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2 00:45:52

브르타뉴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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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 공국
Dugelezh Breizh
Duché de Bretagne
파일:Banniel_Breizh_1.0.svg 파일:브르타뉴 상징 문장.svg
<rowcolor=#000,#fff> 국기 문장
파일:Localisation_Duché_de_Bretagne.svg
939년 ~ 1547년
<rowcolor=#000,#fff> 성립 이전 멸망 이후
브르타뉴 왕국 프랑스 왕국
<colbgcolor=#fff,#000><colcolor=#000,#fff> 위치 프랑스 브르타뉴, 페이드라루아르( 낭트)
수도 낭트

반느
국가원수 공작
주요 공작 조프루아 2세(1181년~1186년)
안 드 브르타뉴(1488년~1514년)
언어 브르타뉴어, 라틴어, 갈로어, 중세 프랑스어
종교 가톨릭
언어별 명칭
브르타뉴어 Dugelezh Breizh
라틴어 Ducatus Brittannia minor
프랑스어 Duché de Bretagne
영어 Duchy of Brittany

1. 개요2. 역사3. 역사
3.1. 낭트 왕조3.2. 렌 왕조3.3. 코르누아이유 왕조3.4. 잉글랜드 왕국의 지배와 프랑스 왕국의 봉신으로의 복귀3.5. 드뢰 왕조3.6.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3.7. 몽포르 왕조
3.7.1. 장 4세3.7.2. 장 5세3.7.3. 프랑수아 1세3.7.4. 피에르 2세, 아르튀르 3세, 프랑수아 2세
3.8. 프랑스 왕국에 편입되다
4.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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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럽의 옛 국가. 로마말기 앵글로색슨족이 브리타니아를 침략하자 그곳에 살던 브리튼족 일부가 브르타뉴에 이주하면서 브르타뉴 왕국을 세웠다. 브르타뉴 왕국은 바이킹의 침략도 막아냈으나 결국 프랑크(프랑스) 왕국의 압박을 받아 칭왕을 포기하고 브르타뉴 공국이 되었다. 브르타뉴 공국은 노르만족과 잉글랜드의 도전을 받다가 마침내 앙주제국으로 편입되나 존 왕의 치세 때 잉글랜드와 브르타뉴의 동맹이 붕괴되어 백년전쟁 동안 영국과 프랑스는 브르타뉴 공국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경쟁했다. 이후 브르타뉴 여공작과 프랑스 왕실의 혼인으로 브르타뉴는 프랑스 왕국에 합병되어 멸망하였다.

2. 역사

3. 역사

3.1. 낭트 왕조

9세기 초, 브르타뉴인들이 프랑크 왕국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브르타뉴 왕국을 건국했다. 그 후 그들은 서프랑크 왕국의 군주를 명목상 주권자로 받들면서도 실질적으로 독립을 누렸다. 그러나 913년부터 바이킹이 침략해 브르타뉴 대부분을 점령하고 20여 년간 지배했다. 그러던 935년, 랑드베네크의 수도원장이었다가 바이킹을 피해 해외로 달아났던 장은 브르타뉴로 돌아온 뒤 접근하기 어려운 해안 바위에 피난했던 주민들을 끌어모은 후, 크로종의 지역 족장인 아말고드(Amalgod)와 웨데노크(Wethenoc)의 지휘 아래 바이킹에 저항하도록 했다. 그 후 그는 잉글랜드로 가서 알란 2세와 접견했다. 알란 2세는 포허 백작으로서 브르타뉴 왕위 주장자였던 마튜에도이의 아들로, 당시 잉글랜드 왕국에 망명 생활하고 있었다.

장 수도원장은 알란 2세에게 상황을 알린 뒤, 그에게 충성을 바칠 테니 브르타뉴를 바이킹의 압제에서 구원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잉글랜드 국왕 애설스탠으로부터 지원받은 뒤 936년 돌(Dol)에 상륙했다. 이후 생브리외 만으로 진군하며 브르타뉴인들의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 후 바이킹과 격전을 이어간 끝에 937년 낭트를 탈환하고 이곳을 중심지로 정했고, 938년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 루이 4세에게 충성을 서약한 뒤 "Brittonum dux(브르타뉴 공작)"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이때부터 브르타뉴 군주들은 서프랑크 왕국과 프랑스 왕국의 국왕의 봉신을 자처하면서도 무제한적인 자치권을 누렸다.

알란 2세는 브르타뉴를 재건한 뒤 프랑크 공작 위그와 가까운 관계를 맺고 바이킹을 상대로 전쟁을 이어갔다. 939년 8월 1일 렌 백작 주헬 베렝거, 멘 백작 위그 1세와 연합해, 쿠에농 강과 인접한 트란스에 주둔하던 바이킹을 습격해 대승을 거두었고, 이 덕분에 바이킹들을 브르타뉴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다만 본래 브르타뉴 왕국의 영역이었던 코탕탱, 아브랑챙, 마옌 서부 지역은 강력한 위세를 자랑하는 데다 루이 4세와 친밀한 관계를 맺은 노르망디 공작 기욤 1세가 장악하고 있었기에 포기했다. 942년부터 루이 4세와 동맹을 맺었고, 아키텐 공작 기욤 3세와 긴밀한 동맹을 맺어 루아르 강 남쪽의 모쥬, 티파우즈, 에르보쥬의 영유권을 확보했다.

랭스의 브르타뉴 역사가 플로도아르(Flodoard, 894 ~ 966)에 따르면, 944년 바이킹을 고용해 자기를 공격하게 한 렌 백작 주헬 베렝거와 전쟁을 치렀다. 하지만 바이킹이 이를 틈타 브르타뉴 일대를 약탈하자, 두 사람은 평화 협약을 맺었다. 랑드베네크 수도원 기부 증서에 따르면, 그는 주헬 베렝거 백작을 비롯한 여러 영주 및 브르타뉴 성직자들과 함께 945년에서 950년까지 랑드베네크 수도원에 여러 차례 기부했다. 알란 2세는 자기를 옹립하는 데 크게 공헌한 랑드베네크 수도원과 각별한 관계를 맺었고, 생 메스민 드 미시 수도원 등 루아르 계곡의 수도원들에게도 기부를 많이 했다. 한편, 알란 2세는 결혼 동맹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943년 블루아 백작 티보 1세의 딸 또는 누이와 결혼해, 서프랑크 왕국의 정계에 자신의 역할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952년 낭트에서 조기 사망하면서, 브르타뉴 공국의 권력을 회복하려는 그의 계획은 중단되었다.

알란 2세 사후, 그의 2살된 아들 드로곤이 브르타뉴 공작에 선임되었다. 루아 백작 티보 1세가 후견인이 되었으며, 어머니는 앙주 백작 풀크 2세와 곧바로 재혼했다. 풀크 2세는 낭트 백국과 어린 공작의 관리권을 맡았고, 티보 1세는 브르타뉴 북부에 대한 종주권을 유지했다. 이때 티보 1세는 자기 영지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이 지역의 행정을 렌 백작 주헬 베렝거와 돌 대주교 위코헨(Wicohen)에게 위임했다. 958년, 드로곤은 앙주 백국의 수도 앙제에서 8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낭트 연대기는 그가 욕조에서 사망했으며, 일부 사람들은 풀크 2세가 그를 죽였다고 주장했다고 기술했지만 진위는 불분명하다.

그 후 풀크 2세가 낭트 백작에 올랐지만 2년 만인 960년에 죽었고, 알란 2세의 사생아인 호엘 1세가 낭트에서 브르타뉴 공작으로 취임했다. 965년에서 972년 사이, 교황 요한 13세는 브르타뉴의 유력 인사들, 즉 "반 백작 주헬 베랭거, 주헬의 아들 코난, 호엘과 그의 형제 게레흐"에게 서신을 보내 투르 대주교에게 복종하라고 권고했다. 호엘 1세는 975년부터 브르타뉴 북부를 지배하고 자기를 봉신으로 간주한 블루아 백작 티보 1세의 가신으로서 렌 백작을 맡은 코난 1세와 충돌했다. 981년, 앙주 백작 조프루아 1세의 지원을 받은 호엘 1세의 낭트군과 블루아 가문의 지원을 받은 코난 1세의 렌 군대가 콩케뢰유에서 맞붙었다. 전투 결과는 불분명하다, 다만 이후에도 전쟁이 쭉 이어진 걸로 볼 때, 어느 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981년 낭트 주교 고티에 1세가 사망하자, 호엘 1세는 생브누아쉬르루아르에서 성직 훈련을 받은 형제 게레흐를 낭트 주교로 선출하고, 투르로 가서 대주교로부터 성직을 받도록 했다. 그러나 게레흐가 투르를 향해 여행을 떠난 동안, 갈루론(Galuron)이라는 인물이 코난 1세의 지시에 따라 호엘 1세를 암살했다. 게레흐는 이 소식을 접하자 곧바로 낭트 주교직을 포기하고 낭트로 귀환한 뒤 브르타뉴 공작에 선임되었다. 이후 게레흐는 형을 죽인 코난 1세와 대적하는 한편, 982년 푸아티에 백작 기욤 2세와 동맹을 채결하고, 아버지 알란 2세가 획득한 루아르 강 남쪽의 모쥬, 티파우즈, 에르보쥬의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983년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 로테르를 알현하고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앙주 백작 조프루아 1세에게 가로막혔고, 조프루아 1세는 그를 포로로 잡아둔 뒤 자신으로부터 낭트의 영유권을 수여받았다는 걸 인정하고 자기의 가신이 되라고 요구했다. 그는 이 요구에 따르겠다고 밝히고 결국 풀려났다. 한편, 그의 아내 아렘부르가는 앙세니에 요새를 건설했다.

3.2. 렌 왕조

988년, 게레흐가 사망했다. 낭트 연대기에 따르면, 렌 백작 코난 1세는 그가 앙주 백작과 연합해 자기를 대적할 것을 두려워해 게레흐의 주치의이자 르동 수도원장이기도 한 헤로이쿠스를 설득해 그를 독살하도록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기록의 진위는 불분명하다. 그 후 게레흐의 어린 아들 낭트 백작을 맡았지만 2년만인 990년에 병사했고, 렌 백작 코난 1세가 즉시 낭트로 진군해서 무혈 입성한 뒤, 브르타뉴 공작에 취임했다. 그 해 7월 28일, 돌에서 몽생미셸 수도원에 기부했으며, 돌 대주교 멘 2세와 브르타뉴 주교 7명이 참석한 가운데 "브르타뉴의 공"( ritannorum Princeps) 칭호를 취했다. 11세기 프랑크 수도자 라울 글레이버(Raoul Glaber, 985 ~ 1047)는 자신의 연대기에 그가 왕이 된 것처럼 왕관을 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새로운 앙주 백작 풀크 3세는 코난 1세의 권세가 강해져서 브르타뉴에 대한 자신의 이권이 잠식당하는 걸 우려해, 낭트 백작들을 연이어 살해한 그를 타도하여 정의를 실현하겠다고 선언했다. 992년 군대를 일으켜 브르타뉴로 진군한 풀크 3세는 그 해 6월 27일 콩퀴어뤼일 전투에서 코난 1세를 사살했다. 이후 코난 1세의 아들 조프루아 1세가 브르타뉴 공작에 선임되었지만, 실제로는 렌, 반, 및 브르통 일대의 상당 부분만 상속받았고, 나머지는 앙주 백국, 블루아 백국, 노르망디 공국 등 이웃 영주들의 영향권에 속했다. 어머니 에르망가르드가 아직 어린 조프루아 1세를 위해 섭정을 맡았는데, 블루아 백작과 노르망디 공국의 압박으로부터 주권을 지키기 위해 친형제인 풀크 3세가 브르타뉴 공국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걸 받아들였다.

992년, 풀크 3세는 낭트 백작으로 호엘 1세의 사생아인 주디카엘을 선임한 뒤 자신의 가신인 투아르 자작 아이메리 3세의 감독하에 뒀다. 하지만 994년, 에르망가르드가 군대를 파견해 주디카엘을 굴복시키고 조프루아 1세에게 경의를 표하도록 했다. 1004년, 낭트 백작 주디카엘이 사망했고,[1] 블루아 백작 에르베도 같은 시기에 사망했다. 당시 성년으로서 통치를 행사하던 조프루아 1세는 이 기회를 틈타 낭트에 대한 자신의 권력을 확보하기 위해 렌 출신의 기사 고티에 2세를 낭트의 새로운 주교로 세우고 주디카엘의 어린 아들 부디크의 섭정으로서 통치를 행사하도록 했다.

조프루아 1세는 브르타뉴에 강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앙주 백국으로부터 독립하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하지만 아버지 대부터 렌 정권을 지원했던 블루아 백국은 새 백작인 외드 2세가 동쪽 지역으로 관심을 돌렸기에 별다른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엇다. 이에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2세와 동맹을 맺기로 마음먹고, 리샤르 2세의 누이인 하부이즈와 결혼하기로 했다. 여기에 더해, 여동생 주디트를 리샤르 2세의 아내로 삼게 함으로써, 양국간의 관계를 두텁게 다졌다. 한편, 그는 아버지 코난 1세와 마찬가지로 몽생미셸 수도원을 적극적으로 후원했고, 생멜루아르데옹드 및 생브누아데옹드의 수도자들에게 수입을 제공했다.

조프루아 1세는 브르타뉴 공국에서 그동안의 전란으로 파괴된 수도원들을 복구하기 위해 생브누아쉬르루아르 수도원장이며 훗날 부르주 대주교가 될 고즐린 드 플뢰리에게 이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수도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1008년, 고즐린은 브르타뉴 출신의 수도자 펠릭스를 보내 그 임무를 맡겼다. 그 후 조프루아 1세는 로마를 목표로 순례를 떠나기로 마음먹고, 펠릭스에게 아내와 두 아들을 보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순례를 떠난 그는 파리를 들러서 프랑스 국왕 로베르 2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후 로마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던 1008년 11월 20일 갑작스럽게 사망했는데,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조프루아 1세 사후, 두 아들 알란 3세 에우돈이 브르타뉴 공동 공작이 되었고, 어머니 하와이즈와 낭트 주교 고티에 2세, 반 주교 주디카엘, 돌 대주교 융게네가 섭정을 맡았으며,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2세가 그들의 대부가 되어줬다. 두 형제는 여러 문서에서 브르타뉴 통치자(Brittanorum Monarchi) 또는 브르타뉴 공(Principes Brittaniae)으로 일컬어졌다. 1009년, 리샤르 2세는 몽생미셸 수도원장 메이너드 2세에게 압력을 행사해 르동의 생소뵈르 수도원으로 밀어내고 힐데베르트 1세를 몽생미셸 수도원의 새 수도원장으로 세웠다. 또한 1014년에는 자기 형제이자 루앙 대주교 로베르에게 세레를 받은 올라프 2세 하랄드손을 사주해 돌을 일시적으로 점령하게 했으며, 브르타뉴 공국에 압박을 계속 가해 양국의 국경을 셀루네 강에서 셀룬 강까지 밀어냈다. 한편 <성 길다스의 생애>에 따르면, 농민 반란이 브르타뉴 각지에서 일어났으며, 귀족들도 종종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1018년, 알란 3세는 블루아 백작 외드 2세의 딸인 베르테와 결혼함으로써 블루아 백국과 렌 간의 오랜 동맹을 갱신했다. 그는 1024년 또는 1025년에 권력을 잡았고, 형제 에우돈과 함께 브르타뉴인의 군주로서 문서에 명시했다. 그는 치세 동안 13개의 헌장, 6개의 통지 및 11개의 사적 법안을 포함하여 32개의 법안을 반포해 통치를 재정비했고, 군사 원정도 종종 벌였다. 1027년 르 루데와 라 페르테베르나르를 포위 공격했으며, 1032년 부활절에 프랑스 국왕 앙리 1세의 수행원으로서 오를레앙에 군대를 이끌고 나타나기도 했다. 1027년 헌장에서, 그는 "어떤 사람들은 왕이라고도 부르는"(qui est aussi appelé roi par certains) 브르타뉴 공작으로 묘사되었다. 그는 때때로 중세 연대기 작가들에 의해 'Rebrit(브르타뉴 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한편, 그는 노르망디와 멘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벨렘 가문과 갈등을 겪던 멘 백작 허버트 1세를 지원했으며, 1027년 앙주 백작 풀크 3세에 대항하여 프랑스 국왕 앙리 1세, 블루아 백작 등과 연합해 공세를 벌여 라 페르테베르나르를 포위한 끝에 접수했다. 이후 샤르트르의 풀베르 주교의 후원 아래 화해를 통해 적대 행위를 종식했으며, 풀크 3세가 인질로 잡아뒀던 망소 출신 기사들을 구출하는 데 관여했다. 1031년 코르누아이유 백작 알란 칸히아르와 다소 갈등을 벌인 뒤 화해했으며, 닝트 백작 부디크에 맞서는 낭트 주교 고티에 2세를 지원했다. 1033년 돌의 대주교 융게네의 설득 덕분에, 낭트 백국은 앙주 백작 풀크 3세에 대한 충성을 포기하고 브르타뉴 공작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030년, 브르타뉴 공작 로베르 1세가 브르타뉴를 침공했다. 알란 3세는 아브랑챙에서 맞섰지만 큰 손실을 입은 채 격퇴되었다. 이후 루앙 대주교이며 노르망디 최초의 대주교이자 덴마크 출신의 인사인 로베르의 중재하에 몽생미셀 수도원에서 평화 협약을 맺고 로베르 1세와 화해했다. 1031년, 알란 3세와 에우돈 형제는 몽생미셸 수도원에 기부했고, 1032년에는 생조르수 수도원 건립식에 참석했다. 1034년, 로베르 1세는 예루살렘 순례를 떠나면서 사생아이자 노르망디 공국 후게자인 기욤 2세의 후견인을 그에게 맡겼다. 1035년, 로베르 1세는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 사망했다. 이후 알란 3세는 노르만 귀족 일부의 반란으로 위협을 받고 있는 후계자 기욤 2세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노르망디에 개입했지만, 실제로는 자기가 어머니를 통해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1세의 진정한 후계자라고 자처했다.

