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종파 (마드하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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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흐마드 이븐 한발이 개창한 학파로, 이슬람 주류 순니 학파 중 가장 보수적이다.[1]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등 무슬림 공동체의 15%가 이 학파를 따르고 사우디아라비아는 한발리파의 주장을 그대로 국법으로 채택했다. 자히리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한발리파에서 더 나가면 와하브파가 되고, 한 발자국 더 나가면 사이드 쿠틉, 알카에다,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같은 극단과격파가 된다.2. 기원
한발리파를 이해하려면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8세기 아라비아 사회에서는 무으따질리( 무타질라) 학파나 자흐미야 학파가 유행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도 매우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압바스조 칼리프들과 관료들은 무으따질라의 학파를 공식적으로 지지하는 상황이었으나 당시 압바스조의 신민들은 이들의 새로운 주장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꼈다.무으따질리 학파는 그리스와 헬레니즘 철학의 영향 및 힌두교, 불교 철학과 마니교 철학의 영향을 골고루 받아 이성을 삶의 제1의 요소로 보았으며 논리적 추론을 중시하고 자유주의적인 주장을 펼쳤다. 종교에 논리를 대입하려고 하니 제대로 답이 나오지 않았고, 답이 나오지 않은 것은 이슬람의 중요한 요소라도 배제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들은 논리와 이성으로 신의 영역에 접근할 수 있다고 보는데 이대로면 꾸란이 일점일획의 오류도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들의 이해를 위해 임의로 창조했을 수도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2]
무으따질리파의 주장은 성경 해석의 역사와 비슷하다. 무함마드가 계시를 받았을 때부터 현재까지 이슬람의 기본적인 꾸란관은 '꾸란에 오류라고는 일점일획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으따질리파는 꾸란이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임의로 창조한 것으로, 조금의 오류도 없다는 말은 틀렸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어찌 보면 현대 가톨릭의 성경관과 유사한 셈이다.
이는 이슬람 사회에 두 가지 충격을 주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무함마드를 부정하고[3] 꾸란의 절대성에 반박했기 때문이다. 자흐미야 학파는 여기서 더 나아가 사후세계를 부정하고 허무주의를 수용하였다.[4]
2.1. 아흐마드 빈 한발
압바스 칼리프조의 7대 칼리파 알 마문은 무으따질라 학파를 지원하던 사람으로 바그다드의 율법학자들 중 무으따질라 학파의 신학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불만을 품고 반역을 할 수 있다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 알 마문은 바그다드의 율법학자들을 대상으로 꾸란이 창조되었는지 영원불변한 것인지를 질문하였고 단 두 명의 율법학자들 빼고는 모두 꾸란이 창조되었다는 무으따질라 학파에 공개적으로 동의하였는데 동의하지 않은 두 명 중에는 한발리파의 시조가 되는 아흐마드 빈 한발이 있었다.아흐마드 빈 한발은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에서는 아랍인이라고 홍보하지만 조상 대로 올라가면 페르시아인 혈통을 물려받았던 사람이다. 그는 기억력이 무척 좋은 사람이었으나 성격이 대단히 완고한 사람이었다고 전해진다. 법정에서 무으따질라 학자들과 논박을 벌였는데 무으따질라 학파 측에서 수사학과 논리학을 바탕으로 한발을 반박하면 한발은 원리원칙만 고수하며 일체의 타협이나 양보를 거부했고 결국 법정은 무으따질라 학파 편을 들면서 한발은 감옥에 수감되었다.
