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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카스티야 왕국 트라스타마라 왕조 초대 국왕
레온 왕국 트라스타마라 왕조 초대 국왕 엔리케 2세 Enrique II |
|
|
|
<colbgcolor=#AA0044> 출생 | 1334년 1월 13일 |
세비야 | |
사망 | 1379년 5월 29일 (향년 45세) |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 | |
재위 | 카스티야 왕국과 레온 왕국의 왕 |
1366년 ~
1367년(1차 재위) 1369년 ~ 1379년 1월 13일(2차 재위) |
|
배우자 | 후아나 마누엘 데 비예나 (1350년 결혼) |
자녀 | 후안 1세, 레오노르, 후아나 등 |
아버지 | 알폰소 11세 |
어머니 | 레오노르 데 구즈만 |
친형제 | 페르난도 알폰소, 산초 알폰소, 파드리케 알폰소, 페르난도 알폰소, 텔로 알폰소, 후안 알폰소, 후아나 알폰소, 산초 알폰소, 페드로 알폰소 |
이복형제 | 페르난도, 페드로 |
[clearfix]
1. 개요
카스티야 연합 왕국 트라스타마라 왕조 초대 국왕. 이복 형제 페드로와의 오랜 내전 끝에 카스티야 왕위를 확보했다.2. 생애
1334년 1월 13일 세비야에서 카스티야 연합 왕국 국왕 알폰소 11세와 카스티야의 명문 귀족 집안인 구즈만 가문의 일원인 레오노르 데 구즈만의 3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친형제로 페르난도 알폰소, 산초 알폰소, 파드리케 알폰소, 페르난도 알폰소, 텔로 알폰소, 후안 알폰소, 후아나 알폰소, 산초 알폰소, 페드로 알폰소가 있었고, 이복 형제로 페르난도, 페드로가 있었다. 알폰소 11세는 정실 아내로 들인 포르투갈의 마리아 왕비와 그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페드로 왕자를 매우 박대한 반면, 레오노르 데 구즈만과 10명의 자녀들을 총애했다. 그 덕분에 일찍이 트라스타마라 백작에 선임되었고, 이외에도 레모스, 사리아, 갈리시아, 칼라브리아, 리베라 일대의 관할권을 부여받았다.알폰소 11세는 레오노르 데 구즈만과의 사이에서 살아남은 자식들 중 연장자인 엔리케를 합법적인 자식으로 삼고 왕위를 물려줄 계획을 구상했지만 1350년 3월 25일 지브롤터 탈환 작전을 지휘하던 중 중세 흑사병에 걸려 사망했다. 아버지 생전에는 레오노르와 자녀들에게 아첨하던 자들은 알폰소 11세가 사망하자마자 태도를 바꿔 그들을 외면하고 페드로를 왕으로 추대했다. 엔리케와 그의 형제들은 새 국왕이 자신들에게 보복할 것을 두려워해 각자의 영지로 달아나 숨어지냈다.
아버지의 유해를 세비야 대성당에 안장하고 장례식을 거행한 페드로는 트라스타마라에 머물고 있던 레오노르에게 장례식에 참석하라고 통보했다. 레오노르는 처음엔 신변에 해를 입을 것을 우려해 가지 않으려 했지만, 아들 엔리케가 세비야로 가서 융숭한 대접을 받자 마음을 놓고 세비야로 향했다. 그러나 세비야에 도착한 레오노르는 오래 전부터 그녀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마리아 왕비의 명령으로 체포된 뒤 레알 알카사르의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다.
어머니가 수감당하자 반감을 품은 엔리케는 카스티야에서 강력한 위세를 떨쳤던 귀족 후안 마누엘의 딸 후아나 마누엘 데 빌레나와 비밀리에 결혼하고 아스투리아스로 피신한 뒤 추종자들을 모집했다. 많은 귀족들은 비록 사생아이지만 부모 모두 카스티야인인 엔리케가 어머니가 포르투갈 사람인 페드로보다는 낫다고 여겼고, 포르투갈 귀족 후안 알폰소가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레오노르와 엔리케를 지지했다.
이에 마리아 왕비는 레오노르가 아들에게 반란을 선동했다고 여겨 1351년 여름에 아들을 승낙을 얻어낸 뒤 레오노르를 처형했다. 아스투리아스에서 어머니가 끝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엔리케는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히온을 공략하는 등 기세를 떨쳤으나 아빌레스와 오비에도 공략에 실패해 더 이상 세력을 키우지 못하다가 1352년 6월 토벌대의 공격을 받아 패배를 면치 못하자 포르투갈로 망명했다가 나중에 페드로의 용서를 받고 카스티야로 돌아왔다.
