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티엘 전투 영어: Battle of Montiel 프랑스어: Bataille de Montie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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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369년 3월 14일 | |
장소 | 카스티야 연합 왕국 사우다드레알 지방 몬티엘 | |
원인 | 엔리케 2세와 페드로의 카스티야 연합 왕국 왕위 계승 전쟁 | |
교전국 |
페드로파 카스티야 연합 왕국 나스르 왕조 세파르딤 |
엔리케 2세파
카스티야 연합 왕국 프랑스 왕국 |
지휘관 | 페드로 |
엔리케 2세 카스티야의 텔로 알폰소 베르트랑 뒤 게클랭 |
병력 | 무어인 2만 명을 포함한 4만 명[1] | 프랑스군 2,000명이 포함된 수만 병력. |
피해 | 막대함 | 알려지지 않음. |
결과 | 엔리케 2세-프랑스 연합의 승리. | |
영향 | 엔리케 2세의 집권과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친불정책 확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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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369년 3월 14일,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엔리케 2세를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으로 복위시키기 위해 카스티야로 진군하여 나스르 왕조와 연합한 페드로를 결정적으로 격파한 전투.2. 배경
백년전쟁이 발발한 이래, 프랑스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을 상대국을 꺾기 위해 강력한 동맹을 찾으려 애썼다. 카스티야 연합 왕국은 동맹으로 거론된 국가들 중 최우선 순위에 들어가는 국가였다. 프랑스 왕국은 이들이 보유한 우수한 선원들을 용병으로 고용해 브리튼 섬과 영국 해협을 연이어 습격해 큰 타격을 입혔고, 잉글랜드 왕국 역시 카스티야 전사들을 용병으로 고용해 프랑스 본토 침략에 써먹었다. 카스티야 국왕 페드로는 초기엔 부르봉 공작 피에르 1세의 딸이자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조카인 블랑슈와 결혼하는 등 프랑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지만, 블랑슈와 사이가 틀어져서 그녀를 감옥에 가두었다가 끝내 죽여버린 뒤에는 잉글랜드와 가까워졌다.1360년 잉글랜드와 브레티니 협약을 맺으면서 백년전쟁의 제1기를 마무리한 프랑스는 전후 각지에서 약탈에 전념하는 대규모 용병들의 횡포에 골머리를 앓다가 이들을 다른 곳에 보내기 위해 잉글랜드와 전면 대결을 벌이지 않는 선에서 또다른 전쟁을 모색했다. 마침 페드로와와의 내전에서 패배한 뒤 프랑스로 망명한 엔리케 왕자는 깃발 색깔 때문에 소위 "백인 중대"라고 불리는 용병들을 고용했다. 그는 프랑스에게 막대한 이권을 넘겨줄 테니 자신을 복위시켜 달라고 청했고, 안 그래도 카스티야를 자국의 편에 끌어들이고 싶었던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는 흔쾌히 승낙했다.
1365년 3월, 프랑스 지휘관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엔리케와 함께 카스티야로 진군했다. 페드로는 엔리케가 용병대를 이끌고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급히 톨레도로 돌아간 뒤 아라곤의 정복지에 주둔한 모든 군대를 철수시키고 엔리케와 맞서 싸우려 했다. 그러나 귀족과 장군들이 잇따라 엔리케에게 귀순하고 아빌라, 세고비아, 탈라베라, 마드리드, 쿠엥카 등 여러 도시가 새 왕에게 경의를 표하자, 페드로는 도저히 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가스코뉴로 달아난 뒤, 당시 가스코뉴가 포함된 아키텐 공작을 역임하고 있던 흑태자 에드워드와 접촉했다. 그는 잉글랜드 왕국과 나바라 왕국이 자신을 복위시켜주는 대가로 비스키야와 카스트로, 우르디알레스 일대를 잉글랜드에 넘기고 기푸스코아, 알라바 및 라 리오하 일부를 나바라 왕국에 넘긴다는 내용의 리부른 비밀 협약을 체결했다.
1367년 2월, 흑태자 에드워드는 심복들과 함께 6,000가량의 아키텐 병사, 2,000 가량의 잉글랜드군, 잉글랜드 병사 1,000명, 나바라 군인 300명 등 10,000명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카스티야 왕국에 진입했다. 엔리케 2세와 베르트랑 뒤 게클랭은 이에 맞섰지만, 1367년 4월 3일에 벌어진 나헤라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게클랭 등 프랑스 고위 장교들은 생포된 뒤 샤를 5세가 막대한 몸값을 지불한 뒤에야 풀려났고, 엔리케 2세는 프랑스로 망명했다. 페드로는 나헤라 전투 승리 후 마드리드에 입성하여 카스티야 국왕으로 복위한 뒤 자신을 도와준 것에 보답하고자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170 캐럿짜리 붉고 거대한 보석을 선물하니, 이것이 바로 흑태자의 루비이다.
