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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DDFF><colcolor=#000> 트란실바니아 제6대 공 보치커이 이슈트반 Bocskai Istvá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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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보치커이 이슈트반 (Bocskai István) |
|
출생 | 1557년 1월 1일 | |
동헝가리 왕국 콜로즈바르 | ||
사망 | 1606년 12월 29일 (향년 49세) | |
트란실바니아 공국 커셔 | ||
재위 |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공 | |
1605년 2월 21일 ~ 1606년 12월 29일 | ||
헝가리의 공 | ||
1605년 4월 20일 ~ 1606년 12월 29일 | ||
아버지 | 보치커이 죄르지 | |
어머니 | 술료크 크리스티나 | |
배우자 | 하기마시 커털린 | |
종교 | 칼뱅파 |
[clearfix]
1. 개요
트란실바니아 공국 제6대 공.2. 생애
1557년 1월 1일 동헝가리 왕국 콜로즈바르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보치커이 죄르지는 키스마르 출신의 지주이자 페르디난트 1세의 추종자였고, 어머니 술료크 크리스티나는 렉스케 출신의 지주 가문 출신이었다. 죄르지는 이 슐로크 크리스티나와의 결혼을 통해 비하르 지역에서 토지를 크게 늘렸다. 하지만 보치커이 이슈트반이 태어났을 당시, 보치커이 죄르지는 이자벨라 야기엘론카와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가 복위한 뒤 합스부르크 가문의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페르디난트 1세 지지자들에 대한 숙청 작업이 진행되면서 투옥되었다. 죄르지는 아들이 태어난 지 몇 달 후에 풀려났고, 가족들을 데리고 키스마르에 조용히 지냈다. 1560년대에 온 가족과 함께 가톨릭에서 칼뱅파로 개종했고, 1570년 또는 1571년에 사망했다.1571년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뒤를 이어 트란실바니아 공이 된 바토리 이슈트반은 보치커이 죄르지의 자녀들의 권익을 보호하겠다고 선포했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를 설득해 젬플렌 주에 있는 보치커이 죄르지의 이전 영지를 그들에게 돌려주도록 했다. 이후 보치커이 이슈트반은 빈으로 가서 막시밀리안 2세의 궁정에서 시종으로 일했고, 1576년 집사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1576년 10월 12일 개신교에 관대한 태도를 보이던 막시밀리안 2세가 사망한 후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루돌프 2세가 직위를 계승하자 얼마 안가 트란실바니아 공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바러드에서 기병 32명과 보병 20명으로 구성된 부대 사령관을 역임했다.
1581년 5월 15일, 트란실바니아 보이보드 바토리 크리스토프는 중병을 앓아 죽기 직전이 되자 의회를 소집한 뒤 아들 바토리 지그몬드를 차기 보이보드로 선출하게 했다. 이때 보치커이 이슈트반도 이 의회에 참여했고, 바토리 지그몬드의 섭정 의회 일원으로 발탁되었다. 섭정 의회의 가장 어린 구성원이었던 그는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나중에 바토리 이슈트반이 개입해 그히치 야노시를 단독 섭정으로 삼도록 했다. 이후 보치커이 이슈트반은 궁정 직위에서 물러났다.
1583년 말 부유한 미망인인 하기마시 커털린과 결혼해 나기케레키 요새와 인근 마을을 물려받았다. 1586년 12월 바토리 이슈트반이 사망한 뒤, 그는 바토리 가문 인사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선출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폴란드로 방문했다. 그러나 그는 대다수 폴란드 귀족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트란실바니아 문제에 더 이상 개입할 의사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고, 결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에 바토리 가문 인사를 앉히는 걸 포기했다. 1588년 12월 바토리 지그몬드가 친정을 맡았을 때 왕실 의회 회원 자격을 유지했다. 당시엔 그가 지그몬드의 가장 충실한 고문이라는 설과 바토리 가문에 대한 음모를 꾸몄다는 설이 병립했지만 실체는 불분명했다.
