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9 02:01:06

페드로(카스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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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티야 왕국 이브레아 왕조 제11대 국왕
레온 왕국 보르고냐 왕조 제10대 국왕
페드로
Pedro
파일:Pedro of Castile.jpg
<colbgcolor=#AA0044> 19세기 상상화
출생 1334년 8월 30일
부르고스 산타 마리아 라 레알 데 라스 우엘가스 수도원
사망 1369년 3월 23일 (34세)
몬티엘
재위 카스티야 왕국 레온 왕국의 왕
1350년 3월 26일 ~ 1366년 3월 26일(1차 재위)
1367년 ~ 1369년 3월 23일(2차 재위)
배우자 부르봉의 블랑슈 (1353년 결혼 / 1353년 결혼 무효)
후아나 데 카스트로(1354년 결혼 / 1354년 결혼 무효)
정부 마리아 데 파디야, 에릴의 엘비라, 헤네스트로사의 마리아, 이사벨 데 산도발, 테레사 데 아얄라
자녀 베아트리체, 콘스탄사, 이사벨, 알폰소, 후안, 페르난도, 산초, 디에고, 마리아 데 아얄라
아버지 알폰소 11세
어머니 포르투갈의 마리아
형제 페르난도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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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잔인왕(el Cruel)"이라는 별칭과 "정의왕(el Justo)"이라는 별칭이 병립하는 인물로, 카스티야 보르고냐 왕조의 마지막 군주로 간주된다.

2. 생애

1334년 8월 30일 부르고스의 산타 마리아 라 레알 데 라스 우엘가스 수도원에서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알폰소 11세와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4세의 딸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제로 페르난도가 있었지만, 1332년에 태어나 1333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사실상 외아들이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축한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후계자였지만, 매우 불행한 유년기를 보내야 했다.

알폰소 11세는 아버지 산초 4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1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뒤 내우외환에 시달리는 나라를 재정비하고 나스르 왕조 마린 왕조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물리치고 레콩키스타를 이어간 군주였지만, 남편과 아버지로서는 좋게 평가받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1327년 포르투갈 왕국과 결혼 동맹을 맺기 위해 첫 왕비 콘스탄사 마누엘을 폐위시키고 마리아를 왕비로 삼았으나, 정작 마리아에게는 별 관심을 주지 않고 정부로 삼은 레오노르 데 구즈만을 무척 총애해 그녀와의 사이에서 사생아를 10명이나 낳았다. 급기야 마리아를 수녀원으로 유폐하고 페드로를 궁궐 밖으로 내보낸 채 별다른 교육을 시켜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레오노르 데 구즈만과의 사이에서 낳은 10명의 자식들에게 여러 영지를 수여하고 어엿한 직책을 맡기는 등 각별히 총애했다.[1]

아폰수 4세는 딸을 심하게 박대하는 알폰소 11세에게 분노했다. 1340년 나스르 왕조의 타이파 아불 핫자즈 유수프 마린 왕조 술탄 아불 하산 알리와 손잡고 타리파를 포위하자, 알폰소 11세는 이에 맞서 싸우고자 남하하면서 포르투갈 왕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자 아폰수 4세는 "내 딸 마리아를 박대하고 정부와 놀아나는데 무슨 염치가 있어서 원군을 보내라고 요구하느냐?"라고 비난했다. 알폰소 11세는 아폰수 4세로부터 원군을 어떻게든 받아내야 했기에, 수녀원에 가 있던 마리아 왕비를 설득해 아버지에게 가서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게 했다. 그러면서 원군을 보내준다면 레오노르와 사생아들을 추방하고 마리아에게 왕비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대우를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아폰수 4세는 이를 믿고 원군을 보내줬고, 카스티야-포르투갈 연합군은 1340년 10월 살라도 전투에서 나스르-마린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그러나 알폰소 11세는 적군을 물리친 후 앞서 맺었던 약속을 무시하고 레오노르를 계속 총애했다.

