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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정통 칼리파
아부 바크르 أَبُو بَكْ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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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에게 돌을 던지는 폭도들을 말리는 아부 바크르 | }}}}}}}}} | ||
<colbgcolor=#008000><colcolor=#FFF,#FFF> 이름 |
아부 바크르 아시디크[1] أَبُو بَكْرٍ عَبْدُ ٱللهِ إبْنِ أَبِي قُحَافَ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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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573년 10월 27일 | ||
헤자즈 메카 | |||
사망 | 634년 8월 23일 (향년 60세) | ||
정통 칼리파 시대 헤자즈 메디나 | |||
재위 기간 | 정통 칼리파 | ||
632년 6월 8일 ~ 634년 8월 23일 (2년) | |||
후임자 | 우마르 | ||
부모 |
아버지 : 아부 쿠하파 어머니 : 움 알 카이르 |
||
종교 | 이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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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초대 칼리파 아부 바크르 시대의 이슬람 제국 영토.
최초의 칼리파이자 초대 정통 칼리파로, 예언자의 후계자(خليفة رسول الله / Khalīfat Rasūl Allāh)로 불리기도 한다. 사하바의 일원으로서, 무함마드 사후 칼리파로 선출되어 그가 초석을 놓은 이슬람 제국의 기초를 굳게 다진 수성 군주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비록 칼리파로 재임한 기간은 2년에 불과하지만 그 영향력과 유산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으며, 그의 치세에 개시된 이슬람 정복은 세계 역사를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
2. 칼리파 이전의 생애
아부 바크르는 573년 쿠라이시 부족의 바누 타임 가문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무함마드와는 8대조 무라흐가 같은[2] 먼 친척이었으며 캐러밴을 따라다니면서 무역업에 종사하다가 무함마드가 계시를 받자마자 그가 신의 사도임을 인정하고 이슬람을 믿게 되었다. 한편 아부 바크르의 가족은 첫째 부인과 첫째 아들을 제외한 모두가 이슬람으로 개종하게 되며, 아부 바크르는 이슬람을 믿지 않는 부인과 이혼하고 아들과도 의절했다.이슬람 입교 이전 카바 신전의 수호자 중 한 명이었던 아부 바크르의 본명은 '압둘 카으바'였는데, 무함마드로부터 '신을 섬기는 자'라는 뜻의 '압둘라'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그 외에 무함마드로부터 '진실된 친구'라는 뜻인 '앗 사디크'로도 불렸다. 아부 바크르의 많은 재산과 넓은 인맥은 초기 이슬람이 퍼지는 데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막대한 재산은 이슬람을 믿는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 사용되어 하층민들에게 이슬람의 교리가 널리 침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극도의 무함마드 혐오자였던 우마르의 개종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또한 까디시야 전투의 사령관이었으며, 사산조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명장 사아드 이븐 아비 와카스, 이집트 정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알 주바이르, 훗날 제3대 칼리파가 되는 메카 최대의 부호였던 우스만 이븐 아판 등이 모두 아부 바크르의 친구들이었으며 그의 영향을 통해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쿠라이시 부족은 무함마드에게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아부 바크르는 쿠라이시 부족으로부터 배신자 취급을 받았다.[3] 결국 615년 무함마드를 따라 아비시니아로 이주했다. 이 이주 자체는 실패하고 다시 메카로 돌아와야 했지만, 620년 무함마드의 첫째 부인이 죽자 6살짜리 어린 딸 아이샤 빈트 아비 바크르를 무함마드에게 시집보냈다. 이로써 아부 바크르는 독실한 무슬림인 동시에 무함마드의 친우이자 장인어른이 되었고, 이는 훗날 제1대 칼리파로 추대되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 또한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쿠라이시 부족의 박해에 맞서 무함마드를 보호하고자 노력했는데, 쿠라이시 부족이 무함마드의 암살을 시도하자 그를 대신하여 그의 복장을 입고 그의 침소에 들거나, 무함마드를 목졸라 죽이려 할 때 그를 보호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수많은 공적을 쌓은 노력을 인정받아 631년에는 300명을 이끌고 최초로 성지 순례('하지')를 하는 영광을 누렸다.