3. 초창기 역사
한발리파는 초창기에는 체계적인 학파가 아니었다. 이븐 한발은 그냥 ' 꾸란은 신의 말씀 그 자체이므로 절대적인 권위가 있다.'고 주장하고 꾸란 해석의 바탕은 반드시 하디스뿐이어야 한다고 못을 박아 버렸을 뿐 추가적으로 이런저런 말을 덧붙인 것이 없다. 이후 이븐 한발의 제자 중 한 명이었던 무함마드 알 부카리가 하디스 모음집을 편찬하고 하디스의 신뢰성에 등급을 매기면서 한발리파는 점차 체계성을 갖춘 학파로 발전해 나갔다. 오늘날 와하브파들은 무함마드 알 부카리가 한발리파에 속한 사람이라고 주장하지만[5] 성격이 온화했던 부카리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강직하고 완고했던 이븐 한발과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사람이었고 종교관도 차이점이 없지 않았다. 알 부카리와 이븐 한발이 사망하기 전에 직접 교류한 제자들은 대개 샤피이파 법학파 소속이었다. 무함마드 알 부카리의 이슬람관이 모호하다고 비판하면서 새로 <사힛 무슬림>이라는 하디스 편집본을 새로 편찬한 " 아불 후세인 나이사부리(بو الحسين النيسابوري)"야말로 오늘날의 한발리파의 직계 기원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나이사부리도 샤피이파였다.하디스 편집본들이 확립되면서 이슬람 세계에서는 무타질라파 같은 사변철학의 입지가 축소되었고 부작용으로 하디스를 광신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미 중세 말에 그리스-로마 의학을 계승하여 발전하던 당대의 이슬람 의학이 불온하다며 무슬림들은 하디스에 기록된 예언자 무함마드가 알려준 민간 요법 외에 의학으로 치료받으면 안 된다고 개소리를 지껄이는 이들도 생겨났다. 즉, 오늘날 보코 하람의 시조로도 볼 수 있다.
예언자 무함마드는 우리에게 종교를 설파하기 위해 온 것이지 민간 요법 같은 잡동사니를 가르치러 온 것은 아니다. 예언자의 언행에서 나오는 의학과 관련된 언급을 결코 강제적 성격을 지닌 율법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이븐 할둔
이븐 할둔
도저히 참다못한 다른 무슬림들은 상술한 이븐 할둔의 사례처럼 "예언자는 종교를 알려주려 온 거지, 민간요법 의술을 알려주러 온게 아니니까 제발 그만하라."며 항의하곤 했다. 이븐 할둔도 음악을 금기시하던 보수적인 학자였는데도 이런 말을 책에 적었을 정도니 이들의 비상식적인 횡포를 알 만 했다.
중세의 한발리파는 주류 교파가 되지는 못했지만 대신 이븐 한발이 칼리프 알 마문, 알 무타심과 대치한 일은 바그다드의 순니파 시민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945년 부와이 왕조긴 바그다드를 장악하고 아바스 조의 칼리파들을 꼭두각시로 삼았는데 이를 계기로 991년부터 수니파 주민들은 시아파랑 계속 충돌하였다. 1051년에는 시아파들이 이븐 한발의 묘지를 불태우려다 저지당하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수니파들이 시아파 모스크들과 성묘들에 계속 불을 질렀기 때문이었다.
4. 이븐 타이미야 그리고 한발파의 중흥
이후 비주류로 전락했지만 이 사상이 널리 퍼지게 된 시기는 십자군 전쟁 이후였다. 몽골 제국의 침략과 십자군 전쟁 양면전선에 시달리던 이슬람 세계는 타종교에 대해서 더 배타적으로 변해 갔다. 몽골 침략자들이 세운 일 칸국에서는 무슬림들을 배제하고 기독교인과 유대인들을 우대했으며 십자군 전쟁으로 성지를 잠시나마 빼았겼던 이슬람 세계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6] 이 상황에서 이븐 타이미야라는 법학자는 아흐마드 빈 한발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시아파[7] 및 수피즘에 대한 맹공격을 퍼부었다.[8]이븐 타이미야의 주장은 튀르크족 통치자들의 노여움을 샀는데 이는 이븐 타이미야가 수피 무슬림들이 예루살렘을 성지순례하면서 승천 같은 기적을 바라는 일이 미신이라고 비판했기 때문이었다.[9] 결국 한발리파는 오스만 제국시 대까지도 계속 탄압당하다가 서구 제국주의 열강이 아라비아를 침략하고 식민화하기 시작하면서 와하비즘[10]이 사상적인 토대를 대강 갖추게 되고 이것이 현대 이슬람 근본주의와 이슬람 극단주의로까지 흐르게 된다.
하지만 이븐 타이미야를 이슬람 극단주의의 토대가 된 만악의 근원이라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도 안 되는데 일단 수백년 전 사람을 갖다가 현대 이슬람 근본주의의 뿌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마키아벨리가 제2차 세계 대전의 원형이라는 식의 지나친 비약이 된다. 오히려 이 사람 자체는 현대인 기준으로 매우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당시 이슬람권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예배 드리고 꾸란을 베고 잠자면 우주 한가운데로 여행할 수 있다~ 같은 주장을 하며 순진한 사람들의 돈을 챙기는 돌팔이 수준의 율법학자들이 매우 많았는데 이븐 타이미야는 역사적 사료를 바탕으로 "예루살렘에서 예배하고 꾸란 베고 자면 천국 간다고 누가 그러던?"이라며 이런 돌팔이들한테 반박을 가하는 등 오늘날의 근본주의자들과는 전혀 다른 상식적인 행동으로 유명해졌다.