1592년 5월, 예수회 고해 사제 알폰소 카릴로에게 강한 영향을 받은 바토리 지그몬드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로 마음먹었다. 친족들이 이에 강하게 반대하자, 지그몬드는 친족들을 권력에서 배제하고 자기 뜻에 따르는 자들을 빈 자리에 앉혔다. 이때 보치커이 이슈트반도 바러드 대장이자 비하르의 이슈판(Ispán, 군대 수장)으로 선임되었다. 바러드 대장은 트란실바니아 공국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 사령관이었다. 지그몬드는 칼뱅파였던 보치커이에게 바러드 대장으로서 가톨릭 신자들을 보호하라고 명령했다. 또한 보치커이는 트란실바니아와 합스부르크 헝가리 사이의 가장 중요한 경로를 보호하는 요새 재건을 지속했다.
1593년 8월, 오스만 제국 파디샤 무라트 3세가 대재상 코차 시난 파샤에게 합스부르크 헝가리를 침공하라고 명령했다. 젊은 트란실바니아 귀족들은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우기 위해 합스부르크 헝가리로 서둘러 갔지만, 대부분의 트란실바니아 귀족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중립을 유지하는 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피하고 싶어했다. 지그몬드는 오스만 제국에 계속 맞서 싸우려는 바토리 지그몬드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1594년 6월 크림 칸국이 파견한 타타르족이 파르티움[1]을 약탈하자, 보치커이는 바러드에서 타타르족의 추가 공세를 막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 사이 바토리 지그몬드는 의회를 소집했지만, 트란실바니아 의회 대표자들은 오스만 제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거부했다.
1594년 7월, 바토리 지그몬드의 사촌인 바토리 발타자르가 바토리 지그몬드를 폐위하고 자기가 트란실바니아 공이 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는 지그몬드를 압박해 퇴위하도록 했고, 지그몬드는 코바르로 가서 이탈리아로 이주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보치커이 이슈트반은 다른 군 사령관들과 함께 코바르로 달려갔고, 지그몬드가 마음을 바꾸도록 설득했다. 보치커이는 군대를 이끌고 의회를 압박해 바토리 지그몬드를 공으로 도로 받들도록 했다. 그 해 8월 28일, 발타자르를 비롯해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반대했던 귀족 12명이 보치커이 이슈트반에 의해 음모 혐의로 체포된 뒤 감옥에서 교살되었다.
그 후 보치커이는 숄노크와 쾨뢰슈비데크(Körösvidék)[2]의 이슈판이 되었다. 그 후 몇년 간 처형된 귀족들에게서 몰수된 많은 영지가 그에게 부여되면서, 그는 트란실바니아에서 가장 부유한 영지 소유자 중 한 명이 되었다. 1594년 11월 전권대사로서 프라하에 파견되어 오스만 제국에 반대하는 신성 동맹 대표자들과 협상을 벌였고, 1595년 1월 28일 트란실바니아가 신성 동맹에 가입하는 것에 관한 조약에 서명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 루돌프 2세는 트란실바니아의 독립을 인정하고 자기 조카딸 마리아 크리스티나를 바토리 지그몬드에게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했다.
보치커이는 그라츠로 가서 3월 6일 지그몬드의 대리인 자격으로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예비 결혼식을 올렸다. 그가 트란실바니아로 돌아온 뒤,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4월 16일에 조약을 확인했다. 보치커이는 7월에 커셔에서 줄러페헤르바르까지 마리아 크리스티나를 안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595년 8월 왈라키아 공 미하이 2세가 오스만 대재상 시난 파샤의 대규모 오스만 제국군을 피해 산악 지대로 후퇴해 지그몬드의 지원을 기다렸다. 지그몬드는 그를 돕기로 하고 9월 6일 용병 13,200명, 세케이인 8,000명을 이끌고 미하이 2세와 합류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지휘권은 보치커이가 맡았다. 여기에 10월 초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3세가 파견한 정예병 1,500명과 토스카나 대공국에서 온 실비오 피콜로미니 휘하 포병 300명이 도착했다.