3. 칼리파 선정과 이슬람 분열의 시작
무함마드의 사망 이후 '신이 점지하신 대리인'의 부재가 발생했다.[4] 이에 혼란에 빠져있던 이슬람 세계는 메디나 집단인 안사르와 메카 집단인 무하지룬이 각기 다른 지도자를 선출하려는 분열의 징조를 보이고 있었는데, 이를 들은 아부 바크르는 서둘러 회의를 중지시키고 사람들을 집결시킨 이후, 한 명의 지도자만을 선출할 것을 간청했다.[5] 이 과정에서 아부 바크르는 우마르를 지도자로 추천했지만, 이에 질겁한 우마르가 아부 바크르를 강력히 추천하면서 그는 신의 사도(무함마드)의 계승자라는 뜻의 칼리파(خليفة رسول الله / Khalīfat Rasūl Allāh, 칼리파 라술 알라흐)로 선정되었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인원들에게 무함마드의 후계자로 평가받고 있었던 알리[6]가 소외당하면서 분열이 시작되었고, 이 과정에서 전승에 따라서는 무함마드의 딸이자 알리의 부인인 파티마가 유산을 하는 일이 벌어질 정도로 격렬한 충돌이 발생했다.그러나 이런 분열은 아부 바크르의 칼리파 취임 6개월 후에 종결되게 되는데, 아라비아 반도 각지의 이슬람 세력들이 무함마드의 죽음을 기회로, 각자 무함마드 이후의 하나님의 사도는 자신이라는 주장을 펼치며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이비들의 독립 움직임을 억누르고자 아부 바크르는 무함마드의 "종교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라는 주장에 위배되지 않으면서도 독립을 막기 위해 "최초의 선택은 자유이지만 이후 배교는 반역과 같다"라는 오늘날까지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조항을 설정했다.[7] 그리고 그 다음에 알리와의 대결을 그만두고, 채찍과 당근을 능수능란하게 휘두르면서 단 1년 만에 모든 사이비들의 독립 움직임을 소탕했다. 하지만 알리와의 분쟁은 해결된 것이 아닌 연기된 것에 불과했고, 아부 바크르를 정통 칼리파로 보는 수니파의 관점과 다르게 시아파는 그저 찬탈자로 여기게 된다.
4. 칼리파 취임 이후
칼리파 즉위 이후 아부 바크르가 처음으로 내린 결정은, 무함마드의 양손자 우사마 빈 자이드가 지휘하는 원정대 파병 여부였다. 임종 몇 주 전, 무함마드는 동로마 제국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양아들 자이드의 원수를 갚도록 그의 아들 우사마에게 요르단 방면 원정군 지휘관을 맡겼다. 그러나 무함마드의 죽음으로 출정은 연기되었고, 우사마는 칼리파에게 승인을 청했다. 한편 우마르 등은 우사마가 18세에 불과하니 새로운 지휘관을 선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아부 바크르는 그대로 추진하는 것이 외부에 이슬람 공동체가 흔들리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겨 강행했다. 그 결과 우사마 빈 자이드는 40일 후 승리를 안은 채로 귀환했고, 무함마드의 결정을 존중한 아부 바크르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우사마의 승전보는 아라바아 반도 각지에서 배교 반란( 릿다 전쟁)이 들끓던 상황에서 불안했던 이슬람 진영에 자신감을 안겨준 희소식이었다.[8]
1. 어린이, 노약자, 부녀자를 살상하지 말 것
2. 인명과 재산을 보호할 것
3. 초목을 해치거나 불사르지 말 것. 과실을 자르지 말 것.
4. 소, 낙타 등 짐승을 도살하지 말 것
5. 신앙에 충실할 것
2. 인명과 재산을 보호할 것
3. 초목을 해치거나 불사르지 말 것. 과실을 자르지 말 것.
