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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

파일: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jpg
성명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
Olivier V de Clisson
별명 오레의 외눈박이(Eborgné d'Auray), 도살자(Le Boucher)
생몰년도 1336년 4월 23일 ~ 1407년 4월 23일
출생지 브르타뉴 공국 클리송
사망지 브르타뉴 공국 조슬랭 성
아버지 올리비에 4세 드 클리송
어머니 잔 드 벨빌
형제 이자보, 모리스, 기욤, 잔
아내 카트린 드 르발, 마르그리트 드 로앙
자녀 베아트리스, 마르그리트
직위 포호에 자작, 퐁샤토 남작, 프랑스 무관장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잉글랜드의 장성2.3. 프랑스 장성2.4. 장 4세와의 갈등2.5. 말년
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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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르타뉴 공국 출신의 프랑스 무관장. 백년전쟁 시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으며, 샤를 5세의 재정복에 크게 공헌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2. 생애

2.1. 초년기

1336년 4월 23일 브르타뉴 공국 클리송에서 마르쉐 영주 올리비에 4세 드 클리송과 몽터규와 팔루아우의 영주인 모리스 4세 드 벨빌의 딸 잔 드 벨빌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이자보[1], 모리스[2], 기욤, 잔[3]이 있었다. 아버지 올리비에 4세는 1341년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을 때 샤를 드 블루아와 그를 지원하는 프랑스 왕국을 지지했고, 1342년 반 공방전 당시 반 시를 지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도중에 잉글랜드군에 붙잡혀 잉글랜드로 이송되었다.

1342년 말, 올리비에 4세는 반 수비대가 사로잡았던 스태퍼드 백작 랄프 드 스태퍼드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매우 낮은 몸값을 치르고 풀려났다. 이로 인해 그가 반 수비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잉글랜드군과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이 프랑스 왕실에서 피어올랐고, 샤를 드 블루아는 그가 반역을 꾀하고 있는 게 분명하니 당장 잡아들이라고 요청했다.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 역시 올리비에 4세를 믿을 수 없는 인간이라 여기고 숙청을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

파일:Exécution_d'Olivier_IV_de_Clisson_(1343).jpg
올리비에 4세 드 클리송의 처형.

얼마 후, 올리비에 4세와 15명의 브르타뉴 영주들은 프랑스 땅에서 열리는 토너먼트에 초대받고 그곳으로 향했다가 도중에 체포된 뒤 파리로 이송되었다. 올리비에 4세의 아내 잔 드 벨빌은 남편을 석방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했고, 올리비에 4세는 1343년 8월 2일 레 알르(Les Halles)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그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확실한 물증이 없었던 데다 수급을 낭트의 소베투 성문에 내걸고 나머지 시신을 파리 성문에 내거는 조치가 내려졌기에 브르타뉴 귀족들에게 깊은 충격을 안겼다.

이후 올리비에 4세의 미망인 잔 드 벨빌은 왕의 하사관에게 뇌물을 주려 한 혐의로 기소되어 추방과 재산 몰수를 선고받았다. 이에 분노한 잔은 어린 두 아들 올리비에와 기욤을 데리고 낭트 성문에 전시된 올리비에 4세의 머리를 보여주며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때까지 투쟁하겠다고 맹세하게 했다. 그 후 그녀는 남편과 자신의 영지를 모조리 매각해 마련한 자금을 토대로 400명 가량의 병사를 모집한 뒤 여러 성을 습격해 수비대를 학살한 뒤, 상선 2척을 전선으로 개조한 후 두 아들을 데리고 대서양에서 활보하며 프랑스의 여러 상선을 습격해 물자를 약탈하고 선원들을 살해하는 등 해적 행위를 벌였다.