1354년 10월, 페드로가 새 왕비로 삼은 후아나 데 카스트로를 홀대하고 마리아 데 파디야와 사랑을 나누는 것에 반감을 품은 후아나의 형제 페르난도 루이스 데 카스트로가 시우다드 로드리고를 근거지로 삼아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텔로 알폰소 등 형제들과 함께 반란에 가담했다. 페드로는 반란군에게 체포된 뒤 사모라 주교의 집에 감금되었지만, 그곳에서 사냥을 하면서 유유자적한 모습을 보이는 한편, 음모가들끼리 서로 권력 다툼을 벌이도록 이간질해 일부 구성원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그 결과 알폰소 11세와 레오노르 왕비의 사생아들에게 상당한 영지와 권력을 양도하는 대가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그는 1355년 초 토로에서 탈출한 뒤 부르고스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해 군대를 무장시키고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보조금을 받아냈다.
파드리케, 후안 등 여러 형제들이 페드로의 설득에 넘어가 그의 편을 들었지만, 엔리케는 이에 따르지 않고 토로에서 톨레도로 이동해 페드로에 대한 저항을 이어가려 했다.그러나 그곳 주민들은 페드로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하고 그를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이에 엔리케는 무력을 동원해 주민들을 복종시키기로 마음먹고,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무장시킨 뒤 톨레도 내 유대인 집단 거주지를 공격해 1,200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페드로는 이 소식을 접하자 톨레도로 진군했고, 엔리케는 페드로가 오기 전에 톨레도를 장악하는 데 실패하자 어쩔 수 없이 텔라벨라로 도주했다. 그러나 텔라베라 주민들 역시 협조하지 않자 다시 토로로 가서 저항을 이어가려 했으나 끝내 패배를 면치 못하자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후 장 2세의 궁정에서 지내며 재기를 도모하던 엔리케는 1365년 새 국왕 샤를 5세의 지원에 힘입어 깃발 색깔 때문에 소위 "백인 중대"라고 불리는 용병들을 고용했다. 이후 아라곤 왕국, 프랑스 왕국, 교황의 지원을 받고 1365년 3월 카스티야 왕국으로 진격했다. 엔리케와 함께 이베리아 반도로 향한 프랑스 지휘관 베르트랑 뒤 게클랭은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2세에게 카스티야 왕국으로 가려 하니 통과시켜달라고 요구했다. 카를로스 2세는 공식적으로는 카스티야 국왕 페드로와 동맹을 맺고 있었지만 많은 돈을 받는 대가로 통과시켰다. 나중에 마음을 바꿔 통과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대신 그들이 나바라 왕국을 통과하면서 약탈을 최소화하기 위해 많은 돈을 지불했다.
부르고스에서 머물고 있던 페드로는 엔리케가 용병대를 이끌고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급히 톨레도로 돌아간 뒤 아라곤의 정복지에 주둔한 모든 군대를 철수시키고 엔리케와 맞서 싸우려 했다. 그러나 귀족과 장군들이 잇따라 엔리케에게 귀순하고 아빌라, 세고비아, 탈라베라, 마드리드, 쿠엥카 등 여러 도시가 새 왕에게 경의를 표하자, 페드로는 도저히 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366년 초 세비야를 떠나 포르투갈 왕국에 망명하려 했다. 그러나 포르투갈 국왕 페드루 1세가 망명을 거부하자, 그는 알부케르케로 피신하려 했지만 그곳 시민들이 성문을 걸어잠그고 입성을 거부하자 갈리시아로 피신했다. 이후 갈리시아까지 쳐들어오는 엔리케 2세를 피해 가스코뉴로 달아난 뒤 바욘에서 흑태자 에드워드와 만났다.
페드로는 잉글랜드 왕국과 나바라 왕국이 자신을 복위시켜주는 대가로 비스키야와 카스트로, 우르디알레스 일대를 잉글랜드에 넘기고 기푸스코아, 알라바 및 라 리오하 일부를 나바라 왕국에 넘긴다는 내용의 리부른 비밀 협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2세는 1366년 12월 엔리케 2세와 로그로뇨에서 만나서 더 많은 보상금을 받는 대가로 잉글랜드군의 통과를 저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흑태자 에드워드는 이중계약을 맺은 그에게 분노해 나바라 국경지대에 군대를 집결시키고 원래 약속한 대로 하라고 요구했다. 카를로스는 급히 에드워드를 찾아가서 자신이 엔리케 2세와 거래한 적이 없다면서, 잉글랜드군이 산길을 통과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카를로스를 신용할 수 없다고 여기고 올리버 드 매니에게 카를로스를 붙잡아놓게 했다. 그 후 카를로스는 흑태자 에드워드가 엔리케 2세를 몰아내고 페드로를 카스티야 국왕으로 복위시킬 때까지 잉글랜드 군영에 억류되었다.
