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비우스 스틸리코 Flavius Stilich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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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몬챠 대성당 (약 395년 경 제작)[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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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 출생 | 359년 경 |
서로마 제국, 자세한 위치는 불명 | |
사망 | 408년 8월 22일 |
서로마 제국 라벤나 | |
국적 | 로마 제국 |
종교 | 기독교 |
가족 | 아내 세레나, 아들 에우케리우스, 딸 마리아, 테르만티아 |
지위 |
황제 호위대장(383년~390년) 로마군 최고 사령관(390년~408년)[2] 집정관(400년~408년) |
참전 전투 |
바스타르네이 전투(390년) 프리기두스 전투(394년) 북아프리카 반란(400년) 폴렌티아 전투(402년) 베로나 전투(403년) 플로렌티아 전투(405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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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장군, 2선 집정관. 게르만계 로마인으로, 사실상 무너져가는 서로마 제국의 충직한 군인이자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 행보에 대해서는 이론이 많지만 대체로 로마 제국을 위해 헌신한 유능한 군인으로 평가받는다. 에드워드 기번은 그를 로마 최후의 장군(the last of the Roman generals)이라고 불렀으며 현대에는 최후의 로마인(the last of the Romans)들 중 하나[3]로 여겨지고 있다.2. 경력
2.1. 불분명한 젊은 시절
태생과 태어난 월, 일은 불분명하지만, 생년은 359년으로 알려져 있다. 반달족 출신의 로마 군인과 로마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정도가 그의 출신성분에 대해 명확히 밝혀진 거의 유일한 사항이다. 다만 이후의 행적으로 미루어 볼 때, 출신 부족의 유력자로서 자신을 따르는 일족과 함께 일종의 용병대장으로 처신했던 대부분의 고위 게르만계 장군들과는 달리 로마인에 보다 가까운 환경에서 성장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부계 쪽으로 반달족 혈통을 이어받았다고는 하지만 이후 그의 행보에서 반달족과 뭔가 특별한 관계를 가진 흔적은 없기 때문이다.히에로니무스와 같은 동시대 로마 지식인들은 그를 거리낌없이 반야만족이라고 불렀다. 원래 게르만계 로마군인 자체는 일찌감치부터 전방 군단에만 가도 흔했고 게르만계만 따로 차별하는 관행도 없었으나 스틸리코는 먼 게르만족 출신, 그것도 게르만족 대침공의 시대에 부친이 반달족이어서 경원시 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로마인 여성과 결혼해서 스틸리코를 낳아 굳건한 로마인으로 키운걸 보면 스틸리코의 부친은 오히려 열성 친로마파였던 모양이다.
이렇다보니, 그는 당시 기독교를 신봉하던 대부분의 게르만족과는 달리 아리우스파가 아닌 아타나시우스파 정통 기독교(=니케아 공의회 계열, = 삼위일체파)의 신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물론, 황제의 신임을 얻었던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의 지지를 받아 정치적 기반을 닦았다는 점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정하는 동시에, 이교와 이단에 대해서도 상당히 엄격한 태도를 취했던 사람인 만큼 그런 황제의 최측근이었던 스틸리코가 이단으로 취급되던 아리우스파 기독교도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가 아리우스파를 신봉하는 이단이었다는 고발은 408년 그가 처형된 이후에 주로 제기되었는데, 이때는 그가 아리우스파를 신봉하는 고트족과의 정치적 결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될 시점이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상당히 젊은 나이에 두각을 드러내었음에도 그의 초기 경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사실상 전무하다. 다만 그에게 심취했던 이집트 시인 클라우디아누스의 기록을 통해 그의 아버지가 로마 제국 동방을 통치하던 발렌스 황제 휘하에서 기병을 지휘했다고 추측될 뿐이다. 이를 감안하면 스틸리코의 군 경력도 동방 제국에서 시작되었을 공산이 크다.