잔 드 벨빌의 해적 활동이 9개월간 이어지자, 프랑스 함대가 보다못해 진압에 나섰다. 그 결과 프랑스 함대가 잔의 배를 공략했지만, 그녀는 두 아들과 함께 쪽배를 타고 탈출했다. 이후 닷새간 물과 음식을 먹지 못한 채 표류했고, 잔의 두 아들 중 한 명인 기욤은 열사병에 시달리다 사망했다. 그러다가 표류 6일째 되던 날 장 드 몽포르의 지지자들에게 구조된 뒤 모를레에 이송되었다. 이후 잔 드 벨빌은 잉글랜드 기사 월터 벤틀리와 재혼했고, 올리비에는 잉글랜드로 이동한 뒤 미래에 브르타뉴 공작 장 4세가 될 장 드 몽포르와 함께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궁정에서 지냈다.

2.2. 잉글랜드의 장성

잉글랜드에서 10여년을 보낸 올리비에는 1359년 23세의 나이에 프랑스 원정을 떠난 에드워드 3세와 동행해 분견대를 이끌고 푸아투에서 약탈 행진을 벌였다. 1359년 12월 계부 월더 벤틀리와 어머니 잔 드 벨빌이 잇따라 사망하자, 에드워드 3세는 올리비에가 월터 벤틀리의 브르타뉴 영지를 물려받게 해줬다. 이후 1360년 브레티니 조약이 성립되면서 잉글랜드와 프랑스간의 전쟁이 종식되었을 때, 그는 프랑스 국왕 장 2세에 의해 복권되었고, 아버지의 옛 영지에 대한 권리를 되찾았다. 1361년 라발 가문의 부유한 상속녀이자 브르타뉴의 공작 아르튀르 2세 드 브르타뉴의 손녀인 카트린 드 라발과 결혼했다. 그는 이 결혼으로 인해 잔 드 팡티에브르의 사촌이 되었고, 프랑스 국왕의 친척이 되었다.

1363년 장 4세 드 브르타뉴가 낭트 공략을 시도하고 베세렐 요새를 포위하는 일련의 원정을 벌일 때 동행했다. 1364년 9월 장 4세, 존 챈더스와 함께 오레를 포위하던 중 샤를 드 블루아와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브르타뉴 연합군의 반격을 받았다. 두 군대는 9월 29일 오레 인근에서 맞붙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밤, 장 4세는 적병이 아군보다 수적으로 우세하기 때문에 전면 대결을 벌이지 말고 적진을 기습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올리비에는 적군이 오레로 이어지는 경사면을 올라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존 챈더스는 그의 주장을 지지했다. 이리하여 올리비에의 의견이 채택되었고, 뒤이은 오레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샤를 드 블루아는 전사했고, 베르트랑 뒤 게클랭은 사로잡힌 뒤 1365년에 프랑스 국왕 샤를 5세가 큰 몸값을 지불한 뒤 풀려났다. 장장 24년간 이어졌던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은 이 전투로 끝났다. 당대 연대기 작가 장 프루아사르에 따르면, 올리비에는 대단한 용맹을 선보였으며, 전투 중에 부상을 입고 한쪽 눈을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오레의 외눈박이(Eborgné d'Auray)'로 불렸다고 한다.

1365년 1차 게랑드 조약이 체결되면서, 장 4세는 브르타뉴 공작으로 공인되었다. 이후 올리비에 5세는 오레 전투에서 입은 부상에서 회복하기 위해 블랑에서 요양했다. 그러던 중 장 4세가 존 챈더스에게 가브르 성과 그 주변 숲을 넘기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올리비에는 장 4세에게 찾아가서 자신이 그를 위해 한쪽 눈을 잃을 정도로 최선을 다해 싸웠음을 상기하면서, 그 보상을 자기에게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장 4세가 묵살하자, 올리비에는 격분했다.
"내 이웃인 잉글랜드인이 그 땅을 차지하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악마에게 내 자신을 바치겠다!"
2주 후, 올리비에는 가브르 성에 불을 지르고 성벽을 허문 뒤 돌을 블랑 성으로 운반했다. 그의 행위를 전해들은 장 4세는 블랑 성의 영주권을 그로부터 박탈했다. 이때부터 올리비에와 장 4세와의 반목이 시작되었다.

