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21:31:56

압뒬아지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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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등 이 4명만 정통 칼리파로 인정받으나 하산도 잠깐동안 칼리파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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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70125><colcolor=#ffffff>
오스만 제국 제32대 파디샤
압뒬아지즈
[1]عبد العزيز | Abdülaziz[2]
출생 1830년 3월 20일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사망 1876년 6월 4일 (향년 46세)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페리예 궁전
묘소 이스탄불 마흐무트 2세 영묘
재위기간 오스만 파디샤[3]
1861년 1월 21일 ~ 1876년 5월 30일
서명 파일:압뒬아지즈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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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70125><colcolor=#fff> 아버지 마흐무트 2세
어머니 페르테브니얄 술탄 (출신: 체르케스인 혹은 루마니아인)
배우자 뒤르위네프 카든 (출신: 조지아인)
하이라느딜 카든 ( 카르스 출신)
에다딜 카든 (출신: 압하스인[4])
네스린 카든 (출신: 우비흐인[5])
게브헤리 카든 (출신: 압하스인[6])
자녀 압뒬메지트 2세, 메흐메드 세이페딘[7], 유수프 이제틴을 포함한 6남 7녀
종교 이슬람 (수니파) }}}}}}}}}
1. 개요2. 생애
2.1. 즉위 전2.2. 근대화와 서유럽 방문
2.2.1. 철도 부설
2.3. 다시 아랍으로2.4. 대 동방 위기2.5. 퇴위와 의문사
3. 건축4. 여담

[clearfix]

1. 개요

오스만 제국의 32대 술탄이자 26대 파디샤.

탄지마트 개혁을 이어가 공립 교육, 빌라예트 행정 체계, 의회 설립, 철도 부설 등을 이룩하고 해군력을 증강시켜 유럽에서 3번째로 큰 규모의 함대를 조성하였다. 서유럽을 순행하고 프랑스, 프로이센, 영국 등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평화로운 국제 관계를 이룩한 덕에 개혁은 외부의 침공 등 큰 방해를 받지 않고 진전되었다.

오스만 황제들 중에서는 이례적이게도 15년이 넘는 그의 치세동안 몇몇 반란을 제외하고는 국제적인 전쟁이 한 차례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아라비아 반도 동부와 예멘 북부 등 거의 한세기 만에 영토 팽창에 나서기도 하였으며 기타 아랍 지역들에 대한 중앙 정부의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베일레르베이 궁전 등 유럽식 별궁 건설을 이어가고 자연재해와 각지의 자치화 등으로 세수가 감소하자 근대화를 위해 서유럽에 빌린 차관 상환이 어려워졌고, 1875년 국가 부도에 이르렀다. 이자 지불을 위해 증세를 감행하며 각지에서 반발이 일었고, 그중에서도 불가리아와 헤르체고비나 등 발칸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에 러시아가 개입하며 20여년만에 다시 전운이 일었다. 이러한 불안한 상황 속에서 압뒬아지즈는 내각 장관들의 반발로 폐위당하였고, 6일 후 미심쩍은 죽음을 맞았다.

2. 생애

2.1. 즉위 전

마흐무트 2세의 늦둥이 아들로 태어나 형 압뒬메지트 1세가 사망한 후 계승하였다. 메흐메트 알리와의 전쟁과 크림 전쟁 이후 설립된 국제 질서는 1860년대 들어 안정적으로 유지되었고, 이러한 평화기에 압뒬아지즈는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에 착수하였다.

2.2. 근대화와 서유럽 방문

파일:오스만 술탄 파리.jpg
1867년 만국 박람회 참석차 프랑스 파리를 방문한 압뒬아지즈, 나폴레옹 3세와 함께.

