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2 21:16:45

페르낭 멘데스 핀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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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포르투갈의 공영방송국(RTP)이 포르투갈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포르투갈인 100명'을 선정. 단, 중복 투표가 포함됨.
TOP 10
1위 2위 3위 4위 5위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알바루 쿠냘 아리트리데스 드 수사 멘데스 아폰수 1세 루이스 드 카몽이스
6위 7위 8위 9위 10위
주앙 2세 인판트 동 엔히크 페르난두 페소아 세바스티앙 주제 드 카르발류 바스쿠 다 가마
11위~100위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살게이우 마이아 마리우 소아르스 파도바의 안토니오 아말리아 호드리게스 에우제비우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프란시스쿠 사 카르네이루 조르제 누누 핀투 다 코스타 누누 알바르스 페레이라 주앙 페레이라 드 알메이다 주제 무리뉴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아고스티뉴 다 시우바 에사 드 케이로스 에가스 모니스 디니스 1세 페르난두 노브레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주제 에르마누 사라이바 아니발 카바쿠 실바 움베르투 델가도 조제 아폰수 루이스 피구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마르셀루 카에타누 페드루 누네스 안토니우 비에이라 플로르벨라 이스팡카 페르디난드 마젤란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마리아 지 루르드 핀타실구 주앙 1세 소피아 드 멜로 브레이네르 안드레센 안토니아 페레이라 파더 아메리쿠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안토니우 다마지우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 마누엘 1세 주제 사라마구 아라곤의 이사벨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카타리나 에우페미아 카를루스 파레지스 주제 소크라트스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 루이 드 카발로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브리테스 지 알메이다 알베르투 주앙 자르딩 알마다 네그레이루스 바스쿠 곤살베스 알바루 시자 비에이라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벨미로 데 아제비로 수사 마르틴스 마리아 두 카르모 세아브라 안토니우 안드라지 카를루스 1세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마리자 비제우의 엘레노르 호자 모타 안토니우 테익세이라 레벨로 아폰수 3세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비토르 바이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오텔루 사라이바 드 카르발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허만 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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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2세 카를루스 로페스 아폰수 코스타 폰테스 페레이라 드 멜루 가구 코티뉴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히카르두 아라우주 페레이라 마누엘 소브리뉴 시몽이스 마누에우 마리아 바르보자 드 보카주 헬리오 페스타나 조르주 삼파이우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안토니우 샹팔리모 안토니우 로부 안투느스 질 비센트 마리아 헬레나 비에이라 다 실바 미겔 토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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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탈리아 코레이아 에드가 카르도주 페르낭 멘데스 핀투 루시아 수녀 알프레도 다 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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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21세 다미앙 드 고이스 주앙 4세 조아킹 아고스티뉴 아델라이드 카베치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알메이다 가헤트 안토니우 젠틸 마르틴스 안토니우 바리아슈에스 파울라 레고 마리아 조앙 피레스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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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não Mendes Pinto
(1509 ~ 1583)

1. 개요2. 초기 생애3.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가다4. 일본으로 가다5. 동남아에서의 고난6. 귀향과 편력기 저술7. 사후

1. 개요

포르투갈 왕국의 아비스-베자 왕조, 압스부르구 왕조 시기의 탐험가. 편력기(핀투 여행기)의 저자.

2. 초기 생애

소도시 몽테모 로 벨로에서 출생했고 멘데스 가문의 먼 친척으로 추정되며, 10살 또는 12살까지 빈곤에 시달리다가 숙부의 주선으로 1522년에 여성 귀족의 집에서 시종이 되어 1년 반 정도를 일하고 도망쳤다,

1524년에 세투발 항으로 가는 알파마의 작은 범선에 탑승했다가 프랑스 해적의 공격을 받고 생포되고 맨 몸으로 버려졌다가 귀족 프란시스코 드 파리아에게 고용되었으며, 1537년에 인도로 떠나서 디우에 도착했다가 홍해로 갔다가 모카 항에서 투르크인들에게 생포되었고, 그리스인과 유태인에게 차례로 팔렸다가 호르무즈의 총독 누나 다 쿠냐 덕분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3.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가다

인도로 향하다가 투르크 함대의 공격을 받자 도망쳐 차울로 갔으며, 고아로 향하다가 페르낭 드 모라이스에게 징병되어 투르크 인과 싸웠지만 빈털터리가 되었다. 1538년에는 귀족 페로 드 화리아 밑에서 일하고 디우가 투르크 인들에게 포위되어 구원을 요청하면서 동 가르시아 드 코로나의 원정에 동행했다.

