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 칼리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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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스 왕조 제10대 칼리파
알 무타와킬 جعفر بن محمد المعتصم بالل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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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이름 |
아부 알 파딜 자파르 이븐 무함마드 알 무타심 비라흐 جعفر بن محمد المعتصم بالله |
출생 | 822년 3월 31일 |
아바스 왕조 바그다드 | |
사망 | 861년 12월 11일 (향년 39세) |
아바스 왕조 사마라 | |
재위 기간 | 아바스 칼리파 |
847년 8월 10일 ~ 861년 12월 10일 (14년) | |
전임자 | 알 와시크 |
후임자 | 알 문타시르 |
별명 | 알 무타와킬 알아 알라(المتوكل على الله: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 |
부모 |
아버지 :
알 무타심 어머니 : 슈자 |
종교 | 이슬람 수니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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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바스 왕조 제10대 칼리파. 아바스 왕조 황금기의 마지막 칼리파이다.2. 생애
822년 2월 또는 3월 바그다드에서 아바스 왕조 제8대 칼리파 알 무타심과 호라즘 출신의 노예 첩인 슈자 사이에서 출생했다. 그는 847년 8월 이복형 알 와시크가 사망할 때까지 별다른 역할을 맡지 않았기 때문에, 초기 생애는 불분명하다. 847년 8월 10일 알 와시크가 수종에 시달리다 후계자를 지명하기 전에 사망했다. 이에 관료들은 논의 끝에 알 와시크의 어린 아들들 대신 그를 칼리파로 세우기로 결의했다.그는 칼리파가 된 직후 형을 치료했던 무함마드 이븐 아브드 알 말리크를 긴급 체포해 칼리파를 잘못 치료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로 전 재산을 압수했다. 무함마드는 가혹한 고문에 시달리다 847년 11월 2일에 사망했다. 또한 칼리파가 되기 전에 자신을 모욕했던 알 자이야트를 체포해 가혹한 고문을 가하여 살해했다. 849년 바그다드에서 열린 연회에서 저명한 튀르크 장군 이타크 알 카자리가 술에 취한 나머지 자신한테 고꾸라졌다는 이유로 체포해 감옥에 집어넣었다. 이타크의 집에서 금화 디나르 백만 닢이 발견되자 그는 분노해 이타크를 태양빛과 열이 가득한 사막 한 가운데에서 철창에 가둔 채 방치하도록 했다. 결국 이타크는 갈증에 시달리다가 그해 12월 21일에 사망했다. 얼마 후 마흐무드 이븐 알 파라즈 알 나이사부리가 자신이 예언자라고 주장하며 봉기했다가 바그다드에서 체포되었고, 감옥에 수감된 뒤 잦은 구타에 시달리다 850년 6월 18일에 사망했다.
851~852년, 아르메니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아바스 총독을 살해했다. 이에 부그하 알 카비르 장군을 보내 이들을 진압하게 했다. 부그하는 반란군을 토벌한 뒤 853년 트빌리시를 공격해 황폐화시켰으며, 반란군 수괴 이샤크 이븐 이스마일을 생포했다. 그러나 855년 5월 22일, 동로마 제국 함대가 환관 다미아누스의 지휘하에 나일강 삼각주의 동쪽 끝자락에 있는 다미에타로 파견해 사라센 함선들을 모조리 불태우고 무기고를 파괴하며 많은 포로를 잡아들였다. 856년 킬리키아 아나자르부스에 동로마군이 들이닥쳐 무슬림들을 살해했다. 아랍 문헌에 따르면, 약 300척의 함대로 이뤄진 제국 함대가 에게 해와 시리아 해안 일대를 3차례 이상 공격했다고 한다. 그는 이 일련의 사태에 분노했고 힘스에 살던 기독교인들을 동로마 제국과 내통하고 있다는 혐의를 씌워 추방했다.
856년, 부자흐(Bujah)에서 금광 개발에 동원되었던 현지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세금 납부를 중단하고 상이집트 일대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는 알쿰미를 파견해 이들을 진압하게 했다. 7척의 보급선과 함께 나일 강을 따라 거슬러 진군해 험난한 지형에 숨은 반란군을 끈질기게 추적하여 모조리 토벌하고 광산을 탈환했다.
이라크 사마라의 마스지드 유적과 말위야 미나레트
대 모스크 일대. 시내 남부에도 발굴 조사가 한창이다.