23,000명에 달하는 연합군은 반격을 개시해 10월 5~8일 트르고비슈테 공방전을 벌인 끝에 탈환했고, 뒤이어 부쿠레슈티로 진군해 1595년 10월 12일 치열한 공병전을 치른 끝에 탈환했다. 여기에 왈라키아인이 대거 합세하면서 적의 군세가 갈수록 불어나자, 시난 파샤는 철수하기로 했다. 그러나 10,000마리 이상의 짐승과 포로 수천 명을 끌고 가느라 철군 속도가 매우 느렸고, 결국 10월 15일 도나우강변의 지우르지우에서 철수 작전을 수행하던 중 연합군에게 따라잡혔다. 시난 파샤 본인은 강을 건넜지만, 10,000명 가량의 병사들과 포로, 짐승들은 강을 미처 건너지 못했다. 이어진 지우르지우 전투에서, 미처 건너지 못한 오스만군 대부분이 궤멸되었다. 생존한 병사들은 지우르지우 성채로 들어가서 며칠 동안 처절하게 항전했지만, 끝내 궤멸되었다. 특히 오랜 세월 정찰 및 적지 약탈 임무를 수행했던 아킨지(Akinji) 부대는 이 전투에서 궤멸되었고,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1596년 1월 초, 지그몬드는 루돌프 2세와 협상을 시작하기 위해 프라하로 떠났고, 아내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보치커이 이슈트반이 그를 대신해 나라를 다스렸다. 그해 2월, 세케이인이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것을 근거로 자신들을 농노에서 해방시켜달라고 요구했지만, 보치커이 이슈트반은 단호히 거부했다. 그러자 세케이인은 반란을 일으켰고, 보치커이 이슈트반은 토벌대를 이끌고 이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이로 인해 트란실바니아 정부에 대한 세케이인들의 반감이 매우 거세졌다. 1596년 3월에 돌아온 바토리 지그몬드가 파르티움을 침공한 크림 칸국의 타타르인과 오스만 제국군에 맞서 군대를 이끌자, 그는 지그몬드를 대신해 공국을 다스렸다.
1596년 10월 24일 ~ 26일, 바토리 지그몬드는 오스트리아군에 가담해서 케레츠테스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에 맞섰으나 완패했다. 이제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로 이길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지그몬드는 루돌프 2세에게 사절을 잇따라 보내 퇴위하고 싶으니 허락해달라고 청했다. 1597년 12월 23일, 루돌프 2세는 그의 퇴위를 승인하기로 했다. 루돌프 2세는 그에게 오폴리와 라치보르시 공국과 연간 50,000 탈러의 보조금을 부여했다. 이 협정은 몇 달 후 공개되었고,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1598년 3월 23일에 그의 퇴위를 인정했다. 루돌프 2세는 슈하이 이슈트반, 바르톨로메우스 페첸, 미클로시 이슈트반을 위원으로 선임해 트란실바니아 총독으로 선임할 예정인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3세가 도착할 때까지 트란실바니아를 통치하도록 했다. 위원들은 보치커이를 껄끄럽게 여겼고, 곧 그의 직위를 박탈했다.
이후 오폴리와 라치보르시 공국의 공작이 된 바토리 지그몬드와 합류한 보치커이는 지그몬드가 후회하고 있는 걸 눈치채고 조속히 트란실바니아로 복귀하라고 촉구했다. 지그몬드는 1598년 8월 21일 콜로츠바르로 향했고, 보치커이는 사스셰베시(Szászsebes 현재의 루마니아 세베슈)에서 군대를 소집한 뒤 의회를 소집한 후 지그몬드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다. 위원들은 모조리 추방되었고, 지그몬드는 복위했다. 그 후 보치커이는 트란실바니아군 총사령관이 되었지만, 바러드의 부사령관인 키라이 죄르지는 루돌프 2세에 대한 충성을 유지했고, 오스만 제국군은 그 해 9월 트란실바니아 공국을 침공해 마로스 강변의 여러 요새를 공략했다.
