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헨리 르 디스펜서 Henry le Despens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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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1341년경 ~ 1406년 8월 23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노퍽셔 브리클랜드 노스 엘햄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노퍽셔 브리클랜드 노스 엘햄 | |
아버지 | 에드워드 르 디스펜서 | |
어머니 | 앤 페러스 | |
형제 | 에드워드, 휴, 토머스 | |
직위 | 노리치 주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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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성직자. 백년전쟁 시기 와트 타일러의 난 진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디스펜서 십자군을 이끌었다.2. 생애
1341년경 잉글랜드 왕국 노퍽셔 브리클랜드 노스 엘햄에서 출생했다. 조부 휴 르 디스펜서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의 총신으로서 막강한 권세를 누렸지만, 1326년 11월 24일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와 이자벨의 애인인 로저 모티머의 정변으로 체포된 뒤 처형되었다. 아버지 에드워드 르 디스펜서 역시 체포되었지만, 나이가 아직 어렸기에 런던 탑에 수감되는 선에서 그쳤다. 1328년 석방되었고, 1330년 실권을 잡은 에드워드 3세의 측근이 되었다. 이후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을 때 동행했지만, 1342년 모롱 전투에서 전사했다. 어머니 앤 페러스는 초대 페러스 남작 윌리엄 페러스의 딸이다. 형제로 에드워드, 휴, 토머스, 헨리가 있었는데, 이중 에드워드가 초대 디스펜서 남작에 선임되었고 백년전쟁에서 활약했다.그는 막내 아들로서 일찍이 성직자의 길을 걸었다. 1353년 랄란도프의 참사회원이 되었고, 1년 후에는 솔즈베리 대성당의 참사회원이 되었다. 1361년까지 레스터셔의 보즈워스 성당 총장을 맡았으며,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법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362년 12월 17일에 공식적으로 성직자가 되었고, 1364년 4월 20일 란다프 주교가 되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1369년에 교황 우르바노 5세가 밀라노와 파비아의 지배자 갈레아초 2세 비스콘티를 상대로 벌인 전쟁에 참여했다고 한다. 1370년 잉글랜드 왕국 이스트 앵글리아의 부유한 도시인 노리치의 주교가 되었다.
1381년 와트 타일러의 난에 가담한 켄트와 에식스 출신 농민들이 자신들의 지도자인 와트 타일러가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에게 피살당한 것에 격분해 봉기를 일으켰다. 이스트 앵글리아 출신 농민들도 이에 호응해 봉기를 일으켰는데, 특히 노퍽 반군을 이끌었던 제프리 리스티는 스스로 "평민의 왕"을 자칭하며 노리치에 중심을 둔 별도의 국가를 만들고 자신만의 궁정을 조직했다. 반군은 영주들의 영지와 수도원을 약탈하고 법률 및 세금 문서를 불태웠다. 당시 헨리는 노리치에서 160km 떨어진 러틀랜드에서 성무 활동을 하던 중 노리치에서 이같은 일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즉시 기사 8명과 궁수 수 명으로 구성된 수행단을 이끌고 노리치로 향했다. 도중에 피터버러에서 지역 수도원을 약탈하려던 군중을 공격해 격퇴했다.
이후 피터버러에서 자원 부대와 합세한 헨리는 1381년 6월 18일 서퍽과 케임브리지셔에서 온 폭도들을 램지에서 강제 해산시켰고, 6월 19일에 케임브리지에 입성한 뒤 도시의 질서를 회복하고 시장을 해임했으며, 반란을 선동한 여러 사람을 처형했다. 그렇게 일을 처리한 뒤 노리치로 가던 중, 제프리 리스티가 리처드 2세에게 사면을 요청하기 위해 런던으로 파견한 사절 3명과 마주치자 모두 현장에서 참수했고, 6월 24일에 노리치 시내를 장악했다. 반군은 도시에서 퇴각한 뒤 요새에 숨었지만, 곧 함락되었다. 제프리 리스티는 체포된 뒤 교수형에 처해진 뒤 시체가 4등분으로 나뉘어 각지로 보내졌다. 헨리는 처형을 직접 감독했고,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의 고해성사를 주관한 뒤 이들의 죄를 사면했다. 그리하여 이스트 앵글리아의 반란은 6월 25일에 최종 진압되었다. 그는 이같은 활동을 할 어떠한 권한도 없었지만, 리처드 2세는 그에게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았다.
