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1 12:58:04

로마-노르만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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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만티아 전쟁 파일:external/b66a81d7e3c5440cfef450e3309a2b4b425f1dcd788e510bd84b747e2e2573be.png 아레바키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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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세기, 남이탈리아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랑고바르드족 계열 귀족들과 동로마 제국에 고용된 노르만족 전사들이 오트빌 가문 로베르 기스카르의 지휘하에 동로마 제국을 밀어내고 남이탈리아를 석권한 뒤 발칸 반도까지 쳐들어오면서 11~12세기에 벌어진 전쟁.

2. 배경

568년 랑고바르드족이 동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이탈리아로 진입하여 랑고바르드 왕국을 건국한 이래, 남부 이탈리아는 랑고바르드 왕국을 따르는 베네벤토 공국, 스플레토 공국과 동로마 제국의 통치를 따르는 나폴리, 칼라브리아, 아풀리아, 바리 등 해안 도시 및 지역들간의 세력 다툼이 오랜 세월 이어졌다. 10세기에 동로마 제국의 국력이 신장하면서 남부 이탈리아에 대한 통제력이 강화되자, 랑고바르드계 귀족들은 막대한 공물을 제국에 바치는 상황에 불만을 품고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던 1015년경, 40명 가량의 노르만족 순례자들이 아풀리아 북부 몬테 가르가노에 있는 대천사 미카엘의 동굴 수도원을 찾았다가 현지 랑고바르드 귀족에 의해 용병으로 고용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노르망디의 노르만족 전사들이 차츰 남이탈리아로 이주했다. 그들은 랑고바르드족과 동로마 제국에 고용되어 전장에서 용맹을 떨쳤다. 그러다 1030년 나폴리 공작 세르기우스가 노르만 용병대장 라이눌프에게 아베르사 지역을 영지로 내주면서, 노르만족은 본격적으로 남이탈리아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1040년, 랑고바르드족 출신의 아두인, 멜피의 토포테리파, 그리고 노르만 용병들은 세금을 가혹하게 뜯어내는 동로마 제국에 반기를 들기로 했다. 그들은 베네벤토 공자인 아테눌프를 지도자로 선출했다. 남이탈리아인들에게 여전한 경외를 받는 베네벤토 공국의 일원이고, 실제로는 한미한 세력이니 자기들을 통제하려 들지 못하리라는 계산이었다. 1041년 9월 3일, 반란군은 이탈리아 속주 총독 엑사고스토스 보이오안네스를 사로잡고 베네벤토에 수감했다. 그런데 1042년 2월, 아테눌프는 동로마 제국이 엑사고스토스의 몸값으로 지불한 돈을 가지고 그리스로 도망쳐 버렸다. 당시 노르만 용병대가 살레르노 공작 과이마르 4세에게 상당한 급료를 지불받아 점차 포섭되고 있었는데, 그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달아났던 것으로 보인다.

노르만 용병대는 기껏 세웠던 지도자가 돈을 갖고 도망쳐버리자 아르이로스를 새 지도자로 선출했다. 1042년 4월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이 타란토에 상륙한 뒤 바리로 진군하자, 아르이로스는 노르만 용병 7천 명을 파견하였다. 마니아케스는 노르만군과의 전투에서 패하여 타란토로 후퇴했다. 그해 7월, 아르이로스는 노르만군과 함께 지오베나초를 포위하여 사흘간 공성전을 벌인 끝에 함락했다. 노르만군은 그곳에 있던 그리스인들을 대거 살해하고 재물을 약탈했다. 이를 보다 못한 그가 간청하자, 노르만군은 포로로 잡았던 주민들을 풀어줬다. 그 후 4년간 남이탈리아에서 세력을 굳히던 아르이로스는 콘스탄티노스 9세와 협상한 끝에 1046년 자신의 영향력을 인정받는 대가로 제국에 정식으로 귀순했다.

제국은 아르이로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해 "이탈리아, 칼라브리아, 시칠리아, 파플라고니아의 공작" 칭호를 내리는 등 융숭한 대접을 하는 한편, 새로운 총독을 보내 남이탈리아를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노르만 용병대는 번번이 총독을 살해하는 등 반항적인 태도를 보였다. 결국 1051년, 제국은 아르이로스를 이탈리아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는 3월에 바리에 도착한 뒤 제국에 반항을 일삼았던 바리의 귀족 로무알드와 베드로 형제를 체포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했다. 이렇듯 아르이로스가 완전히 동로마 제국의 지배에 순응하고 자신들을 억압하자, 노르만인들은 오트빌 가문의 탕그레드의 셋째 아들 옹프루아와 넷째 아들 로베르 기스카르를 중심으로 뭉쳤다.