장 4세는 게랑드 조약을 체결한 후 브르타뉴의 새로운 지위에 대한 프랑스 왕실의 보증을 얻기 위해 올리비에를 파리에 파견했다. 이때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는 올리비에를 정중하게 대해줬고, 그는 이에 감화되어 점차 프랑스 쪽으로 기울었다. 1367년 잉글랜드 장성 로버트 놀스와 함께 흑태자 에드워드의 카스티야 원정에 참여했고, 나헤라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이 완승을 거두고 베르트랑 뒤 게클랭을 사로잡는 데 공헌했다. 하지만 1369년에는 샤를 5세에게 프랑스 함대의 약점을 고려해 잉글랜드에 상륙을 시도하지 말라고 조언했으며, 8월에 아모리 드 크라옹과 함께 잉글랜드군이 지키고 있던 생 소뵈르 르 비콩트를 공격했다. 하지만 도중에 장 4세를 대신해 나바라 왕국의 국왕 카를로스 2세와 협상하러 갔기 때문에 공방전을 계속 이끌지 못했다.

2.3. 프랑스 장성

1370년, 올리비에는 샤를 5세로부터 자신이 가진 영지를 그대로 소유할 권리를 인정받은 뒤 정식으로 프랑스 장성이 되었다. 그해 10월 23일에는 베르트랑 뒤 게클랭과 퐁토르송에서 동맹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두 사람은 서로 힘을 합쳐 영지를 상호 방위하며, 프랑스 국왕의 가신으로서 그를 위해 헌신하기로 했다. 그해 12월 4일, 올리비에는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벌인 퐁발랭 전투에 참전해 프랑스 북부에서 약탈 행진을 일삼던 잉글랜드군 6,000명을 궤멸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 샤를 5세의 지령에 따라 베르트랑 뒤 게클랭과 함께 프랑스 남서부 기옌 지역에 있는 잉글랜드군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오베르뉴와 루에르그에서 공세를 벌이는 동안, 올리비에는 푸아투, 생통주, 앙주 일대에서 잉글랜드군을 몰아붙였다.

1371년 여름 잉글랜드군이 프랑스 북부에 침입해 몽콩투르 요새를 10간의 공방전을 치른 끝에 함락하자, 샤를 5세는 그를 소환해 이들을 물리치게 했다. 1372년 몽콩투르 요새를 탈환했다. 뒤이어 루덩, 생장당젤리, 생트를 포함한 여러 도시를 탈환했다. 이후 베르트랑 뒤 게클랭과 함께 아키텐의 주요 항구 도시인 라 로셸을 포위한 끝에 1372년 9월 7일에 항복을 받아냈다. 이후 생통주의 베논을 공략하던 중 자신의 종자가 잉글랜드 수비대에게 잡힌 뒤 고문을 받고 살해당하자, 그는 베논을 공략한 뒤 적병 15명의 신체를 모조리 절단하는 것으로 보복했다. 그는 이 행위로 인해 '도살자(Le Boucher)'라는 별칭을 얻었다.

한편, 올리비에는 브르타뉴 공작 장 4세를 노골적으로 적대시했고, 샤를 5세가 브르타뉴 공작에게 의심을 가지도록 부추겼다. 1372년 10월,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렌을 포위했다. 렌에 있었던 브르타뉴 공작부인은 도망치지 못하고 포로로 잡혔다. 부르봉 공작의 병사들은 공작부인의 짐을 수색해 브르타뉴 공작이 에드워드 3세와 체결한 비밀 조약의 사본을 발견했다. 이에 장 4세는 샤를 5세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이 잉글랜드군을 끌어들인 것은 인정하지만 올리비에 등 반항적인 귀족들에 맞서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협상 끝에 브르타뉴 공작은 공국에서 잉글랜드인들을 추방하고 프랑스군은 렌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합의를 맺었다.

