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17 22:31:57

호담공 필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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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뉴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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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701a0><colcolor=#ffffff> 부르고뉴의 공작
필리프 2세
Philippe II de Bourgogne
파일:호담공 필리프.jpg
출생 1342년 1월 17일
프랑스 왕국 퐁투아즈
사망 1404년 4월 27일(향년 62세)
에노 백국 할 시
재위 부르고뉴 공국의 공작
1363년 9월 6일 ~ 1404년 4월 27일
자녀 용맹공 장, 마르그리트, 카트린, 본, 앙투안, 마리, 필리프
배우자 플란데런의 마르그리트 (1367년 결혼)
아버지 장 2세
어머니 보헤미아의 보나
형제 샤를 5세, 루이, , 잔, 마리, 이자벨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부르고뉴 공국 계승자2.3. 부르고뉴 공작
2.3.1. 자유 용병대와의 전쟁2.3.2. 마르그리트와의 결혼2.3.3. 샤를 5세의 재정복 참여2.3.4. 샤를 6세의 섭정단2.3.5. 플란데런 전쟁2.3.6. 플란데런 백작으로서의 치세2.3.7. 영토 확장2.3.8. 일시적인 권력 상실과 재장악2.3.9. 니코폴리스 십자군2.3.10. 베네딕토 13세와의 갈등2.3.11. 오를레앙 공작과의 대립
2.4. 열성적인 후원자2.5. 사망
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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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국왕 장 2세의 넷째 아들이자 발루아 왕조의 초대 부르고뉴 공작. 부르고뉴에서 아르투아, 레텔, 메헬렌, 샬랭, 샹파뉴, 느베르, 동지 등지와 저지대 국가까지 세력을 뻗치며 프랑스 제일의 권력자가 된 인물이다.

2. 생애

2.1. 초년기

1342년 1월 17일, 프랑스 왕국 퐁투아즈에서 노르망디 공작이자 왕위 후계자인 장 왕자와 보헤미아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의 딸인 보헤미아의 보나의 넷째 아들로 출생했다. 어린 시절 궁정에서 자란 그는 형제자매들과 함께 할아버지 필리프 6세와 할머니 나바라의 블랑슈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정작 장 왕자는 자식들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가 아들들에게 보낸 서신은 단 하나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 대신, 선량한 성격이었던 어머니 보나가 자식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다. 시인 기욤 드 마쇼에 따르면 보나 왕비는 자녀 양육이 자신의 삶의 소명이라고 여기고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여기에 쏟아부었다고 한다. 그는 궁정에서 또래의 아이들과 함께 친하게 지내면서 라틴어 문법을 가르쳤던 실베스트르 드 라 세르벨 등 프랑스의 뛰어난 학자들로부터 고급 교육을 받았다.

1349년 어머니 보나와 친할머니 블랑슈가 중세 흑사병에 걸려 나란히 사망했다. 할아버지 필리프 6세는 1350년에 사망했고, 아버지 장 왕자가 프랑스 국왕 장 2세로 등극했다. 장 2세는 1350년 9월 26일 별 기사단을 설립했는데, 필리프는 형제 과 함께 이 기사단에 포함되었다. 그는 이후로 오랫동안 별다른 영지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땅이 없는(sans terre)' 왕자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356년 9월 19일, 필리프는 형제들과 함께 푸아티에 전투에 참전했다. 다른 형제들이 달아난 것과는 달리, 당시 14살이었던 그는 아버지의 곁에 서서 끝까지 항전했다.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전투 도중에 아버지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아버지, 오른쪽으로 가세요! 아버지, 왼쪽으로 가세요!"

그러나 전투는 참패로 끝났고, 그는 아버지와 함께 잉글랜드군에 사로잡혔다. 이때 어린나이에도 아버지와 함께 최선을 다해 싸운 것 때문에 '대담한 자( le Hardi)' 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후 아버지와 함께 보르도로 끌려가서 6개월간 머물렀다가 잉글랜드로 이송되었다. 1357년 4월 11일 런던에 도착해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환대를 받고 왕궁에 머물렀다. 그는 아버지의 두터운 사랑을 받았고, 아버지로부터 매 사냥에 대한 열정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와 프랑스 왕국간의 협상이 잘 풀리지 않자 구금 환경은 점점 덜 편안해졌다. 1359년 1월, 장 2세는 69명의 경비를 받는 가운데 가택 연금을 당했다. 6개월 후, 장 2세는 서머튼 요새로 옮겨졌고 1360년 봄에 런던 탑에 갇혔다. 그러다가 1360년 5월 8일, 브레티니 협약이 체결되면서 잉글랜드와 프랑스간의 전쟁이 종식되었고, 장 2세와 필리프는 루이 왕자와 장 왕자가 잉글랜드의 인질이 되는 대가로 조국으로 귀환했다. 그 후 장 2세는 필리프를 투렌 공작에 선임했다.

2.2. 부르고뉴 공국 계승자

1361년 11월,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1세가 승마 사고로 크게 다쳤고, 그해 11월 21일 자신이 태어났던 성인 루브르앙플렌 성에서 사망했다. 장 2세는 자신이 부르고뉴 전임 공작 로베르 2세의 딸 잔의 아들인 점을 내세워 부르고뉴를 왕실의 직할지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그해 12월 23일, 장 2세는 부르고뉴 공국의 수도인 디종에 입성했고, 생베니뉴 성당에서 도시의 특권을 유지하겠다고 맹세했다. 이후 12월 28일 부르고뉴 주 회의에서 부르고뉴 지방 귀족들의 모든 요청에 응하고, 그들의 특권을 확인해서 그들을 안심시키려 했다. 이후 피에르포르의 영주인 앙리 드 바르를 부르고뉴 총독으로 선임하고, 공국의 방어를 탕카르빌 백작 장 2세 드 멜룬에게 맡기고 파리로 귀환했다.