1053년 6월 18일, 옹프루아와 로베르 기스카르는 아풀리아의 치비타테에서 교황 레오 9세가 친히 이끌고 온 교황군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었다.( 치비타테 전투) 이후 기스카르는 1055년 미네르비노, 오트란토, 갈리폴리를 점령해 아풀리아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옹프루아는 기스카르의 권세가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해 칼라브리아로 보냈다. 기스카르는 그곳에서도 탁월한 활약을 하여 1056년 살레르노를 공략하고 뒤이어 코센차를 함락했다. 1057년 봄, 옹프루아는 임종이 다가오자 기스카르를 멜피로 부른 뒤 어린 아들들을 보좌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1057년 8월 옹프루아가 사망한 후, 기스카르는 조카들을 밀어내고 아풀리아의 백작에 취임했다. 그는 이때부터 동로마 제국의 영역을 향한 본격적인 공세를 개시했다.

3. 로베르 기스카르 전쟁

1057년, 로베르 기스카르는 칼라브리아의 동로마 제국령인 카리아티 시를 포위 공격해 수 개월만에 함락시켰다. 뒤이어 교황 니콜라오 2세와 밀약을 맺었다. 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압력으로부터 교황령을 지켜주는 대신, 교황은 그를 아풀리아, 칼라브리아, 시칠리아의 공작으로 봉한다는 것이었다.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는 여전히 동로마 제국에 속했고 시칠리아는 무슬림의 시칠리아 정복 전쟁 이래 시칠리아 토후국 수중에 있었다. 즉, 그는 교황으로부터 이 지역을 자기 것으로 삼을 권리를 인정받은 것이다.

1059년, 기스카르는 로사노와 게라체를 잇따라 공략했다. 이때 아풀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기스카르는 아풀리아로 진군했고, 동생 루지에로 1세가 칼라브리아의 남은 영토를 마저 공략했다. 1059~1060년 겨울, 루지에로는 칼리브리아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동로마 제국의 도시인 레지오 시를 공략하기 위해 공성 무기를 대거 활용해 맹공을 펼쳤지만 수비대의 끈질긴 저항으로 조기 함락에 실패했다. 1060년 봄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온 기스카르가 동생과 합류해 공세를 펼쳤다. 결국 그해 여름 레지오 수비대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자유롭게 돌아갈 수 있는 조건하에 항복했다. 이리하여 칼라브리아는 노르만족의 손에 넘어갔다.

1060년, 콘스탄티노스 10세는 기스카르가 칼라브리아 정복을 완료하는 사이에 이탈리아에 아불하레가 이끄는 군대를 파견했다. 아불하레는 전임 총독 아르이로스와 힘을 합쳐 아풀리아 일대 대부분을 장악한 뒤 기스카르의 본거지인 멜피를 포위했다. 기스카르와 루지에로는 급히 멜피로 달려와서 1061년 동로마군을 격퇴해 멜피를 구했고, 여세를 이어가 브린디시와 오리아를 탈환했다. 그러나 1064년부터 1068년까지 옹프루아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들을 지지하는 가신들의 반란에 직면했고, 동로마군은 이들과 연합해 브린디시, 오리아, 타란토를 다시 공략했다.

그러던 1068년, 로마노스 4세 셀주크 제국의 아나톨리아 침략에 대응하고자 남이탈리아에서 병력을 대거 차출했다. 기스카르는 이 때를 틈타 공세를 감행해 동로마군과 반란군의 손아귀에 있던 모든 도시를 쉽게 공략했다. 1068년 6월, 그는 아르시나에 갇혀 있던 마지막 반란군 요새를 함락시켰고, 동로마군을 바리에 몰아붙였다. 1068년 8월 5일, 기스카르는 바리를 육상과 해상에서 모두 봉쇄하고 포위 공격을 가했다. 아르이로스는 공방전이 한창일 때 병사했고, 아불하레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공방전이 막 시작할 때 바리에서 탈출했다.

1069년 초, 스테파노스가 지휘하는 동로마 함대가 노르만 함대의 해상 봉쇄를 돌파하려 했다가 대부분의 함선을 잃었다. 그럼에도 스테파노스는 기어이 봉쇄를 뚫고 바리로 입성하여 음식과 무기를 지원한 뒤 바리 수비를 이끌었다. 1071년 초, 스테파노스는 바리에서 빠져나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달려가서 로마노스 4세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로마노스 4세가 파견한 함대는 바리 앞바다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동로마 함대에게 섬멸되었다. 눈앞에서 이 참상을 지켜본 바리 주민들은 전의를 잃고 성문을 열었다. 이리하여 1071년 4월 16일, 기스카르는 동생 루지에로와 함께 바리에 입성했다. 이리하여 동로마 제국은 남부 이탈리아의 지배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기스카르는 남이탈리아 전역을 석권한 뒤 여세를 몰아 시칠리아 토후국을 무너뜨리고 시칠리아 마저 손아귀에 넣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동로마 제국 마저 공략하기로 하고, 1080년 롬바르디아와 아풀리아 전역에서 많은 장정을 징집하고 선박을 대대적으로 건조하는 등 원정 준비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살레르노에 라이토르라는 수도자가 찾아왔다. 이 사람은 자신이 사실은 폐위되었던 미하일 7세라면서, 니키포로스 3세에게 황위를 찬탈당한 뒤 수도원에 갇혔다가 가까스로 탈출했으니 복위시켜달라고 부탁했다. 이 자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여러 설이 제기되었지만 정설은 없다. 다만 미하일 7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주교로 지내고 있었으니, 이 자가 가짜인 것만은 분명하다. 로베르 기스카르 역시 그가 가짜라는 걸 눈치챘지만, 이 인물을 동로마 황제로 복귀시키겠다는 명분을 내걸기로 하고 라이토르에게 특별한 대우를 해줬다.

