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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포르투갈의 공영방송국(RTP)이 포르투갈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포르투갈인 100명'을 선정. 단, 중복 투표가 포함됨. | ||||||||
TOP 10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 알바루 쿠냘 | 아리트리데스 드 수사 멘데스 | 아폰수 1세 | 루이스 드 카몽이스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주앙 2세 | 인판트 동 엔히크 | 페르난두 페소아 | 세바스티앙 주제 드 카르발류 | 바스쿠 다 가마 | |||||
11위~100위 | |||||||||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살게이우 마이아 | 마리우 소아르스 | 파도바의 안토니오 | 아말리아 호드리게스 | 에우제비우 | |||||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프란시스쿠 사 카르네이루 | 조르제 누누 핀투 다 코스타 | 누누 알바르스 페레이라 | 주앙 페레이라 드 알메이다 | 주제 무리뉴 | |||||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아고스티뉴 다 시우바 | 에사 드 케이로스 | 에가스 모니스 | 디니스 1세 | 페르난두 노브레 | |||||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주제 에르마누 사라이바 | 아니발 카바쿠 실바 | 움베르투 델가도 | 조제 아폰수 | 루이스 피구 | |||||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마르셀루 카에타누 | 페드루 누네스 | 안토니우 비에이라 | 플로르벨라 이스팡카 | 페르디난드 마젤란 | |||||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마리아 지 루르드 핀타실구 | 주앙 1세 | 소피아 드 멜로 브레이네르 안드레센 | 안토니아 페레이라 | 파더 아메리쿠 | |||||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안토니우 다마지우 |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 | 마누엘 1세 | 주제 사라마구 | 아라곤의 이사벨 | |||||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카타리나 에우페미아 | 카를루스 파레지스 | 주제 소크라트스 |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 | 루이 드 카발로 | |||||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브리테스 지 알메이다 | 알베르투 주앙 자르딩 | 알마다 네그레이루스 | 바스쿠 곤살베스 | 알바루 시자 비에이라 | |||||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벨미로 데 아제비로 | 수사 마르틴스 | 마리아 두 카르모 세아브라 | 안토니우 안드라지 | 카를루스 1세 | |||||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마리자 | 비제우의 엘레노르 | 호자 모타 | 안토니우 테이셰이라 레벨루 | 아폰수 3세 | |||||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비토르 바이아 |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 오텔루 사라이바 드 카르발류 |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 허만 호세 | |||||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마리아 2세 | 카를루스 로페스 | 아폰수 코스타 | 폰테스 페레이라 드 멜루 | 가구 코티뉴 | |||||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히카르두 아라우주 페레이라 | 마누엘 소브리뉴 시몽이스 | 마누에우 마리아 바르보자 드 보카주 | 헬리오 페스타나 | 조르주 삼파이우 | |||||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안토니우 샹팔리모 | 안토니우 로부 안투느스 | 질 비센트 | 마리아 헬레나 비에이라 다 실바 | 미겔 토르가 | |||||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나탈리아 코레이아 | 에드가 카르도주 | 페르낭 멘데스 핀투 | 루시아 수녀 | 알프레도 다 실바 | |||||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요한 21세 | 다미앙 드 고이스 | 주앙 4세 | 조아킹 아고스티뉴 | 아델라이드 카베치 | |||||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알메이다 가헤트 | 안토니우 젠틸 마르틴스 | 안토니우 바리아슈에스 | 파울라 레고 | 마리아 조앙 피레스 | |||||
※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bgcolor=#B2DFDB><colcolor=#000000> 가톨릭 성인 포르투갈 왕국 디니스 1세의 왕비 아라곤의 이사벨 Isabel d'Aragó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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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아라곤어 |
이사벨 다라곤 (Isabel d'Aragón) |
포르투갈어 |
이자벨 드 아라강 (Isabel de Aragã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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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
포르투갈의 성녀 엘리사벳 (Sancta Elisabeth Portugallia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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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271년 1월 4일 | |
아라곤 왕국 사라고사 알하페리아 궁전 | ||
사망 | 1336년 7월 4일 (향년 65세) | |
포르투갈 왕국 알렌테주 이스트레모스 | ||
배우자 | 디니스 1세 (1282년 결혼 / 1325년 사망) | |
자녀 | 콘스탄사, 아폰수 4세 | |
아버지 | 페로 3세 | |
어머니 | 쿠스탄차 2세 | |
형제 | 알리폰소 3세, 차이메 2세, 프리드리히 3세, 비올란테, 페로 | |
종교 | 가톨릭 | |
세례명 | 엘리사벳 | |
축일 | 7월 4일 | |
시복 | 1516년, 레오 10세 | |
시성 | 1626년, 우르바노 8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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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 왕국 국왕 디니스 1세의 왕비이자 가톨릭 성인.아폰수 4세의 어머니이자 페드루 1세의 할머니이며, 포르투갈의 엘리사벳, 포르투갈의 성녀 엘리사벳으로 불렸으며 가톨릭에서 평화와 중재의 사도로 알려진 인물이다.
카탈루냐어 이름은 ' 엘리사벳(Elisabet)'이고, 아라곤어 및 포르투갈어 이름은 '이사벨 / 이자벨(Isabel)'이다.
