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티니아누스 1세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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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CE774> 로마 제국 제61대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 IVSTINIANVS I | Ιουστινιανός 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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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0807> 이름 |
페트루스 사바티우스 유스티니아누스 Petrus Sabbatius Iustinian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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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482년 5월 11일 | ||
로마 제국 다르다니아 속주 타우레시움 | |||
사망 | 565년 11월 14일 (향년 83세) | ||
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
527년 8월 1일 ~ 565년 11월 14일 (38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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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 제호 |
유스티니아누스 1세 대제 Iustinianus I Magn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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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호 | 대제 (Megas) | ||
휘 |
플라비우스 페트루스 사바티우스 유스티니아누스 (Flavius Petrus Sabbatius Justinian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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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비우스 페트루스 사바티우스 유스티니아누스 아우구스투스 (Flavius Petrus Sabbatius Iustinianus Augustus) (Φλάβιος Πέτρος Σαββάτιος Ἰουστινιανός Flávios Pétros Sabbátios Ioustinianó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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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 |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 ||
배우자 | 테오도라 | ||
종교 | 기독교 | ||
모노그램 | |||
전임자 | 유스티누스 1세 | ||
후임자 | 유스티누스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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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리는
하느님께서 맡긴
우리의 제국을 하느님의 성스러운 권위로써 다스리면서
전쟁의
승리를 알고,
평화의 아름다움을 배우고, 제국의 기틀을 유지한다. 또한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지해 주시는 것을 깨닫고 우리의 사기는 크게 올라간다.
우리는 우리의 무기도 믿지 않고, 우리 병사들의 무기도 믿지 않으며, 우리의 지휘관들도 믿지 않고, 우리가 지닌 재주도 믿지 않는다. 우리의 희망은 가장 숭고한 삼위일체의 섭리에 있다. 바로 거기서 전 우주의 요소들이 생겨나 세계 전체에 배열된다.
유스티니아누스, < 학설휘찬>의 서문에서
우리는 우리의 무기도 믿지 않고, 우리 병사들의 무기도 믿지 않으며, 우리의 지휘관들도 믿지 않고, 우리가 지닌 재주도 믿지 않는다. 우리의 희망은 가장 숭고한 삼위일체의 섭리에 있다. 바로 거기서 전 우주의 요소들이 생겨나 세계 전체에 배열된다.
유스티니아누스, < 학설휘찬>의 서문에서
로마 제국 제61대 황제이며 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제2대 황제. 527년부터 565년까지 제국을 통치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마케도니아 빈농 가문 출신으로, 군인 출신 황제이자 자신의 외숙부인 유스티누스 1세를 돕다 공동 황제로 임명되었고, 이후 그의 양자가 되어 최종적으로는 단독 황제로 즉위했다. 서로마를 상실한 이후 침체되어 가던 동로마 제국의 기틀을 정비하고 적극적인 영토 팽창을 도모한 초기 동로마 제국의 대표적인 명군이다.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로마법 대전 편찬, 사산 왕조와의 화평, 니카의 반란 진압을 통한 전제군주제 확립,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 등의 명장 등용 및 고토 수복, 하기아 소피아 재건 등이 있다. 이러한 업적들과 교회에 대한 헌신 등이 높이 평가 받아 정교회로부터 시성되어 성(聖) 유스티니아누스로도 불리며, 대제(Megas)[2] 칭호도 받았기 때문에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로도 불린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도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동로마 황제이기도 하다.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평가
