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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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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0BF><colcolor=#000> 프랑스 왕국 발루아 왕조 제2대 국왕
장 2세
Jean II
파일:장 2세.jpg
왕호 장 2세 (Jean II)
별칭 선량왕 (le Bon)
출생 1319년 4월 26일
프랑스 왕국 르망
사망 1364년 4월 8일 (향년 44세)
잉글랜드 왕국 런던 사보이 궁전
재위 프랑스 왕국의 국왕
1350년 8월 22일 ~ 1364년 4월 8일
배우자 보헤미아의 보나 (1332년 결혼 / 1349년 사망)
오베르뉴 여백작 잔 1세 (1350년 결혼 / 1360년 사망)
자녀 샤를 5세, 루이 1세, , 필리프 2세, 잔, 마리, 이자벨
아버지 필리프 6세
어머니 부르고뉴의 잔
형제 필리프
서명 파일:장 2세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노르망디 공작2.3. 기옌 전쟁2.4. 프랑스의 실질적인 권력자2.5. 프랑스 국왕
2.5.1. 대관식과 긴느 백작의 처형2.5.2. 경제 재건 정책2.5.3. 군사 개혁과 가스코뉴 공세2.5.4. 별 기사단 창설2.5.5. 긴느 공방전2.5.6. 모롱 전투2.5.7. 카를로스 2세와의 갈등
2.5.7.1. 샤를 드 라 세르다 암살 사건2.5.7.2. 갈등 재개와 2번째 화해2.5.7.3. 카를로스 2세 체포 사건
2.5.8. 흑태자의 슈보시2.5.9. 푸아티에 전투
2.6. 잉글랜드의 포로
2.6.1. 제1차 런던 조약과 에티엔 마르셀의 난2.6.2. 제2차 런던 조약과 브레티니 조약
2.7. 왕의 귀환
2.7.1. 화폐 및 재정 개혁2.7.2. 자유 용병대 토벌 시도2.7.3. 부르고뉴 계승 전쟁
2.8. 포로로 돌아간 왕
3. 가족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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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국왕. 발루아 왕조의 제2대 왕으로 필리프 6세의 장남이다. 기사도 정신을 중요시하여 선량왕(Ie Bon)이라고도 불렸다.

2. 생애

2.1. 초년기

1319년 4월 26일 프랑스 왕국 르망에서 발루아의 백작 샤를의 장남인 필리프 드 발루아와 부르고뉴 공작 포베르 2세와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딸 프로방스의 마르그리트의 딸인 아그녜스의 여식인 부르고뉴의 잔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해 4월 30일 르망의 생 줄리앙 대성당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1328년 아버지가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로 등극한 뒤 왕위 유력 계승자가 되었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신체 활동과 놀이를 거의 하지 않았지만 사냥은 즐겨 했다고 한다. 또한 예민한 성격에 감정적이어서 폭력을 행사하곤 했다. 하지만 책을 사랑했고 화가와 음악가를 후원했으며, 기사도에 심취했다고 전해진다.

1332년, 필리프 6세를 상대로 프랑스 왕위를 경쟁했던 나바라 여왕 호아나 2세가 나바라 공동 국왕 필리페 3세와의 사이에서 카를로스 왕자를 낳았다. 이 소식을 접한 필리프 6세는 카를로스 왕자가 장성하면 프랑스 왕위에 재차 도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그 전에 당시 13세였던 장남 장 왕자의 결혼을 서두르기로 했다. 그는 한동안 에드워드 3세의 누이인 엘레노어와 장 왕자를 결혼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보헤미아 국왕이며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과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고, 프랑스에 지극히 우호적인 얀 루쳄부르스키를 동맹으로 삼으면 든든할 거라고 판단했다. 얀 루쳄부르스키 역시 롬바르디아를 확고히 장악하려면 프랑스의 지원이 필요했기에 여기에 긍정적인 입장을 표했다.

양자는 퐁텐블로에서 전쟁 발생 시 서로를 도우며, 보헤미아 국왕이 롬바르디아를 정복하면 프랑스는 이에 간섭하지 않고, 보헤미아 국왕은 롬바르디아를 장악한 뒤 아를 일대를 프랑스에 넘기겠다는 내용의 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얀 루쳄부르스키의 딸 보나가 장 왕자의 아내가 되었고, 지참금은 120,000 플로린으로 설정되었고, 루카 시가 프랑스 왕에게 양도되었다. 그러나 얀 루쳄부르스키의 롬바르디아 석권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오랜 정적 관계였던 구엘프 기벨린 파벌은 동맹을 맺고 페라라에 본부를 세운 뒤 얀 루쳄부르스키를 상대로 공세를 퍼부었다. 결국 더 버티지 못한 얀 루쳄부르스키는 1333년에 보헤미아로 돌아가야 했다.

2.2. 노르망디 공작

1332년 4월 26일, 장 왕자는 프랑스 의회에서 성인으로 선언되었고 노르망디 공작 칭호를 받았으며, 노르망디, 앙주, 메인 카운티를 수여받았다. 그해 7월 28일, 노트르담 드 멜룬 대성당에서 6,000명의 청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보헤미아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의 딸 보나와 장 왕자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2달 후, 장 왕자는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나바라 국왕 필리페 3세와 부르고뉴 공작, 로렌 공작, 브라반트 공작이 모인 가운데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다. 1340년, 장 왕자는 필리프 6세가 플란데런 전선에서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과 대적하는 원정을 벌일 때 동행했다. 다만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343년, 생소뵈르 자작 조프루아 다르쿠르가 몰레이 남작 로저 5세 바콘의 딸이자 노르망디에서 가장 부유한 영지로 손꼽히는 몰레이 영지의 상속녀인 잔 바콘과 약혼했다. 그러나 잔은 나중에 약혼을 파기하고 아르쿠르 가문의 전통적인 라이벌이었던 탕카르빌 가문의 일원인 기욤 베르트랑[1]과 결혼했다. 조프루아는 필리프 6세에게 탕카르빌 가문이 잔을 협박해서 약혼이 깨졌다고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탕카르빌 가문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필리프 6세는 양자간의 분쟁을 중재하기 위해 바이외와 코탕탱의 세네샬들에게 양자가 전투를 벌이지 않도록 막으라고 명령헀다.

그러나 조프루아 다르쿠르는 바이외와 코탕탱 세네샬들의 권고를 듣지 않고 군사 활동을 이어갔다. 급기야 1344년 4월, 조프루아가 테송 가문의 장 드 라 로슈, 바콘 가문의 기욤 바콘, 퍼시 가문의 리처드 퍼시와 함께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를 노르망디 공작으로 옹립하여 프랑스로부터 독립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고발이 들어왔다. 이에 필리프 6세는 조프루아의 재산을 몰수한다는 칙령을 내렸고, 장 왕자는 군대를 이끌고 군사 활동을 개시해 생 소뵈르 르 비콩트를 공략했다. 조프루아는 어머니 알릭스의 출신지인 브라반트 공국으로 망명했고, 조프루아의 동료들인 기욤 바콘, 장 드 라 로슈, 리처드 퍼시가 체포되어 파리에서 참수된 뒤 노르망디의 생로 시로 보내져 시내에 전시되었다. 이후 조프루아는 에드워드 3세에게 귀순했고, 그가 노르망디를 침공하도록 조언했다.

2.3. 기옌 전쟁

1345년 8월, 에드워드 3세의 사촌인 더비 백작 그로스몬트의 헨리 가스코뉴에 도착한 뒤 1,200명의 중장병, 1,500명의 장궁병, 2,800명의 가스코뉴 보병대를 이끌고 베르주라크로 진군해 베르주라크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크게 격파했다. 이후 주 동안 주변 지역을 평정한 후 병사들을 휴식시킨 뒤 베르주라크에서 살아남은 프랑스군이 도주한 페리괴로 진격했다. 페리괴의 방어 시설은 낙후되었지만 그곳에 모인 프랑스군 병력이 잉글랜드군과 맞먹었기에 공성전은 불가능했다. 이에 페리괴를 봉쇄하고 도시로 향하는 주요 경로를 지키는 요새들을 하나둘씩 공략했다.

필리프 6세는 가스코뉴 전선이 위급해졌다는 급보를 전해듣고 장 왕자에게 병력을 규합하여 가스코뉴로 향햐게 했다. 여기에 루이 1세 드 푸아티에가 이끄는 남부 프랑스군이 페리괴로 진군하자, 헨리는 보르도에서 동쪽으로 15마일 떨어진 리보르네로 철수했다. 페리괴를 구조하는 데 성공한 뒤, 루이 1세 드 푸아티에는 잉글랜드-가스코뉴 수비대가 주둔한 페리괴 인근의 요새들을 탈환하는 작전에 착수했다. 1345년 10월 초, 루이 1세 드 푸아티에는 페리괴 남동쪽 요새인 오베르슈를 포위했다. 당시 오베르슈를 지키고 있던 브라반트 출신의 군인인 프랭크 반 할렌은 헨리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로스몬트의 헨리는 즉시 오베르슈로 진군했고, 10월 21일 오베르슈 전투에서 루이 1세 드 푸아티에가 이끄는 프랑스군을 궤멸시켰다. 프랑스군 사령관 루이 드 푸아티에는 중상을 입고 체포된 뒤 부상이 악화되면서 얼마 안가 사망했다. 여기에 릴 백작, 7명의 자작, 3명의 남작,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조카 클레르몽, 배너렛 기사 12명, 툴루즈의 세네샬과 클레르몽의 세네샬, 그리고 수백 명의 기사들이 생포되었으며 그 외의 이름없는 병사들이 사살되었다. 한편, 장 왕자는 오베르슈 인근에 이르렀다가 아군이 참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낙담했다. 그의 군대는 적보다 수적으로 훨씬 우월했지만, 적군을 이길 거라는 희망을 접고 앙굴렘으로 철수한 뒤 1345년 11월에 군대를 해산했다. 그 바람에 헨리를 저지할 남부 프랑스군은 6개월 동안 존재하지 않았고, 헨리는 이 때를 틈타 몽셰귀르, 라 레올, 에귀옹 등 남부 프랑스의 여러 도시를 공략해 잉글랜드의 가스코뉴 및 남부 프랑스에 대한 지배력을 성공적으로 강화했다.

1345년 말, 가스코뉴 방면 잉글랜드 사령관인 스태퍼드 백작 랄프 드 스태퍼드 가론 강 론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프랑스 남서부의 요충지인 에기용을 공략했다. 이 소식을 접한 필리프 6세는 더 이상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프랑스 남부에서 활개치는 잉글랜드군을 몰아내기 위해 군대를 대대적으로 일으키기로 마음먹고, 장 왕자에게 에기용을 탈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346년 초, 장 왕자는 오를레앙에 15,000~2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집결시켰다. 그는 먼저 에기용을 탈환한 뒤 라 레울을 공략하고 뒤이어 가스코뉴의 수도인 보르도를 공략하기로 했다. 프랑스군은 장 왕자의 지휘하에 아쟁에서 가론 계곡을 따라 행진하여 4월 1일 에기용에 도착했다. 스태퍼드 백작은 이에 맞서 300명의 중장병과 600명의 장궁병을 통해 요새 수비에 만전을 기했다. 수적으로는 프랑스군이 압도적인 우위였지만, 장은 에기용을 완전히 고립시키기엔 지형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론 강과 론 강이 서로 합류하면서 3개의 서로 다른 구역을 형성했기에, 도시를 포위하려면 이 3개 구역 모두에 병력을 배치해야 했다. 그렇게 했다가는 각개 격파될 우려가 있었기에 서로 긴밀하게 협력해야 했지만, 강이 가로막고 있어서 가론 강과 론 강 위에 새로운 다리를 건설해야 했다. 론 강을 잇는 다리 공사는 잉글랜드 수비대가 훼방을 놓는 통에 지연되었지만, 5월 말에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가론 강을 잇는 다리는 적 수비대가 장악하고 있던 터라 쉽사리 장악되지 않았다. 더욱이 워낙 많은 병사들이 몰려든 터라 프랑스군이 가지고 온 보급품은 금새 바닥났고, 주변 지역 역시 황폐화되었기에 병참을 전적으로 강에 의존해야했다.

