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6 14:05:11

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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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이슬람의 3대 성지
메카 메디나 예루살렘
카바 예언자의 모스크 알 아크사 모스크
바위의 돔
파일:What-is-the-kaaba-in-islam.jpg
파일:kaaba-a2wif1x8on9qihxv.jpg
카바의 모습

1. 개요2. 역사3. 구조4. 내부5. 검은 돌6. 키스와7. 부속 구조물
7.1. 하팀7.2. 이브라힘 성소7.3. 잠잠 우물
7.3.1. 역사7.3.2. 안전성 논란
8. 마타프 외부9. 대중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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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바(الكعبة, Kaaba)[1]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 있는 이슬람의 제1성지이다. 전 세계의 이슬람 교도들은 메카를 향해 절을 하며 예배를 드린다고 알려져 있는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메카에 있는 이 카바를 향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이슬람 율법에 따르면 아브라함 이스마엘이 지은 신전으로서, 알라가 직접 건설을 지시했고 알라에게만 봉헌된 첫 신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사람들은 우상을 섬기기 시작했고 카바 역시 우상들로 더럽혀졌다. 그렇게 우상들로 오염되었던 것을 무함마드가 다시 유일신 알라에게만 바쳐진 신전으로 되돌렸고, 지금까지도 무슬림 최고의 성지이자 생애 한 번은 반드시 순례해야하는 성스러운 장소로 남아있다. 매년 200~300만 명의 무슬림들이 전세계에서 이 곳으로 순례를 온다.

카바 신전 내부는 향로와 기둥 3개 정도를 빼면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이다. 워낙 신성시되는 장소라서 아무나 못 들어갈 것 같지만 사람들이 내부를 청소하려고 가끔씩 출입한다고 한다.[2] 아무나 청소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왕족, 장군, 최고위 사제 등 사회지도층들이 청소를 도맡아서 들어간다. 이 곳을 청소하는 것마저도 영광스러운 일이기 때문. 이 곳이 너무나도 신성하기에 카바 일대를 포괄하는 거대한 건물군을 마스지드 알 하람 (مسجد الحرم)이라 부르는데, 하람 (금기)일만큼 신성한 마스지드 라는 뜻이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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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초창기의 카바 무함마드 시기의 카바
카바 신전 자체는 이슬람교가 등장하기 전부터 이미 존재했다. 무슬림들은 기원전 2000년 경 아브라함 이스마엘 대홍수 직후 이 카바 신전을 세웠다고 믿는다.[3] 무슬림들은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이 카바를 세우기 이전에도 신에게 바쳐진 신전들은 여럿 존재했지만, 신이 직접 건설을 지시하고 축복을 내린 신전은 이 카바가 최초라고 주장한다. 신은 천사들을 보내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이 카바를 건설하는 작업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신전이 완공되자 신이 직접 축복을 내렸고, 매년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이 곳을 정기적으로 순례토록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점점 신에게서 벗어났다. 사람들은 우상과 거짓된 신들을 섬기기 시작했고, 카바는 아라비아 반도에 사는 다양한 베두인 부족들의 사원으로 전락했다. 사막에 흩어져 살던 베두인 부족들은 음력으로 매년 한 번씩 이 곳으로 순례를 왔는데, 이 성스러운 땅에서는 함부로 칼을 들고 싸울 수도 없었기에[4] 부족 간 교류의 장 역할을 톡톡히 하곤 했다. 당시에는 이 카바 신전 안에 수많은 다양한 형상들의 우상과 신상(神象), 성화들이 가득했다. 무함마드가 태어나기 400년 전에는 히자즈의 왕이 '후발'이라는 신의 우상을 카바 꼭대기에 세우기까지 했다. 이 우상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오른손이 부서져 황금으로 대체한 독특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더럽혀지던 카바 신전은 선지자 무함마드의 탄생과 이슬람교의 발흥으로 다시 신의 품으로 돌아갔다. 무함마드는 630년 메카를 정복했고,[5] 그가 메카를 정복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카바 신전 내부에 있는 360여개의 다신교 우상들을 모두 깨부수는 것이었다.[6][7] 무함마드는 632년 죽음이 임박하자 마지막으로 이 곳으로 '고별 순례'를 했고, 그 이래 1400년 동안 모든 무슬림들은 생애 한 번씩은 이 카바를 참배할 의무를 짊어졌다.

무슬림들의 절대적인 성소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이 카바도 파괴되고 훼손당한 적이 있다. 마지막 정통 칼리파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죽고 우마이야 왕조가 패권을 잡기 직전까지의 혼란기 중, 우마이야 왕조와 메카의 토착 세력 이븐 주바이르 간에 전쟁이 일어났고 이때 카바가 심각하게 파괴당했다. 이븐 주바이르는 내전기 도중 자기식대로 카바 신전을 개축했고, 훗날 주바이르가 패배하자 승리한 우마이야 왕조는 주바이르가 개축한 카바 신전을 아예 헐어버리고 무함마드의 시대 모습 그대로 되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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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의 카바 신전 오스만 제국 시기의 카바
930년의 하지 기간에는 시아파의 소규모 분파였던 카르마트 아바스 왕조에 반란을 일으키고 메카를 공격해 약탈했다. 특히 이 카르마트는 카바 신전에 박혀있던 검은 돌을 빼내갔고, 신성한 잠잠 우물에 무슬림 순례객들의 시체를 던져넣어 메워버리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신성 모독 행위를 펼쳤다.[8] 다만 카르마트의 봉기는 곧 진압됐고 검은 돌은 952년에 다시 카바 신전으로 돌아왔다. 그 이래로 1100년 동안 카바 신전의 모습은 거의 변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됐다.

다만 몇백년 주기로 가끔씩 카바 신전이 파손되는 일이 있긴 했다. 1625년에는 홍수로 인해 카바 신전의 벽이 무너지고 모스크가 파손되며 오스만 제국 무라트 4세가 직접 최고급 화강암을 보내 복구토록 했다. 1916년에는 알리 빈 후세인 아랍 반란을 일으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며 메카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오스만 공군이 메카를 폭격하는 과정에서 카바의 신전 덮개에 불이 옮겨붙는 참사가 났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오히려 아랍 혁명군들이 반오스만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프로파간다용으로 써먹는 역효과를 불러일으키고야 말았다.

지금의 카바는 사우디아라비아 최고의 성소이자 순례지로, 매년 250만 명이 성지순례 기간에 이 곳을 방문해 참배한다.