노리치 대성당 성 루카 예배당 제단, 디스펜서 레테이블(Despenser Retable)
노퍽 주민들은 폭도들을 가혹하게 대우한 그를 몹시 미워했다. 1382년, 헨리를 암살하려는 음모가 조직되었지만, 당국에게 발각되어 공모자들이 처형되었다. 이후 헨리는 노리치 대성당에 있는 성 루카 예배당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고통을 보여주는 성화를 의뢰했다. 일명 '디스펜서 레테이블'로 일컬어지는 이 성화는 예수가 이와 같은 고통을 감내했듯이 농민들도 불평불만을 쏟아내지 말고 자신들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의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1378년에 서방교회 대분열이 발발한 뒤 전 유럽이 로마 교황 우르바노 6세와 아비뇽 교황 클레멘스 7세 편으로 분열되었다. 잉글랜드는 우르바노 6세를 교황으로 인정했고, 프랑스는 클레멘스 7세를 받들었다. 1379년 8월, 프랑스 왕국의 속국인 플란데런 백국에 속한 헨트 직조공들이 자신들의 라이벌인 브뤼헤를 편애하고 막대한 세금을 부과한 플란데런 백작 루이 2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3년간의 항전 끝에 전세가 불리해지자, 헨트 주민들은 잉글랜드에 사절을 보내 원군을 요청했다. 그들은 루이 2세가 대립 교황 클레멘스 7세를 따른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자신들은 우르바노 6세를 위해 봉기를 일으켰으니 이단을 토벌할 십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우르바노 6세는 플란데런에서 발생한 사건을 전해듣고 클레멘스 7세를 추종하는 이들을 상대하는 십자군을 일으킬 것을 촉구하는 교서를 반포하면서, 헨리에게 십자군에 참여하거나 지원하는 자들에게 면죄부를 발급하는 권한을 부여했다. 잉글랜드 의회와 상인들은 프랑스의 플란데런 침공으로 중단된 양모 수출이 이번 십자군 원정을 통해 재개될 수 있다고 여겨 호응했고, 의회 역시 부유한 플란데런 백국과의 우호 관계를 회복하고 상당한 이권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 여겨 찬성했다.
한편,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는 삼촌인 곤트의 존이 카스티야 십자군을 운운하며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던 터라, 헨리 주교의 십자군을 지원한다면 삼촌이 원정을 포기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 보고 지지를 표했다. 또한 그는 1년 전 막대한 세금 부과에 반발한 농노들이 와트 타일러의 난을 일으킨 것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세금을 부과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번 십자군에 들어가는 비용은 교회가 전적으로 부담하니 꺼릴 게 없기도 했다.
1382년 12월 6일, 리처드 2세는 잉글랜드 전역에 십자군을 선포했다. 그리고 12월 말에 헨리와 기사들은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클레멘스 7세를 숭배하는 이단을 토벌할 때까지 십자가를 지겠다고 맹세했다. 1383년 2월, 잉글랜드 의회는 국왕에게 지급하던 전쟁 수행 보조금을 헨리에게 할당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잉글랜드군은 1383년 5월 칼레에 상륙한 뒤 프랑스군의 지배를 받던 됭케르크, 부르부르, 베르그, 포페링에, 뉴포르트 등 플란데런의 여러 마을을 공략했으며, 5월 25일 루이 2세의 지휘를 받은 프랑스-플란데런 연합군을 됭케르크 인근에서 격퇴했다.