라 라울에 기반을 둔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프랑스 식량 운송부대를 지속적으로 습격하고 그들의 보급품을 가로챘다. 여기에 프랑스 숙영지 내부에서 이질이 발생해 많은 병사가 죽어갔다. 6월 중순 프랑스군이 2척의 대형 보급 바지선에 보급품을 채워서 가론 강 서쪽에 주둔한 병사들에게 전달하려 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적 수비대가 지키고 있는 가론 강 다리 아래를 통과해야 했다. 프랑스군은 강행돌파를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바지선들은 파괴되었다. 이에 격분한 프랑스군이 달려들자 수비대는 후퇴했지만, 많은 병사가 성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가지 못해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프랑스군은 이후에도 공성전을 이어갔지만 좀처럼 함락될 기미가 없었다.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이 소량의 보급품과 증원군을 야간에 강을 통해 수비대에 전달하는 것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프랑스군은 에기용 남쪽 방어선에 최소 12개의 투석기를 동원해 포격을 가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7월에는 3개의 공성탑을 바지선에 태워서 에기용 북쪽 방어선을 공격했지만, 공성탑들이 적 투석기가 날린 바위에 맞아 모조리 파괴되는 바람에 실패했다.

장은 도시를 점령할 때까지 공성전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엄숙하게 맹세했지만,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7월 초 프랑스군 보급로를 경비하던 바하몽 성이 잉글랜드군의 기습 공격으로 함락되었다. 7월 말 아쟁의 세네샬인 로베르 드 우데토가 2,000명의 장병을 이끌고 탈환을 시도했지만, 가이야르 1세 드 듀퐁이 이끄는 수비대가 이를 격파하고 로베르를 생포했다. 이로 인해 보급로가 끊겨버리자, 프랑스군은 굶주렸고 수많은 말이 사료 부족으로 죽었으며, 이질은 갈수록 널리 퍼졌다. 이에 절망한 많은 장병들은 끊임없이 탈영했다.

그러던 중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1346년 7월 12일 노르망디에 상륙한 뒤 약탈 행진을 이어가자, 필리프 6세는 아들 장에게 당장 에기용 공방전을 중단하고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장은 에기용을 공략할 때까지 공성전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느님께 맹세했다며 거부했지만, 8월 12일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32km 떨어진 지점까지 진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더는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8월 14일, 장은 지난날 아버지 랭커스터 공작이 사망하면서 랭거스터 공작위를 상속받은 그로스몬트의 헨리에게 지역 휴전을 제안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곤경을 사전에 파악한 헨리는 거부했다. 8월 20일, 장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북쪽으로 철수했다. 에기용 수비대를 비롯한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이들을 추적해 수많은 보급품과 공성 무기 및 말 등을 포획하고 장의 개인 수하물 일부를 입수했다. 프랑스군이 론 강 상류에 설치했던 소규모 요새들은 잉글랜드군에 공략되었다.

장 왕자가 이끄는 군대는 20,000~25,000명의 북부 프랑스군이 크레시 전투에서 완패한 지 2주 후인 9월 7일 즈음에 필리프 6세와 합류했지만, 군기가 매우 불량하고 식량이 부족해서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승리할 가망이 없었다. 이에 프랑스군은 파리를 위협해오는 에드워드 3세에 맞서 새로운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가스코뉴 전선의 수비대를 대거 철수했다. 그 덕분에 가스코뉴를 비롯한 남부 전선은 사실상 무방비 상태가 되었고, 랭커스터 공작 헨리는 이 기회를 틈타 프랑스 남부의 상당수 도시 및 요새들을 공략하고 필리프 6세를 여전히 따르는 마을들을 철저하게 약탈했다.

2.4. 프랑스의 실질적인 권력자

크레시 전투의 참상에 동요한 삼부회는 장 왕자가 에기용 공방전에 집착한 나머지 아버지를 제 때 구하러 오지 않은 것을 비난했고, 부르고뉴 공작이자 장 왕자의 삼촌인 외드 4세도 통화 가치를 임의로 조작한 혐의로 비난받았다. 여기에 스웨덴의 저명한 수녀 비르지타[2]가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화해를 촉구하면서, 프랑스 국왕이 에드워드 3세를 입양해 그의 후계자로 삼을 것을 요청했다. 비르지타의 주장에 공감하는 프랑스 귀족들이 여럿 생기자, 불안감을 느낀 장 왕자는 처남인 카를 4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347년 5월 7일, 카를 4세는 장 왕자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는 데 곤경을 겪을 경우 자신이 도와주겠다는 내용의 서약서에 서명했다.

1347년 8월, 1년 간의 1차 칼레 공방전 끝에 칼레가 잉글랜드군에 함락되었다. 이후 필리프 6세의 위신은 땅바닥에 떨어졌고, 54세의 고령과 좋지 않은 건강으로 인해 정치와 군사 문제에 흥미를 잃고 장남 장 왕자에게 실권을 맡겼다. 이에 따라 장 왕자의 측근들이 국왕의 평의회에 들어갔고 행정부의 고위직을 차지했다. 장 왕자는 아버지를 대신해 몇가지 중요한 거래를 성사시켰다. 1349년 4월 18일, 마요르카 국왕이었던 하이메 3세가 아라곤 국왕 페로 4세의 공세에 밀려 마요르카를 상실한 뒤 프랑스로 망명한 후 몽펠리에 시를 프랑스에게 120,000 골드 크라운에 파는 대가로 군대와 함대를 제공받았다.

1349년 7월 16일, 비에누아의 도팽이었던 움베르 2세 드라투르뒤팽이 막대한 재정 적자에 시달리는 데다 외아들이 사망하면서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 직면하자 프랑스왕국에 신성 로마 제국의 명목상 영토였던 도피네를 양도했다. 이때 체결된 로망스 조약에 따르면, 도피네는 미래에 프랑스 국왕이 될 장 왕자의 아들에게 전달되어야 했다. 따라서 도팽이 될 인물은 장 왕자의 장남인 샤를 왕자였다. 도피네의 지배는 고대부터 지중해와 북유럽 사이의 주요 상업 축인 론 강 계곡을 점유하고 교황청이 위치한 아비뇽과 직접 접촉할 수 있기 때문에 프랑스 왕국에 매우 귀중했다.

1349년 9월 11일, 필리프 6세의 며느리이자 장 왕자의 아내였던 보헤미아의 보나가 중세 흑사병에 걸려 사망했다. 필리프 6세는 즉시 아들의 혼처를 주선했다. 1350년 1월, 나바라 왕국의 공동 국왕 필리페 3세 호아나 2세의 딸 블랑슈가 프랑스 궁정에 소개되었다. 블랑슈는 이보다 앞선 1345년 7월에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알폰소 11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페드로와 결혼하기로 예정되었지만, 카스티야 궁정이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딸 조앤과 페드로를 결혼시키기로 하면서 깨졌다.

필리프 6세는 그녀를 장 왕자와 결혼시키려 했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용모와 총명함에 홀딱 반해 마음을 바꿨다.[3] 마침 1349년 12월 12일 왕비였던 부르고뉴의 잔이 흑사병에 걸려 사망하면서 홀아버였던 그는 블랑슈와 결혼하기로 했다. 1350년 1월 29일, 필리프 6세는 브리콩트로베르에서 40세 어린 블랑슈와 결혼했다. 1350년 2월 19일 오베르뉴와 불로뉴 백작 기욤 12세의 딸이자 상속녀인 오베르뉴의 잔과 장 왕자의 결혼이 낭테르에서 거행되었다. 그 결과, 프랑스 왕국은 몽펠리에, 도피네, 오베르뉴, 불로뉴를 획득하면서, 전쟁으로 잃은 영토보다 훨씬 넓은 영토를 외교 및 결혼 정책을 통해 획득했다.

2.5. 프랑스 국왕

2.5.1. 대관식과 긴느 백작의 처형

1350년 8월 22일, 필리프 6세가 파리의 외르에루아르 노장르후와에서 사망했다. 장 왕자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나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2세가 프랑스 왕을 칭할 것을 우려해, 아버지가 사망한지 한달 밖에 안 된 9월 26일 랭스 대성당에서 아내 오베르뉴의 잔과 함께 비엔 대주교 장 2세의 주관 아래 도유식 대관식을 거행했다. 프랑스의 대귀족 가문에 속하는 400명의 젊은이들이 이날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장 2세는 독수리를 자신의 상징으로 선택했다.

이 무렵, 1차 캉 공방전에서 생포된 뒤 4년간 옥고를 치르던 긴느 백작 라울 2세 드 브리엔이 60,000 리브르를 지불하겠다고 약속하고 풀려났다. 하지만 그 큰 돈을 마련할 길이 없자, 에드워드 3세에게 자신의 소유물인 긴느 성을 잉글랜드에 양도하기로 했다. 긴느 성은 잉글랜드가 확보한 칼레에서 9.7km 떨어진 요새로, 칼레 주변의 프랑스 국경지대의 요충지였다. 에드워드 3세는 그곳을 확보한다면 칼레에 대한 프랑스군의 압박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보고 라울 2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장 2세는 모든 프랑스 영토의 주권자인 자신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하고 라울을 체포한 뒤 루브르 궁전 내 지하감옥에 가둔 후 1350년 11월 19일에 재판도 치르지 않고 즉결 처형했으며, 그의 모든 재산을 몰수했다. 상당한 거물이었던 라울 2세가 순식간에 처형된 사건은 프랑스 귀족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겼고, 발루아 왕조에 대한 불신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가 처형된 이유가 대내외에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장 2세의 첫 아내인 보헤미아의 보나가 라울과 간통했기 때문에 처형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2.5.2. 경제 재건 정책

장 2세는 중세 흑사병의 대유행으로 농민과 노동자들의 숫자가 크게 줄면서 물가와 임금 상승이 급격히 오르는 상황을 막기 위해 1351년 1월 30일 물가와 임금을 정해진 금액에 고정한다는 내용의 법령을 제정했다. 또한 이 법령은 부랑자들의 구걸을 금지하고 일터에 고용하도록 규정했는데, 이는 일꾼을 어떻게든 늘려서 경제를 활성화하고, 부랑자들이 프랑스 각지에서 활개 치는 자유 용병대에 가담하는 걸 막으려는 의도였다.

한편, 장 2세는 파리 시 무역 조례를 제정했다. 이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파리에서 장인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는 가격 인상을 부추기는 길드를 무너뜨려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는 시도였다. 또한 근로자가 근무일에 선술집에 자주 가는 것을 금지하고 더 나은 임금을 받기 위해 고용주를 떠나는 것을 금지했다. 훗날 그의 뒤를 이어 프랑스 국왕이 된 샤를 5세는 1367년에 실업자들을 도랑 수리에 투입하고, 방랑하는 행위를 범죄로 간주한다는 내용의 새 조례를 제정했다.

1351년 9월 11일, 장 2세는 적대 행위가 재개될 경우에 대비해 전쟁 기금을 마련한다는 구실로 휴진 기간 동안 국가 채무를 유예한다고 선언했다. 당시에는 부유한 채권자로부터 돈을 빌리고, 채권자들이 왕의 이름으로 세금을 부과한 뒤 그 중 상당수를 챙기게 허용하는 방식으로 갚는 것이 관례였다. 이는 채권자들이 알아서 세금을 거두기 때문에 국가 운영에 필요한 공무원 숫자를 최소화할 수 있어 행정 비용을 아낄 수 있지만, 백성들은 책권자들에게 깊은 반감을 품었다. 따라서 그들은 채권자들에게 당분간 시달리지 않게 해준 장 2세의 조치를 환영했다.

2.5.3. 군사 개혁과 가스코뉴 공세

장 2세는 크레시 전투의 여파로 큰 손실을 입은 프랑스군을 재편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1351년 4월 30일, 장병들의 급여와 관련된 조례가 반포되었다. 프랑스 전역에서 거둬들인 세금은 군대, 특히 왕실군 지원에 우선적으로 쓰여야 하며, 왕실군에 소속된 각 전사는 대장의 통솔하에 중대에 소속되어야 하며, 한 군마가 2개의 다른 부대에 소속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말에 식별 표식을 해야 했다. 급여는 복무 기간이 만료되었을 때 즉시 지급되지만, 전투원이 장비를 올바르게 갖춘 경우에만 지급될 수 있었다. 각 부대를 이끄는 대장은 전투에 능숙한 용병이나 하급 기사 출신으로, 부대의 전투 임무 수행과 일탈 행위 방지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군대를 총괄하는 프랑스 무관장과 각 지방의 보안관에게 부대의 모든 상황을 일일이 보고할 의무가 있었다.