이렇듯 어머니를 박대하는 아버지에게 경원시된 페드로는 산티아고 기사단장 바스코 로드리게스 데 코르나고의 저택에서 양육되었고, 사제이자 어머니 마리아의 고문이었던 후안 알폰소 데 알부케르케의 가르침을 받았다. 1340년대에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딸 조앤과의 혼사가 오갔지만, 잉글랜드 왕국이 백년 전쟁을 치르느라 빈곤해져서 지참금을 마련하지 못해 지체되다가 1348년 9월 2일 카스티야로 여행가던 조앤이 보르도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1350년 3월 25일, 알폰소 11세는 지브롤터 탈환 작전을 지휘하던 중 중세 흑사병에 걸려 사망했다. 알폰소는 엔리케를 총애했지만 태자를 바꾸지는 않았기에 페드로는 알폰소 11세가 남긴 유일한 적자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오랜 전쟁과 흑사병으로 국가 재정이 파탄난 것을 고려해 전쟁을 그만두기로 하고 나스르 왕조, 마린 왕조와 협상을 벌인 끝에 7월 17일에 평화 협약을 맺었다. 또한 자신의 가정교사이자 어머니의 고문이었던 후안 알폰소 데 알부케르케를 궁재로 삼고 그에게 통치를 위임했다.

한편, 아버지의 유해를 세비야 대성당에 안장하고 장례식을 거행한 페드로는 트라스타마라에 머물고 있던 레오노르에게 장례식에 참석하라고 통보했다. 레오노르는 처음엔 신변에 해를 입을 것을 우려해 가지 않으려 했지만, 아들 엔리케가 세비야로 가서 융숭한 대접을 받자 마음을 놓고 세비야로 향했다. 그러나 세비야에 도착한 레오노르는 오래 전부터 그녀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마리아 왕비의 명령으로 체포된 뒤 레알 알카사르의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다.

어머니가 수감당하자 반감을 품은 엔리케는 카스티야에서 강력한 위세를 떨쳤던 귀족 후안 마누엘의 딸 후아나 마누엘 데 빌레나와 비밀리에 결혼하고 아스투리아스로 피신한 뒤 추종자들을 모집했다. 많은 귀족들은 비록 사생아이지만 부모 모두 카스티야인인 엔리케가 어머니가 포르투갈 사람인 페드로보다는 낫다고 여겼고, 포르투갈 귀족 후안 알폰소가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레오노르와 엔리케를 지지했다.

1350년 8월 중순, 페드로는 중병에 걸려 며칠 간 사경을 헤맸다. 많은 이들은 왕이 만약 죽는다면 그의 사촌이자 알폰소 11세의 조카인 토르토사 후작 페르난도를 옹립하자고 주장했고, 다른 이들은 페르난도 4세를 상대로 왕위 계승 전쟁을 벌이다가 상당한 영지를 받는 대가로 카스티야 왕위를 포기했던 알폰소 데 라 세르다의 후손인 후안 누녜스 데 라라를 왕으로 옹립하자고 제안했다. 며칠 후 페드로가 회복되면서 이러한 논의는 중단되었다. 그러나 페르난도와 후안 누녜스 데 라라는 이 일로 페드로 정권의 경계 대상으로 낙인찍혔다.

1350년 11월 말, 후안 누녜스 데 라라가 부르고스에서 35살의 나이로 돌연 사망했다. 이에 후안 누녜스의 측근이었던 가르실라소 2세 데 라 베가가 "주군께서 페드로 왕에게 암살당했다!"라고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페드로는 즉각 진압에 착수해 1351년 5월 부르고스를 함락하고 가르실라소 2세를 체포한 뒤 기사들을 시켜 길거리에서 그를 몽둥이로 마구 쳐서 죽게 했다. 또한 후안 누녜스의 3살된 아들 누뇨 디아스 데 하로의 영지를 몰수했다. 누뇨는 바스크의 베르메오 마을로 도망쳤지만 2년 후 그곳에서 요절했다.

이후 바야돌리드 코르테스에 참석한 페드로는 후안 알폰소 데 알부케르케가 정한 대로 흑사병 창궐로 인한 노동력 부족을 완화하기 위해 길드를 정식으로 인가하고 유랑민들에게 정착을 권했으며, 계절마다 노동과 휴식 시간을 정하고 물품이나 제품의 가격을 고정하기로 했다. 또한 사법 행정이 재편되었고 상업, 농업 및 가축의 진흥을 위한 법령이 발행되었으며, 유대인을 학대하는 자들을 처벌하고 유대인들의 신변과 재산을 지켜주겠다고 선언해, 많은 돈을 지닌 그들의 협조를 받아내고자 했다.

