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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안니스 4세 | 다비드 | }}}}}}}}} |
이름 |
다비드 메가스 콤니노스 (영어: David Megas Komnenos, 그리스어: Δαβίδ Μέγας Κομνηνός) |
출생 | 1408년경 |
사망 | 1463년 11월 1일 |
직위 | 트라페준타 제국 황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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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라페준타 제국 제21대이자 마지막 황제.2. 생애
트라페준타 제국 제 19대 황제 알렉시오스 4세와 테오도라 칸타쿠지니 황후의 세번째 아들이다. 그는 큰형이자 제20대 황제 요안니스 4세로부터 데스포티스 칭호를 받았고, 1441년 제노바 선박의 탈취와 약탈을 지휘했다. 1458년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오스만 제국의 군주 메흐메트 2세와 형제의 조약을 비준하였고, 그해 말에는 조카 테오도라를 백양 왕조의 샤한샤 우준 하산에게 넘겨줬다.1459년 4월경 요안니스 4세가 죽었다. 요안니스는 생전에 부친 알렉시오스 4세에 의해 공동 황제로 지명된 동생 알렉산드로스를 축출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낸 적이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아들 알렉시오스를 두었는데, 요안니스는 황족의 화해를 위해 알렉시오스가 트라페준타로 돌아오는 걸 허락했다. 그 후 죽음이 임박했을 때, 알렉시오스를 새 황제로 세우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귀족들은 트라페준타 제국의 상황이 지극히 불안한 점을 고려해 나이가 많은 사람이 뒤를 이어야 한다고 결정했고, 이미 데스포티스로 지명된 바 있던 다비드가 새 황제로 선출되었다.
그는 크람반도에서 트라페준타 제국의 명목상 지배를 받았지만 실제로는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도시인 테오도로의 통치자의 딸인 고티아의 마리아와 결혼했다. 1447년 이전 마리아가 사망한 뒤 요안니스 6세의 증손녀인 엘레니 칸타쿠지니와 결혼해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길 희망했다. 그러나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당하고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1459년 다비드가 집권했을 때는 이러한 결혼 동맹은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다비드는 교황 비오 2세에게 십자군을 일으켜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교황은 이를 받아들여 유럽 각국에 십자군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한편 다비드는 메흐메트 2세에게 금화 3천개를 공물로 바치기 너무 힘들다며, 우준 하산의 중재를 통해 공물을 인하해주길 희망했다.
그러나 메흐메트 2세는 트라페준타 제국을 정복하기로 마음먹고, 공물을 바치려 하지 않는 봉신을 징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1461년 여름 대군을 일으켰다. 메흐메트 2세는 시노페를 포위해 항복을 받아낸 뒤, 함대를 트라페준타로 파견해 해상을 봉쇄하게 하고, 육군을 백양 왕조 쪽으로 보내 우순 하산을 격파하였다. 이리하여 트라페준타는 마지막 동맹국을 잃어버렸고, 투르크군은 여세를 몰아 트라페준타를 포위했다. 사령관 마흐무드 파샤는 메흐메트가 도착하기 전에 다비드와 협상하였고, 다비드의 재무관 게오르기오스 아미루치스는 항복만이 살길이라고 조언했다. 뒤늦게 도착한 메흐메트는 협상에 불쾌감을 표했지만, 이내 협상 진행을 허락했다. 다비드는 결국 항복하기로 하고, 트라키아에서 여생을 편히 보내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1461년 8월 말이나 9월 초, 트라페준타의 성문이 열렸고 투르크군이 입성했다. 그 후 다비드와 가족, 그리고 신하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졌다. 그는 가족과 함께 아드리아노폴리스에 정착하였고, 스트루마 강 계국의 봉토를 수여받았다. 그러나 우준 하산과의 교류를 끊지 않은 게 화근이 되었다. 게오르기오스 아미루치스는 이 사실을 메흐메트 2세에게 고변했고, 술탄은 이에 진노하여 1463년 3월 다비드와 자식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1463년 11월 1일, 다비드는 장남 바실리오스, 차남 마누일과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참수되었다. 셋째 아들 게오르기오스는 어린 나이 때문에 살아남았고, 무슬림으로서 살다가 조지아로 탈출했으며,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다비드의 딸 안나 메갈리 콤니니는 술탄의 하렘으로 들어갔다가 투르크족 장군의 아내가 되었고, 또 다른 딸은 조지아의 영주와 결혼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