15세기에 브르타뉴 공작 장 4세 드 브르타뉴의 측근으로 알려진 익명의 성직자가 집필한 <생브리외 연대기>(Chronique de Saint-Brieuc)에 따르면, 1035년 에우돈과 알란 3세가 브르타뉴 공국의 단독 주권자가 되기 위해 내전을 벌였다고 한다. 하지만 내전이 벌어진 정확한 경위 및 진행 상황은 별로 밝히지 않았다. 브르타뉴 출신의 법학자이자 역사가 베르트랑 다르장트레(Bertrand d'Argentré, 1519 ~ 1590)가 1580년부터 1582년까지 저술한 <브르타뉴의 역사>(Histoire de Bretagne)에 따르면, 에우돈은 알란 3세로부터 공작위에서 물러나라는 통보를 받자, 이에 반감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생브리외 연대기는 내전이 일어나자 삼촌이자 반 주교인 주디카엘이 중재에 나섰고, 에우돈은 알란 3세로부터 돔노네 통치권을 맡았다고 서술했다. 여기에는 생 말로, 돌, 팡티에브르, 고엘로 및 램발레가 포함되었다. 이후 생브리외 연대기는 에우돈을 팡티에브르 백작이라고 칭했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이 기록의 신빙성이 거의 없다고 본다. 1987년 프랑스 중세 역사가 노엘 이브 토네레(Noël-Yves Tonnerre, 1946 ~ )는 에우돈과 알란 3세는 공국을 조화롭게 통치했으며, 내전을 벌였다는 것을 교차검증할 다른 기록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한 브르타뉴 역사가 스테판 모랭(Stéphane Morin)은 2009년에 발간한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브르타뉴 공작의 역할>에서 에우돈이 알란 3세의 어린 아들이자 그의 조카인 코난 2세의 섭정으로 선임되어 1047년까지 통치한 것을 볼 때, 알란 3세는 형제를 신뢰했고 서로 내전을 벌이지 않았을 거라고 주장했다. 학자들은 잔 드 팡티에브르를 상대로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을 치른 끝에 승리를 거둔 장 4세 드 브르타뉴의 측근이었던 생브리외 연대기의 저자가 팡티에브르 백작가의 선조인 에우돈이 장 4세 드 브르타뉴의 선조인 알란 3세의 봉신이었으니, 장 4세가 브르타뉴 공작으로서 정통성이 더욱 강하다는 걸 강조하려고 지어낸 이야기라고 추정한다.

1040년 10월 1일, 알란 3세가 노르망디 원정에 착수했던 비무티에에서 중독이 의심되는 증세를 보이며 사망했다. 그 후 알란 3세의 아들인 코난 2세가 브르타뉴 공작이 되었고, 알란 3세의 아내인 베르테 드 블루아와 형제 에우돈이 섭정을 맡았다. 생브리외 연대기는 에우돈이 공작 작위를 찬탈하고 베르테 및 브르타뉴 귀족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코난 2세를 성에 가두고 1047년까지 바깥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기술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근거없는 이야기이며 코난 2세에게 고급 교육을 공평하게 제공했을 거라고 본다. 1045년 알란 3세의 아내인 베르테 드 블루아가 멘 백작 위그 4세와 재혼하면서, 그는 브르타뉴 공국의 단독 섭정으로 군림했다. 한편, 에우돈은 앙주 백작 조프루아 2세에게 자기 딸 아델을 아내로 삼게 함으로써 앙주 백국과 손잡고,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와 대적했다.

1047년, 에우돈은 브르타뉴 공국의 옛 영토였던 베생과 코탕탱의 남작들을 부추겨서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도록 했다. 그는 이를 통해 두 지역을 독립시킨 뒤 자국에 병합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해 8월 10일, 기욤 2세는 발에스듄 전투에서 반란군을 섬멸했다. 노엘 이브 토네레에 따르면, 에우돈은 이 실패로 인해 입지가 약해져 섭정에서 물러났고, 코난 2세가 주권을 행사했다고 한다. 반면, 스테판 모랭은 11세기와 12세기 노르망디 수도자이자 역사가 오더릭 바이탈(Orderic Vital, 1075 ~ 1141/1143)의 저서에서 에우돈이 이후에도 계속 집권했다고 밝힌 것과 교황 레오 9세가 1049년에 반포한 교령에서 그를 "브르타뉴의 공(Princes des Bretons)"으로 밝혔으며, 비슷한 시기에 렌 조폐국에서 발행한 금화에서 에우돈을 "브르타뉴 공작(dux Britanniae)"이라고 칭한 것을 근거삼아, 에우돈은 1057년까지 계속 군림했으며 코난 2세는 1047년부터 1057년까지 에우돈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고 추정한다.

1052년, 에우돈은 프랑스 국왕 앙리 1세와 앙주 백작과 손잡고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를 대적했다. 그러나 연합군은 1054년 모르테메르 전투에서 기욤 2세에게 패배했다. 1056년, 에우돈은 피카르디의 보베 영지를 앙제의 생토뱅 수도원에 기부했다. 1057년, 에우돈은 조카 코난 2세에게 체포되어 샤르트르로 수감되었고, 아들 조프루아 1세 드 팡티에브르가 아버지를 대신해 코난 2세와 맞섰다. 1062년, 코난 2세와 조프루아 1세간의 평화 협약이 체결되면서, 에우돈은 감옥에서 풀려났다.

1064년, 코난 2세는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의 지원을 받은 콩부르 영주인 리왈론 1세 드 돌의 반란에 직면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리왈론 1세를 돌 성채에서 포위했지만, 기욤 2세가 역습을 감행하는 바람에 격퇴된 뒤 렌에 이어 디낭까지 추격당했다. 그러나 기욤 2세는 브르타뉴에 너무 깊숙이 진군했다가 보급로가 끊어지는 바람에 병사들이 기아에 시달리자 결국 노르망디로 철수해야 했다.[2] 그 후 코난 2세는 가신들의 지원을 받아 돌을 점령하고 리왈론을 추방했다. 1065년, 코난 2세는 실베스트르 드 라 게르슈, 지롱 드 샤토지롱, 수하드 다시네 등 브르타뉴 영주 30여 명과 함께 삼촌인 블루아 백작 티보 3세를 방문해 경의를 표했다.

1066년,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는 교황청으로부터 잉글랜드 왕국을 침공해도 좋다는 교령을 접수한 뒤, 브르타뉴를 포함한 주변 지역에 자신이 교황의 깃발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신의 영지를 공격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전갈을 보냈다. 그러자 코난 2세는 즉시 그에게 노르망디 공국을 침략할 기회를 꼭 잡을 거라고 답했다. 그 후 기욤 2세가 잉글랜드를 침공하자, 코난 2세는 1066년 말에 공세를 개시해 푸앙세를 공략한 후 뒤이어 세그레를 점령했다. 이후 공티에 성을 포위했지만, 1066년 12월 11일 공티에 성 앞에서 돌연 사망했다. 브르타뉴 역사학자 아르튀르 드 라 보더리(Arthur de La Borderie, 1827 ~ 1901)는 기욤 2세가 사주한 반역자들에 의해 독살되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3.3. 코르누아이유 왕조

코난 2세는 생전에 결혼하지 않아 적합한 후계자를 낳지 못했다. 그래서 코난 2세의 누이인 하와이즈가 코르누아이유 백작이자 낭트 백작인 남편 호엘 2세와 함께 브르타뉴 공동 공작에 선임되었다. 다만 렌 백작 조프루아 그레노나트가 브르타뉴 공국으로부터 이탈했다. 1072년 하와이즈가 사망한 뒤, 호엔 2세가 브르타뉴의 단독 공작이 되었다. 이후 1075년부터 팡티에브르 백작 에우돈의 아들인 조프루아 1세 드 팡티에브르, 렌백작 조프루아 그레노나트, 포르호에트 영주이자 렌 자작 에우돈 1세의 반란에 직면했다. 먼저 조프루아 그레노나트는 이스트 앵글리아 백작 라울 1세 드 게일이 돌(Dol)을 점령했고, 뒤이어 조프루아 1세 드 팡티에브르, 포르호에트 영주 에우돈 1세가 호응했다.

호엘 2세는 노르망디 공작이자 잉글랜드 국왕 윌리엄 1세의 도움을 받아 반란군을 상대로 우세를 점했다. 그러나 1076년 9월,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가 돌 성채를 포위하던 윌리엄을 기습 공격해 격파했다. 윌리엄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노르망디로 퇴각했고, 호엘 2세는 윌리엄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자 점점 밀려나다가 1077년 반군에게 생포되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 알란 4세가 반란군을 물리친 덕분에 곧 풀려났다. 반란은 1079년 팡티에브르 백작 에우돈이 사망한 뒤 양자가 화해하기로 하면서 종결되었다.

1084년 4월 13일, 호엔 2세가 사망했고 아들 알란 4세가 브르타뉴 공작에 선임되었다. 알란 4세는 조부와 아버지가 캉페를레의 성십자가 수도원에 부여한 모든 특권을 확인했으며, 샤토랭의 수문, 공장 및 어장을 란데베네크 수도원에 기증했다. 한편, 그는 코난 2세의 이복형제이며 렌 백작으로서 아버지 대에 브르타뉴 공국으로부터 독립한 렌 백작 조프루아 그레노나트를 물리치고 렌 백국을 되찾기로 마음먹고, 군대를 이끌고 렌으로 진군했다. 조프루아 그레노나트는 렌에서 포위된 뒤 항복한 후 캉페를레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곧 사망했다. 이후 알란 4세는 렌 백국을 직할령으로 삼고, 동생 마티아스 2세를 낭트 백작으로 세워서 삼촌이며 크코르누아이유 주교 브누아의 보좌를 받게 했다. 마티아스 2세는 1103년에 후계자 없이 사망했고, 낭트 백국은 브르타뉴 공국으로 귀속되었다.

알란 4세는 1086년 또는 1087년에 잉글랜드 국왕이자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의 딸인 노르망디의 콩스탕스와 처음으로 결혼했다. 그러나 그녀는 1090년에 자녀를 낳지 못한 채 사망했다. 일부 기록에서는 콩스탕스가 하인들에게 독살되었다고 기술되었지만 진위는 불분명하다. 1093년, 알주 백작 풀크 4세의 딸 에르맹가르드와 재혼했다. 1096년 교황 우르바노 2세 예루살렘을 향한 십자군을 선포했을 당시, 브르타뉴는 평온했기 때문에 다른 브르타뉴 영주들과 함께 십자군에 가담하기로했다. 그 해 여름, 그는 레올 자작 에르베 1세, 게일과 몽포르 영주 라울 1세와 아들 라울, 팡티에브르 백작 조프루아 1세의 아들 코난, 리우 드 로에악, 쇼타드 당세니스 등과 함께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2세의 군대에 편입되었다. 이렇게 십자군에 참가한 그는 1096년에서 1101년까지 5년간 브르타뉴를 떠났으며, 아내 에르맹가르드가 그를 대신해 브르타뉴를 다스렸다.

1101년 십자군에서 돌아온 알란 4세는 경건한 아내의 영향으로 종교 문제에 관심을 점점 더 가졌고, 렌 주교인 마르보드가 이끄는 세속 성직자 개혁을 지지했다. 그 영향으로, 세속 성직자 개혁을 주창한 보드리 드 부르게유가 돌(Dol)의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는 루아르 수도원의 후원자이기도 했는데, 1100년부터 1112년까지 남아잇는 14개 기부 증서 중 7개는 루아르 계곡의 수도원들에 기부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1106년, 알란 4세는 5월 4일부터 5월 19일까지 벌어진 캉데 공방전에 참여해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의 편에서 승리에 일조했다. 또한 그해 9월 헨리 2세와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2세가 벌인 틴체브레이에 참여해 헨리 1세의 승리에 일조했다. 헨리 1세는 그의 기여에 감사를 표했고, 그의 사생아인 브라이언 피츠카운트를 윌링포드의 영주로 선임했다.

11세기와 12세기 노르망디 수도자이자 역사가 오더릭 바이탈(Orderic Vital, 1075 ~ 1141/1143)에 따르면, 1113년 3월에 프랑스 국왕 루이 6세가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와 오르메토페레에서 만난 뒤 브르타뉴의 주권을 헨리 1세에게 양보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브르타뉴 공작은 잉글랜드 왕의 봉신에 속하게 된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이 시기에 알란 4세가 헨리 1세와 매우 가까운 사이인 건 분명하다. 그는 자기 아들 코난 3세를 헨리 1세의 사생아인 마틸다 피츠로이와 약혼했다. 1115년, 알란 4세는 공작에서 퇴위하고 코난 3세에게 넘긴 뒤 르동의 생소뵈르 수도원에 은거했다가 1119년 10월 13일에 사망했다.

알란 4세의 뒤를 이어 브르타뉴 공작이 된 코난 3세는 1118년 마틸데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이후 그는 루이 6세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오베르뉴 백작 기욤 6세의 위협을 받는 클레르몽 주교를 보호하기 위한 1122년과 1126년 2차례 전개된 프랑스군의 원정에 참여했다. 1124년 8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가 장인인 헨리 1세를 돕기 위해 프랑스를 침공해 랭스로 진격했을 때, 코난 3세는 루이 6세가 소환한 군대에 여러 브르타뉴 가신들과 함께 참여해 하인리히 5세를 격퇴하는 데 일조했다.

한편, 1120년에서 1125년 사이에 낭트 백국의 두 영주인 퐁샤토 남작 올리비에 1세와 동스 자작 사바리가 루아르 강과 빌렌 강 사이 지역을 약탈했다. 특히 르동 시를 침공해 그곳에 있던 생소뵈르 수도원을 약탈하고 막대한 재산을 약탈하기까지 했다. 이에 분노한 코난 3세는 두 영주를 상대로 전쟁을 단행해 그들의 영지를 몰수하고 성을 파괴했다. 결국 두 사람은 다른 브르타뉴 영주들과 함께 1127년 10월 23일에 열린 앙굴렘 수도원의 주요 제단 봉헌식에 참석하면서 코난 3세에게 복종했다. 1128년 3월, 코난 3세는 낭트 공의회 기간 동안 직접적인 상속인 없이 사망한 평민의 상속권을 영주가 가져가는 걸 제한하는 등, 가신들의 특권을 약화하는 몇 가지 법률을 제정했다.

1132년, 코난 3세는 렌의 비테르 영주인 앙드레 1세와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갈등을 벌인 끝에 앙드레 1세가 관리하던 렌을 앙드레 1세의 경쟁자였던 에르베 2세의 아들 고란통 3세에게 맡겼다. 1135년 앙드레 1세가 사망한 뒤 앙드레 1세의 아들 로베르 2세에게 렌을 반환했지만, 이내 로베르 2세와도 갈등을 겪고 군대를 일으켜 비트레를 점령했다. 로베르 2세는 가까운 친척인 푸제르 남작 앙리에게 피신했지만, 앙리가 코난 3세로부터 그를 쫓아내라는 압력을 받으면서 어쩔 수 없이 추방하자 마옌 영주 주헬 2세에게 피신했다. 코난 3세는 로베르 2세와 주헬 2세의 동맹을 깨기 위해 자기 딸 콩스탕스를 주헬 2세의 아들인 조프루아와 결혼시켰다. 이에 로베르 2세는 사촌인 라발 영주 기 3세에게 피신했다. 그러자 코난 3세는 기 3세에게 무력을 행사하겠다고 위협했고, 기 3세는 어쩔 수 없이 로베르 2세를 추방했다.

