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01:18:13

월터 벤틀리

이름 월터 벤틀리
Walter Bentley
출생 1310년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베벌리
사망 1359년 12월
브르타뉴 엔봉
아버지 존 벤틀리
부인 잔 드 벨빌
직위 기사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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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 기사. 백년전쟁 시기에 프랑스군을 상대로 맞서 싸웠다.

2. 생애

1310년경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베벌리에서 기사 존 벤틀리의 아들로 출생했다. 일찍이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서 활약했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1339년 프랑스 원정을 단행한 에드워드 3세의 기사로 참여했고, 1342년 노샘프턴 백작 윌리엄 드 보훈의 뒤를 이어 브르타뉴에서 활동했다. 그는 곧 자신의 용병단을 결성해 트리스탄 섬과 브르타뉴 서부의 여러 성을 공략했으며, 보부아르 쉬르 메르, 앙팡, 바레, 블라이, 샤토뇌프, 빌메인, 일쇼베, 누아르무티에, 부앙 등 브르타뉴의 여러 곳에 영지를 두고, 급료를 제때 지급하지 못하는 에드워드 3세를 대신해 부하들에게 급료를 제공했다.

1349년, 벤틀리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에게 처형된 올리비에 4세 드 클리송의 미망인인 잔 드 벨빌과 결혼한 뒤, 잉글랜드에 협조하던 브르타뉴 영주 라울 드 카우르가 프랑스로부터 탈취한 잔 드 벨빌의 성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 이에 분노한 라울이 벤틀리와 전쟁을 벌이려 하자, 에드워드 3세가 중재에 나섰다. 그해 10월, 에드워드 3세는 벤틀리가 이 성을 갖고 라울에게 보상금을 지불하게 했다. 그러나 라울은 이 판결에 불만을 품고 프랑스 편으로 돌아섰다.

1350년 브르타뉴 보안관을 맡고 있던 토머스 다그워스가 오레에서 브르타뉴인들의 매복 공격을 받고 전사하자, 그의 뒤를 이어 브르타뉴 보안관이 되었다. 1351년 6월 프랑스군이 플로에르멜 마을을 포위하자, 메인과 루아르 계곡을 따라 습격 작전을 벌이면서 프랑스군의 휘방을 위협해, 그들이 저절로 포위를 풀고 물러나게 했다.

1352년, 벤틀리는 더 많은 용병대를 끌어모으기 위해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그 사이에, 프랑스 국왕 장 2세로부터 브르타뉴 공략을 지시받은 기 2세 드 네슬은 브르타뉴의 도시 렌에 병력을 소집한 뒤 플로에르멜, 푸쥬헤 성을 포위 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일부 병력을 남겨서 포위를 이어가게 한 뒤 렌으로 가서 병력을 더 끌어모으려 했다. 프랑스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접한 벤틀리는 1,500명의 중장병 및 장궁병을 이끌고 브르타뉴로 돌아간 뒤 플로에르멜과 푸쥬헤 성을 포위한 적군을 가볍게 격파하고 플로에르멜에 있던 브르타뉴의 대리 수비대장 로버트 놀스와 합세했다.

기 2세는 벤틀리가 포위망을 뚫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쳐부수기 위해 9,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출진했다. 벤틀리는 이에 대응해 1352년 8월 14일 렌에서 약 30마일 떨어진 모롱 마을 동쪽 언덕 꼭대기 가장자리에 전투 대형을 결성하고, 각 측면에 기병과 궁수병을 배치했으며, 중앙에 중장병을 배치했다. 그 뒤에는 숲과 나무 울타리가 있었다. 우익 부대 앞에는 브렘빌리 성이 계곡 위에 세워져 있었다. 이윽고 전장에 도착한 기 2세는 적의 병력이 2,000명 밖에 안 된 걸 보고, 벤틀리에게 사절을 보내 이 점을 지적하면서 프랑스를 떠나기로 약속한다면 전장에서 철수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제안했다. 벤틀리가 제안을 거부하자, 기 2세는 적을 전투 대형을 결성했다. 장 드 엥거스트가 이끄는 프랑스-브르타뉴 기병대는 좌익에 배치되었고, 나머지 부대는 말에서 내려서 도보로 적진을 공격할 준비를 갖췄다.

