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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tin I | ||
가문 | 바르셀로나 왕조 | |
출생 | 1356년 7월 25일 | |
아라곤 왕국 지로나 | ||
사망 | 1410년 5월 31일 (향년 53세) | |
아라곤 왕국 바르셀로나 | ||
재위 기간 |
아라곤 왕국 국왕 | 1396년 ~ 1410년 |
시칠리아 왕국 국왕 | 1409년 ~ 1410년 | |
아버지 | 페로 4세 | |
어머니 | 시칠리아의 엘레오노르 | |
형제자매 | 추안 1세, 엘레오노르, 알폰소 | |
배우자 | 루나의 마리아, 프라데스의 마르가리타 | |
자녀 | 마르티누 1세, 하이메, 후안, 마르가리타 | |
종교 | 로마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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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라곤 왕국 제16대 국왕, 시칠리아 왕국 제22대 국왕. 바르셀로나 왕조 최후의 국왕이다.아라곤 왕호는 '마르틴 1세', 시칠리아 왕호는 '마르티누 2세'이다. 아들 마르티누 1세와 이름이 똑같아서 아들쪽에 'el Joven(the Younger, 소(小))', 아버지쪽에 'el Viejo(the Elder, 대(大))'를 붙여서 구별하기도 한다.
2. 생애
1356년 7월 25일 아라곤 왕국의 지로나에서 아라곤 국왕 페드로 4세와 시칠리아 국왕 페트루 2세의 딸 엘레오노르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추안 1세, 엘레오노르, 알폰소가 있었다. 일찍이 베살루 백국을 물려받았고, 뒤이어 카마라사 후작에 임명되었다. 1372년 6월 13일 바르셀로나에서 루나 백작 로페스의 딸인 마리아와 결혼하여 마르틴, 하이메, 후안, 마르가리타를 낳았다. 이중 하이메와 후안은 요절했기에, 마르틴이 사실상 유일한 아들이었다.1378년, 페드로 4세의 맏아들이자 지로나 공작인 후안 왕자의 아내 마르타가 사망했다. 이에 카탈루냐 출신 시칠리아 귀족들은 마리아 여왕을 후안과 결혼시키자고 주장했다. 아라곤 왕국이 언제 시칠리아에 쳐들어올까 노심초사했던 다른 시칠리아 귀족들도 동의했고, 시칠리아 사절단은 1380년 봄에 아라곤 왕국을 방문했다. 그러나 후안은 같은 바르셀로나 왕가끼리 결혼하는 것은 근친상간이라 여기고 바르 공작의 딸 욜랑드와 약혼했다.
페드로 4세는 그 대신에 이제 갓 4살된 손자 마르틴과 마리아를 짝지어주기로 했다. 이 약혼은 1380년 7월 24일 시칠리다 사절단 대표 굴리에모 라몬 데 몬카다와 엔리코 로소가 바르셀로나 대성당에서 여왕을 대신하여 협약서에 서명하면서 이뤄졌다. 아라곤 왕 페드로 4세는 마리아와 마르틴 모두 어리다는 이유로 둘째 아들이자 마리아의 남편 마르틴의 아버지인 마르틴의 섭정을 받게 했다. 1386년 칼리아리에 수년간 억류생활을 하던 마리아가 아라곤으로 이송되었다. 이후 마리아는 페드랄베스 수도원에 연금되었다가 1390년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마르틴과 마리아의 결혼을 허가하면서 비로소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1392년 3월 22일, 마르틴은 아들 마르틴, 며느리 마리아와 함께 시칠리아의 항구도시 트라파니에 상륙했다. 그동안 시칠리아를 좌지우지하던 아르탈 달라고, 만프레디 치아라몬테, 굴리엘모 디 페랄타, 프란체스코 벤티밀리아는 마리아를 여왕으로서 받들겠지만 두 마르틴 부자를 섬길 수는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에 마르틴은 무력으로 해결하기로 마음먹고, 아라곤 왕국군을 이끌고 팔레르모로 진군했다. 안드레아 치아라몬테가 팔레르모에서 농성했지만, 안드레아의 수탈에 시달렸던 백성들이 성문을 자발적으로 연 덕분에 아라곤군이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고 입성했다. 이후 마리아 여왕은 1392년 5월 팔레르모에서 왕관을 썼다.
안드레아 치아라몬테는 마르틴의 집권을 인정하는 조건하에 사면되었지만, 아버지 마르틴의 최측근인 베르나르도 카브레라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안드레아가 단검을 숨긴 채 궁정을 들락거리고 있다고 고발했다. 안드레아는 곧 체포된 뒤 공범자로 간주된 인사들과 함께 6월 1일에 처형되었다. 그의 재산은 몰수되었고, 영지는 베르나르도에게 수여되었으며, 시칠리아의 대제독 직위 역시 베르다르도에게 수여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팔레르모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왕실은 카타니아로 피신했다. 반란은 시칠리아 전역에 빠르게 확산되었고, 아들 마르틴의 세력권은 카타니아, 메시나, 시라쿠사만 남았다. 여기에 튀니지에서 세력을 떨치던 하프스 왕조가 고용한 사라센 해적들이 시칠리아를 연이어 습격했다. 1393년 6월, 해적들은 시라쿠사 주교를 포함해 몸값을 지불할 가능성이 있는 부유한 주민들을 납치했다.