이븐 타이미야가 없었다고 해도 이슬람 극단주의가 안 생겼다는 보장은 없을뿐더러[11] 정작 이븐 타이미야의 학설 중 온건한 학설 상당수는 묻히다시피 했다.[12] 당시 상술한 돌팔이 무슬림 성직자들하고 이븐 타이미야 및 그 후계자들이 열심히 치고 받은 선례가 없었더라면 이슬람권은 중세 유럽의 돌팔이 성직자들의 전횡 비슷한 일이 횡행했을 수도 있었다. 아니, 횡행하고 있었다. 중세에도 사이비 성직자들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가리지 않고 문맹인 농민들을 상대로 혹세무민을 행했는데 중앙아시아에는 이를 비꼬는 속담이 전해진다.[13]
영험하다고 알려진 한 성묘가 있었다. 이곳은 쿠란에 나오는 위대한 고대 이스라엘 예언자의 무덤으로 알려졌는데, 이곳에서 성묘를 향해 절을 하고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유명했다. 성묘를 관리하던 성직자는 자신의 제자에게 당나귀 한 마리를 주고 다른 곳으로 내보냈다. 당나귀를 타고 가던 성묘 관리인의 제자는 여정 도중 당나귀가 병들어 죽자 그동안 정들었던 당나귀가 죽은 게 가슴아파 당나귀를 땅에 묻은 후에 넋 놓고 울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에게 왜 우냐고 물어보니 그는 자신의 소중한 친구가 이곳에 죽어 묻히게 되어 슬퍼서 운다고 답했다. 이후 당나귀가 없어서 더 이상 여정을 할 수 없었던 성묘 관리인의 제자는 당나귀의 무덤을 장식하고 그 근처에 집을 지어 살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당나귀의 묘에서 소원을 빌면 영험한 효과를 얻는다는 소문이 퍼졌고, 당나귀 무덤 근처에 오두막을 지은 성묘 관리인의 제자는 이곳이 쿠란에 나오는 이스라엘 예언자의 무덤이라고 주장한 뒤 더 많은 성묘객을 얻고 이들이 주고 간 돈으로 새로 석조저택을 지었다. 나중에 제자는 자신이 스승과 함께 머무르던 성묘로 찾아간다. "그나저나 여기 뭍혀계시던 분은 누구십니까? 진짜 예언자 XXX가 맞습니까?" "아, 여기 묻혀 계시는 분은 당신 성묘에 묻힌 친구의 아버님이라네."
전근대 지식인들의 주요 사회적 의무 중 하나는 바로 이런 돌팔이 성직자들에게 고증학적 근거를 가지고 반박하는 것이었다. 이븐 타이미야는 당시 지식인의 의무를 수행했을 뿐이었다. 물론 이븐 타이미야가 긍정적인 영향만 남긴 것은 아니었으며 부정적인 영향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언어 교육이 있다. 그는 아랍어 이외에 언어를 일부러 배우는 것은 불신앙을 숨기는 위선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모국어 이외에 다른 언어를 배우고 사용하면 사고방식이 조금 달라질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를 전적으로 불신, 위선으로 싸잡어 몰아 버리는 것은 극단이나 아집이다. 이븐 타이미야가 '외국어를 배우는 일은 불신앙과 위선'이라고 주장한 것을 오스만 제국의 성직자들이 그대로 배껴서 밥그릇 싸움할 때 잘 써먹었고 그 결과 오스만 제국의 통역들은 주로 기독교도 출신자[14]와 유대인들이 담당하였다.
역설적으로 이븐 타이미야의 억지 주장 때문에 제국에서 통역 일을 맡은 유대인들은 아랍인 무슬림보다 훨씬 대우를 받았고 덕분에 이들은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같은 대재앙도 가까스로 피해갈 수 있었다.