1599년 3월, 바토리 지그몬드가 퇴위하고 삼촌 바토리 언드라시가 트란실바니아 공이 되었다. 당시 그는 지그몬드의 사절로서 프라하에 가서 루돌프 2세와 협상하고 있었다. 나중에 소식을 접한 그는 언드라시에게 충성을 맹세하길 거부하고, 센트조브에 있는 그의 요새에서 농성했다. 언드라시는 바토리 발타자르를 살해한 혐의로 고발하면서, 그에게 소환장을 보냈다. 그가 무시하자, 언드라시는 그의 영지를 몰수한다고 선포했다. 이로 인해 트란실바니아 내에 있던 그의 영지는 몰수되었다. 이에 분노한 그는 세케이인을 규합해 트란실바니아 본토로 진군하려 했지만,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 미하이 2세가 먼저 진군했다. 그가 파견한 세케이인 부대는 미하이 2세와 합류한 뒤 셀림바르 전투에서 바토리 언드라시를 격파했다. 바토리 언드라시는 몰다비아 공국으로 망명하려 했지만 도중에 세케이인에게 붙잡혀 피살되었다.
미하이 2세는 트란실바니아의 공으로 추대된 뒤 보치커이에게 충성 서약을 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미하이 2세의 부하가 되고 싶지 않았고, 미하이 2세가 트란실바니아 영지를 돌려주려는 기미가 없자 이에 대항하기로 했다. 그는 프라하에 있던 루돌프 2세에게 서신을 보내 미하이를 무식한 사기꾼이자 자신의 제국을 세우고자 하는 폭군이라고 규탄했다. 1600년 9월 18일 미하이 2세가 조르조 바스타가 이끄는 황제군에게 완패하고 트란실바니아에서 축출되자, 그는 바토리 지그몬드를 복위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조르조 바스타는 트란실바니아 의회를 압박한 끝에 11월 25일 보치커이의 영지를 몰수하고 공국에서 추방한다는 법령을 반포하도록 했다.
1601년 1월, 보치커이는 프라하로 가서 루돌프 2세에게 그에게 대항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고 해명하려 했다. 당시 미하이 2세도 프라하로 가서 루돌프 2세에게 왈라키아 공국 보이보드에 복위하게 해달라고 청원하고 있었다. 루돌프 2세는 폴란드군의 도움을 받아 트란실바니아 공에 복위한 바토리 지그몬드를 몰아내는 데 도움을 주는 대가로 미하이 2세를 복위하게 해주기로 했지만, 보치커이는 프라하에서 억류되었다. 조르조 바스타와 미하이 2세는 1601년 8월 3일 구루스라우 전투에서 바토리 지그몬드를 격파했지만, 미하이 2세는 8월 9일 또는 8월 19일에 루돌프 2세의 밀명을 받은 조르조 바스타가 파견한 용병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후 바스타의 용병들은 트란실바니아 도시와 마을을 철저히 약탈했다.
보치커이는 1601년 말에 파르티움으로 돌아갔지만, 1602년 4월에 프라하로 재소환되어 황제의 고문이 되었고, 그해 말에야 프라하를 떠날 수 있었다. 그는 센트조브에 정착한 뒤 몰수된 트란실바니아 영지를 회복하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조르조 바스타에 의해 저지되었다. 1604년 봄, 커셔의 수비대장으로 발탁된 자코모 바르비아노 디 벨기오조소가 보치커이에게 20,000 플로린을 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 보치커이의 영지는 면세 혜택을 누리는 걸 무시하고 십일조를 징수하라고 명령했다. 또한 보치커이의 조카인 반피 데네시를 투옥하여 보치커이가 몸값을 지불한 후에야 석방했다.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한 트란실바니아 귀족 지도자인 베틀렌 가보르는 보치커이에게 루돌프 2세에 맞서 봉기하라고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보치커이는 승산이 없다고 보고 거부했다. 이 사실을 나중에 전해들은 루돌프 2세는 1604년 7월 2일에 트란실바니아에 있던 그의 영지를 돌려주도록 했다. 보치커이는 즉시 트란실바니아로 향했지만, 지난 몇년 동안 도시와 마을이 철저히 약탈당하고 파괴된 것을 보고, 이대로면 트란실바니아인들은 귀족과 백성 모두 파멸하고 말 거라고 여겼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토대로 루돌프 2세에 대적하기로 마음먹고, 자기를 따르는 성주들을 설득해 그들을 상대로 반기를 일으키도록 했다.