한편, 장 2세는 기옌 전선에서의 전략을 개편했다. 전쟁을 조기에 끝내기 위해 보르도 공략을 시도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포기하는 대신 잉글랜드가 내부 정비에 집중하는 동안 미리 공세 역량을 꺾어놓기 위해 가스코뉴 국경의 전초기지에 해당하는 요새들을 공략하기로 한 것이다. 1351년 2월, 멜로 영주 기 2세 드 네슬과 부관 아르눌 도드랭이 이끄는 수천 명이 프랑스군이 잉글랜드 수비대 600명이 주둔하고 있는 생장당젤리 요새를 포위하고 요새로 이어지는 모든 보급로를 차단했다. 수비대는 몇 달간 결연히 버텼지만,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굶주림에 시달렸다.

아군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가스코뉴의 세네샬 존 드 체버스턴과 친 잉글랜드파 가스코뉴 영주인 아르노 아마니외 달브레는 생장당젤리를 구원하기 위해 수백 명의 부대를 이끌고 출진했다. 이들은 수적으로 열세했기 때문에 적 포위망을 뚫을 생각은 없었지만 수비대에 물자를 보급하고자 노력했다. 적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기 2세 드 네슬은 일부 병력를 남겨서 계속 포위하게 한 뒤 대다수 병력을 이끌고 이들을 요격하러 출진했다.

1351년 4월 1일, 기 2세 드 네슬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생트 마을에서 약 3마일 떨어진 도로에서 잉글랜드군을 요격했다. 잉글랜드군 기사들은 즉시 말에서 내려 고지로 올라가서 전투 대열을 형성하고 말을 후방으로 이끌었다. 네슬은 양 측면의 소규모 기병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기사들에게 말에서 내리게 한 뒤 고지를 에워싸서 공세를 펼쳤다. 그리하여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인근의 타이르부르와 토네-샤랑트의 잉글랜드 수비대에서 분리된 수백 명의 잉글랜드군이 프랑스군 후방을 공격했다. 이에 전의를 급격히 상실한 프랑스군은 패주했고, 600명 가량의 프랑스 기사가 죽거나 사로잡혔다. 기 2세 드 네슬과 아르눌 도드랭 역시 사로잡혔다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존 드 체버스턴은 생트 전투에서 승리한 뒤 생장당젤리 요새로 접근했지만 포위망을 뚫지는 못하고 보급품을 수비대에 전달해 준 후 철수했다. 한편 장 2세는 지휘관들이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접하자 친히 추가 병력을 이끌고 포위군과 합세했다. 이후 잉글랜드군의 구원이 더이상 오지 않자, 생당장젤리 수비대와 주민들은 1351년 8월 장 2세에게 항복했다. 잉글랜드군은 이에 맞서 프랑스 북부에 기마 약탈을 벌였지만 모조리 격퇴되었다. 아직 프랑스를 대대적으로 공격할 준비가 안 되었던 에드워드 3세는 휴전을 맺자고 제의했고, 장 2세는 생장당젤리의 지배를 정식으로 인정받는 등 유리한 조건으로 휴전에 동의했다.

2.5.4. 별 기사단 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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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1년 11월 16일, 장 2세는 별 기사단을 창설했다. 1348년 에드워드 3세가 잉글랜드에서 창설한 가터 기사단을 모방한 이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는 장 2세였으며, 본부는 프랑스 국왕들의 매장지인 생드니 수도원 근처이며 왕족의 휘장이 보관된 생투앙쉬르센이었다. 별 기사단에 소속된 단원들은 "Monstrant regibus astra viam(별들은 왕에게 가는 길을 보여준다)"라는 모토를 내세웠으며, 빨간색 에나멜에 흰색 별이 달린 목걸이로 서로를 인식할 수 있었다. 기사단에 소속된 기사들에게는 급여가 지급되었다. 별 기사단 법령에는 단원들은 전투 시 절대로 적에게 등을 돌리지 말아야 하며, 네 걸음 이상 물러나지 않아야 한다는 규정이 들어 있었다. 장 2세는 이를 통해 군대의 결속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2.5.5. 긴느 공방전

라울 2세 드 브리엔이 처형된 이후 긴느 성은 프랑스 국왕의 소유지로 편입되었다. 이에 잉글랜드 측은 무력으로 긴느 성을 자기들 것으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1352년 1월, 돈캐스터의 존이라는 이름의 향사가 이끄는 잉글랜드 분견대가 긴느 요새 공략에 착수했다. 돈캐스터의 존은 전쟁 초기에 포로로 잡힌 후 긴에서 강제 노역하다가 풀려난 후 잉글랜드로 돌아갔다가 폭행죄를 저질러서 감옥에 갇혔다가 에드워드 3세의 칼레 원정에 동행하는 대가로 풀려난 뒤 칼레 수비대에 배석되었다. 그는 긴느 요새에서 노역하면서 그곳의 수비 상태를 눈여겨봤기 때문에, 그곳의 약점에 대해 잘 알았다. 그와 동료들은 밤중에 해자를 건너 성벽을 기어올라가 보초를 죽이고 성채를 습격한 뒤, 그곳에 갇혀 있던 잉글랜드 포로들을 석방하고 성 전체를 순식간에 점령했다.

프랑스 수뇌부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했다. 긴느 성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던 위그 드 벨콩로이는 잉글랜드군을 피해 도망쳤다가 북동부 전선 사령관 조프루아 드 샤르니에게 체포되어 거열형에 처해졌다. 장 2세는 1월 15일 에드워드에게 사절을 보내 휴전 중인 상황에서 긴느 성을 빼앗아간 것을 강력히 규탄하며 당장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와 전면 전쟁을 벌일 준비가 안 됐고 명분상으로도 밀란다고 보고 긴느 성에 주둔한 잉글랜드군을 철수시키려 했다. 하지만 1월 17일 소집된 의회에서 많은 의원들이 전쟁을 강력히 지지하자, 에드워드 3세는 곧 마음을 돌렸다. 의회는 3년간의 전쟁세를 승인하기로 결의했고, 에드워드는 존 드 돈캐스터를 완전히 사면하고 보상을 해줬다.

잉글랜드 측이 이렇게 나오자, 장 2세는 실력 행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1352년 5월, 장 2세로부터 긴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접수한 조프루아 드 샤르니는 1,500명의 맨앳암즈와 많은 이탈리아 석궁병을 포함한 4,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토마스 호그쇼가 지휘하는 잉글랜드 수비대 115명이 지키는 긴느 성을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긴느 성은 공략하기가 까다로운 곳이었다. 습지대가 성 주변에 깔려 있고 많은 수로가 있어서 대부분의 방향에서 접근하기 어려우면서도 수비대가 물을 공급받기 용이했다. 조프루아는 지형을 꼼꼼히 살펴본 끝에 요새 정문을 똑바로 공격하는 것만이 요새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보고, 정문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수녀원을 요새로 개조하고 투석기와 대포를 배치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5월부터 7월까지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지만 쉽사리 정문을 돌파하지 못했다. 그러던 7월 중순에 수천 명의 잉글랜드군이 긴느 인근에 도착했다. 이들은 야간에 프랑스 진영을 기습 공격했고, 이를 대비하지 않았던 프랑스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고 수녀원 주변에 쳤던 방어벽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결국 조프루아는 요새를 공략할 가망이 없다고 여기고 철수했다. 다만 칼레에서 남서쪽으로 4.8km 떨어진 프레툰에 새로 건설된 잉글랜드 탑을 기습 공격해 점거하고 그곳을 지키고 있던 파비아 출신의 용병대장 아이머리(Aimery)를 체포한 뒤 생오메르로 끌고 가 도끼로 쳐죽였다.[4]

잉글랜드군은 조프루아를 격퇴한 뒤 칼레 주변 습지를 통과하는 모든 진군로에 요새를 건설해 칼레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다. 프랑스군은 이에 대응해 칼레 인근 마을 60곳에 요새를 설치했다. 그 후 양자는 몇 달 동안 대치하다가 교황 인노첸시오 6세의 중재에 따라 1353년 초 긴느에서 휴전 협상을 시작했고, 1353년 4월 6일 긴느 휴전 협약 초안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 휴전 협약은 나바라 국왕이자 에브뢰 백작 카를로스 2세가 중간에 훼방을 놓으면서 성사되지 못했다.

2.5.6. 모롱 전투

1352년, 장 2세는 긴느 공방전을 치르는 동안 1341년 내전 발발 이래 잉글랜드와 지속적으로 충돌하고 있는 브르타뉴 역시 석권하기로 마음먹고, 프랑스 원수 기 2세 드 네슬에게 브르타뉴 원정을 맡겼다. 기 2세 드 네슬은 왕명을 받들어 브르타뉴의 도시 렌에 병력을 소집한 뒤 플로에르멜, 푸쥬헤 성을 포위 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일부 병력을 남겨서 포위를 이어가게 한 뒤 렌으로 가서 병력을 더 끌어모으려 했다. 한편 브르타뉴 주둔 영국 사령관 월터 벤틀리는 잉글랜드에서 데려온 1,500명의 중장병 및 장궁병을 이끌고 두 곳을 구하기 위해 행진했다. 그는 포위군을 가볍게 격파하고 플로에르멜에 있던 브르타뉴의 대리 수비대장 로버트 놀스와 합세했다.

기 2세는 벤틀리가 포위망을 뚫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쳐부수기 위해 9,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출진했다. 벤틀리는 이에 대응해 1352년 8월 14일 렌에서 약 30마일 떨어진 모롱 마을 동쪽 언덕 꼭대기 가장자리에 전투 대형을 결성하고, 각 측면에 기병과 궁수병을 배치했으며, 중앙에 중장병을 배치했다. 그 뒤에는 숲과 나무 울타리가 있었다. 우익 부대 앞에는 브렘빌리 성이 계곡 위에 세워져 있었다.

이윽고 전장에 도착한 기 2세는 적의 병력이 2,000명 밖에 안 된 걸 보고 벤틀리에게 사절을 보내 이 점을 지적하면서 프랑스를 떠나기로 약속한다면 전장에서 철수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제안했다. 벤틀리가 제안을 거부하자, 기 2세는 적을 전투 대형을 결성했다. 로구스 드 엥거스트가 이끄는 프랑스-브르타뉴 기병대는 좌익에 배치되었고, 나머지 부대는 말에서 내려서 도보로 적진을 공격할 준비를 갖췄다.

이윽고 전투 개시 나팔이 불어오자, 장이 이끄는 프랑스 좌익 기병대가 잉글랜드 우익 궁수대를 향해 돌진했다. 잉글랜드 궁수들은 자신들을 달려오는 적을 향해 일제 사격을 가했지만, 적군이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달려들자 겁을 집어먹고 숲속으로 달아났다. 그 사이, 말에서 내린 프랑스-브르타뉴 주력 부대는 언덕을 기어올라 잉글랜드의 중앙 중장병 부대를 공격해 수목 경계선으로 밀어붙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측에 있던 프랑스 병사들이 언덕의 훨씬 더 가파른 부분에 직면해 전진 속도가 느려졌다. 벤틀리의 좌익 궁수대는 이 기회를 틈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적을 향해 화살을 계속 퍼부을 수 있었다.

계속되는 화살 세례에 견디지 못한 프랑스 우익 부대가 후퇴하자, 궁잉글랜드 좌익 궁수들은 검과 도끼를 챙기고 중앙에 밀집한 적군의 측면을 요격했다. 이에 전의가 꺾인 프랑스 중장병들은 언덕으로 밀려났다. 이 무렵 잉글랜드 우익 궁수대를 격파하고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던 로구스 드 앵거스트는 위기에 빠진 중앙의 아군 부대를 구하기 위해 방향을 틀었지만, 우익 궁수들이 전열을 가다듬고 장이 이끄는 군대의 발목을 잡는 바람에 제때에 이동하지 못했다.