이때 마리아 왕비는 바야돌리드 코르테스에 참석하고자 여정을 떠나면서 레오노르를 '전리품' 삼아 데려갔다. 레오노르는 도중에 레레나(Llerena)에서 산티아고 기사단장이자 자신의 아들인 파드리케를 만났다. 파드리케는 마리아로부터 새로운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라는 강요를 받고 이를 이행한 뒤 레오노르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 코르테스에 도착한 마리아는 레오노르가 귀족들이 왕에게 반역하도록 선동하여 일을 키웠다고 비난하면서 그녀를 왕국을 좀먹는 질병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코르테스에 참석한 이들은 마리아 왕비의 강력한 압력에 따라 그녀를 반역자로 선고하고 텔라베라 데 라 레이나에 종신형에 처하기로 했다. 그러나 마리아 왕비는 이걸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1351년 여름 아들의 동의를 얻어 레오노르를 처형했다.

아스투리아스에서 어머니가 끝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엔리케는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히온을 공략하는 등 기세를 떨쳤으나 아빌레스와 오비에도 공략에 실패해 더 이상 세력을 키우지 못하다가 1352년 6월 토벌대의 공격을 받아 패배를 면치 못하자 포르투갈로 망명했다가 나중에 페드로의 용서를 받고 카스티야로 돌아왔다. 이후 페드로는 왕위를 굳히기 위해 프랑스 왕국과 손을 잡으라는 조언을 받아들여 프랑스 왕국과 협상한 끝에 1352년 7월 부르봉 공작 피에르 1세의 딸이자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조카인 블랑슈와 약혼했다.

당시 프랑스 국왕 장 2세는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카스티야 왕국의 지원을 필요로 했기에, 이 결혼을 반드시 성사시켜야 한다고 여겼다. 그는 지참금으로 다음 크리스마스에 25,000 길더, 블랑슈가 프랑스 왕국을 떠났을 때 25,000길더, 이후 매년 크리스마스에 50,000길더씩 보내 총 300,000 길더를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이 막대한 돈을 받게 된 것에 고무된 페드로는 아빌랴, 세풀베다, 세고비야, 레온 등 여러 마을의 수입을 아내에게 지참금으로 양도하겠다고 약속했다. 여기에 블랑슈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는다면 모든 지참금을 프랑스 왕국에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1353년 1월, 블랑슈는 바르셀로나에 도착하고 2월에 바야돌리드에 이르렀다. 그러나 장 2세가 약속과는 달리 지난 크리스마스 때 25,000 길더를 보내주지 않자, 페드로는 결혼을 연기했다. 사실 페드로는 1352년 여름에 이복 형제 엔리케의 반란을 토벌하기 위해 아스투리아스 원정을 따났을 때 카스티야 귀족 집안인 파디야 가문의 일원이었던 마리아 데 파디야와 연인이 되었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보았다. 그는 내심 블랑슈와의 결혼 계약을 파기하고 마리아 데 파디야와 결혼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어머니 마리아와 후안 알폰소 데 알부케르케의 강력한 압력에 직면하자, 결국 결혼을 진행하기로 했다.

1353년 6월 3일, 페드로와 블랑슈의 결혼식이 바야돌리드에서 거행되었다. 그러나 결혼식 이틀 후 더 이상 그녀와 함께 살기를 거부하고 아내를 별궁에 가두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6세는 서신을 보내 블랑슈를 합법적인 아내로 맞이하라고 권고했지만, 페드로는 "그녀의 확실한 고백으로 내가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결혼을 지속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블랑슈가 무엇을 고백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장 2세가 주기로 한 지참금이 좀처럼 오지 않자 자신이 속았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 일각에서는 그녀가 파드리케와 불륜을 저질렀다고 의심했을 거라고 추정한다.[2] 블랑슈는 남편에게 외면당한 뒤 메디나 시도니아에서 페드로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지내다가 나중에 아레발로 성에 감금되었다.