565년경의 동로마 제국 영토 |
황제로서 제국의 법령을 정비하고, 대규모 정복 전쟁을 통해 로마 전성기에 필적할 정도로 영토를 크게 늘려 로마 제국 으로서 정체성(identity)을 다시 한번 정립한 공이 크다는 평을 받는다. 하지만 이전 황제인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축적해 놓은 황실 예산의 대부분을 재정복 전쟁, 페르시아와의 평화 조약, 하기아 소피아 성당 재건 등에 투입하여 국고를 탕진하였다는 비판이 역시 적지 않다. 그의 재정복 사업이 가능했던 핵심은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화폐개혁이 대대적인 성공을 거둬 재정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약간 특이한 경우였지만 동서 로마 제국 간에 자주 논란을 유발시킨 일리리쿰 속주에는 테오도시우스 2세 이후로는 계속 동로마 제국이 강력한 입김을 행사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 이전에도 동서 로마 황제들 중 선임 황제였던 측은 대부분 일리리쿰 속주와 그 군대를 장악했던 황제들이었으며 유스티니아누스의 양아버지이자 외삼촌인 유스티누스 1세도 유스티니아누스처럼 라틴어밖에 모르는 일리리쿰 속주민이었다.[3] 어쨌든 유스티니아누스가 라틴어에 더 익숙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그래서였는지 로마사와 고대 로마 풍습에 상당한 애착을 보여서 유명무실화된 고대의 여러 관직이나 풍습을 살리기도 했다. 한편 라틴어에 대해서는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언어라고 지칭했지만, 그리스어에 대해서는 마치 소수민족의 언어를 지칭하듯이 그리스인들의 언어로 지칭했다고도 한다.[4] 즉, 라틴어의 위상을 그리스어보다 높게 쳤던 것이다. 이런 점들 때문에 때때로 최후의 로마 황제 혹은 소위 최후의 로마인으로도 불리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문학적 수사. 유스티니아누스 이후로도 라틴어를 쓰고 일부러 공화정기 로마 식 관직을 장교명으로 하는 황제들이 더 등장한다.
그러나 이런 고대 애호가의 이미지와는 반대로 또한 기독교를 매우 선호하는 성향을 보여 유대인들을 가끔씩 괴롭히거나 이교도 사상을 가진 것으로 간주된 아테네의 리케이온과 아카데미아를 문닫는 조치를 내리기도 하는데, 이는 당시 기독교가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던 로마적인 생활과 얼마나 융합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고대 제국의 위엄을 그리워하면서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사는 것이 전혀 양립 불가능하지 않았다.
아테네의 아카데미아를 문닫게 한 조치는 일반인들을 위한 역사교양서에서 까임의 대상으로 나오곤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에게 이걸 가지고 지적했으면, 수도에도 대학교를 새로 세웠는데 이런 학교를 계속 존치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대답했을게 분명하다. 유스티니아누스가 폐지 이유로 내세웠듯이, 아테네의 아카데미아는 동로마 제국의 통치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이교적인 사상을 갖고 있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이다.[5] 사산조 페르시아로 망명한 철학자들도 생각보다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
일자무식인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삼촌을 도우면서 습득한 교양으로 동시대 최고의 교양인으로 불렸을 정도로 학식이 뛰어난 군주였다. 선대의 황제들이 쌓아올린 제국 재건책을 바탕으로 고토 수복에 나서 적은 수일지언정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 등 명장들의 지휘 하에 병력을 효과적으로 운용함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끈 현명한 황제였다.
하지만 매우 안좋은 선례를 남긴 일로 강한 비판을 받기도 하는데, 군납비리를 저지른 데 대한 처벌을 사형에서 벌금형으로 낮춰버린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비록 당장 제국의 몰락을 불러오지는 않았지만, 전쟁으로 고토를 수복한다는 인간이 이런 나쁜 선례를 남긴 것은 후대에 두고두고 비판받는 이유가 되었다.
3.1. 고토 수복 사업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한때 그를 비판하는 의견이 학계의 조류가 되었지만, W. 트레드골드, J. 할던, 조지프 테인터 등의 학자들이 조명 받지 못했던 연구를 재평가함에 따라 1980년대 이후로는 재평가를 받는 게 현재의 추세가 되었다.