로베르 2세는 아내 엠마의 형제인 기욤 2세가 있는 라 구에르쉬로 피신했다. 이에 코난 3세가 라 구에르쉬를 포위하자, 로베르 2세는 비테르 영주 로베르와 아시그네 영주 알란, 그리고 자기 여동생 마퀴즈와 결혼한 마테펠렌 영주 콩데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들이 이에 응해 군대를 이끌고 몰려오자, 코난 3세는 사촌이자 앙주 백작인 조프루아 5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조프루아 5세가 미처 도착하기 전인 1144년 초, 코난 3세는 비세이체 다리 전투에서 적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참패하고 샤토지롱으로 후퇴했으며, 그를 따르던 영주들이 대거 생포되었다. 조프루아 5세는 그가 패전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자 앙주로 물러갔다. 1144년 12월, 코난 3세는 로베르 2세와 화해하고 그의 재산을 돌려줬다. 이후 라 구에르쉬, 돔노네, 레옹, 트레고르, 팡티에브르, 고엘로 등지는 브르타뉴 공국의 지배에서 사실상 벗어나 독자적으로 통치를 행사할 수있었고, 브르타뉴 공국은 이들에 대해 명목상의 주권만 가졌다.

한편, 코난 3세는 어머니 에르맹가르드와 함께 성당 및 수도원에 적극적으로 기부했다. 그는 주로 캥페를레의 성 십자가 수도원과 렌의 성 마를렌 수도원에 기부했으며, 1129년에서 1136년 사이에 앙주의 성 니콜라 수도원에 순례를 떠나고 여러 차례 기부했다. 이외에도 마르무티에 수도원, 샤르트르의 티론 삼위일체 수도원, 사무르의 생플로랭 수도원, 사비니 수도원, 몽생미셸 수도원 등지에 여러 차례 기부했다. 또한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의 개혁 정신을 받든 시토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1130년, 훗날 "아모리카(Armorique)의 작은 시토"로 알려지게 될 베가르 수도원을 설립했으며, 1135년 어머니와 함께 부자이 수도원을 세웠고, 1136년 노르르담 드 랑고네 수도원을 세웠다. 1145년 베르나르도가 제2차 십자군 원정에 귀족들과 함께 참여하라고 권고했지만, 그는 나이가 많다는이유로 거절했다.

15세기 프랑스의 브르타뉴 성직자이자 역사가 피에르 르 보드(Pierre Le Baud, 1458 ~ 1505)에 따르면, 코난 3세는 1148년 9월 17일에 사망하기 전에 모든 사람이 자신의 합법적인 아들로 여겼던 호엘 3세가 사실은 사생아라며 작위와 영지 승계를 거부하고, 딸 베르테를 브르타뉴 여공작으로 세웠으며, 베르테와 첫 남편인 리치먼드 백작 알란 르 루의 자식인 코난 4세를 유일한 상속인으로 지명했다. 이후 코난 3세가 눈을 감았지만, 호엘 3세는 베르테의 집권을 용납하지 않고 낭트 일대에서 할거하며 브르타뉴 공작을 칭했고, 1149년 생폴 드 레옹 주교와 1152년 캉페르 주교로부터 공작으로 인정받았다. <브르타뉴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결국 코난 4세의 섭정이며 베르테의 두번째 남편인 포허 자작 에우돈 2세에게 굴복해 브르타뉴 공작에서 사임했다고 한다. 하지만 1153년부터 다시 공작을 칭하고 브르타뉴 공작으로서 헌장을 발표했다.

1154년, 코난 4세는 성년이 된 자기에게 권력을 돌려주지 않는 계부이자 포허 자작인 에우돈 2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는 호엘 3세와 손잡고 에우돈 2세와 전쟁을 벌였지만 패배해 리치먼드 백국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이내 세력을 재정비해 브르타뉴로 돌아와서 1154년 12월 16일 레제 인근에서 에우돈 2세를 물리치고 브르타뉴 외곽으로 쫓아냈다. 1156년, 호엘 3세는 낭트 사람들에 의해 추방되었고, 낭트 시민들은 앙주와 멘 백작인 앙리 2세의 남동생인 조프루아 6세를 낭트 백작으로 추대했다. 1158년 7월 조프루아 6세가 사망하자, 코난 4세는 즉시 낭트를 장악했다. 이에 잉글랜드 국왕이자 그의 주권자를 자처한 헨리 2세가 리치먼드 백작령을 일시적으로 압수하고 노르망디에 상륙한 뒤 브르타뉴로 진격하려 하자, 코난 4세는 1158년 9월에 아브랑슈로 달려가서 헨리 2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낭트 백국을 넘기는 대가로 리치먼드 백작령을 돌려받았다. 1160년 스코틀랜드의 국왕 말 콜룸 4세의 누이인 헌딩턴의 마가렛과 결혼했다. 이후 1156년부터 1164년까지 잉글랜드에 오랫동안 거주했다.

1160년대, 코난 4세는 삼촌인 트레고르 백작 앙리와 갈등을 벌인 끝에 갱강을 몰수했고, 이곳을 거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돌콤부르(Dol-Combourg) 영주 장 2세, 푸제르 남작 라울 2세, 레옹 자작 기요마르크 4세는 그의 권위에 불복하고 포허 자작 에우돈 2세와 함께 음모를 지속적으로 꾸몄다. 1166년, 포허 자작 에우돈 2세가 여러 귀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브르타뉴 대부분을 석권했다. 이에 코난 4세는 앙제로 이동한 뒤 1166년 7월 31일 헨리 2세와 접견해, 자기 딸이자 후계자인 콩스탕스를 헨리 2세의 넷째 아들인 제프리와 약혼시키고, 두 사람에게 브르타뉴 행정부를 맡기고 퇴위했다. 당시 코난 4세에게는 기욤이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헨리 2세의 압력으로 공작위 계승권이 배제된 뒤 성직자가 되었다. 이후 헨리 2세는 1168년 군대를 이끌고 브르타뉴로 진군해 조슬랭을 접수한 뒤 에우돈 2세의 영지인 포허를 약탈했고, 에우돈 2세와 추종자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헨리 2세에게 복종했다.

3.4. 잉글랜드 왕국의 지배와 프랑스 왕국의 봉신으로의 복귀

코난 4세가 헨리 2세의 압력을 받고 퇴위한 뒤, 그의 딸인 콩스탕스가 브르타뉴 여공작이 되었지만, 실질적인 통치자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였다. 헨리 2세는 잉글랜드 왕국, 노르망디 공국, 앙주 백국, 푸아투, 멘, 아키텐 공국에 이어 브르타뉴 공국까지 실질적으로 통치해, 프랑스 왕국 국토의 서쪽 절반 이상을 온전히 자기 영향권으로 삼았다. 1171년 봄, 헨리 2세는 자기에게 반기를 든 브르타뉴 반군을 토벌하기 위한 원정에 착수했다. 그해 5월 16일, 반군은 퐁토르송에서 항복하고 성을 넘겨줬다. 코난 4세가 사망한 이듬해인 1172년, 헨리 2세는 코난 4세가 마지막까지 간직했던 갱강 백국과 리치먼드 백국을 회수했다. 포허 자작 에우돈 2세가 다시 반기를 들려 했지만, 헨리 2세의 용병들에게 패배했다.

1173년, 남편과 깊은 갈등을 겪던 잉글랜드 왕비 엘레오노르 다키텐의 선동을 받아들인 청년왕 헨리가 반기를 들었다. 콩스탕스의 아내 제프리는 아키텐 공작 리처드와 함께 이에 가담했고, 프랑스 왕 루이 7세가 이들을 지원했다. 여기에 포허 자작 에우돈 2세와 푸제르 남작 라울 2세도 반군에 가담했다. 헨리 2세는 즉각 반격을 개시해 돌(Dol)을 장악하고 돌 마을 인근에서 브르타뉴 반란군을 궤멸했다. 이후 헨리 2세의 용병들은 루제와 라 게르슈 성을 황폐화하는 등 브르타뉴 각지를 휩쓸었고, 1174년 봄 앙세니스가 함락되었다. 결국 제프리는 아버지에게 항복했고, 엘레오노르의 다른 아들들 역시 뒤따라 항복했다. 헨리 2세는 아들들을 사면했지만, 반란의 주동자인 아내 엘레오노르를 올드 새럼 성에 감금했다. 1175년, 헨리 2세는 브르타뉴에 더이상 직접 개입하지 않기로 하고, 아들 제프리와 브르타뉴 세네샬(senechal: 지방관)인 롤랑 드 디낭에게 맡기기로 했다. 1177년 레옹 자작 기요마르크 4세와 라로슈베르나르의 야르노공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프루아가 직접 이들을 토벌했다.

1181년 7월, 제프리는 콩스탕스와 정식으로 결혼하고 그녀의 남편 자격으로 브르타뉴 공작 조프루아 2세를 칭했다. 이후 그는 롤랑 드 디낭의 지도를 거부하고 그의 도시인 베쉐렐을 점령하고 불태웠으며, 아버지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적이 었었던 푸제르 남작 라울 2세를 세네샬로 선임했다. 조프루아 2세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와 절친한 사이였으며, 종종 헨리 2세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었다. 그는 파리로 가서 프랑스 궁정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필리프 2세는 그를 세네샬로 삼았다. 그는 필리프 2세의 총애를 바탕으로 셋째 형 리처드를 아키텐에서 추출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고, 아버지 헨리 2세와 리처드 왕자가 갈등을 벌였을 때는 두 사람의 갈등이 고조되도록 이간질하고, 아버지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따르는 충직한 아들로서의 모습을 보여 아버지의 호의를 얻어서 노르망디와 앙주를 자기에게 상속하는 걸 심각하게 고려하도록 유도했다.

한편, 조프루아 2세는 브르타뉴인들을 선동해 반(反) 헨리 2세 정서에 기름을 부었으며, 브르타뉴인들을 궁정 요직에 앉혀서 그들의 지지를 끌어냈다. 특히 1185년 <아시시 오 콩트 조프루아>(Assisi au Comte Geoffroy)를 반포했는데, 그 내용은 대규모 영지의 분할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통해 브르타뉴 대귀족들의 호의를 이끌어냈으며, 이를 통해 지배 권력을 견고히 구축하면서 기존의 제도를 개편하고 위력을 과시하는 것으로 나머지 브르타뉴인들에게도 복종을 받아내고 선대 브르타뉴 공작들이 누려보지 못했던 강력한 권력과 권위를 누렸다. 다만 원정을 위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수도원과 성당을 번번이 약탈해, 성직자들의 분노를 샀다.

그러던 1186년 8월 19일, 조프루아 2세는 필리프 2세와 손잡고 부왕 헨리 2세와 형 리처드를 대적하는 문제를 논의하고자 파리로 갔다가 27세의 나이에 급병에 걸려 사망했다. 남편 조프루아 2세가 종횡무진하는 동안 조용히 자식들을 양육했던 콩스탕스가 브르타뉴의 단독 여공작이 되었다. 헨리 2세는 브르타뉴 공국을 계속 자기 영향권으로 붙들어놓기 위해 자신의 가장 충성스러운 부하인 체스터 백작이자 아브랑슈 자작 라눌프 드 블론드빌과 재혼하도록 강요했다. 결혼식은 1188년 또는 1189년 2월 3일에 거행되었다. 그러나 콩스탕스와 브르타뉴 귀족들은 이를 모욕적인 처사로 여기고, 라눌프가 리치먼드 백작으로서의 영예를 누릴 뿐 브르타뉴 공작을 자처하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 1189년 5월, 콩스탕스는 세인트 길다스 드 루이스 수도원 예배에 참석해 아버지와 첫 남편 조프루아 2세, 딸 마틸드의 영혼이 구원되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기부금을 납부했다.

1191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와 함께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착수한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1세는 시칠리아에서 시칠리아 국왕 탕크레디와 메시나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당시 4살이었던 그의 조카이자 콩스탕스와 조프루아 2세의 아들인 아르튀르 1세는 리처드 1세에 의해 왕위 후계자로 지명되었고, 아르튀르가 성년이 되면 탕크레디의 딸 중 한 명과 결혼할 것이었다. 1196년, 콩스탕스는 브르타뉴 귀족 총회에서 9살된 아들 아르튀르를 공동 공작으로 세웠다. 이에 리처드 1세는 장차 아르튀르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세우려 했던 자기 계획이 파탄났다며 불만을 품고, 콩스탕스에게 아르튀르를 자기에게 넘기라고 요구했다.

콩스탕스가 아들을 넘기길 거부하자, 리처드 1세는 그녀에게 바이외로 출두하라고 명령한 뒤, 자기가 브르타뉴 공작이 되는 걸 인정하지 않은 콩스탕스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라눌프 드 블론드빌에게 그녀를 남치하라고 명령했다. 라눌프는 콩스탕스가 퐁토르송을 방문했을 때 납치한 뒤 텔레리에 있는 자기 성에 가뒀다. 콩스탕스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아르튀르는 급히 브레스트 성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파리로 이동해서 필리프 2세의 보호를 받았고, 브르타뉴 성직자 및 귀족들은 콩스탕스의 석방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에 리처드 1세는 브르타뉴 대귀족들이 인질을 인도하는 대가로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대귀족들이 인질을 데리고 오자, 그는 인질 뿐만 아니라 이들을 이끌고 온 귀족들까지 감옥에 가뒀다. 이에 분노한 브르타뉴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필리프 2세와 전쟁을 치르던 리처드 1세는 1198년 콩스탕스와 브르타뉴 인질들을 전원 석방하고 브르타뉴 귀족들과 화해했다.

1199년 4월 6일, 리처드 1세가 리모주 성을 공격하던 중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콩스탕스의 아들 아르튀르 1세는 리처드 1세의 동생인 조프루아 2세의 아들이며, 리처드 1세는 지난날 아르튀르를 잉글랜드 왕으로 세우겠다는 메시나 조약을 체결한 바 있었다. 하지만 80세의 잉글래드 왕비 엘레오노르 다키텐은 리처드 1세의 막내 동생인 을 잉글랜드 국왕으로 세우기로 했다. 푸아투와 아키텐의 앵글로-노르만 남작들은 엘레오노르의 결정을 받아들였지만, 앙주, 멘, 투렌 남작들은 반발했다. 1199년 5월, 콩스탕스의 아들 아르튀르 1세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와 접견한 뒤 브르타뉴 공작으로서 경의를 표했다.

이후 아르튀르 1세는 앙주, 메인, 투렌의 세네샬 기욤 드 로슈(Guillaume des Roches, 1155년에서 1165년 사이 ~ 1222)의 중재에 따라 숙부 존 왕과 화해했지만, 그 해 9월 말부터 다시 프랑스 국왕의 보호를 받기로 하고 2년간 파리에 머물면서 잉글랜드 왕위를 노렸다. 그러나 1200년 5월, 필리프 6세는 존 왕과 협상한 끝에 걸리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필리프 2세는 20,000 마크 상당의 자금을 받는 대가로 존 왕이 노르망디 공국, 앙주 및 아키텐 공국 등 유럽 대륙 영주권을 가지는 걸 인정하며, 존 왕은 아버지 헨리 2세의 손녀인 카스티야의 블랑슈의 지참금을 위해 부르주, 이소둔, 그라카이 등 베리 영지를 필리프 2세의 아들인 루이 왕자에게 양도하고, 그 대가로 필리프 2세는 브르타뉴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아르튀르 1세는 존 왕에게 경의를 표해야 했다. 결국 아르튀르는 존 왕에게 경의를 표해야 했다.

한편, 콩스탕스는 리처드 1세의 강압으로 이뤄졌던 라눌프와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하고 기 드 투아르와 재혼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막대한 뇌물을 지불했고, 교황은 그녀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1199년 6월 1일 인노첸시오 3세가 투르 대주교와 돌 대주교 사이에 수백 년간 이어졌던 브르타뉴 교구 관리권 분쟁에 관해 투르 대주교의 손을 들어주고 돌 대주교의 직위와 팔리움을 박탈해 다른 브르타뉴 교구들과 함께 투르 대교구에 귀속되도록 하자, 콩스탕스는 이에 항의했다가 파문되었다. 1201년 9월 3일 또는 4일, 콩스탕스는 낭트에서 사망했다. 투르 연대기에 따르면, 그녀는 나병에 걸려 사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의 여러 학자들은 이 기록은 투르 대주교가 브르타뉴 전역을 관장하는 것에 반발한 그녀를 비하하려는 의도가 엿보이기에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보며, 쌍둥이 카트린과 마르그리트를 낳은 후유증으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후 어머니의 뒤를 이어 브르타뉴 공작이 된 아르튀르 1세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잉글랜드 왕위를 노렸다. 1202년 4월, 필리프 2세는 존 왕과의 평화 협약을 깨고 아르튀르를 다시 지원하기로 했다. 아르튀르는 필리프 2세의 노르망디 원정에 참여했고, 구르네앙브레이를 공략한 후 필리프 2세에게 기사 작위를 받았고, 필리프 2세의 딸 마리와 약혼했다. 여기에 필리프 2세로부터 브르타뉴 공작, 앙주 백작, 멘 백작, 투렌 백작, 푸아투 백작으로 선포되었지만, 앙주, 멘, 투렌, 푸아투를 장악하려면 그곳에 주둔한 친 존왕 파벌을 물리쳐야 했다.