그러던 1373년 3월,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가 생말로 항구에 상륙해 카스티야 선박 7척을 격파하고 2,000명의 맨앳암즈와 2,000명의 궁수병을 육지에 내려보내 브레스트를 구원했다. 샤를 5세는 장 4세가 잉글랜드군의 작전에 동의했기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확신하고, 게클랭에게 브르타뉴를 공략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올리비에는 게클랭의 브르타뉴 원정에 동행해, 2달 만에 브르타뉴 대부분을 공략하는 데 기여했다. 장 4세는 프랑스군의 공세에 도저히 버티지 못하고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그 후 샤를 5세는 브르타뉴를 갈로(Gallo, 브르타뉴 동부)와 브레톤(Breton, 브르타뉴 서부)으로 분할하고, 올리비에를 갈로의 총독, 로앙 자작 장 1세 드 로앙을 브레톤의 총독으로 선임했다.

1373년 말, 장 4세는 잉글랜드의 지원에 힘입어 생폴드레옹을 탈환하고 생브리외를 포위했다. 올리비에는 이에 맞서 콩카르노를 공략하고 그곳을 방어하던 모든 잉글랜드군을 처형했다. 장 4세는 생브리외 공략에 실패한 뒤 캉페를레를 포위했지만, 올리비에의 반격을 받자 물러났다. 이후 올리비에는 브레스트를 1373년부터 1377년까지 포위했고, 잉글랜드군이 바다를 통해 브레스트로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게누 요새를 건설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제독 존 로체스의 분전으로 인해 좀처럼 공략하지 못하다가 때마침 카스티야 왕이 되기 위해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대서양을 항해하던 곤트의 존이 도중에 브레스트를 구하러 오자 철수했다.

이후 장 4세를 여전히 추종했던 여러 도시와 성채를 하나둘씩 공략했다. 1377년 올리비에가 오레를 공략한 후, 장 4세를 따르는 지역은 브레스트와 피니스테르 반도에 국한되었다. 한편, 올리비에는 자신의 거주지로 삼은 조슬랭 성을 이 시기에 인상적인 요새로 개조했다. 그는 13세기에 건설된 요새를 기초로 삼고 9개의 탑과 직경 26m, 높이 32m의 성채를 갖춘 4,500 제곱미터 규모의 요새를 건설했다. 1378년 장 1세 드 로앙의 누이인 마르그리트 드 로앙과 두번째로 결혼해 상당한 영지를 확보했다.

1378년경, 잉글랜드군은 칼레, 보르도, 바욘 등 몇몇 항구만을 확고하게 통제했다. 반면, 그들은 브르타뉴 서부 해안의 브레스트 등 여러 요새를 장악했고, 생 말로 항구에 대한 반복적인 공격을 가했다. 이에 샤를 5세는 잉글랜드군이 브르타뉴에서 새로운 항구를 확보하기 전에 브르타뉴를 확실히 장악하기로 마음먹고, 1378년 12월 18일 잉글랜드에 망명하고 있던 브르타뉴 공작 장 4세의 모든 영지를 몰수하고 브르타뉴를 왕실의 직할지로 삼겠으며, 앙주 공작 루이 1세를 브르타뉴의 총독으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역효과를 초래했다. 지난날 장 4세와 오랜 세월 내전을 치러가며 대립했던 잔 드 팡티에브르는 프랑스 왕실이 브르타뉴 전역을 직할지로 삼아 자치권을 박탈하는 조치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고, 대다수 브르타뉴 영주들 역시 여기에 동감했다. 그들은 1379년 4월 25일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 장 4세를 브르타뉴에 복귀시키기 위해 프랑스 왕국에 대적하기로 결의했다. 임시 정부는 4명의 원수와 4명의 민정 수장으로 구성되었으며, 공국을 방어할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가구당 1프랑의 세금을 거둬서 군자금을 모으기로 했다.

장 4세는 이들의 호응에 힘입어 1379년 8월 3일 셍쎄흐벙에 상륙해 브르타뉴 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이에 맞서 샤를 5세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선언했고, 장 4세가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와 비밀 협정을 맺었으며 잉글랜드인들을 자신의 고문으로 세우는 등 잉글랜드의 앞잡이 노릇을 대놓고 하고 있으니, 그를 브르타뉴 공작으로 인정하지 말고 자신을 브르타뉴 공작으로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브르타뉴 귀족들이 대부분 장 4세 편으로 돌아섰고, 급기야 그의 처남이며 브레톤 총독을 맡고 있던 장 1세 드 로앙마저 장 4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총리가 되었다. 이에 샤를 5세는 브르타뉴 민심이 지극히 적대적인 상황에서 무력을 앞세워 그곳을 평정한들 장기적인 지배를 할 수 없다는 걸 인식하고, 장 4세와 협상하기로 했다.

