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17:44:14

자크리의 난

백년전쟁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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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
2.1. 크레시 전투 (1346): 정부에 대한 분노 2.2. 푸아티에 전투 (1356): 모든 귀족 계급으로 확대된 책임론2.3. 에티엔 마르셀의 난 (1358): 배후중상설
3. 진압4. 영향5. 같이보기

1. 개요

자크리의 난은 백년전쟁이 한창 진행중이던 1358년 5월 21일 프랑스 왕국 북동부에서 농민들이 귀족들에 대항하여 일으킨 민란이다.

와트 타일러의 난과 함께 중세에 일어난 가장 대표적인 민란이다.

2. 배경

2.1. 크레시 전투 (1346): 정부에 대한 분노

파일:hywcrafb1346.jpg
도시 대표들이 말했다. "폐하. 우선 전쟁을 하시는 동안 가까운 신하들에게 들은 조언들을 돌아보셔야 합니다. 그 조언에 따른 결과 폐하께선 모든 것을 잃고 아무것도 얻지 못하셨습니다. 뷔렁포스, 툰 레베크, 부빈, 에귀용과 그밖의 모든 전장에서 폐하를 따른 군대가 얼마나 크고 훌륭했는지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폐하께선 항상 막대한 비용을 들여 모집한 거대한 군대를 이끌고 명예를 지키기 위해 진군하셨으나 매번 굴욕적인 휴전을 구걸한 뒤 비겁하게 물러났습니다. 심지어 적은 수의 적군이 왕국의 심장부에 들어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347년 파리 삼부회 회의 기록

1339년 10월 22일, 1만이 조금 넘는 잉글랜드-독일 연합군과 약 2만 5천의 프랑스군이 프랑스 북동부 국경의 소도시 라 카벨 인근에서 대치했다. 잉글랜드군이 전장에 강력한 야전 진지를 구축해놓은 것을 본 필리프 6세는 군사 고문들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전투를 포기하고 후퇴한다.

1340년 9월 잉글랜드-독일-플랑드르 연합군에 포위당한 도시 투르네를 구하기 위해 프랑스의 대군이 도착했지만 필리프 6세는 또다시 전투를 포기하고 휴전을 체결했다.

1343년 1월 중순, 왕세자 장이 지휘하는 프랑스 대군이 브르타뉴 말레트르와에서 잉글랜드군과 대치했으나 마찬가지로 전투를 포기하고 휴전을 체결했다.

1346년 8월 13일 잉글랜드군이 결국 파리 시에서 하루 이내 거리인 푸아시까지 진군했다. 이에 필리프 6세는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푸아시의 다리를 부쉈다. 잉글랜드군이 고작 하루만에 임시교량을 설치해 센 강을 건너 파리 남쪽 교외에 이르자 필리프는 다시 생클루 다리를 부수며 센 강 북쪽으로 도망쳤다. 파리 시 앞에서마저 프랑스군이 전투를 회피하자 잉글랜드군은 동맹인 플랑드르 국경으로 후퇴한다. 필리프는 후퇴하는 잉글랜드군을 추격해서 함정으로 몰아넣지만 잉글랜드군은 운 좋게 길잡이를 찾아서 저지선을 돌파한다.

잉글랜드군이 솜 강을 건너자 필리프 6세는 추격을 포기했다. 마침 플랑드르군이 잉글랜드군의 작전에 호응해 남하하고 있었으므로 두 군대가 합류해서 다시 남쪽으로 역습을 가해 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필리프와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즉시 방어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때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국경 지역의 소도시 베뒨의 주민들의 결사항전에 플랑드르군의 진격이 저지되면서 잉글랜드군은 보급도 받지 못한 채 고립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필리프는 8월 26일 토요일 이른 아침부터 강행군을 시작해 오전 중 크레시 마을 근처에서 잉글랜드군을 따라잡았다.

