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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2106><colcolor=#FFF> 시칠리아 왕국 아우타빌라 왕조 초대 국왕 루제루 2세 Ruggeru 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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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 |
루제루 2세 (Ruggeru II) |
출생 |
1095년
12월 22일 칼라브리아 밀레토스 |
사망 |
1154년
2월 26일 (향년 58세) 시칠리아 왕국 팔레르모 |
재위 | 시칠리아 백국의 백작 |
1105년 ~ 1130년 9월 27일 | |
시칠리아 왕국의 왕 | |
1130년 9월 27일 ~ 1154년 2월 26일 | |
배우자 | 카스티야의 엘비라 (1117년 결혼 / 1135년 사망) |
부르고뉴의 시빌 (1150년 결혼 / 1150년 사망) | |
레텔의 베아트리스 (1151년 결혼) | |
자녀 | 루제루 3세, 탕크레디, 알폰소, 구기에르무 1세, 쿠스탄차 1세, 시모네(사생아) |
아버지 | 시칠리아 백작 루제루 1세 |
어머니 | 아델라이데 델 바스토 |
형제 | 시모네, 막시밀라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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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칠리아 3대 백작, 아풀리아 공작, 시칠리아 왕국 초대 국왕. 남부 이탈리아 귀족들의 수많은 반란과 신성 로마 제국- 교황청의 방해 공작을 극복하고 왕국의 전성기를 이끈 명군이다.2. 생애
1095년 12월 22일 시칠리아 백국 밀레토에서 시칠리아 초대 백작 루제루 1세와 서 리구리아 후작 보니파시오 델 바스토의 형제인 만프레디 델 바스토의 딸 아델라시아 델 바스토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으로 시모네가 있었고, 누이로 독일왕 콘라트[1]와 결혼한 막시밀라가 있었다. 그는 학식이 풍부한 그리스 학자와 아랍 학자들에게 교육을 받았고, 노르만어, 프랑스어, 아랍어, 그리스어, 이탈리아어를 익혔다. 그는 호기심이 많아 가능한 한 많은 지식을 알고자 노력했고, 언어, 예술, 과학에 타고난 능력을 발휘했다.1101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형 시모네가 시칠리아 백작에 올랐고 어머니 아델라시가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시모네는 4년만인 1105년에 요절했고, 그가 뒤이어 백작에 올라 어머니의 섭정을 받았다. 1110년 여름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노르웨이 왕이자 십자군 참가자 시구르 1세와 접견했다. 1112년 시칠리아의 수도가 밀레토에서 팔레르모로 이전했을 때 왕실 일가와 함께 팔레르모로 이동했고,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의 기사라고 칭하며 본격적으로 통치를 시작했다.
1122년 아풀리아 공작이자 사촌인 굴리에모 2세가 민심의 이반과 재정 악화로 인해 곤란을 겪자, 루지에로 2세는 병력과 자금을 지원해주는 대가로 아풀리아 공국과 시칠리아 백국의 공동 소유로 되어있던 팔레르모와 메시나를 시칠리아 백국이 완전 소유하는 것으로 변경하고 칼라브리아 일대를 온전히 차지하는 것을 용인하게 했다. 1125년에 굴리에모 2세가 재정 지원을 재차 요청하자, 그는 이를 받아들이는 대가로 당시 자녀가 없던 굴리에모 2세의 상속인으로 인정받았다.
1127년 7월 25일 굴리에모 2세가 사망하자, 그는 곧바로 자신의 상속권을 주장했다. 그런데 굴리에모 2세는 죽기 전에 다른 사촌인 안티오키아 공국의 보에몽 2세와 교황 호노리오 2세에게 아풀리아 공국의 상속권을 약속했다. 보에몽 2세는 안티오키아에서 아랍인의 공격에 대처해야 했기에 아풀리아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지만, 교황 호노리오 2세는 루지에로가 기예르모의 영지를 상속받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아풀리아 귀족들에게 교황의 종주권을 인정하라는 서한을 보냈다.