1380년 11월 28일, 프랑스의 새 국왕 샤를 6세는 몇 달 전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사망한 뒤 공석이 되었던 프랑스 무관장에 올리비에를 선임했다. 1381년 5월 2일, 장 4세와 샤를 6세는 제2차 게랑드 조약을 체결했다. 제1차 게랑드 조약의 내용이 재확인되었으며, 장 4세는 브르타뉴 공작으로 공인되었다. 이후 장 4세는 프랑스 무관장에 오른 올리비에를 적대하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그와 협상한 끝에 5월 30일 정식으로 화해했다. 올리비에는 장 4세의 봉신이 되기로 했고, 장 4세는그가 영지 내에서 자치권을 행사하는 걸 공인했다.

1382년, 샤를 6세는 플란데런인들의 반란에 시달리고 있는 플란데런 백작 루이 2세를 돕기 위해 군대를 보내기로 했다. 올리비에는 무관장으로서 원정을 이끌고 출진했다. 11월 12일, 프랑스군은 코미네스 마을 인근의 리스 강에서 플란데런 반란군 900명에게 저지되었다. 이들은 리스 강의 유일한 다리를 끊어서 적군이 강을 건너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올리비에는 야밤에 400명의 프랑스 기사를 이끌고 강 건너편으로 건넌 뒤 다음날 아침 플랑드르 반란군과 교전했다. 그 사이에 다리를 재건한 프랑스군 대부분이 건너갔고, 플란데런군은 패주했다. 이후 플란데런의 여러 도시와 마을은 프랑스군에 평화 협상을 요청하고 프랑스 왕실에 몸값을 지불했다.

프랑스군이 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접한 반란군 지도자 필립 반 아르테벨데는 파스상델레 인근의 루즈베케 언덕에 진영을 세우기로 했다. 프랑스군은 언덕 반대편에 진을 쳤다. 11월 27일 아침, 필립 반 아르테벨데는 짙은 안개가 낀 것을 이용해 프랑스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그는 프랑스 기병대의 돌파를 막기 위해 부하들에게 밀집된 정사각형 대형으로 전진하라고 명령했다. 올리비에는 안개 속에서 진군해오는 적을 확인하고 보병대에게 적과 맞서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중기병에게 적의 측면과 후방을 요격하라고 덧붙였다.

이리하여 플란데런군은 프랑스 보병대와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던 중 적 중기병들의 측면과 후방 공격에 직면했다. 많은 플란데런인들이 적의 공격을 피해 도주하다가 자기들끼리 짓밟혔다. 많은 플란데런인들은 원형 방진을 치고 항전했지만, 사방에서 원거리 무기를 발사하고 기병들이 계속 전열을 흐트리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패주했고, 필립은 전사했다. 루즈베케 전투 소식이 프랑스 북부에 전해지자, 플란데런 봉기에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농민들은 저절로 수그러들었다. 이후 올리비에는 파리에서 무거운 세금에 반발하여 봉기를 일으킨 부르주아를 토벌하러 파리로 돌아왔다. 부르주아들은 감히 맞설 엄두를 못내고 항복했고, 막대한 벌금을 지불하고 샤를 6세의 용서를 받았다.

1384년, 올리비에는 플란데런 반란을 지원하는 잉글랜드를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군대를 수송하기 위해 1,300척에 달하는 수송선을 집결했고, 97척의 전함을 건조했다. 그러나 군대 집결이 지연된 데다 악천후로 인해 함대를 출격하는 데 애를 먹었다. 여기에 잉글랜드 해군이 1387년 3월 마게이트 해전에서 프랑스-카스티야-플란데런 연합 해군을 궤멸시키자, 프랑스 왕실은 잉글랜드를 침공하려는 계획을 완전히 접었다.

