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ttle of Nicopolis (1396), f. 263v. Sébastien Mamerot, Les Passages d’Outremer, Fr. 5594, BnF
1. 개요
1396년 9월 25일에 오스만 술탄국 군대와 유럽연합군(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 신성 로마 제국, 프랑스 왕국, 왈라키아 공국, 폴란드 왕국, 잉글랜드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 구스위스 연방, 튜튼 기사단,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구호 기사단) 사이에서 일어난 전투이다.[1] 니코폴리스 십자군이라고 불리며 50년 후에 벌어질 바르나 십자군(1444)과 함께 중세 말기 최대규모의 십자군 원정들 중 하나였다. 결과적으로 오스만 술탄국이 승리했다.2. 배경
당시의 강대국 오스만 술탄국은 바예지트 1세 하에서 발칸 반도로의 진출을 추진했는데, 그때 획득한 영토 중 하나가 당시 불가리아 제2제국의 임시 수도였던 니코폴리스였다.오스만 술탄국이 니코폴리스를 점령하자 발칸 반도와 동유럽 국가들은 오스만 술탄국의 적극적인 발칸 반도 진출에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독교 대 이슬람의 최전선이 헝가리-크로아티아 동군연합으로 이동했고,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은 오스만 술탄국의 공격을 받을 위험이 생겼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발칸 반도에 위치한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인 모레아 일부 지역 및 달마티아가 오스만 술탄국에게 점령당하면 아드리아 해, 이오니아 해, 에게 해에 대한 영향력이 감소할 것을 매우 우려했다.
제노바 공화국도 비슷하게 만약 도나우 강과 보스포루스-다르다넬스 양쪽 해협에 대한 통제권을 오스만 술탄국이 획득한다면 제노바 공화국에게 중요한 식민지였던 카파와 시노페의 유럽과의 교역로를 오스만 술탄국이 독점하는 것을 우려했다. 그것 말고도 오스만이 1395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을 때 금각만의 북쪽의 갈라타의 요새를 잃었던 것도 있었다.
이러한 정세 속에 교황 보니파시오 9세는 십자군을 선포하였다. 그런데 당시 교황권이 개판이라 고작 그것 하나만으로 십자군을 소환하기에는 한참 역부족했다.
3. 오스만군의 대승
정면공격을 고집하던 프랑스군은 오스만군의 전술에 말려들어서 큰 피해를 입었고, 당시 헝가리 왕국에 피난 중이던 왈라키아 공국의 미르체아 1세는 몇 번에 걸친 제안이 모두 묵살당하고 걱정했던 대로 전투에서 패배하는 상황까지 오게되자 자신들의 세력을 온존한 채 도망가게 된다. 이는 당시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지그몬드(29세)에게 안 좋은 기억으로 남게된다.니코폴리스 회전 자체는 물론 니코폴리스까지 진군하는 과정에서도 지그몬드, 미르체아 1세와 프랑스 기사들이 중심이 된 기사단 십자군은 계속 이견과 갈등을 겪고 있었다. 사실 당장 오스만을 물리친다는 공동 목표가 있었지만, '만일 오스만을 물리친 다면' 그 이후의 주도권의 문제, 나아가 '교황이 선포한 십자군 원정'을 실리로든 명예로든 (나아가 심지어 '영적인') 기회로 삼고 싶어했을 것이 당연했을 프랑스 등의 기사들의 주도권과 공적에 대한 욕구로 갈등의 소지는 충분했다. 나아가 각자 서로의 군대를 이끌고 온 군주와 귀족들이 한데 섞인 십자군은 언제나 그랬듯 불분명한 지휘체계로 혼란스러웠고 때문에 이견과 갈등이 조정되기도 어려웠다. 문제는 그럼에도 지그몬드나 미르체아 1세 등은 그래도 그동안 오스만군과 싸워 본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 저런 주장과 제안을 했지만, 프랑스 등에서 온 기사단들은 그걸 모두 자신들의 공적과 주도권에 대한 위협이라 여기고 거의 전부 씹어버렸다는 것이었다.
