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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스 왕조 제16대 칼리파
알 무타디드 المعتضد بالل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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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이름 |
아부 알 아바스 아흐메드 이븐 타이하 알 무와팍 أبو العباس أحمد بن طلحة الموفق |
출생 | 854/ 861년 |
아바스 왕조 사마라 | |
사망 | 902년 4월 5일 (향년 41/48세) |
아바스 왕조 바그다드 | |
재위 기간 | 아바스 칼리파 |
892년 10월 15일 ~ 902년 4월 5일 (9년) | |
전임자 | 알 무타미드 |
후임자 | 알 무크타피 |
별명 | 알 무타디드 빌라흐(المعتضد بالله: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자) |
부모 |
아버지 : 알 무와파크 어머니 : 디라르 |
종교 | 이슬람 수니파 |
[clearfix]
1. 개요
아바스 왕조 제16대 칼리파. 알 문타시르 사후 오랫동안 이어진 왕조의 혼란을 수습하고 중흥을 이끌었다.2. 생애
854년 또는 861년 사마라에서 아바스 왕조 10대 칼리파 알 무타와킬의 아들 중 한명인 알 무와팍크와 동로마 제국에서 끌려온 여노예 디라르의 아들로 출생했다. 862년 알 문타시르가 사망한 이래, 870년까지 여러 칼리파가 튀르크 장성들에게 살해당하는 "사마라의 무정부 시대"가 벌어졌고, 제국 각지에서는 독립을 꾀하는 여러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다 870년 그의 삼촌 알 무타미드가 튀르크 장성들의 추대를 받아 칼리파로 즉위하면서, 사마라는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은 튀르크 근위대와 아버지 알 무와팍크에게 있었다. 알 무와팍크는 최고 사령관으로서 칼리파 정부와 튀르크군 사이의 중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정적들을 제거하고 지지자들을 끌어모아서 차츰 나라의 통치권을 장악해, 882년부터 891년 사망할 때까지 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활약했다.알 무와팍크가 집권할 당시, 아바스 왕조는 이라크 외부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권을 상실했다. 이집트는 알 무와팍크와 시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다투던 아흐메드 이븐 툴룬이 세운 툴룬 왕조의 지배하에 놓였고, 동방 영토 대부분은 아바스 왕조의 충실한 속국이었던 타히르 왕조를 몰아낸 사파르 왕조에 넘어갔다. 아리비아 반도 역시 아바스 왕조의 통제에서 벗어났고, 타바리스탄에서는 자이드파가 세운 알라비 왕조가 권력을 잡았다. 이라크에서도 흑인 노예들이 일으킨 잔즈 반란이 일어나 바그다드를 위협했으며, 급진적인 이스마일 시아파인 카르마티아인 역시 수시로 습격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알 무와팍크는 왕조의 붕괴를 막기 위해 오랫동안 투쟁했다. 그 결과 사파르 왕조의 바그다드 공략 시도를 저지했고, 잔즈 반란을 수습해 이라크를 보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툴룬 왕조가 시리아를 장악하고 사파르 왕조가 동방 영토의 패자가 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전장에서 종횡무진하는 아버지를 따랐다. 특히 잔즈 반란 토벌전에 참가해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고, 나중에는 1만 군대 사령관으로 부임해 883년 8월 잔즈 반란군의 중심지인 알 무크타라를 함락시켰다. 그러나 884년 그의 군사 노예들이 바그다드에서 무와팍크의 대리인 사이드 이븐 마클라드에 대항한 폭동을 일으켰다가 진압되면서, 그와 아버지 알 무와팍크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885년 아흐메드 이븐 툴룬이 사망하자, 알 무와팍크는 그에게 이집트 공략을 맡겼다. 그러나 이 공격은 실패로 끝났고, 알 무와팍크는 툴룬 왕조가 이집트와 시리아의 통치자가 되는 걸 인정해야 했다. 이후 알 무와팍크와 그는 사파르 왕조로부터 파르스를 탈환하려 몇 차례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889년 아버지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891년 5월까지 지하 감옥에 갇혔다. 그러던 중 바그다드 사령관 아부 알 사크르가 알 무와팍크가 다른 곳에 가 있는 틈을 타 칼리파 알 무타미드를 제거하여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알 무와팍크는 반란을 제압한 뒤 자신이 부재할 때 혈족이 자신을 대신하게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그를 석방했다. 891년 6월 알 무와팍크가 사망하자, 그는 즉시 아버지의 직책을 계승했다. 하지만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892년 4월 30일 알 무타미드의 아들 알 무파와드의 칼리파 계승권을 박탈하고 자신을 1순위 후계자로 내세웠다. 6개월 후인 10월 14일 알 무타미드가 과식과 과음으로 사망하자, 그는 곧바로 칼리파에 등극했다.