바러드의 부사령관 치프리아노 콘치니는 사전에 그가 봉기할 거라는 정보를 입수한 뒤, 병사 600명을 이끌고 센트조브로 진군해 1604년 10월 2일에 센트조브 요새를 점령했다. 그러나 보치커이를 따르는 다른 성인 나기케레키 요새는 하이두크(hajdúk: 평시에 산적, 도적으로 활동하다가 전시에 용병으로 고용되는 비정규 보병) 300명을 고용해 콘치니를 막아냈다. 벨기오조소는 보치커이를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지만, 보치커이의 요원들은 벨기오조소의 군대에 속했던 하이두크가 탈영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고, 보치커이는 이를 바탕으로 10월 15일 알모스드 인근에서 벨기오조소를 물리쳤다. 벨기오조소는 커셔로 철수했지만, 주로 개신교 신자였던 주민들은 입성을 거부했고, 10월 30일 보치커이를 따르는 하이두크가 도시에 입성하도록 했다.
보치커이는 커셔의 귀족들에게 루돌프 2세와 그의 관리들이 폭정을 저지른 사례를 열거하며 봉기할 것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했고, 귀족들은 이에 호응해 그를 지도자로 받들었다. 보치커이는 칼뱅파 영주 드러게트 발린트와 마고치 페렌츠를 군대 사령관으로, 가톨릭 귀족인 카타이 미하이를 재상으로 선임했다. 이 소식을 접한 루돌프 2세는 조르조 바스타에게 10,000명에 달하는 용병대를 맡겨 반란군을 토벌하도록 했다. 조르조 바스타는 11월 17일 오스갸나(현재 슬로바키아 오즈아니) 인근에서 보치커이를 추종하는 하이두크 부대를 격파했고, 뒤이어 11월 27일 에델레니 인근에서 보치커이가 직접 이끄는 부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커셔를 포위 공격하다가 보치커이가 파견한 유격대가 보급로를 끊어버리는 바람에 보급난에 허덕이다가 12월 초 에페리에시로 철수했다. 한편, 오스만 제국은 11월20일 베틀렌 가보르와 랄라 메흐메트 파샤를 커셔에 사절로 파견해 보치커이를 트란실바니아의 공으로 인정한다는 칙령을 수여했다.
보치커이는 조르조 바스타를 물리친 뒤 트란실바니아 각지에 서신을 보내 자기를 지지해달라고 호소했다. 이에 세케이 출신 유니테리언 귀족 페트키 야노시가 가장 먼저 합류했다. 그는 보치커이에게 1596년에 세케이인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던 일에 대해 사죄하라고 권고했다. 보치커이는 이에 따르기로 했고, 세케이인에게 자기가 트란실바니아 공이 되면 농노에서 해방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몰다비아 공국의 보이보드 이에레미아 모빌라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하이두크 대장 발라즈 리파이가 그를 배신하고 조르조 바스타와 내통한 정황이 드러났고, 보치커이는 1605년 1월 6일 리파이를 긴급 체포해 처형했다.
1605년 2월 21일, 트란실바니아 귀족과 세케이인 대표자들은 냐라드세레더(현재 루마니아 미에르쿠레아 니라줄루이)에서 보치커이를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추대했다. 반면 트란실바니아 작센인과 콜로즈바르 시민들은 루돌프 2세를 여전히 따랐다. 보치커이는 그해 3월 유럽 왕실에 <Querelae Hungariae(헝가리의 불행)>라는 제목의 선언문을 발송해, 폭군 루돌프 2세가 저지른 악행을 열거하며, 자기들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했다. 루돌프 2세는 사태가 갈수록 커지자 그에게 화해를 제안했지만 일언지하에 거부당했다. 그 후 조르조 바스타가 루돌프 2세로부터 별다른 재정 지원을 받지 못해 용병들을 유지할 돈을 마련하지 못하게 되면서 프레스부르크로 퇴각하자, 상 헝가리와 파르티움의 22개 주 대표단이 세렌치에 모여 논의한 끝에 4월 20일에 보치커이를 헝가리의 공으로 옹립하기로 결의했다. 다만 트란스다누비아(헝가리 판노니아) 일대는 여전히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보치커이의 군대는 여세를 이어가 너지솜바트, 쉬메그, 솜버트헤이, 베스프렘을 공략한 뒤, 복종을 거부한 트란스다누비아로 진군해 여러 도시를 함락했다. 1605년 5월에는 니더외스터라이히, 보헤미아 왕관령의 모라바, 슬레스코를 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보치커이의 사절인 바이스 미하이는 브러쇼로 가서 트란실바니아 작센인을 설득해 보치커이의 통치를 인정하게 했다. 그해 5월 19일,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콜로즈바르 시민들도 보치커이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 해 9월 9일 세게슈바르가 함락되면서, 트란실바니아 작센인의 저항은 끝났다. 그 해 9월 14일, 트란실바니아 귀족 대표단은 메드제시(현재 루마니아 메디아슈)에서 보치커이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보치커이는 그동안 자기를 도와준 하이두크에게 보답하기로 하고, 12월 12일 9,254명의 하이두크에게 귀족 작위를 부여하고 서볼치 백국 내 자기 영지에 정착시켰다.