2.2. 테오도시우스 1세 재위기
2.2.1. 발탁
기록에 그의 이름이 분명히 등장하는 것은 서기 383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중왕'( 샤한샤) 샤푸르 3세와의 평화조약을 위해 일단의 사절단을 파견하면서부터의 일이다. 스틸리코는 이 사절단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아르메니아 문제를 논의하는 교섭 현장에 참여하여 제국의 위신을 지키는데 공헌했다고 한다.359년 출생설을 믿는다면 불과 24살, 365년 출생설을 믿는다면 18살, 어쨌든 아무리 높게 잡아도 20대 초반밖에 안 되었을 젊은이가 군사 문제도 아니고 외교 분야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긴 하지만 이때 그가 교섭에 있어 일정한 역할을 했음은 분명하다. 스틸리코가 황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한 뒤, 테오도시우스 1세는 그를 '황제 호위대장'(comes stabuli)으로 승진시키고, 이어서 자신의 질녀이자 양녀이기도 했던 세레나(Serena)를 그와 결혼시킴으로써 그를 황가의 일원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390년경에 갈라 플라키디아 공주가 태어나기 전까지 테오도시우스 황가에서 공주라고 할 수 있는 존재는 사실상 세레나뿐이었고, 또한 세레나에 대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총애가 두터웠음을 감안하면 이는 분명히 파격적인 대우다.
클라우디아누스를 비롯한 동시대 사람들의 기록을 보면 세레나는 분명히 테오도시우스 황가와의 인연을 원하는 여러 유력자들이 탐내는 결혼 대상이었고, 상당한 경쟁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 무렵 제국은 어쨌거나 게르만족에 대해 우위를 점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황가에 굳이 게르만족을 끌어들일 이유가 없었고 게르만족에 대한 반감조차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스틸리코와 세레나의 결혼은 철저하게 그가 보여준 실력을 염두에 둔 혼사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대략 서기 384년에서 385년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 결혼은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의향이 강하게 작용했다고는 하지만, 이후 황궁과 원로원에서 스틸리코를 꾸준히 지지한 세레나의 행보를 보면 스틸리코와 세레나의 부부로서의 사이도 크게 나쁘지는 않았던 듯하다. 두 사람 사이에서 1남 2녀가 출생하는데, 아들은 테오도시우스 1세의 숙부로 추정되는 이의 이름을 따서 에우케리우스(Eucherius), 두 딸 또한 테오도시우스 가문 여인들의 이름인 마리아(Maria)와 테르만티아(Thermantia)로 명명되었다.
2.2.2. 군사령관
이후 스틸리코의 행적에 대해서는 역시 뚜렷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다만 황제 호위대장이자 황제의 (조카)사위라는 신분과, 테오도시우스 1세가 383년 이후에도 계속 전쟁을 치렀다는 점을 감안하면 스틸리코가 계속 황제를 수행했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군의 고위 지휘관으로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서기 390년경의 일인데, 이때 스틸리코는 고트족과의 분쟁으로 추정되는 바스타르네이 전투(390)에서 큰 전공을 세우면서 제국군 지휘부의 최고 서열에 해당되는 군사령관(magister militum, 마기스테르 밀리툼)에 임명되었다. 이때 테오도시우스 1세는, 그라티아누스를 시해한 참칭자 마그누스 막시무스와의 내전과 이후 게르만족과의 싸움에서 위기에 빠진 황제를 구출하는 등 대활약했던 용장 프로모투스 장군을 잃었기 때문에 그를 대신하여 스틸리코를 발탁했을 가능성이 크다. 클라우디아누스가 스틸리코와 프로모투스의 관계를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그것에 비유했고, 프로모투스의 전사를 계기로 스틸리코와 재상 루피누스의 관계가 악화되었다는 주장 등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서기 392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후원하던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테오도시우스 1세의 휘하 장군이었던 프랑크족 출신의 플라비우스 아르보가스트(Arbogast)와 갈등을 빚던 중 원인 모를 죽음을 맞는 사태가 발생했다. 아르보가스트는 그 부친 바우토 장군[4]과 함께, 원로원에 보관되어 있던 '승리의 여신상' 철거 문제나 테오도시우스 1세의 기독교 국교화 정책에 반발하는 등, 소위 이교도 장군으로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독실한 아리우스파 기독교도였던 발렌티니아누스 2세와의 종교적 문제로 인한