1202년 8월, 이제 15살이 된 아르튀르는 존 왕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그의 할머니 엘레오노르 다키텐이 피난처로 삼은 루덩 인근의 미르보 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존 왕이 급파한 브람버 제4대 영주 기욤 3세 드 브리우즈의 역습으로 격파된 뒤 생포되었다. 기욤 3세는 아르튀르를 팔레즈에 가뒀다가 다시 루앙 탑으로 이송했고, 아르튀르는 1203년 즈음에 실종되었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리는데 현대 학계에서는 대체로 존 왕이 그를 비밀리에 죽였을 거라고 추정한다. 브르타뉴 공작위는 본래 아르튀르의 누나 엘레오노르가 브르타뉴 여공작이 되어야 했지만, 그녀는 존 왕에게 체포된 뒤 브리스톨에 인질로 끌려갔다. 이에 귀족들은 알릭스 드 투아르를 여공작으로 옹립했고, 그녀의 아버지 기 드 투아르는 그녀가 결혼할 때까지 브르타뉴 보안관을 맡기로 했다.

1204년, 기 드 투아르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가 노르망디 공국을 향한 원정을 감행할 때 가담하여 3월 6일 샤토기야르 요새를 공략하고 6월 24일 루앙을 공략하는 데 일조했다. 이후 무장병 400명을 거느리고 몽생미셸 수도원을 공격했지만, 험준한 지형에 위치한 수도원을 탈환하지 못하고 후퇴하면서 불을 질렀다. 이 불은 순식간에 수도원의 북쪽에 있던 마을을 덮쳐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다. 그 후 아브랑슈 대성당을 약탈했으며, 아브랑챙과 코탕탱 반도를 성공적으로 정복했다. 이리하여 933년 노르망디 공작 기욤 1세가 자기 영역으로 삼은 이래 300년 가까이 노르망디 공국에 속했던 아브랑챙과 코탕댕 반도가 브르타뉴 공국으로 돌아왔다.

1206년, 형제인 투아르 자작 아이머리 7세가 필리프 2세에 대항해 존 왕과 손잡으라고 권유했다. 그가 이를 받아들일 기미가 보이자, 필리프 2세는 그를 보안관에서 일시적으로 물러나게 했다. 얼마 후 존 왕이 브르타뉴에 상륙하는 시도가 실패하자, 필리프 2세는 그를 복직시켰다. 1209년, 파리에서 필리프 2세의 중재 아래 기 드 투아르와 팡티에브르 백작 알란 1세 사이에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기의 장녀 알릭스는 알란 1세의 어린 아들 앙리 1세 다보구르와 약혼하기로 했으며, 브르타뉴 귀족들이 앙리 1세 다보구르에게 경의를 표하기로 했다.

하지만 1212년 12월 29일 알란 1세가 사망하자, 필리프 2세는 계획을 변경했다. 그는 기 드 투아르의 충성심과 권위를 그다지 확신하지 못했고, 기 드 투아르가 존 왕에게 자기 자식의 후견권을 맡길 것을 우려했다. 이에 자신의 충실한 기사인 피에르 드 드뢰를 알릭스와 짝지우기로 했다. 이리하여 알릭스와 앙리 1세 다보구르의 약혼은 파기되었고, 피에르 드 드뢰와 알릭스는 1213년 1월 27일 약혼식을 거행한 뒤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3.5. 드뢰 왕조

피에르 드 드뢰는 1214년 알릭스 드 투아르와 약혼했다가 파혼당한 팡티에브르와 트레고르 백작, 아보구르, 고엘로 영주인 앙리 1세가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길 거부하자, 불경을 저지른 봉신을 벌하겠다며 팡티에브르와 트레고르 백국을 몰수했고, 앙리 1세는 아보구르와 고엘로의 작은 영주로 전락했다. 앙리 1세의 후견인을 맡은 레옹 자작 코난 1세가 반기를 들자, 피에르 1세는 1216년 레옹의 주요 거점인 레스네벤을 점령했다. 이후 앙리 1세는 마옌과 디낭의 영주인 유헬 3세 드 마옌에게 피신했다.

한편, 피에르 1세는 잉글랜드와 전쟁을 치르는 필리프 2세를 도왔다. 1213년 5월 31일 잉글랜드 해군이 브리튼 섬으로 쳐들어가려던 프랑스 함대를 담메에서 기습 공격해 파괴하자, 그는 필리프 2세의 지시를 받아 담메 항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뒤이어 존 왕의 침공으로부터 낭트를 망어했다. 1214년 7월 2일 루이 왕자가 로슈오무앵 전투에서 존 왕을 격퇴하는 데 일조했으며, 1216년 루이 왕자가 존 왕의 통치에 반감을 품은 잉글랜드 남작들의 초대를 받아 잉글랜드로 원정을 떠났을 때 동행했다. 비록 루이 왕자는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하지 못했지만, 그는 1218년에 헨리 3세와 협의해 리치먼드 백작위 및 영지를 돌려받았다. 1219년에는 알비 십자군에 가담해 마르망드 공략에 기여했고, 뒤이은 툴루즈 공방전에 참여했다.

1221년 10월 21일, 아내 알릭스가 사망했다. 이후 피에르 1세와 알릭스의 장남인 장 1세가 브르타뉴 공작이 되었고, 그는 브르타뉴 보안관으로서 어린 아들의 섭정이 되었다. 1222년 레옹 자작 코난 1세, 크라옹 영주 아이머리 1세 등 브르타뉴 영주들이 피에르 1세를 상대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1223년 초, 아이머리 1세는 푸앙세의 영주권에 속한 샤토브리앙과 라 구에르쉬를 공략했지만 푸앙세 성을 공략하지 못했다. 피에르 1세는 즉각 푸앙세를 구하러 출진했고, 그 해 3월 3일 샤토브리앙 인근에서 공성전을 치르느라 지쳤던 아이머리 1세의 군대를 기습 공격해 궤멸시키고 아이머리 1세를 생포했다. 브르타뉴 영주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투항했고, 피에르 1세는 그들의 성을 허물고 영지 일부를 내놓게 했으며, 아이머리 1세에게는 풀어주는 대가로 무거운 몸값을 매겼다. 또한 렌 백국에 가장 강력한 두 영주인 비트레와 푸제르를 견제하기 위해 생토뱅뒤코르미에 시와 요새를 1223년에서 1225년까지 건설했다.

1224년, 프랑스 국왕 루이 8세가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 뒤 니오르와 라로셸을 포위 공격할 때 가담했으며, 같은 해 헨리 3세의 편에 선 샹토소 영주를 격파한 뒤 왕으로부터 샹토소를 소유할 권리를 인정받았다. 1226년 루이 8세의 남부 프랑스 원정에 동행했다. 한편, 그는 당시 부빈 전투에서 생포된 뒤 루브르 감옥에 갇혀 지내던 플랑드르 백작 페랑의 부인인 잔과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잔에게 교황 호노리오 3세에게 사람을 보내 페랑과 자신이 친족 관계이니 결혼 무효를 선고해달라고 요청하도록 했다. 호노리오 3세는 이에 동의했지만, 루이 8세는 브르타뉴 보안관과 플랑드르 백작부인의 재혼을 단호히 반대했다. 두 사람의 결혼으로 브르타뉴와 플랑드르가 결합한다면 프랑스 왕실 영토가 위협받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루이 8세는 호노리오 3세에게 페랑과 잔이 도로 결혼 상태로 돌아가라고 명령하게 했다.

피에르 1세는 모클레르(Mauclerc: 나쁜 성직자)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브르타뉴 성직자들과 오랜 갈등을 겪었기 때문이다. 1213년, 그는 낭트의 방어를 강화할 때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낭트 주교 에티엔 드 라 브뤼에르가 관장하던 낭트 주교구에 세금을 부과하려 했다. 이에 에티엔은 교황령에 불만을 제기했고, 호노리오 3세는 1218년 4월 20일 피에르 1세에게 출두 명령을 내렸지만 무시당했다. 낭트 주교는 그에게 파문을 선고했지만 역시 무시당했다. 이후 생명의 위협을 느낀 에티엔이 투르 대주교구로 피신했고, 투르 대주교 장 드 페이는 1218년 6월 28일에 브르타뉴 전역에 성무 금지령을 내렸다. 호노리오 3세는 1218년 12월 7일에 낭트 주교가 피에르 1세에게 내린 파문을 승인했고, 상스, 투르, 부르주, 루앙 등 대주교 4명도 그에게 파문을 내렸다. 당시 알비파 십자군에 참가했던 피에르 1세는 일단 파문이 즉시 집행되는 건 모면했지만, 이대로면 큰일난다고 판단해 낭트 주교와 화해하기로 했다. 1220년 1월 28일, 그는 낭트 주교구를 복원하고 약탈한 재물을 돌려주고 피해를 보상하며, 세금을 매기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이에 성직자들은 그에게 내린 파문을 취소하기로 했다.

1225년 5월 17일, 낭트에서 열린 회의 중 피에르 1세와 렌 주교 조슬랭 드 몽토방 간의 갈등이 불거졌다. 그는 렌 주교 등 고위 성직자들이 백성들에게 돈을 갈취하고 있다고 비난했고, 주교구를 지나치게 요새화한 점을 지적했다. 렌 주교는 즉각 반발했고, 생브리외 주교 기욤 핀숑과 트레귀에 주교 에티엔이 그를 지지했다. 1227년 르동 회의에서, 피에르 1세는 브르타뉴 세속 영주들의 지지를 받아낸 뒤 군대를 동원해 렌 주교, 생브리외 주교, 트레귀에 주교를 추방했다. 그러자 생말로, 돌, 반, 레옹 주교들이 추방된 동료들을 옹호했고, 이들 7명은 피에르 1세에게 파문을 선고했다. 1228년 3월 19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파문을 승인했으며, 1228년 11월 14일 브르타뉴 전역에 성무 금지령을 내렸다. 이에 그는 교황에게 용서를 빌었고, 교황령의 중재에 따라 추방했던 주교들이 복귀하는 걸 받아들이고 그들과 화해했다.

한편, 피에르 1세는 루이 8세가 재위 3년만에 중병에 걸려 죽음이 임박하고, 아들 루이 9세가 아직 어린 걸 보고, 이 틈에 잉글랜드 왕국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 왕국의 통제에서 벗어나기로 마음먹었다. 1226년 10월 19일, 잉글랜드로 파견된 브르타뉴 사절이 웨스트민스터에서 "대륙의 공통의 적"에 대한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여기에 그의 딸 욜랑드와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 사이의 결혼도 고려되었다. 이후 1227년 프랑스 각지의 대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즉각 참여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이 반란을 빠르게 수습하고 브르타뉴를 압박하자 즉각 항복했다. 이후 프랑스 당국은 그를 회유하기 위해 생잠 요새, 벨렘 요새, 라 페리에르 요새를 양도하는 방돔 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독립할 때를 노리고, 1229년 10월 포츠머스로 가서 헨리 3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1230년 5월 3일 헨리 3세가 생말로에 상륙한 뒤 기옌에서 브르타뉴 방향으로 이동했지만, 나중에 마음을 돌려 병사 1,500명만 브르타뉴로 보내고 자신은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헨리 3세가 미적지근한 모습을 보이자, 피에르 1세는 감히 프랑스군을 상대로 적극적인 군사 작전을 펼치지 못했다. 그 사이, 루이 9세의 어머니이자 섭정 카스티야의 블랑카는 그를 반역자로 규탄하고 브르타뉴 보안관 직책을 박탈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피에르 1세에게 반감을 품었던 아보구르 영주 앙리 1세, 비트레 자작 앙드레 3세, 푸제르 자작 라울 3세, 샤토브리앙 영주 조프루아 4세, 코부르 영주 겔두인 2세, 디낭 영주 리샤르, 레옹 자작 기요마르크 4세 등 주요 영주들이 그로부터 이탈해 프랑스군에 가담했다. 프랑스군은 1231~1232년 브르타뉴 원정을 단행해 국경 요새들을 공략했고, 생토뱅코르미에까지 진군했다. 결국 피에르 1세는 프랑스 왕국에 항복했고, 루이 9세는 1234년 11월 4일 방돔 조약 때 획득한 이권을 포기하라고 명령했지만 그의 아들 장 1세가 성년이 될 때까지 브르타뉴 보안관을 맡는 걸 허용하기로 했다. 1235년, 루이 9세는 브르타뉴 영주들의 요청에 따라 피해를 입은 부분과 보안관이 부과한 의무에 대한 조사를 명령했다.

1237년 11월 16일 장 1세가 성인이 되어 루이 9세에게 경의를 표한 뒤 친정을 시작했다. 그는 먼저 반란을 일으킨 크라옹 자작 피에르를 복종시켰고, 1241년 9월 8일 브르타뉴 영주들을 소집해 자신에게 충성 맹세하도록 한 뒤 멜룬에서 루이 9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1242년 영국과의 전쟁이 재개되었을 때 시농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지만, 내심 잉글랜드 국왕을 적대하고 싶지 않았기에 지극히 소극적으로 임했다. 1243년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 휴전 협정이 맺어지자, 1245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와 접촉해 리치먼드 백작위와 영지 소유권을 인정받고 장남이자 후계자인 아들 장 공자와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의 딸인 베아트릭스의 약혼을 성사했다. 한편, 그는 1236년에 샹파뉴 백작이나 나바라 국왕인 티발트 1세의 딸 블랑카와 결혼했는데, 티발트 1세는 지참금으로 나바라 왕국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다가 티발트 1세가 아들 티발트 2세를 낳으면서 논란이 생기자, 장 1세는 1254년 연간 3천 파운드의 금전적 보상을 받는 대가로 나바라 왕국 승계를 포기하기로 했다.

1240년 4월 10일, 플로에르멜에서 열린 공작 회의에서 고리대금업을 종식하겠다는 이유로 브르타뉴 전역에서 유태인을 추방하라고 명령했다. 1259년 3월 28일 프랑스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간의 평화 협정이 체결되자, 그해 11월 아들 장 공자와 베아트릭스의 결혼을 생드니 대성당에서 거행했다. 1268년 리치먼드 백작위와 영지를 장 공자에게 넘겼고, 루이 9세가 튀니지 십자군을 단행할 때 작은 아들 피에르에게 브르타뉴군을 이끌고 가세하게 했지만, 피에르가 사망하자 자기가 장남 장 공자와 함께 참여했다. 그 해 8월 25일 루이 9세가 튀니지에서 병사하자 브르타뉴로 돌아왔고, 장 공자와 처남인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왕자는 십자군과 함께 시리아로 가서 1273년 상반기까지 유럽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장 1세는 1237년 친정을 시작한 이래 49년간 이어진 오랜 통치 기간 동안 공국을 안정적으로 다스렸으며, 종종 길고 숙련된 법적 절차와 관련된 인수를 통해 영토를 확대했다. 그는 1240년 3월에 레옹 자작 에르베 3세로부터 브레스트 요새를 구입했으며, 1265년에서 1276년 사이에 뒤이어 레옹 자작이 된 뒤 자금난에 시달리던 에르베 4세로부터 레옹 자작령의 모든 권리와 영토를 점진적으로 인수했다. 또한 생마티외 세관을 1265년부터 3,000 리브르에 임대해 1275년에 훨씬 많은 돈을 받고 매각했으며, 1274년 2월 12일 콩케 성을 인수했으며, 1276년 10월 26일 처남인 롤랑 드 디낭몽타필랑으로부터 플루곤벨린, 생 르낭의 플루아르젤 성을 7,210 리브르에 인수했다. 이외에도 1250년경에 무질락 성을 획득했고, 1265년경에 구랭 자작령을 획득했으며, 아들 피에르는 헤데 성을 인수했다. 여기에 라 로슈디낭의 잔과 소송전을 벌인 끝에 라로슈드낭 일대를 30,000 리브르에 구입했다. 1272년에는 로한 자작과 공모해 랑보의 조프루아의 빚을 탕감해주는 대가로 그의 영주권과 다른 영지를 가져갔다.

그가 영지를 확보하기 위한 집념이 대단했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아바구르 영주 알란 2세가 어머니와 아내로부터 물려받은 영지 전체를 16,000 투르누아 리브르에 사들인 일을 들 수 있다. 이 거래는 1264년에 성사되었지만, 알란 2세의 아버지 앙리 2세는 이를 인정할 수 없다고 여기고, 1267년 파리 왕립 재판소에 손자인 앙리 3세의 이름으로 아들이 "광기, 방탕, 통치 무능"하므로 거래를 무효로 처리해달라고 재소했다. 이후 법정 공방은 1283년까지 16년간 쭉 이어졌는데, 그 결과 라글과 디낭 절반이 브르타뉴 공작에게 양도되고, 나머지 영지는 앙리 2세에게 귀속되는 것으로 결론 났다. 앙리 3세는 1286년 장 1세가 사망한 뒤에야 자기 몫이었던 디낭과 라글을 되찾을 수 있었다.