루지에로는 자신이 아풀리아 영지를 상속받는 것을 기정사실로 삼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아풀리아의 수도인 살레르노 성벽에 이르렀다. 살레르노는 처음에 그를 공작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지만, 루지에로가 자유시로 인정해주고 세금 특혜를 약속하는 등 여러 조건을 내걸자 비로소 받아들였다. 여기에 이복 누이 마틸다의 남편이자 알리페 남작인 라눌프 2세에게 아리아노 백작의 영토 일부를 가지게 해 자기 편으로 회유했다. 다른 대도시 및 남작들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회유되었고, 루지에로 2세는 1127년 말에서 1128년 초에 아풀리아 공작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루지에로가 시칠리아로 돌아간 뒤, 호노리오 2세는 트로이아 시, 알리페의 라눌프 2세, 카푸아의 로베르토 2세 및 여러 영주들을 포섭하여 반 시칠리아 동맹을 맺은 뒤 루지에로를 파문했다. 1128년 5월, 루지에로는 남부 이탈리아로 재차 진군해 아풀리아에 도착한 뒤 그해 7월 교황군과 브라다노에서 대치했다. 그는 교황과 섣불리 전투를 벌이는 대신 협상을 택했고, 양측은 2개월간 대치하며 사절을 교환했다. 호노리오 2세는 처음에는 강경한 입장을 내비쳤지만, 교황을 따르던 영주들이 점차 서로 다투었고 용병들도 전쟁을 지속하기를 거부하자, 마음을 바꿔 협상에 응했다.
1128년 8월 22일, 교황은 베네벤토에서 루지에로를 아풀리아 공작으로 인정했다. 루지에로는 교황에게 봉신 서약을 하고 베네벤토가 교황에게 속해 있으며 카푸아의 독립적인 지위를 인정하겠다고 밝혔다. 1129년, 루지에로는 여전히 자신에게 반항하는 남작들을 성공적으로 복종시켰다. 라눌프 2세가 트로이아를 소유하는 것을 허용하는 대신 충성 서약을 받아냈고, 로베르토 2세를 자신의 가신으로 인정했다. 1129년, 멜피에 아풀리아의 고위 성직자들과 남작들을 집결시킨 뒤 자신과 아들들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
1130년 2월 14일, 호노리오 2세가 선종했다. 그 후 교황청은 2명의 교황 인노첸시오 2세, 아나클레토 2세로 분열되었다. 인노첸시오 2세는 아나클레토 2세를 추종하는 세력에 밀려 로마를 떠나야 했지만, 대부분의 유럽 군주가 그를 지지했다. 로마를 통제했지만 외부 세력으로부터 별다른 지지를 받지 못한 아나클레토 2세는 루지에로에게 자신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이 때를 틈타 아나클레토 2세에게 자신을 시칠리아 국왕으로 인정하고 대관식을 치러준다면 교황으로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
1130년 9월 27일, 아나클레토 2세는 루지에로 2세와 그의 후손에게 시칠리아, 아풀리아, 칼라브리아에 대한 왕권을 인정하겠다고 선포했고, 루지에로 2세는 살레르노에서 열린 남부 이탈리아 남작들의 대규모 회의에서 자신을 왕으로 받들겠다는 맹세를 받아냈다. 1130년 12월 25일, 아나클레토 2세의 사절인 코스마스 추기경은 팔레르모 대성당에서 루지에로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고, 카푸아의 로베르토 추기경은 그의 머리에 왕관을 씌웠다. 이리하여 시칠리아 왕국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2]
그러나 시칠리아 왕국의 등장은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노르만 남작들과 남부 이탈리아 자유 도시들은 강력한 군주가 등장해 자신들을 통제하는 상황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남부 이탈리아를 자신들의 영토로 여기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3세와 동로마 제국의 요안니스 2세 역시 그를 왕으로 인정할 수 없었고, 인노첸시오 2세를 지지하던 유럽 국왕들은 대립교황 아나클레토 2세로부터 왕관을 받은 새 왕을 인정하지 않았다.
