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09:22:00

조르조 바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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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DDFF><colcolor=#000> 트란실바니아 총독
조르조 바스타
Giorgio Basta
파일:조르조 바스타.jpg
이름 조르조 바스타
(Giorgio Basta)
출생 1544년 1월 30일
나폴리 왕국 테라 도트란토 로카(현재 이탈리아 로카포르자타)[1]
사망 1607년 11월 20일 (향년 63세)
오스트리아 대공국
재위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총독
1602년 ~ 1603년
1603년 ~ 1604년
아버지 데메트리오 바스타
형제 니콜로 바스타
배우자 안네 드 리베데케르케 드 가브르
자녀 카를로, 조르조, 데메트리오, 페르난도, 마들렌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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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란실바니아 공국 총독.

2. 생애

1544년 1월 30일 나폴리 왕국 테라 도트란토 로카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데메트리오는 알바니아계 에피로스 귀족으로, 오스만 제국이 알바니아 전역을 정복할 때 이탈리아로 망명한 뒤 스페인군에 복무했다. 데메트리오는 1500년대 중반에 피에몬테에서 치러진 전투에 참여했고, 이후 알바 공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톨레도의 기병 연대 사령관으로 발탁되어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서 활약했다. 조르조는 아주 어린 나이에 군인이 되었고, 아버지가 지휘하는 분견대에서 장교로 진급했다. 아버지가 사망한 뒤, 가장 나이 많은 형인 니콜로가 운영하는 기병대에서 복무했다. 1589년 플란데런 출신의 앤 드 리데케르케 드 가브르와 결혼하여 카를로, 조르조, 데메트리오, 페르난도, 마들렌을 낳았다.

조르조는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서 용맹을 떨치다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 사생아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의 눈에 들어 니벨 총독에 선임되었고, 1577년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의 군대에 합류해 3명의 앙리 전쟁 시기 프랑스 전선에서 활약했다. 1584년 메헬렌과 앤트워프 사이의 길목을 차단했으며, 1585년 3월 브뤼셀 공방전에 참여해 브뤼셀 함락에 기여했다. 이후 1585년 연말에 원정군 기병대 지휘관으로 발탁되었고, 1589년 가톨릭 연맹이 파리를 탈환하기 위해 전군할 때 나바라 왕국 국왕 헨리케가 후방을 갑작스럽게 습격하자 즉시 후방으로 이동해 가까스로 격퇴했다.

1591년 루앙 공방전에 참여했지만, 도중에 웨일즈 용병대장이자 헨리케 왕의 사령관인 로저 윌리엄스와 결투를 벌이다가 목이 베어져서 거의 죽을 뻔 했다. 1592년 2월 나바라 왕 헨리케를 유인해 그의 본대로부터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헨리케가 달아나는 걸 잡지 못했다. 이후 루앙과 네덜란드 간의 통신을 보장하고, 알레산드로 파르네세가 부상당한 후 퇴각할 때 스페인군의 후퇴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1596년 파르마 공작이 사망한 뒤 네덜란드 전선을 떠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 휘하에 들어갔다. 1598년 2월 16일 경기병대 대장이자 황금 박차 기사단의 기사로 선임되었다.

1598년 4월, 조르조 바스타는 트란실바니아 공 바토리 지그몬드의 퇴위로 인해 혼란에 빠진 트란실바니아 공국을 안정시키는 임무를 부여받고 트란실바니아로 이동했다. 그는 미리즐로에서 하바살폴트 카자크 세케이인 연합군을 격파하고 트란실바니아를 어느 정도 안정시켰다. 그러나 그해 8월 보치커이 이슈트반이 반기를 들어 루돌프 2세가 선임했던 합스부르크 인사들을 추방하고 바토리 지그몬드를 복위했고, 그는 오스트리아로 물러났다.