3.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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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메카 하면 떠오르는 검은색 신전이다. 외벽은 녹색빛 또는 회색 화강암으로, 내부는 대리석 석회석으로 만들었다. 외벽을 기준으로 하면 면적은 12.04 × 10.18 m 에 높이는 15 m 정도로, 전세계의 이슬람교 신자들이 매일 여기 방향으로 큰절을 한다는 위상에 비하면 별로 크지 않다.

건물 외벽에는 키스와(Kiswah)라는 검은색 비단천을 드리운다. 키스와에는 금실로 쿠란 구절을 새겨 장식해 둔다. 때때로 키스와를 교체하느라 일꾼들이 카바 꼭대기에 올라가기도 한다. 이렇게 키스와를 교체하거나 혹은 순례자들이 몰려 키스와 안쪽, 카바 신전의 외벽이 그대로 보일 때도 있는데, 녹색빛 도는 회색에 가깝다. 참고로 키스와의 가격은 한번 교체할 때마다 550만달러가 든다고 한다. 이 첨가된 비단이라 그렇다는 듯.

파일:Kaaba.png
사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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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검은 돌 (الحجر الأسود)
아래 '검은 돌' 문단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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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브 알 라흐만 (باب الرحمة)
일명 ' 자비의 문'. 카바의 북동쪽 면에 만들어진 출입문.[9] 지면에서 약 2.13m 위에 있다. 현재의 황금빛 문은 1979년 아흐마드 빈 이브라힘 바드르가 만든 300kg 짜리 황금 문이다. 원래는 아흐마드의 아버지가 만든 은제 문이 1942년부터 달려있었는데 이걸 떼내고 대신 단 것. 이 카바 신전의 문들은 떼낸 이후에도 소중히 보관된다. 현재 보존된 가장 오래된 문은 무려 1635년에 달려있던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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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미자브 알 라흐마 (مِيزَاب الرَّحْمة)
카바 신전의 빗물 배수통. 순금으로 만들었고 현재의 배수통은 1626년에 만들어졌다. 카바의 지붕에서 물을 빼내는 용도다. 카바의 천장은 평평하지만 북서쪽 모퉁이 방향으로 비스듬히 경사져있는데 이 북서쪽 모퉁이 끝에 배수통이 달려있는 것. 길이는 약 258cm, 구멍 너비는 26cm, 벽 내부에 58cm 가량이 박혀있다. 특히 비가 오면 이 아래가 난리가 나는데, 이 신성한 배수통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를 맞고 마시면 신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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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샤드헤르완 (شاذروان)
카바 신전의 세 벽면이 바닥과 닿는 부분에 만들어진 구조물. 빗물이 카바 신전의 기단을 약화시키는 걸 막기 위해 1627년 추가된 구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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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하팀 (حجر إسماعيل)
원래 카바 신전의 일부였던 낮은 반원형의 벽이다. 카바의 북서쪽 벽을 마주보고 있는 1.31m 야트막한 높이의 벽이지만 현재는 연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다. 무슬림들은 하팀과 카바 신전 사이의 공간 역시 카바 신전 내부로 취급하기 때문에 타와프 행사[10] 도중에는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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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알-물타잠 (ملتزم)
'검은 돌'과 출입문 사이의 2m 가량되는 좁은 벽면. 사진에 붉은 원으로 표시된 부분이 알-물타잠이다. 이 곳에서 신에게 기도를 드리면 더욱 효과가 좋다고 믿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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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마캄-이브라힘 (مَقَام إِبْرَاهِيْم)
아브라함이 카바를 지을 때 서있었던 작은 정사각형 모양의 돌. 길이와 너비가 40cm, 높이 20cm다. 카바를 쌓던 중 벽이 높아지자 아브라함은 이 돌 위에 올라가 섰는데, 그러자 돌이 기적적으로 솟아올라 아브라함이 쉽게 벽을 쌓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돌에는 발자국 2개가 찍혀있는데 무슬림들은 이게 아브라함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돌은 매년 교체되는 자수 천으로 덮여있고, 그 위에 금제 케이스가 덮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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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검은 돌의 모서리
'검은 돌'이 박혀있는 모서리. 카바의 네 모시리는 대략 동서남북을 각각 가리키도록 설계됐다. 검은 돌이 박혀있는 모서리는 동남쪽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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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예멘 모서리 (الركن اليمني)
카바의 남서쪽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남서쪽에 예멘이 있어서 '예멘 모서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설화에 따르면 무함마드가 여기를 손으로 만졌다고 하는데, 사람들도 무함마드를 따라 이 곳에 키스를 하거나 손으로 만지면서 기도를 하는데 이걸 '이스틸람(Istilaam)'이라고 한다. 그걸 수 천년동안 해온 탓에 모서리가 반질반질하게 닳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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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레반트 모서리 (الركن الشامي)
레반트가 있는 북서쪽 방향을 가리키고 있어서 '레반트 모서리'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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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라크 모서리 (الركن العراقي)
이라크가 있는 북동쪽 방향을 가리키고 있어서 '이라크 모서리'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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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키스와 (كسوة الكعبةكسوة الكعبة)
아래 '키스와' 문단 참조.

4.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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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바 내부 모습 카바 신전의 구조
카바 신전 자체는 정사각형 모양이지만, 내부 북쪽 모서리에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기 때문에 내부는 다각형 형태를 하고 있다. 두터운 대리석 플랫폼을 깔아놨기 때문에 신전의 바닥은 지면으로부터 약 2m 정도 더 높다. 카바 신전은 메카 주변에 풍부한 검은빛 화강암으로 지었고, 지붕은 스테인리스강으로 보강한 최고급 티크 목재로 만든 이중 지붕이다.

카바 입구 바로 맞은편 벽에는 비문이 새겨진 6개의 동판들이 있고, 입구쪽 벽에 2개의 동판이 더 붙어있다. 내부에는 기둥이 3개 있고 그 기둥들 사이에 작은 제단 하나가 있다. 이 제단의 용도는 확실치 않으나 아마 향유를 올려놓는 용도일 것이라고 추정된다. 타일을 붙인 내부의 벽은 13m X 9m 짜리 면적이다. 벽과 바닥은 최고급 백색 대리석으로 깔았고 거기에 어두운 검은 대리석으로 줄무늬를 넣어 장식했다.