사실 니코폴리스까지 진격하는 과정에서도 지그몬드 등은 신중하게 작전을 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프랑스 기사들이 중심이 된 십자군의 억지에 밀려버렸다. 프랑스 기사들은 니코폴리스는 물론이고 콘스탄티노폴리스 나아가 예루살렘까지 탈환하겠다고 날뛰는 주전론을 내세웠다. 결국 십자군은 한편으로는 매우 서둘러 진군하면서 동시에 오스만의 세력권인 도나우강 인근의 여러 소도시들을 공격해서 전투를 벌이는 등 뭔가 난해한 여정으로 니코폴리스에 향했다. 그 과정에서 심지어 라호보(Oryahovo) 에서는 지그몬드가 나서 안전을 보장하고 항복을 받았지만, 프랑스 기사들이 협정을 무시하고 도시를 약탈하고 포로가 된 오스만 수비대를 학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헝가리-크로아티아군은 프랑스 기사들의 행동이 자신들과 군주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고 분개했지만, 프랑스 기사들은 거꾸로 헝가리인들이 자신들의 전공을 빼앗으려 한다고 비난했다. 십자군은 라호보에 소수의 수비대를 남겨두고 니코폴리스를 향해 진군하며 한 두 곳의 오스만 요새와 정착지를 공격하며 나아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공격하지 않고 우회한 요새 한 곳에서 전령이 빠져나가 바예지트 1세의 군대에 십자군이 진격하고 있음에 대해 알렸다.
당시 오스만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진격해 도시를 포위하고 있었다. 이들을 물리치는 것이 목표였던 십자군에게 니코폴리스는 사실 그 시점에서 필수적으로 공략해야만 할 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가 있는 오스만 주력이 니코폴리스를 구원하려 오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기 때문에, 설령 오스만군이 구원하러 온다고 해도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니코폴리스를 함락, 탈환하고 오스만군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고 니코폴리스를 포위했다. 하지만 니코폴리스에 도착했을 때, 십자군은 아무런 공성 무기나 장비도 갖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니코폴리스는 튼튼한 요새인데다 식량도 충분해서 오스만 수비대는 구원군이 올 때까지 충분히 견딜 수 있다고 자신하였고 실제로 십자군의 공격을 버텼다. 때문에 십자군은 그저 성을 포위한 채 시간을 보낼 뿐 별다른 공략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도 십자군은 일단 성을 포위부터 해놓고 공략 준비를 해도 니코폴리스를 함락시킬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스만 지원군은 십자군의 예측보다 훨씬 빠르게 니코폴리스로 진격해왔다. (아래서 다시 언급되겠지만, 십자군은 제대로 정찰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오스만군이 니코폴리스 가까이 진격해 온 다음에야, 오스만군이 자신들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진격해 왔다는 것을 알아챘다.) 십자군은 결국 공성전에서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 진격해온 오스만군을 상대로 회전을 치렀다. 오스만군이 진격해오자 지그몬드와 미르체아 1세는 재차 전투를 신중하게 진행할 것을 주장했다. 그들은 오스만군이 선봉은 주로 적 지역을 약탈하거나 잘 무장된 본대가 싸우기 전에 적을 지치게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투입되는 경무장의 징집병들이기 때문에, 유럽 군대의 주력인 기사들을 투입할 가치가 없으니 이들 오스만군의 선봉대는 기사들 대신 이미 오스만과의 전투 경험이 있는 왈라키아 보병들이 상대하게 하자고 했다. 그들이 오스만의 선봉을 밀어낸 다음 프랑스 기사들이 오스만 주력부대에 정면으로 진격해 들어가는 동안 헝가리-크로아티아와 다른 동맹군들이 측면을 엄호하며 함께 진격해서 오스만 기병대의 측면공격을 차단하며 공격해 들어가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프랑스 기사들은 '우리 기사들 더러 농민 보병들을 뒤따라 가라는 것은 모욕적이다. 뒤에 남는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 대한 불명예와 모독'이라며 거절했다. 그리고 오스만군 진영을 향해 우직한 정면돌격을 감행했다. 물론 여기에는 기사도적인 관념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동시에 프랑스 기사들을 비롯 서유럽 기사단 십자군들은 만일 지그몬드 등의 제안을 따른다면, 헝가리 왕국과 왈라키아 공국 군대에게 전투의 주도권과 공로를 넘겨주게 될까 염려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전투에서 오스만군은 '뾰족하게 깎은 말뚝과 궁병을 이용해서 기병의 돌격을 방해하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3]전술을 썼는데, 프랑스군은 여기서도 그 방어선에 정면으로 돌격하다 피해를 많이 보았다고 한다.