압뒬아지즈는 형 압뒬메지트 1세가 시작한 탄지마트 개혁을 이어갔고, 이는 메흐메트 푸아트 파샤(Keçecizade Mehmet Fuat Paşa)와 메흐메트 에민 알리 파샤(Mehmet Emin Ali Paşa)가 주도하였다. 1861년 이스탄불 대학교의 설립으로 대표되는 프랑스식 공공 교육 체계가 자리잡았다. 1863년 우표 시스템이 도입되었고, 1875년 오스만 제국은 국제 우표 연합에 창립 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1864년에는 기존 에얄레트 행정구역이 빌라예트 체계로 전환되었고, 1868년에는 의회라 할 수 있는 '국가 평의회'가 설립되었다. 근대화에 있어 압뒬아지즈는 해군력 증강에 열을 기울였다. 한편 1867년 여름 압뒬아지즈는 프랑스와 영국 등을 방문하여 최초로 서유럽을 방문한 오스만 파디샤가 되었다. 영국 방문 시에 그는 사립 왕립 함대를 참관하고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명예직인 가터 기사단원직을 수여받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란츠 요제프 1세 러시아 제국 알렉산드르 2세와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파일:오스만 술탄 전용 기차.jpg 파일:오스만 술탄 압뒬아지즈.jpg
영국 방문 시에 압뒬아지즈가 이용한 특별 열차칸 / 영국의 압뒬아지즈

2.2.1. 철도 부설

파일:이스탄불 오스만 역.jpg
아시아 방면 오스만 철도의 시작인 하이다르파샤 역 (1872년)

압뒬아지즈의 치세부터 근대화의 상징인 철도가 본격적으로 부설되기 시작하였다. 사실 첫 오스만 철도는 선대인 압뒬메지트 1세의 치세에 크림 전쟁 직후인 1856년 이즈미르 ~ 아이든과 이스칸다리야 ~ 카이로 사이에 놓인 것이었고 1858년, 대형역사건물로 이즈미르의 알산작 역이 개통되었다. 다만 이들은 연결되지 않은채 개별적으로 놓인 철도들이었고, 따라서 진정한 철도'망'은 압뒬아지즈 때에 와서야 계획되고 실행에 옮겨졌다. 먼저 중부 유럽과 코스탄티니예를 잇는 루멜리아 철도가 부설되었는데, 계획 자체는 1857년부터 논의되었으나 계약은 지지부진한 끝에 1869년 4월에야 벨기에 자산가 마우리츠 드 히르사츠 남작과 성사되었다. 사바 강 ~ 사라예보 ~ 플로브디브 ~ 에디르네 ~ 코스탄티니예로 이어지는 노선 중 1870년 6월 4일 착공한 코스탄티니예에서 외곽 할칼르까지의 15km 구간이 처음 완공되었다. (1871년 1월 4일) 그 노선을 보스포루스 해협을 따라 금각만까지 끌어오는 작업은 1872년 7월 21일 마무리되었고 이듬해 시르케지(Sirkeci) 역이 세워졌다.[8] 목표인 빈까지의 완전 개통은 1888년에 이루어진다.

비슷한 시기 아시아 쪽에도 철도 사업이 추진되었다. 1871년 압뒬아지즈는 자력으로 코스탄티니예 ~ 이즈미트 철도 부설에 나섰고, 이듬해 9월 22일 1/3 지점인 펜딕까지의 공정이 이루어졌고 1873년 새해에 중간 지점인 게브제까지 개통되었으며 그해 8월 목표인 이즈미트에 당도하였다. 그 시종착 역으로써, 보스포루스 건너편 옛 칼케돈 부근에 하이다르파샤(Haydarpaşa) 역이 세워졌다. 한편 1871년 부르사에서 항구 도시인 무단야까지의 철도 공사도 시작되어 1875년 완공되었다. 비슷한 무렵 이라크에 질 좋은 석유가 풍부하다는 것을 발견한 독일 탐사팀은 러시아, 미국의 석유에 대항할 잠재력을 간파, 최대 약점인 수송 문제를 개선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1872년부터 독일 철도 기술자 빌헬름 폰 프레셀이 오스만 조정에 고용되어 튀르키예 지방의 철도망 설계에 나섰고, 이는 1888 ~ 1903년간 계속된 베를린-바그다드 철도 건설로 이어진다.
  • 1856 ~ 1875년 재정위기까지 오스만 철도 부설 연혁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1856년 이즈미르-아이든, 이스칸다리야-카이로 간선 철도 개통
    • 1857년 루멜리야 철도 논의 시작
    • 1869.4 루멜리야 철도 사업 계약
    • 1870.1 루멜리야 철도 착공
    • 1870.6,4 루멜리야 철도 1단계 (코스탄티니예-할카르 15km 구간) 착공
    • 1871.1.4 루멜리야 철도 1단계 (코스탄티니예-할카르) 구간 완공
    • 1871년 코스탄티니예-이즈미트, 부르사-무단야 철도 부설 개시 / 독일 탐사팀, 이라크 석유 확인
    • 1872년 하이다르파샤역, 시르케지역 건설. 각각 코스탄티니예의 아시아, 유럽 부분
    • 1872.7,21 루멜리야 철도의 마르마라해 구간 (~ 금각만) 완공
    • 1872.9.21 이-이 철도 1단계 (코스탄티니예-펜딕) 구간 완공
    • 1873.1,1 이-이 철도 2단계 (펜딕-게브제) 구간 완공
    • 1873년 루멜리야 철도 (코스탄티니예-플로브디프, 알렉산드루폴리스-에디르네, 테살로니카- 스코페) 구간 완공
    • 1873.8 코스탄티니예-이즈미트 철도 완전 개통
    • 1874년 루멜리야 철도 (도브르즐린- 바냐루카, 스코페-프리슈티나-미트로비차, 디미트로프그라드-얌볼) 구간 완공
    • 1875 부르사-무단야 철도 완전 개통 }}}