2.1. 치세
2.1.1. 외정
알 무타디드 즉위 시의 압바스 조 직할령
그는 칼리파에 즉위하자마자 군사 활동을 개시했다. 먼저 이라크, 자지라, 페르시아 서부(지발) 등 아바스 왕조의 핵심 영토에 대한 확고한 통제권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는 자지라에서 아미드와 디야르 바크르의 통치자 아흐메드 이반 이사 알샤이바니, 타길리비 족장 함단 이븐 함둔과 맞붙었다. 아흐마드는 893년 샤이반에서 생포되었고, 함단 이븐 함둔은 도주했으나 추격대에게 잡혔다. 이후 함단의 아들 후세인 이븐 함둔이 그에게 귀순하는 조건으로 아버지를 석방해달라고 요청했고, 그는 이를 받아들였다. 후세인은 아바스군의 주요 지휘관이 되어 896년 카와리즈파의 수장이자 반란군 수괴였던 하룬 이븐 압둘라를 체포해 바그다드로 압송하여 십자가형에 처하는 등 여러 공적을 세웠고, 함단 가문은 점차 자지라에서 권력을 장악해 훗날 함단 왕조를 건국했다. 899년, 그는 자지라를 재침공하여 아흐마드의 아들 무함마드를 아미드로부터 축출하고 후계자로 지명한 알 무크타피를 총독으로 임명해 아미드를 다스리게 했다.
한편, 이미 이집트와 시리아에 확고한 세력을 갖춘 툴룬 왕조에 대해서는 유화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는 일시불로 20만 디나르를 주고 연간 30만 디나르를 바치는 대가로 툴룬 왕조가 더 이상 영토를 확장하지 않게 했고, 툴룬 왕조의 통치자 쿠마라웨이 이븐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자지야의 두 지방인 디야르 라비아와 디야르 무다르를 반환하기로 했다. 이 조약은 쿠마라웨이의 딸 카타르 알 나다와 그가 결혼하면서 이뤄졌고, 그는 아내의 지참금으로써 100만 디나르를 더 가져왔다. 그러던 896년 쿠마라웨이가 내부 반란으로 피살당하고 어린 아들들이 잇따라 칼리파로 세워지면서 툴룬 왕조가 혼란에 빠지자, 그는 이 때를 틈타 대대적인 공세에 착수해 매년 여름마다 서방 원정을 떠나 툴룬 왕조를 밀어붙였다. 그 결과 홈스 북쪽의 시리아 전역이 그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이제는 툴룬 왕조가 아바스 왕조에 45만 디나르를 바쳐야 했다. 이후 툴룬 왕조의 추종자들이 아바스 왕조로 잇따라 투항하면서, 그의 위세는 갈수록 강력해졌다.
한편, 그는 동방 영토에서 강대한 위대를 떨치는 사파르 왕조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지발, 레이, 이스파한은 아바스 왕조의 소유가 되었고, 파르스, 호라산, 이란 동부 일대는 사파르 왕조의 소유가 되었다. 그러면서 사파르 왕조가 아바스 왕조를 명목상 종주국으로 인정하게 했다. 한편, 알 무와팍크로부터 호라산 총독으로 선임된 용병대장 라피 이븐 하르타마는 트란스옥시아나의 사만 왕조와 동맹을 맺고 독자적인 세력을 갖추었다. 그는 888/889년에 타바리스탄을 침공하여 큰 타격을 입혔고, 찰루스 강 전투에서 자이드 지도자 무함마드 이븐 자이드를 격파했다. 이후 카즈빈으로 진군한 뒤 889/890년에 레이로 진군하여 그곳에 지휘부를 세웠다. 그런데 알 무와팍크가 사망한 뒤 칼리파가 된 알 무타디드가 그에게 사파르 왕조와 맺은 협약에 따라 레이를 직접 통치하기로 했으니 그곳에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라피가 거부하자, 그는 아흐메드 이븐 아브드 알 아지즈 이븐 아비 둘라프가 이끄는 군대를 파견하여 그를 공격했다.