장 1세는 아버지 피에르 1세와 마찬가지로 브르타뉴 성직자들과 갈등을 여러 차례 일으켰다. 1240년 로베르 주교가 예루살렘의 라틴 총대주교로 부임하면서 낭트 주교좌가 공석이 되자, 그는 새 주교가 부임할 때까지 자기가 관리하겠다며 그곳의 수입을 공작 국고로 돌렸다. 이후 새로 선출된 낭트 주교 갈레란이 교황령에 불만을 제기하고 공작을 파문했으며, 낭트 교구에 성무 금지령을 내렸다. 장 1세는 1247년에 그에게 용서를 빌고 파문을 해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 1세가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1230년 아버지 피에르 1세에게 내린 교령에서 피에르 1세의 이름을 직접 명시하지 않았고, 아버지에게만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그 교령에 기재된 사안을 따르지 않겠다고 나오자, 분쟁이 또 벌어졌다.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태도를 바꿀 것을 권고했지만 따르지 않자, 낭트 주교 갈레란은 1249년 재차 파문을 선고했다. 그는 이번에는 고집을 부리다가 1256년 4월 7일 교황령에 사절을 보내 사죄하면서 분쟁을 끝냈다. 이렇듯 성직자들과 마찰을 벌이는 와중에도 아내 블랑카와 함께 시토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했고, 그들이 설립한 수도원에 막대한 자금을 기부했다.

1272년 5~6월 프랑스 국왕 필리프 3세가 푸아 백작 로제 베르나르 3세를 상대로 원정을 떠났을 때 기사 60명과 함께 가담했으며, 1285년 필리프 3세가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 후 발발한 아라곤 십자군을 이끌었을 때 장남이자 후계자인 장 공자에게 브르타뉴 기사단을 맡겨 가담하도록 했다. 1286년 10월 8일 브르타뉴 공국의 중심지 낭트에서 사망했고, 빌리에르 마을에 있는 노트르담 드 프리에르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장 1세 사후 브르타뉴 공작에 선임된 장 2세는 여러 자녀를 잉글랜드 국왕에게 맡겼는데, 그 중 장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지시에 따라 기옌 보안관을 맡았고, 1294년 발루아 백작 샤를이 기엔을 몰수한다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의 선언을 집행하기 위해 기옌으로 쳐들어갔을 때 방어했다. 아버지 장 2세는 1294년 8월 잉글랜드 국왕의 호출을 받고 플로에르멜에서 합세했다. 그러나 아들 장이 기옌에서 프랑스군에게 잇따라 패배했고, 잉글랜드군이 보급품을 확보하기 위해 브르타뉴 영지에 있는 생마티외 드 피네테르 수도원을 약탈하자 1296년 잉글랜드를 더 이상 따르지 않기로 했다. 이에 분노한 에드워드 1세는 리치먼드 백작위와 영지를 박탈했다.

1297년 9월, 장 2세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 협의한 끝에 손자인 장 공자와 발루아 백작 샤를의 딸인 이자벨과 결혼을 성사했다. 이후 1297년부터 1304년까지 발발한 프랑스 왕국과 플란데런 백국간의 전쟁에서 프랑스 국왕 편을 섰다. 1302년 프랑스군이 쿠르트레 전투에서 플란데런 반군에게 참패했을 때 참여하지 않았지만, 1304년 8월 18일 프랑스군이 몽앙페벨르 전투에서 플란데런 반란군을 결정적으로 격퇴했을 때 참여했다. 1304년 5월 1일, 에드워드 1세는 프랑스 왕국과 화해한 뒤 그에게 리치먼드 백작위를 돌려줬다.

1305년 11월 6일, 장 2세는 리옹의 생 유스트 성당에서 열린 교황 클레멘스 5세의 교황 대관식에 참여했다. 교황이 대관식을 마치고 성당을 나갈 때, 그가 교황이 탄 노새의 굴레를 잡았다. 그런데 관중들이 모여 있던 벽이 돌연 무너지면서 교황 쪽을 덮쳤다. 교황은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지만, 그는 벽에 깔려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일단 벽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11월 18일에 리옹에서 사망했다. 그 후 브르타뉴 공작이 된 장남 아르튀르 2세는 1302년에 작성한 유언장에서 십자군 원정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자금으로 30,000 리브르를 조달한다고 명시했다. 그는 이 유언장을 집행해 십자군에 참여해야 했지만, 남동생인 장이 스코틀랜드에서 에드워드 1세를 따라 전쟁을 치르는 중이라서 그가 돌아오면 십자군 원정을 떠나겠다고 밝혔다. 이후에는 건강이 나빠졌기에 집자군에 참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십자군 원정을 미루던 1308년, 생말로의 부르주아들이 프랑스 왕국 북부의 도시들의 예를 따라 코뮌을 형성하려고 봉기했다. 이에 1308년 9월 22일 코탕탱의 집행관이 파견한 특사가 생말로에 들어와서 그들이 자치권을 누리게 해주겠다고 약속해 봉기를 중단하도록 했다.

한편, 아르튀르 2세는 사망 시 성직자가 부과하는 부과금, 결혼식 행사를 놓고 브르타뉴 공작과 교회가 오랜 갈등을 겪던 걸 종식하고 성직자들의 권리를 인정했다. 또한 십일조는 전적으로 허용되지만, 사제의 여행을 위해 8 디나르를 제공해야 하는 의무는 "가난한 사람", 즉 동산 가치가 30솔 미만인 사람들에게 적용되지 않도록 했다. 이 합의는 1309년 6월 27일 플로에르멜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그와 교황 클레멘스 5세의 협의 결과 이뤄졌다.

1312년 8월 27일, 아르튀르 2세가 릴 성에서 사망했다. 이후 브르타뉴 공작이 된 장남 장 3세는 아버지의 두번째 아내이자 자신의 계모인 드뢰의 욜랑드 및 이복 형제 장 드 몽포르와 유산 상속을 놓고 갈등을 벌였다. 그는 교황 클레멘스 5세에게 그의 아버지와 욜랑드 사이의 결혼이 적합하지 않다며 무효로 처리해달라고 청원했으나 실패했다. 1317년, 욜랑드와 장 드 몽포르가 장 3세가 모든 영지를 독차지하는 건 부당하다며 교황청에 소송을 걸었다. 이 소송전은 1328년까지 장기간 이어졌다. 교황 요한 22세는 1319년 생플로랑 드 소뮈르의 수도원장인 장 밀레가 이끄는 사도 위원회에 중재를 맡겼고, 1324년 장 밀레가 사망한 후에는 돌드브르타뉴의 주교인 기욤 메생을 포함한 다른 위원회에 맡겼다. 소송전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양자가 우호적인 합의를 맺고 끝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지리한 소송전을 벌이는 동안에도, 장 3세는 통치를 무난하게 수행했다. 그의 기간에 브르타뉴 주교들은 총 57명의 브르타뉴 출신 장학금 수혜자들을 위해 파리 대학교 내에 3개의 대학[3]을 설립했다. 1314년, 장 3세는 아바구르 영주 롤랑 드 디낭이 지휘하는 브르타뉴 부대를 플란데런에 파견했다. 이들은 1315년에 프랑스 국왕이자 브르타뉴 공작의 주군인 루이 10세의 플란데런 원정에 참여했다. 루이 10세는 공로를 인정해 장 3세에게 브르타뉴와 노르망디 국경에 있는 생자크 드 뵈브롱 성채를 수여했다. 1328년, 장 3세는 필리프 6세의 플란데런 원정에 참여해 카셀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가면서 필리프 6세가 승리를 거두는 데 일조했다. 그의 삼촌인 리치먼드 백작 장 드 브르타뉴가 사망한 후인 1334년 5월 8일, 장 3세는 켄터베리 대주교의 중재 하에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에드워드 3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같은 해 5월 24일에 리치먼드 영지를 장 3세에게 수여했다.

1337년 백년전쟁이 발발한 후, 장 3세는 난처한 입장에 처했다. 그는 브르타뉴 공작으로서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었으며, 리치먼드 백작으로서 잉글랜드 국왕의 봉신이었다. 그는 고심 끝에 프랑스 국왕을 지지하기로 하고, 필리프 6세의 1339~1340년 플란데런 원정에 참여했다. 1340년 프랑스 국왕의 함대를 지원하기 위해 자기 함대를 슬로이스 항구로 보냈지만, 슬로이스 해전에서 잉글랜드군에게 파괴되었다. 이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와 투르네에서 대치한 필리프 6세와 함께 했고, 1340년 9월 25일 에드워드 3세와 필리프 6세가 1341년 6월 24일까지 9개월 동안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한 에스플레친 휴전 협약(Trêve d'Esplechin)을 체결할 때 현장에 함께 했다. 이후 필리프 6세와 겨울을 함께 보낸 그는 1341년 부활절에 브르타뉴로 돌아가다가 1341년 4월 말에 캉에서 중병에 걸려 몸져 누웠다.

그는 생전에 발루아 백작 샤를의 딸인 발루아의 이자벨(1292 ~ 1309),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산초 4세의 딸인 카스티야의 이사벨(1283 ~ 1328), 사보이아 백작 에도아르도의 딸인 사보이아의 조반나와 잇따라 결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했다. 이에 장 3세의 친형제인 기 7세 드 리모주의 딸인 잔 드 팡티에브르와 이복형제 장 드 몽포르가 경합했다. 그는 자신과 유산 상속을 놓고 오래도록 대립했던 장 드 몽포르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잔 드 팡티에브르를 후계자로 내정하고 철저하게 교육시켰으며,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친척인 샤를 드 블루아와 결혼시켰다. 하지만 정작 임종을 맞이할 때 후계자를 누구로 삼을지 정해달라는 가신들의 요청에 냉담하게 답했다.
"그런 일로 괴롭히지 말고 제발 날 좀 내버려 두시오."

1341년 4월 30일, 장 3세는 캉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플로에르멜의 카르멜 수도회에 안장되었다. 이후 잔 드 팡티에브르와 장 드 몽포르가 브르타뉴 공작위를 놓고 대립하면서, 장장 24년간 이어진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의 막이 올랐다.

3.6.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

장 3세가 후계자를 명확히 정하지 않고 사망했기에, 브르타뉴 공국의 주권자인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가 브르타뉴 공작으로 누구를 선임할 지 정해야 했다. 필리프 6세는 잔 드 팡티에브르를 브르타뉴 여공작으로 세우기로 했고, 샤를 드 블루아는 그녀의 남편 자격으로 브르타뉴 공동 공작이 되었다. 잔 드 팡티에브르와 샤를 드 블루아 부부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를 알현하여 경의를 표한 뒤 브르타뉴 공작으로 인정받기 위해 파리로 향했다. 장 드 몽포르는 이때를 틈타 반기를 들었다. 그는 잔이 여자이기 때문에 공작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왕실이 필리프 5세부터 도입한 살리카법에 근거해, 브르타뉴는 1297년 이래로 프랑스 왕국의 일부였으므로 종주국의 법률이 브르타뉴에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 드 몽포르는 프랑스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는 귀족 및 평민들의 지지를 토대로 군대를 일으켜 낭트, 렌, 디낭, 브레스트 등 브르타뉴의 가장 중요한 도시 및 성들을 빠르게 공략했다. 이에 샤를 드 블루아는 아내의 권리를 지켜주겠다고 선언하고 그 해 9월까지 5,000명의 프랑스 군인과 2,000명의 제노바 용병을 모집한 뒤 장 드 몽포르가 근거지로 삼은 낭트로 진격했다. 1341년 10월 14일, 샤를 드 블루아의 군대가 샹토소에 도착한 뒤 공성전에 착수했다. 장 드 몽포르는 처음엔 잉글랜드의 지원이 올 때까지 낭트에서 버티려 했다. 그러나 샤를의 뒤에 필리프 6세가 파견한 또다른 프랑스군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점점 많은 추종자들이 그를 저버리고 적에게 투항하려 했다. 이에 장은 지금 당장 승부를 보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10월 16일 낭트에서 출진해 샹토소 구원에 착수했다.

당시 샤를 드 블루아는 장성들에게 공성전을 맡기고 자신은 샹토소에서 3마일 떨어진 로모(l'Humeau) 농장에 머물렀다. 몽포르의 부하들은 이곳을 급습해 샤를의 경호원들을 거의 압도했다. 그러나 샤를이 농가의 탑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항전하는 바람에 제때에 잡는 데 실패했고, 그 사이에 프랑스군이 샤를을 구하기 위해 달려오면서 로모 농장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결국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장은 낭트로 도주했고, 많은 부하들이 프랑스 기병의 추격을 뿌리치지 못하고 죽거나 사로잡혔다.

낭트에 도착한 장은 시민들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자 "한 달 안에 잉글랜드군이 도착하지 않으면 항복할 테니 그 때까지 항전하자"라고 설득해 겨우 자신을 받아들이게 했다. 그러나 샤를의 군대가 도시를 에워싸서 공세를 퍼붓자, 낭트 시내에서 장을 넘기자는 목소리가 갈수록 커졌다. 이에 장은 10월 말에 용병과 민병대를 이끌고 적진을 급습했지만, 용병들이 전투 도중에 적군에 귀순하는 바람에 민병대가 몰살당하는 와중에 홀로 성안으로 도주했다. 그 후 샤를이 시신의 머리를 베어서 투석기를 통해 성내로 발사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시 의회가 장에게 항복을 강요했다.

결국 장은 더 버티지 못하고 11월 2일 샤를에게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는 대가로 항복했다. 샤를은 그가 성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약속을 파기하고 체포한 뒤 루브르 감옥에 보내버렸다. 그 후 샤를은 1341년 겨울 동안 브르타뉴 동부 전체를 공략하고 1342년 봄에는 렌을 비롯한 브르타뉴 서부 대부분을 공략했다. 그러나 장 드 몽포르의 아내인 플란데런의 잔 엔봉 공방전에서 샤를을 막아내고 잉글랜드군이 잔의 편을 들어 전쟁에 개입하면서, 금방 끝나는 듯했던 전쟁은 프랑스의 후원을 받는 잔 드 팡티에브르 및 샤를 드 블루아 부부와 잉글랜드의 후원을 받는 장 드 몽포르와 아들 장 4세 드 브르타뉴간의 기나긴 내전으로 치달았다.

1343년 1월 19일,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레스트로이트 휴전 협약을 맺었다. 그들은 3년간 휴전을 준수하기로 했고, 반은 클레멘스 6세의 추기경이 임시로 관리하기로 했다. 또한 루브르 감옥에 갇혀 있던 장 드 몽포르는 프랑스를 떠나거나 브르타뉴로 돌아가지는 못하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한편 브르타뉴 공작위는 잔 드 팡티에브르가 물려받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반 주민과 지역 성직자들은 장 드 몽포르에게 충성했기에 이 합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조약이 체결된 지 몇 달 후인 1343년 9월 추기경을 몰아낸 뒤 잉글랜드군을 도시로 불러들였다. 또한 브르타뉴 지배권을 두고 경쟁하던 올리비에 4세 드 클리송이 잉글랜드와 내통했다고 필리프 6세에게 모함하여 올리비에 4세를 처형당하게 해 경쟁자를 제거했다. 이에 분노한 올리비에 4세의 부인 잔 드 벨빌과 아들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은 약 9개월간 프랑스를 공격하는 해적질을 했다.

1344년 3월, 샤를 드 블루아는 반 주민들이 추기경을 몰아내고 잉글랜드군을 도시로 불러들인 것을 빌미로 삼아 평화 협약이 깨졌다고 주장하며 공새를 개시해 몽포르 파벌에 가담했던 도시들을 하나둘씩 제압했다. 1344년 3월, 샤를은 캉페르를 포위해 5월 1일에 함락시킨 뒤 1,400 ~ 2,000명 가량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몽포르 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가 생포된 잉글랜드 포로들은 몸값을 받기 위해 따로 구금되었지만, 파리로 이송된 뒤 반역죄가 적용되어 처형되었다.

장 드 몽포르는 브르타뉴로 비밀리에 이동해 세력을 일으켜보려 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자 1345년 3월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이후 잉글랜드군의 지원을 받고 브르타뉴에 귀환했지만 중병에 걸려 9월 16일에 사망했다. 여기에 엔봉 공방전에서 맹활약했던 잔 드 플란데런은 정신병에 걸려 에드워드 3세에 의해 틱힐 성에 감금되었고, 두 사람 사이의 아들인 장 4세 드 브르타뉴는 6살 소년에 불과했다. 이제 브르타뉴의 대다수 지역은 잔 여백작과 샤를 드 블루아를 섬겼다.

