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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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왕국 브라간사 왕조 제13대 국왕 루이스 1세 Luís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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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38년 10월 31일 | ||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네케시다데스 궁전 | |||
사망 | 1889년 10월 19일 (향년 50세) | ||
포르투갈 왕국 카스카이스 카스카이스 요새 | |||
재위기간 | 포르투갈 국왕 | ||
1861년 11월 11일 ~ 1889년 10월 19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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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e3061><colcolor=#fff> 가문 | 브라간사사셰코부르구고다 가문 | |
이름 |
루이스 필리프 마리아 페르난두 페드루 드 알칸타라 안토니우 미겔 하파엘 가브리엘 곤자가 샤비에르 프란시스쿠 드아시스 주앙 아우구스투 줄리우 발판두 (Luís Filipe Maria Fernando Pedro de Alcântara António Miguel Rafael Gabriel Gonzaga Xavier Francisco de Assis João Augusto Júlio Valfand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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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페르난두 2세 | ||
어머니 | 마리아 2세 | ||
형제자매 | 페드루 5세, 주앙, 마리아 아나, 안토니아, 페르난두, 아우구스토 | ||
배우자 | 사보이아의 마리아 피아 (1862년 결혼) | ||
자녀 | 카를루스 1세, 아폰수 | ||
종교 | 로마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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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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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 왕국 브라간사 왕조의 제13대 국왕. 별칭은 "대중적인 왕(o Popular)"이다.2. 생애
1838년 10월 31일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 리스본의 네케시다데스 궁전에서 포르투갈 여왕 마리아 2세와 공동 국왕 페르난두 2세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페드루 5세, 마리아, 주앙, 마리아 아나, 안토니아, 페르난두, 아우구스투, 레오폴도, 마리아, 에우제니우가 있었다. 어린 시절 자상한 부모의 가르침을 받으며 무탈하게 성장한 루이스는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나 첼로와 피아노를 능숙하게 연주했고 여러 곡을 직접 작곡했다. 또한 포르투갈어 외에도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을 능숙하게 말했으며,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직접 번역했다.1846년 해군에 배속된 이래 중위(1851년), 호위함 대위(1858년), 해상대위(1859년)으로 지속적으로 승진했다. 1857년 9월 포르투갈 전함 페드루 누녜스 호의 해군 사령부에 배속된 뒤 포르투갈 해안을 순항했다. 1858년 6월 21일 코르벳함 바르톨로뮤 디아스 호의 선장으로 선임된 뒤 1858년에서 1860년 사이에 여러 임무를 수행했다. 여동생 마리아 아나의 결혼 상대인 작센 왕국의 왕자 게오르크를 리스본으로 호송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또다른 여동생 안토니아의 결혼상대인 레오폴트 폰 호엔촐레른 후작을 사우스햄튼에서 리스본까지 모셔온 뒤 레오폴트와 안토니아를 엔트워프로 호송했다. 그 외에도 앙골라에서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맡았다.
1861년 11월 11일, 형 페드루 5세가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했다. 페드루 5세는 자식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루이스 1세가 새 국왕에 선임되었다. 1862년 9월 27일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딸인 마리아 피아와 결혼하기로 합의했다. 마리아 피아는 그해 9월 29일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호에 승선한 뒤 리스본으로 향했고, 10월 5일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 도착했다. 리스본 항구에서 마중나온 루이스 1세를 처음 만난 순간, 그녀는 한 눈에 반했고 아버지에게 보낸 서신에서 "저는 그를 사진에서 봤을 때보다 더욱 사모합니다."라고 밝혔다. 그들 사이에서 두 아들 카를루스 1세와 아폰수가 태어났지만, 세번째 아이를 사산한 후에는 더 이상 자식이 태어나지 않았다.
루이스 1세는 짧은 치세에도 선정을 베풀어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형 페드루 5세를 동경해 형의 정책을 그대로 받들었다. 인프라 개선을 위한 공공지출을 지속적으로 늘렸다. 리스본과 레이숑이스 항구 인프라가 개선되었으며, 도로 및 철도가 대거 확장되었고, 포르투에 수정궁이 건설되었다. 또한 노예제를 공식적으로 폐지하고 민사 범죄에 대한 사형을 폐지했다. 그러나 페드루 5세 시기와는 달리 그의 시기에는 경제성장은 차츰 둔화되는 데 비해 지출이 지나치게 늘어나서 국가 재정이 위험할 정도로 악화되었다.