그러나 크레시 전투는 잉글랜드군의 승리로 끝났다. 필리프는 먼저 제노바 쇠뇌수들을 투입해서 장궁병들을 견제하게 했지만, 급하게 행군하느라 대형 방패인 파비스 없이 쇠뇌를 장전하기도 어려운 미끄러운 바닥이라는 악조건에서 교전을 시작한 쇠뇌수들은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패주한다. 이 모습을 본 필리프와 몇몇 프랑스 지휘관들은 임금이 밀리면 전투를 거부하고 파업하기로 악명이 높은 제노바 용병들이 이번에도 또 배신했다고 오해하고는 쇠뇌수들을 공격해 학살했다.

이제 보병이나 궁병의 지원도 없이 기병만으로 적의 야전 진지를 공격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아마도 5번이나 적 앞에서 싸우지 않고 도망쳤다는 치욕을 감당할 수 없었을 필리프와 프랑스 기사들은 그대로 공격을 개시한다. 결국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중세 전쟁사에 유명한 크레시 전투는 1만여 명의 잉글랜드군이 3만여 명의 프랑스군을 패퇴시키며 잉글랜드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 크레시 전투의 그림자는 필리프 6세의 아들 장 2세의 치세에도 프랑스 정부를 족쇄처럼 얽매고 있었다. 군사전문가가 아닌 대다수의 프랑스 국민들은 잉글랜드군이 무섭도록 강하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3배 이상의 전력을 가진 프랑스군을 압살할 정도로 강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해할 수 없었다. 따라서 필리프 6세와 군사 고문들이 크레시 전투 이전에 1339년 라 카벨, 1340년 투르네, 1343년 말레트르와, 1346년 파리까지 총 4번이나 전투를 포기한 사실은 신중한 전략적 결단이라기보다는 겁쟁이의 행태로 인식되었다. 크레시 전투도 비겁하고 무능한 총신들이 강행군으로 지친 군사들을 조급하게 밀어붙여서 벌어진 어이없는 졸전이었다는 결론이 당대에 널리 인정받았다.

1347년 삼부회에서 발언한 평민 대표들은 정부에 대한 분노와 경멸을 숨기지 않았다. 이처럼 귀족이든 평민이든 프랑스인들은 국왕이 기사들을 이끌고 용감하게 전투에 나서서 명예로운 승리를 거두길 원했다. 나중에는 심지어 푸아티에 전투에서 패배하고 포로로 붙잡힌 장 왕마저도 용감하다고 칭송하며 왕을 배신하고 도망친 기사들을 대신 욕했다.

하지만 국왕과 원수들의 생각에 잉글랜드군과 야전을 벌이는 것은 위험하고 멍청한 짓이었다. 장 왕 자신과 그의 아들인 샤를 5세가 한 것처럼 국민들로부터 막대한 조세를 거둬서 복잡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전쟁 전문가인 직업군인들을 많이 고용해 끊임없는 전초전으로 전선을 밀어내고, 적들이 마지막 발악으로 벌이는 기마약탈을 청야전술로 막아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대응이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렇게나 많은 세금을 이미 걷었으면서도 전비가 부족하다며 돈을 더 내라고 하고, 막상 적군이 침공해 오면 도망만 치는 국왕과 원수들의 뻔뻔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장 왕은 불만을 가진 신하들을 설득하거나 타협하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강했고, 그들이 자발적으로 따르게 만드는 말재주나 인간적인 매력도 없었다. 그렇게 정부에 실망한 국민들이 납세에 소극적이 되자 이제는 대규모 야전군을 소집해 정면대결을 벌이는 도박을 감행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이 끝없는 악순환을 끝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군이 다시 참패하고 장 왕이 끝까지 남아서 싸우다 포로로 잡힌 푸아티에 전투였다.