그러나 부르고뉴 주민들은 공국이 이대로 왕국의 직할지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집회를 열고 "공국은 왕의 영토에 속하는 속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 공국은 공국으로 남아야 한다. 부르고뉴를 왕국과 혼동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파리에 전달했다. 여기에 부르고뉴를 비롯한 프랑스 각지를 약탈하는 자유 용병대를 토벌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장 2세 드 멜룬이 1362년 4월 6일 브리네 전투에서 참패를 면치 못하고 생포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이후에도 용병대를 토벌하는 데 필요한 군자금 지불을 부르고뉴 의회에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 장 2세는 계획을 변경하기로 했다. 1363년 6월 27일, 장 2세는 필리프를 부르고뉴 중장에 선임해 장 2세 드 멜룬을 대체하게 했다. 이후 1363년 7월 3일 부르고뉴 의회를 소집해 열심히 설득한 끝애 수비대 유지와 용병대 토벌을 위한 상당한 보조금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1363년 9월 6일, 장 2세는 게르미니 주교구에 비밀 서신을 보냈다. 그는 이 서신에서 피리프를 부르고뉴 공작으로 삼을 예정이라고 밝혔으며, 카페 왕조 시대에 로베르 2세가 그의 아들인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1세에게 했던 것처럼 필리프와 그의 후손들에게 부르고뉴 공국을 전부 맡길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부르고뉴 총리 필리베르 파일라르가 이 편지를 보관하고, 자신이 죽을 때까지 누구에게도 이 서신을 넘기지 말라고 명령했다.

한편, 나바라 왕국의 국왕이자 에브뢰 백작인 카를로스 2세는 자신이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2세의 딸 마르그리트[1]의 손자인 점을 이용해 자신이 부르고뉴 공국을 물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를로스는 교황 인노첸시오 6세에게 자신이 부르고뉴 공작이 되는 것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자 1361년 11월 나바라 왕국으로 가서 그곳의 장정들을 소집해 전쟁을 준비했다.

1362년 5월 추종자들을 부추겨 노르망디에서 봉기를 일으키게 했으나 실패하자, 1363년 나바라 해군을 노르망디로 파견해 그곳을 장악하고 나바라 육군을 형제 루이에게 맡겨 가스코뉴인들과 힘을 합쳐 부르고뉴를 공략하게 했다. 1364년 1월, 카를로스는 아헨에서 흑태자 에드워드와 만나 잉글랜드 왕국이 보유하고 있는 아키텐 공국에 나바라 왕국군이 통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해 승낙을 얻어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사전에 노출되었고, 1364년 5월 16일 코르슈렐 전투에서 나바라 왕국군과 잉글랜드 용병 연합군은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참패했다.

코르슈렐 전투 몇 주 후인 1364년 6월 2일, 샤를 5세가 그해 4월 8일 잉글랜드의 사보이 궁전에서 사망한 아버지 장 2세의 뒤를 이어 프랑스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치렀다. 장 2세가 게르미니 주교구에 보냈던 서신은 7일 후에 공포되어 발루아 가문의 부르고뉴 공국 공식 헌법이 되었다. 그 후 필리프는 공식적으로 부르고뉴 공작 칭호를 얻었고, 투렌 공작 칭호와 영지를 왕실에 반납했다. 1364년 11월 디종에 도착한 필리프는 생베니뉴 성당에서 도시와 귀족들의 특권을 존중하겠다고 맹세했다.

2.3. 부르고뉴 공작

2.3.1. 자유 용병대와의 전쟁

부르고뉴 공작으로 부임한 필리프의 첫번째 과제는 자유 용병대였다. 이들은 브레티니 조약 후 잉글랜드, 프랑스와의 용병 계약이 끝나자 프랑스 전역을 돌며 여러 성과 요새, 마을들을 약탈했다. 부르고뉴 역시 니베르네, 푸이사예, 아발로네, 오수아, 뒤즈무아, 샬로네, 마코네, 퐁타이예르쉬르손. 망콩 등 여러 지역이 심각하게 황폐화되었다. 여기에 부르고뉴 공작이 되지 못한 것에 원한을 품은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2세의 의뢰를 받은 용병대까지 부르고뉴에 침입해 약탈을 자행하기도 했다. 필리프는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솜베르농의 영주 장 드 몽터규를 공국 보안관, 몰리노 영주 기 드 프롤로이를 공국의 보안관 겸 대장, 기 2세 드 퐁타예르를 부르고뉴 원수, 기욤 드라트레무아유를 샬롱 및 디종의 집행관으로 선임해 용병대를 토벌하는 데 전념하게 했으며, 주기적으로 부르고뉴 의회를 소집해 용병대를 물리치기 위한 군대를 양성하려면 군자금이 필요하니 보조금을 내달라고 요청했다. 여기에 요새를 강화하고, 신뢰할 수 있는 장교들을 각 요새의 영구 지휘관으로 세워서 용병들을 제압하게 했다.