2.3. 다시 아랍으로

파일:오스만 1862.jpg
1862년의 오스만 제국. 예멘 내륙이 오스만 영토로 되어 있는 것은 오류이다.

탄지마트로 군대의 근대화가 어느정도 이루어지자 제국은 메흐메드 알리와의 전쟁 이후 20여년간 제대로 관심을 두지 못한 아랍권으로 눈을 돌렸다. 19세기 초반 시하브 왕조가 메흐메드 알리에게 멸망당한 후 마론파 기독교 vs 드루즈파 이슬람 간의 내전과 전자에 대한 학살이 발생했음에도 제국은 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프랑스에게 질서 유지를 맡기는 한심한 관리 능력을 보이던 상황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서구 열강과 현지 세력에게 아랍 지배력을 빼앗길 것을 우려한 압뒬아지즈는 근대화와 대 유럽 외교와 함께 다시 중동 지방에 제국의 역량을 할애하기로 하였다. 먼저 1864년 메즈바 반란의 혼란을 틈타 유럽 각국의 함대가 주둔한 튀니스에 함대를 파견, 외세를 물러나고 베이의 형식상 복속을 받아내었다. 1867년에는 오스만 술탄들 중 처음으로 이집트의 이스마일 파샤를 기존의 '왈리' (총독) 대신 군주인 '케디브'(Hidiv)로 인정하였다.[9]

1869년에는 이스마일 파샤 휘하의 이집트에서 수에즈 운하가 개통하며 국제적인 관심이 쏠렸고, 아라비아 반도에 대한 오스만 패권 확립이 재개되었다. 19세기 초엽 오스만 패권을 앗아갔던 1차 사우디 국가 (디리야 토후국)는 메흐메트 알리에 의해 멸망하였고, 2차 사우디 국가 ( 네지드 토후국)가 세워진 상태였다. 하지만 전자와 달리 후자는 만성적인 내분과 함께 취약하였고, 1865년 그나마 안정을 유지하던 파이살 빈 투르키가 사망한 후 아들들 간의 내전이 벌어졌다. 1871년, 동생 사우드에게 리야드를 상실한 장남 압둘라는 1868년 바그다드 총독으로 부임해 탄지마트를 전파하던 미트하트 파샤(Mithat Paşa)에게 개입을 청하였다. 알 아흐사 (현 사우디 동부)에 대한 지배력 회복에 있어 좋은 기회라 여긴 미트하트 파샤는 쿠웨이트의 도움과 함께 남하, 사우드를 격파하고 압둘라를 복위시켰다. 그의 계획대로 알 아흐사에는 2세기 만에 직접 지배가 회복되었고, 네즈드 산작이 설치되었다.