2.2. 푸아티에 전투 (1356): 모든 귀족 계급으로 확대된 책임론

파일:hywpoitiers1356.jpg
프랑스는 한때 학문, 기사도, 상업 등 모든 분야에서 전 세계의 샘터이자 꽃이었으며, 고결함, 우아함, 도의심 등 모든 미덕의 모범이 되는 왕국이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푸아티에에서 끔찍한 패배를 당한 후 포로로 잡히거나 죽지 않고 도망친 기사들은 자치도시에는 감히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모든 평민들의 경멸을 받았으며 왕국에 끊임없이 닥쳐오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왕세자나 왕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도 국민들에게 모범을 보이지 못했다.
장 르 벨의 연대기

1356년 9월 19일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했다. 국왕 장 2세는 끝까지 전장에 남아서 싸우다가 잉글랜드군의 포로로 잡혔다. 이 전투에서 장 왕은 스스로 결백을 증명함으로써 왕권에 드리운 크레시 전투의 그림자를 떨쳐냈다. 용감하고 고결한 군주인 프랑스 왕들은 지금껏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그동안의 모든 재난은 왕에게 잘못된 조언을 한 측근들과 사치에 젖어 군기가 빠진 기사들에게만 책임이 있었다.

장 왕의 아들인 왕세자 샤를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1년여에 걸쳐 협상 끝에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일단 장 왕의 총신들에게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씌워서 전부 숙청한다는 공동의 목적이 달성되고 나자 귀족들과 평민 대표들은 이제 국정 주도권을 놓고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여기에 나바라의 카를로스를 프랑스 왕으로 지지하며 장 왕의 폐위를 요구하는 나바라파까지 가세하면서 혼란이 가중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357년 3월에는 파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소식을 듣고 경악한 장 왕이 프랑스로 포고문을 써 보내, 왕세자의 이름으로 발표된 법령이나 삼부회에서 의결된 정책을 따르지 말라고 모든 프랑스 국민들에게 호소하기까지 했다. 장 왕은 욕심 많고 독선적이며 자기와 똑같은 성격의 총신들만 편애했기 때문에 제후들과 도시 유력자들에게 인기가 없었지만 앞서 설명했듯 푸아티에 전투에서 보인 용기 때문에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2.3. 에티엔 마르셀의 난 (1358): 배후중상설

파일:Étienne_Marcel_et_le_dauphin_Charles.jpg
이들은 잉글랜드인들과 이러한 협정을 맺었네
"우리 서로 죽이지 말자, 전쟁을 질질 끌자"
이렇게 배신으로 국왕은 속았네
……
프랑스에서 우리의 국왕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그가 조언을 잘 받는다면 그는 전혀 잊지 않을 것이리라
그의 대원정에 선량한 자크들(Jacques Bonhome)이 함께 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들은 왕이 생명을 잃도록 도망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작자미상, 홍용진 역, '푸아티에 전투에 대한 한탄'. 1356년경

1358년 1월 24일 왕세자의 재무관 장 바이예가 거리에서 습격받아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범인은 왕실에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해 불만을 품은 채권자였다. 살인범 페렝 마르크는 생마리 수도원으로 피신했지만 노르망디 원수 로베르 드 클레르몽이 체포해서 재판 없이 교수형에 처했다. 로베르가 사형을 집행하면서 파리 시의 유력자들도 곧 이렇게 될 거라고 외쳤다는 소문이 퍼졌다. 바이예와 마르크의 장례식이 같은 날 진행되었고, 왕세자 파벌은 모두 바이예의 장례식에, 개혁파는 모두 마르크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이제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분명해지면서 도시에 살벌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2월 초가 되자 프랑스 왕위를 노리고 있었던 나바라의 국왕 카를로스 2세가 파리 정계에 개입했다. 카를로스는 개혁파가 장 왕과 그의 총신들에게 품은 두려움과 적대감을 이용했다. 왕은 외국에 끌려갔고 측근들은 숙청되었지만 상황은 언제든 반전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나바라파와 개혁파에게 장악된 파리 삼부회는 잉글랜드와의 종전 협상을 거부했다. 그리고 잉글랜드에 포로로 잡혀 있는 상태인 장 왕의 칙령은 무시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마지막으로 이를 위한 명분을 강화하고자 모든 권력을 잃은 왕세자를 국왕 대리인이 아닌 허울뿐인 '섭정'으로 추대했다.