1363년, 필리프는 부르고뉴에서 활개치던 용병대장 아르노 드 세르볼을 회유했다. 그는 마침 아내를 잃어 홀아비였던 아르노에게 샤토빌랭과 아르크앙바로아의 영주인 장 3세 드 샤토빌랭의 딸인 잔 드 샤토빌랭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아르노는 1363년에 아들 필리프를 낳았고, 필리프가 아기 필리프의 대부가 되어줬다. 1364년 5월 16일, 아르노는 카를로스 2세에게 고용되어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과 대적했지만 전투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고 곧 철수했다. 샤를 5세가 자신의 정적인 카를로스 2세를 도운 것에 분노하자, 호담공 필리프는 프랑스 왕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 갖가지 조치를 내려야 했다.

1365년, 필리프는 아르노를 프랑스 바깥으로 보내기로 마음먹고, 헝가리에서 튀르크족에게 대항하는 십자군에 가담하도록 요청했다. 그는 그 요청을 받아들여 용병대를 이끌고 출진했지만, 도중에 로렌, 보주 등 라인강 유역 도시들을 황폐화시켰고, 스트라스부르에 그대로 머물렀다. 1366년 초, 그는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6세가 조직한 십자군에 참여하러 길을 떠났다. 그러나 1366년 6월 25일 솜 강을 건너려고 준비하다가 빌프랑슈 인근의 글레이제에서 어느 종자에게 알려지지 않은 사유로 살해되었다. 이후 자유 용병대는 샤를 5세의 카스티야 원정에 대거 고용되어 카스티야로 보내졌고, 남은 용병들도 차츰 제압되면서 사그라들었다.

2.3.2. 마르그리트와의 결혼

플란데런 백작 루이 2세의 외동딸 마르그리트는 본래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1세의 아내였지만, 남편이 일찍 죽으면서 미망인이 되었다.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플란데런 백국을 자국의 확실한 동맹으로 삼기 위해 넷째 아들인 랭글리의 에드먼드를 마르그리트와 결혼시키려 했다. 플란데런은 잉글랜드와 긴밀한 경제적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루이 2세는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했고, 1364년 10월 10일 마르그리트와 에드먼드의 약혼 계약이 체결되었다. 하지만 에드먼드와 마르그리트는 친족 관계였기에, 그 결혼이 성사되려면 교황청의 특별 허가를 받아야 했다.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는 플란데런 백국이 잉글랜드와 이대로 결혼 동맹을 맺게 하면, 잉글랜드군이 저지대 국가를 확고히 장악해 프랑스에 두고두고 큰 우환이 되리라 여기고 교황 우르바노 5세를 압박한 끝에 마르그리트와 에드먼드의 결혼을 불허하게 했다. 이후 프랑스 국왕 필리프 5세의 딸이며 플란데런 백작 루이 2세의 어머니였던 마르그리트 드 프랑스가 아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샤를 5세가 릴, 두에, 오르키에 시를 플란데런 백국에 양도하겠다고 약속하자, 루이 2세는 마음을 돌려 프랑스와 손잡기로 했다. 1367년 4월 17일, 필리프와 마르그리트의 결혼 계약이 성립되었고, 1369년 6월 19일 겐트의 생바본 성당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그 후 필리프는 릴, 이프르, 브뤼헤, 담, 슬로이스 시를 잇따라 방문해 그곳 주민들의 지지를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2.3.3. 샤를 5세의 재정복 참여

1369년 샤를 5세가 잉글랜드군을 프랑스 남서부의 아키텐 일대에서 몰아내기 위해 전쟁을 단행한 이래, 필리프는 여러 전역에 참여했다. 1372년, 그는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군대에 합류했다. 이들은 푸아투에서 작전을 수행해 생장당젤리, 올네, 니오르, 투아르 등지를 공략했으며, 뒤이어 브르타뉴로 쳐들어가 브르타뉴 서부 해안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영역을 공략하고 브르타뉴 공작 장 4세 드 브르타뉴가 잉글랜드로 피신하게 했다.

1373년 8월 9일, 곤트의 존 맨앳암즈 3,000명, 장궁병 6,000명, 비전투원 2,000명을 이끌고 칼레에서 보르도까지 이어지는 1,500km에 달하는 약탈 행진을 감행했다. 원정군은 하루에 약 10km를 전진하면서 20km 이내의 주변 지역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며칠 후 아르투아 외곽의 에어 쉬르 라 리스와 생폴쉬르테르누아즈에서 프랑스군과 교전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둘렌 요새를 습격해 거의 함락시킬 뻔했으나 수비대의 분전으로 공략에 실패했다. 8월 19일 솜 강에 교두보를 확보한 뒤 아라스를 우회한 후 브레 쉬르 솜을 찔러봤지만 함락에 실패했다.

한편, 필리프는 아미앵에서 군대를 조직해 적의 뒤를 추격했다. 또한 샤를 5세는 베르트랑 뒤 게클랭에게 지원 병력을 줘서 잉글랜드군의 진군에 대응하게 했으며,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 장 3세 드 뷔에이에게도 군대를 맡겼다. 프랑스 장성들은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파견된 잉글랜드 식량 수급 부대를 연이어 습격해 전력을 소모시켰다. 그리고 잉글랜드군의 진군로에 있는 주민들을 근처의 성이나 요새화된 수도원으로 대피시키고, 잉글랜드군이 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등 청야 전술을 구사했다.