4. 소, 낙타 등 짐승을 도살하지 말 것
5. 신앙에 충실할 것
출정에 앞두고 아부 바크르는 청년 우사마 빈 자이드를 마중나가며 그에게 위와 같은 규율을 전했는데, 이는 후에 이슬람 군대의 기본 지침으로 자리잡았다. 19세기에 논의된 제네바 협정과 상당히 겹친다는 점에서, 이러한 도덕률은 아부 바크르의 치적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특히 전쟁 중 인명이나 재산 뿐만 아니라 자연 환경까지 신경쓰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척박한 상황에서 살아온 아랍인들의 배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활약과 함께 633년 봄까지 아라비아 반도를 완벽히 정비한 아부 바크르는 이후 타지역으로의 팽창을 시작했다. 그는 비록 초기 개종자는 아니었지만 능력이 입증된 칼리드를 총사령관에 임명하는 강수를 두었고, 믿음에 보답한 칼리드는 633년 히라 함락, 634년 보스라 함락 및 아즈나딘 전투 등 연이은 승전보를 올렸다. 동시에 《 코란》의 의미가 왜곡되거나 달라지는 형상을 보였기 때문에(《 코란》 항목 참고) 아부 바크르는 《 코란》의 의미를 바로 잡는 대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아부 바크르가 2년 만에 죽었기 때문에 이 작업은 제3대 칼리파인 우스만에 와서야 완성된다.
칼리파로 추대받을 수 있었던 겸손하고 자비로운 성품은 이후에도 변함이 없어 소박한 옷을 입으며 검소하게 살았고, 사사로운 재산 축적을 하지 않았다. 아부 바크르 자신이 옳을 때가 아니라면 아무도 그의 통솔에 따를 의무가 없다는 스스로의 사상을 철저히 지켜 그 자신이 이슬람 공동체( 움마) 내부에서 우월하게 보일 어떠한 움직임도 거부하면서 평등한 공동체의 대표로 처신했다.
또한 본래 대단히 부유한 상인이었던 아부 바크르이지만 이슬람으로 개종한 노예들을 해방시키고자 막대한 재산을 소모한 데다 메디나 이주 과정( 헤지라)에서 그나마 남은 재산마저 압수당하면서 칼리파 취임 당시에는 대단히 가난한 상태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호의호식도 거부하면서 움마(이슬람 공동체)를 지도하면서 나오는 적은 봉급만을 받았고, 상업 활동을 재개하며 때때로는 이웃의 소젖을 짜주면서 스스로의 생계를 꾸려가고자 노력했다.
아부 바크르는 다마스쿠스 포위가 한창이던 634년 8월 말엽,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고 나온 이후,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심각한 고열을 앓기 시작했다.[9] 곧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짐을 느낀 아부 바크르는 이슬람 공동체의 주요 인사들을 소집하여 무함마드 사후 벌어진 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그의 계승자로 우마르를 지정했고, 우마르의 거친 성미 탓에 모두가 꺼릴 때, 주요 계승 후보인 알리가 우마르를 적극 지지하는 놀라운 일을 통해 우마르의 계승이 확정되었다. 아부 바크르는 이에 안도감을 느끼며 8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5. 평가
무함마드를 항상 보필했으며 이슬람에 대한 신앙심도 높았고, 실제로 무함마드가"아부 바크르의 재력과 신앙심이 없었다면 난 벌써 죽었을 거다. 가장 친한 친구를 하나 꼽자면 당연히 아부 바크르이다."
라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녔을 정도로 신뢰받는 인물이었다. 거기에 칼리파로 선출된 이후에도 메디나를 걸을 때면 아이들이 "아빠"라고 외치며 달려들면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사탕을 줄 정도로 항상 겸손하고 자상한 성품을 지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수니파에서는 무함마드 다음으로 존경을 받는 위인이다. 이슬람 사회에서는 초기 이슬람 시대 무함마드가 아비시니아나 메디나로 쫓겨가면서 온갖 개고생을 함께 겪은 자들을 사하바(الصحابة / Aṣ-Ṣaḥābah)라고 해서 높게 쳐준다. 아부 바크르는 무함마드의 동료들 중에서도 가장 출중한 자였으니 동료들 중 가장 높은 취급을 받았다.
