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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르데이 공국의 헝가리인 공작.2. 생애
그의 가문은 대대로 헝가리 왕국 동부 에르데이에 영지를 가지고 있던 귀족 가문이었으며, 어린 시절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장 막시밀리안 2세의 빈 궁정에서 보냈다.에르데이 공국으로 돌아가 조카인 에르데이 공작 바토리 지그몬드(Báthory Zsigmond 1573~1613)[1]를 보필했으나 지그몬드가 친 오스만 제국 귀족들의 압력으로 퇴위하자 합스부르크 가문을 끌어들여 친 오스만 귀족들을 몰아냈다. 그러나 루돌프 2세가 에르데이 공국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며 바토리 지그몬드를 압박하자 허이두크(hajdúk)[2]를 이끌고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냈다. 1605년 12월 21일, 에르데이 공작으로 선출되어 오스만 제국의 승인을 받아냈으나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 사이에서 평화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 1606년 6월 23일 빈 조약으로 평화를 맺었고 합스부르크 제국으로부터 에르데이 공국의 주권과 레세크(Részek)[3] 지역의 영유권까지 인정받았다.
양도받은 합스부르크령 헝가리 도시들에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한편 지트바토로크 조약이 체결되는데 공헌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커셔에서 사망했다. 유해는 줄러페헤르바르 대성당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