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3 16:11:51

장 2세 드 멜룬

성명 장 2세 드 멜룬
Jean II de Melun
생몰년도 1325년 ~ 1382년
출생지 프랑스 왕국 멜룬
사망지 프랑스 왕국 탕카르빌
아버지 장 1세 드 멜룬
어머니 이자벨 드 탕카르빌
형제 아담 드 멜룬, 기욤 드 멜룬, 시몽 드 멜룬, 로베르 드 멜룬
아내 잔 크레스핀
아들 장 3세, 기욤 4세 드 멜룬, 마르그리트 드 멜룬
직위 멜룬 자작, 탕카르빌 백작, 프랑스 대의원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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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 시기 잉글랜드 왕국에 맞섰다.

2. 생애

1325년경 멜룬 자작이자 탕카르빌 백작인 장 1세 드 탕카르빌과 로베르 드 탕카르빌 백작의 외동딸이자 상속년인 잔 드 탕카르빌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아담 드 멜룬[1], 기욤 드 멜룬[2], 시몽 드 멜룬[3], 로베르 드 멜룬[4]이 있었다.

일찍이 튜튼 기사단 고대 프로이센 정복에 참여했고, 스페인으로 가서 레콩키스타에 참여했다. 백년전쟁이 발발했을 때 앙구무아와 노르망디에서 잉글랜드군과 맞섰고, 1346년 1차 캉 공방전에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에 맞섰다가 생포되었다.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된 뒤 100,000 아넬(Agnel)을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에게 지불하는 대가로 프랑스 대의원이자 프랑스 대원수로 선임되었다.

1350년 즉위한 프랑스 국왕 장 2세의 주요 조언자였으며, 장 2세의 막내아들인 용담공 필리프와 플란데런 백국의 상속녀인 마르그리트 3세 드 플란데런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 참전했다가 생포되었고, 1358년에 풀려났다. 1360년 브레티니 평화 협약 체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1361년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1세가 사망했을 때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의 지시에 따라 그곳으로 파견되어 프랑스 왕실의 통제권을 확보했다.

1362년 프랑스 각지를 약탈하는 용병들을 토벌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자크 1세 드 부르봉과 함께 브리네에서 군대를 집결했지만, 그해 4월 6일 용병부대의 예상치 못한 기습 공격으로 발발한 브리네 전투에서 참패를 면치 못하고 생포되었다. 이후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된 그는 그해 7월 23일 카스티야의 왕위 주장자인 트라스타마라의 엔리케와 협상한 끝에 용병들을 카스티야 내전에 참전시켜 새 일자리를 마련해준다는 내용의 클레르몽 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샹파뉴, 부르고뉴, 랑그독의 세네샬(Senechal: 지방관)을 역임했다.

1375년 상스 주민들이 상스 대주교 기욤 드 멜룬이 자신의 형인 장 2세 드 멜룬이 '물과 숲의 주인'을 역임하고 있는 걸 이용해, 자신들이 방목, 죽은 가지 수집, 숯, 이삭 줍기 등 숲을 이용할 권리를 전통적으로 인정받았던 걸 무시하고 삼림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그들을 체포해 쇠사슬에 묶었다고 고발했다. 파리 의회는 이 사건을 조사한 뒤 그해 8월 31일 상스 주민들에게 삼림 이용권을 반환하며, 상스 대주교의 세속적 권리를 압수하며, 장 2세 드 멜룬의 '물과 숲의 주인'으로서의 지위를 철회했다. 이 일로 인해 정치에서 배제된 그는 1382년 탕카르빌에서 사망했다.

3. 가족

  • 잔 크레스핀(1295 ~ 1327)
    • 장 3세 드 멜룬: 탕카르빌 백작, 멜룬자작, 몽트뢰유-벨레이 영주, 프랑스 대시종(1382년)
    • 기욤 4세 드 멜룬: 탕카르빌 백작 국왕의 첫 시종, 프랑스의 대 술잔 관리관.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전사함.
    • 마르그리트 드 멜룬: 프랑스 무관장 로베르 드 파인즈의 아내.


[1] ? ~ 1362, 프랑스 국왕 장 2세 샤를 5세의 첫번째 시종장 [2] ? ~ 1378, 상스 대주교 [3] ? ~ ?, 생테티엔 드 샹 대성당의 참사회원 [4] 샤트노이 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