9월 3일 랑 교외의 보 쉬르 랑에서 미처 피하지 못한 프랑스 농민들을 상대로 약탈을 자행한 곤트의 존은 수아송으로 향했고, 필리프가 이끄는 2,400명의 프랑스군이 그 뒤를 바짝 추격했다. 잉글랜드군은 수차례 그들과 전투를 벌이려 했지만, 필리프는 샤를 5세의 권고에 따라 이를 거부하고 오직 식량 수급을 목적으로 분산된 적군을 사살하고 낙오된 적병들을 사로잡았다. 9월 9일, 프랑스군은 토머스 디스펜서가 이끄는 분견대를 습격해 궤멸시키고 기사 월터 휴이트 등 수많은 병사를 사살하고 디스펜서 등 몇몇 기사와 종자를 생포했다.

곤트의 존은 이러한 고난을 무릅쓰고 계속 진군하면서 에르몽빌, 발돔망주, 에페르네, 샬롱앙샹파뉴 등지의 마을들을 약탈하고 황폐화시켰다. 9월 22일 잉글랜드군이 트루아 외곽에 도착했을 때, 게클랭,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 루이 2세 드 부르봉, 필리프가 연합한 7,000명이 넘는 프랑스군이 트루아 인근 케아에 주둔해 있었다. 곤트의 존은 프랑스군 진영에 전령을 보내 전투를 신청했지만 묵살당하자 센 강으로 이동한 뒤 9월 말에 제쉬르센을 통해 센 강을 건넌 후 니베르네로 향했다. 이에 프랑스군은 두 개의 종대를 형성하여 평행하게 행군하면서 적의 진군을 따라갔다. 그들은 성이나 요새화된 도시에서 매일 밤을 보내면서 적군이 야영을 반복하도록 강요했다.

이렇듯 프랑스군이 바짝 뒤를 쫓으면서도 전투에 절대로 응하지 않고 식량 수급 부대를 끊임없이 공격하자, 잉글랜드군의 사기는 급락했고 행군을 이탈하는 자들이 갈수록 늘어났으며, 수많은 보급 마차를 버려야 했다. 급기야 11월에 꽁브하이으, 리무쟁 상부 지역을 지나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이 지역은 숲이 울창했고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기 때문에, 겨울 추위를 피할 거주지를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고 말에게 먹일 곡물을 마련하기도 힘들었다. 계다가 이 시기에 폭우가 내리면서 도로는 늪으로 바뀌고 하천은 진흙탕으로 변했다. 여기에 프랑스 기병대는 잉글랜드군의 측면을 꾸준히 공격해 피해를 누적시켰다.

1373년 12월 초, 잉글랜드군이 프랑스 왕의 권위에 적대적인 지역인 리무쟁 하부 지역에 도착하자, 프랑스군은 비로소 추격을 중단하고 철수했다. 곤트의 존은 이 지역에서 3주 동안 휴식을 취한 뒤 1373년 마지막 날에 보르도에 입성했다. 4개월 동안 1,500km를 강행군한 대가는 참혹했다. 원정에 동원된 30,000마리의 말 중 절반이 죽었고, 수송 마차의 3분의 2가 버려졌으며, 3,000명이 추위, 질병, 기아로 사망했고 3,000명은 프랑스군에 의해 사살되거나 생포되었다. 더욱이 보르도에 도착한 많은 이가 며칠 또는 몇 달 후에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보르도에 입성한 후의 상황도 심각했다. 그 해 겨울 동안 페스트가 돌면서 많은 이가 목숨을 잃었고, 몇몇 기사들은 거리에서 음식을 달라고 구걸했다.

게클랭이 사망한 후인 1380년 7월 13일, 샤를 5세는 필리프를 "왕국 전역의 중장병과 석궁 사령관"으로 선임해, 그가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곳이면 어디든 적에 맞서 그들을 이끌 수 있는 전권을 부여했다. 필리프는 왕의 뜻에 따라 앙주, 세노네, 가티나, 보스 일대를 휘저으며 진군로 인근의 잉글랜드 성채들을 공략하고 잉글랜드 귀족들의 영지를 약탈했다. 그러면서도 잉글랜드군과 어떠한 전면전도 벌이기를 거부하고, 유격전을 벌여 괴롭혔다. 그러던 중 샤를 5세가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작전을 중단하고 파리로 귀환했다.

2.3.4. 샤를 6세의 섭정단

1380년 9월 16일, 샤를 5세가 사망했다. 그 후 12살된 아들 샤를 6세가 프랑스의 국왕이 되었다. 처음에는 앙주 공작 루이 1세가 섭정을 맡았고, 왕을 가르치는 일은 필리프가 맡았다. 그러나 루이는 왕실 재무부에서 32,000 프랑을 임의로 빼서 자기 사비로 챙겼다가 형제들과 사촌들의 반감을 샀다. 결국 형제와 사촌들로부터 강한 압력을 받은 루이는 2달 만에 섭정 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샤를 6세는 성인으로 인정받고 1380년 11월 4일에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 후 샤를 6세를 보좌하는 12명의 위원회가 설립되었고, 그는 베리 공작 장과 함께 위원회를 이끌었다.