아흐마드 빈 한발의 사상을 계승한 이븐 타이미야의 저서는 샤피이파 학자 몇몇이 그의 사상을 계승하고 결정적으로 이븐 카시르의 유명한 쿠란 주해서가 이븐 타이미야의 해석을 상당 부분 반영하면서 오스만 제국 시대에도 소실되지 않고 계속 보존되었다. 이렇게 전해진 한발리파 이븐 타이미야의 해석은 와하브파의 시조가 되는 무함마드 빈 압둘 와하브에게 직접 영향을 주었다.
5. 여담
이성에 따른 판단 및 비판적 사고를 금지하는 수구 학파로 알려져있는데 적어도 중세 기준으로는 틀린 설명이다. 한발리파는 본래 이라크, 시리아 지역의 도회지 상인들을 중심으로 발전한 학파인데 인간의 이성적인 판단 자체를 금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15]한발파가 이성과 비판적 사고를 제한하는 방향으로 수구화된 결정적인 계기는 이븐 압둘 와하브[16]가 아라비아반도 나즈드 유목민들에게 와하브파 신학을 교육하고 전파시킨 것에 있다.
[1]
수니파의 4대 종파를 보면
하나피파,
샤피이파,
말리키파, 한발리파가 있는데 사실 한발리파를 제외하곤 테러와는 연관이 적다고 한다. 한발리파가 가장 반
세속주의,
원리주의적이고 그 한발리파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게
와하브파와 살라피파(
살라프파)라고 한다.
[2]
당시 이슬람 사회는 꾸란이 오직 유일한 삶의 진리이고 이성이란 바로 하나님이 금지한 것을 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시대였다.
[3]
그뿐만 아니라 쿠란에서도 인정받는 예수는 물론이고 쿠란과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자들도 철저하게 부정했다.
[4]
이들은 불신자로 규정되어 정식 이슬람의 사상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그래서 300년 만에 소멸했다. 반면 무으따질라 철학은 쉬아파에서 적극 흡수되었다. 그러나 시아파 극단주의자들도 알카에다 못지 않게 답 없는 사람이라는 거...
[5]
정확하게 말하면 부카리는
샤피이파 소속이었고 대신 자신의 하디스 수집본의 검수를 받기 위해 직접 바그다드로 가서 이븐 한발을 만난 적이 있다.
[6]
십자군 전쟁 이전에는 이슬람 세계가 기독교권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던 상황이었는데 그 상황에서 성지를 빼았겼으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7]
시아파는 무으따질라 철학을 적극 수용했다.
[8]
다만 이븐 타이미야 역시시대 정황상 몇몇 수피 교단과 친분은 있었다.
[9]
예루살렘은 당시에도 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무슬림 순례자들이 많았으며 이들 덕분에 예루살렘을 통치하던 투르크인 통치자들도 짭짤한 소득을 올렸었다.
[10]
와하브파의 기원이 되는 압둘 와흐하브는 이븐 타이미야의 저서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11]
수피 중에도 여성인권에 대해 적대적이라던지 타 종교에 대해서 대단히 배타적인 종파들이 많다. 유명한 전투민족인
튀르크족이 왜 수피즘을 좋아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12]
이븐 타이미야는 비무슬림이 영원히 지옥불에서 고통받게 된다는 이슬람 주류 학설을 믿지 않았으며 비무슬림이건 무슬림이건 죄의 계산이 끝나면 천국에 올라간다는 견해를 가져서 비판을 받았다. 또한 꾸란의 2장 256절에 나오는 “종교에는 강요가 없다”는 문장을 폐기된 계시로 보는 견해를 지지하지 않고 앞으로도 기독교도와 유대인에게 일정 수준의 권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논문을 남긴 바 있다.
[13]
당시 중앙아시아
카슈미르에는 파슈툰족 수피들이 참배하던 예수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장소가 있던 것은 물론 사마르칸트 일대에는 현지
부하라 유대인들이 참배하던
다니엘의 묘지가 있으며(참고로 다니엘의 묘지는 이란의 수사에도 있고 이라크에도 꽤 많다...
#) 알려지지 않은 모종의 과정을 거쳐 마태의 유골이 오늘날 키르기스스탄의
이식쿨 호 근방에 있는
네스토리우스파 수도원 내에 보관되어 참배객들의 주머니를 털기도 했다.
[14]
파나리오테스 항목 참조
[15]
비교하자면 한발리파는
여성 할례를 금지하지만 샤피이파 중에서 이집트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인도네시아 지역 무슬림들은 전통적으로 여성 할례를 시행한다.
[16]
와하브파의 시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