이에 진보당 당수이자 포르투갈 총리였던 호아킴 안토니우 데 아귀아르는 1867년 6월 26일 민사 행정법을 제정하여 자치권을 행사하는 지방 정부를 통제하고 그 해 소비세를 대폭 늘렸다. 이에 반발한 주민들은 1868년 1월 1일 리스본, 포르투, 브라가에서 대규모 시위를 단행했다. 루이스 1세는 이러다 국가가 혼란에 빠질 것을 우려해 1월 4일 내각을 해산시키고 안토니우 주제 데 아빌라가 이끄는 개혁당에게 정권을 맡겼다. 이리하여 1851년 진보당이 집권한 이래 17년간 정치적 안정과 인프라 개선, 경제 발전이 이뤄지던 "재생(Regeneração)" 시대는 막을 내렸고, 이후 진보당과 개혁당의 치열한 정치 암투가 벌어졌다.
1869년, 지난 해에 이사벨 2세가 9월 혁명으로 폐위되어 프랑스로 망명한 뒤 조직된 혁명위원회에 소속되어 있던 일부 스페인 정치인들이 루이스 1세에게 스페인 국왕이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이 소식이 언론을 통해 대서특필되자, 많은 포르투갈인들은 그가 포르투갈 왕위를 아들 카를루스에게 양위하고 스페인 국왕이 된 후 카를루스의 섭정을 맡음으로써 장기적으로 이베리아 연합을 부활시키려 할 거라 여겼다. 하지만 루이스 1세는 그해 9월 28일 <디아리우 드 노티시아스(Diário de Notícias)>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힌 글을 개재함으로써 스페인 국왕이 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나는 포르투갈에서 태어났으며 포르투갈에서 죽을 것이다."
1870년 5월 19일, 살다냐 공작이자 전 포르투갈 원수였던 주앙 카를루스 그레고리우 도밍구스 비센트 프란시스쿠는 페니케 백작 카에타누 가스파르 드 알메이다 등 우파 인사들과 연계해 쿠데타를 단행했다. 그는 제5 카사도레스 대대와 제7 보병 연대를 이끌고 아주다 궁전을 포위했다. 궁궐을 수비하던 제3 포병 연대가 포격을 가하자, 쿠데타군은 즉시 총격을 가해 궁전 수비대 5명을 사살했으며, 여러 총탄이 궁전 창문을 깨고 벽에 수많은 구멍을 냈다. 당시 포르투갈 총리를 맡고 있던 룰레 후작 누누 주제 세베로 데 멘도사는 반군의 압박에도 사임을 거부했지만, 루이스 1세는 분쟁을 속히 끝내고 싶었기에 내각에 룰레 후작을 사임시키고 살다냐 공작을 새 총리로 인정하라고 통보했다.
5월 25일 룰레 후작을 몰아내고 새 총리에 오른 살다냐 공작은 의회의 지원 없이 우파 정치인들로 구성된 내각을 세웠다. 그 후 루이스 1세는 살다냐 공작에게 통치권을 위임하고 궁궐에 틀어박혀 지내야 했다. 평소 정치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던 마리아 피아 왕비는 남편이 실권을 상실한 것에 분노해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제가 왕이었다면 그 자를 총살하라고 명령했을 겁니다!"
그러나 살다냐 공작의 독재는 오래가지 않았다. 사 다 반데이라 후작 베르나르두 드 사 노게이라 드 피게이레두가 이끄는 반 살다냐 군부 세력이 의회를 무시하는 살다냐 공작에게 반감을 품은 개혁당, 진보당과 연계해 100일 만에 또다른 쿠데타를 일으켜 살다냐 정권을 무너뜨린 것이다. 포르투갈 내전부터 반 세기 동안 포르투갈 정계와 군부에서 대표적인 우파 인사로 활동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살다냐 공작은 영국으로 망명했고, 다시는 포르투갈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후 사 다 반데이라 후작이 집권했다가 노령을 이유로 곧 사임하고 개혁당 수장 안토니우 주제 드 아빌라가 총리에 재선임되었다가 1871년에 선거에서 패한 뒤 진보당 수장 폰테스 페레이라 드 멜루가 총리로 선임되었다.
폰테스 페레이라 드 멜루는 살다냐 공작의 쿠데타로 인한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는 데 성공했고, 포르투갈의 신용을 상승시키고 공적 부채를 어느 정도 개선했다. 그러나 1876년 은행들이 대거 도산당하면서 벌어진 경제 위기로 인해 지지율이 떨어졌고, 1877년 경제 위기를 제때에 수습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강한 비난을 받자 사임했다. 이후 안토니우 주제 데 아빌라가 재집권했으나, 그 역시 의회 분쟁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다 왕의 불신을 사서 1878년 해임되고 폰테스 페레이라가 재집권했다.
