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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DDFF><colcolor=#000> 트란실바니아 제11대 공 베틀렌 이슈트반 Bethlen Istvá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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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베틀렌 이슈트반 (Bethlen István) |
|
출생 | 1584년 | |
트란실바니아 공국 머로시예 | ||
사망 | 1648년 1월 10일 (향년 65~66세) | |
트란실바니아 공국 에세드 | ||
재위 |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공 | |
1630년 9월 28일 ~ 11월 26일 | ||
배우자 | 치사키 크리스티나 (결혼 시기 미상 / 1623년 이전 사망) | |
카로이 커털린 (1623년 결혼 / 1635년 사망) | ||
아버지 | 베틀렌 퍼르커시 | |
어머니 | 라자르 드루지너 | |
형제 | 베틀렌 가보르 | |
종교 | 칼뱅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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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제11대 공.2. 생애
1584년경 트란실바니아 공국 머로시예(Marosillye)[1]에서 태어났다. 그는 베케슈와 자란드 카운티에 영지를 대대로 소유한 헝가리 귀족 가문의 일원이다. 조부 베틀렌 가보르는 모하치 전투 때 창병 600명을 이끌고 러요시 2세 휘하에 들어가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웠고, 이후 벌어진 헝가리 내전에서 오스트리아 대공으로서 헝가리 국왕을 칭한 페르디난트 1세에 맞서 동헝가리 왕국 초대 국왕이 된 서포여이 야노시를 지지했다.아버지 베틀렌 페르커시는 초기에는 페르디난트 1세의 추종자가 되어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참여했다가, 후기엔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편에 들어가 트란실바니아에서 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1571년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가 사망한 후 바토리 이슈트반을 지지했고, 1575년 바토리 이슈트반이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원을 받아 자기에게 반기를 든 가스파르 베케시를 상대로 케렐뢰센트팔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걸 기여한 뒤 머로시예를 영지로 수여받았다. 어머니 라자르 드루지너는 대대로 기병대 지휘관을 맡은 세케이인 귀족 가문 출신이다. 이슈트반에게는 여러 형제가 있었으나 대부분 일찍 죽었고, 1580년에 태어난 형 베틀렌 가보르만이 성인으로 성장했다.
베틀렌 가보르와 이슈트반 형제는 1590년 또는 1592년에 아버지 베틀렌 퍼르커시가 사망할 때까지 머로시예 성에서 살았다. 퍼르커시는 두 아들을 클루지의 예수회 학교에 보내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게 하려 했지만, 그 전에 사망하면서 실패했다. 이후 트란실바니아의 공 바토리 지그몬드가 베틀렌 가문의 영지를 몰수했고, 어머니 라자르는 두 아들과 함께 고향인 게르기오샤르헤기(Gyergyószárhegy, 현재 루마니아 하르기타 카운티 라자레아)로 이사해 형제 라자르 언드라시에게 의탁했다. 두 아이는 어머니가 사망한 후에도 라자르 언드라시의 보살핌을 받았지만, 언드라시는 두 아이를 군인으로 삼기 위해 군사 지식에 중점을 뒀을 뿐 그 외의 교육은 시키지 않았다.
이후 형 베틀렌 가보르의 부관으로서 형의 여정에 함께 했고, 1613년 형이 트란실바니아 공이 된 뒤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1616년부터 후녀드 카운티의 최고 영주가 되었고, 1622년부터 마라마로시 카운티의 최고 영주를 맡았다. 또한 1618년부터 궁정 기병대장이 되었다. 또한 형이 30년 전쟁에 참여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원정을 떠났을 때, 그는 형을 대신해 국내에 남아서 내치를 이끌었다. 당시 베틀렌 가보르에게는 살아남은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후계자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1626년 베틀렌 가보르가 카타리나 폰 브란덴부르크와 재혼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이때 결혼 협약에 따르면, 베틀렌 가보르는 카타리나를 후계자로 지명해야 했다.
1626년 6월 12일, 줄러페헤르바르에서 개최된 의회는 카타리나를 베틀렌 가보르의 후계자로 선출했다. 이와 동시에 베틀렌 가보르는 남동생 베틀렌 이슈트반을 트란실바니아의 총독으로 삼았고, 카타리나가 세운 정책은 이슈트반과 공국 평의회의 승인을 얻어야만 추인된다고 규정했다. 또한 국가의 수입을 관리하는 재무관을 두고, 총독과 의회는 재무관에게 지침을 제공할 의무가 있었으며, 카타리나는 의회에 외국인을 임명할 수 없었다. 1629년 11월 15일, 베틀렌 가보르가 과로에 시달린 여파로 사망했다. 이후 트란실바니아 공이 된 카타리나는 베틀렌 이슈트반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싶어했고, 트란실바니아 정계는 곧 두 패로 나뉘었다. 금고 관리인 치사키 이슈트반, 토르다 수석 주교 코바초치 이슈트반, 트란실바니아 의원 할러 이슈트반, 코바르 수비대장 체르니 퍼르커시 등이 카타리나를 지지했고, 버러드와 트림셰크 수비대장 졸료미 다비드, 하이두크 지도자이자 트란실바니아 총독의 아들인 베틀렌 이슈트반, 궁정 대장 나기 팔과 막스카시 페렌츠, 재무관 미코 페렌츠, 볼디자르 수비대장 케메니 포가라시, 우드바르헬리셰크 수비 대장 발라시 페렌츠 등은 베틀렌 이슈트반을 지지했다.