천장과 벽의 위쪽 절반은 금실로 쿠란의 아랍어 비문을 새긴 연녹색의 천으로 덮여있다. 천의 연녹색 색깔은 일부러 하얀 대리석 벽과 어느 정도 톤을 맞춘 것이다. 관리인들은 카바의 검은색 외벽에 바르는 것과 똑같은 향유를 이 천과 벽에 주기적으로 바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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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바 내부 모습 회개의 문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들은 지난 수 천년 동안 전세계의 무슬림 군주들이 기부한 향로들이다.

카바 내부에는 3개의 목재 기둥들이 서있다. 둘레는 약 150cm, 직경은 약 44cm다. 짙은 갈색으로 가장 단단한 종류의 목재들만을 선별해서 깎았다. 선지자 무함마드의 동료 1350년 전에 이븐 주바이르가 처음으로 여기에 기둥을 세웠다. 심지어 주바이르가 세운 1350년 된 기둥 일부는 아직까지도 남아있어서 바로 옆의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카바 내부에는 계단으로 통하는 황금빛의 '회개의 문(bāb al-tawbah, باب التوبة)'가 존재한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온다. 문 바로 옆에는 1978년 칼리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의 시대에 문을 보수했다는 내용의 금속 명패가 붙어있다.

5. 검은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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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 외벽 동쪽 모서리에는 성스러운 물건인 '검은 돌(ٱلْحَجَرُ ٱلْأَسْوَد, al Hajar al Aswad)'이 박혀있다.

노출된 부분은 너비 16cm, 높이 20cm로,[11] 한 덩이 구체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7~8조각났다. 930년에 메카를 침공한 급진 시아파의 일원 까라미타파(Qaramita)가 돌을 가져가면서 깨진 것. 이후 되찾고 난 후에 으로 만든 끈으로 묶고 은으로 된 못을 박아서 고정했다. 우상숭배를 철저히 금지하는 이슬람의 원칙상 반드시 검은 돌에 입맞추거나 할 필요는 없겠으나, 무함마드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카바에 순례하러 온 사람들이 할 수만 있다면 역시 그렇게 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1년 365일 사시사철 순례객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어서 몇날 며칠을 있지 않으면 입 맞추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직접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손을 그쪽으로 뻗음으로써 대신하기도 한다.

메카에 성지순례 순례자들은 이 돌에 입을 맞춘 후 카바 신전을 반시계 방향으로 빠른 속도로 4번, 천천히 3번, 총 7번을 돌며 순회한다. (절에서 탑 주변 도는거랑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이 규칙은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이 이런 순서대로 했었다고 전해지기 때문에 지키는 것이며, 만약 횟수를 빼먹는다든지 속도 횟수가 어긋난다던지 시간이 늦어 제대로 하지 못했다든지 하면 순례가 무효가 되기 때문에 규정을 정확히 준수해야 한다. 이 외에도 지키지 않으면 순례가 무효가 되는 규칙이 여럿 있어 이것을 준수하고자 교육용 동영상을 만들어 배포하기도 한다.

검은 돌은 이슬람교 등장 이전부터 이미 카바와 함께 신성한 대접을 받던 성물이었다. 이슬람 설화에 따르면 아담이 천국에서 추방당할 적에, 신이 아담과 이브에게 제단을 지을 곳을 알려주기 위해 떨어뜨린 돌이라고 한다.[12] 원래는 눈부시게 새하얀 돌이었으나 이 땅에 내려와 수천년간 인간의 죄를 흡수하며 검은 돌이 되었다고. 이후 대홍수로 인해 잠시 잃어버렸다가 천사 가브리엘 아브라함에게 다시 찾아주었고 아브라함은 돌이 발견된 자리에 카바를 세웠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설화일 뿐이고 실제 역사 기록상으로는 서기 400년 이후에 등장한다. 서기 400년 이후에 등장하는 이유는 그 전에는 인지도가 없었거나 교류가 적어서 기록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13]

이 돌이 이슬람의 대표적인 성물이 된 것은 바로 선지자 무함마드 덕분이다. 특히 검은 돌은 선지자로 각성하기 5년 전인 35살의 무함마드와도 인연이 있다. 당시 메카에서는 화재가 일어나 카바를 복구하고 있었는데, 이때 검은 돌을 현재의 자리에 박아넣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검은 돌을 카바 신전에 박아넣을 것인지에 대해 다툼이 생겼던 것. 그때 짠하고 등장한 사람이 바로 무함마드였다. 무함마드는 모든 부족들의 장로들을 불러모아 천을 맞잡어 들게 한 다음, 그 천 위에 검은 돌을 올려놨다. 장로들이 천을 들고 검은 돌을 카바 신전까지 가져가자 무함마드가 직접 검은 돌을 현재의 위치에 박아넣었다. 630년 무함마드가 메카를 정복한 직후, 무함마드는 낙타를 탄 채로 경의의 뜻으로 지팡이로 검은 돌을 두드리며 카바 신전 주위를 7번이나 돌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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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돌에 키스하는 빈 살만 왕세자 검은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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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중요한 성물이지만 상당히 수난에 시달린 물건이기도 하다. 특히 683년 우마이야 왕조가 메카의 자칭 칼리파 이븐 주바이르와 전쟁을 벌일 때, 우마이야 왕조의 투석기에 맞아서 부서지는 바람에 이븐 주바이르가 순은을 이용해 다시 이어붙였다. 930년 1월에는 카라미타파가 검은 돌을 동부 아라비아로 훔쳐가면서 도난당한 적도 있다. 카라미타파는 자신의 모스크에 검은 돌을 박아넣었지만 무슬림들이 도난당한 검은 돌 대신 카바에 검은 돌이 있던 자리를 계속 숭배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카라미타파가 훔쳐간 검은 돌은 23년 후인 952년에야 다시 카바로 돌아왔다. 카라미타파는 아바스 왕조에게 검은 돌을 돌려받고 싶으면 막대한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했고, 아바스 칼리파가 돈을 지불하자 금요일 예배가 치러지는 쿠파의 대모스크에 검은 돌을 던져놓고 사라졌다.[14] 이때 검은 돌이 추가적인 손상을 입는 바람에 일곱 조각으로 산산히 부서졌다고. 아바스 왕조는 부서진 돌을 다시 하나로 합치기 위해 금세공인을 시켜 돌을 둘러쌀 금속 틀을 만들도록 했고,[15] 지금까지도 검은 돌은 비슷한 은제 틀에 감싸여있다.[16]

11세기에는 파티마 왕조의 칼리파 알 하킴이 보낸 사람이 검은 돌을 부수려 시도했지만 약간의 흠만 낸 채 실패하고 잡혀죽었다. 1674년에는 한 정신이상자가 똥을 던지는 바람에 더럽혀지기도 했다. 수니파들은 출처가 불분명한 증언을 주워듣고 한 페르시아인이 범인이라고 지목, 당시 순례를 온 페르시아인들을 보이는 대로 족족 잡아패는가 하면 메흐메드 알리가 1800년대에 다시 페르시아인의 순례를 허가할 때까지 페르시아인들의 순례를 금지했다. 근데 알고보니 진짜 범인은 이슬람을 혐오하던 유대교도 기독교도였다고. 그냥 시아파인 페르시아인들을 싫어했던 수니파들이 꼴보기 싫었던 페르시아인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던 것이다.