1354년 초, 페드로는 칼라트라바 기사단장 후안 누녜스 데 프라도를 해임하고 정부로 삼은 마리아 데 파디야의 형제인 디에고 가르시아 데 파디야를 칼라트라바 기사단장으로 선임했다. 후안 누녜스 데 프라도는 왕의 숙청을 피해 아라곤 왕국으로 피신했다가 나중에 알마그로로 이동했다가 체포된 후 감옥에서 살해되었다. 뒤이어 후안 알폰소 데 알부케르케를 해임하여 포르투갈로 돌려보내고 마리아 데 파디야의 친족들을 주요 직책에 앉혔다. 또한 후안 알폰소가 영지로 삼았던 플라자 데 메델린을 공략하고 그곳을 지키던 장교들이 저항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처형했다. 후안 알폰소 데 알부케르케는 이에 격분해 엔리케 왕자의 편으로 돌아섰다.

1354년 봄, 페드로는 레모스, 몬포르테, 사리아의 영주인 페드로 페르난데스 데 카스트로의 딸 후아나 데 카스트로와 결혼했다. 교황청으로부터 결혼 무효를 승인받지도 않은 상황이었지만, 그는 블랑슈와 사실상 결별했다며 산 마르틴 데 쿠엘라르 성당에서 결혼식을 거행했다. 후아나는 페드로와의 사이에서 후안을 낳았지만, 페드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에게 관심을 거두고 마리아 데 파디야와 사랑을 나누었다. 후아나의 형제인 페르난도 루이스 데 카스트로는 이에 분노해 지난날 페드로의 어머니 마리아 왕비에게 살해된 레오노르의 자식들과 후안 알폰소 데 알부케르케, 그리고 아들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뒷방 늙은이 취급받는 것에 반감을 품은 마리아 왕비와 함께 음모를 꾸몄다.

1354년 10월 반란 세력의 리더를 맡았던 후안 알폰소 데 알부케르케가 갑작스럽게 사망했지만, 다른 음모자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획대로 시우다드 로드리고를 근거지로 삼아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 세력이 삽시간에 카스티야 북부 대부분을 장악해버리자, 페드로는 반란을 진압하려 애썼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페드로는 그때까지 아레발로 섬에 감금되어 있던 블랑슈를 알카사르 데 톨레도 성에 이송시키기로 했다. 블랑슈는 톨레도에 도착한 직후 기사들을 설득해 자신을 감옥에서 빠져나오게 한 뒤 교황 인노첸시오 6세에게 페드로가 자신을 무자비하게 학대했다고 호소하는 서신을 보내는 한편 지역 귀족과 시민들에게 자신을 지켜달라고 요청했다. 알폰소 11세와 레오노르의 아들 파드리케는 즉시 700명의 기사와 함께 톨레도로 가서 블랑슈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급기야 페드로를 충실히 따랐던 이들마저 마리아 데 파디야와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하고 그녀의 친족들을 내치고 블랑슈를 맞이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충성하지 않겠다고 통보하자, 페드로는 토르데시야스로 피신했다가 다시 토로의 견고한 성채로 피신했다. 이후 반란군에게 포위된 그는 성채에 의존해 항전하면서, 그들을 용서할 의향은 있지만 마리아 데 파디야와 절대로 헤어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다가 반군이 마리아를 해쳤을까 봐 걱정이 됐는지, 그는 토로 요새를 은밀히 떠나 마리아가 있는 우루에냐로 향했다. 그 사이, 페드로와 함께 있던 마리아 왕비는 토로의 성문을 열어줬다. 이리하여 토로를 장악한 반란군은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서, 당장 이곳으로 와서 자신들의 뜻에 복종하라고 요구했다.

페드로는 어쩔 수 없이 토로로 돌아갔다가 체포된 후 사모라 주교의 집에 감금되었지만 어느정도의 자유를 보장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사냥을 하면서 유유자적한 모습을 보이는 한편, 음모가들끼리 서로 권력 다툼을 벌이도록 이간질해 일부 구성원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그 결과 알폰소 11세와 레오노르 왕비의 사생아들에게 상당한 영지와 권력을 양도하는 대가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그는 1355년 초 토로에서 탈출한 뒤 부르고스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해 군대를 무장시키고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보조금을 받아냈다.