1081년 5월, 기스카르는 1,300명의 노르만 기사를 포함한 16,000명의 병력과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살레르노에서 아드리아 해로 출항했다. 도중에 알렉시오스 1세의 요청을 받은 베네치아 공화국 해군의 습격으로 함선 대부분을 상실하면서 상륙지에서 고립되었지만, 기스카르는 포기하지 않고 일리리아 해안 지대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도시인 디라히온을 포위했다. 그는 디라히온 수비대 지휘관 요르요스 팔레올로고스에게 미하일 황제를 복위시키려 하니 당장 따르라고 요구했다. 요르요스는 자신이 미하일 황제를 잘 알고 있으니, 그를 눈앞에서 확인한 뒤 성문을 열고 도시를 넘겨주겠다고 밝혔다. 이에 라이토르는 즉시 군인과 귀족들의 호위를 받으며 성곽 앞에 행진했고, 악대는 음악을 연주했다. 그러나 수비대는 그를 보고 "넌 미하일 황제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일이 풀리지 않자, 로베르는 도시를 맹공격했다. 하지만 디카리움 수비대는 여름 내내 버텼고, 간간히 돌격대를 내보내 노르만군에게 타격을 입혔다.

1081년 10월 15일, 알렉시오스 1세가 20,000~2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디라히온 인근에 도착했다. 황제의 군대에는 타그마 8,800명, 프랑크 용병 1,00명, 바랑인 친위대 1,000명, 룸 술탄국이 보내준 궁기병대 9,000명, 그리고 동로마 제국의 봉신인 두클랴 왕국의 국왕 콘스탄틴 보딘이 이끄는 부대가 포함되었다. 기스카르는 디라히온 북쪽으로 이동한 뒤 10월 18일 황제의 군대와 대적했다. 중앙 대열은 자신이 맡았고, 좌익이나 측면에 해당하는 내륙 쪽엔 아들 보에몽 1세가 맡았으며, 우익은 랑고바르드족 공주이자 자신의 아내인 시켈가이타가 맡았다.

이후 벌어진 디라히온 공방전에서, 노르만군은 헤이스팅스 전투 이후 동로마 제국으로 망명한 뒤 바랑인 친위대에 고용된 앵글로색슨족 장병들의 복수심에 가득찬 맹렬한 공격으로 인해 우익이 붕괴되면서 꼼짝없이 패할 위기에 직면했다. 이때 시켈가이타가 병사들을 독려해 무너지려던 군대를 수습했고, 보에몽이 좌익의 궁수 부대를 이끌고 아군 전열 깊숙이 침투한 바랑인 친위대를 향해 화살을 퍼붓자, 바랑인 친위대는 기세를 잃었다. 그들은 아군 본대보다 너무 앞서 나왔기 때문에 퇴로마저 차단되었고, 결국 대부분 사살되었다. 한편 알렉시오스 1세는 중앙에서 최선을 다해 맞섰지만 노르만 군대의 압도적인 전투력을 버티지 못한 병사들이 패주하면서 위기에 직면했다. 급기야 룸 술탄국 궁기병대와 콘스탄틴 보딘의 부대가 전장을 이탈해버리자, 알렉시오스 1세는 홀로 말을 몰아 전장을 가까스로 빠져나와 오흐리드의 산악 지대로 피신한 뒤 잔여 병력을 수습했다.