참고로 이 검은 돌의 정체는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운석 충돌 시 방출되는 고열로 인해 지구의 암석이 녹았다 굳어져 만들어진 유리질 광물인 텍타이트라는 가설이 가장 신빙성 있다고 한다. 약 6000년 전, 메카에서 약 1,100km 떨어진 룹알할리 사막 와바르 크레이터에 운석이 떨어졌는데, 이 때 생긴 텍타이트라는 것이다. 물론 2004년에는 와바르 크레이터가 고작 200~300년 전에 만들어진 크레이터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검은 돌이 운석처럼 생긴 돌일 뿐이라는 주장도 나오는 등 여러 가설들이 쏟아지고 있기에 확실한 건 아니다. 검은 돌의 정체를 확실하게 알려면 꺼내서 확인해봐야 하는데 사우디아라비아 측에서 절대 불가를 외치고 있기에 그 정체는 아직도 미스터리에 싸여있다.

6. 키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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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와를 벗겨낸 카바 신전 키스와 교체 모습

كسوة الكعبة. Kiswha. 카바 신전을 덮는 거대한 검은색 천. 보통 사람들이 카바를 보고 매끈매끈한 검은색 대리석에 금을 박아넣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자주 있는데, 사실 벽돌 건물에 거대한 검은빛의 천을 뒤덮은 것이다. 사우디 당국은 이 키스와를 매년 교체하는데 이때 벗겨낸 키스와는 잘라서 해외 정상들이나 왕족들에게 선물로 준다. 그래서 키스와는 남아있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키스와는 1544년에 만들어졌다.

카바를 천으로 뒤덮어서 모습이 드러나지 않게 하는 풍습은 이슬람 이전 시대부터 있었던 전통이다. 400년대 초 메카의 주르훔 부족이 처음으로 카바에 천을 덮기 시작했다. 이 풍습이 이어져내려오며 메카의 중심 부족인 쿠라이시 부족이 각 부족들로부터 매년 징수한 세금으로 키스와를 짜서 위에 덮어놓기 시작했던 것이다. 무함마드의 등장 이후에도 키스와를 덮는 전통은 유지됐고, 2대 칼리파인 우마르 이집트에서 제작한 흰색 리넨 천으로 키스와를 짜서 덮어놓았다.

우마이야 왕조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들도 꾸준하게 키스와를 공급했다. 칼리파들은 매년 최소 2벌의 키스와를 이집트에서 짜서 메카로 보냈다. 원래는 기존의 키스와를 교체하지 않고 그냥 새로운 키스와를 겹쳐서 계속 덮어놓는 방법을 쓰다가, 아바스 왕조의 무함마드 알 마흐디가 잘못하면 키스와의 무게로 카바 신전이 무너질 위험을 깨닫고 기존의 키스와들을 모두 빼내고 한 겹씩만 덮는 것으로 바꿨다. 키스와의 재질, 종류, 색깔 따위는 계속 바뀌었지만 생산지만큼은 항상 이집트로 일정했다. 맘루크 왕조 오스만 제국은 항상 이집트에서 키스와를 만들어 공급토록 했고 메흐메트 알리 역시 이 키스와 제조만큼은 도맡아서 책임졌다. 이 전통은 이집트 왕국 시절까지도 쭉 이어지다가, 이집트의 왕정이 무너지며 1962년 사우디아라비아로 완전히 옮겨갔다. 지금은 사우디 정부가 책임지고 키스와의 제조와 공급을 관리한다.

오늘날 키스와의 디자인은 매끄러운 검은색 천에다가 은실과 금실로 화려한 서예를 새겨놓은 모습이다. 670kg의 백색 실크를 검은색으로 염색한 다음, 거대한 기계를 이용해 47개의 천 조각들을 엮어낸다. 이 과정에서 샤하다의 구절들을 함께 천 안에 실로 박아넣는다. 그런 다음, 각 천 조각들을 직조기 위에다 펼쳐놓고 금실과 은실로 직접 손으로 쿠란의 구절들을 꿰매넣으면 된다. 자수를 다 꿰매넣으면 천을 다 하나로 꿰맨 다음, 백색 옥양목을 뒷면에다 덧대 쉽게 찢어지지 않도록 강화한다. 이렇게 완성된 키스와는 총 면적 658제곱미터, 비용은 약 2,200만 리얄로 한화 약 80억 원 정도가 소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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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잠 시타라

키스와에서 바닥으로부터 3분의 2 지점에는 금빛의 띠가 있는데, 히잠(hizam)이라고 부른다. 하나의 띠가 아니라 한 측면당 4개씩, 총 16개의 조각들을 합쳐놓은 것이다. 히잠의 총 길이는 47m, 너비 95cm다. 이 히잠에는 금실과 은실로 수놓은 쿠란의 구절들이 새겨져 있다. 히잠 아래 모서리 부분에는 '카르다쉬아트'라고 알이클라스[17]가 새겨진 정사각형 모양의 황금빛 천조각들이 모서리마다 하나씩 덧대어져 있다. 참고로 이 황금빛 천조각들은 탈부착식이다. 마치 곤룡포에 새겨진 용보와 비슷하다.

카바의 문쪽 바로 위에는 특별히 더 정교하게 자수가 놓인 황금빛 천부분이 있다. 이걸 '시타라'라고 부른다. 이 천조각은 키스와에서 가장 정교하게 장식된 부분으로, 평균 크기는 약 7.75m X 3.5m이며 4개의 천 패널들을 꿰매어 만든다. 각 패널들에는 쿠란의 구절들이 금실로 꿰매어졌다.

