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 라시둔 칼리파국의 명장
아므르 이븐 알 아스 عمرو بن العا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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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본명 |
عمرو بن العاص Amr ibn al-As al-Sahmi 아므르 이븐 알 아스 알 사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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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573년 아라비아 메카 | |
사망 | 664년 이집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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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 등과 함께 정통 칼리파 시대의 영토 대확장에 크게 공헌한 1등 공신 중 한 명으로 서아시아 제패에 안주하던 이슬람 제국의 영토를 북아프리카 동부 이집트까지 확장시킨 명장이다. 이후 두 차례에 걸쳐 14년간 이집트 총독을 도맡아 행정의 거점을 알렉산드리아에서 내륙의 푸스타트(현 카이로 남부)로 옮기는 등 현재 아랍 문화를 주도하는 이집트를 아랍화한 선구자라 볼 수 있다. 그에 의해 세워진 아므르 이븐 알 아스 마스지드는 이집트의 첫 번째 모스크이자 중세 카이로의 3대 모스크 중 하나로 꼽힌다.[1]정치적으로 아므르는 제 1차 피트나에서 무아위야 1세의 주요 지지자였고, 제4대 정통 칼리파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임명한 총독 무함마드 이븐 아비 바크르[2]로부터 이집트를 '재점령'했다. 군사적 능력 뿐만 아니라 권모술수에도 능했던 아므르는 시핀 전투에서 알리 측에 협상을 청하며 붕괴 직전에 놓인 무아위야 진영에 시간을 벌어주었다. 그리고 이어진 협상에 직접 나선 아므르는 화려한 언사로 무아위야를 알리와 동급으로 인정하게 만들었다. 결국 알리 진영이 주화파와 주전파( 카와리즈파)로 분열되면서 무아위야 1세의 승리로 끝났고, 1등 공신이 된 아므르는 90세로 사망하는 664년까지 이집트의 종신 총독이 되었다.
2. 생애
573년경 쿠라이쉬 연맹에 속한 사흠 가문의 알 아스 이븐 와일과 라일라 빈트 하르말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노예 출신인 모친 라일라는 여러 남자들과 지내어서 사실 알 아스가 부친이 아니라는 말도 있다. 따라서 라일라의 별명인 '앗 나비가'를 따라 이븐 앗 나비가로도 불렸다.[3] 부친 알 아스는 무함마드를 두고, 그가 사망하면 이슬람도 와해될 것이라는 말을 남길만큼 그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가 622년 사망했다. 한편 아므르의 동생 히샴 이븐 알 아스는 헤지라 이전에 이슬람으로 개종했고, 비록 헤지라에는 동참하지 못했지만 그 이후에 메디나에 합류했다. 형인 아므르는 메카에 남아있다가 무함마드의 승리가 확실해 보였던 629년경에야 이슬람으로 개종했다.2.1. 이집트 정복
카이로 남부 푸스타트에 위치한 아므르 이븐 알 아스 사원. 이집트 최초의 모스크이다
시리아와 이라크 정복 이후 팔레스타인 총독이 된 아므르는 이집트의 동로마군이 공격해오자 국경의 안전을 명목으로 제2대 정통 칼리파 우마르에게 이집트 정복을 문의했다.(639년) 아직 시리아도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섣부른 공격이라 판단한 우마르는 이를 거부했지만 아므르는 이집트의 정복이 시리아의 안정과 이슬람 팽창의 거점으로 필수적이라며 역설했다. 결국 우마르는 4,000명의 병력을 내어주며 슈라(원로회의)에서 논의할테니 결정이 나오면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구체적으로
'국경에 도달하기 전에 전령이 도착하면 회군하는데, 국경을 넘었다면 알라께 도움을 청하고 그의 가호를 기원하라!'
라는 지시였는데, 회의의 결론은 위험 부담이 크니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전하러 사절이 부리나케 달려가 국경을 넘기 직전 가자에서 아므르에게 서신을 전했다. 그러나 아므르는 다른 이에게 알리지 않고 봉인을 풀지 않은 채로 국경을 넘었다.(639년 2월) 지도부의 우려와는 달리 아므르는 전광석화로 시나이 반도를 가로질러 이집트의 방어 거점인 펠루시움, 빌바이스를 각각 한 달의 포위 끝에 점령했다. 종교적 차이와 지나친 과세로 지중해 건너 본국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갈등을 빚던 이집트는 이슬람 군대에 큰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아므르군은 640년 초, 과거 멤피스 건너편의 바빌론 성채 주변에 주둔했다. 그해 6월, 사하바인 주바이르 이븐 알 아왐 휘하의 지원 병력이 당도하자 바빌론 외곽의 옛 헬리오폴리스에서 동로마군을 격파하고 성을 포위한 채, 개종 / 인두세 / 전쟁의 선택을 요구했다.
9개월의 포위 끝에 641년 4월 바빌론 수비대는 지즈야 납부를 조건으로 항복했다. 포위 도중 640년부터 아므르는 주둔지의 비둘기 둥지가 있던 곳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사원을 지었다. 바빌론 요새의 항복 이후 사원을 중심으로 신도시 푸스타트 건설이 시작되었다. 비슷한 시기 동로마령 이집트의 치소인 알렉산드리아에 대한 포위가 시작되었고 그해 9월 콥트파 기독교도의 내통 덕에 점령되었다. 본래 아므르는 이곳을 중심으로 삼으려 했는데 칼리파 우마르는 나일 강이 범람할 때는 메디나와의 육로가 단절된다며 반대했다. 당시 이슬람 제국은 해군이 빈약했기 때문이었고, 결국 푸스타트가 이집트의 중심이 되어 현재 카이로에 이르게 된 것이다. 결국 641년 11월 동로마 총독 키로스는 인두세 및 공물을 대가로 교회의 자치를 보장받고, 이듬해 9월까지 남은 병력과 함께 이집트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