조지프 테인터에 따르면 반달족 치하의 카르타고 경제 지표가 오히려 로마 제국 시대를 상회했다는 연구 결과도 있고, 훗날의 이라클리오스 로마 황제는 사산조 페르시아가 밀고 들어오자 카르타고로의 천도를 시도했을 정도였다. 아무리 자기 본거지였다곤 해도[6] 그렇게 사막화가 진행되어 피폐해진 지역으로 천도하려고 했을까? 이탈리아도 동고트 왕국이 나름대로 합리적인 통치를 했다. 일단 무조건 약탈만 한게 아니라 나름대로의 통치 체제에 따라 통치했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경제 지표도 그렇게까지 나락으로 떨어진 건 아니었다. 문제는 이들 지역을 수복한 동로마 제국이 갑자기 증세를 하는 바람에 해당 지역의 경제가 더이상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워렌 트레드골드에 따르면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계획을 망쳐놓은 건, 541~542년 2년간 걸쳐서 동로마 제국을 파괴한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라고 한다. 이 중세 극초기판 흑사병은 카르타고와 이탈리아의 경제력을 회복시켜 수익을 뽑아내기 전에 국고를 격감시키고 유스티니아누스 자신도 사경을 헤매게 하는 등 전체적인 사업 추진력을 떨어뜨렸다는 평가다.
당시 유스티니아누스는 5세기 폭발적으로 성장한 원로원 계층, 즉 귀족층의 전횡을 최대한 차단하는 데 초점을 둔 행정 개혁을 시도했다. 매관매직과 수탈이 성행하던 행정체계를 바로잡은 덕분에 당대의 귀족층에게 질시를 당했지만, 이런 개혁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를 재정복한 후 유스티니아누스가 바로 착수한 것이 제국 동방에서 이루어진 식의 행정 개혁이었다. 게다가 서양에서 도시화율이 가장 높았던 곳이 동로마 제국이다 보니 사산 왕조에 비해 전염병에 의한 피해도 훨씬 심각했다고 한다.
또한 반달족을 정복할 때도 아리우스파인 겔리메르가 왕위를 찬탈하자 뒤에서 돈을 뿌리고 종교갈등을 일으켜 반달족 내의 반란을 조작한 사람도 유스티니아누스였고, 그 시점에서 적당히 조공만 받고 끝내려는 수준의 원정 계획을 끌어올려 반달족 완전 정복을 계획한 것도 유스티니아누스였다. 벨리사리우스를 심하게 견제하긴 했지만 나중에 이탈리아를 수복한 사람은 결국 유스티니아누스의 확실한 지원을 받은 나르세스였다.
실제로 나르세스도 타기나에 전투에서 고트족을 격파하고 카실리눔 전투에서 프랑크족을 격파한 명장이다. 두 명장들이 다툴 때는 나르세스를 후방으로 빼버리기도 할 만큼, 기본적으로 사람을 쓰는 법은 알고 있었다. 비록 일관성 있게 장기간 중용하지는 못했지만 이건 왕권 수호에 얽힌 보편적이고도 복잡한 문제인 군권과 실력과 인기를 가진 강력한 신하는 황제에게 그 자체로 위협이 된다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유스티니아누스만의 특징이라고 보긴 어렵다.
결국 벨리사리우스 개인 능력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지만,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업적을 전부 벨리사리우스의 역할로 보려고 하는 건 힘들다. 이걸 시오노 나나미의 폐단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이게 한동안 대세 학설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모든 걸 다 그녀의 탓으로 돌리는 것 역시 무리다. 적어도 군사 이외의 수많은 문화적, 통치체계 정비 등의 업적에서 유스티니아누스의 역할을 무시하기도 힘들고 실제 자신도 신학, 음악, 역사, 법학에서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판을 지나치게 키웠다는 비난도 있지만, 적어도 대역병이 창궐하기 전까지 서양에선 로마인들의 약진이 두드려졌고, 동부 전선도 앞서 말한 통치체계 개선을 통한 세제 개혁 등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조세를 이용해 사산 왕조를 비롯한 기타 세력들과 화평을 맺었으며, 그로 인해 막대한 돈을 쏟아부었음에도 별다른 경제적 어려움은 겪지 않았다. 즉 철저히 계산된 확장이었다는 소리.
