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3 13:26:56

모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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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롱 전투
영어: Battle of Mauron
프랑스어: Bataille de Mauron
파일:모롱 전투.jpg
시기 1352년 8월 14일
장소 프랑스 브르타뉴 모롱
원인 잉글랜드 왕국 프랑스 왕국의 브르타뉴 패권 경쟁
교전국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왕국 파일:프랑스 왕국 국기(12세기-13세기).svg.png 프랑스 왕국
지휘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월터 벤틀리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로버트 놀스
파일:프랑스 왕국 국기(12세기-13세기).svg.png 기 2세 드 네슬
파일:프랑스 왕국 국기(12세기-13세기).svg.png 로구스 드 엥거스트
병력 2,000명 9.000명
피해 막대한 피해 기사 500명. 이중 별 기사단 89명 전사
결과 잉글랜드의 승리.
영향 프랑스 왕국의 브르타뉴 공세 단념.
1. 개요2. 상세

[clearfix]

1. 개요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 시기인 1352년 8월 14일, 브르타뉴의 모롱 평원에서 잉글랜드군과 프랑스군이 맞붙은 전투.

2. 상세

1352년 1월, 돈캐스터의 존이라는 이름의 향사가 이끄는 잉글랜드 분견대가 칼레에서 9.7km 떨어진 요새인 긴 성을 기습 공략했다. 휴전 기간에 중요한 요충지를 뺏긴 것에 격분한 프랑스 국왕 장 2세는 그 해 5월 프랑스 북동부 전선 사령관 조프루아 드 샤르니에게 긴 요새를 탈환하라고 명령했다.( 긴 공방전) 그는 이와 더불어 1341년 내전 발발 이래 잉글랜드와 지속적으로 충돌하고 있는 브르타뉴 역시 석권하기로 마음먹고, 기 2세 드 네슬에게 브르타뉴 원정을 맡겼다.

기 2세 드 네슬은 왕명을 받들어 브르타뉴의 도시 렌에 병력을 소집한 뒤 플로에르멜, 푸쥬헤 성을 포위 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일부 병력을 남겨서 포위를 이어가게 한 뒤 렌으로 가서 병력을 더 끌어모으려 했다. 한편 브르타뉴 주둔 영국 사령관 월터 벤틀리는 잉글랜드에서 데려온 1,500명의 중장병 및 장궁병을 이끌고 두 곳을 구하기 위해 행진했다. 그는 포위군을 가볍게 격파하고 플로에르멜에 있던 브르타뉴의 대리 수비대장 로버트 놀스와 합세했다.

기 2세는 벤틀리가 포위망을 뚫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쳐부수기 위해 9,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출진했다. 벤틀리는 이에 대응해 1352년 8월 14일 렌에서 약 30마일 떨어진 모롱 마을 동쪽 언덕 꼭대기 가장자리에 전투 대형을 결성하고, 각 측면에 기병과 궁수병을 배치했으며, 중앙에 중장병을 배치했다. 그 뒤에는 숲과 나무 울타리가 있었다. 우익 부대 앞에는 브렘빌리 성이 계곡 위에 세워져 있었다.

이윽고 전장에 도착한 기 2세는 적의 병력이 2,000명 밖에 안 된 걸 보고 벤틀리에게 사절을 보내 이 점을 지적하면서 프랑스를 떠나기로 약속한다면 전장에서 철수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제안했다. 벤틀리가 제안을 거부하자, 기 2세는 적을 전투 대형을 결성했다. 로구스 드 엥거스트가 이끄는 프랑스-브르타뉴 기병대는 좌익에 배치되었고, 나머지 부대는 말에서 내려서 도보로 적진을 공격할 준비를 갖췄다.

이윽고 전투 개시 나팔이 불어오자, 장이 이끄는 프랑스 좌익 기병대가 잉글랜드 우익 궁수대를 향해 돌진했다. 잉글랜드 궁수들은 자신들을 달려오는 적을 향해 일제 사격을 가했지만, 적군이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달려들자 겁을 집어먹고 숲속으로 달아났다. 그 사이, 말에서 내린 프랑스-브르타뉴 주력 부대는 언덕을 기어올라 잉글랜드의 중앙 중장병 부대를 공격해 수목 경계선으로 밀어붙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측에 있던 프랑스 병사들이 언덕의 훨씬 더 가파른 부분에 직면해 전진 속도가 느려졌다. 벤틀리의 좌익 궁수대는 이 기회를 틈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적을 향해 화살을 계속 퍼부을 수 있었다.

계속되는 화살 세례에 견디지 못한 프랑스 우익 부대가 후퇴하자, 궁잉글랜드 좌익 궁수들은 검과 도끼를 챙기고 중앙에 밀집한 적군의 측면을 요격했다. 이에 전의가 꺾인 프랑스 중장병들은 언덕으로 밀려났다. 이 무렵 잉글랜드 우익 궁수대를 격파하고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던 로구스 드 앵거스트는 위기에 빠진 중앙의 아군 부대를 구하기 위해 방향을 틀었지만, 우익 궁수들이 전열을 가다듬고 로구스가 이끄는 군대의 발목을 잡는 바람에 제때에 이동하지 못했다.

몇 시간이 지난 후 측면이 찔린 상황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프랑스군이 등을 돌리기 시작하자, 벤틀리의 중장병들은 즉시 적군을 추격했다. 이에 프랑스군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패주했지만, 전투에 참석했던 별 기사단 89명 만은 끝까지 항전했다가 전원 사살되었다. 프랑스 사령관 기 드 네슬도 전사했으며, 프랑스 기사 500명이 추가로 죽었다고 전해진다. 잉글랜드군의 사상자는 알려진 바 없지만, 에드워드 3세가 브르타뉴 방면 잉글랜드군의 전력 손실이 심하다는 소식을 듣고 원군을 보내줘야 했던 것을 보면 역시 많은 손실을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

모롱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접한 장 2세는 브르타뉴에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고 칼레에 온 신경을 집중하기로 했다. 잉글랜드군은 긴 공방전에서 승리한 뒤 칼레 주변 습지를 통과하는 모든 진군로에 요새를 건설해 칼레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다. 프랑스군은 이에 대응해 칼레 인근 마을 60곳에 요새를 설치했다. 그 후 양자는 몇 달 동안 대치하다가 교황 인노첸시오 6세의 중재에 따라 1353년 초 긴에서 휴전 협상을 시작했고, 1353년 4월 6일 긴 휴전 협약 초안을 마련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절들은 교황 앞에서 조약을 비준하기 위해 그 해 겨울 아비뇽을 방문했다. 그러나 장 2세가 협약 조건을 자기에게 좀더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전쟁을 재개하기로 하면서, 휴전 협약은 성립되지 않았다.
[1] 일설에 따르면, 벤틀리는 전투 초반에 로구스 드 엥거스트의 돌격에 제대로 맞서지 않고 도주한 잉글랜드 장궁병 30명을 집단 처형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