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2 15:57:20

아폰수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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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098><colcolor=#fff> 포르투갈 왕국 보르고냐 왕조 제7대 국왕
아폰수 4세
Afonso 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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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아폰수 디니스
Afonso Dinis
출생 1291년 2월 8일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사망 1357년 5월 28일 (향년 66세)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재위 포르투갈 왕국의 국왕
1325년 1월 7일 ~ 1357년 5월 28일
배우자 카스티야의 베아트리스 (1309년 결혼)
자녀 마리아, 페드루 1세, 레오노르
아버지 디니스 1세
어머니 아라곤의 이사벨
형제 콘스탄사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
2.1. 재위
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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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 왕국 보르고냐 왕조 제7대 국왕. 별칭은 '용감한 왕(O Bravo)'이다.

2. 생애

1291년 2월 8일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 리스본에서 포르투갈 국왕 디니스 1세와 아라곤 10대 국왕 페로 3세의 딸인 아라곤의 이사벨 왕비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누이로 카스티야 국왕 페르난도 4세의 왕비인 콘스탄사가 있었다. 1309년 카스티야 국왕 산초 4세의 딸인 베아트리스와 결혼했다. 그는 일찍이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지만, 디니스 1세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디니스 1세는 알돈카 데 소사라는 정부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 아폰수 산체스를 매우 총애해, 왕궁에서 함께 살게 하고 알부케르케 영주로 삼았으며, 1312년 궁재에 선임했다.

이러다가 왕위 계승권을 아폰수 산체스에게 빼앗길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아폰수 4세는 1321년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고, 자신들의 특권의 정당성을 지속적으로 조사하는 디니스 1세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대다수 귀족들의 호응을 얻어냈다. 반란군은 포르투갈 북부를 장악하고 코임브라를 거점으로 삼았다. 이사벨 왕비는 코임브라로 가서 아들에게 아버지와 화해하라고 권고했지만 거부당했다. 이후 디니스 1세가 군대를 이끌고 코임브라로 진군해 아폰수 4세와 몬데로 강 다리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자, 이사벨 왕비는 나귀를 탄 채 다리를 오가며 양 진영에 찾아가 골육상쟁을 벌이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호소했다. 이사벨의 간곡한 호소에 마음이 움직인 디니스 1세와 아폰수 4세는 1322년 5월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2.1. 재위

그 후 경미한 심장마비 또는 뇌졸중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리스본에서 요양 생활을 하던 디니스 1세는 1323년 카스티야의 왕비 마리아로부터 펠리페 왕자의 반란을 진압해달라는 요청을 받자 아폰수 4세에게 리스본의 주둔한 정예병을 맡기고 카스티야로 출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폰수 4세는 즉각 국경으로 진격했고, 바다호스를 포위 공격하고 있던 펠리페는 포위를 풀고 세비야로 철수했다. 그 후 아폰수 4세는 "이 참에 지금 가지고 있는 군대를 이끌고 리스본으로 가서 왕이 되시라"는 측근들의 권유에 넘어가 군대를 돌려 리스본으로 진군하면서, 자신을 왕위 후계자로 확정하고 아폰수 산체스를 추방하기 위한 코르테스를 소집하지 않으면 전쟁을 재개할 수밖에 없다고 협박하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디니스 1세는 아들의 요청에 따라 1323년 10월 리스본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하고 결론이 날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아들의 바람과는 달리 일반적인 주제를 놓고 논의하게 하면서 시간을 끌다가 막판에 아폰수 왕자가 왕위를 차지하려 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코르테스는 왕자의 요구는 부당하며 왕은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당시 산타렘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아폰수 4세는 이 소식을 듣고 분개해 군대를 이끌고 리스본으로의 행군을 재개했다.

파일:알발라드 평원에서 전투를 말리는 이사벨 왕비.jpg

아들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디니스 1세 역시 군대를 이끌고 출진했다. 양자는 리스본 교외의 알바라데 평원에서 대치했다. 이제 아버지와 아들의 전투가 임박했을 때, 이사벨 왕비가 노새를 타고 수도사와 함께 나타나 평원 한 가운데에 서서 골육상쟁을 벌이는 것을 다시 한 번 만류했다. 이에 모든 전사가 싸울 생각을 버리고 국왕과 왕자에게 화해를 강력하게 권고했고, 두 사람은 전쟁을 강행할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화해하기로 했다. 그 후 디니스 1세와 아폰수 4세는 1324년에 평화 협약을 맺고 내전을 종식했다.

1325년 1월 7일, 아버지 디니스 1세가 산타렘에서 사망했다. 이후 왕위에 오른 아폰수 4세는 아폰수 산체스를 카스티야 왕국으로 추방하고 아폰수 산체스를 계속 도왔던 디니스 1세의 또다른 사생아인 후안 산체스를 처형했다. 아폰수 산체스는 카스티야 왕국에서 카스티야 귀족들의 지원을 받고 용병을 모집한 뒤 1326년부터 1329년까지 포르투갈과 카스티야 국경지대에서 아폰수 4세의 군대와 여러차례 전쟁을 치렀다. 1329년이 되어서야 두 사람은 최종적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고, 아폰수 산체스는 아폰수 4세로부터 영지를 돌려받은 뒤 음유시인으로서 여생을 보냈다.

