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통 전투 영어: Battle of Anthon 프랑스어: Bataille d'Anth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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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430년 6월 11일 | |
장소 | 프랑스 왕국 도피네 안통 [1] | |
원인 | 도피네 지방을 장악하려는 오랑주 공국의 시도 | |
교전국 | 오랑주 공국 |
[[프랑스 왕국| ]][[틀:국기| ]][[틀:국기| ]] |
지휘관 | 루이 2세 드 샬롱아를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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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 6세 드 고쿠르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움베르 드 그로슬리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로드리고 데 빌란드란도 |
]][[틀:깃발| ]][[틀:깃발| ]]
병력 | 4,000명 | 1,600명 |
피해 | 막대함. | 미미함. |
결과 | 프랑스군의 승리. | |
영향 | 프랑스 왕국의 도피네 통제 공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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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430년 6월 11일, 프랑스 왕국 남동쪽 도피네(Dauphiné) 지역의 패권을 둘러싸고 부르고뉴 공국과 사보이아 공국의 지원을 받은 오랑주 공국과 샤를 7세를 추종하는 아르마냑파가 맞붙은 전투.2. 배경
1420년대 후반, 프로방스에 위치한 작은 공국인 오랑주 공국의 공작인 루이 2세 드 샬롱아를레는 프랑스 왕국이 백년전쟁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조그마한 영토를 대폭 확장하여 도피네 전역을 석권할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는 1428년부터 크헤미유와 론 강 사이의 벨랭 일대에 있는 요새 공략에 착수해 콜롱비에, 안통, 생로랑 드 뮈르, 푸지냥, 아지우 일대의 여러 성채를 점령하고 수비대를 배치했다. 당시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는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이고 있던 터라 그의 공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1430년, 루이 2세 드 샬롱아를레는 부르고뉴 공국과 사보이아 공국의 지원을 토대로 도피네 전역을 석권하기 위한 대규모 공세를 개시하려 했다. 사실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로부터 부르고뉴의 대리권을 부여받은 것을 근거로 자신과 갈등을 벌이기도 했고, 샤를 7세 편을 들었던 적도 있었던 그를 그리 신뢰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를 잘만 이용하면 샤를 7세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거라 여기고 지원했다. 한편, 사보이아 공작 아메데오 8세는 그를 통해 프랑스를 충분히 약화시킨 뒤 영토를 확장하고 싶었기에 역시 상당한 장병과 군자금을 제공했다.
한편, 샤를 7세에 의해 도피네 총독으로 선임된 라울 6세 드 고쿠르는 루이 2세가 부르고뉴와 사보이아로부터 대규모 병력을 지원받고 한 곳에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리옹의 집행관인 움베르 드 그로슬리가 이끄는 기병 300명을 소환했고, 부르봉 공작 샤를 1세로부터 보졸레와 돔브 출신의 보병대를 제공받았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오랑주 공작이 이끄는 군대를 상대할 수 없다고 여긴 그는 당시 자유 용병대장으로서 프랑스 남부 일대에서 약탈을 일삼아 "도적의 황제"라는 악명을 떨치고 있던 카스티야 출신의 용병대장 로드리고 데 빌란드란도를 고용했다. 로드리고는 1430년 3월 26일 강력한 전투력을 갖춘 용병 300명과 함께 합류했다.
5월 27일 코트 생 앙드레에 집결한 프랑스군 1,600명은 루이 2세가 점거한 요새들을 탈환하기 위해 공세를 벌이기로 했다. 그들은 먼저 오베리브를 탈환한 뒤 6월 7일 푸지냥을 탈환했고, 6월 8일 아지외를 공략했으며, 6월 10일 콜롱비에를 공략했다. 그날 저녁, 라울 6세 드 고쿠르는 군사 회의를 소집한 뒤 오랑주 공작이 곧 구원군을 이끌고 올 거라고 판단하고, 평지에서 싸우면 승산이 없으니 숲길에 매복하기로 했다. 한편, 루이 2세는 자기가 공략했던 요새들이 프랑스군에게 신속하게 공략당하고 있으며 콜롱비에도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4,000 가량의 병력을 안통에 집결시킨 뒤 콜롱비에를 구원하기로 했다.
3. 전투 경과
6월 11일, 루이 2세는 콜롱비에가 함락되었다는 것을 모른 채 안통에서 출발해 콜롱비에로 이어지는 부와 데 프렁쉬스(Bois des Franchises) 숲길을 따라 진군했다. 그러던 중 선두 부대가 용병대장 로드리고 데 빌란드란도가 이끄는 용병대와 마주쳤다. 루이 2세는 그들이 300명에 불과한 걸 보고 강행 돌파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양측면이 빼곡히 자란 숲에 뒤덮여 있었기 때문에, 오랑주군은 제대로 돌파하지 못하고 숲길에서 정체되었다.이때 숲 속에 숨어있던 라울 6세 드 고쿠르와 움베르 드 그로슬리가 이끄는 프랑스 병사들이 뛰쳐나와 적의 양 측면을 요격했고, 프랑스군에 고용된 롬바르드 기병대가 후방을 요격했다. 오랑주군은 사방에서 공격해오는 적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치다가 자기들끼리 밟아 죽거나 무기에 찔리면서, 수많은 이가 피살당했다. 이때 오랑주군에 가담했던 부르고뉴 장병 200명 이상이 레세르 습지에 빠져 익사했고, 600명 가량이 생포되어 몸값을 지불할 때까지 억류되었다. 루이 2세는 군대를 버리고 홀로 말을 몰아 론 강을 건너 탈출에 성공했고, 인근의 멕시미외 성으로 피신했다가 부르고뉴 공국으로 망명했다.
4. 이후
라울 6세 드 고쿠르는 마구가 달린 말 1,200마리와 많은 무기 및 갑옷을 크레미외에서 처분했고, 오랑주의 빨간색과 금색 깃발을 리옹의 생장 대성당에 전시하게 했다. 이후 안통으로 진군해 무혈 입성했고, 뒤이어 오랑주 수비대가 여전히 있던 팔라비에로 진군해 항복을 받아냈다. 이리하여 오랑주군이 빼앗았던 모든 성채를 탈환한 뒤, 로드리고 데 빌란드란도와 함께 오랑주로 진군해 6월 말부터 포위했고, 오랑주 시는 7월 3일에 항복했다. 뒤이어 오랑주 공국의 다른 지역도 잇따라 항복했다.프랑스 왕국은 안통 전투의 승리로 도피네 지방을 보전할 수 있었다. 라울 6세 드 고쿠르는 승리를 거둔 공적을 인정받아 샤를 7세의 첫번째 시종장에 선임되었고, 로드리고 데 빌란드란도는 퓌시냥을 영지로 수여받았다. 그리고 롬바르드 기병대를 이끌었던 테오도르 드 발페르그(Théodore de Valpergue)는 1435년부터 1458년까지 리옹의 총독이 되었다. 한편 루이 2세 드 샬롱아를레는 부르고뉴 공국에서 찬밥 취급받다가 1432년 샤를 7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영지를 돌려받았다.
현재 안통 전투 기념비가 자네이리아스 동쪽 도로에 세워져 있다.
[1]
현재 프랑스 이셰르 주 자네이리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