7. 부속 구조물

7.1. 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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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바의 북서쪽 벽면에 반원형으로 담장 같은 것이 있는데 아랍어로 하팀(حجر إسماعيل, Hatim)이라고 부른다. 이슬람의 전승에 따르면 하팀 아래에 아브라함의 아들이자 이사악의 이복형인 이스마일이 묻혔다고 한다. (하지만 이건 나중에 만들어진 이야기에 가까워서 일부 무슬림은 부정하기도 한다.) 따라서 카바를 일주하는 타와프 (طَوَاف)를 행할 때에도 순례객들이 하팀과 카바 사이를 들어오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18]

실제로는 메카가 이슬람화되기 이전 시대에 카바 신전에 바칠 동물들을 가둬두거나 기도하기 위한 공간으로, 카바 신전의 일부였다. 6세기 후반 메카의 쿠라이쉬 부족이 카바를 보수하며 현재 크기로 축소했고, 7세기 말엽 2차 피트나 당시 메카에서 칼리파를 칭한 압둘라 이븐 앗 주바이르가 다시 하팀을 포함한 크기로 카바를 중건했다가 그가 전사한 후 메카를 수복한 우마이야 왕조가 재차 기존 쿠라이쉬 시기의 정육면체에 가까운 크기로 환원하며 옛 카바의 일부였음을 표시하기 위해 담을 쌓은 것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것이다.[19]

7.2. 이브라힘 성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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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라힘 성소 시트라 아브라함의 발자국
이브라힘 성소(مقام إبراهيم). '마캄-이브라힘'이라고도 한다. 카바 동북쪽에 있는 둘레 1.4m에 면적 40cm X 40cm, 높이 20cm의 작은 바위로, 이브라힘 ( 아브라함)의 것으로 여겨지는 발자국이 찍혀 있다. 이슬람 전승에 따르면 이브라힘이 처음 카바 신전을 세울 때에 생긴 것이라 한다. 이브라힘이 카바의 벽을 쌓을 적에 벽이 갈수록 높아지자 옆에 있는 돌 위에 올라섰는데, 이 돌이 기적처럼 솟아오르며 이브라힘이 벽을 수월하게 쌓을 수 있도록 도와줬다고 한다. 게다가 이스마일이 이브라힘에게 돌을 건네줘야 할 때는 또 기적같이 아래로 내려오기를 반복했다고.

과거에는 카바의 키스와처럼 시트라로 불린 카펫으로 덮혀 있었지만, 최근 들어 도금된 연필 형태의 구조물로 둘러져 직접 만질 수는 없고 유리창을 통해 볼 수 있다.

7회 카바를 돌고 난 순례자들은 카바를 두른 아치의 이브라힘 성소와 카바가 일직선을 이루는 곳에 서서 잠깐 예배[20]를 드리는 것이 순나 (관행)로 여겨진다. 일부 쉬아 / 수피 성향 순례자들은 마캄 이브라힘의 창살을 잡거나 기대고 흐느끼며 기도하는 방언에 가까운 행위를 하기도 하는데, 딱히 제재되지는 않지만 정통 수니파 측에서는 비드아(탈선)로 여겨 좋지 않게 보는 편이다.

7.3. 잠잠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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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잠 우물의 현 구조 잠잠 물을 마시는 순례자들
잠잠 우물 (بئر زمزم). 이슬람 최고의 성수.

이스마엘이 어머니 하갈과 함께 메카의 사막을 헤맬 적에, 목이 말라 쓰러지자 솟아났다는 기적의 우물이다. 이후 이슬람권 최고의 성수로 지정되어 메카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마시는 물이다. 마셔 본 사람들 말에 따르면 이상한 냄새가 나며 금속맛이 강하고 약간 짜다고 하는데, 물을 구하기 힘든 옛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이 정도 우물물도 명수(明水)로 이름이 자자했다고 한다.[21]

다만 최근에는 하루에만 200만개의 컵이 소모되는 등 잠잠 물에 대한 수요가 너무 커지자 대량 생산하는 과정에서 변화가 있었는지 미각이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 특유의 물맛을 느낄 수 없고, 그냥 깨끗한 물맛이라고 한다. 또한 20세기 중반 카바 주변에 대리석 바닥을 깔면서 잠잠 우물은 철거되어 현재는 위치를 육안으로 확인 할 수 없이 카바를 도는 순례자들의 발 밑에 있다. 대신 파이프로 연결하여 한 곳에 모은 후 분배하여, 메카 곳곳에 잠잠 물통과 플라스틱 컵이 배치되어 있어 순례자들이 따로 물을 뜨지 않아도 손쉽게 잠잠 물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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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아래 우물에 설치된 전기펌프 우물 내부 물 속 모습
원래는 깊이 30m, 입구 지름 1.08m에서 2.66m 정도 되는 우물로 두레박으로 물을 퍼마실수 있었다. 그러나 근현대 들어서 사람이 지나치게 많이 모이자 더이상 전통적인 방식의 우물로는 그 수요를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고, 결국 사우디 정부 측에서 7억 리얄을 들여 우물에 대규모 전기 펌프를 설치해 물을 초당 18리터씩 퍼올리고 있다. 이렇게 퍼올린 물은 우물이 있던 자리에서 약 5km 남쪽에 위치한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온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에서는 이렇게 만든 수로 시스템에다가 정화조와 자외선살균 시스템을 갖춘 수질관리 시스템을 만들었다. 2개의 거대한 저수조가 있는데, 하나는 1만 큐빅미터짜리 저수조로 마스지드 알 하람 모스크의 수도꼭지로 연결된다. 여기서 메카의 순례자들이 물을 받아 마시는 것. 나머지 하나는 1만 6천 큐빅미터짜리 저수조로 파이프를 통해 저멀리 메디나 예언자의 모스크로 물을 공급한다. 파이프 뿐만 아니라 트럭 등 다양한 방법으로 물을 받아 운송하기도 한다. 매일 탱크트럭들이 15만 리터의 물을 퍼가고 순례기간 동안에는 40만 리터에 달하는 물을 메카와 메디나로 실어나른다. 메카와 메디나에서는 물을 작은 플라스틱 페트병에 담아 공짜로 나눠주기도 하는데 이렇게 하루에 70만 리터, 순례기간에는 하루에 200만 리터의 물을 나눠준다. 순례자들은 원하면 자기가 가져온 통 안에다가 물을 원하는만큼 담아서 가져갈 수도 있다. 해외로 수출하기도 하는데 규격화된 10리터짜리 통에 담아 하루 150만 병씩 판매한다. 물론 사우다아라비아 내에서도 생수로 유통되며, 무슬림이 아니어도 구매에 아무 제약이 없기 때문에 사우디에 방문하거나 체류한다면 충분히 구매가 가능하다.[22] 이렇게 펑펑 퍼올리다보면 물이 고갈될 걱정도 있겠지만, 사우디 정부 측에서도 1년에 약 50만 큐빅미터 정도를 상한산으로 보고 적당히 그 안에서 퍼올린다고 한다.