1367년 3월 흑태자 에드워드와 함께 카스티야 왕국에 돌아온 페드로는 4월 3일 나헤라 전투에서 엔리케 2세와 게클랭의 군대를 격파했다. 게클랭은 포로로 잡혔고, 엔리케 2세는 프랑스 왕국으로 달아났다. 이후 에드워드가 전염병에 걸려 가스코뉴로 돌아가자, 엔리케 2세는 1368년 9월 프랑스 왕국의 지원을 받고 카스티야 왕국에 돌아왔다. 부르고스, 코르도바, 팔렌시아, 바야돌리드, 하옌 등 여러 도시들이 엔리케 2세를 즉각 지지했고, 갈리시아와 아스투리아스는 페드로를 계속 지원했다. 엔리케 2세가 톨레도로 향할 때 안달루시아로 후퇴한 페드로는 군대를 집결시킨 뒤 1369년 3월 14일 몬티엘에서 격돌했다. 이 전투에서 참패한 페드로는 몬티엘의 한 요새로 피신한 뒤 적군에게 포위되었다.
페드로는 충실한 기사 멘 로드리게스 데 사나브리아를 엔리케 2세와 함께 있던 게클랭에게 보내 그에게 여러 영지를 제공하는 대가로 자신이 탈출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게클랭은 이를 받아들이겠다며, 3월 22일 밤에 변장한 채 몬티엘 성을 빠져나오게 했다. 페드로는 몇몇 수행원만 대동해 성밖으로 나온 뒤 게클랭의 안내를 받으며 한 천막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엔리케 2세가 무장한 채 기다리고 있었고, 천막 안으로 들어간 페드로는 엔리케 2세의 단검에 찔려 죽었다. 엔리케 2세는 페드로의 수급을 벤 뒤 여전히 그를 지지하고 있는 성채와 마을에 널리 보여주며 항복을 유도했다. 갈리시아 귀족들은 엔리케 2세를 따르기를 거부하고 포르투갈 국왕 페르난두 1세를 갈리시아 국왕으로 추대했지만, 페르난두 1세는 1371년 엔리케 2세와 협상한 끝에 갈리시아를 카스티야 왕국에 도로 넘겼다.
이리하여 내전에서 승리한 엔리케 2세는 자신을 도와준 샤를 5세에게 보답하기 위해 카스티야 해군을 보내줬고, 샤를 5세는 카스티야 해군의 지원에 힘입어 1372년 라 로셸 해전에서 잉글랜드 해군을 격파하고 라 로셸을 공략했다. 하지만 역시 자신을 도와준 아라곤 국왕 페드로 4세에게 넘겨주기로 했던 무르실아를 양도하기를 거부했다. 페드로 4세는 이에 분개해 아라곤 왕국과의 전쟁을 이어갔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375년 알마잔 평화협약을 맺었다. 카스티야는 몰리나 영주권 등 아라곤 왕국의 통치하에 있던 카스티야 왕국의 영지를 돌려받았고, 페드로 4세의 딸인 레오노르와 엔리케 2세의 후계자인 후안 1세의 결혼이 성사되었다.
한편, 1371년 페드로의 딸 콘스탄사와 결혼한 제1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은 아내가 카스티야 여왕에 오를 자격이 있으며 자신 역시 공동 군주로 등극해야 한다며 스스로 카스티야와 레온의 왕이라는 칭호를 취했다. 그러면서 동료 귀족들에게 "스페인의 주군"이라고 부르라고 권했다. 엔리케 2세는 곤트의 존의 이같은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백년 전쟁에 개입해 프랑스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373년 곤트의 존이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2세에게 접근한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카를로스 2세에게 결혼동맹을 맺을 것을 제안하면서 곤트의 존이 카스티야 왕국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카를로스 2세는 1374년 3월 기스코뉴에서 곤트의 존을 만나서 엔리케 2세가 지난날 빼앗아간 나바라 왕국의 도시들을 탈환하는 데 힘을 보태준다면 나바라 왕국을 카스티야 침공기지로 사용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곤트의 존은 얼마 안가 계획을 포기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가버렸고, 엔리케 2세로부터 보복당할 위기에 몰린 카를로스 2세는 1375년 5월 장남 카를로스와 엔리케 2세의 딸 레오노라의 결혼에 동의하고 나바라 왕국이 카스티야 왕국의 봉신이 되는 것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레오노라는 카스티야에 머물렀고, 그가 나바라 왕국에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카스티야를 찾아갈 때 아내를 종종 만났다. 그러던 1378년 카를로스 2세가 잉글랜드와 손잡고 카스티야 왕국이 지난날 빼앗아간 로그로뇨를 공략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소식을 샤를 5세로부터 전해듣자, 엔리케 2세는 1378년 6~7월 나바라 왕국을 전격 침공해 각지를 황폐화시켰다. 결국 카를로스 2세는 1379년 3월 31일 투델라를 포함한 나바라 왕국 남부의 20개 요새를 카스티야 왕국에 넘겨주고 잉글랜드에 맞서 카스티야-프랑스 왕국과 군사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내용의 브리오네스 협약에 서명해야 했다.