디라히온은 알렉시오스 1세가 패주한 뒤에도 4개월을 더 버텼지만, 1082년 2월 한 베네치아 주민이 성문을 열어주는 바람에 함락되었다. 그 후 기스카르는 일리리아 전역을 수 주일만에 휩쓸고 카스토리아를 뒤이어 함락시켰다. 이제 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는 것은 시간문제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해 4월, 기스카르는 아풀리아, 칼라브리아, 캄파니아에서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는 알렉시오스 1세의 공작이었다. 이보다 앞서, 기스카르에 의해 아풀리아 공작 직위에서 밀려난 옹프루아의 아들 아벨라르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피신해 있었다. 아벨라르는 알렉시오스 1세의 설득을 받아들여 비밀리에 이탈리아로 돌아와서 황제가 내준 막대한 자금과 형제인 에르망의 도움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위협을 받고 있으니 서둘러 귀국해서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 역시 알렉시오스 1세의 공작이었다. 그는 하인리히 4세에게 동맹을 제안하면서, 그 대가로 금괴 36만 개, 고위 궁정 관리 스무 명의 급료, 진주가 박힌 황금 가슴 장식, 크리스털 술잔, 붉은줄마노로 만든 컵, 그리고 '성인들의 유품이 작은 꼬리표로 분류되어 담긴 금갑 성물함' 등 귀중한 보물들을 선물했다. 하인리히 4세는 동로마 제국이 기스카르를 묶어두는 사이 성직자 서임 문제로 갈등을 벌이는 교황을 폐위시키기로 작정하고 로마로 쳐들어갔다. 상황이 이처럼 꼬이자, 기스카르는 할 수 없이 아들 보에몽에게 원정군 지휘를 맡긴 뒤 아드리아 해를 건너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알렉시오스 1세는 교회의 재산을 몰수해가며 국방비를 대거 충당해 병력을 다시 끌어모은 후 기스카르가 떠난 틈을 타 노르만군을 물리치려 했다. 그러나 보에몽은 야니나와 아르타에서 동로마군을 상대로 잇따라 승리를 거두고 마케도니아 전역과 테살리아 대부분을 장악했다. 그러던 1083년 봄, 양군은 라리사에서 대치했다. 알렉시오스 1세는 전투가 임박할 때 주력군을 매부인 요르요스 멜리세노스와 바실리오스 쿠르티키오스에게 맡기고, 이들에게 적을 향해 진군하되 맞붙는 순간 방향을 돌려 후퇴하라고 명했다. 그 사이 알렉시오스는 사전에 선발한 병력을 이끌고 우회로를 통해 노르만 진영의 배후로 돌아갔다.

이후의 전투에서 노르만군이 후퇴하는 적을 맹추격하는 동안, 알렉시오스 1세는 적의 진지를 습격해 남아 있는 적군을 사살하고 보급품을 모조리 약탈했다. 뒤늦게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보에몽은 카스토리아로 퇴각했다. 그 후 보에몽의 노르만군은 제국군과의 여러 전투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급료를 지급받지 못해 전의를 잃었다. 여기에 알렉시오스가 탈영병에게 큰 보수를 지불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병사들은 더욱 싸울 의욕을 잃었다. 보에몽이 자금을 얻어오기 위해 이탈리아로 떠나자, 노르만군은 대거 알렉시오스 1세에게 투항했다. 베네치아 함대는 이 틈을 타서 코르푸와 디라히온을 수복한 뒤 동로마 제국에 넘겼다. 1083년 말에 이르자, 발칸 반도에서 노르만군이 점령한 지역은 아드리아 해 연안의 몇 개 섬과 해안 지대 뿐이었다.

한편, 기스카르는 반란을 평정한 뒤 산탄젤로 성에서 외롭게 농성하고 있던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구출했다. 이후 1084년 봄 새롭게 병력을 소집한 뒤 로마로 진군하여 하인리히 4세와 일전을 벌이려 했다. 하인리히 4세는 사전에 로마를 떠나 롬바르디아로 철수했고, 1084년 5월 27일 로마에 입성한 기스카르는 로마를 사흘 동안 대대적으로 약탈했다. 그 후 기스카르는 신변 보호를 명분삼아 그레고리오 7세를 본거지인 살레르노로 이송시킨 뒤 1084년 가을 보에몽과 다른 두 아들 루지에로와 기, 그리고 150척의 새 함대를 이끌고 발칸 반도로 건너갔다. 그러나 부트린토에서 폭풍으로 인해 2달 동안 항해가 중단되었고, 코르푸 해협을 가까스로 건넜을 때 베네치아 함대의 공격을 받아 3일 동안 2차례나 참패했다. 하지만 기스카르는 잔여 함대를 끌어모은 뒤, 적이 승리에 취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 기습 공격을 감행해 3번째 해전에서 승리했다. 안나 콤니니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13,000명의 베네치아 병사가 죽고 2,500명이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고 한다. 이 포로들은 이후 신체 훼손형에 처해졌고, 도메니코 셀보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도제 직에서 물러났다.

코르푸를 장악한 노르만군은 육지에 상륙한 뒤 원정을 이어가려 했으나, 1084년 겨울에서 1085년 봄까지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노르만 기사 500명이 죽고 상당수 병력이 몸져 누웠다. 여기에 기스카르의 장남 보에몽도 병에 걸려 바리로 후송되었다. 로베르는 병력을 재정비한 뒤 1085년 초여름 원정을 재개하여 케팔로니아로 행진했다. 그러나 도중에 자신 역시 전염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아테르 곶에 상륙한 뒤 피스카르도 만으로 들어가서 요양 생활을 하다가 1085년 7월 17일 아내 시켈가이타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그 후 노르만군이 발칸 반도에서 철수하면서, 전쟁은 막은 내렸다.