하지만 2월 21일 삼부회가 해산되자마자 왕세자는 생드니 평야에 주둔한 자신의 군대에게 파리 시내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도시 성벽과 성문은 전부 개혁파 민병대가 장악하고 있었지만 서쪽 문 바로 옆에 루브르궁이 있었다. 그곳에 집결해 있는 왕세자 파벌이 내부에서 호응하면 성문이 돌파당할 수 있었다.

결국 2월 22일 아침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에티엔 마르셀이 선수를 쳐서 민병대 3000명을 이끌고 왕궁을 습격했다. 샹파뉴 원수 장 드 콩플랑과 노르망디 원수 로베르 드 클레르몽이 눈앞에서 반란군에게 살해당하자 왕세자는 겁에 질린 채 마르셀에게 보호를 요청했고, 이에 마르셀은 '이들은 전하의 보호자입니다'라고 답하며 자신이 쓰고 있었던 파리 시의 상징 모자를 왕세자의 모자와 바꿔 썼다. 그리고 그레브 광장에 모인 수천 명의 군중 앞에서 자신이 프랑스 왕국 공동체의 공익을 위해 반역자들을 죽였다고 밝힌 뒤 왕세자에게 사면을 받았다.

그러나 3월 25일 왕세자는 우연한 계기로 탈출에 성공한다. 5월 왕세자는 에티엔 마르셀과 개혁파를 물리치고 파리를 탈환하기 위해 농촌 공동체의 관습적인 특권도 무시하는 강화된 징발령을 선포한다. 이에 불만이 폭발한 보베지의 농민들이 봉기하면서 자크리의 난이 일어났다.
보베, 브리, 랑 그리고 수아송 인근에 사는 소작농 중 일부가 보베로 모여들었다. 처음에 그들은 지도자 없는 무리였고, 숫자도 백 명을 넘지 않았다. 그들은 프랑스 왕국의 제후와 기사와 향사들이 왕국의 명예를 실추시켰으므로 이들을 전부 죽여 없애는 것은 매우 훌륭한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모두 이 제안에 동의했고, 다 함께 이렇게 외쳤다. "세상의 모든 귀족을 멸망시키려 하지 않는 자들은 수치를 안으리라!"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농민군은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하고 국왕이 포로로 잡힌 것은 잉글랜드인들에게 매수된 귀족들이 왕을 배신했기 때문이라며 귀족들을 학살했다.

3. 진압

파일:Jacquerie_meaux.jpg
푸아 백작과 뷰슈 대장, 그리고 그들이 이끄는 군대는 시장의 성문을 열고 나와서 형편없는 무장을 갖춘 소작농들을 기습했다. 선두에 있던 폭도들은 수는 적지만 잘 무장된 군대가 맹렬한 기세로 진격해오는 것을 보고 물러나기 시작했고, 중장병들이 푸아 백작과 오를레앙 공작과 뷰슈 대장의 깃발을 앞세운 채 계속 진군하면서 창과 검을 휘둘렀다.
공격을 당한 폭도들은 공포에 질린 채 등을 보이고 도망치기 시작했고, 너무 급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서로 뒤엉켜서 넘어졌다. 그러자 요새의 모든 중장병이 밖으로 나와서 공황에 빠진 폭도들 사이로 뛰어들어 짐승 잡듯이 때려잡았고, 도망치는 자들도 추격해서 죽이거나 강물에 던져넣었다.
모 시를 공격한 무리가 궤멸당한 이후 폭도들은 다시는 그렇게 많은 수가 한자리에 모이지 못했다. 젊은 앙게랑 드 쿠시 경과 그가 이끄는 군사들이 남은 잔당을 무자비하게 토벌하며 보이는 대로 다 잡아 죽였기 때문이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농민군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왕세자 샤를과 북부 프랑스 귀족들을 적대하고 있는 파리 부르주아들과 연합을 시도했다. 그러나 에티엔 마르셀과 파리 개혁파는 센강의 수운을 봉쇄한 요충지의 요새들을 공격하는 계획에만 동조하고 그 이상의 협력은 철저히 거부했다.