엔리케 2세는 유대인에게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페드로가 유대인 재무관 레비를 중용하고 유대인을 괴롭히는 자들을 처벌한 것을 근거로 삼아 "유대인 왕"이라고 비난해 일반 주민들이 품고 있는 반유대주의를 부추겼다. 또한 게클랭의 용병들에게 돈을 지급하기 위해 톨레도의 유대인 공동체에 2만 길더를 부과했으며, 그들이 이를 내지 못한다면 굶어죽을 때까지 음식을 주지 말라고 명령했다. 여기에 1369년 토로 코르테스와 1374년 및 1377년 부르고스 코르테스에서 결정된 사항에 따라 유대인들에게 다윗의 별 배지를 가슴에 달라고 명령하고 기독교식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단기 대출의 경우 기독교인 채무자는 유대인 채권자에게 원금에 2/3만 갚아야 한다고 명령했다. 그러면서도 재정 관리에 탁월한 유대인들을 마냥 내칠 수는 없었기에 유대인 요세프 피코네를 수석 세금 징수원으로 삼았다. 한편, 자신을 위해 싸워준 "백인 중대"에게 줄 돈이 부족하자 화폐를 대량으로 주조하고 금의 함유량을 줄였으며, 왕국을 재건하기 위해 행정 체계를 개편하고 코르테스를 여러 차례 개최했다. 형제 텔로가 사망한 후 비스카야의 영주권을 왕실 유산에 완전히 통합했다.
1379년 5월 29일, 엔리케 2세는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자다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부르고스, 바야돌리드를 거쳐 톨레도로 이송되어 카필라 데 로스 레예스 누에보스 데 톨레도 성당에 안장되었다. 사후 아들 후안 1세가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에 즉위했다.
3. 가족 관계
- 후아나 마누엘 데 비예나(1339 ~ 1381): 비예나 공작 후안 마누엘의 딸.
- 후안 1세(1358 ~ 1390):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 레오노르(1361 ~ 1425): 나바라 왕국의 국왕 카를로스 3세의 왕비.
- 후아나(1372 ~ 1376): 요절.
- 사생아
- 페드로 엔리케스(? ~ 1366): 요절.
- 알폰소 엔리케스(1355 ~ 1400): 히온 및 노레냐 백작.
- 레오노르 데 카스티야(? ~ ?)
- 콘스탄사 엔리케스(? ~ ?): 알바 드 토르메스의 여성 영주. 발렌시아 데 캄포스 공작 후안과 결혼.
- 파드리케 엔리케스(1360 ~ 1394): 베나벤테 공작. 재정 비리를 저지른 혐의로 엔리케 3세에 의해 체포된 뒤 알모도바르 델 리오 성에 감금되었다가 그곳에서 사망함.
- 페르난도 엔리케스(1365 ~ 1438): 아버지의 재위 기간 동안 두예냐스 영주를 지내다가 후안 1세의 통치기간 동안 포르투갈로 이주하여 포르투갈 알카소비스 영주가 됨.
- 후아나(1367 ~ ?): 빌레나 후작 페드로 데 아라곤과 결혼.
- 이사벨 엔리케스(? ~ 1420): 곤살로 누녜스 데 구즈만과 결혼했지만 교황 클레멘스 7세에 의해 결혼 무효됨. 이후 톨레도에 있는 산타 클라라 라 레알 수녀원에 들어가 수녀원장으로 활동함.
- 이녜스 엔리케스(? ~ 1443): 산타 클라라 라 레알 수녀원장.
- 베아트리스(? ~ 1409): 세비야의 산 클레멘테 수녀원의 수녀.
- 마리아 엔리케스(1375 ~ 1393): 제10대 멘도사 영주 디에고 우르타도 데 멘도사와 결혼.
- 엔리케 엔리케스(1377 ~ 1404): 카브라와 메디나 시도니아의 백작이자 몰론의 영주, 알칼라 데 로스 가줄레스, 포르티요와 아란데 데 두로의 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