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23:24:58

라틴인 학살

1. 개요2. 배경3. 인기 없는 마리아4. 피바다가 된 콘스탄티노폴리스5.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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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 약탈은 끔찍하고 변명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취급받은 것처럼 그들을 취급했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약탈에 분개하며 열변을 토하는 역사가들은 1182년의 서방인 학살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워렌 H. 캐롤(Warren H. Carroll)
1182년 4월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반라틴 폭동이 일어나 라틴인 수만 명이 학살당한 사건.

2. 배경

베네치아-동로마 무역 전쟁 중 동로마 제국은 베네치아 공화국을 견제하기 위해 피사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아말피 공화국을 끌어들였다. 이들 라틴 도시국가들은 라이벌인 베네치아의 공백을 틈타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그러나 이들 라틴인을 바라보는 동로마인들의 시선은 결코 곱지 않았다. 라틴인들의 무역 독점은 토착 상인들의 몰락을 부채질했고, 교회의 차이도 양자 간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특히 중하류층에서 라틴인들은 맹렬한 증오를 받았다. 정국이 안정되어 있던 마누일 1세 재위기에는 제국이 이같은 문제를 통제할 수 있었지만, 1180년 마누일 1세가 사망하고 알렉시오스 2세 제위에 오르자 문제가 생겼다.

3. 인기 없는 마리아

알렉시오스 2세는 즉위 당시 10살의 소년이었기에 황태후인 안티오키아의 마리아가 섭정에 올랐다. 그러나 그녀의 통치는 동로마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동로마인들은 라틴인인 그녀를 포함해 섭정단에 서방인이 많다는 점에 불만을 품었으며, 섭정단이 친라틴적인 정책을 추진한다고 확신했다. 또한 여러 구혼자가 그녀와 결혼하길 희망한다는 것도 그녀의 평판을 악화시켰다. 심지어 마리아가 섭정단 대표 알렉시오스와 사랑을 나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렇듯 불안감이 고조되던 1181년 2월, 마누일 1세와 줄츠바흐의 베르타의 장녀 마리아 콤니니는 남편인 몬페라토의 레니에르와 함께 반란을 꾀했다. 그러나 음모는 조기에 발각되었고, 마리아 황태후가 직접 재판을 주관하여 음모의 주동자들을 유배하거나 처형했다. 하지만 몬페라토의 레니에르와 아내 마리아는 아야 소피아로 숨었고, 세계총대주교 테오도시오스가 비호한 덕분에 체포되지 않았다.

레니에르는 아내 마리아와 함께 아야 소피아에서 민중을 선동했고, 친라틴 정책에 불만이 가득했던 민중은 이에 호응했다. 그들은 동료 공모자들을 석방하고 섭정단을 퇴진하라고 요구했다. 마리아 황태후는 이러한 요구에 응하지 않았고, 레니에르와 마리아는 아야 소피아를 요새로 전환하고 외국인 용병을 고용했다. 알렉시오스 콤니노스는 이에 맞서 부활절을 기념하여 황궁에 방문했던 테오도시오스 세계총대주교를 전격 체포하고, 새 세계총대주교를 세우려 했다. 하지만 마리아 황후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고, 테오도시오스는 석방되었다. 민중은 이 사건에 분노하였고, 곧 황태후와 섭정단 지지파와 레니에르와 마리아 지지파 간의 시가전이 벌어져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며칠간의 시가전 끝에 양측은 화해하기로 했다. 마리아와 레니에르는 황궁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었고, 반란군은 사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너그러운 조치에도 불구하고 마리아 황태후의 인기는 갈수록 떨어졌고, 민중의 라틴인에 대한 적개심은 증폭되었다.

한편, 지난날 마누일 1세에 맞서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으나 번번이 실패한 뒤 흑해의 해안지대에서 요양 생활을 하던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는 수도에서 벌어진 상황을 전해듣고 오래도록 고대하던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1181년 5월, 안드로니코스는 테오도시오스 세계총대주교에게 알렉시오스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이 수도에 가서 모든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무리를 끌어모아 봉기를 일으켰고, 여러 도시와 마을을 들려 자원자들을 수용했다. 민중이 열렬히 호응한 덕분에, 칼케돈 해협에 이르렀을 때 그의 병력은 수만에 달했다. 그는 마리아 황태후와 섭정단이 황좌의 순수성을 훼손했다고 비판하였고, 마리아 황태후가 수녀원에 들어가야 한다고 요구했다. 함대 사령관 안드로니코스 콘토스테파노스는 반란군에 가담했다. 이같은 상황 속에 안드로니코스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하자 전례 없는 규모의 반라틴 폭동이 시작되었다.

4. 피바다가 된 콘스탄티노폴리스

1182년 4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동로마인들은 라틴인 거주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소수의 라틴인들은 이같은 상태를 예상하고 탈출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폭도들은 여성과 어린이, 노약자를 가리지 않고 학살했다. 침대에 누워 있던 환자들 역시 끔찍하게 살해되었다. 특히 성직자들은 동로마인들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되었고, 교황 특사인 요한 추기경조차 참수당한 채 목이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집과 성당, 구호소는 모두 약탈당한 뒤 전소되었다.

공동 황제로 즉위한 안드로니코스 1세는 특별히 반라틴 감정을 갖지는 않았지만, 사태를 수습하기는커녕 헛소문을 퍼트려 반라틴 감정을 부채질했다. 폭동은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 내의 제노바 거주구와 피사 거주구를 완전히 파괴한 후에야 끝이 났다. 학살에서 살해된 라틴인들은 최소 수만 명으로 추산되며, 생존자 4천 명은 룸 술탄국에 노예로 팔렸다.

5. 결과

이 사건은 서방을 경악하게 만들었고 서방에서 동로마 제국의 이미지를 크게 악화시켰다. 비록 얼마 후 무역 협정이 다시 체결되었지만 근본적인 적대감은 사라지지 않았고, 시칠리아 왕국 테살로니카 원정과 신성 로마 제국과의 외교 분쟁은 양자 간의 악감정을 증폭시켰다.

이같은 증오의 나선은 1204년 4차 십자군이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동로마인을 학살한 뒤에야 한번 끝이 난다. 학살로 시작된 분쟁이 결국 또다른 학살로 끝난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