프랑스의 모든 귀족들을 적으로 삼은 농민군은 이제 '같은 평민'인 도시 세력과 연합하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지만 개혁파 부르주아들에게는 이미 나바라파 귀족들이라는 연줄이 있었으므로 애초에 서로 이해관계가 맞지 않았다. 결국 6월 10일 나바라의 왕 카를로스 2세는 멜로 고원에서 농민군에게 거짓으로 협상을 제안한 뒤 기습해서 지도자 기욤 칼레를 포함한 농민군을 무참히 짓밟는다. 같은 날 모 시를 점령하러 떠난 분견대도 수비군에게 패배하고 흩어지면서 봉기가 완전히 진압되었다.

나바라 왕 카를로스가 자크리 반란군 진압에 가장 먼저 나섰으므로 자연스럽게 그는 북부 프랑스 귀족 난민들과 자경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멜로에서 농민군을 전멸시킨 이후 카를로스는 봉기를 일으킨 마을마다 주동자 4명씩을 골라내 처형하고 약탈과 방화를 벌인 대가로 보상금을 걷으라는 지시를 내리는 등 귀족들을 통제하고 이끌면서 상황을 주도하려 했다.

하지만 이제 귀족들도 자크리 못지 않게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나바라 왕의 명령은 거의 무시되었고 어떤 이들은 일드프랑스의 농촌 마을과 농민들을 마치 잉글랜드군이 하는 것처럼 불태우고 학살했다.

4. 영향

파일:Chroniques_de_Froissard_Paysans_massacrant_un_noble.jpg
파리에 도착하자 그는 성직자, 귀족, 평민 등 모든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자신이 당한 일의 부당함을 호소하며 자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자신은 아버지와 어머니 양쪽 모두 프랑스 왕가의 후손이기 때문에 의무대로 프랑스 왕국을 수호하며 살다가 죽기를 원한다고 설득력 있게 연설했다.
장 르 벨의 연대기

농민들에 대한 보복을 어느정도 끝내자 귀족들의 분노는 이제 도시민들에게 향했다. 마침 에티엔 마르셀과 파리 개혁파는 자크리의 난의 배후로 의심받기에 딱 좋은 위치에 있었다. 그들은 파리 삼부회에서 귀족들과 대립했고, 농민군과 같은 비귀족 평민이며 똑같이 왕세자를 적대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에티엔 마르셀에게나 그의 동맹인 카를로스에게나 전혀 달갑지 않은 결과였다.

1358년 6월 14일 카를로스는 다시 환호를 받으며 파리 시내로 입성했다. 그리고 그레브 광장에 모인 군중 앞에서 프랑스 왕국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고 자신이 카페 왕가의 후손임을 강조했다. 그러자 에티엔 마르셀은 왕국을 다스릴 지도자가 없는 작금의 현실을 개탄하며 나바라 왕을 파리 시의 수비대장으로 추대한다. 카를로스는 결국 귀족들을 버리고 도시 세력을 선택한 것이다.

이에 실망한 귀족들은 나바라 왕 대신 왕세자 샤를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왕세자는 자크리 반란 진압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지만 가장 큰 이득을 누렸다. 6월 말 그는 1만이 넘는 맨앳암즈를 이끌고 파리 시 교외에 도착했고, 7월 14일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8월 2일 왕세자는 결국 파리에 입성한다. 개혁파 지도층 일부는 처형되었으나 나머지 시민들과 자크리 반란군은 곧 사면을 받았다.

5. 같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