몇 시간이 지난 후 측면이 찔린 상황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프랑스군이 등을 돌리기 시작하자, 벤틀리의 중장병들은 즉시 적군을 추격했다. 이에 프랑스군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패주했지만, 전투에 참석했던 별 기사단 89명 만은 끝까지 항전했다가 전원 사살되었다. 프랑스 사령관 기 드 네슬도 전사했으며, 프랑스 기사 500명이 추가로 죽었다고 전해진다. 잉글랜드군의 사상자는 알려진 바 없지만, 에드워드 3세가 브르타뉴 방면 잉글랜드군의 전력 손실이 심하다는 소식을 듣고 원군을 보내줘야 했던 것을 보면 역시 많은 손실을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5] 모롱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접한 장 2세는 브르타뉴에 대한 관심을 접었다.

2.5.7. 카를로스 2세와의 갈등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2세는 1349년 10월 중세 흑사병에 걸려 사망한 어머니의 뒤를 이어 나바라 국왕이자 노르망디의 에브뢰 백작위를 물려받았다. 그는 나바라 왕국엔 거의 들르지 않고 프랑스 영지 관리에 집중했으며, 그에 의해 나바라 총독으로 선임된 동생 루이가 나바라 왕국을 대신 통치했다. 이후 어머니가 필리프 6세에게 빼앗겨 버린 프랑스 왕위를 자기 손으로 되찾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1350년 8월 22일 필리프 6세가 사망한 뒤 장 2세가 한달 만인 9월 26일 랭스에서 대관식을 서둘러 진행했을 때, 지지자들을 미처 규합하지 못한 그는 일단 장 2세의 즉위를 받아들였지만, 어머니가 돌려받지 못한 브리와 샹파뉴 백국을 돌려받는 데 초점을 맞췄다. 필리프 6세가 주기로 약속했던 앙굴렘을 끝내 주지 않았으니 마땅히 브리와 샹파뉴를 회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카를로스는 노르망디와 센 계곡에 풍부한 재산을 가진 에브뢰 가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프랑스 국왕 샤를 4세의 왕비이자 카를로스의 외숙모인 잔 데브뢰는 프랑스 왕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카를로스와 장 2세 사이의 중재 역할을 수행했다. 동생 필리프는 잉글랜드 등 외국에서의 지원을 받아내는 데 힘을 기울였으며, 또다른 동생 루이는 나바라 왕국을 대리 통치하면서 형을 위해 인적, 물적 자원을 징발했다. 여기에 라울 2세 드 브리엔이 갑작스럽게 체포되어 처형된 사건에 불만을 품은 푸아 백작 가스통과 불로뉴 백작가, 아르투아 백작가 등을 끌어들였다.

1352년, 장 2세는 카를로스에게 갓 8살된 딸 잔느를 아내로 삼으라고 권유했다. 카를로스는 이를 거부한다면 장 2세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을 테고, 아직은 그에게 맞설 힘이 부족하다고 여겼다. 또한 장 2세가 신부의 지참금으로 왕실 수입에서 차출한 10만 에쿠스를 매년 송금하겠다고 약속하자, 그는 결혼에 동의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1352년 2월, 카를로스는 장 2세의 딸 잔느와 결혼했다. 그러나 장 2세는 약속과는 달리 10만 에쿠스를 지불하는 것을 차일피일 미뤘다.

여기에 더해 장 2세가 가장 신뢰하는 신하인 샤를 드 라 세르다가 앙굴렘 백작에 선임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카를로스 2세는 격노했다. 앙굴렘은 지난날 필리프 6세가 어머니 호아나 2세에게 양도하기로 약속해놓고 끝까지 주지 않았던 곳이었다. 그런 곳을 카스티야 출신의 남작인 샤를 드 라 세르다가 가로챘다니, 그로서는 도저히 참고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언젠가 샤를 드 라 세르다를 가만두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1353년, 프랑스와 잉글랜드 국왕들은 교황 인노첸시오 6세의 호소와 중세 흑사병 유행으로 인한 참상으로 파탄 지경에 몰린 내치를 고려해 평화 협상을 가졌다. 그들은 먼저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에 대해 논의했다. 공작위 계승 분쟁의 당사자인 장 드 몽포르는 1345년에 사망헀고, 4살된 아들 장과 그의 아내 잔 드 플란데런이 잉글랜드에 있었다. 또다른 당사자인 샤를 드 블루아는 라 로슈데리앙 전투에서 사로잡힌 뒤 런던에 수감되어 몸값을 협상하고 있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 당국은 샤를 드 블루아를 브르타뉴 공작으로 인정하되, 샤를 드 블루아는 300,000 크라운의 몸값을 지불하고, 브르타뉴는 잉글랜드와 영구적으로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카를로스 2세는 평화가 이대로 성립되면 자신에게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하고, 협상을 훼방놓기 위해 전권 대표를 맡고 있던 샤를 드 라 세르다를 체포하기로 했다.
2.5.7.1. 샤를 드 라 세르다 암살 사건
1354년 1월 18일, 카를로스의 동생인 롱그빌 백작 필리프가 이끄는 무리가 레글르(L'Aigle)의 한 여관에 투숙하고 있던 샤를 드 라 세르다를 습격했다. 그 과정에서 샤를의 수행원들이 대거 척살되었고, 샤를은 도주하다가 체포된 뒤 목숨을 구걸하다가 살육에 흥분한 필리프의 부하들에게 참수되었다. 카를로스는 동생 필리프가 샤를 드 라 세르다를 체포하지 않고 암살해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일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자신이 살인을 주도했으며 샤를 드 라 세르다가 자신을 해치기 위해 음모를 꾸몄기에 정당방위로 행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샤를 드 라 세르다는 어린 시절 장 2세와 궁정에서 함께 교육받았고, 매우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사이가 어찌나 좋았는지, 장 왕자가 어딜 가든지 그가 항상 따라가곤 했기에 세간에서는 두 사람이 동성애 관계가 아니냐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그런 샤를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장 2세는 나흘 동안 엎드린 채 울부짖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카를로스 2세는 에드워드 3세, 흑태자 에드워드, 에드워드 3세의 왕비인 에노의 필리파, 랭커스터 공작 헨리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장 2세는 이러다가 잉글랜드와의 전쟁이 재개될 것을 우려해 1354년 2월 22일 카를로스와 망트 조약을 체결했다. 장 2세가 아직 주지 않았던 영토를 포기하는 대가로 보몽-르-로거 군, 브레퇴일 성, 콩체스 성, 퐁-오데메르 성, 체르부르 시, 코탕탱의 폐쇄, 노르망디의 카렌탕, 쿠탕스 및 발로그네 일대를 영지로 수여받았다. 또한 노르망디 공작의 모든 특권을 직함 없이 누릴 수 있었다.

이렇듯 많은 것을 얻어낸 대가로, 카를로스 2세는 왕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파리로 가야만 했다. 장 2세의 둘째 아들인 앙주의 루이는 카를로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에브뢰에 인질로 보내졌고, 카를로스는 1354년 3월 4일 파리로 가서 삼부회 의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왕에게 공개적으로 용서를 구해 허락을 얻어냈다. 이후 카를로스는 에드워드 3세가 보낸 동맹 제안을 거부하면서, 그의 도움으로 폭력사태 없이 화해가 이루어져서 다행이라며 조롱하는 내용의 답신을 보냈다. 그러나 장 2세는 샤를 드 라 세르다를 죽이는 데 일조한 카를로스 2세를 용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2.5.7.2. 갈등 재개와 2번째 화해
1354년 4월 6일, 장 2세와 에드워드 3세는 긴느 비밀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에드워드는 프랑스 왕위 주장을 포기하고, 장 2세는 전쟁 이전의 가스코뉴 영토에 더해 푸아투, 리우쟁, 루아르 지방의 영토와 주권을 양도하기로 했다. 10월 1일 아비뇽에서 조약이 확정되는 동시에 교황이 그 내용을 발표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해 8월, 나바라 왕 카를로스의 심복이었던 아르쿠르 백작이 장 2세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그에 따르면 시종관이자 잉글랜드와의 종전 협상을 주도한 로베르 드 로리스를 포함해 장 왕의 측근 중 일부는 나바라 왕 카를로스의 첩자이며 추밀원 회의 내용을 그에게 비밀리에 누설했다고 한다.

장 2세는 이에 분노해 카를로스 형제를 죽이기로 작정하고 자신의 궁전에서 열린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하지만 카를로스 형제는 참석하러 가던 중 경고를 받지 급히 파리를 탈출해 암살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 후 카를로스는 노르망디를 침공한 장 2세를 피해 교황청이 있는 아비뇽에 은거했고, 장 2세는 1355년 1월 아비뇽에 사절을 보내 긴 조약을 파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카를로스는 아비뇽에 잉글랜드 측 사절로 찾아왔던 랭커스터 공작 헨리에게 즉시 접근해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겠다고 제안했고, 에드워드 3세는 이를 받아들였다.

1355년 7월, 에드워드 3세는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가스코뉴로 가서 그곳의 병력을 규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면서 본인은 노르망디로 가서 카를로스와 연합해 장 2세와 맞붙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2,000명의 용병들을 이끌고 노르망디 세르부르에 상륙한 카를로스 2세는 장 2세에게 협상을 제안했고, 장 2세 역시 카를로스와 잉글랜드가 연합하는 사태를 피하고 싶었기에 받아들였다. 양자는 2개월간 협상한 끝에 9월 15일에, 장 2세는 카를로스로부터 빼앗은 영지를 돌려주고 사면하고, 카를로스는 프랑스 왕국에 충성을 바치고 영국과의 관계를 끊는다는 내용의 발롱크스 협약을 체결하고 정식으로 화해했다.

카를로스 2세에게 또다시 농락당했지만, 에드워드는 프랑스 침공을 진행하기로 했다. 노르망디 원정 계획을 취소하는 대신 카를로스가 고용했다가 해산한 용병들을 재고용해 브르타뉴 방면을 교란하게 하면서, 본인은 칼레에 상륙한 뒤 피카르디 일대에서 슈보시를 시도했다. 그러나 장 2세가 피카르디 일대의 모든 농민에게 사료, 음식, 잠재적인 전리품 등을 모조리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 때문에 아무것도 얻을 수 없자 잉글랜드군은 열흘 만에 칼레로 귀환했다.
2.5.7.3. 카를로스 2세 체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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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6년, 장 2세는 아르쿠르 백작 장 5세 다르쿠르와 카를로스 2세가 에드워드 3세와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했고, 장남 샤를 왕자와도 친분을 다지는 것에 위협을 느낀 끝에 그들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1356년 4월 5일, 샤를 왕자가 노르망디 영주들을 루앙에 초대하고 연회를 베풀었다. 카를로스 2세와 장 5세 다르쿠르 역시 이 연회에 참석해 샤를 왕자의 옆에 앉았다. 연회가 한창일 때, 장 2세가 투구를 쓰고 손에 검을 쥔 채 나타나 외쳤다.
"이 검에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누구든지 움직이지 못하게 하라!"

그 직후, 장 2세의 동생 필리프 도를레앙과 차남 루이 1세를 비롯한 국왕을 따르는 인사들과 무사들이 연회장에 난입해 카를로스 2세와 그를 추종하던 인사들을 모조리 체포했다. 이때 장 2세는 카를로스 2세의 멱살을 잡고 그 자리에서 끌어내며 외쳤다.
"이 배신자! 너는 내 아들의 식탁에 앉을 자격이 없다!"

카를로스 2세의 종자 콜린 더블레(Colin Doublet)는 주인을 보호하기 위해 칼을 뽑았지만 왕실 근위대에 의해 즉시 체포되었다. 샤를 왕자는 이런 식으로 자신을 불명예스럽게하지 말라고 간청했지만, 장 2세는 묵살하고 카를로스 2세와 장 5세 다르쿠르를 비롯한 세 명의 귀족, 그리고 콜린 더블레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날 저녁, 아르쿠르 백작과 다른 세 명의 사형수는 루앙 인근의 샹 뒤 파르동으로 끌려간 뒤 참수형에 처해졌고, 그들의 몸통은 루앙의 교수대에 내걸렸다.