이후 1878년 선거에서 야당이 대승을 거두면서 다수의 야당 의원이 의회에 진출했다. 이후 진보당 위주로 짜여진 기존의 내각을 유지하려는 진보당 측과 선거에서 승리했으니 자기들이 내각에 더 많이 참여해야 한다는 개혁당의 심각한 갈등으로 인해 의회가 제대로 운영되지 않자, 루이스 1세는 폰테스 페레이라에게 압력을 가해 사임하게 한 뒤 개혁당 위주의 내각을 조직했다. 이에 진보당 지지자들은 국왕이 개혁당을 비열하게 후원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후에도 개혁당과 진보당의 암투가 지속되었고, 국왕은 두 당을 번갈아가며 집권시키는 것 외에는 별다른 대안을 마련하지 않자, 포르투갈 왕실에 대한 불신이 차츰 커져갔고, 포르투갈 사회당(1875년), 노동당(1876년) 등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이 잇따라 신설되었다. 특히 1883년에는 왕정의 폐지를 목표로 삼은 포르투갈 공화당이 조직되었다. 루이스 1세의 치세 동안에는 공화주의자들의 세력은 미약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세력을 불러가면서 훗날 포르투갈 왕국을 몰락으로 이끌었다.
1884년 오스만 제국을 물리친 러시아 제국의 발칸 반도 진출 문제 등 유럽의 여러 분쟁을 논의하기 위한 베를린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때 회의에 참석한 포르투갈 사절단은 앙골라에서 모잠비크 식민지로 이어지는 회랑이 자국의 소유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아프리카 지도에 자신들이 요구하는 영토를 장미색으로 칠했기에, 학계에서는 이 주장을 가리켜 장미색 지도(Mapa cor-de-rosa)로 일컫는다. 그러나 이집트 - 수단에서 남아공까지의 회랑을 세우려던 영국 측의 거센 반대와 다른 열강의 무관심으로 인해, 사절단은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지 못했다.
1889년 10월 19일, 루이스 1세는 오랜 지병에 시달린 끝에 51세 생일을 며칠 앞두고 카스 카이스 요새에서 병사했다. 사후 상 비센트 드 포라 성당에 안장되었고, 장남 카를루스 1세가 포르투갈 왕위에 올랐다.
3. 가족 관계와 후손
3.1.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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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피아와 루이스 1세 |
아내 마리아 피아는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딸이다. 리스본 항구에서 루이스 1세를 처음 마주친 순간부터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친정에게 남편에 대한 찬사가 담긴 편지를 자주 보내곤 했다. 그러나 세번째 아이를 사산한 후 임신을 더이상 하지 못하게 된 후 남편이 여러 정부를 사귀자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시누이 안토니아[1]가 자신이 남자 배우와 바람을 피운다고 모함하는 바람에 가슴앓이를 했다. 사치를 상당히 해서 의원들의 비판을 샀지만, 자선 사업을 성심껏 해서 하층민들의 존경을 받기도 했다. 남편의 죽음, 아들 카를루스 1세의 즉위, 카를루스 1세와 손자 루이스 필리프 왕세자의 암살, 손자 마누엘 2세의 즉위, 포르투갈 혁명으로 군주제가 폐지되는 것까지 지켜보았고 친정인 이탈리아 왕국으로 망명가서 1년 뒤인 1911년 사망했으며 시신은 토리노의 수페르가 성당[2]에 안장되었다.
3.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남 |
카를루스 1세 (Carlos I) |
1863년 9월 28일 | 1908년 2월 1일 |
아멜리 도를레앙 슬하 2남 1녀[3] |
2남 |
포르투 공작 아폰수 왕자 (Infante Afonso, Duke of Porto) |
1865년 7월 31일 | 1920년 2월 21일 | 네바다 스투디 헤이즈[4] |
루이스 1세의 직계 후손은 1908년 장남 카를루스 1세와 장손 루이스 필리프 왕세자의 암살, 1920년 차남 아폰수가 자녀 없이 사망, 1932년 친손자 마누엘 2세가 자녀 없이 사망하면서 직계 후손은 완전 단절되었다. 그렇긴 하나 직계가 아닌 방계로는 작센 왕가와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공가로 시집간 두 여동생의 후손들이 아직 남아있고(대표적으로 미하이 1세)[5] 창업군주인 직계조상 주앙 4세의 나머지 후손들도 현재 많이 남아있다.
[1]
루마니아 국왕
페르디난드 1세의 어머니.
[2]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 이래 오랫동안
사보이아 왕가의 왕실 묘지로 사용된 성당으로, 어머니
아델라이데 왕비가 묻힌 곳이다.
[3]
루이스 필리프 왕세자,
마누엘 2세 등
[4]
미국 출신의 이혼녀. 1917년에 귀천상혼했다.
[5]
두 여동생 중
마리아 아나는
작센 국왕 게오르크와 결혼했고(남편이 즉위하기 전에 사망해서 왕비가 되진 못했다) 안토니아는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공가의 수장인 레오폴트와 결혼했는데, 마리아 아나의 외손자
카를 1세를 통해 그녀의 혈통은 오스트리아 황가로 이어지고 안토니아의 차남인
페르디난드 1세를 통해 루마니아 왕가와 유고슬라비아 왕가도 자손이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