1131년, 콘베르사노의 탕크레드와 바리의 그리말디가 루지에로에게 반란을 일으켜 브린디시를 공략했다. 여기에 라눌프 2세의 형제인 아벨리노 백작 리카르도도 독립을 선포했다. 1132년 3월, 루지에로는 다시 이탈리아로 출진해 2달만에 반란을 진압했다. 아벨리노는 왕실 직할지로 들어갔고, 왕실 수비대는 바리에 주둔했다. 그리말디와 그의 가족은 포로로 잡혀 시칠리아에 보내졌고, 탕크레드는 예루살렘으로 떠나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반란이 벌어지는 동안 반란에 동조하지 않았지만 왕을 도우려는 움직임을 보이지도 않았던 카푸아의 로베르토 2세와 알리페의 라눌프 2세는 아나클레토 2세를 지원하라는 명을 받고 로마에 파견되었다.
1132년 5월, 루지에로는 또다시 반란에 직면했다. 라눌프 2세의 아내이자 루지에로의 이복 누이인 마틸다가 시칠리아로 도망쳐서 남편이 자신을 심하게 학대하고 있으니 보호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소식을 접한 라눌프 2세는 로마를 떠나 알리페로 귀환한 뒤 아내를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요청이 거부당하자, 라눌프 2세는 역시 카푸아로 돌아온 로베르토 2세와 동맹을 맺고 반기를 들었다. 루지에로는 반군을 토벌하기 위해 출진했지만, 도중에 베네벤토 시가 반군 편에 서는 바람에 보급로가 끊기자 카푸아에서 두번째로 중요한 도시인 노세라로 후퇴했다. 1132년 7월 24일, 반란군은 루지에로의 시칠리아군을 대파했고, 루지에로는 4명의 군인과 함께 전장에서 탈출했다. 루지에로가 참패를 면치 못하고 시칠리아로 달아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아풀리아 전역이 반란에 가담했다.
한편, 로타르 3세는 인노첸시오 2세를 교황에 올리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이탈리아 원정을 단행했다. 1133년 4월 30일, 로타르 3세와 인노첸시오 2세는 로마에 도착한 뒤 아나클레토 2세가 농성하고 있는 산탄젤로 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산탄젤로 성은 좀처럼 함락되지 않았고,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입성하려던 계획 역시 아나클레토 2세의 추종자들이 결사적으로 막는 바람에 실패했다. 로타르 3세는 1133년 6월 4일 라테라노의 산 조반니 교회에서 인노첸시오 2세에 의해 제관을 썼지만, 식량과 자금이 바닥나서 원정을 지속하기 어렵게 되자 독일로 철수했다. 인노첸시오 2세 역시 황제를 따라 피사로 도주했다.
황제가 로마에서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루지에로는 시칠리아 무슬림으로 구성된 새 병력을 이끌고 다시 이탈리아 본토로 진군했다. 그는 반역을 일으킨 도시들을 파괴하고 여러 남작을 처형했고, 신성 로마 제국의 후원을 받을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남작들은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했다. 1134년 아풀리아 지배권을 회복한 루지에로는 피사로 도망친 로베르트 2세가 소유하던 카푸아를 왕실의 소유로 삼았다. 라눌프 2세와 나폴리 공작 세르지오 7세는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용서를 받았다. 루지에로는 자신의 권력이 불가침임을 현지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세 아들 루지에로 3세, 탕크레드, 그리고 알폰소를 각각 아풀리아, 바리, 카푸아 공작에 선임했다.
1135년 초, 루지에로는 중병에 걸렸다. 급기야 그가 사망했다는 헛소문이 남부 이탈리아에 확산되자, 또다시 반란의 조짐이 일었다. 1135년 4월, 카푸아의 로베르토 2세는 피사 함대와 함께 나폴리에 도착했고, 나폴리 공작 세르지오 7세는 로베르토와 손을 잡았다. 알리페의 라눌프 2세 역시 로베르토 2세와 연합해 시칠리아에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힘을 합쳐 카푸아를 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루지에로가 군대를 이끌고 반격을 가하자, 로베르토와 세르지오는 나폴리로 후퇴했고, 라눌프는 아베르사에서 시칠리아군을 막으려 했지만 패배를 면치 못하자 역시 나폴리로 철수했다.