페로 드 화리아가 말라카의 총독에 임명되자 1539년에 그를 따라 말라카로 향했다. 바탁과 아친의 전쟁에서 바탁과의 계약을 위해 대사로 수마트라에 파견되었으며, 말라카로 돌아오는 길에 아아루를 거쳐 수마트라에서 좌초되었고 잠바 왕국에서 어부들에게 포로로 붙잡혔다가 무어인 덕분에 말라카로 돌아갈 수 있었다.

4. 일본으로 가다

1540년에는 인도차이나와 남중국해에서 해적 활동을 했고 묘지를 파헤친 일로 인해 타이포르에서 체포되었으며, 중노동형을 선고받아 노역을 하다가 석방된 후에는 병에 걸리기도 했다. 이후 핀투가 타타르라 칭하는 자들의 공격을 받아 붙잡혀 포로 생활을 했다가 떠나 동남아를 항해한 후에 1542년에는 일본의 타네가시마 섬에 도착하고 배에 있던 물건들을 그 곳에서 거래하면서 일본에 조총을 보급하게 되었다.[1]

일본에 머물러 분고의 다이묘 오토모 요시아키를 만났다고 하며,[2] 중국에서 가져온 특별한 약을 만들 수 있는 나무를 통해 요시아키의 지병을 치료했다.

요시아키의 아들이 총기 사고에 휘말려 부상을 입어 죽을 뻔 했지만 치료를 해주어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어린 왕자인 오토모 요시시게의 남동생 하치로의 사건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슈르함머가 지적했다. 핀투가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 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자기 마음대로 이야기를 바꿨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5. 동남아에서의 고난

1546년에는 타네가시마를 떠나 항해하다가 류큐로 표류해 인육을 먹고 연명하다가 해적으로 체포되어 영주로부터 사지분할형을 선고받았다가 석방되어 항해를 해 닝포에 도달했다가 칼라미난 왕국을 거쳐 버마에 갔다. 버마에서 포트루갈 총독과 버마 왕이 다투면서 버마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했으며, 말라카에서 일본인 안지로, 프란시스코 하비에르를 만났다.

1548년에는 시암만에서 일본 해적의 추격을 받고 좌초되어 자바인들로부터 칼라파 왕에게 팔려나갔다가 버마가 시암을 공격하자 시암 편에 서 전투에 참가했다.

6. 귀향과 편력기 저술

전투가 끝나고 그 곳을 떠나 일본의 분고로 갔고 1549년에 일본인 안지로와 함께 선교를 했으며, 1551년에는 하비에르와 함께 큐슈까지 여행했다. 1554년에는 포르투갈령 인도의 대사로 큐슈를 갔고 1556년에는 일본을 떠나 1558년에 리스본으로 귀향했다.

그 동안 16번을 포로로 붙잡히고 13번 노예로 팔려가면서 21년간 여행했다고 하며, 핀투 여행기를 집필하고 1561년에는 알마다 인근에 정착해 마리아 코레이아 드 브리토와 결혼하고 1583년 7월 8일에 사망했다.

7. 사후

그의 사후인 1614년에 핀투 여행기 초판이 포르투갈에서 발행되었다.


[1] 역사가들은 이 때 왕직의 해적단과 동맹을 맺은 신원 미상의 포르투갈 해적이 조총을 전파한 것은 맞지만 핀투 본인일 가능성은 낮다고 한다. [2] 하지만 제임스 머독은 저서 '1542 ~ 1561년 사이 일본의 초기 외국과의 교류 역사'에서 타네가시마가 분고의 오토모 가문에게 지배받은 적이 없다는 것을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