1381년, 프랑스 남부에서 강력한 권세를 누리고 있던 푸아 백작 가스통 3세 페부스가 베리 공작 장의 지시에 따라 세금을 악착같이 거두는 세네샬 3명을 약탈자라고 비난하면서, 랑그독 주민들에게 자신이 잉글랜드와의 전쟁을 중단하고 동원을 해제하며, 주민들을 착취하는 세네샬들을 제거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호응한 랑그독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장은 샤를 6세와 함께 진압에 착수했다. 이후 프랑스 왕실군의 공세로 랑그독 각지에서 심각한 약탈이 발생하자, 가스통 3세 페부스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65,000 프랑을 즉시 왕실에 지불하고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후 필리프가 개입해 랑그독 주민들과 장의 화해를 주선했으며, 투옥된 부르주아 4명이 석방되도록 했다. 이후 장 드 베리가 프랑스 왕국의 1/3에 달하는 거대한 영지를 관리하느라 바쁘고, 루이가 나폴리 왕국의 국왕이 되기 위한 원정에 몰두하면서, 필리프는 프랑스 왕실을 장악하고 국정이 자기 뜻대로 이뤄지게 했다.

2.3.5. 플란데런 전쟁

1379년 5월, 플란데런 백작 루이 2세는 브뤼헤 시가 레이 강과 리스 강 사이에 운하를 파는 사업을 단행하는 걸 허락했다. 이에 브뤼헤의 전통적인 라이벌이었던 겐트 시는 이 때문에 자기들이 큰 손해를 보게 생겼다며, 루이 2세가 브뤼헤만 감싸고 돈다고 여겼다. 그해 8월, 겐트 직조공들이 반란을 일으켜 시민 정부를 다시 세웠고, 북부 플란데런의 나머지 지역에서도 루이 2세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루이 2세는 토벌군을 규합한 뒤 반란군과 맞붙었고, 여러 전투에서 승리한 뒤 1381년 겐트를 포위했다. 겐트 시민들이 협상을 요청하자, 그는 겐트의 모든 성인 남성들의 운명을 자신이 결정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대숙청을 우려한 겐트 주민들은 끝까지 항전하기로 결의했다.

1382년 1월 24일, 겐트 반란군의 지도자가 된 필립 반 아르테벨데는 1382년 5월 3일 베버하우트 평원 전투에서 수적으로 훨씬 많은 토벌군을 격파하고 브뤼헤에 입성했다. 루이 2세는 강에 몸을 던져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릴로 도주했다. 이후 플란데런 전역이 반란에 가담했고, 오직 덴데르몬드와 오우데나르데 만이 루이 2세에 대한 충성을 유지했다. 한편 가혹한 세금에 시달리던 프랑스 북부 백성들 역시 플란데런 반란에 고무되어 봉기를 일으켰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루이 2세는 사위인 필리프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필리프는 이 기회에 플란데런을 자신에게 완전히 귀속시키기로 마음먹었고, 자국의 농민 반란에 영향을 끼친 플란데런 반란군을 경계한 프랑스 귀족들 역시 그를 지원하기로 했다. 1382년 11월 초 아라스에서 10,000명의 병력을 집결한 프랑스군은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의 지휘하에 플란데런으로 진격했다. 11월 27일, 프랑스군은 루즈베케 전투에서 반란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고, 필립 반 아르테벨데는 전사했다.

그러나 플란데런 반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겐트 주민들은 끝까지 항전하기로 결의하고 잉글랜드에 사절을 보내 원군을 요청했다. 그들은 루이 2세가 대립 교황 클레멘스 7세를 따른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자신들은 우르바노 6세를 위해 봉기를 일으켰으니 이단을 토벌할 십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잉글랜드 당국은 이에 따르기로 하고, 헨리 르 디스펜서를 수장으로 하는 '십자군'을 일으켜 플란데런으로 파견했다. 필리프는 프랑스 왕실과 함께 이에 맞서 싸웠고, 1383년 10월 디스펜서 십자군의 항복을 받아내고 잉글랜드로 돌려보냈다.

잉글랜드군이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난 뒤에도 겐트는 저항을 계속 이어갔다. 그러던 1384년 1월 30일, 플란데런 백작 루이 2세가 사망했다. 이후 외동딸 마르그리트가 플란데런 여백작이 되었고, 필리프는 아내의 권리에 따라 플란데런을 관리하게 되었다. 그는 2월 27일 장인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거행하고, 브뤼헤, 이프르, 메신느, 딕스무이데, 담, 메헬렌 및 앤트워프를 잇따라 방문해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2.3.6. 플란데런 백작으로서의 치세

플란데런 백작이 된 뒤, 필리프는 플란데런 전쟁을 마무리할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세금을 부과하기로 했다. 그는 기 2세 드 퐁타예르와 장 드 기스텔을 플란데런 백국 총독으로 선임하고, 플란데런 귀족들에게 세금 징수 책임을 맡겼다. 또한 요새의 개조 및 건설을 위한 사업을 단행했다. 1384년 1월, 필리프는 겐트 시와 15개월간 휴전을 맺는다는 내용의 로이링헨 협정을 체결한 뒤 겐트를 제압하기 위한 병력을 준비했다. 겐트 시민들 역시 그의 의도를 눈치채고 100명의 맨앳암즈와 300명의 장궁병으로 구성된 잉글랜드군 지원군을 받았다.