4. 보에몽과 알렉시오스 1세의 전쟁

로베르 기스카르가 사망한 후, 아풀리아 공국은 시켈가이타의 아들인 루지에로 보르사에게 상속되었다. 이에 반감을 품은 다른 아들들과 조카들이 대거 반기를 들면서, 기스카르가 생전에 구축한 영역은 산산조각났다. 그 과정에서 소외된 채 타란토 공작 노릇하고 있던 보에몽 1세 제1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뒤 튀르크-아랍군을 상대로 용맹을 떨치고 온갖 모략을 구사한 끝에 안티오키아를 손아귀에 넣었다.

그러나 알렉시오스 1세가 이끄는 동로마 제국이 위세를 회복하여 "십자군 전쟁에서 획득한 영토를 제국에 넘기겠다는 맹세를 준수하라"며 안티오키아를 넘기라는 압박을 계속 가하자, 이참에 아버지가 이루지 못했던 꿈을 달성하기로 마음먹고 1106년 극비리에 시칠리아로 잠입했다. 생 레오나르데 노블라트 성당에서 군중을 소집한 뒤 알렉시오스 1세를 다음과 같이 규탄했다.
"그는 사악한 배반으로 수천 명의 기독교인들을 억압했다. 어떤 이들은 난파선에 갇혔고, 많은 이들은 독살당했으며, 더 많은 이들은 망명했으며 무수한 이가 이교도들에게 넘겨졌다. 이 황제는 기독교가 아니라 미친 이단자이며, 배교자 율리아누스, 또다른 유대인이며, 평화를 가장하면서도 전쟁을 선동하고, 형제들의 목을 베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항하는 피비린내 나는 헤롯이다!"

1107년, 보에몽은 34,000명의 노르만 병사를 모집한 후 아드리아 해를 건너 디라히온에 상륙했다. 그러나 타티키오스와 요안니스 콤니노스 두카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이 그들을 효과적으로 격퇴하고 해안가에 봉쇄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식량이 바닥나 기아가 창궐해 군대를 유지하기 어려운 지경에 처하자, 보에몽은 1108년 봄 알렉시오스 1세에게 무릎을 꿇고 데볼 조약을 체결했다. 안티오키아는 명목상 동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으며, 동로마 제국에 전쟁 시 병력을 보내야 하고 공물을 매년 납부해야 하며, 종교적으로는 정교회 관할에 들어갔다. 보에몽 역시 형식적으로나마 제국의 관리로 임명되었다. 보에몽은 조카 탕그레드에게 안티오키아를 맡긴 뒤 실의에 빠진 채 아풀리아의 카노사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111년 사망했다.

5. 요안니스 2세 마누일 1세의 안티오키아 원정

보에몽 1세의 뒤를 이어 안티오키아 공작이 된 탕그레드는 데볼 조약을 부정하고 동로마 제국을 노골적으로 적대했고, 후계자들도 똑같은 태도를 보였다. 특히 1130년대에 공작을 맡은 레몽은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군주 레오 1세와 동맹을 맺고 타르소스, 아다나, 시스 등 동로마 요새들을 빼앗고 촌락 수십 곳을 약탈했다. 1137년, 요안니스 2세는 안티오키아 공작을 응징하고자 45,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동방으로 진격했다. 레오 1세는 제국군의 압도적인 위세에 경악해 산악 지대로 도주했고, 레몽은 안티오키아 성채에 숨었다.

1138년 초, 안티오키아에 도착한 요안니스 2세는 공성전을 감행했다. 정규군이 공성전을 치르는 동안, 동로마군 소속 용병들은 안티오키아 공국의 촌락들을 약탈했다. 결국 레몽은 황제에게 무릎을 꿇었고, 요안니스는 무슬림의 영토를 정복하여 그의 새 영지로 줄 것을 약속하는 대신 안티오키아를 제국령으로 회수했다. 이후 제국군은 안티오키아 공국군에 성전 기사단까지 합류시킨 후 샤이자르 공방전을 치렀지만, 제국이 레반트 일대에 세력을 떨치는 것을 원하지 않은 라틴 기사들이 의도적으로 공성전을 회피한 탓에 지지부진했다.

그러다 요안니스 2세가 샤이자르 에미르와 타협하여 기독교도인과 성 십자가의 조각을 넘겨받고 공물을 매년 받는 대신 샤이자르를 계속 다스리도록 허용하자, 레몽은 자기가 다스릴 영지가 없게 된 것에 분노해 황제가 안티오키아 성내에서 소규모 주둔군과 함께 휴식하는 사이 주민들을 선동해 폭동을 일으켰다. 자칫하면 안티오키아에서 목숨을 잃을 처지에 놓이자, 황제는 어쩔 수 없이 레몽이 안티오키아에서 자치권을 누리는 걸 받아들이고 귀국했다.