엔리케 왕자는 토로에서 톨레도로 이동해 페드로에 대한 저항을 이어가려 했다. 그러나 그곳 주민들은 페드로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하고 그를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이에 엔리케는 무력을 동원해 주민들을 복종시키기로 마음먹고,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무장시킨 뒤 톨레도 내 유대인 집단 거주지를 공격해 1,200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페드로는 이 소식을 접하자 톨레도로 진군했고, 엔리케는 페드로가 오기 전에 톨레도를 장악하는 데 실패하자 어쩔 수 없이 텔라벨라로 도주했다.

페드로는 톨레도에 입성한 뒤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체포된 인사들을 모조리 처형하고 블랑슈를 시구엔사(Sigüenza) 성에 엄중히 가두었다. 엔리케는 텔라베라에서도 주민들이 협조하지 않자 다시 토로로 가서 저항을 이어가려 했으나 끝내 패배를 면치 못하자 프랑스로 망명하여 장 2세의 궁정에서 지냈다. 이후 페드로는 후아나 데 카스트로에게 두예나스의 영주권을 내주고 헤어졌다. 이후 후아나는 두예나스에서 여성 영주로 지내면서 죽을 때까지 자신을 카스티야와 레온의 왕비로 칭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각지에서 준동하는 반란군 잔당 토벌에 전념하던 페드로는 1356년 1월 알카자르 데 토로에 은신중이던 어머니 마리아에게 그곳에서 나와 자신과 만나자는 전갈을 보냈다. 마리아는 여러 귀족들과 함께 페드로를 찾아가서 자신에게 의탁한 이들을 용서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페드로는 집사 마르틴 알폰소 텔레스 데 메네세스를 비롯해 마리아 왕비와 동행한 여러 귀족을 처형했다. 페드로 로페스 데 아알랴가 기술한 연대기에 따르면, 마리아 왕비는 기사들이 무참히 살해되는 광경을 보고 땅바닥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그녀가 깨어났을 때, 기사들이 그녀 주위에 벌거벗은 채로 쓰러진 광경을 목격하고 큰 소리로 아들을 저주하며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나으니 어서 죽여달라"고 애걸했다고 한다. 그 후 마리아 왕비는 포르투갈의 에보라 시로 돌아갔다가 1357년 1월 18일 그곳에서 44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1356년, 페드로는 반란군을 뒤에서 후원했던 아라곤 국왕 페로 4세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일명 "두 명의 페드로 전쟁"이라 명명된 이 전쟁에서, 아라곤 왕국은 많은 패배를 당하고 타라고나, 아리제, 엘체, 모로스, 세티나 등지가 짓밟히는 등 큰 피해를 입었지만, 페드로 역시 아라곤 왕국의 반격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은 데다 엔리케 지지자들의 준동으로 인해 아라곤과의 전쟁에 전념하기 힘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중세 흑사병이 창궐했고 가뭄과 메뚜기떼의 습격 등 여러 자연재해가 벌어지면서 수많은 이들이 죽어나갔다.

아라곤 왕국과의 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1358년 1월 13일, 페드로의 편에 서서 아라곤 왕국과 맞서던 파드리케 왕자가 페드로로부터 세비야로 와달라는 명령를 받고 그곳에 방문했다. 페드로는 파드리케가 프랑스 왕국으로 망명한 뒤 카스티야 왕국을 적대하는 형제 엔리케와 밀통한 정황이 드러났다며 사형을 선고했다. 파드리케는 급히 달아났지만 레알 알카세르의 안뜰로 도주했다가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페드로 로페스 데 아알랴의 연대기에 따르면, 페드로는 부하들이 파드리케를 척살한 뒤 창문으로 시신을 내던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태연히 식사했다고 한다. 또한 아일랴의 연대기는 페드로가 1년 후에 파드리케의 형제인 10살의 후안 알폰소와 14살의 페드로 알폰스를 카르모나에서 체포한 뒤 가르시아 디아스 데 알바라신을 시켜 처형했다고 밝혔다.

