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29 23:03:56

나헤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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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헤라 전투
영어: Battle of Najera
프랑스어: Bataille de Nájera
파일:Battle_najera_froissart.jpg
시기 1367년 4월 3일
장소 카스티야 연합 왕국 라리오하 지방 나헤라 마을 북동쪽 평원
원인 카스티야 내전에 개입한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의 대결
교전국
파일:카스티야 연합 왕국 국기(1230-1406).svg.png 페드로파 카스티야 연합 왕국
파일:800px-Royal_Arms_of_England_(1399-1603).svg.png 잉글랜드 왕국
파일:카스티야 연합 왕국 국기(1230-1406).svg.png 엔리케 2세파 카스티야 연합 왕국
파일:800px-France_moderne.svg.png 프랑스 왕국
지휘관 파일:카스티야 연합 왕국 국기(1230-1406).svg.png 페드로
파일:카스티야 연합 왕국 국기(1230-1406).svg.png 마요르카의 하이메 4세
파일:800px-Royal_Arms_of_England_(1399-1603).svg.png 흑태자 에드워드
파일:800px-Royal_Arms_of_England_(1399-1603).svg.png 장 3세 드 그레일리
파일:800px-Royal_Arms_of_England_(1399-1603).svg.png 가스통 드 푸아
파일:800px-Royal_Arms_of_England_(1399-1603).svg.png 곤트의 존
파일:800px-Royal_Arms_of_England_(1399-1603).svg.png 존 챈더스
파일:800px-Royal_Arms_of_England_(1399-1603).svg.png 장 1세 다르마냐크
파일:카스티야 연합 왕국 국기(1230-1406).svg.png 엔리케 2세
파일:카스티야 연합 왕국 국기(1230-1406).svg.png 카스티야의 텔로 알폰소
파일:800px-France_moderne.svg.png 베르트랑 뒤 게클랭
파일:아라곤 왕국 국장.svg 알리폰소 4세 데 리바고르자
병력 10,000명 4,500명
피해 불명 불명
결과 페드로-잉글랜드 연합의 승리.
영향 페드로-잉글랜드 연합의 단절과 엔리케 2세-프랑스 동맹의 반격
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4.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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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367년 4월 3일, 흑태자 에드워드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페드로를 카스티야 국왕으로 복위시키기 위해 카스티야로 원장하여 엔리케 2세와 동맹을 맺은 베르트랑 뒤 게클랭 휘하 프랑스군을 격파한 전투.

2. 배경

백년전쟁이 발발한 이래, 프랑스 왕국 잉글랜드 왕국을 상대국을 꺾기 위해 강력한 동맹을 찾으려 애썼다. 카스티야 연합 왕국은 동맹으로 거론된 국가들 중 최우선 순위에 들어가는 국가였다. 프랑스 왕국은 이들이 보유한 우수한 선원들을 용병으로 고용해 브리튼 섬과 영국 해협을 연이어 습격해 큰 타격을 입혔고, 잉글랜드 왕국 역시 카스티야 전사들을 용병으로 고용해 프랑스 본토 침략에 써먹었다. 카스티야 국왕 페드로는 초기엔 부르봉 공작 피에르 1세의 딸이자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조카인 블랑슈와 결혼하는 등 프랑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지만, 블랑슈와 사이가 틀어져서 그녀를 감옥에 가두었다가 끝내 죽여버린 뒤에는 잉글랜드와 가까워졌다.

1360년 잉글랜드와 브레티니 협약을 맺으면서 백년전쟁의 제1기를 마무리한 프랑스는 전후 각지에서 약탈에 전념하는 대규모 용병들의 횡포에 골머리를 앓다가 이들을 다른 곳에 보내기 위해 잉글랜드와 전면 대결을 벌이지 않는 선에서 또다른 전쟁을 모색했다. 마침 페드로와와의 내전에서 패배한 뒤 프랑스로 망명한 엔리케 왕자는 깃발 색깔 때문에 소위 "백인 중대"라고 불리는 용병들을 고용했다. 그는 프랑스에게 막대한 이권을 넘겨줄 테니 자신을 복위시켜 달라고 청했고, 안 그래도 카스티야를 자국의 편에 끌어들이고 싶었던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는 흔쾌히 승낙했다.

1365년 3월, 프랑스 지휘관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엔리케와 함께 카스티야로 진군했다. 그는 프랑스와 카스티야 사이의 산악지대에 자리잡은 나바라 왕국의 국왕 카를로스 2세에게 카스티야 왕국으로 가려 하니 통과시켜달라고 요구했다. 카를로스 2세는 공식적으로는 카스티야 국왕 페드로와 동맹을 맺고 있었지만 많은 돈을 받는 대가로 통과시켰다. 나중에 마음을 바꿔 통과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대신 그들이 나바라 왕국을 통과하면서 약탈을 최소화하기 위해 많은 돈을 지불했다.