그러나 카스티야인들은 페드로가 잉글랜드와 나바라 왕국에게 많은 영토를 넘기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격분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재정이 파탄난 지 오래라서 사전에 보상금으로 주기로 했던 돈을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페드로는 어떻게든 에드워드와 맺은 약속을 지키고자 애썼지만, 에드워드는 그가 약속을 실현시킬 가망이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아라곤 국왕과 비밀리에 접촉해 카스티야 왕국을 잉글랜드, 아라곤, 나바라, 포르투갈 왕국이 4부분으로 나눠 가지는 방안을 논의했다. 그러나 군중에 전염병이 돌고 급기야 자신마저 중병으로 앓아눕게 되자, 에드워드는 이베리아 반도에 더 있어봐야 답이 없다고 여기고 보급품을 마련하기 위해 약탈을 자행하며 가스코뉴로 귀환했다. 이때 그는 페드로가 빚을 갚게 할 보증인으로 삼고자 페드로의 두 딸 콘스탄사와 이사벨을 인질로 데리고 갔다.
이리하여 페드로와 잉글랜드간의 연합이 끊어지자, 엔리케 2세와 게클랭은 이를 호기로 여기고 1368년 9월 군대를 일으켜 카스티야 왕국으로 진격했다. 부르고스, 코르도바, 팔렌시아, 바야돌리드, 하옌 등 여러 도시들이 엔리케 2세를 즉각 지지했고, 갈리시아와 아스투리아스는 페드로를 계속 지원했다. 엔리케 2세가 톨레도로 향할 때 안달루시아로 후퇴한 페드로는 나스르 왕조에 지원을 요청했다. 백년전쟁 초기에 관한 주요 정보를 제공한 연대기 작가 장 프루아사르에 따르면, 2만에 달하는 무어인이 이에 응해 페드로에게 가담하면서, 페드로의 군세가 4만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이를 명백한 과장이라고 간주한다. 여기에 엔리케 2세가 1355년 톨레도에서 페드로를 따르던 유대인 1,200명을 학살한 것에 깊은 반감을 품고 있던 세파르딤이 대거 가담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페드로를 끝까지 따르는 톨레도를 포위 공격하고 있던 엔리케 2세는 페드로가 대군을 이끌고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군사 회의를 소집했다. 게클랭은 일부 병력만 남겨서 톨레도를 그대로 포위하게 하고, 주력군은 페드로를 향해 진군하면서 첩자들을 사방에 보내 페드로의 군대에 대한 정확하고 세세한 정보를 파악하게 하자고 제안했다. 엔리케 2세는 그의 제안에 따르기로 마음먹고, 전군에 출격 명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내전의 승자를 판가름할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전투 경과
1369년 3월 14일 아침, 별다른 정찰을 하지 않은 채 몬티엘 인근을 행진하던 페드로군 선봉대는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 기사들의 갑작스러운 습격에 직면했다. 기사들은 "저들은 기독교인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교도이니 포로를 잡지 말고 죽여라!"라는 게클랭의 지시에 따라 닥치는 대로 쳐 죽였다. 페드로는 선봉대가 순식간에 궤멸되자 급히 주변의 남은 전사들을 전사들을 집결시켰고, 후위대에게 가능한 한 빨리 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 전에 집결을 완료한 엔리케 2세-프랑스 연합군이 맹공을 퍼부었다. 페드로의 군대 상당수를 차지하는 무어인들은 최선을 다해 맞서 싸웠지만 프랑스 기사와 제노바 석궁병의 압도적인 전투력에 밀린 끝에 퇴각했고, 다른 이들은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사방으로 뿔불이 흩어졌다.페드로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뒤 몬티엘의 한 요새로 피신한 후 그곳에서 적군에게 포위되었다. 그는 충실한 기사 멘 로드리게스 데 사나브리아를 엔리케 2세와 함께 있던 게클랭에게 보내 그에게 여러 영지를 제공하는 대가로 자신이 탈출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게클랭은 이를 받아들이겠다며, 3월 22일 밤에 변장한 채 몬티엘 성을 빠져나오게 했다. 페드로는 몇몇 수행원만 대동해 성밖으로 나온 뒤 게클랭의 안내를 받으며 한 천막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엔리케 2세가 무장한 채 기다리고 있었고, 천막 안으로 들어간 페드로는 엔리케 2세의 단검에 찔려 죽었다. 엔리케 2세는 페드로의 수급을 벤 뒤 여전히 그를 지지하고 있는 성채와 마을에 널리 보여주며 항복을 유도했다. 이에 몬티엘과 톨레도 등 페드로를 따랐던 도시들이 항복하면서, 카스티야 내전이 막을 내렸다.
4. 결과
게클랭은 페드로를 끝장내고 엔리케 2세를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으로 복위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엔리케 2세로부터 몰리나 공작에 선임되었으며, 연간 2만 리브르에 달하는 수입을 받게 되었다. 이후 카스티야 연합 왕국은 프랑스 왕국의 충실한 동맹자가 되었고, 카스티야 해군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군은 1372년 라 로셸 해전에서 잉글랜드 해군을 격파하고 아키텐의 주요 항구 도시인 라 로셸을 공략했다.
[1]
장 프루아사르의 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