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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098><colcolor=#fff> 포르투갈 왕국 보르고냐 왕조 제9대 국왕 페르난두 1세 Fernando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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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345년 10월 31일 |
포르투갈 왕국 코임브라 | |
사망 | 1383년 10월 22일 (향년 37세) |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 |
재위 | 포르투갈 왕국의 국왕 |
1367년 1월 18일 ~ 1383년 10월 22일 | |
갈리시아 왕국의 국왕 | |
1369년 ~ 1371년 | |
배우자 | 레오노르 텔레스 (1372년 결혼) |
자녀 | 베아트리스, 이자벨(사생아) |
아버지 | 페드루 1세 |
어머니 | 콘스탄사 마누엘 |
형제 | 마리아. 루이스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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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 왕국 보르고냐 왕조 제9대 국왕.2. 생애
1345년 10월 31일 포르투갈 왕국 코임브라에서 포르투갈 왕자 페드루와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대귀족 후안 마누엘의 딸인 콘스탄사 마누엘의 세번째 자식으로 태어났다. 누나로 마리아(1342 ~ 1368)가 있었고, 형으로 루이스(1344년 출생 후 일주일 만에 사망.)가 있었다.포르투갈 왕위 계승자로 지명된 아버지와 카스티야 공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고귀한 신분이었지만, 페르난두의 어린 시절은 매우 불행했다. 어머니는 정부 이녜스 데 카스트로에게 일방적인 애정을 퍼부으며 자신을 거들떠도 보지 않는 남편 때문에 가슴 앓이를 하다 그를 낳은 지 3주 만인 1345년 1월 13일에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그 역시 이녜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만 아끼고 자신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아버지 때문에 마음 고생을 많이 했을 것이다. 당대의 연대기에 따르면, 이녜스의 자식들은 혈색이 좋고 건강한 데 비해, 페르난두를 포함한 콘스탄사의 자식들은 몸이 허약하고 병을 자주 앓았다고 한다.
그러던 1367년 1월 18일, 페드루 1세가 이스트레모스에서 사망하고 페르난두가 페드루 1세의 유일한 적출자로서 포르투갈 왕위에 올랐다. 2년 후인 1369년, 페르난두 1세의 사촌인 카스티야 국왕 페드로가 엔리케 2세와의 내전에서 패배해 목숨을 잃었다. 페드로를 지지했던 갈리시아 귀족들은 엔리케 2세를 따르기를 거부하고 페르난두 1세를 자신들의 국왕으로 옹립했다. 이리하여 카스티야-포르투갈 간의 소규모 접전이 벌어졌지만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1371년, 양국은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의 중재에 따라 알쿠팀 협약을 체결하고 전쟁을 종식했다. 이때 페르난두 1세는 엔리케 2세의 10살짜리 딸인 레오노르와 약혼했지만, 1372년 포르투갈 귀족 마르팀 아폰수 텔레스의 딸인 레오노르 텔레스와 결혼하기로 하고 카스티야 왕국과의 약혼 계약을 파기했다.
페르난두 1세와 레오노르 텔레스의 결혼은 강한 반발을 초래했다. 레오노르 텔레스의 어머니 알돈사 아녜스는 보르고냐 왕조의 일원이었기에 성직자들로부터 근친간의 결혼이라며 비판받았고,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 시민들은 대귀족의 딸이 왕비가 되었으니 귀족들의 횡포가 심해질 것을 우려한 끝에 아예 반란을 일으켰다. 페르난두 1세는 리스본 시민들의 의견을 듣는 척하다가 리스본을 비밀리에 탈출한 뒤 레사 두 발로 수도원에서 레오노르 텔레스와의 결혼을 감행했다. 이후 토벌대를 조직한 뒤 리스본으로 돌아와 반란 주모자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1372년, 랭커스터 제1대 공작 곤트의 존이 파견한 사절이 포르투갈에 찾아와 자신이 카스티야 국왕이 될 수 있도록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페르난두 1세는 그 해 7월 10일 곤트의 존이 카스티야 왕이 될 때까지 바다와 육지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주고, 잉글랜드 왕국은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더 많은 특혜를 부여하고 포르투갈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내용의 타길데 협약을 체결했다. 페르난두 1세는 조약에 서명한 직후 영국에 두 명의 사절을 보냈고, 사절들은 곤트의 존의 거주지인 사보이 궁전에서 존의 서명을 받아냈다. 여기에 더해, 사절들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와 흑태자 에드워드와도 협상했고, 1373년 6월 16일 양국의 우호를 굳건히 하자는 내용의 런던 협약을 체결했다. 티길데 협약과 런던 협약은 잉글랜드와 포르투갈이 공식적으로 체결한 최초의 우호 조약으로, 향후 600여 년간 이어질 양국의 우호 관계의 기반이 되었다.