서기 394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아르보가스트 토벌을 위해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 포이데라티 20,000명을 포함하여 대군을 편성했다. 여기서 스틸리코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첫번째 부인인 아일리아 플라킬라의 일족으로 알려진 티마시우스와 함께 로마군 최고지휘관으로 이름을 올리게 되는데, 그가 지휘한 로마군은 서기 394년 가을에 벌어진 프리기두스 강에서의 전투에서 아르보가스트와 에우게니우스를 모두 전사시키는 완승을 거두게 되었다. 이때 이룬 그의 전공이, 이후 테오도시우스 1세가 그에게 자신의 후계자를 맡기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
2.3. 최고 권력자
2.3.1. 섭정
테오도시우스 1세는 프리기두스 전투의 승리로 명실공히 제국 전체의 황제가 되었지만 서기 395년 1월에 지병이었던 수종으로 불과 48세의 나이에 급사했다. 임종의 자리에서 황제는 스틸리코에게 후임 황제가 될 자신의 아들 호노리우스를 지켜달라고 유언했다.[6]이때 테오도시우스 1세는 동방 제국군과 더불어 프리기두스 전투에서 투항한 서부 제국군까지 모두 거느리고 있었는데, 서류상으로는 10만 4천에 가까운[7] 병력은 물론이고 황제가 보유하고 있던 막대한 양의 보물까지 황제 사후 고스란히 스틸리코의 손에 들어갔다. 이 정도 힘을 지니고 있었던 데다, 그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조카)사위로서 황실의 어른과도 같은 위치에 있었으며, 그의 아들 에우케리우스는 황제의 외손으로 역시 황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가 이 시점에서 다른 생각을 했다면 테오도시우스 1세의 무력한 두 아들은 간단히 배제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8]
그러나 스틸리코는 황제 사후 지체없이 호노리우스 황제를 옹립, 이후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 두 황제에게 테오도시우스 1세가 남긴 보물들을 배분하는 절차를 직접 지휘했다. 동시대인들에게 결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어떤 루머라도 있을 법한데 그런 것조차 없다는 것을 보면, 이때 그의 행보가 공정했다는 것은 믿어도 좋을 듯.
2.3.2. 제국의 분열과 전란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후계자들이 어느 쪽이나 싹수없기로는 매한가지였기 때문에, 이때부터 스틸리코는 사실상 제국의 최고 권력자로 활동하게 된다. 다만 그의 지배력은 제국 서부에 국한되어 있었고, 아르카디우스가 다스리던 제국 동부는 테오도시우스 1세가 총애하던 갈리아 출신의 재상 루피누스[9]의 영향권 안에 있었으며, 루피누스를 싫어하던 동로마 궁정의 관료들과 아르카디우스의 황후 아일리아 에우독시아도 스틸리코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에우독시아가 스틸리코에게 패사했던 아르보가스트의 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개인적인 원한도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문제는 395년 말부터 고트족이 준동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때 동방 제국군은 훈족과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움직임을 경계하여 대부분 동방 국경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동방 제국의 북부 국경선은 테오도시우스 1세가 게르만족과 맺은 조약에 그 운명을 걸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한 뒤, 고트족은 이 조약을 무시하고 군대를 일으켰다. 이때 고트족의 지도자로 추대된 사람이 고트족의 명문인 발티 가문 출신의 알라리크였다.
알라리크의 봉기로 순식간에 하드리아노폴리스까지 털려버리자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긴급히 스틸리코에게 군대를 되돌려보낼 것을 명령했고, 이에 스틸리코는 휘하에 있던 동방 제국군에 제국 서부의 군대 일부를 합쳐 출격, 알라리크의 고트족을 내쫓았다. 하지만 루피누스의 흉계로 인해 스틸리코는 동방 제국군의 지휘권을 박탈당하고 동방군을 되돌려보내게 된다.[10]
이후 알라리크와 다시 한 번 맞선 스틸리코는 또다시 그를 격파하지만[11] 동방 제국과의 불화로 결정적인 공세를 취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그가 알라리크를 놓아보낸 직후, 알라리크는 다시 동방 제국에 군사행동을 감행, 아르카디우스 황제에 의해 일리리쿰 전역을 통치하는 군사령관이 되면서 스틸리코는 자신이 사실상 통치하는 이탈리아 곁에 강대한 숙적을 두고 사는 신세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미 발렌티니아누스 1세 시대에 한번 반란을 일으켰던 바 있는 북아프리카에서 다시 반란이 발생, 서방 제국이 일시 공황 상태에 빠졌다.[12] 다행히 반란군의 수괴 길도의 동생이자 형에게 두 아들을 잃은 마스케젤을 진압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반란군을 분열시킨 스틸리코의 적절한 대처로 반란은 조기에 진압되었지만 미봉책에 불과했고, 결국 스틸리코는 가뜩이나 부족한 병력으로 제국의 사방을 지켜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13] 서기 400년, 아프리카 반란을 조기에 진압한 공을 인정받아 집정관이 되었지만 허울뿐인 명예였다.