카를로스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에브뢰 가문과 노르망디 귀족들은 프랑스 왕에 대한 충성 서약을 철회하고 에드워드 3세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장 2세는 이를 응징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노르망디에 파견했다. 1356년 4월, 프랑스군은 노르망디 대부분을 장악하고 항복을 거부한 노르망디 중부의 브레퇴유 요새를 포위했다. 5월 14일, 장 2세는 샤르트르에 머물면서 잉글랜드의 대응에 대비해 병력을 모으고자 전국에 소집령을 내렸다. 그러나 민중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장 2세는 병력이 모이지 않자 5월 말과 6월 초에 소집령을 재차 반포했다. 한편, 카를로스 2세의 동생 필리프는 코탕탱 반도 북부로 도주한 뒤 에드워드 3세에게 조속히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1356년 8월 18일, 500명의 맨앳암즈와 800명의 잉글랜드 장궁병들이 랭커스터 공작 그로스몬트의 헨리의 지휘하에 코탕탱 반도 북동쪽의 생바스트라후그에 상륙했다. 그들은 필리프가 지휘하는 200명의 노르만 병사들과 합류했고, 로버트 놀스가 이끄는 브르타뉴 잉글랜드 수비대에서 분리된 800명의 추가 병력이 몽트부르에서 가세했다. 잉글랜드군은 6월 24일 몽트부르에서 출발하여 노르망디 서부 일대를 관통하며 약탈을 자행했고, 7월 5일 브레퇴유에 도착했다. 브레퇴유를 포위 공격하던 프랑스군은 질서정연하게 철수했고, 수비대는 1년간 동안 포위 공격을 버틸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보급을 받았다.

헨리는 여세를 이어가 7월 4일 베르누이로 진군해 그곳을 공략하고 약탈을 자행했으며, 몸값을 지불할 수 있다고 여긴 이들을 포로로 잡았다. 이후 프랑스군이 베르누이에서 11km 떨어진 콩데쉬르이통에 주둔했다는 소식을 접한 힌리는 전투를 준비했다. 프랑스군이 콩데쉬르이통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낙오병들의 합류를 기다리는 동안 헨리는 그들과 3~5km 떨어진 지점으로 이동했다. 장 2세는 헨리에게 전령을 보내 전투를 벌이자고 제안했지만, 헨리는 승낙도 거절도 하지 않는 애매한 답을 했다. 그 후 헨리는 밤에 숙영지를 철거하고 45km 떨어진 아르장탕까지 강행군했다. 장 2세는 이들을 추격하는 대신 브레퇴유를 재차 포위하기로 했다.

7월 12일부터 브레퇴유 포위를 재개한 장 2세는 성벽 아래에 땅굴을 파서 공략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프랑스군은 8월의 어느 시점에 거대한 이동식 공성탑을 지어서 성벽까지 밀고 들어갔지만, 수비대가 공성탑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격퇴되었다. 이렇듯 수비대가 악착같이 저항한 데다 1년간 버틸 수 있을 만큼의 식량을 저장했으니, 가까운 시일에 성을 공략하는 것은 요원했다. 여기에 가스코뉴에 있던 흑태자 에드워드가 8월 4일부터 6,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진군하며 여러 마을을 황폐화시켰다.

장 2세는 처음엔 가스코뉴에서 올라오는 적을 격퇴하자는 제안에 "브레퇴유의 반역자들이 더 위험하다!"라며 거부했다. 그러나 프랑스 남서부의 민심이 심하게 악화되어 자칫하면 프랑스로부터 독립하려 들 수 도 있다는 첩보가 들어오자, 결국 브레퇴유를 무력으로 공략하려는 계획을 포기했다. 그 대신 수비대에게 코탕탱 반도로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게 해주고 귀중품과 물품을 가져갈 수 있게 해줄 테니 브레퇴유를 떠나라고 권유했다. 수비대는 처음엔 거절 의사를 밝혔지만 장 2세가 막대한 돈을 찔러주자 이내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브레퇴유 문제를 해결한 뒤, 장 2세의 프랑스 주력군은 흑태자를 물리치기 위해 남하했다.

2.5.8. 흑태자의 슈보시

1355년 7월, 에드워드 3세가 카를로스 2세의 반란에 호응해 칼레에 상륙한 뒤 피카르디 일대에서 슈보시를 실시했으나 장 2세의 청야전술에 막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열흘 만에 칼레로 철수했다. 하지만 장 2세와 프랑스군의 시선이 에드워드 3세에게 쏠린 사이, 가스코뉴로 간 흑태자 에드워드가 대대적인 슈보시에 착수했다. 1355년 9월 20일, 가스코뉴의 수도인 보르도에 도착한 흑태자 에드워드는 가스코뉴 귀족들을 소집해 병력을 5,000~6,000명으로 늘리고 상당한 보급품 및 수송 마차를 제공받았다. 1355년 10월 5일, 보르도를 출발한 그의 군대는 남쪽으로 48km 떨어진 생마께흐에서 보급품을 추가로 확보하고 바자스를 통과해 10월 12일 아르마냐크 국경에 도달했다. 그 과정에서 수십일간의 항해에 이어 일주일간 강행군하느라 지칠대로 지친 잉글랜드 말들이 대거 죽거나 부상을 입자, 현지의 말들로 교체했다.

프랑스 왕국의 영역인 아르마냐크에 들어서자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대대적인 약탈에 착수했다. 그들은 약탈과 파괴를 극대화하기 위해 서로 평행하게 진군하는 3개의 종대로 나뉘었고, 11일 동안 아르마냐크 전역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횡단하며 지나가는 곳마다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대부분의 마을은 명목상으로만 요새화되었기에 쉽게 습격당하고 파괴되었다. 아르마냐크 백작 장 1세는 야전에서는 그들을 당해낼 수 없다고 판단하고 프랑스의 무관장인 자크 1세 드 부르봉과 프랑스 원수 장 드 클레르몽의 지원을 받으며 툴루즈에 웅크렸다. 그러면서 툴루즈로 접근할 때 건너야 하는 가론 강과 아리에주 강의 다리를 절단했다. 그러나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여울목을 통해 강을 건넜고, 그 과정에 말 몇 마리와 적은 수의 병사만 잃었다.

흑태자 에드워드는 툴루즈에서 농성하는 프랑스군을 내버려둔 채 툴루즈 동쪽의 곡창지대로 향했다. 동시대 역사가는 툴루즈 동쪽 지역을 "세계에서 가장 기름진 땅"이라고 묘사했다.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이 풍요로운 곳을 계속해서 약탈하고 불태웠다. 강력한 요새를 제외한 모든 곳이 습격되었으며, 수많은 이들이 피살당하거나 생포되었다. 일부 잉글랜드군은 본군에서 최소 39km 떨어진 범위 내에 흩어져서 수많은 작은 마을들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잉글랜드군이 툴루즈에서 동쪽으로 80km 떨어진 카르카손에 이르렀을 때, 주민들은 인근 요새에 틀어박혀 농성했다. 이에 공성을 개시해 한나절 만에 함락시키고 사흘간 심각한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11월 8일, 잉글랜드군은 지중해에서 16km 떨어진 나르본에 도착했다. 그들은 인근 요새를 무시하고 마을을 빠르게 점령하고 약탈했다. 요새에 있던 프랑스군은 그들에게 포격을 가했지만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이후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나르본에서 사방으로 흩어져서 약탈을 자행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6세는 에드워드에게 사절을 보내 프랑스와 휴전을 맺자고 제안했지만, 에드워드는 "우리 왕에게 가서 얘기해라"라고 답하고 돌려보냈다. 이렇듯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의 약탈 행렬이 갈수록 심각한 파괴를 일삼자, 장 1세 다르마냐크, 자크 드 부르봉, 장 드 클레르몽은 군대의 일부를 나르본에서 서쪽으로 24km 떨어진 홈프스로 이동시켰다. 이 곳은 오데 강을 건너는 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잉글랜드군이 가스코뉴로 돌아갈 때 오데 강을 무리하게 건너 이들과 싸우다가 막심한 손실을 입도록 강요하려 했다.

11월 10일, 15,000마리의 말에게 먹일 사료와 곡물이 부족해지자, 에드워드는 가스코뉴로 돌아가기로 했다. 잉글랜드군의 후위대와 낙오병들은 마을 민병대의 연이은 습격을 받았다. 에드워드는 적군 정예병이 주둔하고 있는 홈프스를 회피하고자 북동쪽의 베지에로 향했지만, 정찰병들이 그곳이 강력하게 방어되고 있다고 보고하자 전쟁 회의를 열어서 장군들의 의견을 들은 뒤 홈프스를 무력으로 뚫기로 결의하고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과정에서 물이 부족해지면서 다들 갈증에 시달렸다. 한 연대기에 따르면, 말에게 먹일 물이 없어서 포도주를 줘야 했다고 한다. 잉글랜드군이 이러한 역경을 무릅쓰고 홈프스에 접근하자, 프랑스군은 막상 적과 대결했다가 막대한 피해를 입는 게 싫었는지 툴루즈로 후퇴했다. 에드워드는 그들을 카르카손까지 추격한 뒤 자신이 파괴해서 황량해진 진군로에서 고군분투하며 남쪽으로 계속 이동했다.

11월 15일, 잉글랜드군은 에드워드를 비롯한 수뇌부가 프루유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평신도 형제로 추대되는 동안 4개의 큰 마을들을 파괴하고 주변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그러고 나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푸아 백작령을 가로지르러 했다. 11월 17일 푸아 백작 가스통이 찾아와서 잉글랜드인들의 자유 통행을 허용하고 식량을 제공하며, 부하들을 에드워드의 군대에 배속시키는 대가로 약탈을 면제받았다. 푸아 백작령을 통과하는 내내 비가 내려서 행군에 차질이 벌어지자, 병사들은 화풀이로 가스통에 속하지 않는 수많은 마을들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한편, 자크 드 부르봉과 장 드 아르마냐크는 에드워드를 쫓아가야 하는지를 놓고 논쟁했다. 장 드 아르마냐크는 툴루즈에서 계속 버티고 싶었지만, 자크 드 부르봉은 적을 추격해서 행군을 차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장은 자크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두 사람은 잉글랜드군을 아르마냐크 동부에 있는 세바 강에서 차단해 적지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만들려 했다.

11월 20일, 자크와 장이 파견한 선봉대가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과 맞붙었다가 패퇴했다. 에드워드는 적과 회전을 벌이기 위해 11월 22일에 프랑스군 가까이에 진을 쳤지만, 자크와 장은 수적으로 우세한 상황에서도 회전을 피하기로 하고 밤중에 철수했다. 에드워드는 가스코뉴로 계속 행군하여 11월 28일 가스코뉴에 도착했다. 많은 가스코뉴인들이 각자의 고향으로 떠났고, 나머지는 행군을 이어가서 12월 2일 겨울 숙영지가 있는 라 로셸에 도착했다. 에드워드와 수행원들은 12월 9일 보르도로 이동해 작전을 마무리했다.

흑태자 에드워드의 슈보시는 잉글랜드 왕국에 막대한 전리품을 안겼다. 한 기록에 따르면, 잉글랜드인들은 가능한 많은 금과 보석을 휴대하기 위해 약탈했던 은을 버렸고, 전리품을 운반하기 위해 1,000대의 수레를 동원했다고 한다. 500개의 마을이 파괴되었으며, 그중 다수는 민심을 수습하려는 장 2세에 의해 세금 면제를 받았다. 현재 학계에서는 총 40만 에퀴(약 6만 파운드)에 달하는 조세 부담 능력을 가진 거주지와 시설이 파괴되었다고 추정한다. 여기에 약탈을 모면한 프랑스 남부 전역의 도시들은 요새를 건설하거나 수리하는 데 수년에 걸쳐 많은 돈을 지출했다. 또한 에드워드의 슈보시에 소극적으로 대응한 프랑스 군부에 대한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장 2세는 친정을 단행해 잉글랜드군과 한 판 붙어서 쫓아내라는 압력에 시달렸다.

2.5.9. 푸아티에 전투

1356년 봄, 흑태자 에드워드는 지난해 그가 거둔 성과에 열광한 본국 의회가 보낸 군대와 말, 그리고 식량 및 물자를 수령했다. 그 후 8월 초에 6,000명의 잉글랜드-가스코뉴 군대와 함께 또다시 슈보시를 단행했다. 이들은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베르주라크, 오베르뉴, 리무쟁, 베리, 부르주를 거치며 시골 지역을 심하게 약탈하고 파괴했다. 8월 25~27일에 이수둔 공방전을 벌였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이후 에드워드는 브르타뉴에서 남하하는 그로스몬트의 헨리와 투르 인근에서 합류하려 했다. 그러나 헨리는 루아르 강변에 이르렀을 때 강의 수위가 높은 데다 프랑스군이 강에 있는 다리를 파괴하거나 요새화했기 때문에 좀처럼 건너지 못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브르타뉴로 돌아갔다.