시아파에서는 아주 안 좋은 취급을 받는다. 이들은 아부 바크르가 무함마드를 보필했던 것은 순수한 마음이 아니라 권력을 얻으려고 했던 흑심에서 나왔던 것이고, 무함마드가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를 후계자로 지정했지만 아부 바크르가 권력을 결국 찬탈했다고 본다. 이들은 알리를 추종하며 아부 바크르에 반대했던 자들을 아부 바크르가 탄압했다며 비난한다.[10]
6. 후손들
아부 바크르의 자녀들 중 무함마드와 압둘라흐만의 두 아들들은 제 1차 피트나에서 제4대 정통 칼리파 알리를 지지했다. 특히 압둘라흐만 빈 아비 바크르는 낙타 전투에서 누이 아이샤에 맞서 싸우기도 했다. 무함마드 빈 아비 바크르는 알리의 이집트 총독을 맡았다가 우마이야군의 아므르 이븐 알 아스에게 참살되었다. 아이샤 외에도 아부 바크르는 아스마 빈트 아비 바크르와 움 쿨숨 빈트 아비 바크르라는 딸들을 두었다. 아스마는 앗 주바이르와 결혼하여 후에 제 2차 피트나 시기 히자즈에서 칼리파를 칭하는 압둘라 이븐 주바이르를 낳았고, 움 쿨숨은 탈하 이븐 우바이둘라와 결혼하여 아이샤와 함께 반알리 진영에 가담했다.7. 기타
사하바 중 한 사람인 빌랄을 주인공으로 하는 아랍에미리트의 극장판 애니메이션 < 슬레이브워>에서 이 인물이 아부 바크르라는 이름으로 나오지는 않고, '알 시디크'(진실된 자, 정직한 자)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프레드 타타시오르가 더빙을 맡아 연기했다.문명 3에서 아라비아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게임에 넣으려다가 엎어져서 흔적만 남아 있는 문명 2를 빼면 시리즈 역사상 아라비아가 처음 나온 것이 문명 3인데, 이 작품에서 지도자로 선정되었다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다. 덧붙여 문명 2 당시 지도자로 추가되려던 인물은 살라딘.
[1]
'정직한 아부 바크르'라는 의미이다.
[2]
아랍인들은 조상이나 가문을 매우 중시하기 때문에 아무리 옛날이라도 조상이 같다면 서로 가까운 관계로 인식한다.
[3]
이것은 아부 바크르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쿠라이시 부족 개종자들이 겪는 일이었다. 당장 우스만이 개종할 때, 최초의 유력자의 개종으로 인해 쿠라이시 부족은 경악하게 되었고, 우스만을 비난하는 한편 무함마드를 죽이고자 더욱 노력하게 되었다.
[4]
이슬람에서 무함마드는 신의 마지막 사도이다. 즉, 일반적인 지도자라면 혈연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후계자를 이어가면 되겠지만 신이 내려준 무함마드의 후계자는 그런 식으로 선정할 수 없었고, 신이 내려주신 인물만이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무함마드가 신의 마지막 사도이기에 그런 존재는 앞으로 없는 것이었지만 이미 군사집단 및 국가의 형태를 지닌 이슬람을 이끌어갈 지도자는 필요했기에 마냥 신의 계시만을 기다릴 수도 없는 대단한 혼란에 빠져있었다.
[5]
무함마드가 죽었으니 이슬람도 이제 끝이라는 사람들 앞에서 "너희가 믿은 것이 무함마드냐, 하나님이냐? 그가 성사(聖使)였다고는 해도 하나님께서 선택한 한 사람의 인간에 불과했을 뿐인데 이제 무함마드가 죽었다고 영원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등을 돌릴 수 있겠느냐?"라는 말로 진정시켰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6]
알리는 최초의 남자 무슬림이자 온갖 노력과 공을 세우며 이슬람의 확립에 거대한 공을 세웠고, 특히 무함마드가 "여러분 중 나를 수호자로 여기는 사람이라면 알리를 당신의 수호자로 여겨야 한다"라는 말까지 한 상태였다.
[7]
오늘날 이슬람을 국교로 채택한 국가들도 맨처음 종교를 선택하는건 개인의 자유지만 이후 타 종교로 개종하는건 법적으로 사형을 선고한다.
[8]
실제로 많은 배교자들이 이슬람으로 돌아왔다
[9]
전승에 따라서는 음식을 잘못 먹어서라는 주장도 있다.
[10]
근데 정작 아부 바크르는 충성을 맹세하는 이슬람세를 바치지 않아도 예배만 충실히 하면 봐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