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곤 국왕에 대한 내용은 페르난도 2세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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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A0044><colcolor=#FFF> 레온 왕국 보르고냐 왕조 2대 국왕 페르난두 2세 Fernando 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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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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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137년 톨레도 |
사망 |
1188년
1월 22일 (50~51세) 사모라 베나벤테 |
재위 | 레온 왕국과 갈리시아 왕국의 왕 |
1157년 8월 21일 ~ 1188년 1월 22일 | |
배우자 | 포르투갈의 우라카 (1165년 결혼 / 1175년 결혼 무효) |
테레사 페르난데스 (1177년 또는 1178년 결혼 / 1180년 사망) | |
우라카 로페스 (1187년 결혼) | |
자녀 | 알폰수 9세, 페르난도, 산초, 가르시아 페르난데스, 알폰소 페르난데스, 산초 페르난데스 |
아버지 | 알폰소 7세 |
어머니 | 바르셀로나의 베렝겔라 |
친형제 | 라몬, 산초 3세, 콘스탄사, 산차, 알폰소 |
이복 형제 | 페르난도, 산차, 우라카 라 아스투리아나, 에스테파니아 알폰소 라 데스디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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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온 왕국과 갈리시아 왕국 보르고냐 왕조 2대 국왕.2. 생애
1137년경 톨레도에서 레온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의 국왕이자 전히스파니아의 황제인 알폰소 7세와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3세의 딸 베렝겔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친형제로 라몬, 산초 3세, 콘스탄사, 산차, 알폰소가 있었고, 이복 형제로 페르난도, 산차, 우라카 라 아스투리아나, 에스테파니아 알폰소 라 데스디차다가 있었다. 어린 시절 갈리시아의 유력 귀족이었던 트라바 백작 페르난도 페레스에게 교육받았고, 아버지가 레콩키스타에 몰두하는 동안 행정 업무를 담당했다. 1151년 아버지에게서 '갈리시아의 왕' 칭호를 받았고, 형제 산초 3세 역시 '카스티야의 왕' 칭호를 받았다.[1]1155년 바야돌리드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알폰소 7세는 큰 아들 산초 3세에게 카스티야 왕국을 물려주고, 작은 아들 페르난두 2세에게 레온과 갈리시아 왕국을 물려주겠다고 선언했다. 다만 레온과 갈리시아 왕국에 속해 있던 티에라 데 캄포스, 사하군, 아스투리아스 데 산티아나는 산초 3세에게 물려주기로 했다. 1157년 알폰소 7세가 사망한 뒤, 두 아들은 아버지의 생전 지시에 따라 영토를 분할했다. 1158년 5월 23일, 페르난두 2세와 산초 3세는 사하군 시에서 상호 원조 협약을 맺었다. 두 사람은 서로 힘을 합쳐 무슬림과의 전쟁을 이어가며, 알 안달루스를 정복한 후에는 니에블라에서 리스본까지 레온-갈리시아 연합 왕국이 차지하고 나머지 영토는 카스티야 왕국이 차지하기로 했다. 또한 둘 중 한 명이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 다른 한 명이 형제의 영토를 관할하기로 했다.
1158년 8월, 산초 3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그의 아들 알폰소 8세가 3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라라 가문과 카스트로 가문의 인사들이 어린 왕을 대신하여 섭정했지만, 곧 최고 권력을 놓고 내전을 벌이면서 카스티야 왕국이 혼란에 빠졌다. 그는 이를 이용해 카스티야 왕국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야심을 품고 내전에 개입했다. 수세에 몰린 카스트로 가문의 가주 페르난도 로드리게스가 레온에 망명하자, 페르난두 2세는 그를 지원해 라라 가문과의 전쟁을 이어가게 했다. 여기에 1159년 카스티야 왕국을 안정시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대를 파견해 부르고스 시를 점거했다.
1160년 페르난도 로드리게스가 이끄는 카스트로 가문 추종자들은 바야돌리드 지방의 빌라브라마 마을 인근에서 벌어진 로브레갈 전투에서 페르난두 2세의 지원에 힘입어 누뇨 페레스 데 라라가 이끄는 라라 가문 추종자들을 격파하고 누뇨 페레스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장인 오소리오 마르티네스가 목숨을 잃는 등 막심한 피해를 입었고, 라라 가문은 여전히 알폰소 8세의 섭정직을 유지했다.