7.3.1.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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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되기 이전의 모습 오스만 제국 시절의 우물
이슬람 전승에 따르면 이스마일이 어머니 하갈과 함께 메카 일대에서 헤멜 적에[23] 목이 말라 쓰러지자 잠잠에서 물이 솟아나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24] 이스마일은 이 곳에 우물을 만들었으니 이게 바로 그 '잠잠 우물'이다. 잠잠 우물은 예멘에서 건너온 주르훔 부족이 메카에 정착해 신을 모독하자 그에 대한 징벌로 잠시 말라버렸다가, 선지자 무함마드의 할아버지 '아브드 알 무탈리브'가 다시 발견한다.[25]

아브드 알 무탈리브는 아들 아부 탈리브에게 우물을 넘겼지만 아부 탈리브가 돈이 없어 쪼달리는 바람에 소유권이 그의 형제 알 아바스에게 넘어갔다. 알 아바스는 우물물을 종교적 용도를 제외한 빨래, 식용으로 사용하는 걸 모두 금지하면서 잠잠 우물을 완전한 종교적인 성지로 만들었다.[26] 사람들은 이 우물 바로 옆에 '음용의 돔'을 세우고 그 돔 안에 우물물을 차갑게 보관했다. 이슬람 초창기에는 이 우물 옆에 2개의 구덩이를 또 파서 샘을 만들었다고 한다. 하나는 순례자들이 마실 용도고, 나머지 하나는 '우두'라고 하여 몸을 정갈히 씻을 용도였다. 이후 이슬람의 교세가 커지면서 잠잠 우물도 돔 건물이 씌워지고 화려한 모자이크화로 장식되는 등 갈수록 화려해졌다. 930년에 카르마타파가 메카를 침공해 검은 돌을 빼가고 잠잠 우물을 순례자들의 시체로 메워버리는 초대형 사고가 있긴 했지만, 얼마 안가 아바스 왕조가 다시 메카를 수복하며 우물도 다시 깨끗해졌다.

아바스 왕조가 쇠락하자 잠잠 우물을 관리하는 길드가 등장해 19세기까지 우물을 지켰다. 율법상으로는 누구나 우물에서 물을 떠갈 권리가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이 길드에 소속된 사람들만이 우물에 직접 손을 댈 수 있었다. 길드는 무상봉사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돈을 내야 물을 마시거나 씻을 수 있었다. 순례자가 길드원에게 돈을 쥐어주면, 길드원들이 주전자에 물을 떠오거나 순례자 위로 물을 부어 씻겨주는 서비스를 제공했다. 돈을 많이 쥐어줄수록 서비스가 좋아져서 순례자들이 집으로 가져갈 물을 따로 싸주거나 심지어 순례자가 메카에서 머무르는 숙소에 물을 배달해주기까지 했다고.[27] 연중무휴인데다가 상당히 수입이 짭짤했기에 19세기 후반에는 무려 50파운드를 내야 길드원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중요했던 우물이지만 지금 카바 신전 옆에서는 이 우물의 자취를 찾아볼 수가 없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에서 순례객들이 원활하게 카바 주변을 움직일 수 있도록 이 우물을 지면 아래로 묻어버렸기 때문. 1964년 사우디 당국이 우물을 덮고 있던 돔 건물을 허물었고, 얼마 안가서 우물을 허물고 우물 입구를 지면 2.5m 아래로 묻어버렸다. 그래서 현재 잠잠 우물 자체는 육안으로 확인이 불가능하며 카바를 도는 순례자들의 발 아래에 있다.

7.3.2. 안전성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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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되는 잠잠 우물물 대규모로 포장, 판매한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마시는 물이기에 사우디 당국에서도 매일 3번씩 우물에서 샘플을 채취해 안전성을 검사한다. 특히 순례객들이 쏟아지는 라마단 기간에는 하루에 무려 100개의 샘플을 채취해 안전성을 검사한다고.

다만 안전성 논란이 아예 없는건 아니다. 이 잠잠 우물물의 음용성 안전 문제는 심지어 1883년부터 시작된 논란인데, 영국인 과학자 에드워드 프랭클랜드(Edward Frankland, 1825~1899)가 제다 주재 영국 영사로부터 잠잠 물을 전달받아 분석해봤더니 런던의 하수보다 무려 6배나 많은 동물 분뇨가 검출됐던 것. 프랭클랜드는 메카에서는 사람들이 똥을 그대로 땅에 묻어버리기에 이 분뇨들이 그대로 지하에 있는 우물물로 들어갔다고 주장하며 당장 음용을 멈출 것을 권고했다.

네덜란드 대사는 이같은 제안을 담은 서한을 압뒬하미트 2세에게 보냈지만 당연히 이슬람권은 엄청나게 분노했다. 오스만 과학자들은 다시 잠잠 물을 떠서 자체적으로 분석한 결과, 별다른 안전 문제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프랭클랜드의 샘플에서 거의 바닷물만큼 염분이 많이 검출된 것을 지적, 샘플 자체가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다고 반박했다. 또한 메카 사람들은 잠잠 우물 근처에서 배변은 당연하고 목욕조차 함부로 하지 않으며 메카에서는 그 흔한 콜레라조차도 일어난 적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들며 프랭클랜드의 조사가 지극히 편향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어쨌든 이 사건 이후로 오스만 당국은 잠잠 우물 등 아라비아의 우물물의 수질을 본격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2011년 5월에도 또다시 똑같은 논란이 터졌다. BBC의 자체 조사 결과 잠잠 우물의 수도꼭지에서 채취한 물에서 영국의 법적 제한치의 3배에 달하는 질산염과 비소가 발견되었던 것. 당연히 사우디 보건당국은 즉각 성명을 내어 이를 반박했다. 사우디 당국은 잠잠 물이 마시기에 적합하며 비소 따위는 제대로 검출되지도 않았다고 주장, 공식적인 잠잠 물이 아니라 개인이 불법적으로 유통하는 비위생적인 잠잠 물에서만 해로운 성분들이 검출됐다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잠잠 우물물의 안전성 논란은 과학적으로 유해하다고 주장하는 서양권 VS 전혀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이슬람권 구도로 흘러가고 있다.