1599년,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 미하이 2세 바토리 언드라시를 물리치고 트란실바니아를 석권했다. 그는 뒤이어 1660년에 이에레미아 모빌라를 물리치고 몰다비아 공국 마저 석권하면서 루마니아 전역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에 루돌프 2세는 충실한 봉신이라 여겼던 미하이 2세가 너무 강해져서 트란실바니아를 영향권에 두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놓였다고 여기고, 조르조 바스타에게 그를 물리치라는 지시를 내렸다. 조르조 바스타는 황제군 18,000명을 이끌고 트란실바니아로 진군했다.

1600년 9월 18일에 벌어진 미라슬라우 전투에서, 미하이 2세는 무레슈 강, 언덕, 로파데아 강 및 도랑으로 둘러싸인 요새화된 지형에 10,000 ~ 12,000명을 배치하고 오스트리아군과 맞서 싸웠다. 조르조 바스타는 미하이 2세의 군대가 강력한 방어 진형을 구축한 걸 보고, 그들을 유인하기로 했다. 그 후 오스트리아군이 적진을 공격했다가 강력한 저항에 못 이겨 후퇴하자, 미하이 2세는 오스트리아군을 추격해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기로 마음먹고 기병대를 이끌고 추격했다. 그러나 미리 대기하고 있던 총사대가 왈라키아 기병대를 향해 일제 사격을 가했고, 뒤이어 독일 흉갑 기병대가 출격해 믹대한 피해를 입혔다. 결국 미하이 2세는 4,000명을 잃고 패주했고, 트란실바니아는 순식간에 오스트리아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이후 조르조 바스타가 이끄는 황제군은 트란실바니아 각지를 철저하게 약탈했고, 당초 미하이 2세를 축출한 것에 환영했던 헝가리계 트란실바니아 귀족들은 크게 실망했다. 1601년 3월, 폴란드군이 바토리 지그몬드를 앞세워 트란실바니아로 진군해 트란실바니아 귀족들의 호응에 힘입어 황제군을 몰아냈고,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4월 3일 콜로즈바르에서 바토리 지그몬드의 복위를 선포했다. 이에 조르조 바스타는 빈으로 망명했던 미하이 2세와 함께 그 해 여름 트란실바니아를 침공했다. 그들은 1601년 8월 3일 고로슬로 전투에서 지그몬드의 군대를 격파했다. 당초 루돌프 2세는 미하이 2세의 협조를 받아내는 조건으로 그를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복위시키겠다고 약속했지만, 1년 전에 루마니아 전역을 석권했던 그를 위험인물로 간주하고, 조르조 바스타에게 그를 제거하라는 밀명을 내렸다.

1601년 8월 9일 또는 8월 19일, 미하이 2세는 투르다에서 남쪽으로 3km 떨어진 평원에서, 조르조 바스타의 왈롱인 용병대장 자크 드 보우리가 이끄는 용병들의 습격을 받았다. 미하이 2세는 자기 천막을 습격한 그들에 맞서 검을 뽑아 용병 한 명에게 상처를 입혔지만, 다른 용병이 내지른 창에 배를 찔러 땅바닥에 쓰러진 뒤 머리가 베어졌다. 그의 유해는 크리스티슐루이 평야에 던져졌고, 수급은 나중에 미하이 2세의 부하인 투르투레아 파하르니쿨이 수습해 왈라키아로 가져와 달루 수도원에 있는 그의 아버지로 간주된 파트라스쿠 첼 분의 유해 옆에 안장되었다.

1601년 10월, 몰다비아 공국으로 망명했던 바토리 지그몬드가 오스만 제국군의 지원을 받고 트란실바니아로 돌아와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대다수 지역을 공략했다. 하지만 조르조 바스타는 전력을 재정비한 뒤 반격을 가해 여러 전투에서 바토리 지그몬드를 물리쳤다. 이에 지지자들이 조만간 자기를 배신할 거라고 의심한 지그몬드는 1602년 3월에 조르조 바스타와 퇴위에 대한 새로운 협상을 시작했다. 1602년 7월 26일 퇴위가 확정된 뒤 조르조 바스타의 군대에 합세했고, 이후 프라하로 가서 루돌프 2세에게 자비를 구해 보헤미아에서 토지를 소유할 권리를 받아냈다.

