을 전하면서, 그에게도 이와 같은 공물을 바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며 반발했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정부도 오스만 제국의 탐욕으로부터 트란실바니아를 지킬 의사를 표명했다. 여기에 왈라키아 공국 몰다비아 공국에서도 과도한 공물 요구에 반발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무라트 3세는 1581년 11월에 바토리 지그몬드의 통치를 재차 인정하기로 했다.

지그몬드는 아직 미성년자였기에, 섭정 의회가 권력을 잡았다가 1585년부터 헝가리 귀족 그히치 야노시(Ghiczy János ?~1589)가 섭정을 맡았다. 하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이자 트란실바니아 공인 스테판 바토리는 크라쿠프에 별도의 트란실바니아 정부를 조직하고 어린 조카를 대신하여 트란실바니아에 관한 모든 중요한 결정을 스스로 내렸다. 또한 루스 차르국과의 전쟁 때 트란실바니아에서 동원한 군대를 투입하기도 했다. 그러던 1586년 12월 13일, 스테판 바토리가 사망했다. 그 후 지그몬드는 트란실바니아 공에 선임되었다. 그는 아직 14살의 미성년자였고, 그히치 야노시가 섭정으로서 계속 통치했다. 지그몬드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 후보 중 한 명이었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 의회는 지그문트 3세 바사를 왕으로 선출했다.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를 놓고 지그문트 3세 바사와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3세가 전쟁을 벌일 때, 트란실바니아 정부는 지그문트 3세를 지원했다. 한편, 스테판 바토리 생전에 크라쿠프에서 별도의 트란실바니아 정부를 이끌었던 바토리 발타자르는 스테판 바토리 사후 트란실바니아로 돌아간 뒤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퍼거라슈에 있는 자신의 궁정을 섭정 그히치 야노시의 통치에 반대하는 인사들의 집결지로 만들었다.

1588년 10월,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개신교에 지나치게 적대적이어서 트란실바니아에서 종교 갈등을 유발하는 예수회를 추방하라고 권고했다. 그들은 그렇게 해준다면 당시 16세였던 지그몬드를 성인으로 인정해 친정을 실시하는 걸 받아들이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지그몬드는 예수회 인사들과 가까운 사이였기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친족들은 개신교 대표들이 주도하고 있는 의회에 저항하면 트란실바니아 공 직위가 위태로워진다며, 그들의 요구에 따르라고 설득했다. 의회는 1588년 후반에 다시 소집된 뒤 같은 요구를 되풀이 했고, 지그몬드는 고심 끝에 12월 8일 예수회 추방을 받아들였다. 그 대가로, 그는 성인으로 선포되면서 친정을 시작했고, 12월 23일 트란실바니아 공 대관식을 거행했다.

교황 식스토 5세는 예수회가 추방되었다는 소식에 분노해 지그몬드를 파문했다. 지그몬드의 사촌이자 헝가리 추기경인 바토리 언드라시는 교황에게 "개신교 고문들이 그에게 예수회를 추방하라고 강요했을 뿐, 지그몬드는 그들을 추방하고 싶지 않았다"라며 파문을 철회해달라고 요청헀다. 이에 식스토 5세는 1589년 5월 지그몬드가 고해신부를 고용하는 걸 허가했고, 1590년 부활절에 파문을 취소했다. 이후 지그몬드는 국가 행정 최고 직위에 가톨릭 신도를 앉힘으로써 가톨릭 교회의 지위를 강화하려 했고, 1591년 8월 바토리 언드라시와 바토리 발타자르와 접견해 예수회를 합법화하는 것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또한 그는 이탈리아 예술가와 장인들을 자신의 궁정에 초대해 고문이나 집사로 삼았다.

지그몬드의 이같은 행보에, 개신교 영주들은 위협을 느꼈다. 그들은 이대로 가다간 궁정이 비헝가리 인사들로 채워지고, 가톨릭이 트란실바니아를 지배해 자신들을 억압할 거라고 여겼다. 1591년 11월, 줄러페헤르바르 의회는 지그몬드의 방탕한 생활 방식을 비판하면서, 그가 왕실 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만 정책을 수립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후 바토리 발타자르가 사촌 지그몬드를 폐위하고 공위를 가로채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반대로 지그몬드의 전직 가정교사인 갈피 야노시가 지그몬드와 발타자르 간의 사이를 이간질하고 있으며, 나중에는 두 사람 모두 죽이려 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1592년 여름, 교황 클레멘스 8세의 특사인 아틸리오 아말테오가 트란싧라니아 공국에 찾아와서 지그몬드와 발타자르 간의 화해를 중재했다. 또한 그는 지그몬드에게 가톨릭 공주와 결혼할 것을 제안했다.