또한 이탈리아는 동로마 제국이 서방 세계에 간섭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황제들이 남부 이탈리아에서 노르만족이 등장하기 전까지 500년 동안 교황에게 압박을 가하고 서방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무익했다고 평가하기도 힘들다. 실제로 남이탈리아는 서방 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중요 지역이었고, 이 지역이 노르만족에게 넘어가 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지워지자 발칸반도가 노르만족의 침공으로 전장이 되었던 것을 보면 제국 수호에는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제국에 창궐한 전염병 때문에 심각한 재정적 타격을 입은 동로마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사후 그가 차지한 점령지 상당수를 잃고 만다. 물론 카르타고, 남이탈리아, 남부 이베리아 등 중요 지역은 이후로도 계속 유지하고 있었으나, 후임인 유스티누스 2세 때의 정치 혼란에 암군 포카스의 실정까지 겹치자 허약해진 제국은 사방에서 압력을 받으며 사산 왕조와의 전면전을 치러야만 했다. 비록 최후의 승자는 로마 제국이었지만, 국력을 지나치게 소모한 동로마 제국은 이슬람 제국의 확장을 막지 못 하게 된다.
한편 조금 다르게 바라본 관점도 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후 로마 시 원로원[7]도 어느 정도 돌아갔고, 구(舊) 서로마 제국 시절의 지방행정 체제[8]도 어느 정도 유지되었으며, 동로마 황제로부터 명예시민, 집정관, 파트리키우스 등 명목상의 관작을 받아서 활동하던 게르만 각국의 군주들의 모습에서 엿보이듯이, 구(舊) 서로마 지역은 느슨하게나마 로마 세계 안에 있다고 할 수도 있었다.[9]
그런데 유스티니아누스가 명목상의 종주권을 인정받아왔던 종래의 정책을 폐기하고서는 아예 대놓고 직접적인 전쟁에 나섬으로써, 그렇게 새로 그어진 국경 밖은 역설적으로 완전히 로마에서 벗어난, 달리 말하면 (동)로마가 수복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이 인증되어 버려서[10] 그 지역에서의 구(舊) 로마적 정체성은 급격히 퇴조하게 되었다는 관점도 있다.[11]
4. 그 외
- 그리스어권인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태어나긴 했으나 타우레시움은 라틴어권과의 경계인 소위 'Jirecek Line' 근처였고, 혈통적으로 보자면 라틴어권에 포섭된 일리리아계였기 때문인지 라틴어가 모어였다. 그래서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가 그리스어를 못한다고 까기도 했다.
- 위와 별개로 현대 그리스에선 자국의 위인으로 보는 시선이 적지는 않다. 때문에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의 개회쇼에서 각각 고대, 중세, 근대 그리스를 상징하는 실존 인물로 알렉산드로스 3세와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와 함께 등장했다.
- 서커스 단원의 딸이란 천한 신분 출신의 황후 테오도라를 극진히 생각했으며 실제로 공동으로 통치했다. 그가 사람 보는 눈이 있었던 것인지 상당수의 기록이나 역사가들은 테오도라 황후가 정치적인 능력 면에서는 황제와 대등한 수준이거나 혹은 그를 능가하는 정치인이었다고 평가한다.
-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이후 삶의 활력을 잃은 말년에는 종교 문제 외에는 제대로 손댄 일이 없다. 종교 문제에 손댄 일 자체가 "왜 그런 쓸데 없는 것에 집착하냐?"이라고 비판받는 경우가 있는데, 당대 로마인에게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한 논쟁은, 오늘날 현대인들이 민주주의의 올바른 구현방식을 놓고 논쟁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했으며, 신민들이 이 논쟁으로 분열하기도 했다. 황제는 이러한 논쟁을 적절하게 조율하여 제국 신민들을 하나로 묶을 필요성이 있었다. 당시 정통파와 돌이킬 수 없는 불화에 빠져 있던 이집트와 시리아 합성론파 간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였으나, 그 방법으로 내세운 새 교리가 정통파와 합성론자들 모두에게 전혀 지지를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장만을 고집하였다.
- 재정은 유스티니아누스가 대단히 정력적으로 관리했으나, 말년의 장기 와병한 결과 재정 상황이 악화되면서 후대에 낭비 황제로 낙인 찍히는 결과를 낳았다. 현대에 유스티니아누스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지만, 만년의 이 행태는 정말이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일설에는 후임인 유스티누스 2세가 자신이 물려받은 금고에는 현금은 없고 차용증서만 있었다는 투의 말을 했다고도 한다.