프랑스 기병들은 언덕을 타고 내려오던 오스만군과 마주치자 그대로 공격을 시작해서 처음에는 앞서 언급된 것 처럼 오스만군 선봉부대의 경무장에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징집병 보병들을[4] (당연히) 단숨에 격파하며 기세를 올렸다. 프랑스 기병들은 여세를 몰아 그 뒤에 포진해있던 오스만 정예 보병대를 향해 그대로 돌격했는데... 한편으로는 빗발치는 화살세례가 쏟아졌고, 그 와중에 오스만군이 미리 꽂아놓은 뾰족하게 깎은 말뚝이 '말의 배를 꿰뚫는' 사태가 벌어졌다. 프랑스 기사들은 말에서 내려 말뚝을 치우고 길을 내가며 진격을 계속하여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결국은 어찌어찌 오스만 정규 보병대도 돌파했고, 오스만 보병대는 더 후방의 시파히 기병대가 있는 쪽으로 퇴각했다.
그 시점에서 프랑스 기사들을 이끌던 최고위 기사들[5]은 '잠시 멈춰 휴식하며 전열을 재정비하고 헝가리 군대와 합류해서 계속 싸우자'고 의견을 냈다. 그러나 프랑스 기사들은 역시 이번에도 어디선가에서 많이 본 듯 하게, 그들의 제안을 상큼하게 무시하고 그대로 계속 오스만군을 쫒아 언덕을 올라갔다. 왜냐하면 사실은 프랑스 기사들이 오스만군의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이미 오스만군의 주력을 완전히 박살냈다고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투에 앞서 정찰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결과였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프랑스군은 이미 적잖은 기사들이 앞서 말뚝 방어선 등에서 말을 잃은 상태였고, 나머지 기사들도 계속해서 언덕을 올라가야 하는데다 여전히 남아있는 말뚝 등 장애물을 치워가며 진격해야 했던 탓에 상당수 기사들은 말에서 내려 언덕을 걸어 오르고 있었다. 무거운 갑옷을 입은 채 말도 타지 못하고 언덕 꼭대기까지 - 여전히 남아있는 말뚝 등 장애물을 치워가며 - 낑낑거리며 올라간 프랑스군은 겁에 질려 패주하는 오스만군 패잔병을 발견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오스만군의 예비대였던 쌩쌩한 시파히 기병대였다. 이미 앞선 전투로 지치고 타격을 입었던 프랑스군을 향해 밀려든 시파히 기병대는 측면을 돌파해 프랑스군을 포위해 버렸고 일부 프랑스군 기사들은 전투를 포기하고 도주했다. 나머지 기사들은 오스만 기병대와 격렬한 전투를 벌였지만 결국 프랑스군은 궤멸되고 장 드 비엥을 비롯 다수의 기사들이 전사하고, 앙게랑 드 쿠시를 비롯 많은 이들이 포로로 잡힌다.
그렇게 프랑스군이 자기 혼자 박살나는 사이, 헝가리-크로아티아군을 포함한 나머지 유럽군대는 오스만군의 나머지 본대와 맞부딪혔다. 초반에는 헝가리-크로아티아, 왈라키아 및 나머지 기사단들은 오스만군에 완강히 맞섰다. 특히 오스만 기병대의 측면 공격으로 포위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분전했고, 한동안 오스만군의 맹공을 버터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오스만군에 속해있던[6] 약 1500기 규모의 세르비아 중기병들이 유럽 군대의 측면을 돌파하며 유럽군대는 무너졌고 결국 중과부적으로 격파당하고 다수의 기사와 귀족들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지그몬드는 칠리 백작 헤르만 2세의 활약으로 간신히 탈출한 다음, 어선을 타고 빠져나가 도나우 강에 있던 베네치아 군선에 올라 피신해야 했다. 전장에서 빠져나온 병력들 일부를 태운 군선은 강변에서 침몰되었으며, 군선에 올라타지 못한 병력은 상당수 익사했다. 도나우 강을 건너 육로로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병력은 퇴각 중에 왈라키아에서 약탈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7]
그나마 초반에 프랑스 기사들이 중심이 된 무모한 돌격에 가담하지 않아 전력이 온전했던 구호기사단이 퇴로를 지킨 덕이었다. 그 덕에 일부 십자군이나마 지그몬드와 마찬가지로 강변으로 도망쳐 배를 타고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전장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포로가 된 수천의 십자군들은 몸값을 낼 수 있던 일부를 제외하고는 라호브에서의 오스만 포로 학살의 보복으로 모두 처형당했다.