이슬람의 양대 성지 메카, 메디나를 품은 히자즈 역시 1872년 빌라예트로 개편되었고 기존에 오스만 총독이 제다에서, 샤리프가 메카에서 통치하던 체제 대신 내륙의 메카에 총독부가 세워졌다. 이로써 히자즈 지방은 중앙 정부의 통제 하에 놓였고, 샤리프들은 아들들을 코스탄티니예로 보내고 오스만 술탄이 그들 중에 후임 샤리프를 선정하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같은해 봄 수에즈 운하를 통해 홍해에 진입한 오스만 함대는 예멘의 오스만령 항구 호데이다에 상륙한 후 내륙의 사나로 진군하였다. 반세기 간의 혼란에 지쳐있던 주민들은 오스만 군을 환영하였고, 셰이크 무흐신과 이맘 알 하디 역시 저항 없이 항복하였다. 이로써 예멘 빌라예트가 세워졌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자이디 (카심) 왕조는 275년만에 사실상 멸망하였다. 이로써 오스만 제국은 1871 ~ 1872년간 불과 2년만에 영국에 복속한 아덴, 바레인, 오만을 제외한 홍해와 걸프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장악하였다.

2.4. 대 동방 위기

파일:오스만 1872.png
예멘 내륙 ( 사나)과 알 아흐사 ~ 카타르를 수복한 오스만 제국

압뒬아지즈의 일시적 성공은 1871년 동맹이자 근대화 모델이던 프랑스 제2제국의 멸망과 함께 위기를 맞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개혁을 이끌던 메흐메트 푸아트 파샤와 메흐메트 에민 알리 파샤가 사망하였다. 확실한 동맹과 믿음직한 대신들을 잃어버린 압뒬아지즈는 함대 건설에 집착하여 1875년 오스만 함대는 21척의 전함, 173척의 전선을 지니며 영국과 프랑스에 이은 세계에서 3번째로 큰 해군으로 발돋움하였다. 그러나 해군의 막대한 유지비에도 19세기 중반 들어 시작된 유럽식 별궁 건설 등 황실의 사치는 크림 전쟁 후 서유럽으로부터 차관을 빌린 후에도 지속되었다. 또한 19세기 들어 강한 자치권이 주어진 (사실상 잃어버린) 세르비아, 이집트, 루마니아. 레바논에 비해 새로 정복된 곳들은 제국의 재정에 이익보다 주둔 비용이 더 나가는 비효율적인 영토였다.

파일:오스만 불가리아 봉기.png
불가리아 4월 봉기

그러한 상황에서 1873년 제국의 핵심 지역인 아나톨리아에 대가뭄이 들었고, 이듬해에는 홍수까지 겹치며 대흉작으로 이어졌다. 이미 서유럽 채권자들로부터 이자 독촉을 받는 상태에서 이는 결정타였고, 1875년 10월 30일 압뒬아지즈는 국가 파산을 선언하였다. 이후 국채 상환을 위해 나머지 지역들에 대한 증세에 나섰는데, 그렇지 않아도 제국의 지배에 반발하던 발칸의 기독교도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1875년 헤르체고비나 봉기를 시작으로 이듬해 봄에는 불가리아 4월 봉기가 터졌다. 비록 후자는 1만이 넘는 학살과 함께 진압되었지만, 그로써 촉발된 1877년의 러시아와의 전쟁은 세르비아/몬테네그로/불가리아의 사실상 독립으로 이어지며 오스만 제국의 발칸 패권을 다뉴브 이남에서조차 붕괴시켰고 제국에 충성하는 알바니아 & 불가리아와 수도 간의 소통을 어렵게 하였다. 다만 사건이 더 커지기 전인 1876년 5월 30일, 미트하트 파샤 등 장관들의 압력으로 압뒬아지즈는 퇴위당한다.

2.5. 퇴위와 의문사

파일:마흐무트 오스만 영묘.jpg
압뒬아지즈가 묻힌 마흐무트 2세 영묘

퇴위 후 압뒬아지즈는 톱카프 궁전으로 보내졌는데, 하필이면 셀림 3세가 살해된 방이 주어졌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압뒬아지즈는 베일레르베이 궁으로 옮겨줄 것을 청하였으나 거절되었고 대신 1871년 자신이 츠라안 궁전(Çırağan Sarayı) 옆에 건설한 페리예 궁전(Feriye Sarayı)이 주어졌다. 그곳에서도 안전에 불안을 느낀 그는 6월 5일 아침, 수염을 다듬는다며 가위를 달라고 하였다. 몇시간 후 압뒬아지즈는 욕탕에서 사체로 발견되었으며, 팔에 난 상처에서는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공식적인 사인은 자살이었으나 미심쩍은 점이 많았고, 많은 음모론이 제기되었다. 특히 이슬람교에서는 자살을 구제받지 못하는 최악으로 취급하기에 더더욱… 퇴위 후 압뒬메지트 1세의 큰아들인 무라트가 무라트 5세로서 제위를 이어받았으나 중증 정신질환자였던 그가 93일 만에 폐위되어 둘째인 압뒬하미트가 압뒬하미트 2세로서 제위에 올랐다. 음모론 중 하나는 압뒬하미트가 암살했다는 설이다.