이윽고 전투 개시 나팔이 불어오자, 장이 이끄는 프랑스 좌익 기병대가 잉글랜드 우익 궁수대를 향해 돌진했다. 잉글랜드 궁수들은 자신들을 달려오는 적을 향해 일제 사격을 가했지만, 적군이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달려들자 겁을 집어먹고 숲속으로 달아났다. 그 사이, 말에서 내린 프랑스-브르타뉴 주력 부대는 언덕을 기어올라 잉글랜드의 중앙 중장병 부대를 공격해 수목 경계선으로 밀어붙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측에 있던 프랑스 병사들이 언덕의 훨씬 더 가파른 부분에 직면해 전진 속도가 느려졌다. 벤틀리의 좌익 궁수대는 이 기회를 틈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적을 향해 화살을 계속 퍼부을 수 있었다.

계속되는 화살 세례에 견디지 못한 프랑스 우익 부대가 후퇴하자, 궁잉글랜드 좌익 궁수들은 검과 도끼를 챙기고 중앙에 밀집한 적군의 측면을 요격했다. 이에 전의가 꺾인 프랑스 중장병들은 언덕으로 밀려났다. 이 무렵 잉글랜드 우익 궁수대를 격파하고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던 로구스 드 앵거스트는 위기에 빠진 중앙의 아군 부대를 구하기 위해 방향을 틀었지만, 우익 궁수들이 전열을 가다듬고 로구스가 이끄는 군대의 발목을 잡는 바람에 제때에 이동하지 못했다.

몇 시간이 지난 후 측면이 찔린 상황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프랑스군이 등을 돌리기 시작하자, 벤틀리의 중장병들은 즉시 적군을 추격했다. 이에 프랑스군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패주했지만, 전투에 참석했던 별 기사단 89명 만은 끝까지 항전했다가 전원 사살되었다. 프랑스 사령관 기 드 네슬도 전사했으며, 프랑스 기사 500명이 추가로 죽었다고 전해진다. 잉글랜드군의 사상자는 알려진 바 없지만, 에드워드 3세가 브르타뉴 방면 잉글랜드군의 전력 손실이 심하다는 소식을 듣고 원군을 보내줘야 했던 것을 보면 역시 많은 손실을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

1553년, 에드워드 3세는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에서 프랑스 편에 서서 싸우다가 라 로슈데리앙 전투에서 생포된 뒤 런던으로 끌려갔던 샤를 드 블루아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 협약에 따르면, 샤를 드 블루아는 잉글랜드에 대적하지 않는 대가로 클리송 가문의 영지를 소유할 권리를 인정받았다. 그해 말, 에드워드 3세는 벤틀리에게 아내의 성을 샤를 드 블루아에게 넘기라고 명령했다. 벤틀리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잉글랜드로 가서 에드워드 3세에게 자신이 잔 드 벨빌의 남편인 만큼 그녀의 성을 소유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의 지시에 순종하지 않은 것에 분노해 벤틀리를 런던 탑에 가두었다. 그 사이에 장 2세가 샤를 드 블루아와 에드워드 3세가 맺은 협약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면서 전쟁이 재개되자, 에드워드 3세는 그를 몇 주 만에 석방시켰다.

1357년 1월 라 로슈 무아장 남작 작위를 수여받았으나, 2년 후인 1359년 12월 아내 잔과 함께 엔봉에서 사망했다. 두 사람은 생전에 자식을 낳지 못했고, 그들의 영지는 잔 드 벨빌이 전 남편 올리비에 4세 드 클리송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에게 넘어갔다.

[1] 일설에 따르면, 벤틀리는 전투 초반에 로구스 드 엥거스트의 돌격에 제대로 맞서지 않고 도주한 잉글랜드 장궁병 30명을 집단 처형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