루지에로는 아베르사를 파괴한 뒤 육상과 바다에서 나폴리를 포위 공격했다. 반군은 교황 이노첸시오 2세와 황제 로타르 3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1137년 2월, 로타르 3세는 군대를 이끌고 볼로냐에 입성한 뒤 군대를 둘로 나누었다. 황제 본인은 인노첸시오 2세와 함께 아드리아 해안을 따라 남하했고, 사위인 하인리히는 토스카나와 교황령을 거쳐 나폴리로 진군한 뒤 바리에서 로타르 3세와 합세하기로 했다. 로타르 3세는 신속하게 진군했고, 하인리히는 로마를 해방시키는 데 실패했지만 베네벤토와 몬테 카시노를 복속시켰다.
신성 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던 루지에로는 시칠리아로 철수했고, 카푸아의 로베르토는 제국군의 지원에 힘입어 카푸아를 탈환한 뒤 피사 함대와 함께 살레르노를 포위했다. 1137년 5월, 로타르 3세와 하인리히의 군대가 바리에서 합세한 뒤 칼라브리아와 시칠리아로 진격하려 했다. 그러나 독일 가신들이 귀국을 강하게 요구하는 바람에 더 이상 원정을 이어가지 못했고, 1137년 8월 라눌프 2세를 아풀리아 공작으로 승격시킨 뒤 이탈리아에서 철수했다.
제국군이 이탈리아를 떠난 후, 전력을 재정비한 루지에로 2세는 1137년 10월 반격에 착수했다. 카푸아는 시칠리아군에 재차 넘어갔고, 로베르토는 다시 도주했다. 나폴리 공작 세르지오 7세는 루지에로에게 또다시 충성을 서약한 뒤 리그나노에서 반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루지에로는 나폴리를 왕실 직할지로 삼고 군대를 주둔시켜서 그곳을 확고히 통제했다. 이제 남은 상대는 알리페의 라눌프 2세였다. 1137년 10월 30일, 루지에로는 리기아노에서 라눌프 2세와 맞붙어 패배했지만, 남작들의 충성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1137년 12월 4일, 루지에로를 계속 훼방놓던 로타르 3세가 사망했다. 그리고 1138년 1월 25일에는 아나클레토 2세가 사망했고 인노첸시오 2세가 단독 교황이 되었다. 인노첸시오 2세는 로마에 입성한 뒤 제2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루지에로 2세와 그의 아들들을 파문했다. 1139년 4월 30일 라눌프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리하여 루지에로 2세를 대항할 유력한 귀족은 아무도 없게 되었고, 루지에로 2세의 권위는 트로이아와 바리를 제외한 남부 이탈리아 전역에서 인정받았다.
루지에로 2세는 자신을 파문에 처한 교황을 응징하고자 로마로 진군했다. 1139년 7월 22일, 교황군은 갈루치오 전투에서 시칠리아군에게 패배했고 인노첸시오 2세는 포로로 잡혔다. 1139년 7월 25일, 인노첸시오 2세는 루지에로를 이탈리아의 왕으로 인정했고, 그의 장남 루지에로를 아풀리아 공작으로, 삼남 알폰소를 카푸아 공작으로 인정했다. 그 대신, 루지에로는 시칠리아 왕국에 대한 교황청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그리하여 교황청과 화해한 루지에로 2세는 마지막까지 저항을 이어가는 반란군 토벌에 착수했다. 먼저 트로이아를 포위 공격한 끝에 항복을 받아낸 뒤 그곳에 묻혀 있던 라눌프 2세의 유해를 끌어낸 뒤 도랑에 던졌다. 하지만 장남 루지에로가 "기독교도로서 망자에게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간절히 설득하자, 그는 마음을 바꿔 라눌프 2세의 유해를 재매장했다. 이후 바리를 공략하고 바리 공작과 고문들을 교수형에 처하고 많은 주민들을 실명시킨 뒤 지하 감옥에 수감했다. 이로써 카푸아, 나폴리, 바리 등 그동안 자체적으로 통치를 행사하던 공국들은 청산되었고, 대부분의 도시는 자치권을 상실했으며, 시칠리아 왕국은 시칠리아를 넘어 남부 이탈리아 전역을 직접적으로 통치했다.