그 사이, 에드워드 왕자는 투르에 도착한 뒤 헨리가 오기를 헛되이 기다렸다. 그러나 헨리가 좀처럼 오지 않자, 어쩔 수 없이 푸아티에를 거쳐 보르도로 귀환하기로 하고 남하했다. 8월 29일 로모랑탱 인근에서 일부 프랑스군 기사들이 잉글랜드 전위대와 접전을 벌인뒤 로모랑탱 성채로 후퇴했다. 그는 전우 존 챈더스를 로모랑탱 성채로 보내 항복을 권고했지만, 수비대가 이를 거부하자 8월 31일 공성전을 개시했다. 사흘간 지속된 공성전 도중에 친구 한 명이 전사하자, 에드워드는 분노해 성을 함락하고 수비대를 살육할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로모랑탱 요새는 9월 3일에 함락되었고, 에드워드는 수비대 전원을 처형했다.

한편, 장 2세는 브레퇴유 공방전을 마무리한 뒤 중무장한 기병대를 이끌고 프랑스 영토에 깊숙하게 침투한 흑태자 에드워드의 잉글랜드군을 물리치러 남하했다. 에드워드는 서둘러 보르도로 퇴각하려 했지만, 푸아티에 인근에서 프랑스 기병대에 거의 따라잡혔다. 그는 이대로 진군했다간 진군 도중에 프랑스 기병대의 급습을 받고 전군이 궤멸될 수 있음을 직감하고, 푸아티에 인근의 모페르튀스 언덕으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농성하기로 했다. 얼마 후 인근에 도착한 장 2세는 평원에 병사들을 배치하고 휴식을 취했다.

1356년 9월 18일, 추기경 엘리 드 탈레랑 페리고르가 장 2세의 군영에 찾아가 평화 협상을 제의하겠다고 요청해 승인을 얻어냈다. 에드워드는 협상에 기꺼이 응하기로 하고, 자신이 정복한 모든 도시와 성을 포기하고 포로를 모두 석방하며, 십만 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7년 동안 프랑스 왕을 대적하지 않겠다고 제안했다. 장 2세는 에드워드와 그의 기사 100명이 항복하고 자신의 포로가 되라고 답했고, 에드워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겼다. 이리하여 협상은 평화 협약 대신 에드워드의 군대에게 하루 간의 휴식을 주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에드워드 왕자는 존 챈더스와 가스코뉴 출신 영주이자 심복인 장 3세 드 그레일리의 조언에 따라 전투 대형을 편성했다. 그의 군대는 3개 사단으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 사단은 워릭 백작과 서퍽 백작이 지휘했고, 두번째 사단은 에드워드 본인이 지휘했으며, 3번째 사단은 솔즈베리 백작과 옥스퍼드 백작이 지휘했다. 에드워드는 첫 번째 열 앞과 자신의 위치로 이어지는 좁은 길의 양쪽에 울타리로 잘 보호되는 궁수들을 배치하고 300명의 무장병과 300명의 기마병으로 구성된 매복 부대를 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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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상황도. 붉은 색이 흑태자가 이끄는 잉글랜드군, 파란색이 장 2세가 이끄는 프랑스군

9월 19일 새벽, 프랑스군이 언덕을 향해 접근했고, 에드워드는 장병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짧게 연설했다. 프랑스군 선봉에 선 기병 300명이 좁은 길을 통과하여 영국군 진지를 공격하려고 시도했지만 궁수들에게 궤멸되었다. 그 뒤를 이어 독일 용병대와 샤를 왕자의 중보병대가 진격했지만, 전신에 무거운 갑옷을 입고 가시덤불을 헤치며 언덕을 오르느라 지칠대로 지쳤고, 말을 탄 궁수들과 이들을 보호하는 맨앳암즈로 구성된 잉글랜드군 분견대가 언덕을 돌아 내려와서 프랑스군 측면에 자리를 잡고 화살을 퍼부었다. 프랑스군 제2 부대가 동요하기 시작하자, 잉글랜드군 기사들은 인근에 뒀던 말을 타고 언덕 아래로 돌격했다.

샤를 왕자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적 기병대의 돌격에 제대로 맞서지 못하고 와해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장궁병들은 모든 화살을 소진했고, 잉글랜드 전사들의 피해가 누적되고 있었다. 만약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도를레앙이 3번째 부대를 이끌고 곧바로 진격했다면, 잉글랜드군은 그대로 무너졌을 것이다. 그러나 필리프는 제1선과 제2선 부대가 잇따라 와해되는 걸 보고 공포에 질린 나머지 퇴각했다. 최후방에 있는 제4선에 있던 프랑스 국왕 장 2세는 오를레앙 공작이 싸우지도 않고 도망치는 걸 보자 바로 잉글랜드군을 향해 진격했다. 그들은 화살이 다 떨어진 장궁병대의 견제 없이 잉글랜드의 전열에 도달했다. 이에 에드워드는 말에서 내려 싸우던 기사들을 다시 말에 태워 프랑스군 정면을 향해 돌격하게 했지만, 왕과 함께 진군한 프랑스군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맞서 싸웠다.

이때, 가스코뉴 기마병 60명과 궁수병 100명을 이끌고 잉글랜드군 후방에 있던 장 3세 드 그레일리는 부대원들을 이끌고 모페르튀스 언덕 뒷편을 지나서 한창 격전을 치르고 있던 프랑스군 후방으로 이동했다. 이윽고 고지대에 자리잡은 그는 성 조지의 깃발을 펼친 뒤 적을 향해 화살비를 퍼부어서 피해를 누적시킨 뒤 친히 기마병을 이끌고 돌격했다. 프랑스군은 가스코뉴 중기병의 후방 습격에 와해되었다. 이날 프랑스군 11,000명이 전사했으며, 장 2세와 막내아들 필리프를 비롯한 100명 가량의 백작, 남작, 기사 그리고 무장병 2,000명이 생포되었다. 잉글랜드군의 손실은 알려진 바 없으나 그렇게 크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 2세는 후퇴를 거부하고 끝까지 싸우다가 머리에 부상을 입은 채 막내아들 필리프와 함께 사로잡힌 뒤 흑태자 에드워드 앞으로 끌려왔다. 에드워드는 장 2세를 정중하게 영접하고 그가 갑옷을 벗는 것을 도왔으며, 장 2세와 포로로 잡힌 귀족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이때 그는 자신을 장 2세보다 아랫반열에 두고 옆에서 시종들었으며, 장 2세에게 위로하는 말을 많이 했다. 그는 루이 9세에 이어 적군의 포로가 된 프랑스의 국왕이 되었지만, 오히려 용감한 기사로서 당대 프랑스 민중의 추앙을 받았다.

2.6. 잉글랜드의 포로

장 2세와 막내 아들 필리프는 보르도로 끌려간 뒤 최고급 포로로서 우대를 받았다. 에드워드 3세는 이들을 잉글랜드로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흑태자 에드워드는 왕을 몸값을 받지 않고 석방하길 원했지만, 에드워드 3세가 강력히 명령하자 이에 따르기로 했다. 푸아티에 전투에 참여했던 가스코뉴 귀족들이 자기들의 몫을 받기 전에는 장 2세를 잉글랜드로 옮기는 것을 막겠다고 했기 때문에, 에드워드는 그들에게 지금까지 확보한 전리품 일부를 넘겨줘야 했다.

1357년 3월 23일, 흑태자 에드워드와 도팽 샤를 사이에 1년간 휴전 협약이 체결되었다. 4월 11일, 장 2세와 필리프 왕자는 여러 고급 귀족 포로들과 함께 잉글랜드로 이송되었다. 5월 4일 플리머스에 상륙한 장 2세는 5월 24일 런던에 입성했다. 이때 장 2세는 수려한 흰색 군마를 탔고, 흑태자 에드워드는 작은 검은 색 말을 탔다. 이후 장 2세는 런던의 초고급 거주지인 호텔 드 사부아에 거주했으며, 잉글랜드 내에서 이동의 자유를 누렸다. 그는 함께 포로로 잡힌 친척 또는 프랑스에서 자의로 온 이들로 구성된 나름의 궁정을 꾸렸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장남 도팽 샤를이 그를 대신해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에티엔 마르셀을 위시한 파리 부르주아들이 패전의 책임자 처벌을 강력히 주장하며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프랑스 각지는 무정부 상태로 전락했으며, 카를로스 2세의 추종자들은 카를로스 석방을 강하게 요구했다. 카를로스 2세의 동생 필리프는 랭커스터 공작 그로스몬트의 헨리가 이끄는 잉글랜드군과 함께 힘을 합쳐 노르망디 전역에서 프랑스군과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였다. 결국 샤를 왕자는 1357년 11월 9일 카를로스를 아를뢰 성에서 석방시키기로 했다.

카를로스 2세는 아미앵에 잠시 들렀다가 삼부회의 초대를 받아 파리로 갔다. 11월 30일, 파리에 도착한 그는 민중들에게 자신을 투옥시킨 자들을 규탄하는 연설을 감행했다. 이에 에티엔 마르셀이 이끄는 파리 시민들이 "나바라 국왕을 부당하게 대우한 자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했고, 샤를 왕자는 일단 카를로스와 협상하기로 했다. 카를로스는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자신의 영지에 가해진 모든 피해를 보상할 것, 자신과 추종자들을 사면할 것, 장 2세에 의해 처형된 동료들을 명에롭게 매장할 것 등을 요구했으며, 이와 더불어 노르망디 공국과 샹파뉴 백국을 자신에게 정식으로 넘기라고 촉구했다.

2.6.1. 제1차 런던 조약과 에티엔 마르셀의 난

프랑스에서 카를로스 2세의 위세가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장 2세는 이대로 가다가 프랑스 왕권이 카를로스 2세에게 넘어갈 것을 우려해 에드워드 3세에게 많은 것을 양보하더라도 협상을 서두르기로 했다. 1358년 1월, 그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제1차 런던 조약에 서명했다.
1. 잉글랜드 국왕은 필리프 2세 이래로 프랑스 왕국에게 잃었던 아키텐 공국의 본래 소유권을 전부 회복한다.
2. 프랑스 국왕은 400만 크라운의 몸값을 지불하는 대가로 프랑스 왕위를 잃지 않은 채 석방된다.

장 2세세와 에드워드 3세의 평화 협정이 이뤄졌다는 소식을 접한 카를로스 2세는 평화 협정이 성립되면 자신에게 좋을 게 없다고 여기고, 에티엔 마르셀에게 거사를 단행하자고 제안했다. 때마침 장 2세가 합의한 평화 협정에 프랑스 영토의 1/3에 해당하는 기옌, 생통주, 푸아투, 리무쟁, 쿠에르시, 페리고르, 루에르그 및 비고르가 잉글랜드에 넘어간다는 내용이 있는 것을 확인한 파리 시민들이 항의 시위를 벌이자, 마르셀은 이를 이용해 거사를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2월 22일, 마르셀은 마침내 민중들을 선동해 폭동을 일으키고 파리에 수감된 죄수들을 풀어주고 도팽의 군대에 맞섰다. 이내 3,000명에 달하는 무리가 집결했고, 일전에 장 2세와 에드워드 3세간의 합의안을 도출하고 파리에 보고했던 르노 다시(Regnault d'Acy)는 이들에게 체포된 뒤 목이 베어진 후 장대에 꽂혔다.

이후 마르셀은 군중을 이끌고 샤를 도팽이 있던 팔레 드 라 시테 궁전으로 쳐들어가 샤를 도팽을 따르던 장병들을 모조리 죽이고 샤를이 있던 방에 난입했다. 장 르 벨의 연대기에 따르면, 에티엔 마르셀은 샤를에게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전하, 이제 보시는 일로 인해 놀라지 마십시오. 이 일들은 우리가 정한 것이요, 그 일이 이뤄지는 것은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그 직후, 샹파뉴 원수 장 드 콩플랑과 노르망디 원수 로베르 드 클레르몽이 샤를 도팽 앞에서 피살당했고, 그들의 피가 샤를 도팽의 옷에 묻었다. 마르셀은 샤를에게 폭도들이 입고 있던 빨간색과 파란색 후드를 착용하라고 강요했고, 자신은 도팽의 모자를 썼다. 그러면서 1357년 대조례를 갱신하라고 요구했고, 샤를 도팽은 공포에 질린 채 받아들였다. 그 후 플레이스 드 글레브(Place de Grève) 광장으로 가서 '왕국의 반역자'를 제거하는 데 적극적으로 협력한 군중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방 정부에 서신을 보냈지만, 오직 아미앵과 아라스만이 지지를 표했다.