1385년 5월 휴전이 끝나자, 겐트 시민들이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그들은 브뤼헤를 공략하려고 시도했고, 담 항구를 장악했다. 필리프는 즉시 슬로이스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를 이끌고 진격해 8월 28일에 담을 공략했다. 하지만 겐트의 방어가 워낙 강해서 무력으로 공략하기엔 무리라고 보고, 그 대신해 도시의 모든 보급선을 차단해 굶주리게 했다. 이후 겐트 시민들은 도시 내 식량이 바닥나면서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사절을 보내 평화 협상을 하자고 간청했고, 필리프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1385년 12월 18일, 양자는 투르네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필리프는 겐트 주민들을 사면하고 특권을 보장하는 대가로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벌금을 납부하도록 했다. 이후 모든 플란데런 도시들이 그에게 충성을 서약하면서, 플란데런 전쟁이 막을 내렸다.

그 후 필리프는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된 플란데런을 회복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는 세금 특혜를 부여해 황폐화된 도시에 사람들이 다시 거주하도록 촉진했으며, 잉글랜드와의 무역에 힘을 기울였다. 일부 도시는 그의 치세 동안에도 제대로 재건되지 못했지만, 플란데런 백국의 경제는 전반적으로 회복되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잉글랜드와 우호 관계를 이어가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고, 자연히 백년전쟁을 어떻게든 종식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3.7. 영토 확장

필리프는 장인 루이 2세로부터 플란데런 백국을 물려받은 뒤 적극적인 결혼 정책에 착수했다. 그는 마르그리트와의 결혼으로 자녀 10명을 두었는데, 그 중 소년 3명과 소녀 4명이 성인이 되었다. 1385년, 필리프의 장남 용맹공 장이 하바이에른 공작이자 에노, 홀란트, 질란트 백작 알브레히트 1세의 딸 마르가레테와 결혼했다. 이후 필리프의 딸 마르그리트가 알브레히트 1세의 첫째 아들이며 1404년부터 1417년까지 하비에이른 공작, 에노, 홀란트, 질란트 백작이 될 빌헬름 2세와 결혼했다. 여기에 조카인 샤를 6세가 상바이에른 공작 슈테판 3세의 딸인 이자보 드 바비에르와 결혼하도록 주선했다. 그는 이를 통해 비텔스바흐 가문과 발루아 가문 사이에 탄탄한 동맹을 형성하고, 저지대 국가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강화했다. 1392년, 필리프는 딸 카트린을 미래의 오스트리아 공작이 될 레오폴드 4세와 결혼시켰다. 1393년에는 딸 마리를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8세와 결혼시켰으며, 1402년에는 아들 앙투안을 피카르디의 가장 강력한 영주인 룩셈부르크-리니의 왈레랑 3세의 딸인 룩셈부르크-생폴의 잔과 결혼시킴으로써, 피카르디에 대한 영향력 역시 키웠다.

한편, 그는 결혼 정책과는 별개로 무력을 통한 확장 정책도 추진했다. 1388년, 겔데르란트 공작 기욤 7세 드 쥘리에가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아 룩셈부르크 공작 벤첼 1세의 미망인인 브라반트의 잔으로부터 영지를 빼앗으려 들고, 샤를 6세의 중재 제안을 무례하게 거부했다. 프랑스 왕실은 이에 분개해 응징하기로 결의헀고, 필리프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겔데를란트 공국으로 쳐들어갔다. 이때 프랑스군은 필리프의 제안에 따라 브라반트-에노로 이어지는 길 대신해 아르덴-에노를 거치는 행군을 택했다. 이는 자기 영지가 약탈당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한 필리프의 계산이었다. 1388년 10월 13일, 기욤 7세 드 쥘리에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고 여기고 코렌지히에서 프랑스 왕에게 경의를 표하고 배상금을 지불했다. 브라반트의 잔은 자신을 도와준 그에게 감사를 표했고, 부르고뉴의 보호 아래 놓였다. 1390년 9월 28일, 그녀는 필리프에게 자신의 영지를 양도하겠다는 내용의 계약서를 작성했다.

2.3.8. 일시적인 권력 상실과 재장악

필리프는 겔데를란트 공국 원정을 통해 많은 것을 얻어냈지만, 원정을 수행한 프랑스군은 험난한 지형을 갖춘 아르덴을 왕복하면서 큰 손실을 입었다. 당대 연대기 작가들은 샹파뉴에 돌아온 프랑스군의 몰골이 거지떼나 다름없었다고 기술했다. 이로 인해 필리프에 대한 군대와 민중의 인기는 매우 떨어졌고, 필리프 드 메지에르,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 등 샤를 6세의 고문들은 이를 필리프의 구너세를 약화시킬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1388년 10월 28일 랭스에 도착한 샤를 6세는 고문들의 조언에 따라 11월 3일 랭스의 주교 궁전에서 삼부회를 개최한 뒤 자신이 이제 나이가 충분히 찼으므로 스스로 통치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그의 사랑하는 삼촌들에게 "자신와 왕국의 일을 위해 겪었던 수고에 감사를 표한다"라고 밝혔다. 사전 통보를 받지 못했던 필리프와 베리 공작 장은 당황했지만, 샤를 6세의 행위에 문제삼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그 후 필리프는 당분간 왕국의 일에 관심을 끊고 공국을 관리하는 데 집중했다.