레몽은 이후에도 제국을 상대로 도발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1142년, 제국에 편입된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에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했으며, 키프로스 일대에서 해적질을 벌였다. 요안니스 2세는 친서를 보내 약탈을 중지할 것을 명했으나, 레몽은 "그리스 황제"를 운운하며 묵살했다. 이에 요안니스 2세는 5만 대군을 동원하여 다시 안티오키아로 쳐들어갔지만, 도중에 전염병이 창궐해 원정에 함께 했던 장남 알렉시오스와 차남 안드로니코스가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고, 킬리키아에 잠시 주둔했을 때 사냥 도중에 독이 발라진 화살촉에 손을 찔려버리는 바람에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요안니스 2세로부터 차기 황제로 지명받은 마누일 1세는 즉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다. 이후 레몽은 이슬람 세계에서 지하드의 물결이 거세게 일렁이는 상황에서 동로마 제국과 갈등을 벌이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판단해 1144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찾아가 마누일 1세에게 무릎을 꿇고 봉신이 되었다.

1149년 레몽이 사망한 후 아내 콩스탕스가 안티오키아 단독 여공이 되었다. 그녀는 르노 드 샤티용과 결혼해 안티오키아를 실질적으로 이끌도록 했다. 그러나 르노는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로부터 돈을 뜯어내고 동로마 제국이 약속한 자금을 지원해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쟁을 선포한 뒤 키프로스를 약탈했다. 마누일 1세는 르노의 행각에 분노하여 1158년 겨울 4~5만 대군을 이끌고 안티오키아로 진군해 주변 일대를 초토화했다. 르노는 신민들과 다른 십자군 국가들에게 함께 저항하자고 설득했으나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자 결국 항복했다.

1159년 4월 안티오키아에 입성한 마누일은 르노를 용서하는 대신 안티오키아를 제국의 봉신으로 삼고 안티오키아 교회를 정교회 산하로 편입했다. 이후 르노가 무슬림과의 전투 도중 포로 신세가 되어버리자, 콩스탕스는 샤티옹의 레이날드와 재혼하는 한편 제국의 보호를 확실히 받기 위해 레몽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안티오키아의 마리아를 마누일 1세에게 시집보냈다.

6. 마누일 1세의 남이탈리아 원정

로베르 기스카르가 남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석권한 이래, 그의 후손인 오트빌 가문 시칠리아 왕국을 수립하고 그 일대를 다스렸다. 그들은 대대로 동로마 제국에 적대적이었으며, 서유럽 국가들에 "저들은 기독교도가 아니라 이단이다", "순박한 기독교도들을 무슬림들에게 팔아넘기고 있다", "겉으로는 점잖은 체 하지만 속으로는 음험한 음모를 꾸미는 족속이다" 등 동로마 제국에 대한 악성 선전을 벌이면서 힘을 합쳐 정벌하자고 주장했다.

1147년,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 2차 십자군이 발칸 반도를 통과하는 동안 벌어질 부작용을 최소화하고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는 제국군을 대거 동원해 십자군이 지나가는 경로 주변에 배치시켜서 십자군을 통제하게 했다. 이로 인해 아드리아 해 방위가 상대적으로 허술해지자, 시칠리아 왕 루지에로 2세는 이 기회를 틈타 코르푸를 기습 공략하고 이어서 테베와 코린트를 약탈했다. 하필이면 쿠만족 다뉴브 강을 넘어 쳐들어오는 걸 막아야 했기도 했기에, 마누일 1세는 시칠리아군의 공격에 곧바로 대처할 수 없었다.

1149년, 마누일 1세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원에 힘입어 코르푸를 탈환했다. 그 후 시칠리아 왕국을 응징하고 이참에 남부 이탈리아를 탈환하기 위한 원정을 준비했다. 마침 1154년 2월 루지에로 2세가 사망하면서 시칠리아 왕국이 어수선해지자, 그는 원정을 단행할 호기라고 여기고 주변 국가들과 현지 주민 포섭에 나섰다. 우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게 선왕 콘라트 3세와 맺었던 협약을 상기시키며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남이탈리아 현지의 귀족 및 시민들과 접촉해 막대한 금을 뿌려 충성을 맹세받았고, 교황청에도 접근해 "야만스러운 노르만인보다는 로마인을 곁에 두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라며 협조를 잘해준다면 차후에 교황령을 지킬 병력 모집에 필요한 군자금을 지원하는 등 많은 선물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포섭에 공을 들인 그는 1155년 마누일 팔레올로고스와 요안니스 두카스에게 서방 전선에서 차출한 군대를 맡겨 아풀리아에 상륙하도록 명령했다. 군대 운송은 베네치아 공화국이 맡았으며, 현지 주민들도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노르만족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기에 호응했다. 원정군은 옛 총독부가 있었던 바리에 입성하고 노르만인들이 세웠던 주변 성채들을 모조리 허물었다. 뒤이어 트라니, 지오비나초, 안드리아, 타란토, 브린디시가 잇따라 동로마군에 넘어갔다. 시칠리아 왕 기욤 1세는 2,000명의 노르만 기사를 포함한 군대를 파견해 이들을 막게 했으나 격퇴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다. 먼저, 기대했던 신성 로마 제국의 지원이 좀처럼 오지 않았다. 사실 프리드리히 1세는 북이탈리아를 통제하는 데 사활을 걸고 있었는데, 또다른 제국이 남이탈리아에 진출한다면 북이탈리아를 통제하기 힘들어진다고 여기고 병력을 보내주지 않기로 했다. 게다가 원정군 총사령관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는 현지 귀족들에게 고압적으로 일관해 반감을 샀다. 이에 로리텔로 백작 로베르 2세는 그를 경질하지 않는다면 협조하지 않겠다고 경고했고, 마누일 1세는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를 소환했다.