마르틴은 아라곤 함대를 총동원해 시칠리아 반란을 수습하려 애썼다. 그러던 1396년 형이자 아라곤의 왕이었던 후안 1세가 사망했다. 이때 후안 1세의 미망인 욜랑드 드 바르가 자신이 태아를 임신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많은 귀족들은 욜랑드가 아들을 낳을 경우를 고려해 마르틴을 새 왕으로 세우기를 주저했다. 같은 시기에 후안 1세의 딸 후아나는 남편인 마티외 드 푸아카스텔봉을 부추겨 아라곤을 침공해 왕관을 손에 넣으라고 독촉했다. 푸아 백작은 그 말에 따라 아라곤을 침공했지만 아라곤 귀족들에게 패퇴했다.
국내에 남아있던 아내 루나의 마리아는 마르틴에게 아라곤으로 돌아와서 이 불안한 정국을 수습해달라고 요청했다. 마르틴은 시칠리아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전념하고 싶었기에 몇 달간 망설였다. 그 사이에, 마리아가 욜랑드의 건강을 지켜주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그녀를 한 성채로 옮김으로써 그녀의 지지자들로부터 고립시켰다. 곧, 욜랑드의 임신이 거짓이라는 게 드러나자, 마리아는 군대를 소집해 욜랑드와 마티외의 추종자들을 모조리 체포해 지하감옥에 가두고 영지를 몰수했다.
1397년, 마르틴은 아라곤으로 돌아간 뒤 마르틴 1세로서 즉위했다. 이후 대규모 병력을 시칠리아로 파견했고, 1398년 시칠리아 귀족들이 모조리 제압되면서 난이 진정되었고, 왕실은 팔레르모로 귀환했다. 아들 마르틴은 1398년 초 마르티누 1세로서 마리아와 함께 공동 왕으로 등극했고, 마리아는 1398년 11월 17일 아들 피에트로를 낳았다. 마르틴 1세는 1398년과 1399년에 북아프리카에서 무어인들을 상대로 십자군을 벌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400년 11월 8일, 마르티누 1세와 마리아 여왕의 아들 피에트로가 마상창시합 도중 날아온 창에 맞아 죽었다. 아들이 허망하게 죽어버리자, 마리아는 절망에 빠져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1401년 봄 카타니아에 전염병이 창궐하자 렌테니 성으로 옮겨졌으나 이미 역병에 걸려버린 그녀는 독방에 갇혀 지내다가 5월 25일 새벽 2시경에 숨을 거두었다. 당시 바르셀로나에 있던 마르틴 1세는 그해 6월 14일에 마리아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른 채 아들에게 "마리아와 다시 관계를 맺어서 자식을 낳으라"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한편, 마르틴 1세는 서방교회 대분열에 깊이 개입했다. 그는 아비뇽 교황의 지지자로, 1403년 포위된 아비뇽을 구원하고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를 앙주 공작 루이의 영지로 호송시키는 데 깊이 관여했다.
1409년 사르데냐가 아라곤 왕 마르틴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마르틴 1세는 아들 마르티누 1세에게 사르데냐 진압을 명령했다. 마르티누 1세는 원정군을 이끌고 출진해 그 해 6월 30일 나르본 자작 기욤 2세 드 나르본이 지휘하는 반란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말라리아에 걸렸고, 그해 7월 25일 칼리아리에서 사망했다. 아들이 허망하게 죽어버린 후, 마르틴 1세가 '마르티누 2세'로서 시칠리아 왕위를 겸임했다. 마리아 왕비는 그보다 전인 1406년에 사망했다.
마땅한 후계자가 없던 마르틴 1세는 1409년 9월 17일 엔첸차 남작 페드로의 딸 마르게리타와 결혼해 후계자 생산에 힘쓰는 한편, 마르티누 1세의 사생아인 페데리코를 정식 후계자로 삼고자 노력했다.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가 이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표하면서 성사되는 듯했지만, 그가 1410년 5월 31일에 바르셀로나 성벽 밖에 있는 발돈젤라 수도원에서 돌연 사망하면서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갑자기 죽었기에 마르틴 1세의 정확한 사인도 불명확하여 오래 전부터 갖가지 설들이 제기되어왔다. 당시 해당 지역에 창궐했던 흑사병이나 요독성 혼수[1] 같은 질병 때문에 죽었다는 설도 있고, 로렌초 발라는 독살설을 제기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후술하듯 개그를 듣고 웃다가 죽었다는 설도 있다.
그 후 아라곤과 시칠리아의 왕위는 2년간 정해지지 않고 귀족들간의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1412년 카스티야 국왕 후안 1세의 아들이자 메디나 델 캄포 기사단장 페르난도가 카스페 협약에 의해 아라곤 왕으로 추대되었다.
3. 기타
- 상술한 마르틴 1세가 개그를 듣고 웃다가 죽었다는 이야기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1410년 5월 31일 마르틴 1세는 저녁에 거위 한 마리를 구워 먹었다가 소화불량에 시달리자 가장 총애하던 어릿광대 보라(Borra)에게 우스갯소리를 해서 기분이 낫게 해달라고 명령했다. 보라가 농담을 건네자, 그는 그 말이 너무 웃겨서 3시간 동안 미친듯이 웃다가 침대에서 떨어져 곧 죽었다고 한다. 참고로 왕을 죽게 하며 왕조까지 바꿔버린 희대의 농담은 이런 내용이었다고 한다. "포도밭 밖에 있었습니다. 거기서 저는 나무에 자신의 꼬리가 걸려있는 사슴을 보았지요, 누군가가 무화과를 훔치려했던 그 녀석을 벌주는 거처럼 말입니다."[2] 출처 다만 이에 대한 사료적 근거는 부족하다고 한다.
- 인문학과 책에 대한 큰 열정으로 인해 '인간(las Humanidades)'으로 불렸고, 특히 가치 높은 책들을 너무 많이 수집한 나머지 그의 도서관이 후대에 '르네상스라고 부를 수 있는 최초의 도서관'으로 평가받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