잇따른 승리에 기세가 한껏 오른 기사들은 플란데런 백작과 프랑스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는 이프르 시를 공략하자고 주장했다. 이보다 앞서, 리처드 2세는 전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와 흑태자 에드워드의 휘하에서 맹활약한 노장 윌리엄 뷰챔프가 이끄는 추가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프랑스와 플란데런에 대한 공격을 미루라고 지시했다. 헨리는 왕의 명령에 따르려 했지만, 기사들이 이프르를 공략해야 한다고 계속 촉구하고 헨트 수뇌부 역시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밝히자, 그들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1383년 6월 8일, 헨리의 십자군이 이프르에 도착한 뒤 포위 공격에 착수했다. 하지만 이프르 주민들은 수비대장 얀 돌트르(Jan d'Oultre)의 지휘하에 농성 준비를 이미 완료했다. 도시 교외의 주거지들은 모조리 파괴되었고, 이때 나온 목재는 흙으로 된 성벽과 돌로 만들어진 성문을 강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또한 두 개의 도랑을 도시 주위에 파 두었고, 말뚝으로 강화된 높은 가시 울타리와 나무 방책이 설치되어 상대적으로 낮은 성벽의 방어를 보강했다.
십자군은 포위 첫날부터 사흘 동안 도시의 정문인 템플 게이트를 공격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이후 추가 병력이 도착하여 성벽을 완전히 포위했고, 흙을 사용하여 외부 도랑을 메웠다. 포위 8일째인 6월 15일에 포병대를 동원해 방어 시설을 공격해 손상을 입혔지만, 수비대는 이에 굴하지 않고 굳건히 버텼다. 십자군은 이후에도 수시로 도시를 공격했지만 모조리 격퇴되었고, 포격 역시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여기에 도시를 돕기 위해 인근에 군대를 배치한 루이 2세와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가 수비대와 연락을 원활하게 주고받으면서 잉글랜드군을 앞뒤로 괴롭혔다.
8월 8일, 헨리는 헨트 동맹군에게 알리지 않고 철수했다. 헨트군은 이후에도 도시를 포위했지만 9월 10일 갈수록 불어나는 손실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철수했다. 그 후 헨리와 기사 휴 칼블리는 프랑스로 진격하기를 원했지만, 다른 사령관들은 프랑스의 압도적인 병력을 감당할 여력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 가기를 거부했다. 일부 십자군은 아예 전쟁을 포기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가버렸다. 이후 십자군이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소년 왕 샤를 6세를 대동한 프랑스군이 8월 15일 아라스에서 소집된 뒤 플란데런으로 이동해 8월 말에 테루안에 이르자, 헨리는 그하블린느로 퇴각했다.
얼마 후 십자군이 점령했던 됭케르크, 부르부르, 베르그, 포페링에, 뉴포르트 등이 차례로 프랑스군에 재정복되었고, 십자군이 플란데런에 마련한 마지막 거점인 그하블린느도 며칠 뒤 포위되었다. 헨리는 처음엔 항복을 거부하고 리처드 2세가 원군을 보내주기를 희망했지만, 리처드 2세가 프랑스와 정면 대결하기 싫어서 군대를 보내주지 않는데다 그하블린느 시민들이 프랑스군에 항복하겠다고 통보하자,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이 잉글랜드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는 조건으로 항복하겠다고 제안했고, 프랑스군 수뇌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헨리의 십자군은 10월 말까지 영국 해협을 건너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헨리는 잉글랜드에 돌아온 뒤 1383년 10월 26일에 소집된 의회에 소환되어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총리 마이클 드 라 폴은 그가 사전에 합의한 대로 칼레에 충분한 병력을 모집하지 않았으며, 군사 지도자를 명확하게 정하지 않았고, 군대를 조기에 해산했다고 비난했다. 헨리는 이에 대응해 이프르에 충분한 병력이 모였고 지휘관을 잘 선택했으며, 왕의 명령에 순종했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면서 장군들이 이프르에서 철수한 뒤 자신의 허락을 받지 않고 잉글랜드로 도주하거나 명령에 불순종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묵살되었고, 재산이 압류되어 이번 십자군에 들어간 비용을 메꾸는 데 쓰였다.