이리하여 바토리 지그몬드가 퇴위한 뒤, 조르조 바스타는 트란실바니아 총독으로서 개신교 세력을 트란실바니아에서 근절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칼뱅파 헝가리인과 세케이인, 정교회 왈라키아인과 세르비아인, 루터교 색슨인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강요했고, 이에 따르지 않는 자들을 철저하게 응징했다. 이에 분노한 세케이인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황제군을 이끌고 퇴비스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뒤 세케이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여기에 트란실바니아 각지에서 기근이 창궐하면서 수많은 이들이 아사했다.

1602~1603년 겨울, 트란실바니아 귀족 세케이 모제시 베틀렌 가보르가 반(反) 합스부르크 연맹을 조직한 뒤 티미쇼아라에서 거점을 삼아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흐메트 3세의 지원을 받으며 조르조 바스타에 대적했다. 세케이 모제시는 1603년 4월 15일 하체그 인근의 숙영지에서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추대되었고, 5월 9일 트란실바니아의 중심지인 줄러페헤르바르에 입성한 뒤 대관식을 거행했다. 조르조 바스타는 적의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오스트리아로 퇴각했다. 1603년 7월 17일, 왈라키아 공국 보이보드 라두 10세가 루돌프 2세의 사주를 받고 트란실바니아로 진군해 라쇼노프 전투에서 트란실바니아군을 격파했고, 세케이 모제시는 탈출을 시도하다가 추격대에 따라잡혀 전사했다.

이후 총독으로 복귀한 조르조 바스타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반감을 품은 자들을 탄압하다가, 1604년 루돌프 2세의 지시를 받아 트란실바니아를 떠나 합스부르크 헝가리로 이동한 뒤, 그곳에 침입한 오스만 제국군에 대항했다. 그는 10,000명 가량의 용병대를 이끌고 오스만 제국군 80,000명에 맞서 에스테르곰을 성공적으로 지켜냈다. 이후 보치커이 이슈트반이 이끄는 트란실바니아 봉기군이 조르조 바스타를 대신해 트란실바니아에 주둔한 황제군을 지휘하던 조반니 지아코모 바르비아노 디 벨조이오소를 격파하자, 루돌프 2세는 조르조 바스타에게 이들을 물리치게 했다. 1604년 11월, 바스타는 보치커이 이슈트반을 상대로 2차례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보치커이 이슈트반이 유격대를 보내 보급로를 끊어버리자, 겨울에 프레쇼브로 후퇴했다. 몇 달 후 루돌프 2세의 소환령을 받고 합스부르크 헝가리로 이동한 뒤, 보치커이 이슈트반이 파견한 습격대로부터 합스부르크 헝가리의 광산 마을, 모라비아와 오스트리아를 방어했다.

1605년 7월 오스만 제국군이 침공하자 이에 맞서 싸우려 했지만, 용병을 충분히 유지할 만한 돈을 받지 못해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합스부르크 궁정은 전쟁에 지쳐 오스만 제국군과 평화 협상을 벌이는 한편, 그에게 지급해야 할 380,000 탈러에 달하는 빚을 갚고 싶어하지 않았다.당시 그는 마지막 4년간 급여를 받지 못했고, 군사 위원회에 초대조차 받지 못했다. 이후 프라하로 이동한 그는 1606년 4월 17일 교황 바오로 5세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파문을 선포한 뒤 1607년 2월 26일 베네치아를 응징할 교황청 군대의 중장으로 임명되었지만, 그해 4월 21일 베네치아의 파문이 취소되면서 중단되었다. 1607년 11월 20일 빈에서 뇌졸중에 걸려 사망했다.


[1] 로카 다라조의 아스테사나 또는 크로토네 인근 산 니콜라 델알토 라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