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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098><colcolor=#fff> 포르투갈 왕국 아비스 왕조 제3·5대 국왕 아폰수 5세 Afonso 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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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32년 1월 15일 | |
포르투갈 왕국 신트라 신트라 왕궁 | ||
사망 | 1481년 8월 28일 (향년 49세) | |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 ||
재위 | 포르투갈 왕국의 국왕 | |
1차 | 1438년 9월 13일 ~ 1477년 11월 11일 | |
2차 | 1477년 11월 15일 ~ 1481년 8월 28일 | |
배우자 | 코임브라의 이자벨 (1447년 결혼 / 1455년 사망) | |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 (1475년 결혼) | ||
자녀 | 주앙, 후아나, 주앙 2세 | |
아버지 | 두아르트 1세 | |
어머니 | 아라곤의 레오노르 | |
형제 | 페르난두, 레오노르, 카타리나, 후아나 | |
종교 | 가톨릭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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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 왕국 아비스 왕조 3, 5대 국왕. 별칭은 '아프리카의 왕(o Africano)'이다.2. 생애
1432년 1월 15일 포르투갈 왕국 신트라 왕궁에서 포르투갈 국왕 두아르트 1세와 아라곤 왕국의 국왕 페란도 1세의 딸 레오노르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제로 주앙, 필리파, 마리아, 페르난두, 레오노르, 두아르트, 카타리나, 후아나가 있었는데, 유년기에 사망한 형제들을 제외하면 그가 최연장자였기 때문에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다.1438년 9월 9일, 두아르트 1세는 투마르에서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당시 6살이었던 아폰수 5세를 포르투갈 국왕으로 즉위시키고 섭정으로 레오노르 왕비를 선임한다는 유언장을 남겼다. 귀족들은 유언에 따르려 했지만, 리스본 시민들은 아라곤 여자에게 포르투갈 통치를 맡길 수는 없으며, 두아르트 1세의 형제이자 당대의 왕자들 중에서 학식이 가장 뛰어나기로 유명한 페드루 왕자가 섭정해야 한다며 봉기했다. 이후 양자간의 협상 끝에, 레오노르와 페드루 왕자가 공동으로 섭정을 맡고 권력을 공유하기로 했다. 레오노르는 아폰수를 돌보고 왕실 재정과 행정을 주관하기로 했으며, 페드루는 법률을 집행하고 군대를 통솔하기로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외국인 여자'로 간주된 레오노르의 입지는 갈수록 약화되었고, 대다수 왕족과 귀족들은 페드루를 따랐다. 오직 페드루의 형제로 페드루에게 경쟁의식을 강하게 품고 있던 아폰수만이 레오노르를 지지했다. 1439년, 레오노르는 페드루 세력의 강력한 압박에 굴복하여 아폰수 5세를 신트라 궁정에서 리스본으로 옮겨야 했고, 섭정에서도 물러나야 했다. 그녀는 아라곤 국왕이자 오빠인 알폰소 5세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당시 나폴리 왕국 정복에 사활을 걸고 있던 알폰소 5세는 포르투갈 왕국에 사절을 보내 항의 한 번 했을 뿐 그 이상의 조치를 하지 않았다. 결국 레오노르는 페드루에게 해코지 당할 것이 두려운 나머지 몇몇 측근과 함께 갓난아기 후아나와 함께 크라토로 피신했다가 다시 카스티야로 이동한 뒤 1445년에 사망했다.
레오노르를 축출하고 권력을 손아귀에 쥔 페드루 왕자는 국정을 잘 이끌었다. 그는 대귀족이 영지를 지나치게 늘리고 백성들을 수탈하는 것을 억제하고 왕권 강화에 몰두했으며, 주앙 1세와 두아르트 1세가 추진했지만 그들의 대에 이뤄지지 못했던 포르투갈 왕국의 법률 정비 사업을 이어받아 1444년경 포르투갈 왕국 최초의 성문법인 <아폰수 법률(Código Afonsino)>을 반포했다. 또한 동생 엔히크의 해상 탐사를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 국내외 무역 활성화를 위한 정책 역시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페드루의 권세를 시기한 아폰수 왕자가 자신들의 권력을 제한하는 페드루에게 불만을 품은 귀족들을 포섭했다. 페드루는 그런 동생을 달래기 위해 1443년 브라간사 공작에 선임했지만, 아폰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형과 대립했다.