1592년 8월, 무라트 3세는 지난날 몰다비아 공국 보야르들에 의해 폐위된 전임 보이보드 아론 트리아눌을 복위하기로 하고, 지그몬드에게 현재 자포로제 카자크의 지원을 받아 보이보드에 오른 페트루 7세 카자쿨을 축출하고 아론을 복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지그몬드는 이 명령에 따라 1592년 10월 시브리크 가스파르가 이끄는 트란실바니아군을 파견해 아론을 복위시켰다. 또한 지그몬드는 연간 공물을 2배 지불하라는 무라트 3세의 명령에 복종했다.

이 무렵, 헝가리 역사가이자 지그몬드의 비서인 규라이 팔은 갈피 야노시와 함께 줄러페헤르바르에서 비밀 의회를 소집한 뒤 영주들에게 지그몬드와 발타자르 사이의 불화가 끝나지 않는다면, 발타자르를 추방하거나 처형하는 것에 동의를 받아냈다. 그러나 이 비밀 의회의 정보가 누설되었고, 영주들은 발타자르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책임을 규라이 팔과 갈피 야노시에게 떠넘겼다. 1592년 12월 10일, 발타자르는 지그몬드를 압박한 끝에 그의 동의를 받아낸 뒤, 병사들을 이끌고 아바파에서 규라이 팔을 체포한 뒤 사지를 잘라 죽였다. 또한 1593년 3월 8일에는 지그몬드의 동의를 다시 받고 갈피 야노시를 체포한 뒤 처형했다. 이리하여 발타자르의 권세가 매우 강해지자, 지그몬드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도움을 받아 권좌를 지키기로 마음먹고, 1593년 여름, 지그몬드는 변장을 한 채 크라쿠프로 간 뒤 지그문트 3세 바사의 여동생인 안나와의 결혼을 협상했지만 무산되었다.

1593년 8월, 오스만 파디샤 무라트 3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면서 지그몬드에게 오스만 제국군을 돕기 위한 보조군을 보내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지그몬드는 이 명령을 따르고 싶지 않았고, 교황 클레멘스 8세도 지그몬드에게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조직된 신성 동맹에 가입하라고 설득했다. 루돌프 2세의 황제군이 1593년 가을에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로 일련의 전투를 벌여 승리한 뒤, 지그몬드는 루돌프 2세가 트란실바니아의 독립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신성 동맹에 가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하는 건 자살 행위라고 여기고 단호히 거부했다.

1594년 7월, 발타자르는 이를 기회로 삼아 주요 관리들을 포섭해 지그몬드를 폐위한 뒤 자기가 트란실바니아 공이 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는 지그몬드를 압박해 퇴위하도록 했고, 지그몬드는 코바르로 가서 이탈리아로 이주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보치커이 이슈트반은 다른 군 사령관들과 함께 코바르로 달려갔고, 지그몬드가 마음을 바꾸도록 설득했다. 보치커이는 군대를 이끌고 의회를 압박해 바토리 지그몬드를 공으로 도로 받들도록 했다. 그 해 8월 28일, 8월 28일 발타자르를 비롯해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반대했던 귀족 12명이 보치커이 이슈트반에 의해 음모 혐의로 체포된 뒤 감옥에서 교살되었다.