3. 건축

파일:오스만 베이렐베이 궁전.jpg
1865년 여름 별장으로 지어진 베일레르베이 궁전(Beylerbeyi sarayı). 보스포루스의 아시아 쪽에 세워진 첫 대규모 유럽식 궁전이다.
파일:오스만 시라간 궁전.jpg
파일:오스만 시르간 1.jpg
1863-7년 돌마바흐체 궁전 근교 해안에 세워진 츠라안 궁전(Çırağan sarayı). 조카 무라트 5세가 퇴위 후 평생 지낸 곳이기도 하다.
파일:오스만 모스크.jpg
파일:오스만 모스크 19세기.jpg
1869-72년에 걸쳐 세워진 페르테브니얄 발리데 술탄 모스크. 압뒬아지즈의 모후인 페르테브니얄의 주선으로 세워진 황실 예배당이다.

4. 여담

  • 1869년 수에즈 운하 개통식에 향하며 1868년 돌마바흐체 궁전을 방문한 나폴레옹 3세의 황후 외제니 드 몽티조가 압뒬아지즈의 형제 중 한명의 팔짱을 끼고 정원을 둘러보다가, (외간 여성의 사적 공간 출입에) 분노한 발리데 술탄 페르테브니얄에게 뺨을 맞는 일이 있었다. 이는 국제적인 분쟁을 일으킬 뻔했다.
  • 문학과 음악에 조예가 깊던 압뒬아지즈는 클래식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는데, 이는 런던 오스만 궁정 음악 아카데미에서 발행한 European Music at the Ottoman Court 앨범에 수록되어 있다. 압뒬아지즈가 직접 작곡한 음악 중 한 곡을 들어보자.


곤돌라의 노래(Gondol şarkısı), 압뒬아지즈 작곡
  • 1867년 서유럽 순행 도중 방문한 파리, 런던, 빈 등지의 박물관에서 감명을 받은 압뒬아지즈는 코스탄티니예에도 박물관 설립을 명한다. 다만 실제 건립은 후대 압뒬하미트 2세 치세인 1891년 이루어졌다. 이때 세워진 박물관이 그 유명한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İstanbul Arkeoloji Müzesi)인데, 당시 박물관 설립에 크게 기여하고 초대 박물관장직을 맡았던 오스만 함디 베이(Osman Hamdi bey)가 당시 내전과 전운의 기운으로 위험에 처한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일대의 유물들을 싸그리 다 가져와서 인류역사상 최초의 평화조약문(카데시 전투 이후 이집트와 히타이트 사이의)과 알렉산드로스의 석관과 같은 세계적인 컬랙션을 보유하는 박물관이 되었다. 주로 고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헬레니즘 시대의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1] Abd'ül aziz [2] 이름의 뜻은 압둘라, 압뒬하미트, 압뒬학, 압뒬카림과 같이 아랍어로 종, 노예를 뜻하는 abd(압드) 돌림이다. 압뒬아지즈는 '성스러운 자의 종'이라는 뜻으로 알라의 99가지 이름 중 하나인 알아지즈(Al-aziz, 신성한 분)에서 따왔다. [3] 수니파의 칼리파 겸직. [4] 압하지야 왕가의 공주 [5] 우비흐 왕가 공녀 [6] 압하지야 귀족 가문 공녀 [7] 메흐메트 압뒬아지즈의 아버지 [8] 다만 해당 역사는 임시 건물이었고, 후대인 압뒬하미트 2세 대에 현재의 역사가 세워진다. [9] 1866년 조공 증대에 대한 보답이었다. 이 조공은 오스만 제국이 영국, 프랑스에 차관을 빌릴 때에 보증금으로 제시되었는데 1875년 파산 선언 후 영국이 이를 관리하게 되었다. 이집트 케디브국 역시 1879년 우라비 반란 시에 영국군이 주둔하며 보호국으로 전락하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