401년, 서고트족의 알라리크가 동고트족의 라다가이수스와 군사 동맹을 체결하고, 여기에 반달족, 알란족 등의 소규모 부족들이 합류하여, 이탈리아 북부에 해당하는 라이티아 속주로의 대규모 침공이 단행되었다. 스틸리코는 이에 직접 출격, 도나우 강을 건너서까지 동고트족을 추격하여 격파하는 등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지만 이것은 알라리크가 이탈리아를 침공하기 위해 던진 낚시였다.
알라리크의 서고트족에 의한 침공은 빠른 속도로 이루어져, 그 무렵 호노리우스가 머무르고 있었던 밀라노까지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스틸리코는 이러한 급보를 접하고 바로 군을 퇴각시켜, 총세 30,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밀라노로 급행하여 피난길에 오르려던 호노리우스 황제를 구출하고 402년 4월 6일, 폴렌티아 전투에서 알라리크를 격파했다.[14] 이어 403년, 베로나 전투에서 스틸리코는 알라리크의 군대를 포위하는데 성공했는데,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의 서술에 의하면 이때 알라리크는 자신이 탄 말의 속도에 자신의 명줄을 걸어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스틸리코는 알라리크의 숨통을 끊으려 하지 않았고, 휴전조약을 체결한 뒤 알라리크를 일리리쿰으로 돌려보냈다.[15] 이때가 사실상 스틸리코의 절정기였다.
2.3.3. 최후의 승리, 그리고 죽음
알라리크의 패퇴로 잠시나마 제국에 평화가 찾아온 듯 했지만, 알라리크와 함께 고트족의 거물급 지도자였던 라다가이수스가 남아있었다. 405년 말, 라다가이수스는 남녀노소 합쳐 거의 10만,[16] 전투병력 2만에 달하는 부족을 이끌고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거듭된 전투로 스틸리코 휘하에는 10,000명 내외의 병력만이 남아있을 뿐이었기 때문에, 그는 노예까지 해방시켜가며 간신히 15,000명 내외의 병력을 증원, 406년 여름에 플로렌티아(지금의 피렌체)를 포위한 고트족을 역포위했다. 플로렌티아는 아르노 강을 통해 지속적으로 보급을 받을 수 있었지만, 고트족은 그렇지 못해 굶주리기 시작했고 포위망은 날이 갈수록 견고해졌다. 결국 절망적인 돌격을 시도한 라다가이수스를 간단히 격파하고 그를 참수했다. 이 플로렌티아 전투에서 스틸리코가 포로로 잡은 동고트족 사람들 중 군대에 자원한 10,000명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노예로 팔렸는데, 그 수가 대단히 많아서 노예시장의 시세가 폭락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17]또다시 대승을 거두었기 때문에 스틸리코의 입지는 더욱 탄탄해진 듯 했지만, 문제는 거듭된 전란으로 로마 제국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는 것이었다. 속주 통치가 사실상 방기되어 있었기 때문에, 브리타니아와 갈리아에서 반란이 빈발했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알라리크의 서고트족에게 손을 벌리면서 스틸리코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었다.[18] 그리고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가 어린 아들 테오도시우스 2세를 남기고 세상을 떠나자 서로마 제국 황제 호노리우스는 동로마로 가 동·서 통합 황제가 되거나 조카의 섭정이 될 욕심을 냈는데 이미 동로마는 테오도시우스 2세의 승계가 마무리된 상황이었고 동로마 측의 요청도 없었다. 스틸리코는 황제가 제국을 떠나는 것에 반대했고 이로 인해 황제와 관계가 악화된 데다 설상가상으로 호노리우스에게 시집보냈던 스틸리코의 장녀 마리아가 숨지고, 테오도시우스 1세의 막내딸 갈라 플라키디아와 스틸리코의 아들 에우케리우스 간의 혼담이 이슈가 되면서, 호노리우스 황제가 스틸리코를 의심하는 상황까지 발생하고 말았다.[19]
결국 그동안 스틸리코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호노리우스의 측근들에 의해, 408년 8월 13일에 지금의 파비아에 해당하는 티키눔에서 군사 쿠데타가 발생, 스틸리코파 군인과 관료들이 대거 살육당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때 스틸리코를 지지하던 군대는 그를 위해서 호노리우스와 대적하는 것도 감수하며 스틸리코를 황제로 추대하려 했지만 스틸리코는 이를 거부하고[20][21][22] 8월 23일, 호노리우스 황제가 있던 라벤나에 자진 출두하여 처형당했다. 이후 기록말살형(Damnatio Memoriae)에 처해졌다.