8. 마타프[28] 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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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와 마르와 사이를 걷고 뛰는[29] 순례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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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 언덕 앞에 모인 순례객들
  • 사파와 마르와 (الصفا والمروة)
카바 동쪽의 두 바위 언덕으로, 히자즈 산지의 일부이다. 북쪽의 마르와는 거의 평탄하고, 남쪽의 사파는 뾰족한 형태로 8m에 달한다. 이슬람 전승에 따르면 (알라의 명령으로) 이브라힘이 하자르 (하가르)와 이스마일 모자를 (미래의 메카가 될) 협곡에 두고 간 후, 하자르가 아들을 살리기 위해 물을 찾으려 이곳 저곳을 뛰어다닌 곳이라 한다. 그러다가 알라가 천사 지브릴 (가브리엘)을 보내 이스마일의 발 밑에서 솟아난 샘물이 바로 잠잠이라는 것이다. 순례자들은 이를 기념하며 카바를 7바퀴 돈 후에, 두 언덕 사이를 7번 오가는 사이 (سعي)라고 불리는 의식을 행한다.[30] 본래 자연 언덕이었으나 20세기 후반 들어 알 하람 사원이 확장되며 회랑 형식의 3층 규모 건물 내부에 자리하게 되었다.[31] 통로는 총 3개로, 2개는 각각 사파 -> 마르와 및 마르와 -> 사파 일방향이고 중간의 통로는 몸이 불편한 사람 전용이다. 사파 ~ 마르와 거리는 450m고, 7번 오가면 3.6km 거리이다. 전 구간을 카바를 돌 때처럼 맨발로 걷고, 중간에 초록불이 켜진 구간은 (남성의 경우) 뛰어서 가야 하기에 체력 소모가 생당하다. 따라서 중간 중간 잠잠 물통이 있어 수분 보충이 가능하다. 한편, 일부 초창기 무슬림은 자힐리야[32] 시기 메카의 다신교도들이 사파와 마르와에 신상을 올려두고 숭배한 것을 언급하며 둘을 오가는 의식을 거부하기도 했다 한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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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배당
카바를 포함한 알 하람 모스크 일대는 전부 기도를 위한 종교 시설이다. 다만 현대 들어 무슬림 수와 순례자 수가 모두 급증하여 기존의 카바를 둘러싼 광장 및 회랑만으로는 방문 인원을 수용할 수 없게 되자, 1950년대부터 대대적인 확장 공사가 벌어졌다. 그리고 80-90년대 사우디 국왕 파흐드의 치세에 카바의 남서쪽 방향에 거대한 예배 공간이 세워졌다. 2010년대부터는 카바의 북서쪽에 더 큰 규모의 예배 공간이 건설되고 있어, 알 하람 모스크의 면적은 매년 늘어나고 있다. 원칙상 남성의 경우 카바를 돌 수 있는 광장인 마타프 (مطاف) 일대는 이흐람이란 천 옷을 두르고 가야 하는데, 순례가 끝난 후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사람들과 메카 주민들이 최대한 카바 주변에서 예배를 드리길 원하기에 알 하람 모스크의 확장은 주변의 산을 깎고 시가지를 철거하는 한이 있더라도 계속되는 추세이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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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240122_015955.jpg 카바 남쪽에 있는 높이 601미터(2024년 현재 세계 4위)의 마천루. 카바 참배객들을 위한 세계 최대의 시계탑 및 호텔 기능을 하고 있다. 물론 숙박비는 매우 비싼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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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스러운 메카 도서관 (مكتبة مكة المكرمة)
알 하람 사원 건물군 동북쪽 외곽에 위치한 작은 도서관으로, 1951년 사우디 국왕 압둘아지즈 이븐 사우드가 무함마드의 탄생지라 전해 내려오는 곳(베이트 알 마울리드)에 건립하였다. 워낙 거대한 하람 사원과 비교하여 2층 규모의 소박한 건물이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다.

9. 대중 매체에서

Europa Universalis IV에서 기념물로 등장한다. 이교 상대 전쟁 점수 비용 -10%라는 미친 버프 때문에 이슬람 국가 한정으로 무조건 올려두어야 하는 기념물이자, 이슬람 국가 한정 아라비아 반도를 빠르게 정리해야 하는 유일한 이유다.