1561년, 페드로는 아라곤 왕국이 시구엔사 성에 유폐된 블랑슈와 접촉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알카사르의 헤레스 데 라 프론테라로 이송시켰다. 교황 인노첸시오 6세는 그녀를 석방하라고 요구했지만 무시당했다. 그러다가 아라곤 국왕 페드로 4세와 일시적으로 휴전 협약을 맺은 뒤 세비야로 돌아온 페드로는 블랑슈를 처단하기로 마음먹었다. 페드로 로페스 데 아얄라에 따르면, 그는 아내를 메디나 시도니아로 이송시킨 뒤 이니고 오르티스 데 에스투르니가에게 그녀를 처단하라고 지시했지만 거부당하자 왕의 석궁수인 후안 페레즈 데 레볼레도에게 다시 지시했고, 블랑슈는 곧 살해되었다. 그녀는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카스티야여! 내가 너에게 무슨 잘못을 했는지 말해다오!"

반면 아얄라 연대기의 다른 버전에 따르면, 블랑슈는 약초에 중독되어 죽었다고 한다. 또한 후대의 일부 기록에는 블랑슈가 병에 걸려 죽었다고 기술되었다. 진실은 분명하지 않지만, 페드로가 그녀가 죽기를 바랐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블랑슈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오랫동안 정부로 삼았던 마리아 데 파디야를 왕비로 삼겠다고 선포했다.

그러나 마리아는 블랑슈가 죽은 지 얼마 안되어 아스투디요에 있는 거주지에서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 페드로는 진심으로 사랑했던 마리아가 죽자 몹시 애통해 했고, 그녀의 장례식을 정성껏 치러줬다. 이후 1362년에 세비야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자신의 유일한 왕비는 마리아 데 파디야이며 다른 두 결혼은 무효라고 선언하고 그녀의 자녀들을 합법화 했으며, 아스투디요에 안장되었던 그녀의 유해를 역대 카스티야 국왕과 왕비의 무덤이 조성된 세비야 대성당에 이장했다. 이후 후아나 데 카스트로의 아들인 후안 대신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알폰소를 왕위 후계자로 지명하고, 아라곤 국왕 페드로 4세와 화해하는 차원에서 그의 딸과 결혼시키려 했다. 그러나 알폰소는 결혼이 이뤄지기 전에 사망했다.

1362년 아라곤 왕국과 휴전 협약을 맺은 페드로는 나스르 왕조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보다 앞서, 페드로는 나스르 왕조의 타이파 무함마드 5세에게 아라곤 왕국과의 전쟁에 쓸 병력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무함마드 5세는 군대를 보내줬지만, 기독교 국가를 도운 타이파에게 분노한 민심을 등에 업은 이복동생 이스마일 2세가 1359년 정변을 일으켜 무함마드 2세를 폐위시키고 타이파에 올랐다. 무함마드 5세는 마린 왕조로 망명했고, 이스마일 2세는 1년간 집권하다가 1360년 정변의 공신이었던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와 대립하다가 그의 반란으로 폐위된 뒤 처형되었다.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는 무함마드 6세로 즉위한 뒤 카스티야 대신 아라곤의 페드로 4세와 손을 잡았다.

페드로는 아라곤과 휴전 협약을 맺은 뒤 1362년 무함마드 5세와 연합하여 그라나다로 함께 진격했다. 무함마드 6세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자 세비야로 망명해 페드로에게 자신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페드로는 그를 친히 참수한 뒤 복위한 무함마드 5세에게 수급을 보냈다. 이후 아라곤과의 전쟁을 재개해 1363년 초 알리칸데, 엘체, 크레빌렌테를 공략했지만, 아라곤 국왕 페드로 4세가 반격하여 빼앗긴 영토 다수를 회복했다. 1363년 7월 2일,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은 교황 사절 장 드 라 그랑주의 중재하에 모르베데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양국은 이후에도 전쟁을 이어가며 크고 작은 전투를 연이어 치렀다.