1594년, 지그몬드는 오스트리아 대공국, 교황령, 스페인, 페라라 공국, 만토바 공국, 토스카나 대공국이 가담한 신성 동맹에 가담했다. 그 해 9월 16일 몰다비아 보이보드 아론 트리아눌이 참가했고, 11월 13일에는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 미하이 2세도 가담했다. 아론 트리아눌과 미하이 2세는 교황청과 직접 협상하려 했지만, 지그몬드는 왈라키아와 몰다비아는 자신의 봉신이니 그럴 수는 없다며 가로막았다. 그의 사절인 보치커이 이슈트반은 1595년 1월 28일 프라하에서 트란실바니아가 신성 동맹에 가입한 것을 확인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이때 맺은 조약에 따르면, 루돌프 2세는 트란실바니아와 파르티움을 통치 하고 '프린스'라는 칭호를 사용할 지그몬드의 세습권을 인정했지만, 지그몬드 가문이 단절될 경우 트란실바니아 공국은 합스부르크 가문 수중에 있는 헝가리 왕국에 재통합되어야 했다.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4월 16일에 조약을 확정했다. 또한 의회는 종교적 혁신을 금지했고, 이로 인해 우드바르헬리셰크의 세케이인 안식일 수호파[4]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1595년 5월 3일 또는 5월 4일, 몰다비아 보이보드 아론 트리아눌은 지그몬드로부터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군사 작전을 논의하자는 초청장을 받고 그곳으로 향했다가 긴급 체포되었다. 지그몬드는 아론이 신성 동맹을 이탈하고 무라트 3세와 단독으로 평화 협약을 맺으려 했기에 자기가 손을 썼다고 주장했지만, 대다수 연대기 작가들은 아론이 지그몬드에게 충성 서약을 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이후 빈슈 데 조스의 마르티누치 성에 투옥되었고, 1597년 6월에 독살당했다. 이후 슈테판 8세 라즈반이 트란실바니아군에 의해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그 후 왈라키아 보야르들은 미하이 2세를 대신해 바토리 지그몬드와 협상한 끝에 줄러페헤르바르 조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12명의 대 보야르로 구성된 위원회는 보이보드와 함께 국가의 행정 통치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 보야르들은 트란실바니아 공의 승인 없이는 보이보드에게 처형될 수 없고,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더라도 재산을 몰수당하지 않았다. 미하이 2세는 사절들이 협상한 조약 내용이 자기에게 지극히 불리하고 보야르들에게 유리한 걸 보고 불만을 품었지만,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치르는 상황에서 보야르들의 지지가 필요했기에 어쩔 수 없이 따랐다. 이후 지그몬드는 자신을 "신의 은총으로, 트란실바니아, 왈라키아, 몰다비아의 공, 신성로마 제국의 프린스, 세케이의 백작, 헝가리 왕국 일부의 군주"라고 칭했다. 1595년 8월 6일, 지그몬드는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2세의 딸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의 조카딸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결혼했다.

1595년 8월, 오스만 대재상 시난 파샤가 85,000 ~ 10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왈라키아로 쳐들어갔다. 미하이 2세는 오스만 제국군 선봉대를 상대로 칼루가레니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지만, 시난 파샤에게 여전히 대규모 병력이 있으며 자신이 가진 병력으로는 이들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잘 알았기에 적군이 수도 부쿠레슈티를 향해 행진하는 걸 허용하고 산악 지대로 후퇴해 지그몬드의 지원을 기다렸다. 시난 파샤는 부쿠레슈티에 도착하여 그곳에 메흐메트 파샤와 10,000명의 수비대를 배치하고 교회를 모스크로 바꾼 뒤, 트르고비슈테를 추가로 점령하고 1,500명의 병력과 대포 30문을 남겨뒀다. 오스만군 대부분은 스토에네슈티로 진군해 미하이 2세의 군대 앞에 진영을 세웠지만, 험준한 산악지대에 자리를 잡은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한편, 시난 파샤는 왈라키아 각지에 분견대를 파견해 여러 곳을 장악하고 오스만 관리들을 임명해 왈라키아를 제국의 직할령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오스만군의 가혹한 수탈과 약탈에 분노한 왈라키아인들이 대거 반란을 일으키면서, 점차 입지가 불안해졌다.