라피는 이에 맞서 무함마드 이븐 자이드와 화해했고, 금요일 기도를 자이드의 이름으로 낭독했다. 896년, 라피는 호라산을 침공하여 니샤푸르를 점령하고, 그곳에서 자이드의 이름으로 기도문을 낭독했다. 심지어 아바스 왕조의 검은 깃발 대신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흰색 깃발[1]을 군기로 고르며 칼리파에게 제대로 개겼다. 그러나 알라비 왕조가 약속한 지원군은 제때 도착하지 않았고, 그 사이에 라피는 알 무타디드와 연합한 사파르 왕조 군에 의해 니샤푸르에서 축출되었다. 그는 호라산에서 호라즘으로 후퇴한 뒤 재차 맞서 싸웠으나 끝내 전사했고 그의 수급은 베어져서 바그다드로 이송되었다.
898년, 알 무타디드는 사만 왕조의 지배를 받던 트란스옥시아나의 총독으로 사파르 왕조의 통치자 암르 이븐 알 레이트를 임명했다. 이후 사만 왕조와 사파르 왕조는 서로를 적대시했고, 900년 아므르가 사만 왕조군에게 참패해 사로잡혔다. 사만 왕조 통치자 이스마일 이븐 아흐마드는 암르를 쇠사슬에 묶어 바그다드로 보냈고, 아므르는 902년 알 무타디드가 사망한 직후 바그다드에서 처형되었다. 알 무타디드는 아므르의 작위를 이스마일에게 수여하여 회유한 뒤 파르스와 키르만을 되찾으려 노력했지만 사파르 왕조의 잔당들에게 패퇴했다. 아바스 왕조는 알 무타디드 사후 8년이 지난 910년이 되어서야 파르스 지방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한편, 카르마티아인들은 897년부터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했다. 899년, 아부 사이드 알 잔나비 휘하의 카르마티아인들은 바레인을 공략했고 이듬해에 알 아바스 이븐 암르 알 가나위가 이끄는 아바스 왕조군을 격파했다. 이들은 알 무타디드 사후 잔즈 반란 이후 아바스 왕조가 직면한 가장 위험한 적으로 부상했다. 같은 시기 이슬람 세계의 주변부에 더 많은 반 아바스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프리키야에서 파티마 왕조가 권력을 장악했고, 예멘에서는 또다른 자이드파 왕조가 세워졌다.
이렇듯 수많은 내부의 적들을 상대로 분투하며 왕조의 영향력을 어느정도 회복했으나, 900년경에 큰 실책을 저질렀다. 이븐 아부 엘사지가 타르수스의 유명 인사들과 결탁하여 디야르 문다르 지방을 장악해 아바스 왕조로부터 독립하려는 음모를 꾸민 정황이 드러나자, 엘사지를 체포해 처형하고 타르수스의 함대를 파괴해버린 것이다. 타르수스 함대는 지난 수십 년간 동로마 제국 함대를 수 차례 무찌르고 해안 지대를 맹렬히 습격할 만큼 강력한 집단이었다. 그런 그들을 손수 없애버렸으니, 동로마 함대가 활개를 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동로마 함대는 이 때를 틈타 데메트리아스 항구를 약탈했고, 동로마 육군은 해상보급을 토대로 국경 지대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해 아바스 왕조와의 사이의 무인 지대를 점거하고 새로운 테마를 세웠다.
2.1.2. 내치
그는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아랍 역사 연구가 휴 케네디에 따르면, 당시 아바스 정부 지출의 80% 이상이 군대 유지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자연히 더 많은 세입을 확보하기 위한 개혁이 이뤄졌다. 이전에는 자체적으로 지방을 다스리는 에미르나 반 자치 총독들이 수도에 거둬들인 세금을 보냈지만, 그들은 세금을 빼돌리기 일쑤였다. 이에 중앙 집권 체계를 강화하기 위해 지방을 더 작은 세구로 나누고 디완의 수를 늘려서 세수입을 늘리는데 훨씬 더 면밀한 감독을 하도록 했으며, 에미르와 총독들에 대한 감찰을 좀더 착실하게 진행해, 정부에 세금을 꼬박꼬박 바치도록 유도했다.한편, 그의 시기에 고위 관료들은 세습을 허용받았다. 재상 우바이드 알라 이븐 술레이만 이븐 와흐브는 892년 알 무타디드가 즉위한 이래 901년까지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고, 901년 우바이드가 사망한 뒤 아들 알 카심이 뒤를 이었다. 또한 아바스 왕조의 핵심 지역인 이라크의 재정은 처음에는 바누 푸라트 가문이 담당했고, 899년부터는 바누 푸라트 가문의 라이벌인 바누 자라 가문이 담당했다. 두 가문은 아바스 왕조 정부를 향후 수십년간 지배하면서, 종종 권력을 공고히하기 위해 전임자들에게 벌금을 매기고 고문을 가했다.