이 무렵, 프랑스에 망명가 있던 엔리케는 깃발 색깔 때문에 소위 "백인 중대"라고 불리는 용병들을 고용했다. 그는 아라곤 왕국, 프랑스 왕국, 교황의 지원을 받고 1365년 3월 카스티야 왕국으로 진격했다. 엔리케와 함께 이베리아 반도로 향한 프랑스 지휘관 베르트랑 뒤 게클랭은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2세에게 카스티야 왕국으로 가려 하니 통과시켜달라고 요구했다. 카를로스 2세는 공식적으로는 카스티야 국왕 페드로와 동맹을 맺고 있었지만 많은 돈을 받는 대가로 통과시켰다. 나중에 마음을 바꿔 통과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대신 그들이 나바라 왕국을 통과하면서 약탈을 최소화하기 위해 많은 돈을 지불했다.

부르고스에서 머물고 있던 페드로는 엔리케가 용병대를 이끌고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급히 톨레도로 돌아간 뒤 아라곤의 정복지에 주둔한 모든 군대를 철수시키고 엔리케와 맞서 싸우려 했다. 그러나 귀족과 장군들이 잇따라 엔리케에게 귀순하고 아빌라, 세고비아, 탈라베라, 마드리드, 쿠엥카 등 여러 도시가 새 왕에게 경의를 표하자, 페드로는 도저히 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366년 초 세비야를 떠나 포르투갈 왕국에 망명하려 했다. 그러나 포르투갈 국왕 페드루 1세가 망명을 거부하자, 그는 알부케르케로 피신하려 했지만 그곳 시민들이 성문을 걸어잠그고 입성을 거부하자 갈리시아로 피신했다. 이후 갈리시아까지 쳐들어오는 엔리케 2세를 피해 가스코뉴로 달아난 뒤 바욘에서 흑태자 에드워드와 만났다.

페드로는 잉글랜드 왕국과 나바라 왕국이 자신을 복위시켜주는 대가로 비스키야와 카스트로, 우르디알레스 일대를 잉글랜드에 넘기고 기푸스코아, 알라바 및 라 리오하 일부를 나바라 왕국에 넘긴다는 내용의 리부른 비밀 협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2세는 1366년 12월 엔리케 2세와 로그로뇨에서 만나서 더 많은 보상금을 받는 대가로 잉글랜드군의 통과를 저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흑태자 에드워드는 이중계약을 맺은 그에게 분노해 나바라 국경지대에 군대를 집결시키고 원래 약속한 대로 하라고 요구했다. 카를로스는 급히 에드워드를 찾아가서 자신이 엔리케 2세와 거래한 적이 없다면서, 잉글랜드군이 산길을 통과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카를로스를 신용할 수 없다고 여기고 올리버 드 매니에게 카를로스를 붙잡아놓게 했다. 그 후 카를로스는 흑태자 에드워드가 엔리케 2세를 몰아내고 페드로를 카스티야 국왕으로 복위시킬 때까지 잉글랜드 군영에 억류되었다.

1367년 3월 흑태자 에드워드와 함께 카스티야 왕국에 돌아온 페드로는 4월 3일 나헤라 전투에서 엔리케 2세와 게클랭의 군대를 격파했다. 게클랭은 포로로 잡혔고, 엔리케 2세는 프랑스 왕국으로 달아났다. 페드로는 자신을 도와준 것에 보답하고자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170 캐럿짜리 붉고 거대한 보석을 선물하니, 이것이 바로 흑태자의 루비이다. 하지만 카스티야인들은 그가 잉글랜드와 나바라 왕국에게 많은 영토를 넘기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격분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재정이 파탄난 지 오래라서 사전에 보상금으로 주기로 했던 돈을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페드로는 어떻게든 에드워드와 맺은 약속을 지키고자 애썼지만, 에드워드는 그가 약속을 실현시킬 가망이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아라곤 국왕과 비밀리에 접촉해 카스티야 왕국을 잉글랜드, 아라곤, 나바라, 포르투갈 왕국이 4부분으로 나눠 가지는 방안을 논의했다. 그러나 군중에 전염병이 돌고 급기야 자신마저 중병으로 앓아눕게 되자, 에드워드는 이베리아 반도에 더 있어봐야 답이 없다고 여기고 보급품을 마련하기 위해 약탈을 자행하며 가스코뉴로 귀환했다. 이때 그는 페드로가 빚을 갚게 할 보증인으로 삼고자 페드로의 두 딸 콘스탄사와 이사벨을 인질로 데리고 갔다.