1595년 9월 6일, 지그몬드가 용병 13,200명, 세케이인 8,000명을 이끌고 미하이 2세와 합류했다. 여기에 10월 초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3세가 파견한 정예병 1,500명과 토스카나 대공국에서 온 실비오 피콜로미니 휘하 포병 300명이 도착했다. 미하이 2세는 총 23,000명에 달하는 연합군의 선봉에 서서 반격 작전을 개시해 10월 5~8일 트르고비슈테 공방전을 벌인 끝에 탈환했고, 뒤이어 부쿠레슈티로 진군해 1595년 10월 12일 치열한 공병전을 치른 끝에 탈환했다. 여기에 왈라키아인들이 대거 합세하면서 적의 군세가 갈수록 불어나자, 시난 파샤는 철수하기로 했다. 그러나 10,000마리 이상의 짐승과 포로 수천 명을 끌고 가느라 철군 속도가 매우 느렸고, 결국 10월 15일 도나우 강변의 지우르지우에서 철수 작전을 수행하던 중 연합군에게 따라잡혔다. 시난 파샤 본인은 강을 건넜지만, 10,000명 가량의 병사들과 포로, 짐승들은 강을 미처 건너지 못했다. 이어진 지우르지우 전투에서, 미처 건너지 못한 오스만군 대부분이 궤멸되었다. 생존한 병사들은 지우르지우 성채로 들어가서 며칠 동안 처절하게 항전했지만, 끝내 궤멸되었다. 특히 오랜 세월 정찰 및 적지 약탈 임무를 수행했던 아킨지(Akinji) 부대는 이 전투에서 궤멸되었고,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1596년 1월 초, 지그몬드는 루돌프 2세와 협상을 시작하기 위해 프라하로 떠났고, 아내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보치커이 이슈트반이 그를 대신해 나라를 다스렸다. 그해 2월, 세케이인들이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것을 근거로 자신들을 농노에서 해방시켜달라고 요구했지만, 보치커이 이슈트반은 단호히 거부했다. 그러자 세케이인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보치커이 이슈트반은 토벌대를 이끌고 이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이로 인해 트란실바니아 정부에 대한 세케이인들의 반감이 매우 거세졌다. 한편, 지그몬드는 루돌프 2세로부터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지속하는 데 필요한 지원군과 자금을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 3월 4일에 트란실바니아로 돌아왔다. 이후 테메스바르를 포위했지만 오스만군 2만 명이 요새를 구원하기 위해 다가오자 철수했다. 그 해 여름 오스만 파디샤 메흐메트 3세가 헝가리 왕국을 침공하자, 지그몬드는 황제군에 가담했다. 그러나 그들은 10월 24일부터 26일까지 벌어진 케레츠테스 전투에서 완패했다.

이제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로 이길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지그몬드는 루돌프 2세에게 사절을 잇따라 보내 퇴위하고 싶으니 허락해달라고 청했다. 1597년 12월 23일, 루돌프 2세는 그의 퇴위를 승인하기로 했다. 루돌프 2세는 그에게 오폴리와 라치보르시 공국과 연간 50,000 탈러의 보조금을 부여했다. 이 협정은 몇 달 후 공개되었고,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1598년 3월 23일에 그의 퇴위를 인정했다. 아내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루돌프 2세가 트란실바니아 총독으로 선임한 막시밀리안 3세가 도착할 때까지 트란실바니아를 임시로 다스렸다.

그렇게 트란실바니아 공에서 물러난 뒤 오폴리와 라치보르시 공국에 도착했지만, 지그몬드는 곧 이곳의 여건이 자기 기준에 미치지 않는다고 여겼고, 루돌프 2세가 보낸다고 했던 보조금이 오지 않는 것에도 불만을 품었다. 여기에 그가 퇴위한 뒤 직위에서 물러나야 했던 보치커이 이슈트반이 조속히 트란실바니아로 복귀하라고 촉구했다. 1598년 8월 21일, 그는 콜로즈바르로 향했고, 보치커이는 루돌프 2세가 선임했던 합스부르크 인사들을 추방한 뒤 사스세베스에 있는 자신의 숙영지에서 의회를 소집한 후 그를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옹립했다. 대다수 트란실바니아 귀족들은 이를 받아들였지만, 바라드의 부사령관인 키랄리 죄르지는 루돌프 2세에 대한 충성을 유지했다. 그 해 9월, 오스만군이 트란실바니아 공국을 침공해 마로스 강변의 여러 요새를 공략했다.