1392년, 샤를 6세는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 암살 시도의 배후로 의심되는 브르타뉴 공작 장 4세 드 브르타뉴를 상대로 원정을 단행했다. 그런데 그는 도중에 르망 인근에서 광기에 빠졌고, 원정은 중단되었다. 필리프는 즉시 왕을 대신해 전권을 잡은 뒤 브르타뉴 공국에 대한 원정을 취소하고 베리 공작 장과 함께 필리프 드 메지에르,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 등 왕의 고문들을 대거 숙청했다. 샤를 6세는 이후에도 정신병에 시달렸기에 국정을 거의 돌보지 못했고, 필리프는 최고 권력자로 우뚝 섰다. 하지만 샤를 6세의 형제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이 그를 견제하기 시작하면서, 부르고뉴 공국과 오를레앙 공국간의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2.3.9. 니코폴리스 십자군

1395년, 필리프는 장남 장을 오스만 술탄국을 정벌하기 위한 십자군의 수장으로 세웠다. 그는 이 원정을 성사시킴으로서 부르고뉴 가문의 명성을 유럽 전역에 떨치기를 희망했다. 십자군은 1396년 4월에 출진해 헝가리의 부더에서 유럽 각지의 군대와 합세했다. 십자군의 목표는 다뉴브 강을 따라 이동해 니코폴리스를 공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396년 9월 25일, 십자군은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바예지트 1세가 이끄는 오스만군에게 궤멸되었고, 장은 생포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필리프는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특별세를 거둬들였다. 1398년, 필리프는 술탄에게 200,000 두카트에 달하는 몸값을 지불하고 장을 석방시켰다. 프랑스로 돌아온 장과 그의 동료들은 목숨걸고 이교도와 맞서 싸운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부르고뉴 가문의 명성이 향상되었다. 이후 부르고뉴 궁정은 자신들이 십자군을 주도했다고 홍보했고, 1420~1460년대 유럽에서 가장 많은 십자군 문학서를 출간했다.

2.3.10. 베네딕토 13세와의 갈등

1394년, 십자군 준비에 한창 몰두하고 있던 필리프는 서방교회 대분열 때문에 십자군의 호응이 약해질 것을 우려해 파리 대학에 분열을 종식할 수 있는 권고안을 제시해달라고 요청했다. 파리 대학은 몇 달간의 숙고 끝에 세 가지 해결책을 제시했다.
1. 타협의 길: 교황이 스스로 분열을 종식하도록 맡긴다.
2. 양도의 길: 두 교황이 동시에 사임하고 다른 사람을 선출한다.
3. 협의의 길: 분열 문제 해결을 목표로 하는 공의회를 개최한다.

1395년 2월, 필리프가 주관한 국왕 평의회는 양도의 길을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와 로마 교황 보니파시오 9세 모두 사임에 동의하지 않았다. 1396년, 캉브레 주교 앙드레 드 룩셈부르크가 사망하자, 측근인 루이 드라트레무아유를 그 자리에 앉히려 했다. 그러나 교황 베네딕토 13세는 이를 거부하고 자기가 총애하는 인물을 그 자리에 앉혔다. 이후 필리프와 베네딕토 13세간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1398년, 파리에서 열린 주교 회의는 프랑스 왕을 위해 교황으로부터 교회 혜택과 세금을 철회하는 조례를 통과시켰다. 이제 프랑스 교회는 교황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통치하며, 왕은 종교적인 문제에 관한 법안을 제정할 권한을 맡았다. 아비뇽 교황은 오직 영적인 권위만 누릴 수 있었다. 베네딕토 13세가 이 조례를 따르길 거부하자, 필리프는 샤를 6세의 이름으로 베네딕토 13세를 더는 교황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포하고 지원을 끊어버렸다. 그리고 9월 1일, 프랑스 왕실 관리들은 성직자들이 아비뇽에 남을 경우 프랑스 성직자로서의 자격을 박탈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아비뇽 추기경 23명 중 18명이 프랑스로 돌아갔고, 프랑스군은 4년 반 동안 아비뇽 교황궁을 봉쇄했다.

1403년 3월 11일 밤 아비뇽에서 탈출한 베네딕토 13세는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 프랑스 왕실이 일방적으로 교황 지지를 철회한 것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한 추기경들의 지지를 확보했다. 결국 샤를 6세는 봉쇄를 풀었고, 베네딕토 13세는 아비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베네딕토 13세는 이에 보답하기 위해 성직자들이 교황청에 납입한 50,000 프랑을 루이 1세 도를레앙에게 넘기기로 했다.

2.3.11. 오를레앙 공작과의 대립

필리프는 플란데런 백작을 겸임하면서 잉글랜드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백년전쟁 종식을 추구했다. 그는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와 샤를 6세의 딸 이자벨의 결혼을 주선했으며, 양국간의 평화 협상을 꾸준히 이어갔다. 그러나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은 잉글랜드와의 전쟁을 재개해 샤를 5세 치세 때 공략하지 못한 지역을 마저 공략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필리프는 리처드 2세에 의해 추방된 뒤 파리에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리처드 2세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했다. 그러던 1399년 5월 흑사병이 유행하면서 필리프가 파리 밖으로 나간 사이, 루이 1세 도를레앙이 헨리에게 접근했다. 6월 17일, 헨리와 루이 1세 도를레앙은 정식 동맹을 맺었고, "서로의 친구의 친구이자 서로의 적의 적이 될 것"을 맹세했다. 그 후 헨리는 루이 1세의 지원을 받아 잉글랜드로 귀환했고,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키고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로 등극했다. 그는 이 사건에 격분했고, 루이 1세에게 강한 적의를 품었다.