이리하여 브르타뉴 내전이 종결되는 듯했지만, 1346년 여름 에드워드 3세가 노샘프턴 백작 윌리엄 드 보훈에게 정예병 수백 명을 맡겨 장 드 몽포르와 함께 브르타뉴로 파견하면서 재개되었다. 잉글랜드군은 브르타뉴 해안지대의 몇 개 마을과 요새를 공략했다. 샤를 드 블루아는 이들을 격퇴하기 위해 병사 1,000여 명을 이끌고 북상했다. 1346년 6월 9일, 생폴드레옹 전투에서 윌리엄 드 보훈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샤를 드 블루아를 격파했다. 이후 샤를은 군대를 재건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 사이에 잉글랜드군은 7월 캉페르 탈환에 착수했다가 샤를에게 격퇴된 뒤 엔봉으로 철수했고, 장 드 몽포르는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1346년 8월 26일 크레시 전투에서 필리프 6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완패하자. 민심은 또다시 요동쳤고, 브르타뉴의 많은 귀족들이 잉글랜드군과 은밀히 접촉했다. 1347년 5월, 중장병 1,800명, 궁수 600명, 석궁병 2,000명, 다수의 농민병을 모은 샤를은 브르타뉴의 민심을 수습하고 잉글랜드군을 브르타뉴에서 몰아내기 위해 공세를 재개하기로 했다. 그의 첫번째 목표는 라 로슈데리앙이었다. 그는 이곳을 포위 공격하면서 잉글랜드 구원군이 근처에 이르면 즉시 요격해 궤멸시키기로 했다. 5월 20일 라 로슈데리앙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마을을 에워싸고 북쪽, 동쪽, 남쪽에 3개의 요새화된 숙영지를 건설한 뒤 다양한 크기의 투석기 9개로 포격을 가했다. 가장 큰 투석기는 무게가 300파운드에 달하는 돌을 던졌고, 이로 인해 마을 주지사의 집이 부분적으로 파괴되는 등 많은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라 로슈 데리앙의 잉글랜드 주지사 리처드 토스햄은 그의 아내를 포함한 수많은 인사들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항복을 거부했다.

라 로슈데리앙 마을이 위험에 처했다는 소식을 접한 토머스 다그워스는 라 로슈데리앙에서 남서쪽으로 50마일 떨어진 카하익스에서 기마병 300명, 궁수 400명을 모은 뒤 라 로슈데리앙을 향해 행진했고, 6월 중순에 마을에서 9마일 떨어진 베강의 대수도원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후 야밤에 조우디(Jaudi) 강 동쪽 기슭을 따라 라 로슈데리앙을 향해 접근하기로 하고, 일부 부대는 조우디 강 서쪽 기슭의 도로를 따라 행군하며 소음을 일으켜서 적군의 시선을 그쪽으로 잡아끌게 했다.

6월 20일 새벽에 도로변에서 소음이 일자, 샤를은 적이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전군에 가만히 서서 적의 공격을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얼마 후 다그워스의 잉글랜드군은 라 로슈데리앙에 도착한 뒤 마을 동쪽에 있는 숙영지를 공격했다. 그러나 사전에 대기하고 있던 프랑스군은 곧바로 반격했고, 잉글랜드군은 침착하게 대응하는 적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심지어 지휘관 다그워스는 부상을 입고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이대로 가면 프랑스군이 승리했을 테지만, 날이 밝을 무렵 아군이 적진을 기습 공격했다는 것을 알게 된 리처드 토스햄은 성벽을 지키는 일부 병력을 남겨두고 나머지를 이끌고 마을 밖으로 출격해 샤를의 프랑스군 후방을 공격했다. 프랑스군은 이를 예상치 못했고, 많은 병사가 겁에 질러 달아났다. 진영을 떠나지 않은 다른 두 진영의 브르타뉴-프랑스군은 차례로 잉글랜드군의 공세에 시달리다가 결국 무너졌다. 다그워스는 구출되었고, 샤를은 치열한 격투를 벌이다가 17개의 부상을 입은 채 생포되었다.

라 로슈데리앙 전투에서 프랑스군이의 사상자는 600명에 달했다. 잉글랜드군의 사상자는 알려진 바 없었지만, 상당한 숫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동안 브르타뉴 방면 프랑스군 사령관을 맡고 있었던 샤를 드 블루아는 생포된 후 치료를 받은 뒤 잉글랜드로 이송되어 수년 동안 투옥되었다. 이렇듯 몽포르 파벌과 블루아 파벌 모두 지휘관이 사라지면서 지리멸렬해졌고, 프랑스와 잉글랜드 모두 노르망디-플란데런-가스코뉴 등 다른 전선에 전념했지만 이곳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따라서 브르타뉴 내전은 소규모 군벌들과 도적단의 각축장으로 전락했다. 그 와중에 기사도의 상징으로 간주된 30인의 결투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전황에 별달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1352년, 프랑스 국왕 장 2세는 브르타뉴를 석권하기로 마음먹고, 프랑스 원수 기 2세 드 네슬에게 브르타뉴 원정을 맡겼다. 기 2세 드 네슬은 왕명을 받들어 브르타뉴의 도시 렌에 병력을 소집한 뒤 플로에르멜, 푸쥬헤 성을 포위 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일부 병력을 남겨서 포위를 이어가게 한 뒤 렌으로 가서 병력을 더 끌어모으려 했다. 한편 브르타뉴 주둔 영국 사령관 월터 벤틀리는 잉글랜드에서 데려온 1,500명의 중장병 및 장궁병을 이끌고 두 곳을 구하기 위해 행진했다. 그는 포위군을 가볍게 격파하고 플로에르멜에 있던 브르타뉴의 대리 수비대장 로버트 놀스와 합세했다.

기 2세는 벤틀리가 포위망을 뚫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쳐부수기 위해 9,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출진했다. 벤틀리는 이에 대응해 1352년 8월 14일 렌에서 약 30마일 떨어진 모롱 마을 동쪽 언덕 꼭대기 가장자리에 전투 대형을 결성하고, 각 측면에 기병과 궁수병을 배치했으며, 중앙에 중장병을 배치했다. 이후 벌어진 모롱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참패했고, 프랑스 사령관 기 드 네슬과 프랑스 기사 500명이 전사했다. 글랜드군의 사상자는 알려진 바 없지만, 에드워드 3세가 브르타뉴 방면 잉글랜드군의 전력 손실이 심하다는 소식을 듣고 원군을 보내줘야 했던 것을 보면 역시 많은 손실을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롱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접한 장 2세는 브르타뉴에 대한 관심을 접었다.

1353년, 프랑스와 잉글랜드 당국은 샤를 드 블루아를 브르타뉴 공작으로 인정하되, 샤를 드 블루아는 300,000 크라운의 몸값을 지불하고, 브르타뉴는 잉글랜드와 영구적으로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이 합의는 나바라 왕국 국왕이자 에브뢰 백작 카를로스 2세의 훼방으로 깨졌다. 1356년 8월 10일, 샤를 드 블루아는 700,000 골드 플로린의 몸값을 지불하기로 약속한 후 런던 탑에서 9년만에 풀려나 본국으로 귀환했다. 그 후 샤를은 몽포르 가문과의 전쟁을 재개했지만, 잉글랜드와 프랑스 모두 브르타뉴 전선에 별다른 관심이 없던 데다 몽포르 가문과 샤를 모두 병력을 동원할 여력이 없어서 승부를 가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공세를 벌이지 못했다.

1356년 9월 19일, 프랑스 국왕 장 2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푸아티에 전투에서 흑태자 에드워드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에 궤멸되고 장 2세가 생포되었다. 이 일로 민심은 요동쳤고, 브르타뉴의 많은 도시와 마을이 잉글랜드군에 귀순했다. 1356년 10월 3일, 랭커스터 공작 그로스몬트의 헨리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브르타뉴 내전을 마무리하기 위해 브르타뉴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이며 여전히 잔 드 팡티에브르와 샤를 드 블루아에 충성하는 도시인 포위했다. 그러나 렌 수비대의 항전에 고전하다가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역공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1357년 7월 5일에 철수했다.

1363년 7월, 샤를 드 블루아는 베서렐에서 장 4세 드 브르타뉴와 대치하던 중 합의를 이루었다. 이에 따르면, 블루아는 낭트 시를 포함한 북동부를 가지고, 몽포르는 남부와 서부를 가질 예정이었다. 공작 칭호를 사용할 권리에 대해서는 프랑스 국왕 장 2세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중재를 요청하기로 했다. 그러나 잔 드 팡티에브르가 자신은 온전한 브르타뉴 여공작이 되어야 한다며 합의를 거부해, 협정은 무효로 돌아갔다. 이 일은 전쟁에 지친 브르타뉴의 많은 귀족들이 블루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계기가 되었다.

1364년 2월 2일, 샤를 드 블루아와 장 4세 드 브르타뉴는 아키텐 공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브르타뉴 내전에 대한 중재를 요청했지만 별다른 응답을 받지 못했다. 1364년 7월, 잉글랜드에서 용병대를 모집한 장 4세 드 브르타뉴가 브르타뉴 서부 해안의 항구 도시들 중 블루아 가문을 지지하는 몇 안 되는 도시인 오레를 포위했다. 샤를 드 블루아는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베르트랑 뒤 게클랭과 함께 진군했다.

1364년 9월 29일 오레 외곽 북동쪽에 샤를 드 블루아의 군대가 도착하자, 장 4세 드 브르타뉴의 포위군은 마을 북쪽에 있는 호수를 옆에 낀 채 전투 대형을 편성했다. 존 챈더스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우익을 맡았고, 장 4세는 중앙 부대를 이끌었으며, 로버트 놀스의 또다른 잉글랜드군은 좌익을 맡았다. 그리고 휴 칼블리는 예비대를 이끌었다. 이에 맞서는 샤를 드 블루아의 군대 역시 3개 대열을 결성했다. 샤를 본인은 우익을 지휘했고, 게클랭은 중앙을 이끌었으며, 오세르 백작 장 3세는 좌익을 이끌었다. 누가 프랑스군 예비대를 이끌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장 4세와 샤를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사절을 보내 협상을 시도했다. 두 사람은 오랜 내전에 지칠대로 지쳐 있었고, 브르타뉴를 나눠 가지는 선에서 전쟁을 끝내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장군들은 그렇게 어중간하게 끝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샤를이 추가 제안을 하려 한다면 그가 보낸 사절을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특히 잉글랜드 군과 동맹한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은 아버지의 원수인 샤를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게클랭을 비롯한 블루아 지지자들 역시 비타협적으로 나왔고, 협상은 결국 결렬되었다. 협상이 잘 돼서 평화롭게 끝나기를 바랐던 양측의 많은 브르타뉴인들은 이에 실망해 탈영했다.

그 후 양측은 서로를 향해 진군했고, 잉글랜드 장궁병과 프랑스 석궁병간의 사격전이 펼쳐졌다. 이후 양측 맨앳암즈들과 창병들이 정면 충돌했다. 양자 모두 길고 잔혹한 전쟁을 이번 전투에서 끝내고 싶었기에 매우 필사적이었다. 그렇게 반나절간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진 끝에, 존 챈더스의 잉글랜드 우익 부대가 오세르 백작의 좌익 부대를 압도했다. 오세르 백작은 눈 하나를 잃고 포로가 되었고, 그의 부하들은 게클랭이 이끄는 중앙 부대로 도주했다. 이로 인해 중앙 부대의 대열이 흐트러지자, 챈더스는 이 호기를 놓치지 않고 적 중앙 부대 측면을 요격했다.

아군이 위급한 것을 본 샤를 휘하 우익 부대 상당수가 도주했고, 후방에 있던 예비대 역시 패주했다. 장 4세와 로버트 녹스는 존 챈더스와 함께 중앙의 게클랭 부대를 포위 공격했고, 예비대를 이끌던 휴 칼블리도 전장에 뛰어들었다. 결국 전의를 상실한 블루아군은 패주했고, 샤를 드 블루아는 전사했다. 게클랭은 필사적으로 항전했지만 완전히 포위되자 항복했다. 이날 전투에서 블루아 가문의 브르타뉴-프랑스 동맹군은 800명이 죽고 1,200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몽포르 가문의 브르타뉴-잉글랜드 연합군의 피해는 알려진 바 없지만 상대적으로 적었을 것이다.

전투 다음날, 장 4세 드 브르타뉴는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에게 서신을 보내 프랑스에 충성을 바치겠으니 자신을 브르타뉴 공작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샤를 5세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잔 드 팡티에브르에게 브르타뉴 여공작이 되려는 뜻을 접으라고 설득했다. 잔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고, 장 4세는 1365년 4월 12일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 되고 잔에게 상당량의 보상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브르타뉴 공작으로 인정받는다는 내용의 게랑드 조약을 체결했다. 이리하여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이 24년 만에 종식되었다.

3.7. 몽포르 왕조

3.7.1. 장 4세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에서 승리하고 브르타뉴 공작이 된 장 4세는 자기를 옹립하는 데 기여한 잉글랜드 왕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365년, 그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딸 메리 공주와 결혼했다. 메리 공주는 결혼식 직후 사망했지만, 장 4세는 에드워드 3세의 허락 없이는 재혼하지 않는 데 동의했다. 1366년, 그는 흑태자 에드워드의 의붓딸인 조앤 홀랜드와 재혼했다. 1362년 에드워드 3세가 브르타뉴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했지만, 이 공국은 이후로도 수년간 플랜태저넷 왕조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그는 브레스트 등 해안 지대의 여러 요새와 주변 지역의 통제권을 여러 잉글랜드 대장과 영주에게 위임하거나 확인해야 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 왕실과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 베르트랑 뒤 게클랭, 올리비에 드 모니 등 친 프랑스파 브르타뉴 인사들은 그를 불신했다.

장 4세는 프랑스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전쟁에서 어느 한쪽을 돕지 않고 중립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는 그가 잉글랜드와 연합할 가능성이 높다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고, 게클랭과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을 비롯한 샤를 5세의 궁정에서 영향력 있는 브르타뉴 인사들은 장 4세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남편 샤를 드 블루아가 죽은 후에도 브르타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잔 드 팡티에브르 역시 장 4세와 대립했다. 1372년 10월,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렌을 포위했다. 렌에 있었던 브르타뉴 공작부인은 도망치지 못하고 포로로 잡혔다. 부르봉 공작의 병사들은 공작부인의 짐을 수색해 브르타뉴 공작이 에드워드 3세와 체결한 비밀 조약의 사본을 발견했다. 이에 장 4세는 샤를 5세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이 잉글랜드군을 끌어들인 것은 인정하지만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 등 반항적인 귀족들에 맞서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협상 끝에 브르타뉴 공작은 공국에서 잉글랜드인들을 추방하고 프랑스군은 렌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합의를 맺었다.

그러던 1373년 3월,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가 생말로 항구에 상륙해 카스티야 선박 7척을 격파하고 2,000명의 맨앳암즈와 2,000명의 궁수병을 육지에 내려보내 브레스트를 구원했다. 샤를 5세는 장 4세가 잉글랜드군의 작전에 동의했기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확신하고, 게클랭에게 브르타뉴를 공략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게클랭은 기다렸다는 듯 대규모 군대를 일으켜 공세를 개시했다. 그 결과 2달 만에 브르타뉴 대부분이 프랑스에 넘어갔고, 브르타뉴 서부 해안 요새들인 브레스트, 오레, 베세렐, 데르발만이 프랑스군에 넘어가지 않았다. 장 4세는 4월 28일 브르타뉴를 떠나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1373년 8월 ~ 12월, 장 4세는 곤트의 존 칼레에서 출발해 보르도까지 진군하면서 단행한 약탈 행렬에 참여했다.

1378년경, 잉글랜드군은 칼레, 보르도, 바욘 등 몇몇 항구만을 확고하게 통제했다. 반면, 그들은 브르타뉴 서부 해안의 브레스트 등 여러 요새를 장악했고, 생 말로 항구에 대한 반복적인 공격을 가했다. 이에 샤를 5세는 잉글랜드군이 브르타뉴에서 새로운 항구를 확보하기 전에 브르타뉴를 확실히 장악하기로 마음먹고, 1378년 12월 18일 잉글랜드에 망명하고 있던 브르타뉴 공작 장 4세의 모든 영지를 몰수하고 브르타뉴를 왕실의 직할지로 삼겠으며, 앙주 공작 루이 1세를 브르타뉴의 총독으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역효과를 초래했다. 지난날 장 4세와 오랜 세월 내전을 치러가며 대립했던 잔 드 팡티에브르는 프랑스 왕실이 브르타뉴 전역을 직할지로 삼아 자치권을 박탈하는 조치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고, 대다수 브르타뉴 영주들 역시 여기에 동감했다. 그들은 1379년 4월 25일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 장 4세를 브르타뉴에 복귀시키기 위해 프랑스 왕국에 대적하기로 결의했다. 임시 정부는 4명의 원수와 4명의 민정 수장으로 구성되었으며, 공국을 방어할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가구당 1프랑의 세금을 거둬서 군자금을 모으기로 했다.

장 4세는 이들의 호응에 힘입어 1379년 8월 3일 셍쎄흐벙에 상륙해 브르타뉴 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때 프랑스 무관장 게클랭은 장 4세를 저지하려 하지 않았고, 샤를 5세는 브르타뉴인인 그가 브르타뉴 영주들의 뜻에 동조하고 자신에게 반역을 꾸미고 있다고 의심했다. 게클랭은 왕이 자신에게 그런 의혹을 품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격분해 무관장의 검을 왕에게 반환하고 카스티야로 가려 했다. 그러다가 앙주 공작 루이 1세의 개입으로 샤를 5세의 신임을 되찾았다. 이후 샤를 5세는 브르타뉴 민심이 지극히 적대적인 상황에서 무력을 앞세워 그곳을 평정한들 장기적인 지배를 할 수 없다는 걸 인식하고, 장 4세와 협상하기로 했다.