그는 사마라에서 바그다드로 수도를 옮기는 사업을 완료했지만, 기존의 도시를 그대로 사용하는 대신 티그리스 강 동쪽 강둑에 새 도시를 세웠는데 그가 세운 도시는 오늘날까지도 바그다드의 중심지로 남아 있다. 또한 도시의 관개 네트워크를 복구하는 데 신경썼고, 진흙으로 뒤덮인 두자일 운하를 청소하면서 이를 통해 이익을 얻는 지주들이 그 비용을 감당하게 했다. 이와 동시에, 토지세를 수확 전 대신 수확 후에 징수되도록 하여 농부들의 부담을 덜어줬다.
그는 통치 초기부터 수니파의 전통을 중시하는 한발리파를 확고히 옹호하여 무타질라 학파의 신학 활동을 금지했고, 한발리파가 불법으로 간주하는 재산을 책임지는 재정 부서를 폐지했다. 또한 자이드파와 격렬하게 대립하면서도 다른 시아파와 화해를 도모했고,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적수이자 우마이야 왕조의 창시자인 무아위야 1세에게 공식적으로 저주를 내리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지만, 고문들이 "그랬다간 후폭풍이 엄청날 것이다"라며 말리자 단념했다.
하지만 무타질라 학파를 후원한 알 마문 시대의 과학 열풍을 되살리고자 노력했으며, 그리스 문헌 번역가이자 당대의 수학자 중 한 사람인 타비트 이븐 쿠라와 문법학자 이븐 두라이드, 알 자히를 후원했다. 이중 이븐 두라이드와 알 자히는 그의 자녀들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그의 스승이었던 아흐마드 이븐 알 타이브 알 사라흐시는 바그다드의 시장 감독관이 되었지만, 896년 그의 분노를 사 처형되었다.
그는 형벌을 엄격하게 집행하기로 유명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평소에는 관료들의 실수를 너그럽게 봐주었지만, 중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 궁전 아래에 특별한 고문실을 건설해 온갖 기발한 방법으로 죄인들을 고문했다. 알 마수디, 알 사파디 등 이슬람 연대기 작가들은 그가 죄수들에게 가한 온갖 고문들을 설명했다. 심지어, 그는 바그다드 대중 앞에서 고문을 집행하는 장면을 공공연히 보여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두 연대기 작가들은 이러한 엄격함 덕분에 흐트러졌던 기강이 바로잡힐 수 있었다며 긍정적인 평을 내렸다.
2.2. 사망
알 무타디드 사망 시의 압바스 조 직할령. 이란 서부, 자지라, 시리아 북부가 추가되었다.
알 무타디드는 902년 4월 5일 하사니 궁전에서 사망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중병에 걸렸을 때 의사들의 충고를 따르기를 거부했고, 심지어 한 의사를 발로 차 죽였다고 한다. 사후 바그다드의 서쪽에 있는 타히리드 궁전에 묻혔다. 그의 통치기에 자지라, 시리아 북부, 지발 등을 직접 지배령으로 수복하고 툴룬 왕조와 사파르 왕조로부터 형식적인 충성을 받아내면서 왕조의 통합을 겉으로나마 달성했고, 내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여전히 제국 각지에는 반 아바스 정서가 팽배했고, 군대 유지에 필요한 세금 관리를 위해 비대해진 관료제 역시 왕조에게 상당한 부담을 안겼다.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려면 그처럼 정력적인 지도자가 필요했으나, 아바스 왕조에겐 불행하게도 뒤를 이어 칼리파에 등극한 알 무크타피는 능력은 있지만 아버지처럼 정력적이지 않았던 인물이었으며, 그나마도 908년에 일찍 사망해 버렸다. 그 후 아바스 왕조는 1136년 알 묵타피가 등장하기 전까지 쇠락의 길을 걸어갔다.
[1]
당연하게도 시아파의 상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