루지에로는 아버지 루제루 1세의 종교 관용 정책을 그대로 이행했다. 가톨릭, 정교회, 이슬람교는 그의 왕국에서 동일한 권리를 누렸다. 루지에로는 라틴 수도원과 그리스 수도원을 동등하게 후원했으며, 정교회 신자들은 공식적으로는 라틴 수도자들에게 복종하면서도 정교회 방식의 의식을 고수할 수 있었다. 무슬림들 역시 모스크에서 종교 의식을 거행할 수 있었고, 기독교인과 동등한 조건으로 국가 행정 직책을 맡았으며, 시칠리아 군대의 핵심 전력으로서 활약했다. 특히 무역 관세와 세금 징수는 무슬림 관료들이 전문적으로 맡았다. 형사 재판은 각지를 순회하는 재판관에 의해 수행되었는데, 기독교인과 무슬림을 포함한 지역 주민 중에서 배심원을 뽑아서 판결을 심의했다.
루지에로는 무슬림과 그리스인들의 전통적인 토지 소유권을 인정했다. 그 결과, 시칠리아 왕국은 다양한 형태의 토지 보유와 불완전한 봉건제의 특성을 지녔다. 노르만 기사들은 영주로 군림하기는 했지만 종종 농노를 거느리는 대신 자유민들에게 토지를 임대하는 형태를 띄었다. 왕 역시 왕권이 제약을 받을 게 뻔한 봉건제의 형성을 막는 정책을 추구했다. 영주가 기사에게 토지를 양도하려면 왕의 승인을 반드시 받아야 했는데, 오직 왕에 대한 충성과 충돌하지 않는 경우에만 허락받았다. 이리하여 대부분의 시칠리아 기사들은 왕에게 직접 의존해야 했고, 대귀족이 대규모 사병을 거느릴 기회가 박탈되었다. 루지에로는 이에 더해 이웃 지중해 국가들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상당한 함대를 건설하고 유지 및 관리했다.
1140년 7월, 루지에로는 소위 <아리아노 법령(Assizes of Ariano)>으로 일컬어지는 법전을 반포했다. 이 법전은 당시 시칠리아 왕국에 종속된 모든 민족의 고유 법전의 효력을 왕실 법령과 상충하지 않는 선에서 인정했다. 또한 신성한 권위를 지닌 왕만이 법을 만들고 폐지하고 해석할 권리가 있다고 밝혔으며, 왕의 뜻을 따르지 않거나 반대하는 것은 신성 모독이자 반역으로 간주했다. 왕족에 대한 범죄와 음모는 반역일 뿐만 아니라 왕국의 모든 민족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되었다. 전투에서의 비겁함, 왕이나 그의 동맹의 군대 지원 거부 역시 반역으로 취급되었다. 당시에 반역죄를 이 정도로 광범위하게 적용하는 나라는 오직 시칠리아 왕국 뿐이었다.