그 후 수년간 잠자코 지내던 헨리는 1385년에 교구에서 활동할 권리를 회복했고, 다른 많은 성직자 및 세속 영주들과 함께 리처드 2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했다. 이후 그는 더 이상 전쟁에 관여하지 않았고, 그 대신 노리치 교구에 대한 통제권을 확대하는 데 노력을 집중했다. 이후 10여 년간 주교가 노리치 대성당 지부 및 기타 종교 공동체의 내부 문제에 간섭할 수 있는 권리를 놓고 당사자들과 분쟁을 벌였다. 1394년, 그의 정적들은 교황 보니파시오 9세에게 그가 횡포를 부리고 있다고 호소했고, 교황은 1년 후 캔터베리 대주교인 윌리엄 코트니에게 분쟁을 중재하라고 지시했다. 양측 모두 대주교와 왕실 의회에 회부되었지만, 1396년 7월 코트니가 사망하면서 결정이 지연되었다. 1398년, 리처드 2세가 구성한 위원회는 헨리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교황청은 1401년에 이 결정을 번복했지만, 헨리는 무시했다. 결국 정적들은 주교가 노리치 대성당 지부 및 기타 종교 공동체의 내부 문제에 간섭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한편, 헨리는 1382년부터 이단으로 정죄된 롤라드파 탄압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 토머스 월싱햄은 그가 잉글랜드의 다른 주교들과는 달리 신앙에 헌신적이었다며 칭송했다. 이에 따르면, 헨리는 “이 사악한 종파의 누구든지 그의 교구에서 감히 설교한다면 그는 불에 던져지거나 참수되어야 한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그러나 롤라드파의 일원이었던 노퍽 대리 주교 윌리엄 소트리가 1393년 5월 1일 헨리의 심문을 받았을 때 자신이 롤라드파임을 공개적으로 부인했을 때 큰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 이후 윌리엄 소트리는 런던으로 이주한 후 비밀리에 롤라드파 신앙을 전도하다가 토머스 아룬델 대주교에게 고발당한 뒤 1401년 유죄 판결을 받고 사슬에 묶인 채 화형에 처해졌다.
1399년 곤트의 존의 아들인 블롱브로크의 헨리가 리처드 2세에 반기를 들고 대다수 영주들이 이에 동참했을 때, 그는 리처드 2세에 대한 충성을 유지했다. 그는 교구를 세 명의 대리자에게 맡기고 잉글랜드 호국경을 맡고 있던 랭글리의 에드먼드와 합세해 아일랜드에서 귀환하는 리처드 2세와 합류하려 했다. 그러나 에드먼드는 버클리 성에서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블롱브로크의 헨리에게 가담했고, 그는 반란에 가담하기를 거부했다가 체포된 뒤 런던 탑에서 며칠간 억류되었다가 풀려났다. 1399년 10월 6일 블롱브로크의 헨리가 의회에서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로 선포되었을 때 참여했다.
이후 헨리의 노리치에서의 권력은 유명무실해졌고, 랭커스터 왕조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기사 토머스 아핑햄이 노리치 일대를 실제로 통치했다. 1400년 1월, 헨리의 조카인 토머스 르 디스펜서를 포함한 귀족들이 리처드 2세를 복위시키기 위한 음모를 꾸몄지만 도중에 발각되었고, 토머스 등은 처형되었다. 아핑햄은 헨리 역시 이에 관여했다고 비난했고, 그는 필사적으로 부인하며 헨리 4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401년, 헨리 4세는 그를 사면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조용히 지내던 그는 1406년 8월 23일에 사망했고, 노리치 대성당의 중앙 제단 앞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