1446년, 아폰수 5세는 리스본 코르테스에 출석해 자신이 성년이 되었으니 이제부터 친정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페드루 왕자는 왕의 조언자로서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페드루는 자신의 입지를 보장하기 위해 1448년 5월 6일에 자신의 딸 이자벨을 아폰수 5세와 결혼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 해 9월 15일, 아폰수 5세는 페드루가 실시한 모든 칙령을 무효화한다고 선언했다. 페드루는 젊은 왕에게 자신의 충심을 알리기 위해 서신을 여러차례 보냈고 엔히크 왕자도 양자를 화해시키려 노력했지만, 아폰수 왕자가 이를 가로막고 페드루가 반역을 꾀하고 있으니 서둘러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폰수 5세는 아폰수 왕자의 뜻에 따라 페드루를 왕국의 반역자이자 적이라고 낙인찍었다.
페드루는 협상이 통하지 않자 "간신으로부터 왕과 왕국을 구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6천 병력을 이끌고 코임브라에서 출발해 리스본으로 향했지만, 1449년 5월 20일 알파로베이라 전투에서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 토벌대에게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아폰수 5세는 페드루의 모든 영지와 재산을 몰수하고 페드루 편에 섰던 모든 이들의 재산을 압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다가 1450년 7월 딸 후아나가 태어난 후 페드루를 따랐던 이들 일부를 사면했으며, 1455년 7월 아들 주앙 2세가 태어난 뒤 아직 사면받지 못한 모든 페드루 지지자들을 사면했다.
그 후 아폰수 5세는 내정을 삼촌 아폰수에게 맡기고 자신은 무슬림과의 전쟁에 전념했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제국에 함락되면서 동로마 제국이 멸망했다. 이 일은 유럽 전역에 큰 충격을 안겼고, 교황 갈리스토 3세는 1456년 십자군을 선포했다. 그는 이에 응해 군대를 소집한 뒤 지난날 탕헤르 원정에 착수했다가 마린 왕조군에 붙들린 뒤 페스 요새에 감금되었다가 1443년 옥사한 또다른 삼촌 페르난두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북아프리카 원정을 감행했다. 1458년 크사르 엘케비르 시가 25,000명의 병력과 220척의함대를 동원한 아폰수 5세에게 함락되었다. 아폰수 5세가 수비대를 남기고 철수한 뒤, 마린 왕조 칼리파 아브드 알 하크가 1459년 7월에 도시 탈환 작전에 착수했지만 수비대에게 격퇴되었다. 1464년 카사블랑카도 포르투갈 왕국에 넘어갔으며, 1471년 아르질라와 탕헤르도 포르투갈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한편, 아폰수 5세는 탐험가 페르낭 고메스 데 미나(Fernão Gomes da Mina)에게 보조금을 지급해 그가 대서양을 탐험하여 아프리카 서해안의 엘미나에서 무역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1460년 엔히크 왕자가 사망한 뒤, 아폰수 5세는 투자에 비해 수익이 형편없다는 이유로 탐험가들에게 더 이상 보조금을 지불하지 않았다.
1474년,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4세가 외동딸 후아나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사망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후아나가 엔리케 4세의 총신인 벨트란 데 라 쿠에바와 두아르트 1세의 딸 후아나 왕비가 간통해서 태어났다는 소문을 퍼트리며, 후아나에게 벨트란의 딸이라는 의미인 '라 벨트라네하(la Beltraneja)'라는 모욕적인 별명을 붙였다. 그들은 후아나에게 등을 돌리고 엔리케 4세의 이복 동생인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자이자 이사벨의 남편인 페르난도를 카스티야 왕국의 공동 군주로 옹립하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톨레도에서 무르시아까지 이르는 카스티야 남부 일대의 방대한 영지를 보유한 비에나 후작 디에고 로페스 파체코와 톨레도 대주교 알폰소 카리요 데 아쿠냐 등 일부 귀족과 성직자들은 후아나를 지지했다.