1160년 9월 카스트로 가문과 라라 가문간의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지만, 페르난도 2세는 페드로 로드리게스가 카스티야 왕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불허했다. 이에 분개한 페르난도 로드리게스는 기독교인과 무슬림인이 혼합된 군대를 이끌고 최근에 세워진 도시인 시우다드 로드리고를 방문한 페르난두 2세를 포위했다. 페르난두 2세는 한때 목숨이 위험했지만, 살라망카와 사모라의 민병대가 구해주러 온 덕분에 포위망에서 벗어났다. 페르난두 2세는 페르난도 로드리게스와 곧 화해했고, 그를 쿠엘라르, 두냐스, 살라망카, 토로, 바야돌리드, 사모라의 총독으로 임명했다가 나중에는 아스투리아스와 베나벤테의 총독으로 선임했다.
1162년, 페르난두 2세는 카스티야로부터 톨레도를 무력으로 빼앗은 후 페르난도 로드리게스를 톨레도 총독으로 선임했다. 페르난두 2세에 대항할 여력이 없었던 라라 가문은 페르난두 2세가 톨레도와 세고비아를 자국의 영역을 삼는 것을 용인했다. 1164년 페르난도 로드리게스는 페르난두 2세의 지원에 힘입어 카스티야 왕국 깊숙이 진격해 그해 6월 또는 7월에 벌어진 우에테 전투에서 승리하고 적장인 만리케 페레즈 데 라라 백작을 전사시켰다. 그러나 라라 가문은 알폰소 8세를 호리타 데 로스 카네스로 피신시켰다가 다시 아빌라 시로 피신하면서 저항을 이어갔고, 페르난도 로드리게스는 알폰소 8세 확보에 실패하자 레온 왕국으로 돌아갔다.
1165년, 페르난두 2세는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1세의 딸 우라카와 결혼하고 평화 협약을 맺음으로써 선대 때부터 이어졌던 양국의 갈등을 종식하려 했다. 또한 이 시기에 라데스마와 사우다드 로드리고를 재건하고 주민들을 거주시키고 총독을 선임했다. 이에 과거에 라데스마 시를 소유했던 살라망카 주민들이 "우리의 땅을 우리의 동의 없이 빼앗아걌다"고 여기고 라데스마 총독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페르난두 2세는 이 소식을 듣자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반란군을 격파한 뒤 다시는 반역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아내고 살라망카로 돌려보냈다.
아폰수 1세는 자국의 국경 인근에 있는 시우다드 로드리고를 재건하는 것은 장차 그곳을 요새화해 포르투갈을 공격하려는 의도라고 의심했다. 그는 그 전에 선제 공격하기로 마음먹고, 1166년 아들 산슈 1세에게 군대를 맡겨 갈리시아를 침공하게 했다. 산슈 1세는 곧바로 갈리시아로 쳐들어가 여러 요충지를 공략했다. 여기에 무와히드 왕조가 알칸타라와 알부르케르케를 공략하며 톨레도를 위협하자, 페르난두 2세는 어쩔 수 없이 카스티야 왕국과의 전쟁을 끝내기로 했다. 1166년, 그는 라라 가문의 구성원들과 소리아에서 만나 톨레도를 카스티야 왕국에 돌려주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때 무슬림으로부터 톨레도 시를 방어하기 위해 우클레스 성채를 성전 기사단에 양도하기로 했다. 그는 나중에 카스티야 왕국 역시 아폰수 1세처럼 평화 협약을 깨뜨릴 것을 걱정해 나바라 왕국의 안초 6세와 투델라에서 만나서 알폰소 7세가 나바라 왕국으로부터 빼앗았던 영토를 되돌려주는 대가로 서로를 지원하기로 한 투델라 협약을 체결했다.