지중해 중심에 위치한 시칠리아는 그의 치세에 유럽, 북아프리카, 중동과의 활발한 무역 거래를 수행했다. 주요 수출 품목은 듀럼밀이었고, 치즈와 덩굴 과일 등 식용품들도 수출되었다. 시칠리아 상인들은 강력한 해군과 왕의 후원에 힘입어 지중해 전역을 돌며 무역을 수행했고, 자연히 국내 시장과 산업 역시 갈수록 발전했다. 루지에로는 왕국에서만 쓰이는 동전인 두칼레(ducale)를 도입하기도 했다. 이 동전에서, 왕은 'REX' 칭호로 일컬어졌다. 이 새로운 동전은 장거리 무역을 더 쉽게 만들었지만, 자신들을 짓밟은 루지에로에게 반감을 품은 이탈리아인들이 그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을 사용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이탈리아 내 무역에는 잘 쓰이지 않다가 1150년대 이후에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그리스인과 아랍인 교사의 가르침을 받았던 루지에로는 동시대의 유럽 군주들과 많은 면에서 달랐다. 그는 아랍어와 그리스를 훌륭하게 구사할 수 있었고, 아랍과 유럽 세계의 많은 철학자, 수학자, 지리학자, 의사를 팔레르모로 초빙해 시간이 남을 때마다 그들과 담화를 나누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루지에로의 절친한 친구였고 루지에로의 요청에 따라 지리 정보를 수집하고 체계화하는 위원회를 이끌었던 알 이드리시였다. 이드리시는 위원회 활동을 통해 대항해 시대 이전 주요 지리서로 취급된 <루지에로의 책>을 발간했다. 그는 루지에로 2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수학 및 정치 영역에 대한 그의 지식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했다. 과학에 대한 그의 지식 역시 무궁무진했으며, 모든 세부 사항을 깊이있고 현명하게 연구했다. 그는 어떤 주권자도 이전에 만든 적이 없는 놀라운 발견을 이뤘고, 놀라운 발명품을 소유했다."
루지에로 2세 치하에서, 시칠리아는 그리스어와 아랍어로 이뤄진 과학과 철학 연구가 동시에 수행되는 독특한 장소로 각광받았다. 또한 그는 예술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의 시대에 세파루 대성당이 건설되었고, 로마네스크와 그리스 모자이크, 아랍식 예술이 혼합된 산 조반니 델리 에레미티(San Giovanni degli Eremiti) 수도원과 팔레르모의 팔라티노 예배당도 세워졌다. 그의 대관식이 거행된 마르토라나 교회는 루지에로 2세의 수석 장관이자 시리아 정교회 수사였던 안티오키아의 게오르기오스의 후원으로 건설되었다. 이 교회의 모자이크에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왕관을 전달받는 장면이 그려졌다.
루지에로 2세의 어머니 아델라시아 델 바스토는 1112년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보두앵 1세와 결혼했다. 이때 맺은 협약에 따르면, 이전의 결혼에서 자녀를 얻지 못한 보두앵 1세가 아델라시아와의 사이에서도 자식을 끝내 얻지 못한다면 루지에로가 예루살렘 왕국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보두앵이 이전에 맺었던 결혼을 끝맺지 않고 아들라시아와 결혼했던 사실이 드러나면서, 두 사람의 결혼은 1117년 무효화되었다. 아델라시아는 불명예를 안은 채 시칠리아로 돌아갔고, 지참금은 반환되지 않았다. 보두앵 1세가 사망한 후, 예루살렘 왕국은 보두앵 2세를 새 왕으로 세웠다. 어머니가 받은 모욕에 반감을 품고 예루살렘 왕국에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다.
1130년 안티오키아 공국을 다스리던 보에몽 2세가 사망하고 어린 딸 콩스탕스가 여공(女公)이 되었다. 그는 이 소식을 듣자 자신이 보에몽 2세의 가까운 친척이니 안티오키아 공국을 다스릴 권한이 있다고 주장했다. 1135년 푸아티에의 레몽이 콩스탕스와 결혼하고자 이탈리아를 거쳐 동방으로 향하자, 그를 중도에서 체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138년에는 안티오키아에서 로마로 향하던 라틴 총대주교를 억류하기도 했다. 안티오키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그의 태도는 안티오키아 공국의 주권자를 자처하던 동로마 황제의 반감을 샀고, 가뜩이나 로베르 기스카르 전쟁 이래 서로에게 안 좋은 감정을 품고 있던 동로마 제국과 시칠리아 왕국의 갈등은 고조되었다.