페르난두 1세는 리스본과 포르투 및 여러 지역에 성채 건설을 감독했으며, 농업에 관한 법률을 개정했다. 이 법의 목적은 휴경지를 없애고 농업에 전념하는 일손의 수를 늘리기 위한 것으로, 대지주들이 농민들을 원활하게 징발할 수 있도록 허용했으며, 중세 흑사병의 여파로 치솟는 임금을 고정시켰고, 모든 농민의 노동이 의무화되었다. 방대한 토지를 보유한 귀족들은 이 법을 반겼지만, 일반 백성들은 노동력을 마음껏 착취하면서 임금 인상을 불허하는 처사에 불만을 품었다. 반면 페르난두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바스크인, 카탈루냐인, 제노아인, 롬바르드인, 밀란인 등 다양한 상인들이 리스본에 거주하면서 왕성한 상업 활동을 전개하면서, 포르투갈의 무역량은 갈수록 크게 불어났고 왕실과 상인들은 풍족한 삶을 누렸다.
1378년 로마와 아비뇽에서 두 명의 교황이 난립하면서 서방 교회 대분열이 발발했다. 페르난두 1세는 처음엔 아비뇽 교황을 지지하는 카스티야 왕국에 대응하기 위해 로마 교황을 지지했지만, 1379년 카스티야 왕국과 종전 협약을 맺은 뒤 아비뇽 교황을 지지하기로 했다. 그러다가 1381년 캐임브리지 백작이자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인 랭글리의 에드먼드가 이끄는 원정대가 포르투갈에 도착하여 백년 전쟁에 개입해 프랑스 왕국을 적극적으로 돕는 카스티야 왕국을 응징하고자 전쟁을 단행하자 즉시 카스티야 왕국과 맺었던 종전 협약을 파기하고 로마 교황 지지로 선회했다.
1382년 랭글리의 에드먼드가 카스티야와의 전쟁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가자, 페르난두 1세는 카스티야 국왕 후안 1세와 접촉해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는 양국의 화해를 위해 자신의 외동딸 베아트리스를 후안 1세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이때 맺은 결혼 조약에 따르면, 페르난두 1세가 남자 아이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하면 포르투갈 왕위는 베아트리스에게 넘어가고 그녀의 남편은 포르투갈의 왕을 칭할 수 있지만 실제로 통치를 하지는 않고 베아트리스의 어머니 레오노르가 섭정을 맡기로 했다. 또한 베아트리스가 낳은 자식은 포르투갈 왕국을 물려받지만, 자식이 태어나지 않는다면 왕위는 후안 1세에게 돌아가며, 그 다음엔 후안 1세가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엔리케 왕자에게 넘어갈 것이었다. 1383년 5월 17일 바다호스 대성당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고, 5월 21일 카스티야 기사와 고위 성직자들은 카스티야 왕이 조약에서 동의한 약속을 어긴다면 왕과 싸우겠다고 맹세했고, 포르투갈인들 역시 조약을 준수하겠다고 맹세했다.
1383년 10월 22일, 페르난두 1세가 사망했다. 그 후 베아트리스가 포르투갈 여왕에 등극했지만, 카스티야 국왕 후안 1세가 결혼 계약을 빌미삼아 포르투갈의 내정에 깊숙이 간섭하면서, 포르투갈 왕국은 주권을 카스티야 왕국에 빼앗길 위기에 직면했다.
3. 가족 관계
- 레오노르 텔레스(1350 ~ 1405): 포르투갈 귀족 마르팀 아폰수 텔레스의 딸.
- 사생아
- 이자벨(1364 ~ 1435): 히엔 백작 아폰소 엔리케스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