지그몬드는 오스만 제국군에 사절을 보내 트란실바니아 본토로 침입하지 말고 바라드를 공격해 달라고 설득하면서, 그렇게 해주면 신성 로마 제국과 단절하고 오스만 제국의 신실한 봉신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자, 그는 그는 루돌프 2세와 협상하기 위해 프라하에 사절을 파견했고, 고해 신부 알폰소 카릴로를 폴란드로 보내 폴란드-리투아니아 총리 얀 자모이스키와 협상하도록 했다. 1599년 3월 21일, 지그몬드는 메드제슈에서 열린 의회에서 퇴위를 선언했다. 8일 후인 3월 29일, 의회는 그의 사촌이며 친 오스만 제국 인사인 바토리 언드라시를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선포했고, 언드라시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도움을 받아 오스만 제국과 평화를 이룰 수 있기를 희망했다. 지그몬드는 6월에 트란실바니아를 떠나 폴란드로 갔다. 또한 마리아 크리스티나와의 결혼은 그해 8월에 지그몬드가 성관계를 하지 못해서 성적 결합이 성립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황청에 의해 무효 처리되었다.

1599년 10월 28일, 바토리 언드라시는 셀림바르 전투에서 왈라키아 보이보드 미하이 2세에게 완패했다. 언드라시는 몰다비아로 도망쳐서 재기를 도모하려 했지만, 도중에 산지에서 세케이인들에게 생포된 뒤 10월 31일에 참수된 후 수급이 미하이 2세에게 전달되었다. 이후 미하이 2세가 트란실바니아를 통치했지만, 그의 통치는 휘하 병사들의 약탈로 인해 트란실바니아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다. 1600년 2월 9일 초, 지그몬드는 트란실바니아로 돌아갈 준비가 되었다고 발표했다. 차키 이슈트반은 이에 호응해 미하이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고, 미하이 2세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소집했다. 그러던 중 조르조 바스타가 이끄는 황제군 18,000명이 헝가리 귀족들을 돕기 위해 트란실바니아로 진군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미하이 2세는 이에 맞서려 했지만 1600년 9월 18일 미라슬라우 전투에서 참패했다. 트란실바니아는 순식간에 황제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그 후 황제군은 트란실바니아 각지를 약탈했고, 오스만과 타타르 약탈자들도 국경을 넘어서 약탈을 자행했다.

1601년 3월 24일, 지그몬드는 폴란드군과 함께 몰다비아를 거쳐 트란실바니아로 돌아와서 황제군을 몰아냈다.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4월 3일 콜로즈바르에서 그를 복위시켰다. 이에 조르조 바스타는 으로 망명했던 미하이 2세와 함께 그 해 여름에 트란실바니아를 침공했다. 그들은 16501년 8월 3일 고로슬로 전투에서 지그몬드의 군대를 격파했다. 지그몬드는 몰다비아로 망명했다가 오스만 제국군의 지원을 받고 10월에 돌아와서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대다수 지역을 공략했다. 그러나 11월 말 콜로즈바르 공방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후 조르조 바스타가 이끄는 황제군의 반격으로 여러 전투에서 패배하자, 지지자들이 조만간 자기를 배신할 거라고 의심한 그는 1602년 3월에 조르조 바스타와 퇴위에 대한 새로운 협상을 시작했다. 1602년 7월 26일 퇴위가 확정된 뒤 조르조 바스타의 군대에 합세했고, 이후 프라하로 가서 루돌프 2세에게 자비를 구해 보헤미아에서 토지를 소유할 권리를 받아냈다. 그 후 조르조 바스타가 트란실바니아 총독으로 군림했다.

1605년 2월 트란실바니아 의회가 자기의 허락을 받지 않고 보치커이 이슈트반을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세우자, 루돌프 2세는 이를 응징할 준비를 하면서 지그몬드에게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복위하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그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606년 7월에 재차 황제로부터 트란실바니아 공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도록 설득했지만, 지그몬드는 또다시 거부했다. 그해 12월에 프라하에서 같은 제안을 받았지만 역시 거부했다. 그 후 보헤미아의 리보초비체에서 영지를 받고 조용히 살아가다가 1611년 황제를 암살하려 한 혐의로 프라하의 흐라진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14개월 후 석방되었다. 1613년 3월 27일 리보초비체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고, 사후 프라하의 성 비투스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1] ? ~ 1590, 폴란드 대원수이자 총리 얀 자모이스키의 세번째 부인 [2] 1555 ~ 1577, 1577년 5월 비스툴라 강에서 익사했다. [3] 1567 ~ 1576, 요절 [4] 안식일 준수를 비롯한 유대교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기독교 분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