부르고스에서 머물고 있던 페드로는 엔리케가 용병대를 이끌고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급히 톨레도로 돌아간 뒤 아라곤의 정복지에 주둔한 모든 군대를 철수시키고 엔리케와 맞서 싸우려 했다. 그러나 귀족과 장군들이 잇따라 엔리케에게 귀순하고 아빌라, 세고비아, 탈라베라, 마드리드, 쿠엥카 등 여러 도시가 새 왕에게 경의를 표하자, 페드로는 도저히 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366년 초 세비야를 떠나 포르투갈 왕국에 망명하려 했다. 그러나 포르투갈 국왕 페드루 1세가 망명을 거부하자, 그는 알부케르케로 피신하려 했지만 그곳 시민들이 성문을 걸어잠그고 입성을 거부하자 갈리시아로 피신했다. 이후 갈리시아까지 쳐들어오는 엔리케 2세를 피해 가스코뉴로 달아난 뒤 바욘에서 흑태자 에드워드와 만났다.

페드로는 잉글랜드 왕국과 나바라 왕국이 자신을 복위시켜주는 대가로 비스키야와 카스트로, 우르디알레스 일대를 잉글랜드에 넘기고 기푸스코아, 알라바 및 라 리오하 일부를 나바라 왕국에 넘긴다는 내용의 리부른 비밀 협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카를로스는 1366년 12월 엔리케 2세와 로그로뇨에서 만나서 더 많은 보상금을 받는 대가로 잉글랜드군의 통과를 저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에드워드는 이 소식을 전해듣고 이중계약을 맺은 그에게 분노해 나바라 국경지대에 군대를 집결시키고 원래 약속한 대로 하라고 요구했다. 카를로스는 급히 에드워드를 찾아가서 자신이 엔리케 2세와 거래한 적이 없다면서, 잉글랜드군이 산길을 통과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카를로스를 신용할 수 없다고 여기고 올리버 드 매니에게 카를로스를 붙잡아놓게 했다. 그 후 카를로스는 흑태자 에드워드가 엔리케 2세를 몰아내고 페드로를 카스티야 국왕으로 복위시킬 때까지 잉글랜드 군영에 억류되었다.

1367년 2월, 흑태자 에드워드는 심복들과 함께 6,000가량의 아키텐 병사, 2,000 가량의 잉글랜드군, 잉글랜드 병사 1,000명, 나바라 군인 300명 등 10,000명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카스티야 왕국에 진입했다. 엔리케 2세는 이에 맞서고자 병력 소집령을 내렸지만, 그를 위해 푸아티에 전투의 영웅인 에드워드와 싸우려는 카스티야인은 얼마 되지 않았다. 4월까지 모인 병력은 2,500명에 불과했고, 프랑스 용병 1,000명과 아라곤 출신 귀족들이 제공한 1,200명이 그 뒤를 따랐다.

전력상 절대 불리했기에, 게클랭 등 많은 장교들은 엔리케 2세에게 전투를 피하라고 충고했다. 프랑스 국왕 샤를 5세 역시 압도적으로 유리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적군과 회전을 벌여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그러나 카스티야 신하들은 그가 침략자와 싸우지 않는다면 카스티야에 남아있는 지지자들이 뿔뿔이 사라질 거라고 충고했다. 여기에 흑태자 에드워드가 일부러 엔리케 2세를 깔아뭉개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자, 엔리케 2세는 적과 회전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이리하여 나헤라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전투 경과

파일:나헤라 전투도.jpg

1367년 4월 3일, 엔리케 2세와 페드로는 나헤라 마을을 옆에 끼고 나헤릴라 강을 앞에 둔 고지대에 자리를 잡았다. 얼마 후 전장에 도착한 에드워드는 군대를 재편성했다. 잉글랜드군과 브르타뉴 출신 맨앳암즈가 최전선에 배치되었고, 곤트의 존, 존 챈더스 등 여러 원수가 이들을 지휘했다. 두번째 대열에서는 에드워드가 가스코뉴인과 함께 본군을 이끌었고, 우익에는 알브레 영주와 아르마냐크 백작, 좌익에는 지난날 코르슈렐 전투에서 게클랭에게 굴욕을 맞보았던 장 3세 드 그레일리가 지휘했다.

에드워드는 4월 3일 새벽이 되기 훨씬 전에 적지에 접근했고, 적에 충분히 접근하자 기사들에게 말에서 내려 적진에 침투하라고 명령했다. 카스티야-프랑스 연합군은 소음을 듣고 적이 근처에 왔다는 것을 직감하고 전투 대열을 형성했다. 그러나 적의 압도적인 규모를 목도한 많은 카스티야인들이 겁에 질러 달아나거나 아예 적에게 귀순했다. 이에 게클랭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선제 공격하기로 마음먹고, 최전선에 배치된 프랑스군과 카스티야 기마병에게 돌격을 명령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곤트의 존과 존 챈더스가 지휘하는 병사들을 패퇴시켰으나, 에드워드가 신속히 원군을 보내자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한편, 엔리케 2세의 형제인 텔로 알폰소는 좌익에서 카스티야 경기병대와 함께 돌격했으나 잉글랜드 장궁병들이 화살비를 퍼붓자 뿔뿔이 흩어졌다.