치사키 이슈트반은 베틀렌 이슈트반 지지자들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코바르에서 군사 행동을 준비했지만, 베틀렌 이슈트반이 코바르에 집결하려던 장정들을 차단하면서 지연되었다. 1630년 1~2월, 의회는 베틀렌 이슈트반의 사주에 따라 여공의 권한을 더욱 제한했다. 여공은 총독과 의회의 승인이 있어야 직책이나 재산을 부여할 수 있었고, 물품에 대한 문제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으며, 여공의 재산은 총독과 궁정 평의회가 임명하고 감독하는 재무관에 의해 관리될 수 있었다. 1630년 6월 메지에시에서 소집된 의회는 추가 제한 사항이 도입되었다. 치사키 이슈트반은 의회의 승인이 있어야만 트란실바니아에 방문할 수 있으며, 그가 여공에게 보낸 편지는 베틀렌 이슈트반이 먼저 읽어야 했다.
이후 양자간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고, 양측은 상대방이 자기를 암살하려 들까 봐 두려워했다. 1630년 8월, 치사키 이슈트반이 카타리나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고 트란실바니아를 침공할 준비를 하자, 베틀렌 이슈트반은 라코치 죄르지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세워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라코치 죄르지가 하이두크를 동원해 진군하기 직전인 1630년 9월 21일, 카타리나는 심각한 사치를 연이어 규탄당하고 사임 압박을 받은 끝에 시기쇼아라에서 열린 의회 앞에서 퇴위를 선언하고 물러났다. 다만 의회는 카타리나가 차기 공을 정할 권리를 인정했다.
이후 베틀렌 이슈트반이 1630년 9월 28일 의회의 추대로 트란실바니아 공이 되었지만, 라코치 죄르지가 이에 반발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누가 트란실바니아 공이 되든 상관이 없었기에, 두 사람 모두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이에 카타리나가 둘 중 한 사람을 트란실바니아의 공으로 정해야 했는데, 베틀렌 이슈트반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었던 그녀는 12월 1일 라코치 죄르지의 임명장만 읽음으로써 그를 선택하겠다는 의사를 간접적으로 밝혔다. 여기에 하이두크와 세케이인이 모두 라코치 죄르지를 지지하자, 베틀렌 이슈트반은 일단 물러섰다. 하지만 그는 언젠가는 형의 뒤를 이어 트란실바니아 공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1636년, 라코치 죄르지가 오스만 제국이 요구한 공물 납부를 거부하면서 관계가 악화하자, 그는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고 부다의 후세인 파샤에게 사절을 보내 자기를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옹립해달라고 요청했다. 부다의 파샤는 이에 따르기로 했지만, 1636년 10월 라코치 죄르지에게 스잘론타(현재 루마니아 나기스잘론타)에서 격파당했다. 그 후 그는 오랜 협상 끝에 라코치 죄르지와 화해하고 꿈을 접었다. 1648년 1월 10일 에세드에서 사망했다.
3. 가족
- 치사키 크리스티나(? ~ 1623년 이전): 트란실바니아 귀족 치사키 가보르의 딸.
- 베틀렌 가보르: 유년기에 사망.
- 베틀렌 이슈트반(1606 ~ 1633): 비하르 지방의 청지기, 버러드 최고 사령관, 하이두크 지도자.
- 베틀렌 페테르(? ~ 1646): 마라마로시와 후냐드의 영주.
- 베틀렌 커털린(? ~ ?): 버러드와 트림셰크 수비대장 졸료미 다비드의 부인.
- 베틀렌 언너(? ~ ?): 트란실바니아 귀족 줄러피 사무엘의 부인. 딸 줄러피 마리어는 트란실바니아 공 퇴쾨이 임레의 어머니다.
- 베틀렌 드루지나(1614 ~ 1667년에서 1671년 사이): 트란실바니아 공 르헤데이 페렌츠의 부인.
- 카로이 커털린(1588 ~ 1635): 사투마레의 지주 카로이 라슬로의 딸. 베틀렌 가보르의 첫 아내 카로이 주전너의 자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