아폰수 4세는 비록 아버지와 내전을 치렀지만 아버지가 실시한 정책을 이어갔다. 1327년 귀족의 재판 간섭을 금지하고 재판관을 직접 임명했으며, 사적인 복수를 하는 자를 사형에 처했다. 또한 1331년 코르테스에 참여하는 대표들을 개편했고, 여러 영주들의 횡포로부터 평민들을 지켜주기 위한 법을 엄격히 집행했다. 또한 아버지가 신설한 포르투갈 해군의 전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했으며, 대서양 탐험가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해 1336년 카나리아 제도를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328년, 아폰수 4세는 자신의 딸 마리아를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1세와 결혼시켰다. 그러나 알폰소 11세는 마리아를 세비야의 산 클레멘테 수녀원에 보내버리고 정부로 삼은 레오노르 데 구즈만에게 흠뻑 빠져 사생아를 10명이나 낳았다. 아폰수 4세는 알폰소 11세에게 레오노르와의 관계를 끊고 딸을 아껴달라고 여러 차례 요구했지만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1340년 2월 나스르 왕조의 타이파 아불 핫자즈 유수프 마린 왕조 술탄 아불 하산 알리가 연합군을 결성하고 카스티야 왕국의 도시인 타리파를 포위했다. 알폰소 11세는 이에 맞서고자 진군하면서 포르투갈 왕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아폰수 4세는 "내 딸 마리아를 박대하고 정부와 놀아나는데 무슨 염치가 있어서 원군을 보내라고 요구하느냐?"라고 비난했다. 알폰소 11세는 아폰수 4세로부터 원군을 어떻게든 받아내야 했기에, 수녀원에 가 있던 마리아 왕비를 설득해 아버지에게 가서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게 했다. 그러면서 원군을 보내준다면 레오노르와 사생아들을 추방하고 마리아에게 왕비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대우를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아폰수 4세는 이를 믿고 원군을 보내줬고, 카스티야-포르투갈 연합군은 1340년 10월 살라도 전투에서 나스르-마린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그러나 알폰소 11세는 적군을 물리친 후 앞서 맺었던 약속을 무시하고 레오노르를 계속 총애했다.

1347년 코임브라 지진이 일어나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다. 여기에 1348년 중세 흑사병이 포르투갈을 덮치면서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는 혼란에 빠진 나라를 수습하기 위해 치안 정비, 시신 수습, 유랑민 억류, 구걸과 게으름을 억제하는 등 여러 정책을 잇따라 실시했다. 여기에 사회 계층에 따라 허용되는 의복을 규제하는 조치를 내려, 사회의 혼란으로 인해 신분제도가 붕괴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1350년 카스티야 왕국에서 페드로 엔리케 2세와의 내전이 발발했다. 이 내전은 1369년까지 이어지며 카스티야 왕국 전역을 황폐화했고, 수많은 난민이 혼란을 피해 포르투갈로 망명했다. 정쟁에서 패배한 카스티야 귀족들도 이 시기에 포르투갈에 이주했는데, 그들은 곧 포르투갈 궁정 내에서 독자적인 파벌을 결성했다. 그러던 중 아폰수 4세의 아들이자 왕위 후계자인 페드루 1세가 왕세자비로 맞이한 콘스탄사 마누엘의 시녀인 이녜스 데 카스트로에게 홀딱 빠지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페드루는 정실부인 콘스탄사를 홀대하고 이녜스와 깊은 사랑을 나누면서, 그녀와 가까운 카스티야 귀족들에게 많은 특권을 부여했다.

아폰수 4세는 아들의 열정이 식기를 기다려 보기도 하고 이네스를 궁정에서 추방하기도 했지만, 페드루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녜스와의 관계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외롭게 지내던 콘스탄사가 결혼 9년 만에 출산 후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아폰수 4세는 아들을 재혼시키려 했지만 페드루는 이네스 이외의 사람과 결혼하기를 거부했다. 사생아의 딸이었던 이녜스를 포르투갈 왕비로 삼을 수는 없었던 아폰수 4세는 이러다가 페드루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것으로 예정된 손자 페르난두 1세가 이녜스의 자식들에게 밀려날까 우려했고, 이녜스와 가까운 카스티야 귀족들이 활개치는 것에 반감을 품은 포르투갈 귀족들도 왕에게 조치를 내려달라고 촉구했다.

결국 1355년, 아폰수 4세는 페드로 코엘호, 알바로 곤살베스, 디에고 로페스 파체코와 함께 이녜스를 긴급 체포한 뒤 사형을 선고했다. 이네스는 어린 자식들을 왕 앞에 내밀며 아이들을 봐서라도 용서해달라고 빌었지만, 아폰수 4세는 이를 묵살하고 처형을 감행했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이녜스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페드루는 격분해 카스트로 가문과 연합하여 아버지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2주 동안 포르투를 포위 공격하며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가 아폰수 4세가 급파한 토벌대에 패배했다.

1355년 8월, 과거 1324년에 아버지 디니스 1세와의 싸움을 어머니 이사벨의 중재로 그만두고 평화 협약을 맺었던 것처럼, 아폰수 4세는 아내이자 페드루의 어머니인 베아트리스의 중재로 아들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1357년, 아폰수 4세는 페드루에게 권력의 상당 부분을 위임하는 대가로 페드루와 화해했다.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1357년 5월 28일에 리스본에서 사망했고, 페드루 1세가 포르투갈 왕위에 올랐다.

3. 가족 관계

  • 카스티야의 베아트리스(1293 ~ 1359): 카스티야 국왕 산초 4세의 딸.
    • 마리아(1313 ~ 1357):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1세의 왕비.
    • 아폰수(1315): 요절.
    • 디니스(1317 ~ 1318): 요절.
    • 페드루 1세(1320 ~ 1367): 포르투갈 국왕.
    • 이사벨(1324 ~ 1326): 요절.
    • 주앙(1326 ~ 1327): 요절
    • 레오노르(1328 ~ 1348): 아라곤 국왕 페드로 4세의 왕비.
  • 사생아
    • 마리아 아폰수(1316 ~ 1384): 발렌시아 데 캄포스 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