그러나 미하일 팔레올로고스가 고압적이기는 했지만 군략은 뛰어난 장군이었던 반면, 요안니스 두카스는 범용한 인물일 뿐이었다. 굴리에모 1세는 12,000명의 보병과 5천 기사대를 소집한 뒤 1156년 봄 아풀리아의 동로마군과 반란군을 상대로 여러 전투에서 격파했다. 이후 시칠리아군이 육상과 해상에서 압박을 가하면서 급료 마련이 어려워졌다. 동로마 용병들은 급료 지급이 미뤄지자 "당장 금을 달라"고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이탈해버렸다. 이로 인해 동로마군의 전력이 크게 줄어들자, 현지 귀족과 시민들은 실망해 동로마군에 등을 돌렸다.

1158년, 황제는 알렉시오스 악수흐를 안코나로 보내 제국군을 지원하게 했다. 그러나 그의 가세에도 불구하고 전세는 바뀌지 않았고, 동로마군은 속절없이 밀린 끝에 브린디시에서 최종적으로 떠났다. 굴리에모 1세는 반란의 씨앗을 자르기 위해 반란군 잔당을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그리하여 동로마 제국의 침공을 물리치긴 했지만, 굴리에모 1세는 동로마 제국이 작심하고 대군을 동원해 또다시 쳐들어오면 승산이 희박하다고 판단하고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시칠리아는 아드리아 해 건너편 일리리아 해안을 공격하지 않으며 안코나가 제국의 영역으로 편입되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 대신 동로마 제국은 시칠리아 왕국의 주권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이 정도 성과는 원정에 들어간 엄청난 비용[1]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다.

마누일 1세는 프리드리히 1세가 막대한 돈을 받아먹고 협조를 약속했으면서 정작 군대를 보내주지 않은 것에 반감을 품었고, 이탈리아를 제국령으로 편입하려는 그의 야심에 경각심을 가졌다. 이에 따라 프리드리히 1세에 대항하는 구엘프당에 자금을 대폭 지원하고 일부 병력을 보내줬으며, 신성 로마 제국군에 의해 파괴된 밀라노 성벽 복구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그 결과, 구엘프당은 1176년 5월 29일 레냐노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1세를 물리쳤고, 프리드리히 1세는 이탈리아 병합 시도를 단념했다.

7. 1185년 시칠리아 왕국의 발칸 침공

1183년 9월 안드로니코스 1세가 어린 황제 알렉시오스 2세를 시해하고 황위를 찬탈했다. 그는 제위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정적을 처단하고 반란이 일어난 지역을 철저히 파괴하고 주민들을 학살하는 등 폭정을 일삼았다. 이에 각지에서 그에게 반감을 품은 이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동로마 제국에 예속되었던 나라들은 이 때를 틈타 독립했으며, 헝가리 왕국의 국왕 벨라 3세는 자신의 처제이자 알렉시오스 2세의 모후였던 안티오키아의 마리아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다뉴브 강을 넘어 제국의 북방 도시 몇 곳을 공략했으며, 룸 술탄국도 제국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아나톨리아 내륙 지역을 갉아먹었다.

당시 시칠리아 왕국의 국왕 굴리에모 2세는 이러한 상황을 보고 지금이야말로 오랜 숙원을 달성할 때라고 여겼다. 1184-1185년 겨울, 굴리에모 2세는 메시나에 육군과 합대를 집결시킨 뒤 함대 지휘권을 사촌 탕그레디에게, 육군 지휘권을 아케라 백작 리카르도와 볼드윈에게 맡겼다. 1185년 6월 11일, 메시나에서 출항한 시칠리아 함대는 그해 6월 24일 발칸 반도의 아드리아 해 인근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도시인 디라히온에 진입했다. 100여년 전 로베르 기스카르가 발칸 원정을 감행했을 때 디라히온에서 오랜 공성전을 치러야 했지만, 이번에는 안드로니코스 1세에게 반감을 품은 수비대와 주민들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도 않고 항복하면서 무혈 입성할 수 있었다. 그 후 시칠리아군은 적의 미약한 저항을 물리치며 동진한 끝에 8월 6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이어 제국 제2의 도시인 테살로니카를 육상에서 포위했고 8월 15일 시칠리아 함대가 해상을 봉쇄했다.