2.4. 그 이후
스틸리코의 아들 에우케리우스는 아버지가 처형된 직후 로마에서 살해당했고, 스틸리코의 둘째 딸이자 호노리우스 황제의 두 번째 황후였던 테르만티아는 수녀원에 유폐되어 417년 사망했다. 에우케리우스와 함께 로마에 있었던 스틸리코의 아내 세레나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딸 갈라 플라키디아의 모략에 휘말려 알라리크와의 공모를 꾀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원로원에 의해 2차 로마 약탈 직전에 처형당했다.이후 스틸리코와의 동맹을 구실로, 그와 세레나의 복수를 하겠다며 알라리크가 이탈리아 침공을 단행, 결국 410년 로마는 두 번째[23] 약탈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스틸리코의 죽음 이후 채 백년도 지나지 않아 서로마는 멸망한다.
3. 평가
3.1. 군인으로서
전술가로서는 당대 최고라고 할 만하다. 테오도시우스 1세 재위기에는 딱히 그의 군사적 재능을 평가할 만한 기록이 없지만, 30대 초반에 군사령관이 될 정도면 이미 테오도시우스 1세가 직접 지휘한 전투에서도 두각을 드러냈을 가능성이 크다.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 알라리크와의 전투에서 그 역시 탁월한 장군이던 알라리크를 상대로 군의 기동과 매복, 야전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시종일관 우위를 점했던 것이나, 라다가이수스를 제압할 때 보여준 정석적인 포위섬멸전을 보면 그의 전술가로서의 재능은 분명 뛰어났다고 할 수 있다. 이게 테오도시우스에겐 정말 큰 의미가 있는 재능이었는데, 테오도시우스는 부대 관리, 병사 훈련, 보급, 군수 면에서는 정말 탁월한 재능을 자랑했고 전략적 안목도 나쁘지 않았으나 전술적 능력은 정말 의외일 정도로 꽝이었다. 삼국시대 동탁과 거의 군재 유형이 비슷했던 인물인데, 그럼에도 크게 성공을 거두었던 것은 스틸리코 같은 훌륭한 전술가가 테오도시우스의 이런 단점을 정확히 보완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테오도시우스가 딸이나 마찬가지인 조카를 시집보내 스틸리코를 자기 편으로 확고히 굳힌 건 다 이유가 있었다.더군다나 알라리크와 이탈리아에서 맞겨룰 때나, 그 이후의 행적을 보면 스틸리코가 지휘한 병력은 양적인 면에서나 질적인 면에서나 상대에 비해 우위를 점한 적이 거의 없었다. 이탈리아를 침공하기 전에 알라리크는 일리리쿰군 사령관[24]을 겸하며 테살로니키를 비롯한 동로마 제국
전략가로서의 역량에는 여러 의견이 있다. 북아프리카 반란을 진압할 때 불과 5,000명 병력으로 70,000 대군을 모았던 북아프리카의 길도를 제압하고[26] 단기간에 북아프리카는 물론 이탈리아와 히스파니아를 안정시킨 전략은 분명 뛰어났지만, 이후 이탈리아 방위를 위해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등 속주를 지키던 병력들을 철수시킨 것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제국의 군사력이 심각하게 피폐해져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스틸리코가 피에솔레 언덕 전투 직전에 동원했던 병력이 겨우 30,000명인데 속주 군대를 차출하고 게르만족과 훈족을 용병으로 고용하며, 심지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래 최초라는 말까지 나온 노예해방이라는 극약처방까지 동원해 병력을 증강했음에도 30,000명에 불과했다면 정말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이것도 스틸리코가 양호한 야전군(리미타네이)들 싹다 소환&닥치는대로 야만족 용병 데려오고 노예랑 검투사까지 강제징집해서 꾸역꾸역 모은 것이었다. 브리타니아 주둔군은 스틸리코가 미리 빼온 발레리아 빅트릭스 20군단 정도를 제외하면 나중에 찬탈자 콘스탄티누스를 지지해서 분리주의자로 갈아탔고 갈리아 주둔군 대부분은 방금 말한 반란군+몰려드는 야만족 막느라 이동불가능 상태였으며[27] 정예였던 일리리아 주둔군은 내전 여러번 겪으면서 싹다 갈려나갔고 프리기두스 전투 이후에 서고트족이 일리리쿰에 눌러 앉는 바람에 재건도 제대로 못하는 상황이었다. 히스파니아와 아프리카는 후방이라서 그렇게 주둔군이 많지도 않았다. 따라서 저 중앙군 3만명이 당시 서로마 제국의 기동군단 전부라고 할 수 있었다.[28]
