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06 21:33:52

컬블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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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블린 전투
영어: Battle of Culblean
파일:컬블린 전투 기념비.jpg
시기 1335년 11월 30일
장소 스코틀랜드 왕국 애버딘셔 디넷 인근 컬블린 숲
원인 잉글랜드 왕국의 괴뢰왕인 에드워드 발리올을 축출하려는 스코틀랜드인들의 저항.
교전국 파일:스코틀랜드 국장.svg 스코틀랜드 왕국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잉글랜드 왕국
지휘관 파일:스코틀랜드 국장.svg 앤드류 머레이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데이비드 드 스트라스보기
병력 1,100명 3,000명
피해 미미함. 상당함
결과 스코틀랜드군의 승리
영향 잉글랜드 왕국의 스코틀랜드 지배력 약화.

1. 개요2. 상세

[clearfix]

1. 개요

1335년 11월 30일, 앤드류 머레이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저항군이 스코틀랜드 보안관 데이비드 드 스트라스보기의 잉글랜드군을 격파한 전투.

2. 상세

1333년 7월 19일,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할리돈 힐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에드워드 3세에 의해 스코틀랜드 국왕에 복위한 에드워드 발리올은 1333년 10월 스코틀랜드의 수도 퍼스에서 의회를 개최한 뒤 자신이 왕좌에 오르도록 도왔던 잉글랜드 귀족들에게 스코틀랜드 내 재산을 돌려줬다. 1334년 6월 19일, 발리올은 공식적으로 스코틀랜드 남동부의 8개 카운티를 잉글랜드에 양도했고, 에드워드 3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또한 데이비드 2세와 결혼했던 에드워드 3세의 여동생 조앤과 약혼했다.

그러나 발리올의 입지는 여전히 안전하지 않았다. 로버트 1세에게 추방당했다가 발리올과 함께 스코틀랜드에 복귀한 귀족들과 브루스 가문의 지지자들간의 갈등이 갈수록 심해졌고, 급기야 에이셔의 로버트 스튜어트와 리데스데일의 영주 윌리엄 더글러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데이비드 2세의 복위를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존은 1334년 8월 반란군을 피해 베릭 성으로 이동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스코틀랜드를 무력으로 정복하기로 마음먹고, 1334년 말에 스코틀랜드를 침공했다. 그러나 겨울 추위로 인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철수해야 했다.

1335년 7월, 에드워드 3세는 많은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를 재차 침공해 로우랜드를 휩쓸었다. 이에 로버트 스튜어트와 제3대 머레이 백작 존 랜돌프 등 여러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에드워드 3세의 강력한 군대를 이길 수 없다고 여기고 항복을 결정하고 1335년 8월 18일 퍼스에서 에드워드 발리올을 스코틀랜드의 유일한 국왕으로 받들며, 로우랜드가 잉글랜드의 수중에 넘어가고 에드워드 3세를 스코틀랜드의 진정한 주군으로 받들겠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9대 마치 백작 패트릭 5세 드 던바와 리데스데일의 기사 윌리엄 더글러스는 에트릭 포레스트와 팬트랜드 둔덕에서 은신해 저항군을 규합했다. 그해 9월, 덤바턴에서 집결한 반란군은 윌리엄 월레스의 전우로서 에드워드 1세에 맞서 싸운 독립투사 앤드류 머레이의 아들인 앤드류 머레이를 스코틀랜드의 호국경으로 추대했다.

1335년 10월, 에드워드 발리올에 의해 북부 스코틀랜드 보안관을 맡은 데이비드 드 스트라스보기는 3,000명을 이끌고 프랑스로 망명한 스코틀랜드 국왕 데이비드 2세의 누이인 크리스티나 브루스가 방어하던 킬드러미 성을 포위했다. 이 소식을 접한 앤드류 머레이는 자신의 아내이기도 한 크리스티나 브루스를 구하기 위해 800명을 이끌고 킬드러미 성으로 향했다. 도중에 디강에서 북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크레이그 출신의 존이 이끄는 킬드러미 민병대 300명이 가세했다. 스트라스보기는 머레이가 접근하기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군대를 돌려 머레이를 요격하러 이동했다.

1335년 11월 29~30일 밤, 머레이의 군대는 스트라스보기를 기습하기 위해 숲길을 따라 이동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정찰병들이 그들을 발견하고 즉시 숙영지에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고, 스트라스보기는 즉시 전투 태세를 갖췄다. 이윽고 11월 30일 새벽, 머레이는 숙영지 인근에 이르렀을 때 스트라스보기가 전투 준비를 갖춘 걸 보고 군대를 둘로 나눴다. 리데스데일의 기사 윌리엄 더글러스가 선봉대를 맡았고, 머레이는 후위대를 이끌었다. 스트라스보기가 전투 대열을 형성하자, 윌리엄은 마치 적의 방어 태세에 직면하여 망설이는 듯 멈춰 섰다. 이에 스트라스보기는 적이 겁을 집어먹고 있다고 여기고 진영에서 출진해 단숨에 끝장내려 했다. 윌리엄이 병사들을 이끌고 전면에서 잉글랜드군에 맞서 싸우는 사이, 앤드류 머레이가 이끄는 후위대가 적의 노출된 측면을 요격했다. 전면에 고정된 채 측면에서 급습당한 스트라스보기의 군대는 곧 무너졌고, 스트라스보기는 항복을 거부하고 항전하다가 토머스 코민을 포함한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전사했다.

컬블린 전투의 패배는 스코틀랜드 내 잉글랜드 세력의 쇠락을 초래했다. 머레이는 승전의 여세를 이어가 파이프의 쿠파르 성을 공략하고, 뒤이어 로진도르브 성을 포위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상황을 반전하기 위해 1336년 스코틀랜드 원정에 재차 착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