디에고 로페스 파체코와 알폰소 카리요 데 아쿠냐 등은 자신들의 세력이 이사벨의 지지자들보다 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아폰수 5세에게 조카 후아나가 카스티야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지원해달라고 요청하면서, 그녀와 결혼하고 카스티야의 공동 국왕이 되라고 제안했다. 이 참에 카스티야 왕위를 자기 것으로 삼을 야심을 품은 아폰수 5세는 이를 받아들이고 1,600명의 보병과 5,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국경을 넘어 엑스트레마두라를 거쳐 팔렌시아에 도착해 후아나의 지지자들과 합세한 뒤 1475년 5월 25일 후아나와 결혼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은 포르투갈에 이어 프랑스 왕국이 후아나를 지원하고 아라곤 왕국이 이사벨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국제전의 양상으로 흘러갔다. 그러다 1476년 3월 1일에 벌어진 토로 전투에서 카스티야-아라곤 연합군이 후아나 지지세력과 포르투갈 왕국 동맹군을 격파하면서 전세가 기울었다. 아폰수 5세는 1476년 6월 13일까지 카스티야 왕국과의 전쟁을 이어갔지만, 전세를 뒤집을 가망이 없자 후아나를 데리고 포르투갈로 철수했다. 이후 3년간 포르투갈-카스티야 국경지대와 해상에서 간혈적인 전투가 이어졌는데, 국경지대에서는 양 측이 승패를 주고받았지만 해상에서는 해전 경험이 많은 포르투갈 측이 대부분 승리했다.
1477년 11월, 아폰수 5세는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가 자신의 동의도 얻지 않고 카스티야 왕국과 일방적으로 종전 협약을 맺고 물러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이 소식에 깊은 환멸을 느끼고 11월 11일 왕위를 아들 주앙 2세에게 넘기고 자신은 토레스 베드라스에 있는 바라토호 수도원에 은거했다. 그러다 주앙 2세와 신하들의 간곡한 설득에 마음을 돌이켜 그해 11월 15일에 복위했다. 그 후 카스티야 왕국과 수 년간 평화 협상을 벌인 끝에 1479년 9월 4일 알카조바스 협약을 체결하면서 전쟁을 종식했다.
포르투갈 왕국은 알카조바스 협약에서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가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공동 국왕이 된 것을 인정하는 대가로 마데이라와 아조레스의 소유권, 와타스 왕조와 기니에 대한 독점적 무역권, 그리고 카나리아 제도를 제외한 대서양 섬들의 소유권을 인정받았다.[1] 또한 후아나는 이사벨의 아들 후안이 성년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결혼하거나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 중 하나를 6개월 안에 선택할 기회를 부여받았다. 후아나는 자신이 심한 모욕을 당했다고 여기고 즉시 산타 클라라 데 코임브라 수도원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수녀 서약을 하고 평생 수녀로 지냈다.
1481년 8월 28일, 아폰수 5세는 리스본에 창궐한 전염병을 피하기 위해 신트라 궁전으로 피신했다가 자신이 태어난 방에서 사망했다. 사후 아들 주앙 2세가 포르투갈 국왕으로 등극했다.
3. 가족 관계
- 이사벨 데 코임브라(1432 ~ 1455): 코임브라 공작이자 아폰수 5세의 섭정이었던 페드루 왕자의 딸.
- 주앙(1451): 요절
- 후아나(1452 ~ 1490):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와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3세 등의 청혼을 모조리 뿌리치고 아베이루의 도미니크 수녀원에 입회해 정식으로 수녀가 되지는 않았지만 수녀들의 삶의 규칙을 따름. 1693년 교황 인노첸시오 12세에 의해 복자로 시복되었고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아베이루 시의 특별한 보호자로 선포됨.
- 주앙 2세(1455 ~ 1495): 포르투갈 국왕.
-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1462 ~ 1530):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4세의 딸, 카스티야 왕위 요구자.
[1]
카나리아 제도는 카스티야 왕국의 수중에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