어쨌든 그가 유능한 군인이었다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별다른 이견이 없으며, 그가 어떤 야심을 품었건 간에 그 시점에서는 그만한 군사 지도자가 로마에 없었다는 평가 또한 마찬가지로 거의 이견이 없다. 게다가 스틸리코 이후 서로마의 희망들로 부상하는 콘스탄티우스 3세, 아이티우스의 아버지 가우덴티우스, 아이티우스 모두 다름아닌 이 스틸리코의 휘하에서 군 경력을 쌓으며 성장한 인물들이었다. 백여년 쯤 뒤 동양사에서, 본인 사후 독립하며 제각기 역사에 이름을 남긴 고환, 우문태, 후경 등을 한꺼번에 거느렸던 북위의 이주영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 사실 콘스탄티우스든 아이티우스든 본인들 부재시에 믿을만한 다른 장군이 없어 고생한만큼 스틸리코가 보다 오래 장수하여 커리어를 이어갔다면 서로마 제국이 부흥할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에서 아쉽다.[29]
3.2. 정치가로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했을 때나, 마지막에 처형될 때 보여줬듯 시종일관 처신이 깨끗했기 때문인지,[30] 그에게 반감을 품은 대부분의 동시대 지식인들도 그의 청렴함을 인정했을 정도였으며, 원로원 의원들과 기독교의 유력자들 상당수는 최소한 405년 전까지는 그의 게르만 혈통에도 불구하고 그의 능력을 인정했다고 전한다.자신의 게르만 혈통을 상당히 의식한 듯, 원로원의 지지를 얻어내려는 행보를 많이 보였고, 그 탓에 원로원에게 발목을 잡히기도 했다.
종교 정책에서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이교 탄압적 기독교 정책을 계승했던 것 같다. 서기 405년 경에 로마 전래의 예언서로 알려진 시빌라 예언서를 파괴한 흔적이 남아있다.
3.3. 개인으로서
클라우디아누스에 의하면 때이르게 머리가 세어 반백이기는 했지만, 당당한 체격에 수려한 용모의 소유자였으며, 무예와 학문에 두루 능통했고, 대단히 가족적이면서도 공사 구분이 철저했다고 한다. 물론 클라우디아누스의 배경[31]을 생각할 때 저런 찬사는 상당히 가감하여 들을 필요가 있지만 아들 에우케리우스가 사망 당시 로마에서 트리부누스 정도에 불과했다는 점이나, 금전적으로 문제가 거의 없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최소한 개인적인 미덕만큼은 충분했던 것 같다.
[1]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를 조각한 것이라는 말도 있다.
[2]
magister militum. 그냥 직역하면 군사령관.
[3]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또한 '최후의 로마인'으로 불리는데, 뉘앙스는 미묘하게 다르다. 반역 혐의를 뒤집어 쓰고도 내전을 막기 위해 자신의 죽음까지 받아들였던 스틸리코와 달리, 아에티우스는 자신에게 위협이 될 경우에는 황제와 적대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실 '최후의 로마인'이라는 말은 후대에 등장한 문학적 표현으로, 로마를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거나 로마가 멸망해가는 순간까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인물들을 기리는 의미로 사용된 말이다. 스틸리코와 아에티우스는 둘 다 추구하는 바는 달랐을지라도 로마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는 것은 같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괴벨스는 무솔리니가 실각하자 그를 최후의 로마인으로 기리기도 했다. 요컨대 문학적 수사에 불과하므로 '누가 실제로 마지막인가'를 가리는 것은 무의미하다.
[4]
이 장군의 딸, 그러니까 아르보가스트에게는 누이가 되는 여인이, 나중에 테오도시우스 1세의 장남
아르카디우스의 황후가 되는 에우독시아였다(...).
[5]
의심받고 있으니, 시해여부에 상관없이 죽지 않으려면 칼을 뽑아야 했다. 시해했을 공산이 정황상 매우 높기도 했지만.
[6]
이때 황제의 임종을 지켰던
밀라노 대주교
암브로시우스는 테오도시우스 1세가 스틸리코에게 호노리우스 뿐만 아니라 그때 동방 제국을 지키던 장남 아르카디우스의 후견까지 아울러 맡겼다고 주장함으로써 동·서 협조 저해의 한 시초를 제공했다.