이제 샤를 도팽은 포로 신세로 전락했고, 에티엔 마르셀이 주도하는 삼부회가 행정과 재정을 주관했다. 여기에 장 2세와 에드워드 3세의 평화 협약은 무효로 간주되었다. 이 새로운 조례를 비준하려면 귀족들의 동의가 필요했는데, 그들은 파리에서 모이기를 거부하고 상리스에서 만나기로 했다. 샤를 도팽은 이들과 회담을 가진 후 파리로 돌아올 테니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마르셀은 10명의 부르주아를 대표단으로 선임하고 그들의 감시를 받는 조건하에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파리에서 나온 샤를 도팽은 4월 9일 프로뱅에서 열린 상파뉴 삼부회에 참석해 그곳 귀족들의 지원에 힘입어 자신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던 10명의 대표단을 구금했다. 이후 샤를을 추종하는 기사단은 몽뜨호와 모 요새를 점거했다.

샤를에게 속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마르셀은 카를로스에게 속히 파리로 와달라고 요청했지만, 카를로스는 파리로 가려던 중에 병에 걸려 몸져누웠다. 그 사이에 샤를은 프랑스 동부에서 병력을 규합해 반격에 착수했다. 이후 파리 주변의 영토는 카를로스가 파견한 노르망디군과 샤를 왕자가 보낸 선봉대에 의해 약탈당했다. 마르셀은 카를로스에게 샤를 왕자와 협상해달라고 간청했지만 묵살당했다. 1358년 5월, 그동안 가혹한 수탈에 시달리다가 샤를 도팽이 부과한 새 세금에 격분한 프랑스 북동부의 농민들이 대대적으로 봉기해 귀족들을 집단 학살했다.( 자크리의 난) 마르셀은 자크리들을 지지한다고 선언했고, 프랑스 북부 기사들은 카를로스에게 자크리 토벌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그들의 요청에 따르기로 하고, 1358년 6월 10일 멜루 전투에서 자크리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이후 파리로 들어와서 민중을 소집한 뒤 자신을 "파리의 대장"으로 선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자크리와 손잡았던 에티엔 마르셀을 토벌하지 않고 손잡는 것에 반감을 품고 샤를 도팽 쪽으로 등을 돌렸다.

1358년 6월 29일, 마르셀은 카를로스 2세 진영에서 이탈한 기사들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잉글랜드 궁수병들을 용병으로 고용했다. 그러나 파리를 방어하는 잉글랜드 용병들은 파리 시민들의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파리 근교로 진군한 샤를 도팽의 군대와 카를로스 2세와 마르셀의 군대가 수차례 소규모 접전을 치르던 7월 21일, 술집에서 벌어진 사소한 싸움이 시가전으로 변질되면서 34명의 잉글랜드 궁수들이 학살당했다. 다음날, 마르셀과 로베르 르 콕, 카를로스 2세는 시민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플레이스 드 글레브에 군중을 집결시켰다. 군중들이 잉글랜드인들을 몰아내라고 요구하고 있을 때, 동료를 살해한 파리 시민들에게 분노한 용병대가 매복하고 있다가 습격을 가하면서 시가전이 또 벌어졌다.

이로 인해 600~700명이 피살당했고, 파리 시민들은 카를로스가 용병들에게 자신들을 습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의심했다. 여기에 카를로스의 형제인 필리프가 10,000명의 잉글랜드군을 이끌고 프랑스에 상륙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그들은 도시가 잉글랜드인들에게 철저하게 약탈당할 것을 우려했다. 한편, 마르셀은 나바르군의 입성을 준비하는 한편, 7월 30일부터 31일까지의 밤에 샤를 도팽을 동조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의 집을 표시했다. 그러나 이 행위는 곧 발각되었고, 에티엔이 잉글랜드군에 파리를 넘겨주려 한다는 의혹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부르주아들 역시 마르셀을 더 이상 따랐다가는 자신들의 안위마저 위태로워진다고 확신하고, 에티엔을 제거하기로 결의했다.

1358년 7월 31일, 마르셀은 군중의 습격으로 피살당했다. 이후 친 잉글랜드, 친 나바라 성향의 인사들이 파리에서 모조리 학살당했고, 카를로스 2세는 파리 외곽의 생드니 수도원에 숨었다가 노르망디로 도주했다. 샤를 도팽은 8월 2일에 파리에 입성한 뒤 마르셀에게 적극적으로 가담한 주동자 15명만 처형하고 파리 시민들을 사면했으며, 반역죄로 처형된 이들의 친척들을 약탈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카를로스 2세는 에드워드 3세에게 서신을 보내 프랑스를 침공해 샤를 왕자를 격파하는 것을 도와준다면 그를 프랑스의 국왕으로 인정하고 노르망디, 피카르디, 샹파뉴, 브리의 영주로서 충성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일전에 카를로스 2세에게 연이어 속았던 것에 반감을 품고 있었고 푸아티에 전투에서 생포된 뒤 런던으로 끌려간 장 2세와 평화 협정을 맺어뒀던 에드워드 3세는 이에 호응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이를 기회로 삼아 장 2세를 압박하기로 마음먹었다.

2.6.2. 제2차 런던 조약과 브레티니 조약

1359년 3월, 장 2세는 이동 제한을 더욱 엄격히 적용하면서 압력을 행사한 에드워드 3세의 뜻에 따라 제2차 런던 조약을 체결헀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아키텐 공국의 이전 소유물에 더해 메인, 투렌, 앙주 및 노르망디도 에드워드 3세와 후계자들에게 넘어간다.
2. 브르타뉴 공작으로는 샤를 드 블루아가 아니라 장 드 몽포르의 아들 장이 선임되며, 잉글랜드 국왕은 브르타뉴 공작으로부터 경의를 받는다.
3. 장 2세는 인질들을 남긴 채 프랑스로 귀환한 뒤 400만 크라운의 몸값을 더 짧은 기한 내에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삼부회는 협약 내용이 부당하다고 여기고 샤를 왕자에게 전쟁을 지속하라고 촉구했고, 샤를 왕자 역시 받아들였다. 샤를 왕자와 삼부회의 입장을 전해들은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를 재차 침공하기로 마음먹었다. 1359년 늦여름, 4,000명의 맨앳암즈, 700명의 대륙 용병, 5,000명의 장궁병을 칼레에 집결시킨 그는 랭스로 진격해 5주 동안 랭스를 포위했지만 방어 태세가 워낙 굳건해서 함락이 어려워지자 1360년 봄 포위를 해제하고 프랑스의 수도인 파리로 진격했다. 파리 교외는 철저하게 약탈당했지만, 샤를 왕자와 수비대는 파리 성에서 끝까지 버텼다. 천혜의 요새인 파리 성을 무력으로 공략하는 건 무리었고, 프랑스인들이 청야 전술을 구사하면서 먹을 것을 구할 길이 막막해지고 곳곳에서 적군이 튀어나와 치고빠지는 전술을 구사했다. 급기야 전염병 마저 창궐해 많은 이들이 죽자, 에드워드는 다른 곳을 목표로 삼기로 했다.

1360년 4월 13일, 에드워드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프랑스 대성당이 있는 도시인 샤르트르에 도착했다. 클리니 수도원장 앙드루앵 드 라 로슈가 이끄는 수비대는 요새 뒤에 숨어서 농성했다. 잉글랜드군은 이 요새를 포위해 공성 준비에 착수했다. 그런데 그날 밤,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천둥과 우박을 동반한 맹렬한 폭풍우가 잉글랜드 진영을 강타했다. 우박이 사람과 짐승을 죽일 만큼 컸고 수없이 떨어졌기에 가장 용감한 자도 겁을 먹었다.

조슈아 반스의 <가장 성공한 군주 에드워드 3세>에 따르면, 이날 6000마리의 말과 거의 1000명의 병사가 우박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다른 사료에는 수치가 확인되지 않기에 신빙성은 의심되지만, 고위급 기사인 기 드 뷰챔프 2세가 우박에 맞아 3주간 고통받다가 사망했다는 것을 볼 때 피해가 심히 큰 건 사실로 여겨진다. 에드워드는 하느님이 프랑스 왕국과 완전한 화해를 하지 않는 것에 분노해 징벌을 내렸다고 여기고, 샤르트르에 있는 성모 교회 쪽으로 몸을 돌려 땅바닥에 엎드리며 성모 마리아에게 평화 협약을 맺겠다고 맹세했다고 전해진다. 다음날인 4월 14일, 앙드루앵이 잉글랜드 진영에 찾아와 평화 협약을 맺자고 요청하자, 에드워드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샤르트르 공방전을 그만두고 물러났다.

한편, 장 2세는 제2차 런던 조약이 삼부회에게 거부된 뒤 경비병 69명의 감시 하에 가택 연금을 당했고, 서머튼으로 옮겨졌다가 1360년 봄에 런던 탑에 감금되었다. 그는 어떻게든 프랑스로 돌아가고 싶었기에, 상스 대주교 기욤 2세 드 멜룬에게 조속히 에드워드 3세와 협상을 완료하고 샤를 왕자에게 더 이상 지체하지 말 것을 촉구하게 했다. 이후 양국이 평화 협상을 벌인 끝에, 1360년 10월 24일 브레티니 조약이 체결되었다. 협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국왕 직위를 주장하는 것을 그만둔다. 그 대신 기옌, 가스코뉴, 아키텐, 아르마냐크 등지의 영주권을 인정받으며, 프랑스 국왕은 이에 대해 명목상의 주권만 가진다.
2. 제2차 런던 조약에서 잉글랜드 왕국이 가지기로 했던 노르망디, 투렌, 앙주, 메인, 브르타뉴, 플란데런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한다.
3. 장 2세는 300만 에쿠스를 몸값으로 지불하기로 약조하고 석방하되, 두 아들인 앙주 공작 루이 1세, 베리 공작 장, 그리고 여러 명의 왕자와 귀족, 파리 주민들을 인질로 보낸다.

2.7. 왕의 귀환

에드워드 3세는 장 2세를 해방시키는 조건으로 60만 크라운의 보증금을 즉시 지불하고, 1년 이내에 40만 크라운을 추가로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샤를 도팽은 프랑스 국민들의 자발적인 지원을 받았지만 겨우 40만 크라운만 확보할 수 있었다. 이에 장 2세는 딸 이자벨을 밀라노 공국의 통치자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와 결혼시키고, 그 대가로 60만 크라운의 지참금을 받아낸 뒤 이를 잉글랜드에 넘기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합의를 이룬 그는 귀국길에 올랐고, 1360년 12월 5일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파리로 돌아왔다. 한편,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2세는 칼레에서 장 2세와 만나 장 2세에게 용서를 구하고 추종자 300명과 함께 사면받았다. 그 대가로 프랑스 왕실에 대한 충성 서약을 재차 맺었고, 프랑스에서 약탈을 자행하는 잉글랜드-나바라 용병대를 토벌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2.7.1. 화폐 및 재정 개혁

장 2세는 런던에서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프랑스 화폐를 개혁할 필요성을 절감했고, 귀국하자마자 프랑화를 도입했다. 이 화폐는 매우 높은 금 함량(순금 3.88g)을 함유한 통화로 1 파운드 의 가치가 있었다. 화폐에는 말을 타고 돌진하는 왕의 이미지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이 신 화폐를 도입함으로써 14세기 전반에 걸쳐 수많은 평가 절하로 인해 가치가 유명무실해진 기존의 에퀴화를 대체하길 희망했다. '프랑'이라는 이름의 선택은 프랑스 왕국에 대한 애국심을 대중에 각인하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프랑화를 창설한 뒤, 장 2세는 공무원 수를 줄이고 인기가 별로 없던 금융계 직원들을 해고했으며, 샤를 도팽의 친척 대부분을 내보냈다. 샤를 도팽은 노르망디로 보내져서 그곳을 관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왕실 추밀원은 재정을 충당해 장 2세의 몸값을 마련하는 걸 목표로 삼고 모든 화폐 교환에 부과되는 5%의 세금을 설정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의 무역, 농업, 상업은 심각한 불이익을 받았고, 경제 활동이 둔화되었다.