1145년 프랑스 국왕 루이 7세가 제2차 십자군 원정에 가담했다. 이때 루지에로는 십자군을 이용해 동로마 제국을 공략하기로 하고, 프랑스 십자군들을 팔레스타인까지 수송해주겠다고 제안했다. 프랑스 조정은 반 동로마 세력이 강했고 루이 7세에게 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을 권고했지만, 루이 7세는 부용의 고드프루아가 걸었던 육로를 선호해 루지에로의 제안을 거절했다. 루이 7세의 프랑스 군대는 1147년 6월 11일 프랑스를 떠나 10월 4일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부관들이 루지에로의 제안을 이제라도 받아들여 동로마를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었지만 루이 7세는 기독교 제국을 공격하는 것을 끝까지 거부했다.
1147년,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는 십자군이 발칸 반도를 통과하는 동안 벌어질 부작용을 최소화하고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는 제국군을 대거 동원해 십자군이 지나가는 경로 주변에 배치해서 십자군을 통제하게 했다. 이로 인해 아드리아 해 방위가 상대적으로 허술해지자, 루지에로는 이 기회를 틈타 코르푸를 기습 공략하고 이어서 테베와 코린트를 약탈했다. 하필이면 쿠만족이 다뉴브 강을 넘어 쳐들어오는 걸 막아야 했기도 했기에, 마누일 1세는 시칠리아군의 공격에 곧바로 대처할 수 없었다. 한편, 루지에로는 북아프리아 해안의 트리폴리, 가베스, 마디아, 수스, 스팍스 등 여러 도시를 공략했다. 이로써 시칠리아 함대는 지중해 중부를 완전히 장악했으며, 아프리카 내륙으로의 무역로가 이 도시들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아프리카 무역로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막대한 부를 챙겼다.
1149년, 마누일 1세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원에 힘입어 코르푸를 탈환했다. 그 후 시칠리아 왕국을 응징하고 남부 이탈리아를 탈환하기 위한 원정을 준비했다. 여기에 마누일 1세의 환대를 받고 동로마 제국에 긍정적인 입장이 된 데다 남부 이탈리아를 공략하고 싶었던 콘라트 3세가 마누일과 손을 잡았고, 에우제니오 3세도 반 시칠리아 정책을 추구했다. 1152년 콘라트 3세가 죽은 뒤 신성 로마 제국이 한동안 프리드리히 1세와 하인리히 사자공의 대립으로 인해 소란스러웠기 때문에, 당분간 그들의 침략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마누일 1세는 대규모 함대와 병력을 디라히온에 집결시키는 등 노골적으로 전쟁을 준비했다.
이렇듯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이 가시화되던 1154년 2월 26일, 루지에로 2세는 팔레르모에서 병사했다. 사후 유일하게 살아있던 아들 굴리에모 1세가 왕위에 올랐다.
3. 가족 관계
- 첫번째 아내: 카스티야의 엘비라(1100 ~ 1135):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6세의 딸.
- 루지에로(1118 ~ 1148): 아풀리아 공작.
- 탕크레드(1119 ~ 1138): 바리 공작.
- 알폰소(1120 ~ 1144): 카푸아 공작
- 굴리에모 1세(1120 또는 1121 ~ 1166): 시칠리아 2대 국왕.
- 엔리코: 유년기에 사망.
- 부르고뉴의 시빌라(1126 ~ 1150): 부르고뉴 공작 위그 2세의 딸. 1149년 루지에로 2세와 결혼했으나 이듬해 사산아를 낳은 직후 사망.
- 흐뗄의 베아트리체[3](1135 ~ 1185): 예루살렘 왕 보두앵 2세의 조카.
- 시모네( 사생아, ? ~ 1157): 타란토 공작
-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딸(사생아): 몬테스카글리오소 백작 로드리고 가르세스의 아내
-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딸(사생아): 나폴리 귀족 아담의 아내
- 클레멘사(사생아): 몰리세 백작 위그 2세의 아내
- 아델리사(사생아): 로레토 백작 조슬랭과 첫번째 결혼, 로리텔로 백작 로베르토와 두번째 결혼함.
- 마리나(사생아): 브린디시의 제독 마르가리투스의 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