2. 생애
2.1. 어린시절
1271년, 아라곤의 왕인 페로 3세와 시칠리아의 쿠스탄차 2세의 딸로 태어났다. 이사벨의 아버지인 페드로 3세는 딸이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헌신한 페드로 3세의 이모인 헝가리의 에르제베트을 본받으라고 같은 이름을 지어주었다.2.2. 포르투갈의 왕비
1282년, 이사벨은 11세의 나이로 포르투갈의 디니스 1세와 결혼하게 된다. 어린나이에 결혼했지만 수년이 지나서 1남 1녀 자녀를 낳았다. 장녀 콘스탄스는 아라곤의 페르난도 4세의 왕비가 되었고, 장남 아폰수 4세는 포르투갈 국왕이 되었다.디니스 1세는 왕으로서 좋은 통치자였지만 남편으로서는 영 아니었는데, 이사벨 왕비는 자신이 낳지 않은 남편의 사생아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끊임없이 기도와 경건한 삶을 추구하며 자선사업에도 힘써 병원, 고아원, 매춘 여성들의 보호소, 양로원 등을 만들고, 순례자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숙소도 마련해주었다.
이사벨의 이러한 자선사업에 디니스 1세는 탐탁해하지 않았는데,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사벨 왕비가 어느날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줄 빵을 앞치마에 담아 나가는 와중 디니스 1세에 들키겼다고 한다. 이사벨 왕비는 앞치마에 담긴 것이 빵이 아니라 장미꽃이라고 둘러댔으나 이를 믿지 않은 디니스 1세가 앞치마를 들춰보라해 어쩔수 없이 앞치마를 들춰보니, 앞치마 가득히 담겼던 빵은 사라지고 대신 장미가 가득했다는 기적이 일어난 전설이 전해진다.
아침엔 일찍 일어나 성무일도를 바치고 미사 참례를 한 후 성경을 읽고 맡은 바 집안일을 정성껏 했으며, 가난한 자와 환자를 방문하고 위로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궁중의 호화찬란한 생활을 피하고 매일 빵 3조각과 물로써 연명할 만큼 극기의 생활을 하였다
이사벨 왕비는 디니스 1세의 냉대에도 인내심을 갖고 대했고, 1297년 이복형제들에게 관대한 아버지의 행동에 분개한 아들 아폰수와 남편 사이의 대립을 중재하고 조정을 했다. 이런 그녀의 노력과 정치적 영향력 때문에 오해를 받아 한때 알렌케르로 추방되기도 했다고 한다.
2.3. 왕대비
1324년, 디니스 1세가 병에 걸리자 옆에서 간호해 주었다. 남편 디니스가 이사벨의 정성으로 인해 감화되어 뒤늦게 가톨릭 신앙을 찾게 되었지만 이듬해 승하한다.디니스 1세로부터 재산을 상속된 이사벨 왕대비는 왕비 시절부터 운영한 자선사업을 아낌없이 지속적으로 했다. 코임브라에 성 클라라 가난한 자매회[1] 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겼고, 작은형제회( 프란치스코회)의 3회원이 되어 수도자 못지않은 엄격한 신앙생활과 봉사활동에 전념했다.
한편 이사벨 왕대비는 포르투갈과 카스티야의 전쟁을 막아냈다고 한다.
2.4. 사망
1336년 7월 4일, 이사벨은 아폰수 4세와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1세의 중재를 하러 가는 도중 과로와 열병으로 인해 이스트레모스에서 사망하였다. 이사벨 왕대비의 유해는 그녀가 거처했던 성 클라라 가난한 자매회 수도원 성당에 안장되었고, 포르투갈과 카스티야의 평화에 힘썼던 그녀의 노력으로 인해 두 나라는 동맹을 맺었다고 한다.3. 시복과 시성
1516년 교황 레오 10세에 의해 복녀로 시복되었고, 1626년 교황 우르바노 8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1630년 로마 순교록에 성녀의 축일이 7월 4일로 수록되어 있었으나, 1695년에 교황 인노첸시오 12세는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8일 축제[2]와 겹치는 관계로 7월 8일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1969년 전례력 개정과 함께 선택 기념일로 변경되면서 축일 또한 이사벨의 사망한 날인 7월 4일로 변경되었다.위의 장미 전설 덕에, 당시 포르투갈의 수도였던 코임브라는 시성 이후 이사벨을 수호성인으로 삼는다.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아라곤의 이사벨 (Elizabeth of Arag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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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로 3세 (Peter III of Aragon) |
<colbgcolor=#ffffe4,#323300>
차이메 1세 (James III of Arag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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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소 2세 (Alfonso II of Arag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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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티야의 산차 (Sancha of Casti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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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펠리에의 마리 (Marie of Montpelli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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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렘 8세 (William VIII of Montpelli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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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도키아 콤니니 (Eudokia Komne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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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스탄차 2세 (Constance II of Sicil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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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프레디 (Manfred, King of Sicil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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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2세 (Frederick II, Holy Rome Emper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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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앙카 란치아 (Bianca Lanc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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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이아의 베아트리체 (Beatrice of Savo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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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데오 4세 (Amadeus IV, Count of Savo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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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뉴의 안 (Anne of Burgundy) |
4.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녀 |
카스티야의 왕비 콘스탄사 (Constance, Queen of Castile) |
1290년 1월 3일 | 1313년 11월 18일 |
페르난도 4세 슬하 1남 1녀[3] |
1남 |
아폰수 4세 (Alfonso IV of Portugal) |
1291년 2월 8일 | 1357년 5월 28일 |
카스티야의 베아트릭스 슬하 1남 2녀[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