2.7.2. 자유 용병대 토벌 시도

1360년 10월 브레티니 조약으로 잉글랜드와 프랑스간의 전쟁이 종식되자, 프랑스와 잉글랜드 양쪽에 고용되었던 용병대는 급료를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신 그랑드 콩파니(Grandes Compagnies)라고 불리는 대군세를 이루었는데, 그 숫자는 15,000명에 달했다. 이들은 프랑스 동부 지역에서 남동쪽으로 이동하며 심각한 약탈을 자행했다. 이 골치아픈 용병대를 내버려두면 프랑스가 재기 불능이 될 거라 여기고 어떻게든 토벌하기로 마음먹었다.

1361년 말, 용병대가 브리네 요새를 점령하고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 리옹의 세네샬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장 2세 드 멜룬은 프랑스 왕실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장 2세는 퐁티외와 라마르슈 백작이며 프랑스 무관장인 자크 1세 드 부르봉에게 영주들의 군대를 소집해 장 2세 드 멜룬과 힘을 합치고, 부르고뉴에서 파견된 2번째 군대가 합류할 때까지 기다린 뒤 용병대를 토벌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1362년 4월 6일에 벌어진 브리네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자유 용병대에게 크게 패했다.

브리네 전투 패배 소식은 리옹에 공황을 퍼트렸다. 하지만 용병대는 고위급 장성들을 풀어주는 대가로 챙긴 막대한 몸값에 만족해 리옹을 공격하지 않고, 일부는 오베르뉴, 다른 일부는 북쪽의 부르고뉴로 이동해 성벽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농촌과 소도시들을 약탈했다. 이후 장 2세 드 멜룬은 용병대를 다른 곳으로 보낼 방안을 모색한 끝에 1362년 7월 23일 카스티야의 왕위 주장자인 라스타마라의 엔리케와 협상한 끝에 용병들을 카스티야 내전에 참전시켜 새 일자리를 마련해준다는 내용의 클레르몽 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용병들은 엔리케를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지만, 마침 피에레 인근에서 아르마냐크 백작 장 1세 다르마냐크와 푸아 백작 가스통 3세 페부스간의 전쟁이 벌어지자, 많은 용병이 그쪽으로 몰려들었다. 얼마 후 가스통 3세가 대승을 거두면서 전쟁이 종결되자, 대부분의 용병들이 랑그독으로 다시 돌아와서 또다시 약탈을 자행했다. 결국 클레르몽 조약은 용병 도적떼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했다.

2.7.3. 부르고뉴 계승 전쟁

장 2세는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전국을 여러 공국으로 나눈 뒤 아들들에게 관리를 맡기기로 했다. 샤를 도팽은 노르망디 공국을 맡았고, 차남 루이는 메인과 앙주를 맡았고, 장은 베리를 맡았다. 특히 푸아티에 전투에서 자신의 곁에서 함께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던 막내아들 필리프를 각별히 총애했던 그는 1361년 11월 21일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1세가 자손을 두지 못한 채 요절하면서 부르고뉴의 카페 가문이 끊기자, 부르고뉴 전임 공작 로베르 2세의 둘째 딸 잔의 아들인 장 2세 본인이 부르고뉴 공작위를 물려받고, 필리프를 부르고뉴 공작 후계자로 지명했다.

카를로스 2세는 이에 반발해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2세의 딸 마르그리트[6]의 손자인 점을 이용해 자신이 부르고뉴 공국을 물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를로스는 교황 인노첸시오 6세에게 자신이 부르고뉴 공작이 되는 것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자 1361년 11월 나바라 왕국으로 가서 그곳의 장정들을 소집해 전쟁을 준비했다.

1362년 5월 추종자들을 부추겨 노르망디에서 봉기를 일으키게 했으나 실패하자, 1363년 나바라 해군을 노르망디로 파견해 그곳을 장악하고 나바라 육군을 형제 루이에게 맡겨 가스코뉴인들과 힘을 합쳐 부르고뉴를 공략하게 했다. 1364년 1월, 카를로스는 아헨에서 흑태자 에드워드와 만나 잉글랜드 왕국이 보유하고 있는 아키텐 공국에 나바라 왕국군이 통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해 승낙을 얻어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사전에 노출되었고, 1364년 5월 16일 코르슈렐 전투에서 나바라 왕국군과 잉글랜드 용병 연합군은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참패했다.

2.8. 포로로 돌아간 왕

1363년, 장 2세는 프랑스 왕국이 잉글랜드와의 전쟁으로 파괴되고 자유 용병대의 횡포로 인해 세금이 제대로 거둬지지 않으면서 몸값 마련이 곤란해지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아버지 필리프 6세의 전 고문이었던 교황 인노첸시오 6세를 만나러 아비뇽으로 여행했다. 그러나 그가 도착했을 때 인노첸시오 6세는 이미 죽었고, 새 교황 우르바노 5세는 그의 몸값 지불을 도와주는 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장 2세는 방향을 돌려 나폴리 여왕 조반나 2세와 막내 아들 필리프와의 결혼을 성사시키고 이를 통해 지참금을 받아내려 했지만, 조반나 2세가 마요르카 국왕 하이메 4세와 결혼하기로 하면서 무산되었다.

장 2세는 어떻게든 교황을 설득할 방안을 모색하던 중 우르바노 5세가 오스만 술탄국의 침략으로 위기에 몰린 키프로스 왕국을 구원할 십자군을 모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 십자군을 솔선해서 이끔으로써 명예를 회복하고, 십자군 활동을 통해 얻은 자금으로 몸값을 마련하려 했다. 1363년 3월 30일, 우르바노 5세는 장 2세에게 아우트레머(Outremer)[7] 십자가를 수여했다. 그러나 교황은 십자군을 강행할 재정 마련에 곤경을 겪다가 결국 계획을 취소했다.

그러던 중, 장 2세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잉글랜드에 인질로 가 있던 차남 루이가 아내 마리 드 블루아와 함께 불로뉴에 있는 노트르담 대성당에 순례하는 것을 잉글랜드 왕실로부터 "반드시 런던으로 돌아온다"는 조건하에 허락받은 뒤, 1363년 7월 1일 불로뉴에 도착하자마자 잉글랜드 호위대를 제압한 후 아내 마리와 함께 신성 로마 제국과의 국경 지대에 있는 기즈성으로 달아난 것이다. 장 2세는 아들에게 당장 런던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지만, 루이는 이를 무시하고 여차하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외삼촌인 카를 4세의 궁정에 피신하려 했다.

몸값 마련은 가망이 없어지고 인질이었던 루이가 도망쳐버리면서 기사도를 준수하는 국왕으로서의 긍지에 상처를 입은 데다, 이로 인해 전쟁이 또다시 발발하면 프랑스가 파멸하고 말 것이라고 확신한 장 2세는 자신을 희생하기로 마음먹었다. 1363년 12월, 그는 아미앵에 삼부회를 소집한 뒤 왕국의 파멸을 막기 위해 장남 샤를을 프랑스의 섭정이자 총독으로 선임해 통치를 맡기고 잉글랜드에 가서 포로로 지내겠다고 선언했다. 고문들이 격렬하게 반대했지만, 그는 이렇게 말하며 결정을 고수했다.
"만약 선의가 지상에서 금지된다면, 그녀는 왕들의 마음 속에서 피난처를 찾아야 한다."

그 후 장 2세는 1364년 1월 잉글랜드 도버 항에 상륙한 뒤 앨런 벅스헐, 리처드 펨브릿지 등 여러 고위 귀족들의 영접을 받고 에팅엄과 사보이 궁으로 안내되었고, 1364년 1월 런던에서 잉글랜드 시민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으며, 웨스트민스터 궁에서 에드워드 3세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잉글랜드에 도착한 지 몇 달 후 알려지지 않은 질병에 걸렸고, 1364년 4월 8일 사보이 궁전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프랑스로 반환되었고, 5월 8일 생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보헤미아의 보나(1315 ~ 1349): 보헤미아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의 딸.
    • 블랑슈(1336): 요절.
    • 샤를 5세(1338 ~ 1380): 프랑스 국왕.
    • 카트린(1338): 요절.
    • 루이(1339 ~ 1384): 앙주 공작.
    • (1340 ~ 1416): 베리 공작.
    • 필리프(1342 ~ 1404): 부르고뉴 공작.
    • 잔(1343 ~ 1373):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2세의 왕비.
    • 마리(1344 ~ 1404): 바르 공작 로베르 1세의 부인.
    • 아녜스(1345 ~ 1349): 요절.
    • 마르그리트(1347 ~ 1352): 요절.
    • 이자벨(1348 ~ 1372): 밀라노 공작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의 부인.
  • 오베르뉴의 잔(1326 ~ 1360): 오베르뉴 백작 기욤 12세의 딸.
    • 블랑슈(1350): 요절.
    • 카트린(1352): 요절.
    • 성명 미상의 아들(1354): 요절.

14~15세기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 토머스 월싱햄은 장 2세가 잉글랜드에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사생아 장을 낳았다고 기술했지만, 진위는 불분명하다.

4. 여담

카페 왕조 후기의 장 1세는 태어난 지 5일 만에 죽었고, 장 2세는 위에서 보듯 암울한 재위기간을 보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다시는 '장'이란 왕이 없었다. 공교롭게도 잉글랜드/영국의 존(=장) 왕도 역시 암울하여, 영국에서도 다시는 '존'이라는 왕은 없었다. 프랑스인이 얼마나 '장-이란 이름이 왕에게 재수없다고 판단했는지, 1818년 스웨덴의 왕이 된 프랑스 장군 출신 장-밥티스트 베르나도트도, 칼 14세 요한이라는 어색한 이름을 써 가면서까지 '장'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다. 스웨덴 왕사로 보면 요한이라는 대표 왕명을 가진 왕은 3명이 배출되었어서, 13명이나 배출된 칼(프랑스어 샤를)이라는 대표왕명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본인의 퍼스트네임인 장(=요한)을 일부러 뒤로 빼면서 본명에는 아예 없던 칼(=샤를)을 앞에 내세울 정도로, 요한이라는 왕명이 전례가 없거나 스웨덴 사회에 어색하게 받아들여지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8]


[1] 프랑스 원수 로베르 8세 베르트랑 드 브릭퀘벡의 아들 [2] 1303 ~ 1373, 스웨덴 우플란드의 총독 비르겔 페르손과 스웨덴 벨보 왕조의 방계 혈족인 잉그보르그 벵츠도터의 딸. 1391년 10월 7일 교황 보니파시오 9세에 의해 성녀 시성되었다. [3]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블랑슈는 당대의 가장 아름다운 공주였다고 하며, '아름다운 지혜( Belle Sagesse)'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4] 조프루아는 아이머리의 배신으로 인해 잉글랜드군에 생포된 뒤 런던에 끌려가 18개월간 억류되었기 때문에 그에게 깊은 원한을 품었다. 자세한 내용은 칼레 전투 참고. [5] 일설에 따르면, 벤틀리는 전투 초반에 장 드 엥거스트의 돌격에 제대로 맞서지 않고 도주한 잉글랜드 장궁병 30명을 집단 처형했다고 한다. [6] 루이 10세의 첫번째 왕비이자 호아나 2세의 모친으로, 불륜을 저질러 감금되었다. [7] 제1차 십자군 원정 이후 창설된 동방의 십자군 국가들을 총칭하는 용어 [8] 다만 스웨덴은 1598~1599년 벌어진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 시기스문드 폐위 전쟁 끝에 칼 공작이 승리를 거두면서 시기스문드의 아버지 요한 3세 가계의 스웨덴 왕위 계승권이 박탈된 이래로 요한이라는 이름은 왕자에게조차 붙이지 않았다. 대부분 구스타브(Gustav}와 칼(Karl)을 돌려가면서 썼고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도 스웨덴인에게 좀 더 친밀감을 심어주기 위하여 '칼'이라는 이름을 선택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