에드워드가 가스코뉴로 돌아간 뒤, 엔리케 2세는 1368년 9월 프랑스 왕국의 지원을 받고 카스티야 왕국에 돌아왔다. 부르고스, 코르도바, 팔렌시아, 바야돌리드, 하옌 등 여러 도시들이 엔리케 2세를 즉각 지지했고, 갈리시아와 아스투리아스는 페드로를 계속 지원했다. 엔리케 2세가 톨레도로 향할 때 안달루시아로 후퇴한 페드로는 군대를 집결시킨 뒤 1369년 3월 14일 몬티엘에서 격돌했다. 이 전투에서 참패한 페드로는 몬티엘의 한 요새로 피신한 뒤 적군에게 포위되었다.

페드로는 충실한 기사 멘 로드리게스 데 사나브리아를 엔리케 2세와 함께 있던 게클랭에게 보내 그에게 여러 영지를 제공하는 대가로 자신이 탈출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게클랭은 이를 받아들이겠다며, 3월 22일 밤에 변장한 채 몬티엘 성을 빠져나오게 했다. 페드로는 몇몇 수행원만 대동해 성밖으로 나온 뒤 게클랭의 안내를 받으며 한 천막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엔리케 2세가 무장한 채 기다리고 있었고, 천막 안으로 들어간 페드로는 엔리케 2세의 단검에 찔려 죽었다.

엔리케 2세는 페드로의 수급을 벤 뒤 여전히 그를 지지하고 있는 성채와 마을에 널리 보여주며 항복을 유도했다. 페드로의 남은 유해는 오랫동안 몬티엘 성밖에 방치되었다가 알 수 없는 날짜에 산티아고 데 푸에블라 데 알코세르 성당에 안장되었고, 1446년 카스티야 국왕 후안 2세에 의해 마드리드에 있는 산토 도밍고 엘 레알 수도원으로 이장되었다. 1869년 산토 도밍고 엘 레알 수도원이 철거될 때 세비야 대성당으로 이송되었다.

3. 가족 관계

  • 부르봉의 블랑슈(1339 ~ 1361): 부르봉 공작 피에르 1세의 딸.
  • 후아나 데 카스트로(? ~ 1374): 카스티야 귀족 페드로 페르난데스 데 카스트로의 딸.
    • 후안(1355 ~ 1405): 엘비라 데 에릴과 결혼.
  • 마리아 데 파디야(1334 ~ 1361): 후안 가르시아 데 파디야의 딸. 페드로의 정부.
    • 베아트리스(1353 ~ 1369): 알폰소 데 카스티야 사후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지만 아버지와 같은 해에 사망.
    • 콘스탄사(1354 ~ 1394): 제1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과 결혼.
    • 이사벨(1355 ~ 1392): 제1대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와 결혼.
    • 알폰소 데 카스티야(1359 ~ 1362):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지만 요절.
  • 이사벨 데 산도발(? ~ ?): 알폰소 데 카스티야의 가정교사였다는 것 외엔 알려진 바 없음.
    • 산초(1363 ~ 1371): 아버지가 패망한 뒤 토로 성에 투옥되었다가 8살에 사망.
    • 디에고(1365 ~ 1440): 아버지가 패망한 뒤 쿠리엘 데 에로로 보내져 그곳에서 50여 년간 유폐됨. 1434년에 석방된 뒤 카스티야 엑스트레마두라 에 있는 코카 마을에서 여생을 보냄.
  • 테레사 데 아얄라(? ~ ?): 마리아 데 파디야의 사촌, 디에고 고메스 데 톨레도의 딸.
    • 마리아(1367 ~ 1424): 톨레도의 산토 도밍고 엘 레알 수녀원장.


[1] 알폰소 11세는 정황상 엔리케 2세가 성인이 되면 왕비와 태자를 바꾸려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2] 페드로가 블랑슈와 파혼하고 영국과 동맹을 맺으려 했다는 가설 역시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