[1] 로마자로 Ka ‘bah로 적기도 한다. 국립국어원은 '카아바', '카바흐'는 잘못된 외래어 표기라 제시했다. 한국 이슬람에서는 '카으바'라고 쓰기도 한다. [2] 여담으로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성전에 우상인 이슈타르 신상을 꺼내는 등의 사건이 있었다. [3] 중론은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이지만 천사, 혹은 아담 이브가 지었다는 설도 있다. 이원복의 만화인 신의 나라 인간 나라 종교편에 의하면, 아담 이브 선악과 사건으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후에, 야훼에게 용서를 구하고자 세운 신전이라는 전승이라고 한다. 실제로 유대교 외경에는 돌로 제단을 쌓았다는 얘기가 나온다, 사탄의 유혹을 여러번 받은 뒤 아담 이브가 돌로 제단을 쌓아 제를 올리고 나중에는 자식들과 같이 제를 올렸다고 한다. [4] 이 검은 돌을 중심으로 약 30km 이내에서는 그 어떠한 전투도 칼싸움도 다툼도 모두 금지됐다. [5] 570년 경 메카에서 태어난 무함마드는 605년에 천사를 영접하고 선지자로 각성했다. 그는 이후 열심히 이슬람 신앙을 포교했으나 기존의 우상숭배가 득세하던 메카에서 그의 급진적인 주장은 반감을 불러왔고, 결국 무함마드는 622년 메디나로 쫒겨나고야 만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굴하지 않고 세를 모아 결국 8년 후 메카를 정복하고 돌아오는 데에 성공한다. [6] 8세기 경의 이슬람 학자 '이븐 이스하크'가 남긴 기록에는 이 카바 신전 내부에는 예수 성모 마리아의 초상화도 있었다고 한다. 다만 무함마드는 이 초상화는 부수지 않고 그대로 안에 놔두었다고. [7] 우상 가운데서 아브라함의 모습을 띈 조각상들과 초상화도 있었다고 기록되어있다.(무함마드는 아브라함 초상화를 보고 실제랑 이 그림은 다르다고 말했다고 함) [8] 카르마트파가 이런 난폭한 행위를 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순례의 의무를 폐지시키고, 이슬람의 순례, 단식, 예배 등이 내적 의미만을 지니는 단순한 종교적 상징일 뿐이라는 이들의 사상을 행동으로 입증하기 위함이었다. [9] 참고로 이 문이 있는 면이 바로 카바의 정면이다. [10] 하즈 행사의 주요 의식으로 카바 신전 주위를 7번 도는 행위를 일컫는다. [11] 노출되지 않은 부분까지 하면 더 크지만, 부서진 조각들을 어떻게 배열하느냐에 따라서 크기가 천차만별로 다르기 때문에 기록된 수치도 다 다르다. 가장 최근에 남긴 메흐메트 알리의 기록에 따르면 대략 길이 76cm, 너비 46cm였다고 한다. [12] 또다른 설로는 검은 돌 자체가 원래 낙원의 선악과를 지키는 천사였는데,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어버리는 바람에 그 죄를 받아 검은 돌로 변해버렸다는 설도 있다. [13] 굳이 이해하기 쉽게 비유하자면 단군이 지었다는 마리산 제단은 고조선 시기에 지었다고 하지만 실제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건 삼국시대쯤이다. [14] 여담이지만 이때 검은 돌을 훔쳐간 도난범 아부 타히르는 끔찍한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괴저성 염증에 시달리고 벌레들이 그의 살을 산 채로 파먹다가 고통스럽게 죽었다고 한다. [15] 이 틀이 여자 성기를 닮았다는 말이 아바스 왕조 시절부터 나왔다. [16] 하도 많은 사람들이 검은 돌과 함께 은제 틀을 만지기 때문에 은제 틀은 주기적으로 교체한다. 근현대에는 오스만 제국이 틀 교체 작업을 도맡아했는데, 그래서 오스만 제국의 황궁 톱카프 궁전에는 교체한 검은 돌의 은제 틀이 전시되어 있다. 그 외에도 카바를 덮는 검은 천 '키스와' 조각, 카바 신전의 열쇠도 전시한다. [17] 수라의 112번째 장인 알이클라스는 하나님의 영원함, 유일함, 우상숭배의 어리석음, 이슬람 유일신 사상의 "삼위일체의 부정"을 담고 있다. [18] 몇몇 사진들을 보면 인파에 밀린 것인지 가끔 순례객들이 그 안까지 들어가기도 한다. 실제로 가보아도 카바 벽을 만지기 위해서, 혹은 그 안에서 엎드려 기도하기 위해서 들어가려고 대기하는 인파가 많다. 하팀에 들어갈 수 있느냐는 순전히 본인의 의지와 카바에 배치된 사우디 보안 요원들의 마음에 달려있다. [19] 또한 이후 군주들이 자신의 마음에 따라 함부로 카바의 크기를 줄이고 늘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도 있다. 정육면체 크기를 취하되 직육면체 크기 시절도 표시해두어 일종의 절충안을 제시한 것. [20] 이맘 없이 각자 2번 라카아를 행한다 [21] 게다가 사막 기후인 아라비아반도는 강수의 부족으로 지하수가 발달하기 어렵고 메카가 바다에서 그리 멀지 않기 때문에 안그래도 수압이 약한 지하수에 해수의 유입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비가 많이 오지 않아 사막에 축적되는 염분이 충분히 씻겨내려가기 어렵기 때문에 지하수의 염분 농도가 높은 편이다. 잠잠 물은 pH가 약 7.9~8로 약알칼리성이며, 경도 399에 총미네랄함량(TDS)이 835 mg/l (ppm) 정도 되는 초경수다. 나트륨 함량은 133 mg/l 정도로 알려져 있다. [22] 실제로 잠잠 물을 현지 마트에서 구입해 마셨다는 사우디 체류 한국인의 글이 있다. # 가격은 일반 생수보다 2배쯤 비싸지만,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유통되는 다른 생수는 해수담수화를 통해 제조되기 때문에 현지에서 구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광천수 기반 생수라고. 맛은 국내에서 유통되는 생수와 비교해보면 확실히 차이가 느껴진다고 한다. 사실 에비앙보다도 광물질 함량이 2배 이상 많은 센물이기 때문에, 광물질 함량이 낮은 생수와 비교해보면 맛이 확실히 차이가 날 가능성이 높다. [23] 아브라함은 신의 명령을 받아 하갈과 이스마일을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인도했고, 그 곳에 그 둘을 남겨두었다. [24] 어떤 버전에는 하갈이 두 언덕 사이를 일곱 차례 왔다갔다하자 물이 솟아났다는 말도 있고, 목마른 이스마일이 발을 구르자 물이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고 대천사 가브리엘이 알려줬다는 전승도 있다. [25] 아브드 알 무탈리브는 이 우물에서 황금 가젤 상, 갑옷, 검 따위를 함께 발견했다고 한다. [26] 이 알 아바스의 후손들이 나중에 아바스 왕조를 세운다. [27] 길드원들은 돈을 더 많이 받기 위해서 해진 양탄자나 옷을 보여주며 자비를 구걸했다. [28] 카바를 돌 수 있는 원형 광장 형태의 공간 [29] 파란불 구간에서만 뛴다. 여성은 선택, 남성은 의무. 가운데 노약자로에선 안 뛴다 [30] 하가르도 7회 왔다갔다 했다고. [31] 3층에 걸친 통로 건설을 위한 평탄화 과정에서 언덕의 대부분이 파괴되고 정상부만 남게 되었다 [32] 이슬람 이전 시기 [33] 일부 학자들은 모리야와 스코푸스 산을 언급하며 사실 사파와 마르와는 예루살렘에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34] 다만 서쪽과 남쪽에는 고급 호텔들 및 알베이트 타워, 동쪽에는 사파&마르와 및 각종 행정기관이 있기에 현재 계획된 북쪽 방면 외의 확장은 어려워 보인다. 북쪽 확장의 경계는 다름아닌 제1 순환도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