오스만 제국은 그의 봉기를 기회로 삼아 합스부르크 제국을 몰아붙이기로 마음먹었다. 1605년 10월 3일, 릴라 메흐메트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이 에스테르곰을 점령했다. 이후 보치커이는 11월 11일에 페슈트에서 릴라 메흐메트 파샤와 만난 뒤 왕관을 수여받았다. 상 헝가리에 속했던 귀족들은 오스만 제국군이 에스테르곰을 점령하자, 이러다가 오스만 제국이 자기들 영지까지 모조리 석권해버릴 것을 우려했다. 그들은 보치커이에게 루돌프 2세를 폐위하기로 결정한 루돌프 2세의 동생 마티아스와 협상하라고 설득했다. 보치커이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일레샤지를 빈으로 보내 마티아스와 협상하도록 했다. 협상은 1606년 6월 23일에 체결된 빈 조약으로 끝났다. 이에 따르면, 헝가리 내 개신교 귀족과 시민들은 자기들이 믿는 종교를 준수할 권리를 인정받았다. 보치커이는 트란실바니아의 세습 군주로 인정되었고, 서볼치, 서트마르, 우고처, 베레그 주와 토커이 성에서의 주권도 인정되었다. 8월 17일, 보치커이는 커셔에서 조약을 확인했다.
상황이 이쯤 되자, 루돌프 2세도 백기를 들었다. 1605년 11월 24일, 루돌프 2세는 보치커이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더라도 트란실바니아 공국이 독립을 유지하는 걸 인정하겠다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후 보치커이는 합스부르크 제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의 평화 협상을 중재했고, 양국은 11월 11일 지트바토로크 조약을 체결하면서 13년간 이어졌던 기나긴 전쟁을 종식했다. 그러나 보치커이는 자기가 일궈낸 성공을 오래 누리지 못했다. 1606년 봄부터 부종을 앓기 시작한 그는 12월 17일 후계자들에게 트란실바니아의 독립을 보존하라고 촉구하는 내용의 유언장을 작성했다. 1606년 12월 29일, 그는 향년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람들은 그의 이른 죽음에 깊은 의혹을 품었다. 자기들을 귀족으로 올려준 보치커이를 존경하던 하이두크는 수상 카타이 미하이가 독살했을 거라고 믿고, 1607년 1월 12일 커셔 광장에서 카타이를 공격해 사지를 절단해 죽였다.
보치커이는 생전에 잘라 카운티에 영지를 소유한 하급 귀족인 하기마시 레스타르의 딸 하기마시 커털린과 결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는 아내를 깊이 사랑했고, 아내가 전남편 와르코치 타마시와의 사이에서 낳은 죄르지를 잘 돌봐줬다. 1804년 9월 커털린이 사망한 뒤, 그는 전임 트란실바니아 공 바토리 지그몬드와의 결혼이 무효로 처리된 뒤 미망인으로 살아가던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에게 재혼을 요청했지만 루돌프 2세가 이를 막아서면서 무산되었다. 그렇게 해서 생전에 친자식을 얻지 못한 그는 유언장에서 상 헝가리 방면군 총사령관 드러게트 발린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2월 11일 콜로즈바르에서 고령이었던 라코치 지그몬드를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선임했다. 보치커이의 유해는 줄러페헤르바르 대성당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