그리하여 카스티야 왕국과 화해한 페르난두 2세는 1168년 갈리시아로 달려가 시우다드 로드리고를 포위 공격하던 포르투갈군을 급습해 격파했다. 하지만 아폰수 1세는 다시 군대를 일으켜 갈리시아를 침공해 투이 등 여러 성채를 공략하고 1169년에는 카세레스 시를 공격했다. 하지만 아폰수 1세는 곧 마음을 바꿔 일부 병력을 갈리시아에 남겨두고 무슬림의 지배를 받고 있던 바다호스 공략에 착수했다. 이로 인해 포르투갈군의 전력이 분산되자, 페르난두 2세는 이 때를 틈타 군대를 끌어모아 갈리시아에 침투한 포르투갈군을 격파한 뒤 바다호스 공방전을 진두지휘하고 있던 아폰수 1세를 습격했다. 아폰수 1세는 급히 피신하려 했지만 도중에 낙마하는 바람에 다리가 부러진 채 사로잡혔다. 그 후 페르난두 2세는 바다호스를 마저 공략한 뒤 레온 왕국의 봉신 노릇을 하는 무슬림들에게 바다호스 성채를 맡겼다.
1070년, 페르난두 2세는 장인 아폰수 1세를 석방시키는 대가로 지난날 아폰수 1세가 레온-갈리시아 연합 왕국으로부터 빼앗았던 영토를 돌려받고 카세레스, 바다호스, 트루히요, 산타 크루스 데 라 시에라, 몬탄체스 시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중 트루히요, 몬탄체스, 산타 크루즈 데 라 시에라 등지는 페르난도 로드리게스의 영지가 되었다. 같은 해에 무와히드 왕조가 포르투갈의 도시인 산타렝을 포위하자, 페르난두 2세는 장인을 도우러 달려와서 무슬림군을 격파했다. 1173년 포르투갈을 공격했다가 아폰수 1세에게 패배한 무슬림군은 방향을 돌려 시우다드 로드리고를 기습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이들의 의도를 조기에 파악한 페르난두 2세는 레온, 사모라, 갈리시아 등지에서 군대를 소집한 뒤 시우다드 로드리고를 향해 진군하던 적을 역습해 대승을 거뒀다.
1175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페르난두 2세와 우라카 왕비가 사촌 관계[2]라는 이유로 결혼 무효를 선고했다. 물론 이것은 명목상일 뿐이고, 실제로는 포르투갈과 결혼 동맹을 이어가봐야 이득이 없겠다고 판단한 페르난두 2세가 결혼을 무효로 해달라고 요청한 것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알렉산데르 3세는 카스티야 왕국의 여인과 결혼해서 레온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이 하나로 힘을 합쳐서 레콩키스타를 완수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고 페르난두 2세 역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의 딸 엘레오노르를 왕비로 삼고 있었던 알폰소 8세는 레온 왕국보다는 잉글랜드와 손잡는 게 낫다고 여겼기에 무산되었다. 그 후 페르난두 2세는 1177년 8월에서 10월 사이에 어린 시절 자신을 가르쳤던 트레바 백작 페르난데 페레스와 테레사 데 레온의 사생아이자 누누 페레스 데 라라 백작의 미망인인 테레사 페르난데스와 결혼했다. 그는 이 결혼을 통해 카스티야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라라 가문과 갈리시아의 거물 귀족인 트리바 가문과 동시에 동맹을 맺을 수 있었다.
1178년, 카스티야 왕국의 연이은 침략에 시달리던 나바라 국왕 안초 6세의 구원 요청을 받은 페르난두 2세는 카스티야 왕국을 전격적으로 침략했다. 그는 알폰소 8세가 미처 대처하기 전에 카스트로헤리스, 두에나스를 공략했다. 알폰소 8세는 이에 맞서 포르투갈 왕국과 동맹을 맺었고, 아폰수 1세는 페르난두 2세가 다수의 병력을 카스티야 방면으로 보낸 틈을 타 아들 산슈 1세에게 군대를 맡겨 갈리시아를 공격해 여러 요새를 공략했다. 1180년 페르난두 2세와 알폰소 8세는 토르데시아스 마을에서 만나 평화 협약을 맺기로 합의했다. 그 해 2월 6일 페르난두 2세의 두번째 왕비 테레사 페르난데스가 둘째 아들을 낳다가 사망하고 레온의 산 이시도르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통치 기간 동안 파드론, 리바다비아, 노이아, 카스트로 칼델라스, 폰테베드라, 투이, 루고 등 여러 영지를 수도원에 기부했으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종신 연금을 수여했다. 