이윽고 잉글랜드군이 적의 저항을 뚫고 게클랭의 중앙 부대를 포위하기 시작하자, 엔리케는 카스티야 중 기병들을 이끌고 게클랭의 측면을 공격하는 황태자 에드워드의 부대를 급습했다. 그러자 궁수들은 카스티야 군마들에게 화살을 퍼부었고, 많은 기사가 말을 잃고 낙마하거나 말을 잃을 것을 우려해 전장을 이탈했다. 에드워드는 적 중기병들을 흩어지게 만든 여세를 이어가 프랑스군을 포위 섬멸했고, 뒤이어 전장에 여전히 남아있는 카스티야인들을 향해 맹공을 퍼부어 패주시켰다.

에드워드는 마요르카의 하이메 4세가 이끄는 예비 아라곤 기병들에게 패잔병들을 가능한 한 계속 추격해 섬멸하고 귀족들을 생포하게 했다. 엔리케 2세는 자신의 종자 중 한 명의 말을 타고 전장을 가까스로 벗어나 프랑스로 망명했고, 게클랭은 사로잡혔다가 그를 소중한 인재로 여긴 샤를 5세가 몸값을 지불한 덕분에 프랑스로 돌아갔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페드로는 전투가 끝난 뒤 자신에게 반역한 카스티야 귀족들을 모조리 처형하려 했지만, 페드로가 이미 죽여버린 자들 외에 많은 이가 에드워드의 제지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4. 이후

페드로는 나헤라 전투 승리 후 마드리드에 입성하여 카스티야 국왕으로 복위한 뒤 자신을 도와준 것에 보답하고자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170 캐럿짜리 붉고 거대한 보석을 선물하니, 이것이 바로 흑태자의 루비이다. 하지만 카스티야인들은 그가 잉글랜드와 나바라 왕국에게 많은 영토를 넘기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격분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재정이 파탄난 지 오래라서 사전에 보상금으로 주기로 했던 돈을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페드로는 어떻게든 에드워드와 맺은 약속을 지키고자 애썼지만, 에드워드는 그가 약속을 실현시킬 가망이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아라곤 국왕과 비밀리에 접촉해 카스티야 왕국을 잉글랜드, 아라곤, 나바라, 포르투갈 왕국이 4부분으로 나눠 가지는 방안을 논의했다. 그러나 군중에 전염병이 돌고 급기야 자신마저 중병으로 앓아눕게 되자, 에드워드는 이베리아 반도에 더 있어봐야 답이 없다고 여기고 보급품을 마련하기 위해 약탈을 자행하며 가스코뉴로 귀환했다. 이때 그는 페드로가 빚을 갚게 할 보증인으로 삼고자 페드로의 두 딸 콘스탄사와 이사벨을 인질로 데리고 갔다.

이리하여 페드로와 잉글랜드간의 연합이 끊어지자, 엔리케 2세는 1368년 9월 게클랭과 함께 카스티야 왕국에 돌아왔다. 부르고스, 코르도바, 팔렌시아, 바야돌리드, 하옌 등 여러 도시들이 엔리케 2세를 즉각 지지했고, 갈리시아와 아스투리아스는 페드로를 계속 지원했다. 엔리케 2세가 톨레도로 향할 때 안달루시아로 후퇴한 페드로는 군대를 집결시킨 뒤 1369년 3월 14일 몬티엘에서 격돌했다. 이 전투에서 참패한 페드로는 몬티엘의 한 요새로 피신한 뒤 적군에게 포위되었다.

페드로는 충실한 기사 멘 로드리게스 데 사나브리아를 엔리케 2세와 함께 있던 게클랭에게 보내 그에게 여러 영지를 제공하는 대가로 자신이 탈출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게클랭은 이를 받아들이겠다며, 3월 22일 밤에 변장한 채 몬티엘 성을 빠져나오게 했다. 페드로는 몇몇 수행원만 대동해 성밖으로 나온 뒤 게클랭의 안내를 받으며 한 천막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엔리케 2세가 무장한 채 기다리고 있었고, 천막 안으로 들어간 페드로는 엔리케 2세의 단검에 찔려 죽었다.

엔리케 2세는 페드로의 수급을 벤 뒤 여전히 그를 지지하고 있는 성채와 마을에 널리 보여주며 항복을 유도했다. 이후 엔리케 2세가 카스티야 국왕에 등극했고, 카스티야 왕국은 이후로 프랑스의 든든한 동맹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