당시 테살로니카엔 안드로니코스 1세의 친척이었던 다비트 콤니노스가 4개 부대를 이끌고 주둔하고 있었다. 다비트는 성벽을 보수하고 병사들에게 보너스를 지급하는 등 어떻게든 도시를 지키려 애썼지만, 안드로니코스 1세를 위해 싸울 마음이 없던 3개 부대가 8월 24일 항복해버리는 바람에 나머지 1개 부대만 챙기고 도주했다. 시칠리아군은 테살로니카에 입성한 뒤 1182년 4월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벌어진 라틴인 학살에 보복하겠다며 테살로니카 시민 8,000여 명을 학살하고 건물들을 모조리 파괴했다.

테살로니카를 공략한 뒤, 시칠리아군은 3부대로 나뉘었다. 한 부대는 테살로니카 수비를 맡았고, 한 부대는 세레스로 진군했으며, 가장 많은 병력을 보유한 부대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다. 한편, 테살로니카가 파괴되었다는 소식에 분노한 안드로니코스 1세는 다비트 콤니노스를 투옥한 뒤 반격에 착수했다. 하지만 한 사람에게 대군을 맡겼다가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눌 것을 우려해 아들 요안니스와 테오도로스, 장군 안드로니코스 팔레올로고스와 알렉시오스 브라나스, 그리고 내시 니키포로스에게 각각 한 부대씩 맡겨 시칠리아군을 저지하게 했다. 그러나 다섯 지휘관들 중 누가 우선적으로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를 명확히 정하지 않았기에 지휘체계가 문란해졌고, 결국 동로마군은 연전연패했다.

시칠리아군은 연전연승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접근하자, 안드로니코스 1세는 스테파노스 하기오크리스토포리테스에게 적과 내통할 지도 모르는 인사들을 모조리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히기오크리스토포리테스가 명령에 따라 여러 인사를 잡아 처형하고 있을 때, 이사키오스 앙겔로스가 자신을 잡으러온 하기오크리스토포리테스를 우발적으로 죽이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사키오스는 아야 소피아로 피신한 뒤 시민들에게 호소했고, 안드로니코스 1세의 폭정에 반감을 품고 있던 시민들이 그를 황제로 추대하고 황궁을 향해 진격했다. 대세를 읽은 수도 방위군과 근위대는 폭동 진압을 거부하고 안드로니코스 1세를 체포했다. 안드로니코스는 폐위된 후 시내로 끌려가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이리하여 새 황제가 된 이사키오스 2세 알렉시오스 브라나스를 제국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남은 병력을 지원군으로 편성해 합류시키면서 군대를 독려했다. 브라나스는 군대를 재정비한 뒤, 거듭된 승리에 자만하고 있던 시칠리아군을 요격하여 트라키아의 모시노폴리스에서 격파하고 마케도니아까지 추격했다. 시칠리아군은 암피폴리스로 물러난 뒤 브라나스에게 평화 협상을 제안했다. 하지만 브라나스는 이를 무시하고 재차 총공격을 가했고, 시칠리아군은 괴멸되어 상당수가 스트리온 강에 익사했고, 소수가 간신히 산맥을 넘어 이피로스 지역으로 도망쳤다가 이탈리아로 달아났다. 여기에 육군 지휘관 리카르도와 볼드윈은 사로잡혔고, 해군 지휘관 탕그레디만이 무사히 탈출했다. 이리하여 시칠리아 왕국의 야심찬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8. 이후

안드로니코스 1세의 폭정을 틈타 감행했던 원정이 허망하게 실패한 지 4년 후인 1189년 11월 18일, 굴리에모 2세는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뒤이어 왕위에 오른 탕크레드 제3차 십자군 원정을 감행한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가 시칠리아에 진입하여 자신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 메시나를 파괴한 사건 처리에 골머리를 앓아야 했고, 신성 로마 제국의 남이탈리아 공략을 저지해야 했다. 그러다 1194년 2월 20일 팔레르모에서 역시 후계자를 두지 못한 채 사망했고, 시칠리아 왕위는 호엔슈타우펜 왕조 하인리히 6세에게 넘어갔다.

시칠리아 왕국의 침공을 격퇴한 동로마 제국 역시 사정이 좋지 않았다. 이사키오스 2세는 시칠리아 왕국과의 전쟁에 투입할 국방비를 마련하기 위해 불가리아에 무거운 세금을 매기고 장정들을 징집했으며, 심지어 새로 황후를 맞아들인 뒤 결혼 축의금을 마련하라는 명분으로 특별세를 부과했다. 이에 타르노보 인근에 사유지를 경영하고 있던 토도르와 아센 형제는 1185년 킵셀라에 있던 이사키오스 2세에게 세금 경감과 자치권, 그리고 세금을 내는 데 필요한 수도원 수입을 받기 위해 하이모스 산 근교의 토지를 하사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요청은 거부당했고, 황제의 삼촌인 요안니스 두카스는 아센의 얼굴을 때리며 요구가 너무 무례하다고 꾸짖었다. 이에 두 사람은 동료들을 설득하여 1185년 여름 반란을 일으켰고, 제국은 이로 인해 쇠락의 길을 걸어갔다.


[1]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에 따르면, 216만 전의 금화를 이 원정에서 소모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