또한 1170년 카세레스 시에 산티아고 기사단이 선립되어 순례자들의 순례길을 지키고 무슬림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축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184년 무와히드 왕조 칼리파 아부 야쿱 유수프가 북아프리카에서 모집한 군대를 이끌고 포르투갈을 침공해 그 해 5월 산타렝에서 아폰수 1세를 포위했다. 이에 산티아고 기사단이 출격해 그해 6월 무슬림군을 격퇴했다. 이후 이전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순례하러 찾아오면서, 레온-갈리시아 연합 왕국의 경제가 상당히 호전되고 문화, 에술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1187년 5월, 페르난두 2세는 비스카의 영주 로페 디아스 데 하로의 딸이자 세온의 영주 누뇨 메넨데스의 미망인인 우라카 로페스와 결혼했다. 그는 새로 맞이한 아내에게 아길라르와 몬테아구도의 영주권을 주었다. 우라카 로페스는 적어도 1180년 5월부터 페르난두 2세의 정부였으며, 그와의 사이에서 가르시아 페르난데스, 알폰소 페르난데스, 산초 페르난데스를 낳았지만 오직 산초 페르난데스만이 유년기에 죽지 않았다. 1188년 1월, 페르난두 2세의 죽음이 임박하다는 것을 눈치챈 우라카는 그의 맏아들인 알폰수 9세를 몰아내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그는 알폰수 9세의 어머니 '포르투갈의 우라카'가 교황에 의해 결혼 무효 처리되었으니 알폰소 9세가 후계자로 인정받아서는 안 된다는 우라카 로페스의 주장을 받아들여 알폰수 9세를 추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 1188년 1월 22일 베나벤테에서 병사했다.
페르난두 2세 사후, 우라카 로페스는 자기 아들 산초 페르난데스를 새 국왕으로 옹립하려 했다. 그러나 페르난두 2세의 두번째 부인 테레사 페르난데스와 연관이 있던 라라 가문과 트라바 가문은 알폰수 9세를 지지했고, 다른 귀족과 성직자들 역시 오랫동안 왕위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왕자를 하루아침에 추방하고 어린 아이를 세울 수는 없다고 여겼다. 그 결과 알폰수 9세는 무사히 레온-갈리시아 연합 왕국의 국왕이 되었고, 우라카 로페스는 아들 산초와 함께 카스티야 왕국으로 피신했다. 그 후 페르난두 2세의 유해는 레온의 산 이시도르 수도원에 안장되었다가 나중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3. 가족 관계
- 포르투갈의 우라카(1148 ~ 1211):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1세의 딸.
- 알폰수 9세(1171 ~ 1230): 레온-갈리시아 연합 왕국 국왕.
- 테레사 페르난데스(? ~ 1180): 트레바 백작 페르난도 페레스와 테레사 데 레온의 사생아이자 누누 페레스 데 라라 백작의 미망인.
- 페르난도(1179 ~ 1187): 요절.
- 산초(1180): 출생 도중 어머니와 함께 사망.
- 우라카 로페스(1160 ~ 1230): 비스카의 영주 로페 디아스 데 하로의 딸이자 세온의 영주 누누 메넨데스 백작의 미망인.
- 가르시아 페르난데스(1182 ~ 1184): 어머니가 왕비가 되기 전에 사생아로 태어나고 사망함.
- 알폰소 페르난데스(1184 ~ 1187): 사생아로서 태어났다가 어머니가 왕비가 되면서 합법적인 자식이 됨. 그러나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함.
- 산초 페르난데스(1186 ~ 1220): 어머니에 의해 레온-갈리시아 연합 왕국 차기 국왕으로 옹립될 뻔했으나 여론의 반대로 무산된 뒤 어머니와 함께 카스티야 왕국으로 망명함. 훗날 알폰수 9세와 화해한 뒤 레온-갈리시아 연합 왕국으로 돌아와서 몬테아구도와 아길라르 영지를 상속받았고, 알폰수 9세의 궁정에서 관료로 지냄.
[1]
알폰소 7세는 살아 있는 동안에도
전히스파니아의 황제로서 가족들에게 왕과 여왕의 칭호를 줬다. 아들인
산초 3세는 '카스티야의 왕' 칭호를, 아들인 페르난두 2세는 '갈리시아의 왕' 칭호를, 사생아 딸인
우라카 라 아스투리아나는 '아스투리아스의 여왕' 칭호를, 자매인 산차 라이문데스는 '인판타-여왕' 칭호를 받았다.
[2]
페르난두 2세와 우라카 부부의 할머니인 레온의
우라카와 포르투갈의
테레사 데 레온은 이복 자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