그러나 샤를 5세는 협상이 마무리되기 전에 사망했고, 새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섭정단이 협상을 이어간 끝에 1381년 5월 2일에 제1차 게랑드 조약의 내용을 재확인하는 내용의 제2차 게랑드 조약을 체결했다. 이리하여 장 4세는 브르타뉴 공작으로 공인되었다. 그는 렌에서 열린 공작 대관식을 프랑스 왕실 대관식을 모방하여 거행하게 해, 브르타뉴 공작의 자치권은 프랑스 왕국이 침해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드러내려 했다.

그러나 1387년, 장 4세는 또다시 위기에 직면했다. 당시 프랑스 무관장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은 팡티에브르 백작이며 고인이 된 아버지 샤를 드 블루아가 생전에 미지급한 몸값을 지불하기 위한 담보로 잉글랜드에 수감되어 있던 장 1세 드 샤티옹을 대신해 팡티에브르 백국을 관리하고 있었고, 그의 딸 마르그리트를 장 1세 드 샤티옹의 아내로 삼았다. 개랑드 조약에 따르면, 브르타뉴 공작 장 4세가 아들을 낳지 못하면 팡티에브르 백작이 브르타뉴 공작이 될 수 있었다. 장 4세는 이 때문에 올리비에가 자신을 배제하고 장 1세 드 샤티옹을 브르타뉴 공작으로 세우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의심했다.

그러던 1387년 6월 26일, 올리비에는 반에서 열린 연회에서 장 4세에 의해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이후 장 4세는 그를 가방에 가둔 뒤 바다에 던지라고 명령했지만, 이내 명령을 철회했다. 그 후 올리비에 5세는 몸값으로 많은 금액을 지불하고 블랑, 조슬랭, 주곤 및 르 길도 요새를 장 4세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1388년,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는 장 4세가 압수한 영토를 올리비에 5세에게 돌려주지만 몸값을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으로 중재했다. 이후 올리비에 5세는 장 4세에게 반감을 품었다.

1392년 6월 13일, 올리비에 5세는 생폴 호텔에서 개인 저택으로 이동하던 중 라 페르테 베르나르, 프레시네, 사비에 영주인 피에르 드 크라옹이 이끄는 무리의 습격을 받고 중상을 입었다. 피에르 드 크라옹은 사비에 요새로 피신했다가 토벌대가 접근해오자 브르타뉴 공국으로 피신했다. 그는 자신이 올리비에 5세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으며, 혼자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지만, 올리비에 5세는 분명 장 4세가 사주했을 거라고 여겼다. 프랑스 왕실은 장 4세에게 피에르 드 크라옹을 넘기라고 요구했지만, 장 4세는 거부했다. 이에 샤를 6세는 올리비에 5세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암살 미수범을 숨기는 장 4세를 응징하겠다고 선포하고 브르타뉴 원정을 단행했다. 그러나 1392년 6월, 샤를 6세가 르망 숲을 지나가던 중 갑작스러운 발작 증세를 보이면서 원정이 중단되었다. 그 후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은 숙청되었고, 장 4세는 프랑스 왕실과 휴전을 맺고 지속적으로 평화 협상을 이어간 끝에 1395년에 화해했다. 그러나 장 4세의 권위를 거부한 생 말로 시는 1394년 프랑스 국왕의 종주권 아래 놓였고, 1415년까지 브르타뉴 공국 변두리에 남아 있었다.

1393년, 장 4세는 올리비에가 프랑스 왕국에서 추방된 뒤 숨어든 조슬랭 성을 포위했다. 하지만 1394년 정신을 어느정도 회복한 샤를 6세는 올리비에가 무관장으로서의 특권을 유지하도록 허락했고, 올리비에는 이를 기회로 삼아 생브리외에서 군대를 소집한 뒤 장 4세에 맞섰다. 여기에 샤를 6세의 형제이자 오를레앙 공작인 루이 1세 도를레앙과 동맹을 맺고 브르타뉴 공작에 맞서 싸울 병력과 물자를 지원받았다. 결국 장 4세는 그를 꺾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1396년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를 통해 올리비에와 화해를 모색했다. 장 4세는 그의 신변을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했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자기 아들 을 그에게 보내 반에서 인질 생활을 하도록 했다. 그 후 올리비에와 장 4세는 정식으로 화해했다. 1397년 6월 12일, 장 4세는 샤를 6세와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의 협상 덕분에 브레스트를 잉글랜드로부터 돌려받았다. 그 대신, 그는 잉글랜드에 120,000 금 프랑을 지불했다. 이후 리치먼드 백작과 영지 역시 1398년 4월 23일에 돌려받았다. 그러나 1년 후 리처드 2세가 폐위된 뒤, 새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는 리치먼드 백작위를 그로부터 박탈했다.

3.7.2. 장 5세

1399년 11월 1일, 장 4세가 낭트에서 사망했다. 그 후 브르타뉴 공작이 된 아들 장 5세는 아직 10살이었기에 어머니 나바라의 호아나가 섭정을 맡았고, 그 다음에는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가 후견인이 되었다. 1403년, 브르타뉴군과 잉글랜드군 사이에 2차례의 전투가 벌어졌다. 첫번째는 브르타뉴 제독 장 드 펜회트와 기욤 2세 뒤 샤스텔이 7월에 잉글랜드 함대를 격파한 것이었고, 두번째는 펜회트와 샤텔이 9월부터 11월까지 저지 섬, 건지 섬, 웨스트 데번셔를 습격해 해당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이에 잉글랜드군이 보복에 나서 브르타뉴의 항구도시인 뿌왕뜨 드 셍마띠유를 파괴했다. 1404년, 타네기 3세 뒤 샤스텔이 형이 저지 섬 원정을 떠났다가 장병 200명과 함께 전사한 것에 보복하고자 잉글랜드의 다트머스 항구를 습격한 뒤 막대한 전리품을 챙겨 귀환했다.

이렇듯 잉글랜드와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1403년, 어머니 호아나가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의 새 왕비가 되었다. 이로 인해 헨리 4세의 의붓아들이 된 그는 잉글랜드와의 무력 충돌을 자제하려 했다. 그러면서도 1404년 1월 7일에 파리로 가서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에게 경의를 표했고, 샤를 6세의 딸인 잔 드 발루아와 결혼했다. 또한 그는 아버지의 옛 적수였던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과 화해했다. 하지만 얼마 후 올리비에 5세와 영지 소유권 문제를 놓고 다퉜다. 올리비에 5세가 파리 법원에 소송을 걸자, 장 5세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올리비에의 땅을 몰수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에 무력 행사를 자제하기로 하고 올리비에 5세와 재차 화해했다.

1406년부터 친정을 시작한 그는 프랑스에서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냑파간의 대결이 벌어지자 처음에는 부르고뉴파의 편에 섰다가 1407년부터 1411년까지 아르마냑파를 지원했다. 하지만 대체로 약간의 병력과 물자만 보냈을 뿐 내전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고, 1411년 이후에는 어느 쪽에도 편을 들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1407년, 1409년, 1415년에 잉글랜드와 맺은 휴전 협정을 갱신했다. 1415년 여름에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가 프랑스를 침공하자, 그는 프랑스를 돕는 대가로 프랑스 왕실로부터 생 말로 시를 돌려받을 계획을 세웠지만 1415년 10월 25일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완패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포기하고 1417년 잉글랜드와의 휴전 협약을 갱신했다.

1420년, 장 5세는 샹토소에서 열린 연회에 초대받고 그곳으로 갔다가, 팡티에브르 백작부인 마르그리트 드 클리송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마르그리트 드 클리송과 마르그리트의 아들이자 팡티에브르 백작 올리비에는 그가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그를 매일 새로운 감옥으로 옮기며 공작에서 사임하고 브르타뉴 공작위를 올리비에에게 넘기라고 협박했다. 이에 장 5세의 아내인 잔 드 발루아는 브르타뉴의 모든 남작들에게 공작을 구출하는 걸 도와달라고 요청했고, 그들은 이에 호응해 팡티에브르 가문의 모든 성을 하나씩 포위했다. 얼마 후 마르그리트 드 클리송이 잔의 군대에 사로잡히자, 올리비에는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그를 풀어주기로 했다. 그 후 그는 자신이 갇혔던 샹토소 성채를 완전히 파괴했고, 올리비에의 모든 영지를 압수하고 올리비에를 추방했다. 또한 게랑드 조약을 파기해, 몽포르 가문이 끊어진 뒤에도 팡티에브르 가문이 공작위를 잇지 못하게 했다.

1420년 형제 아르튀르의 설득을 받아들여 헨리 5세가 샤를 5세의 뒤를 이어 프랑스 국왕이 되는 트루아 협약을 승인했다. 하지만 1421년 3월 22일 보제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이 참패하자, 그해 5월 사블레에서 도팽 샤를과 브르타뉴 측이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포기하는 대가로 프랑스 측은 반 브르타뉴파 인사들을 축출하겠다는 내용의 협약을 맺었다. 그 후 도팽 샤를이 루아르 계곡에서 전쟁을 치렀을 때, 브르타뉴 측은 샤를의 병력 중 1/3을 제공했다. 이는 스코틀랜드에서 파견된 군대와 거의 같은 규모였다. 그러나 도팽 샤를이 약속과는 달리 측근들을 내보내지 않았고, 헨리 5세가 모 공방전을 단행하자, 프랑스와의 동맹을 끊었다. 1423년, 장 5세는 잉글랜드의 새 국왕이자 프랑스 국왕이 된 헨리 6세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대가로 무제한의 자치를 인정받는 아미앵 협약을 체결했다.

1424년 8월 17일,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이 베르뇌유 전투에서 베드퍼드 공작 존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에게 궤멸되었다. 이에 도팽 샤를은 11월 30일 마콩에서 부르고뉴 및 브르타뉴 측 대표와 협상해, 두 세력이 잉글랜드와 동맹을 끊고 자신과 손잡기를 희망했다. 브르타뉴 공작 장 5세는 브르타뉴의 지원을 얻고 싶다면 아르마냑파를 궁정에서 축출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도팽 샤를은 자신의 주요 지지 세력인 아르마냑파와 척지는 건 정치적 자살이라는 걸 잘 알았기에 이를 들어줄 수 없었다. 장기간의 협상 끝에, 장 5세의 동생 리슈몽을 베르뇌유 전투에서 전사한 장 8세 다르쿠르의 뒤를 이어 프랑스 무관장으로 선임하고, 브르타뉴 공작이 프랑스 정부에서 지분을 받는 대가로 아르마냑파 지도층은 지위를 유지한다는 타협이 이뤄졌다.

1425년 3월 7일, 리슈몽은 시농에서 도팽 샤를이 하사한 무관장의 검을 받아들고 정식으로 무관장에 취임했다. 그해 4월, 리슈몽은 앙주 공작부인 아라곤의 욜란다와 타네기 3세 뒤 샤스텔의 설득을 받아들여 프랑스의 몰락을 초래한 아르마냑파를 축출해 도팽 샤를을 구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대를 일으켰다. 6월 초, 리슈몽과 욜란다의 군대는 부르주 인근에서 아르마냑파 지도자 장 루베와 도팽 샤를의 군대와 대치했다. 도팽 샤를은 브르타뉴의 지원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결국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부르주로 돌아와서 귀족과 도시 유력자들 앞에서 그동안의 잘못된 통치를 반성하는 연설을 한 뒤 장 루베를 해임했다.

1425년 10월 초, 소뮈르에서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와 도팽 샤를이 접견했다. 브르타뉴 공작은 도팽 샤를에게 신하로서 선서한 뒤, 부르고뉴 공작에게 서신을 보내 아르마냑파가 숙청되었으니 도팽 샤를과 화해하라고 권유했다. 이 소식을 접한 베드퍼드 공작 존은 격분해 브르타뉴 공국에게 2년 전 아미앵에서 맺은 조약에 따라 헨리 6세를 프랑스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응징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낸 뒤 브르타뉴 침공을 준비했다. 1426년 1월 15일, 베드퍼드 공작 존은 브르타뉴에 전쟁을 선포하고 공세를 단행했다. 그는 이에 맞서 싸웠지만, 1426년 2월 27일 ~ 3월 6일 생잠 요새 공방전에서 참패를 면치 못했고, 뒤이어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이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브르타뉴로 쳐들어가 공국의 수도인 렌을 압박했다.

결국 장 5세는 굴복했고, 1427년 9월 8일 트루아 조약에 대한 지지를 재확인하고 헨리 6세를 프랑스 국왕으로 받들기로 했다. 여기에 아들 질 드 브르타뉴를 잉글랜드에 인질로 보냈다. 질은 나중에 헨리 6세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이후 겉으로는 잉글랜드의 편에 섰지만 실제로는 소극적인 자세로 임하던 그는 1431년부터 프랑스 진영에 합류했지만, 아들 질을 런던 주재 대사로 세웠다. 1436년 4월 2차 파리 공방전으로 파리가 프랑스의 손아귀에 들면서 전세가 기울었지만, 그는 1440년 7월 11일 헨리 6세와 또다른 조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그는 잉글랜드의 적을 지원하지 않으면, 그들의 망명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한편, 그는 알랑송 백작 장 2세 달랑송과도 마찰을 벌였다. 장 2세 달랑송은 베르뇌유 전투에 참여했다가 생포된 뒤 석방되는 조건으로 내야 할 막대한 몸값 마련에 골머리를 앓았다. 그러다가 외삼촌인 장 5세에게 푸제르 요새를 매각하는 대가로 12만 크라운을 챙겼다. 그럼에도 돈이 부족했던 그는 1431년 크리스마스 때 낭트를 방문해 장 5세에게 어머니의 지참금 중 아직 미지급된 15,000 크라운을 달라고 요구했다. 장 5세가 시원한 응답을 하지 않자, 그는 외삼촌에게 압력을 가하기로 마음먹고 사촌인 몽포르 백작 프랑수아[4]를 납치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그 대신 낭트의 주교이자 장 5세의 총리였던 장 드 말레트르와를 납치해 푸앙세로 끌고 갔다.

장 5세는 자신의 총신을 납치한 그에게 분노해 렌과 그 주변 지역에서 군대를 집결한 뒤 사위인 기 14세 드 라발에게 지휘권을 맡겨 푸앙세를 공략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에게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메인과 하부 노르망디에 주둔한 잉글랜드 중대가 그를 돕기 위해 달려왔다. 장 2세 달랑송은 이에 맞서기 위해 부르봉 공작 샤를 1세 및 여러 영주들로부터 무장병 2,000명을 지원받았다.

푸앙세 공방전은 1432년 1월 16일부터 2월 22일까지 진행되다가, 브르타뉴 공작 장 4세의 둘째 아들이자 장 5세의 동생이었고, 프랑스군의 사령관이기도 했던 아르튀르 드 리슈몽의 중재로 평화 협약이 체결되면서 해결되었다. 협약에 따르면, 알랑송 공작은 일전에 납치했던 장 드 말레트르와와 모든 잉글랜드인 및 브르타뉴인 포로를 석방하고, 플라스 드 라 게르슈를 담보로 제공하고 50,000 크라운의 벌금을 지불하기로 했다. 또한 장 5세는 1년 후 플라스 드 게르슈를 돌려주며, 마리 드 브르타뉴의 지참금 중 나머지 금액, 즉 15,000 크라운을 지불하기로 약속했다.

3.7.3. 프랑수아 1세

1440년 10월 27일, 장 5세가 낭트에서 사망했고, 아들 프랑수아 1세가 브르타뉴 공작에 선임되었다. 1443년 10월 중순, 존 보퍼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브르타뉴 국경의 성채 라 게르슈를 공략하고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 당시 브르타뉴 공국은 잉글랜드 왕국과 막 평화 협약을 맺고 휴전 중이었다. 그는 잉글랜드군이 난데없이 쳐들어와서 행패를 부린 것에 분노해 잉글랜드 정부에 항의했다. 이에 당황한 잉글랜드 추밀원은 브르타뉴 공작에게 정중하게 사과하고 존 보퍼트에게 브르타뉴 공국에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명령했다.

1444년, 잉글랜드 대사로 활동하다가 브르타뉴로 귀환한 형제 질은 8세의 부유한 상속녀인 프랑수아즈 드 디낭과 결혼해, 샤토브리앙 남작과 길도 성을 포함한 브르타뉴의 여러 곳을 확보했다. 그 후 질은 프랑수아 1세에게 더 많은 상속 재산을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프랑수아 1세가 이를 거절하자 질은 대사로 활동하던 시절 친분을 맺은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에게 접근해 그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브르타뉴에 있는 자신의 모든 영지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질이 1445년 7월 5일에 잉글랜드로 보낸 편지는 프랑수아 1세의 요원들에게 발각되었다. 프랑수아 1세는 이에 분개해 질을 체포하려 했지만, 프랑스 무관장이자 숙부인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만류하자 일단 용서해주기로 했다.

