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17:35:30

포르투갈 내전

1. 개요2. 발단3. 전개4. 결과

1. 개요

1828년부터 1834년에 걸쳐 포르투갈 왕국에서 일어난 왕위 계승 전쟁.

2. 발단

빈 체제의 부산물로서 자유주의적인 입헌군주제와 보수적인 전제왕정이 충돌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발단은 1826년, 포르투갈 국왕 주앙 6세가 사망하면서 시작되었다. 주앙 6세의 후계자로서 정통성을 가진 자는 나폴레옹 전쟁속에서 자유주의적인 정치를 펼치려다 실패하여 본국 포르투갈에 반란을 일으켜 브라질 제국 황제로 즉위한 페드루 4세(브라질에서는 페드루 1세)였다.

그러나 페드루 4세는 본국에 반역한 전력탓에 포르투갈과 브라질 양측 국민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결국 페드루 4세는 여론을 의식하여 자신의 딸인 7살밖에 되지 않은 마리아 데 글로리아에게 양위하고 동생 미겔 1세와 약혼시켜 마리아가 성인이 될때까지 미겔이 섭정을 보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즉위한 여왕이 바로 마리아 2세다.

한편 포르투갈은 이미 주앙 6세 시절인 1822년 헌법을 제정하고 입헌군주제로 나아가고 있었다. 페드루 4세는 이 헌법을 1826년 4월 개정한다. 페드루 4세 본인은 자유주의적인 성향이었지만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대립중이던 포르투갈의 상황을 감안하여 양측의 입장을 고루 반영한 중도적 입장의 헌법 개정을 단행했다.

정부의 권한을 모두 4개의 기관에 분산하였는데 국왕이 임명하는 귀족과 성직자 계급의 종신의원들의 상원과 지방의회의 간접선거로 선출되는 111명의 하원, 사법권을 행사하는 재판소와 행정권을 행사하는 내각으로 권력분립의 체제를 갖추는 것이 1826년 포르투갈 헌법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이 신헌법에 대해서 포르투갈의 보수적인 귀족 지주층이나 성직자들은 불만을 품었다. 이들은 입헌군주제가 아닌 절대왕정 체제를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페드루 4세와는 달리 보수적인 입장이었던 미겔을 정식 국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자유주의적 개혁을 청산하려고 노력하던 스페인 페르난도 7세의 지지를 확보하여 자유주의 세력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3. 전개

이런 가운데 주앙 6세 시절 형의 반란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에 망명했던 미겔 1세가 1828년 귀국했다. 미겔은 페드루 1세의 뜻대로 조카 마리아와 약혼하고 섭정 지위를 받아들이겠다면서 귀국했지만 이것은 위장일 뿐이었고 보수파들의 추대를 받아 왕권을 탈취하고 포르투갈 왕위를 차지했다.

미겔 1세는 등극하자마자 헌법에 규정된 상하원을 폐지했으며 전통적인 포르투갈의 신분제 의회인 코르테스를 부활시키고 빈 체제에 입각한 철저한 반동정치를 펼쳤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자유주의 세력들은 미겔 1세에 대항하여 페드루 4세 마리아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5월 18일, 반란을 일으켰다. 미겔 1세는 이 반란을 철저하게 진압하여 수천명의 자유주의자들이 체포되었고 일부는 스페인이나 영국으로 망명했다.

그러는 사이 1831년, 페드루 1세는 브라질에서 대농장주들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아들 페드루에게 양위했다. 그리고 영국의 지원을 받아 내전을 끝내기 위한 원정군을 조직했다. 이후 자유주의 세력의 임시정부가 있던 아소르스 제도로 이동했다.

1832년 7월, 페드루 1세가 이끄는 군대는 영국과 스페인의 지원을 받아 포르투 근처에 상륙하고 미겔 1세의 군대와 접전을 벌였다. 습격을 당한 미겔 1세의 군대는 한때 포르투를 포기하고 철수하기도 했지만 이내 전열을 가다듬고 페드루 1세의 군대를 포위하였다. 미겔 1세의 군대는 1년여간 페드루 1세의 군대를 포위했으나 섬멸하지 못했고 그 사이 영국의 지원군이 두로강을 거슬러 오자 되려 미겔 1세의 군대가 양방향에서 포위되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4. 결과

1833년, 포르투를 포위중이던 포르투갈의 테세이라 공과 영국의 찰스 네이피어 제독의 연합군은 포르투갈 최남단의 알가르브 지역을 기습공격해 파루 상륙에 성공했다. 이후 테세이라 공의 군대는 알가르브 북쪽의 알렌테주 지역까지 진군하였고, 7월 24일 리스본 점령에 성공했다. 또한 찰스 네이피어도 상 비센트에서 미겔 1세의 해군을 궤멸시켰다. 리스본의 함락으로 9개월여에 걸친 포르투 공방전은 페드루 1세가 이끄는 자유주의 세력의 승리로 끝났다.

페드루 1세는 리스본에 입성한 뒤, 딸 마리아를 포르투갈의 정식 국왕으로 선포하고 마리아가 성인이 될 때까지 자신이 섭정을 맡기로 하여 포르투갈 내전은 자유주의측의 승리로 일단락 지어졌다. 미겔 1세의 남은 군대는 1834년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국면을 뒤집지는 못했고 1834년 5월 24일 포르투갈 내전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미겔 1세는 모든 왕권을 박탈당하고 영구추방되어 포르투갈에서 입국 금지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왕족으로서 살 수 있을 정도의 연금을 지급받았다. 페드루 1세는 1826년 헌법에 입각한 입헌정치를 부활시킨 후 1834년 9월 24일 사망했다.

한마디로 포르투갈의 정치가 자유주의냐 절대왕정이냐를 놓고 형과 동생이 싸운 전쟁이다.

여담으로 페드루 1세의 딸 마리아 2세는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 출신인 페르난두 2세와 결혼하여 그 계통이 이어지다가, 1910년 공화국 수립에 이어 마지막 왕 마누엘 2세[1]가 1932년 자녀 없이 사망하여 단절되었다. 그래서 현재 포르투갈 브라간사 왕조의 당주는 미겔 1세의 후손이다.


[1] 마리아 2세의 증손자이다. 마리아 2세는 자녀를 11명이나 낳았으나 4명은 태어나자마자 죽었고, 마누엘 2세의 큰할아버지인 페드루 5세를 포함한 아들 4명이 자녀 없이 사망했고, 딸 2명은 외국 왕실과 결혼해 왕위 계승과 멀어졌다. 결국 마리아 2세의 실질적인 유일한 후계자는 마누엘 2세의 할아버지인 루이스 1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