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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등 이 4명만 정통 칼리파로 인정받으나 하산도 잠깐동안 칼리파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포함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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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이야 왕조 제9대 칼리파 야지드 이븐 아브드 알 말리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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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아랍어 | يزيد بن عبد الملك |
영어 | Yazid ibn Abd al-Malik | |
출생 | 690/ 691년 | |
사망 | 724년 1월 26일 (향년 32~34세) | |
존호 | 칼리파 | |
재위 기간 | 720년 2월 5일 ~ 724년 1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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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마이야 왕조 제9대 칼리파.2. 생애
690년 또는 691년 다마스쿠스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우마이야 왕조 5대 칼리파 아브드 알 말리크이고 어머니는 야지드 1세의 딸 아티카이다. 그는 715년에서 717년 사이에 메카를 순례한 것을 포함하여 히자즈를 여러 차례 방문한 것 외에는 시리아를 거의 떠나지 않았고, 군사나 행정 경험도 없었다. 단지 아브드 알 말리크에 의해 암만 총독으로 부임한 뒤 알 카스탈과 알 무와카르 사막 궁전을 지은 사실이 고고학 연구로 확인되었을 뿐이다.720년 우마르 2세가 사망한 뒤 예정대로 칼리파가 된 그는 여러 면에서 우마르 2세와 정반대였다. 우마르 2세가 검약한 삶을 추구한 것에 비해, 그는 즐거움을 추구했으며 사치를 구가하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우마르 2세 시절 부패 혐의로 감옥에 수감되었던 오사마를 석방한 뒤 이집트 총독으로 임명했으며, 이라크의 기독교인으로 최근에 이슬람으로 개종한 아부 무슬림을 이프리키야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우마르의 세제 개혁은 원상태로 환원되었고, 우마르 2세에게 파직 및 감옥에 갇혔던 이들 역시 석방된 뒤 자신들의 직책으로 돌아가서 우마르 2세의 지명자들을 적극적으로 박해하고 그들의 재산을 박탈했다.
아부 무슬림은 이프리키야 총독으로 부임한 뒤 지즈야를 대거 거둬들이고 세금을 미납한 자의 손등에 낙인을 찍는 관행을 부활시켰다. 이에 분노한 베르베르인들은 721년 반란을 일으켜 사원에서 아부 무슬림을 살해했다. 하지만 그들은 보복을 두려워하여 칼리파에게 사절을 보내 "총독의 부당한 행위에 분노했을 뿐 칼리파님께 대적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며 사죄했고, 그는 특별히 그들을 용서하고 아부 무슬림의 전임 총독 이스마일 이븐 압드 알라 이븐 아비 알 무하지르를 복위시켜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였다. 한편, 바스라 총독은 우마르 2세 시절 온건한 대우를 받았던 카와리즈파를 강하게 탄압했다. 카와즈리파는 이에 분노하여 이라크의 전 총독이지만 감옥에 갇혀 있었던 야지드 이븐 알 무할랍을 탈옥시킨 뒤 그를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의 규모는 작았지만, 이라크의 주민들과 부족 민병대는 그들을 굳이 토벌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기에 의외로 반란이 오래 갔다. 바스라 인근에서 무히라 이븐 압둘라가 이끄는 기병대가 저지했지만, 야지드의 동생 무함마드 이븐 알 부할랍에게 패퇴했다. 이후 야지드는 자신의 집에 도착하여 금고를 확보한 뒤, 바스라 주민들에게 금을 아낌없이 나눠줬다. 당시 정부군은 하루에 2 디르함만 받았기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금을 나눠주겠다는 말에 마음이 넘어가 반란군 편으로 대거 가담했다. 바스라 총독은 곧 체포된 뒤 감옥에 갇혔다.
720년 4월 15일, 야지드는 시민들을 모아놓고 쿠란과 순니를 따르라고 촉구하며, "시리아인에 대한 지하드는 투르크인과 델람인에 대한 지하드보다 알라의 보상을 더 받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여기서 우마이야 왕조가 아니라 시리아인을 지하드 대상으로 삼은 점이 특이한데, 이는 이라크인들이 모든 시리아인이 우마이야 왕조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반란군은 720년 8월 23일 바빌론으로 접근하던 중 아스시브 전투에서 정부군에게 괴멸되었고, 야지와 일족은 목숨을 잃었다.
오직 알 무파달 알 무할랍만이 살아남아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와시트로 철수했다. 야지드는 생포된 반란군을 모조리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알 무파달은 바스라로 이동한 뒤 다시 카르마니아의 수도로 피신하려다 토벌대에게 어느 협곡에서 따라잡혀 목숨을 잃었다. 야지드는 마슬라마를 새 이라크 총독에 임명했지만, 그가 지방세 잉여금을 자신에게 전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곧 해임했다.
야지드는 끊임없이 일어나는 전쟁과 반란으로 인해 갈수록 고갈되어가는 재정을 채우기 위해 이프리키야, 호라산, 신드 및 이베리아 반도의 총독들에게 지방 세수의 5분의 1을 반드시 바치라고 명령했다. 또한 개종하면 지즈야를 면제받았던 피지배인 마왈리에게 지즈야를 무조건 납부하라고 강요했다. 이로 인해 제국 각지에서 불온한 기온이 피어올랐다.
722년 3월,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총독 말라크 이븐 사파르 알 바흐라니가 하자르에 패배하여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그는 이 소식에 분노하여 사파르를 해임한 뒤 알 자라 이븐 압달라에게 25,000명의 시리아 군을 맡겨 하자르로 진격하게 했다. 압달라는 발란자르를 점령했지만, 적이 무슬림들의 추적을 피해 멀찌감치 달아났기에 별다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723년, 바흐라니는 추가 병력을 제공 받은 뒤 발란하르 북쪽에서 공격을 감행했지만 역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예루살렘 총대주교 요한 5세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니키포로스 1세, 참회자 테오파네스 등 동로마 제국의 문헌에 따르면, 그는 티베리아스 출신의 유대인 마술사의 사주를 받아 제국 전역에 있는 기독교 교회의 모든 성상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그들은 이 칙령이 동로마 제국의 황제 레온 3세가 726년 성상 파괴주의를 체택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아랍 역사가 알 킨디, 알 마크리지, 세베루스 이븐 알 무카마 등 아랍 역사가들도 이 칙령을 기록했다. 칙령이 발표된 시기는 기록마다 다르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예루살렘 총대주교 요한 5세가 언급한 721년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본다.
야지드는 아버지의 형제인 무함마드 이븐 유수프 알 타카피의 딸 움 알 하지와 결혼하여 왈리드 2세와 알 하지를 낳았다. 그는 또한 제3대 정통 칼리파 우스만의 증손녀인 수다 빈트 압드 알라 이븐 암르와 결혼하여 압드 알리와 아이샤를 낳았다. 724년 1월 28일 다마스쿠스의 준드 다미슈크의 발카 분구에 있는 이르비드에서 병사했다. 그는 본래 아들 왈리드 2세를 칼리파로 선임하려 했지만, 최측근인 마스라마의 설득을 받아들여 이복 형제 히샴을 칼리파로 임명하고, 그 대신 왈리드 2세를 히샴의 후계자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