2.4. 장 4세와의 갈등

1387년 무렵, 올리비에는 팡티에브르 백작이며 고인이 된 아버지 샤를 드 블루아가 생전에 미지급한 몸값을 지불하기 위한 담보로 잉글랜드에 수감되어 있던 장 1세 드 샤티옹을 대신해 팡티에브르 백국을 관리하고 있었고, 자기 딸 마르그리트를 장 1세 드 샤티옹의 아내로 삼았다. 게랑드 조약에 따르면, 브르타뉴 공작 장 4세가 아들을 낳지 못하면 팡티에브르 백작이 브르타뉴 공작이 될 수 있었다. 장 4세는 이 때문에 올리비에가 자신을 배제하고 장 1세 드 샤티옹을 브르타뉴 공작으로 세우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의심했다.

그러던 1387년 6월 26일, 올리비에는 반에서 열린 연회에서 장 4세에 의해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이후 장 4세는 그를 가방에 가둔 뒤 바다에 던지라고 명령했지만, 이내 명령을 철회했다. 그 후 올리비에 5세는 몸값으로 많은 금액을 지불하고 블랑, 조슬랭, 주곤 및 르 길도 요새를 장 4세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1388년,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는 장 4세가 압수한 영토를 올리비에 5세에게 돌려주지만 몸값을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으로 중재했다. 이후 올리비에와 장 4세간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1388년, 15살의 나이로 성년이 된 샤를 6세는 이제부터 직접 통치하겠다고 선포했다. 이후 올리비에는 샤를 6세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프랑스군을 통솔했다. 그러던 1392년 6월 13일, 생폴 호텔에서 개인 저택으로 이동하던 중 라 페르테 베르나르, 프레시네, 사비에 영주인 피에르 드 크라옹이 이끄는 무리의 습격을 받고 중상을 입었다. 피에르 드 크라옹은 사비에 요새로 피신했다가 토벌대가 접근해오자 브르타뉴 공국으로 피신했다. 그는 자신이 올리비에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으며, 혼자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지만, 올리비에 5세는 분명 장 4세가 사주했을 거라고 여겼다. 프랑스 왕실은 장 4세에게 피에르 드 크라옹을 넘기라고 요구했지만, 장 4세는 거부했다.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장 4세는 피에르 드 크라옹을 대면한 뒤 이렇게 말했다.
"당신보다 위에 있는 사람을 죽일 수 없다면, 당신은 약자요. 당신은 두 가지 실수를 저질렀소. 첫 번째는 그를 공격한 것이고, 두 번째는 그를 놓친 것이오."

크라옹이 답했다.
"이건 정말 사악한 일입니다. 나는 그가 속한 지옥의 모든 마귀가 그를 지키고 나와 내 백성의 손에서 그를 구원했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60번 이상의 칼질이 가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말에서 떨어졌을 때, 나는 그가 죽은 줄 알았습니다."

그 후 샤를 6세는 올리비에 5세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암살 미수범을 숨기는 장 4세를 응징하겠다고 선포하고 브르타뉴 원정을 단행했다. 그러나 1392년 6월, 샤를 6세가 르망 숲을 지나가던 중 갑작스러운 발작 증세를 보이면서 원정이 중단되었다. 이후 장 드 베리 등 샤를 6세의 삼촌들이 섭정을 맡았다. 그들은 샤를 6세의 측근들을 모조리 축출했는데, 그 중에는 올리비에도 있었다. 1392년 12월 10일, 올리비에는 샤를 6세를 현혹해 브르타뉴 공작과 전쟁을 벌이도록 몰아간 혐의로 규탄받고 모든 직위를 박탈당하고 왕국에서 추방되었다. 올리비에는 무관장의 검을 반환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몽레리 성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브르타뉴의 조슬랭 성으로 도주했다.