[7]
물론 각 주둔지의 동원가능 병력이므로 실제 야전군은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8]
동로마에 있던 19살의 아르카디우스는 몰라도 서로마에 있던 12살의 호노리우스는 간단히 제압하고 황위를 찬탈할 수 있었을 것이다.
[9]
젊었을 적에는 상당한 미남이었고, 법률가인 동시에 관료로서 출중한 수완을 발휘했다. 다만 물욕과 권력욕이 좀 지나쳐서 테오도시우스 1세 생전에도 문제가 많았다고 한다.
[10]
이후 루피누스는 스틸리코가 돌려보낸 동방군에 의해 참살당한다. 스틸리코의 지령이 있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지만 이후 정세를 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당시 스틸리코가 서로마 제국 섭정이기는 했지만 이전에는 동방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신하였으므로 그의 기반은 동로마 콘스탄티노플에 있었다. 자신의 기반을 모두 무너뜨릴 수 있는 선택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동로마에서는 루피누스 암살의 배후를 스틸리코로 단정하고 동로마에 있는 스틸리코의 재산을 몰수한다.
[11]
이 전투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견이 존재하지만 알라리크가 털린 것은 사실인 듯 하다.
[12]
북아프리카는 로마 제국 시대에
밀의 주산지로, 사실상
이탈리아 반도의 식량자원 공급을 책임졌다.
[13]
이에 대처하기 위해 스틸리코는 각지 속주에 파견되어 있던 군대를 소환했는데, 이때의 일을 배경으로 집필된 소설로 '
눈 속의 독수리'가 있다. 다만 여기서 스틸리코는 본의 아니게 먹튀로...
[14]
이 전투에서 스틸리코는 알라리크의 처자를 생포하는 등의 대전과를 거두었지만, 알라리크는 휘하의 정예병 대부분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완승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15]
협박으로 따낸 거긴 하지만 어쨌든 동방 제국의 장군 신분이던 알라리크를 처단할 경우,
동방 제국과의 내전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알라리크를 이용하여 모종의 정치적 야심을 채우려는 의도도 있었다는 얘기가 있다. 사방의 적들에 포위된 상태나 다름이 없었던 서로마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 쓸만한 동맹을 구하려했다는 의견도 있다. 숙적인 알라리크가 왜 쓸만한 동맹이냐면,
실력은 있지만 스틸리코한테는 4번이나 발려서(...).
[16]
40만이라는 기록이 있지만 과장되었다고 한다.
[17]
이런 기록 때문에 라다가이수스 휘하의 인원수가 40만이었다는 기록을 믿지는 못하더라도 20만 정도는 되지 않았겠느냐는 주장도 있다. 어찌나 노예 시세가 엉망이었는지 스틸리코가
해방시킨 노예 출신 병사가 자신의 노예를 사는 괴상한 일도 있었다. 이런 일화들을 볼 때 부하들에 대한 포상도 후했던 것 같다. 소설
눈 속의 독수리에서는 시장가치가 적은 노약자들은 두당
솔리두스 금화 1닢이라는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팔아야 했다고 한다. 실제 역사에서 노예 병사들에게 스틸리코가 제의한 조건이 전투가 끝나면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며 급료로 솔리두스 금화 2닢를 주기로 했다는 점에서 얼마나 싼 가격이었는지 알 수 있다.
[18]
당시 원로원 의원 중 한 명이던 람파디우스는 알라리크에게 돈을 주기로 한 조치는 평화 조약이 아닌 노예 조약이라고 주장했다(출처는 로마제국 쇠망사 30장),
[19]
다만, 스틸리코가 집정관에 취임할 무렵인 서기 400년에 쓰여진 클라우디아누스의 송가를 보면 에우케리우스와 갈라 플라키디아는 호노리우스가 마리아와 혼인할 무렵부터 이미 사실상 약혼한 것과 다름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갈라 플라키디아의 연령을 고려할 때 갑자기 혼담이 나왔다기보다는 혼인 적령기까지 기다렸다고 보는 게 맞을 듯.
[20]
이때 그를 황제로 추대하려던 일부 부대가 스틸리코의 결정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스틸리코가 칼을 들고 반란을 일으켰더라면 스스로 황제가 되거나
황제의 아버지가 되었을 것이다. 스틸리코파 장교들이 대거 숙청당한 여파로 호노리우스의 군대에는 쓸만한 장교가 없었던 데다, 황제 호노리우스가 무능하다는 것은 서로마 제국의 일개 병사까지 모두 알고 있는 공공연한 사실이었고 무능한 황제를 대신해 서로마 제국을 위협하는 모든 음모들을 분쇄해 온 것이 누구인지도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는 스틸리코를 보자마자 호노리우스의 병사들은 항복하기 바빴을 것이다.