1401년 12월, 필리프는 수도 주변에 소규모 군대를 집결시킨 뒤 루이 1세를 위협했다. 이에 베리 공작 장, 이자보 드 보부아르, 앙주 공작 루이 2세가 필리프와 루이 1세를 중재해 내전이 벌어지는 걸 겨우 막았다. 1402년, 루이 1세는 필리프가 부르고뉴에 간 틈을 타 샤를 6세로부터 주권 총독 직위를 얻어 예외적인 세금을 부과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파리로 귀환한 필리프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샤를 6세를 압박해 공동 원조 총독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루이 1세는 부르고뉴 공국이 부르고뉴 본토와 플란데런 백국 및 아르투아 백국 사이의 영토를 연결하는 걸 저지하기 위해 룩셈부르크 공국을 담보로 획득했다. 룩셈부르크 공국은 훗날 선량공 필리프 시기에 이르러서야 부르고뉴 공국의 소유가 되었다. 이후 필리프는 프랑스 궁정에서 루이 1세의 지지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정쟁을 벌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4. 열성적인 후원자

필리프는 자기 영지에서 예술 문화의 발전을 장려했다. 그는 디종 인근의 카르투지오 수도원 교회 예배당에서 매년 새로운 찬송가를 제작하도록 독려했으며, 이 예배당에 20명 가량의 음악가들이 상시 거주했다. 또한 장 드 보메츠, 멜키오르 브로더람을 비롯한 성화 화가들이 그의 후원을 받으며 여러 작품을 제작했다. 필리프는 필요에 따라 유명한 장인을 고용하기도 했다. 가령 콜라 드 랑은 1396년 필리프의 장남 장의 십자군 원정을 준비할 때 장의 깃발을 그리는 일을 맡았다. 또한 필리프는 기사도와 십자군 문학을 선호했으며, 크리스틴 드 피장과 오노레 보넷의 문학 작품을 선호했다.

필리프는 플란데런을 영지로 삼은 뒤 방직업을 후원했는데, 특히 태피스트리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75개에 달하는 태피스트리를 제작하도록 했으며, 이것을 타국 군주 및 주요 인사에게 선물하는 등 외교적 도구로도 활용했다. 1390년 " 클로비스 왕의 역사"와 " 성모의 역사"라는 제목의 태피스트리를 제작해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과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에게 선물했으며, 뒤이어 " 십자가형을 당한 예수"와 "성모의 죽음"을 리처드 2세에게 바쳤다. 1397년 아들을 구출하기 위해 몸값을 술탄 바예지트 1세에게 보낼 때, " 알렉산더의 역사"를 곁들어 보내기도 했다.

필리프는 열정적인 독서광이기도 했다. 그는 부르고뉴 공국의 중심지인 디종에 사립 도서관을 설립하고, 그리스어나 라틴어로 번역된 사본들을 구입했다. 그는 성무일도서인 <대담한 필리프의 위대한 시간들(Grandes Heures de Philippe le Hardi)>을 의뢰했으며, 플란데런 백국 네이메겐 출신의 림부르크 형제에게 <대담한 필리프의 도덕적인 성경(Bible moralisée de Philippe le Hardi)>을 의뢰하기도 했다. 프랑스 국왕의 목사이자 사냥에 관한 논문의 저자힌 가스 드 라 빅뉴는 <추론의 로멘스(Le Roman des déduis)>라는 제목의 저서를 그에게 헌정했다. 필리프가 사망할 무렵, 그가 소유한 저서는 70권에 달했다.

2.5. 사망

1404년 봄, 필리프는 브라반트의 잔으로부터 브라반트 공국을 양도받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브뤼셀로 향했다. 그러다가 중병에 걸린 그는 플란데런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다가 1404년 4월 27일 에노 백국의 할 시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그는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방부 처리되어 납관에 보관되었고, 내장과 심장은 각각 할과 생드니에 안장되었다. 그의 유해는 디종에 있는 샴몰 샤르트뢰즈 성당으로 이송되었고, 장남 용맹공 장의 주관하에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그 후 아버지의 직위와 영지를 물려받은 용맹공 장은 프랑스의 최고 권력을 놓고 오를레앙 공작과 대립한 끝에 프랑스를 심각한 혼란에 빠뜨릴 내전을 감행했다.

3. 가족

  • 플란데런의 마르그리트(1350 ~ 1405): 플란데런 백작 루이 2세의 외동딸. 호담공 필리프와 결혼하기 전에 전임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1세와 결혼했다.
    • 용맹공 장(1371 ~ 1419): 부르고뉴 공작.
    • 샤를(1372 ~ 1373): 요절.
    • 마르그리트(1374 ~ 1441): 하바이에른 공작, 에노, 홀란트, 젤란트 백작 빌헬름 4세의 부인.
    • 카트린(1378 ~ 1425):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4세의 부인.
    • 본(1379 ~ 1399): 미혼인 채 사망.
    • 앙투안(1384 ~ 1415): 브라반트 공작. 아쟁쿠르 전투에서 전사.
    • 마리(1380 ~ 1428):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8세의 부인.
    • 필리프(1389 ~ 1415): 레텔 백작. 아쟁쿠르 전투에서 전사.
  • 마리 도베르시쿠르: 에스타임부르그의 영주 볼드윈 도베르시쿠르의 딸. 호담공 필리프의 정부.
    • 앙리 뒤 리수와르(1360 ~ 1409): 뒤 리수와르 가문의 시조. 호담공 필리프의 사생아.
    • 수잔 드 브라반트: 기사 자크 위트블리에의 부인.


[1] 루이 10세의 첫번째 왕비이자 호아나 2세의 모친으로, 불륜을 저질러 감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