장 4세는 이 기회를 틈타 올리비에를 끝장내기로 하고 조슬랭을 포위했다. 하지만 1394년 정신을 어느정도 회복한 샤를 6세는 올리비에가 무관장으로서의 특권을 유지하도록 허락했고, 올리비에는 이를 기회로 삼아 생브리외에서 군대를 소집한 뒤 장 4세에 맞섰다. 여기에 샤를 6세의 형제이자 오를레앙 공작인 루이 1세 도를레앙과 동맹을 맺고 브르타뉴 공작에 맞서 싸울 병력과 물자를 지원받았다. 결국 장 4세는 그를 꺾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1396년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를 통해 올리비에와 화해를 모색했다. 장 4세는 그의 신변을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했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자기 아들 을 그에게 보내 반에서 인질 생활을 하도록 했다.

2.5. 말년

그 후 올리비에와 장 4세는 정식으로 화해했고, 1399년 장 4세가 사망할 때까지 평화롭게 지냈다. 장 4세가 사망한 뒤 아들 장 5세 드 브르타뉴가 10살의 나이로 브르타뉴 공작이 되었다. 장 4세의 아내이자 장 5세의 어머니인 나바라의 호아나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와 재혼했다. 이에 루이 1세 도를레앙은 샤를 6세에게 브르타뉴 공국의 섭정으로 올리비에를 선임해, 브르타뉴가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는 것을 방지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공국의 섭정이 된 사람은 올리비에가 아니라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였다.

올리비에는 장 5세가 브르타뉴 공작이 되는 걸 인정했지만, 그의 딸이자 팡티에브르 백작 장 1세 드 샤티옹의 아내인 마르그리트 드 클리송은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올리비에를 브르타뉴 공작에 세울 기회를 노렸다. 전승에 따르면, 올리비에는 그런 딸에게 쓸데없는 욕심을 버리라면서, 공작위를 계속 탐했다간 그녀의 자식들을 파멸로 이끌 거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딸이 말을 듣지 않자, 올리비에가 분노해 그녀를 창으로 위협했고, 마르그리트는 아버지를 피해 도망치던 중 다리가 부러졌고 이후로 "절름발이 마르그리트"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현대 학계에서는 이 이야기는 1420년 마르그리트가 아들을 브르타뉴 공작에 세우기 위해 장 5세를 납치했지만 실패로 돌아간 후 장 5세 및 측근들이 지어낸 것으로 간주한다.

1401년,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가 파리를 위협하자, 그는 루이 1세 도를레앙에게 군대를 보내줘서 이에 맞서게 했다. 1402년 렌에서 장 5세의 대관식을 주관했다. 그러나 얼마 후 장 5세와 영지 소유권 문제를 놓고 다퉜다. 올리비에가 파리 법원에 소송을 걸자, 장 5세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올리비에의 땅을 몰수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에 무력 행사를 자제하기로 하고 올리비에와 재차 화해했다. 1407년 4월 23일, 올리비에는 자신이 여전히 쥐고 있는 무관장의 검을 프랑스 왕실에 반환하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조슬랭에서 사망했다. 사후 조슬랭 성의 예배당에 묻혔다.

3. 가족

  • 카트린 드 라발(? ~ ?): 라발 영주 기 10세 드 라발의 딸, 브르타뉴 공작 아르튀르 2세 드 브르타뉴의 손녀.
    • 베아트리스 드 클리송(1366년 이전 ~ 1448): 로앙 자작 알랭 8세 드 로앙의 부인.
    • 마르그리트 드 클리송(1366 ~ 1441): 팡티에브르 백작 장 1세 드 샤티옹의 부인. 1420년 아들 올리비에를 브르타뉴 공작으로 세우기 위해 장 5세 드 브르타뉴를 납치했지만, 끝내 실패로 돌아가고 모든 영지를 몰수당했다.
  • 마르그리트 드 로앙(1330 ~ 1406): 로앙 자작 알랭 7세 드 로앙의 딸, 장 드 보마누아르의 미망인.


[1] 1325 ~ 1343, 리외의 영주 장 1세의 부인, 장 2세 드 리외의 부인 [2] 1333 ~ 1334, 요절 [3] 1340 ~ ?, 잉글랜드 기사이자 생통주와 아키텐 세네샬 존 하페든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