4. 결과
서유럽 쪽은 이 전투에서 패배함에 따라서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데 있어서 제대로 된 도움을 주기 힘든 처지에 놓였다. 결국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당시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이탈리아에서 뛰어난 인품과 성실함으로 열심히 외교활동을 하여 로마에 대한 동정 여론을 만드는데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지원군을 보낸건 이탈리아쪽 몇 천이 전부였고, 결국 동로마 제국은 멸망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하지만 승리했던 오스만 측도 피해가 꽤나 컸는데, 왜냐하면 초반 프랑스 기사들의 맹렬한 돌격에 비정규군인 바시바조우크는 물론 술탄의 친위대인 예니체리들도 거의 전멸에 가까울 만큼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바예지트 1세는 아군의 막대한 피해에 분노하여 포로로 잡힌 프랑스 기사 대부분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여기서 입은 피해는 1402년 앙카라 전투의 패배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게 된다.[8]
[1]
정확한 군세에 대해서는 기록들이 상충한다. 이 때 포로로 잡힌 유럽인은 17000명의 십자군이 오스만군 20만과 싸운 전투라고 기록했고, 오스만 측에서는 되려 13만명의 십자군과 6만명의 오스만군 사이의 전투라고 기록했다. 오늘날엔 양측 모두 10000~20000명 내외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2]
그나마 이들 기사단 중, 정찰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은 앙게랑 7세 드 쿠시 정도였는데 그는 중기병 500기와 승마궁수 500기를 이끌고 정찰을 나갔다가 오스만 군대와 조우해서 200기의 기병을 이용 오스만군을 유인한 후 매복한 나머지 주력으로 후방을 급습해서 상당한 전과를 거두기도 했었다. 일부 문헌에 따르면 필리프 다르투아 등은 이를 시기해서 드 쿠시가 '전공을 가로채려 지휘체계를 무시하고 무모한 행동을 해서 전군을 위험에 빠뜨릴 뻔했다'고 비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기록내용이 사실이라면 여러 왕국, 공국 및 기사단 등에서 모인 구성상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기는 하지만, 서유럽에서 온 기사단들과 헝가리-크로아티아, 왈라키아 군대 사이에서 뿐 아니라, 심지어 유럽 기사단 내에서도 한편으로는 고질적인 모호한 지휘체계의 문제와 동시에 실리이든 명예이든 큰 기회일 수도 있는 '교황이 선포한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기사들 사이에도 주도권과 공훈을 둘러싼 상호경쟁과 견제의 분위기가 팽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헝가리, 왈라키아의 군주가 주장했고, 경쟁자로 여겨지는 다른 고위기사들이 찬성했으니 반대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3]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
[4]
이들은 '바시바조우크'라고 불리는데, 약탈을 하기 위해 오스만 군대에 자원 입대한 자들로 무기나 방어구가 형편없었고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해서 전투력은 매우 부실했다. 사실 오스만 군대의 장군들도 이들 바시바조우크들한테 별로 큰 기대는 안 했고, 전투 전에 적과 먼저 싸워 그들을 지치게 만드는 역할 정도나 맡겼다.
[5]
앙게랑 7세 드 쿠시(Enguerrand VII, Lord of Coucy)와
샤를 5세때 '프랑스 해군 총 제독'에 임명되기도 했던 장 드 비엥(Jean de Vienne_ 등.
[6]
세르비아는 이 때
1차 코소보 전투이후 오스만의 봉신국이 되어있는 상태였고 오스만군과 함께 헝가리, 왈라키와와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7]
지그몬드는 육로로 귀국하지 않고 도나우 강에서 흑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거쳐 해로로 귀국했다.
[8]
앙카라에서는 니코폴리스 때보단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하긴 했지만 결국 티무르에게 수적 열세를 보였고 정예도도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