1446년, 노르망디에서 파견된 잉글랜드 궁수들이 질이 다스리던 길도에 들어섰다. 이에 프랑스의 여론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의 허락을 받고 1446년 6월 26일 프리장 드 코에티비 장군을 파견해 질을 체포했다. 이후 질은 디낭으로 이송된 뒤 렌으로 옮겨졌다. 이때 프랑수아는 렌에 있었지만 질을 만나보기를 거부했다. 그 후 질은 샤토브리앙으로 이송되어 그곳의 지하 감옥에 갇혔다. 질의 재산과 프랑수아즈 드 디낭의 재산은 모조리 압수되어 브르타뉴 공작 직할지가 되었다.이후 브르타뉴 법무장관 올리비에 뒤 브레일의 주관하에 1446년 7월 31일 르동에서 질의 반역죄를 논하는 재판이 거행되었다. 하지만 1447년 헨리 6세가 질의 석방을 위해 브르타뉴에 군사 개입을 하겠다고 위협하자 재판은 중단되었다.

1448년 10월, 질은 몽콘투어 성으로 옮겨졌다. 질은 그곳에서 학대당하다가 12월에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에게 구원을 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샤를 7세는 질을 석방시키기 위해 프리장 드 코에티비 제독을 파견했다. 코에티비는 1449년 5월 반에 도착한 뒤 프랑수아 1세에게 질을 석방하라는 왕명을 전했고 일단 프랑수아도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얼마 후 헨리 6세가 질을 잉글랜드로 보내라고 요구하는 서신이 도착했는데, 이 서신은 사실 피에르 라 로즈라는 자가 위조했다고 알려졌다. 프랑수아 1세는 이 서신에 격분해 질의 석방을 취소했다. 질은 생로뇌의 하두이나예 성으로 옮겨졌다.

1449년 3월 24일, 잉글랜드 용병대장 프랑수아 드 쉬리엔이 브르타뉴로 쳐들어가서 푸제르를 공략했다. 휴전 기간 중에 부유한 도시인 푸제르를 점령한 것에 분노한 프랑수아 1세는 노르망디의 잉글랜드 정부에 푸제르를 돌려주고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요구했으나, 잉글랜드 정부는 쉬리엔이 단독으로 그렇게 했을 뿐 자기들과는 관련 없는 일이라며 무시했다. 이에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에게 탄원했다. 샤를 7세는 고대하던 기회가 왔다고 여기고, 잉글랜드군이 협약을 위반했다고 간주하고 전쟁을 선포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노르망디를 향한 대규모 공세를 벌였고, 노르망디 전역이 프랑스의 영토로 신속하게 귀속되었다. 잉글랜드 측은 이를 어떻게든 저지하려 했지만 포미니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1450년 4월 25일, 질을 감시하던 올리비에 드 멜 등의 간수들이 질을 목 졸라 죽였다. 프랑수아 1세가 명령을 내렸는지 간수들이 독단적으로 저질렀는지는 분명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대 사람들은 프랑수아에게 동생 질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프랑수아 1세는 공개적으로 질이 가엾게 죽었다며 후회를 표명했다. 그로부터 불과 3개월도 안 된 1450년 7월 19일, 프랑수아 1세는 낭트에서 사망했다.

3.7.4. 피에르 2세, 아르튀르 3세, 프랑수아 2세

프랑수아 1세는 임종을 눈앞에 뒀을 때 형제 피에르 2세를 브르타뉴 공작 후계자로 선택했다. 이에 스코틀랜드 정부는 프랑수아 1세의 장녀인 마르그리트가 브르타뉴 여공작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450년 11월 3일, 피에르 2세는 투르 인근의 몽바종에서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후 아르튀르 드 리슈몽의 권고를 따라 막내 동생 질 드 브르타뉴를 해친 간수들을 추격해 올리비에 드 멜 등을 체포한 뒤 1451년 6월 8일에 처형했다. 살인의 선동자로 지목된 아르튀르 드 몽토방은 탈출한 뒤 파리의 셀레스틴 수도원에 숨어 루이 11세 치세 때까지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1453년 카스티용 전투에 명목상 총사령관으로서 참여했으며, 뒤이은 보르도 공방전에 참여해 프랑스 왕국이 가스코뉴 전체를 병합하고 백년전쟁을 마무리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기옌에 1,500명의 기사단을 파견해 잉글랜드군이 차후에 가스코뉴에 상륙하려는 걸 저지하도록 했다. 이후 건강이 악화되었고, 자식이 없어서 승계 문제가 야기될 소지가 생기자, 그는 형 프랑수아 1세의 장녀인 마르그리트를 사촌인 에탕프 백작 프랑수아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1455년 11월 16일 반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낭트 주교 기욤 드 말레스트로이트의 주관하에 거행되었다.

1457년 9월 22일, 피에르 2세가 사망했다. 그 후 장 4세의 아들이자 피에르 2세의 삼촌인 프랑스 무관장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아르튀르 3세'로서 브르타뉴 공작에 선임되었다.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는 몽타르지로 와서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라고 명했지만, 리슈몽은 전임자들처럼 프랑스 국왕에게 경의를 표하길 거부하고, 1458년 5월 11일에 아래의 선언서를 발표했다.
나는 항상 샤를과 그의 왕국을 섬겼다. 나는 무관장이므로 왕의 명령을 따라야 하지만, 브르타뉴 공작으로서는 그렇지 않다. 내 공국은 왕국의 일부가 아니었고, 왕국이 분할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나는 프랑스의 귀족이 아니다. 그리고 내 신민들의 독립성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나는 몽타르지나 다른 곳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리슈몽은 브르타뉴 공작으로서 오래 재임하지 못하고 1458년 12월 26일 낭트에서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3차례 결혼했지만 자녀를 한 명도 낳지 못했기에, 장 4세의 손자인 프랑수아 2세가 브르타뉴 공작이 되었다. 그는 프랑스의 간섭으로부터 브르타뉴 공국의 자주권을 지켜내는 걸 목표로 삼았다.

1465년 3월, 샤롤레 백작이자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의 아들인 용담공 샤를, 로렌 공작 장 2세, 느무르 공작 및 라 마르쉐 백작 자크 다르마냐크느무르, 아르마냐크 백작 장 5세 다르마냐크, 생폴 백작 루이 드 뤽상부르생폴, 뒤누아 백작 장 드 뒤누아, 도매르탱 백작 앙투안 드 샤반, 알브레 백작 샤를 2세 달브레, 피에르 당부아즈, 앙드레 드 라발몽모랑시 등과 함께 공익 연맹을 결성해, 프랑스 대귀족의 특권을 박탈하고 중앙집권제를 추진하는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 클레베 공작 요한 1세와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 등 외부 세력도 공익 연맹에 가담했다.

1465년 7월 16일, 프랑수아 2세는 용담공 샤를과 함께 몽레리에서 루이 11세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맞붙어 승리했다. 이후 파리로 진군해 프랑스 시를 포위했지만, 식량 부족에 시달린 데다 타 지역의 프랑스군이 접근해오는 것에 압박감을 느꼈다. 결국 공익 연맹은 루이 11세에게 평화 협상을 맺자고 요청했고, 루이 11세는 받아들였다. 양자는 1465년 10월 5일 콩플랑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공익 연맹 참가자들은 각종 이권을 받아내는 대가로 루이 11세를 국왕으로 계속 받들기로 하고, 루이 11세는 그들을 사면하기로 했다. 이때 프랑수아 2세는 1465년 12월 23일 루이 11세와 캉 조약을 별도로 체결해, 몽모르와 에탕프를 받아내는 대가로 프랑스 국왕에 대한 충성 서약을 유지하기로 했다.

1466년, 루이 11세가 파견한 왕실군이 노르망디 공작 샤를을 노르망디 공국에서 축출했다. 샤를은 브르타뉴 공국으로 도망친 뒤 프랑수아 2세의 보호를 받았다. 1468년, 루이 11세는 브르타뉴 공국을 상대로 원정을 개시했다. 그 해 9월 7일, 앙센이 5일간의 공방전 끝에 프랑스군에 함락되었다. 그 후 9월 10일 교황청의 중재에 따라 샤를과 함께 "왕의 훌륭한 종이 되겠다"는 서명을 제출하고 콩플랑 조약 때 얻었던 영토를 돌려주고,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과의 동맹 관계를 끊겠다고 약속했다.

1472년, 프랑수아 2세는 앙센 협약을 파기하고 용담공 샤를과 동맹을 맺었다. 루이 11세는 이를 응징하기 위해 그해 6월 대규모 병력을 일으켜 브르타뉴로 진격했다. 프랑수아 2세는 용담공 샤를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샤를은 이에 부응해 피카르디를 침공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에 루이 11세는 브르타뉴에서 군대를 돌려야 했다. 이후 프랑수아 2세는 노르망디와 푸아투를 수 차례 침공했지만 프랑스군에게 격퇴되었다. 1474년 7월 25일, 프랑스 무관장을 역임하면서도 루이11세에 대한 음모를 꾸미던 루이 드 뤽상부르생폴의 중재하에 용담공 샤를과 함께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와 런던 비밀 협정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이들은 루이 11세를 처단한 뒤 프랑스를 생폴 백작, 부르고뉴 공작, 브르타뉴 공작, 부르봉 공작, 느무르 공작, 멘 백작, 에드워드 4세의 주도하에 분할하기로 했다. 여기에 루이 드 뤽상부르생폴은 에드워드 4세에게 피카르디를 침공한다면 생캉탱을 넘겨주겠다고 제안했으며, 프랑스의 여러 거물을 음모에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1475년 7월 4일, 에드워드 4세는 칼레에 11,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상륙했다. 그러나 정작 용담공 샤를과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로부터 거의 지원을 받지 못했고, 다른 영주들에게서도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에 에드워드 4세는 전쟁을 이어가봐야 소용없겠다고 판단하고 루이 11세와 회담을 가진 끝에 1475년 8월 29일 파퀴니 평화 협약을 체결한 뒤 본국으로 철수했다. 1477년 1월 5일, 부르고뉴 전쟁을 치르던 용담공 샤를이 낭시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 후 루이 11세가 부르고뉴국으로 쳐들어가 영지들을 대거 석권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프랑수아 2세는 루쇼에서 루이 11세와 평화 협정을 체결해 브르타뉴와 프랑스 간의 상호 지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1479년 용담공 샤를의 후계자인 마리 드 부르고뉴를 돕는 막시밀리안 대공과 전쟁을 치르는 루이 11세에게 원군을 보내주지 않았다.

1480년 1월, 루이 11세는 팡티에브르 가문 대표로부터 브르타뉴 공작위에 대한 권리를 구입했다. 이 소식을 접한 프랑수아 2세는 프랑스의 예상되는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장녀 을 막시밀리안 대공이 속한 합스부르크 가문과 맺기 위해 협상을 시작했다. 1484년, 리치먼드 백작이자 잉글랜드 왕위 주장자 헨리 튜더가 브르타뉴로 망명했다.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3세는 프랑수아 2세에게 헨리 튜더를 넘겨달라고 요구했지만 거절당하자, 함대에 브르타뉴 해안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피해를 입은 프랑수아 2세는 헨리 튜더를 설득해 프랑스 본토로 이동하게 했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1483년 루이 11세가 사망한 뒤 13세 아들 샤를 8세가 왕위에 올랐다. 루이 11세의 딸이자 샤를 8세의 누나인 안 드 발루아와 그녀의 남편인 부르봉 공작 피에르 2세가 샤를 8세의 섭정이 되었다. 이에 오를레앙 공작 루이 2세가 자신이 섭정이 되어야 한다며 반발했다. 1485년, 루이 2세가 반기를 들었고, 프랑수아 2세는 그를 도왔다. 그러나 루이 2세는 왕실군에게 패배했고, 1487년 1월 브르타뉴 공국에 망명했다. 이후 프랑수아 2세는 반란에 호응한 다른 귀족들과 연합해 파리로 진군했지만, 1488년 7월 28일 생토뱅뒤코미에 전투에서 왕실군에게 패배했다. 루이 2세는 체포된 뒤 수년간 감옥에 갇혔다가 1491년에 풀려났고, 프랑수아 2세는 1488년 8월 19일 베르주에서 샤를 8세와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그는 브르타뉴의 주권을 보장받는 대가로 배상금을 지불하고 여러 국경 요새를 양도해야 했으며, 상속녀인 안의 결혼은 프랑스 국왕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했다.

3.8. 프랑스 왕국에 편입되다

1488년 9월 9일, 프랑수아 2세가 쿠에롱에서 낙마 사고로 인해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후 11살의 장녀 이 브르타뉴 여공작이 되었다. 안은 본래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했지만, 프랑스 국왕이 베르주 조약에 근거해 자신이 이 결혼을 승인하지 않았으므로 불법으로 선언했다. 그 후 안은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의 압력을 받고 1491년에 그와 결혼했지만, 브르타뉴 여공작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프랑스 관료들이 브르타뉴를 통제했다. 1498년 샤를 8세가 급사하자, 안은 브르타뉴로 돌아간 뒤 여공작으로서 브르타뉴 공국을 독립 통치로 되돌렸다.

샤를 8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루이 12세는 첫번째 왕비인 과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한 뒤 1504년 안과 결혼했다. 안은 이번에는 브르타뉴 여공작 칭호를 사용할 수 있었고, 그녀의 대리인이 브르타뉴를 다스리는 것도 인정되었다. 또한 안은 프랑스 국왕과의 사이에서 낳은 장남은 프랑스 왕위 후계자가 되고, 차남 이하 아들들과 딸은 브르타뉴 공작위를 상속해, 프랑스 왕위와 브르타뉴 공작위가 분리되는 걸 보장받는 협약을 맺었다. 그 후 장녀 클로드를 후계자로 삼고,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에게 시집보내려 했다. 그러나 루이 12세는 브르타뉴 공국이 합스부르크 왕조에 넘어가는 걸 용납할 수 없다고 여기고, 차기 프랑스 왕위 계승자인 앙굴렘의 프랑수아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안은 브르타뉴 공국이 프랑스에 편입되는 걸 어떻게든 막고 싶었기에 클로드와 프랑수아의 결혼을 반대했다. 루이 12세가 자기 의견을 들어주려 하지 않자, 여행을 명분으로 각국을 돌아다니며 브르타뉴 공국의 독립을 보장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다가 1514년 1월 9일 사망하면서, 유언장에 브르타뉴 공국을 차르 르네에게 물려주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루이 12세는 이를 무시하고 장녀 클로드를 브르타뉴 여공작에 선임하고, 기어이 프랑수아 1세와 결혼시켰다. 그 후 프랑스 왕위에 오른 프랑수아 1세는 클로드의 남편 자격으로 브르타뉴 공작을 겸임했다. 1524년 클로드가 사망한 뒤, 프랑수아 1세와 클로드의 장남이자 도팽 프랑수아가 브르타뉴 공작에 선임되게 되었다.

브르타뉴 귀족들은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전임 브르타뉴 여공작 안 드 브르타뉴와 프랑스 전임 국왕 루이 12세의 결혼 계약에 따르면, 프랑스 국왕이 될 장남이 아니라 차남 이하의 왕자가 브르타뉴 공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수아 1세는 "짐은 왕자에게 적합한 작위를 내릴 권리가 있다"고 답했고, 브르타뉴 귀족들은 프랑스 왕의 압력에 직면한 끝에 자기들이 자치와 특권을 누리는 걸 보장받는 조건으로 프랑수아가 브르타뉴 공작이 되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1532년 8월 13일 낭트에서 프랑스와 브르타뉴의 연합 칙령이 반포되었고, 다음날 프랑수아는 화려한 축제가 진행되는 가운데 에서 브르타뉴 공작으로 즉위했다. 그는 프랑스 국왕의 기사를 상징하는 생 미셸 기사단의 깃을 벗은 뒤 담비 기사단[5]의 깃으로 장식했으며, 렌 주교 이브 마히유크는 그에게 공작의 검을 주고 축복한 뒤 황금 왕관을 그의 머리에 씌웠다. 이렇게 장비를 갖춘 프랑수아는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3세'로서 왕좌에 앉았고, 주교가 말한 맹세문의 각 문장에 아멘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이후에는 프랑스 궁정으로 돌아갔고, 브르타뉴 통치는 아버지가 파견한 관리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1536년, 프랑수아 3세가 리옹에서 병사했고, 동생 앙리 왕자가 브르타뉴 공작이 되었다. 이후 앙리 왕자가 앙리 2세로서 프랑스 국왕에 등극하면서 브르타뉴 공국은 프랑스에 완전히 편입되었고, 브르타뉴 공작은 프랑스 국왕이 누리는 작위명 중 일부가 되었다.

4. 역대 군주

파일:브르타뉴 상징 문장.svg
브르타뉴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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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낭트 연대기에 따르면, 렌에 있는 조프루아 1세의 궁정으로 여행하던 중 체포되어 반역죄로 피살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진위는 불분명하다. [2] 기욤 2세의 잉글랜드 원정을 다룬 '바이외 테피스트리'에서는 코난 2세가 디낭에서 기욤 2세에게 도시의 열쇠를 바치며 항복했다고 묘사되었지만,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브르타뉴 원정 실패를 감추려고 꾸며낸 것으로 간주한다. [3] 콘월 대학, 플레시 대학, 트에귀에 대학 [4] 훗날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1세 [5] 1381년 브르타뉴 공작 장 4세가 창설한 기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