[21]
또한 이 부대는 사실상 서로마의 마지막 정예 정규군+비정규 용병이었다. 이들은 대부분이 스틸리코가 처형된 뒤 이런 정부에는 희망도 정의도 없다고 보아
불과 얼마 전까지 피터지게 서로 싸웠던 알라리크에게 귀부했다. 진짜
죽 쒀서 개 준 꼴이다.
[22]
후대
동로마 제국에서는 부자 간, 형제 간, 숙질 간 내전은 기본으로 몇 번씩 일어났고, 심지어
조
손간 내전까지 일어났다는 점을 볼 때, 정말 대조되어 숙연해진다. 하지만 호노리우스는 스틸리코가 내전을 막기 위해 순순히 목숨을 내놓은 덕분에 보전한 국력을 무능과 사치로 다 까먹어서 그 결단을 의미없게 만들었다. 따라서 후대 동로마 내전의 주역들은 자신을 호노리우스에 숙청당할 위기의 스틸리코에 몰입하며 기를 쓰고 내전을 벌이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23]
공화정이었으며 아직 도시국가를 벗어나지 못했던 시절(
기원전 387년)
켈트족에게 첫 번째 약탈을 당했다. 387+410=797, 즉 거의 800년 만에 처음 있는 이민족의 진주였던 것이다. 서로마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시한 동로마에서도 이 소식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24]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다. 우리 편이냐, 적이냐의 흑백논리로는 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외교라는 것이 다 그렇지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때는 더더욱 그렇다.
반농반목하는 부족집단의 부족장에게 최우선 목표는 자신과 부족원들의 생존·정착·번영이고, 오직 그것만을 위해 제국에 허리를 숙였다 폈다를 반복하는 것이며, 게르만 각 부족의 이런 양태는 서로마 말기, 부분적으로는 그 너머 6세기 초중반과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까지 계속된다. 그런데 사실 이건 동롬이 나중에 어떻게 굴러갈지 뻔히 알면서도 동방 대신 그냥 서로마나 공격하라고 떠넘긴 느낌도 있다
[25]
마찬가지로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다!
[26]
후대의
벨리사리우스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27]
그나마 꾸역꾸역 라인 강에서 게르만족을 틀어막던 것도 407년 이후로는 더 이상 막는게 불가능해진다. 소설
눈 속의 독수리가 위에서 나온 발레리아 빅트릭스 20군단을 주인공으로 삼아 이 당시 정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
[28]
그러나 이들의 전투력이 의외로 막강해서 알라리크의 정예 서고트족 군대도 간단히 제압해버리고 라다가이수스가 이끄는 10만 부족민도 싹다 몰살시켜 버린다. 서고트족과 4번 싸워서 4번 다 이기고 알라리크가 자기 처자마저 버리고 도주하게 만들었다는 점만 봐도 이 부대가 얼마나 강한지 잘 알 수 있다. 괜히 스틸리코가 서로마 최후의 명장들 중 하나로 손꼽히는게 아니다.
[29]
게르만족 왕국들의 군사적, 문화적 역량이 꽤나 성장하긴 하였으나, 이들조차도 로마 제국 기준에선 최악인 상태였던 아이티우스 시대 서로마군마저 여전히 1:1로는 이겨내지 못하고 갈려나갔다. 그러니 적어도 스틸리코 시대까지는 서유럽을 벌벌 떨게 한 로마군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은 상황이었다. 물론 아이티우스와 스틸리코의 군재가 보통 장군들을 훨씬 상회했던 것도 감안해야 하지만.
[30]
로마사에서 그와 비슷한 인물로, 지명도는 그보다 더 높은
아에티우스가 수완은 스틸리코보다 위였을지 몰라도 인간적인 면에서는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을 듣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에티우스가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보여준 처신들은 스틸리코에 비하면 굉장히 미심쩍은 구석이 많다. 물론 두 사람이 처한 시대와 배경의 차이를 감안할 필요는 있다.
[31]
정치 감각이 뛰어났던 세레나가 남편에 대한 일반 여론의 호전을 위해 당대의 유망한 시인이던 그를 금전적으로 후원하고, 심지어 부인까지 중매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