이렇듯 동로마 제국의 침략과 잦은 반란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그는 수도 사마라 일대에 많은 건축물을 남겼다. 그중 대표작은 848 ~ 852년에 걸쳐 완성된 대 모스크 (마스지드)로, 무려 17개의 회랑을 갖춘 당대 최대 규모의 사원이었다. 또한 나선형의 말위야 (ملوية)[1] 미나렛은 52m의 높이를 자랑하며 당대 서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그외에도 사마라에 20여개의 궁전을 세웠고 도시를 북쪽으로 확장시켰다. 9세기 중반 무렵 사마라는 바그다드, 콘스탄티노폴리스, 장안 등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사마라의 유적지구 넓이만 1만 5천 헥타르가 넘는데 그 대부분이 그의 시대에 지어졌다. 그의 치세동안 사마라 일대의 건축에 들어간 예산은 2억 디르함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859년부터 사마라 시내에서 북쪽으로 15km 가량 떨어진 옛 아시리아 ~ 페르시아 도시 유적 인근에 알 자파리야[2]라는 신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먼저 세워진 아부 둘라프 모스크 (جامع أبو دلف)는 사마라 대모스크에 버금가는 규모를 자랑한다. 두 사원의 넓이는 각각 5만 제곱미터에 이른다. 또한 둘다 높은 나선형의 미나렛이 특징인데 둘라프의 미나렛은 33m 로 말위야의 축소판이다. 자파리야의 운하 건설은 유대계 기술자인 신드 이븐 알리가 맡았다. 860년경 조로아스터교에서 신성히 여기는 천년이 넘은 측백나무를 베어 자신의 궁전 기둥으로 쓰이게 하였다. 이에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은 분노했고, 얼마 후 해당 목재가 도착하기 전에 그가 사망하면서 신의 징벌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한편, 그는 선대 칼리파들이 시아파에게 관용을 베풀었던 것과는 달리 12 이맘파의 10번째 이맘인 알리 알 하디를 사마라로 소환하여 가택 연금했다. 이는 메디나 총독 압둘라 이븐 무함마드가 시아파들이 그를 칼리파로 내세워 반란을 꾀한다고 밀고한 데서 비롯되었다. 다만 시아파들이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죽이지는 않았다. 또한 시아파의 상징이었던 후세인 이븐 알리의 모스크를 파괴해, 시아파들이 그곳을 순례하는 걸 막았다. 또한 알 무타심에 의해 투옥되었던 한발리파의 시조 아흐마드 빈 한발을 석방하고 무타잘리 학파에 대한 지원을 축소했고 알 마문 치세 말기부터 도입되었던 미흐나(종교 재판)를 폐지했다.
850년, 그는 기독교인와 유대인들에게 '꿀색' 모자와 벨트를 착용해야 하며, 재산의 10분의 1을 몰수하고 궁정에서 더 이상 일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시행되었는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학자들은 대체로 박해의 증거가 없다고 여기지만 이집트 태생의 영국의 이슬람 학자 밧 예올(Bat Yeʼor)은 알 무타와킬의 치세 동안 비무슬림은 지즈야를 3배나 지불해야 했으며, 교회는 수시로 약탈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반란을 진압하고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이끌기 위해 튀르크 장성들과 노예 병사들을 계속 의지했다. 그러나 말년에 튀르크 장성들의 권세가 갈수록 강해지는 걸 경계하여 트집을 잡아 처형했고, 튀르크인들은 차츰 그에게 반감을 품었다. 그는 849/850년에 장남 알 문타시르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차남 알 무타즈를 점차 총애했다. 알 무타즈는 아바스 왕조의 기존 엘리트들의 지지를 받은 것으로 보이며, 알 문타사르는 튀르크 장성들과 노예 근위대의 지원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861년 가을, 그는 튀르크 장군 와시프의 영지를 몰수하고 알 무타즈를 지지하는 알 파르트 이븐 카칸에게 넘기라고 명령했다. 이에 튀르크 장성들은 곧 대대적인 숙청을 벌어질 징조라고 여기고 그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고, 아버지로부터 숱한 모욕을 당하고 심지어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받은 알 문타시르 역시 가담했다. 얼마 후 와시프와 다른 튀르크 장성들이 12월 12일에 체포되어 처형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를 전해들은 공모자들은 거사를 개시하기로 했다. 알 타바리에 따르면, 알 무타즈의 지지자인 알 파르트와 우바이드 알라는 튀르크 여성으로부터 음모를 경고받았지만 무시했다고 한다.
861년 12월 10일 밤, 튀르크 병사들은 그와 알 파르트가 식사 중이던 방에 침입했다. 알 파르트는 칼리파를 지키려다가 살해되었고, 그 역시 곧바로 살해되었다. 공식적으로는 칼리파가 술을 마시다가 질식사했다고 발표되었다. 다음날 알 문타시르가 칼리파로 등극하고 동생들이 칼리파 계승권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알 문타시르는 862년 6월 7일에 급사했고, 아바스 왕조는 대혼란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