-
유스티니아누스의
무덤은
로마 제국의
황릉 역할을 한 판토크라토
수도원의 묘역에 있었는데,
4차 십자군 때
십자군에게
약탈당하면서
파괴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뿐만 아니라 이전의
동로마 제국 초기의 황제들의 무덤들도 모조리 파괴되어서 무덤 양식이나 복식 등이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들(십자군)은 자신들에 내재 된 황금 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황제의 도시를 약탈할 때 재화를 획득하는 새롭고, 타인의 이목에서 벗어나는 방법( 도굴)을 생각해냈다. 그들은 성스러운 사도 교회의 성역에 마련된 판토크라토르 묘역에 있는 황제들의 묘실을 열어젖혔다. 이들은 밤새 이 모든 것들을 약탈하였고 황금 장신구, 진주 목걸이, 반짝이고 귀중하며 순수한 보석들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불법적이라고 해도 이를 취하였다. 그들은 또한 오랜 세월 동안 피해를 입지 않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들은 경의에 찬 눈으로 이를 바라보았으나 관에서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중략) 그들은 만사에 있어 총체적인 무관심과 불경심을 표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역사》중에서
*
2011년 6월 16일, 스코페 2014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북마케도니아의
스코페에 그의 조각상이 세워졌다. 다만 여러 가지 정치적 이유로 얼룩진 프로젝트다 보니 국내외로 비웃음을 당하고 있다.
5. 매체에서
- 게임 문명 4에서 비잔틴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6. 관련 문서
- 가족
- 신하
- 대외 전쟁
- 적국
- 업적 및 사건
7. 참고 자료
[1]
다만 이것은 프로코피우스가 황제에게 아첨하기 위해 지은 말이며, 비공개 책인 '비사'에서는 악의적인 소문까지 포함하여 황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2]
고전 그리스어: μέγας
[3]
이 사람은 유스티니아누스와는 달리 일자무식이었던지라
그리스어는 한마디도 할 줄 몰랐다.
[4]
《Transformations of Romanness》113p, 원문 "He called Latin our from the fathers inherited language", "in contrast to the language of the Greeks or the common Greek language."
[5]
여담으로 아카데미아와 콘스타티노폴리스의 국립대학은 공존하는 기간 동안
학자들 간의 상호 교류가 많았다고 사료된다.
[6]
이라클리오스는 즉위하기 직전 카르타고
총독이었고 그곳 병력을 토대로
포카스를 타도했다.
[7]
즉, 구(舊) 서로마
원로원
[8]
Praetorian prefecture나 Diocese 등
[9]
게르만
왕국들이
동로마 제국에게 의지했던 것은 다름 아닌
주화 발행 같은 경제적 권위였다.
동고트 왕국이 특히 심했는데 동로마에 침략당하는 와중에 주화 발행을 위해서 전전황제인
아나스타시우스 1세 명의로 발행했다.
[10]
반달 왕국을 1년도 안 돼서 멸망시킨
벨리사리우스가 기세를 타고 금방 전쟁이 끝날 줄 알았는데, (손익 계산 자체를 어그러지게 만든
흑사병이라는 핑계라면 핑계가 있지만 어쨌든) 생각보다 훨씬 오래 갔고, 그런 와중에도
서고트 왕국의
이베리아 반도
내륙지역이나
프랑크 왕국의
갈리아에 대해서는 손도 못 댄 셈이니.
브리타니아는
5세기 초에 서로마가 포기하고 떠났기 때문에 말할 나위도 없고.
[11]
《Transformations of Romanness》53p, 원문 "The impact of the Justinianic Wars, and especially of the fact that they did not result in the West's military domination by the eastern Emperor, cannot be overestimated. After twenty years of brutal destructive warfare waged to make the point,no one could be in any doubt that the areas beyond actual imperial authority were not part of the Empire anymore. They remained lost to barbarians; the frontier between imperial Roman inside and outside had formally been redra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