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22:56:25

에드워드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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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FFF> 잉글랜드 왕국 플랜태저넷 왕조 제5대 국왕
에드워드 3세
Edward III of England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dward_III_of_England_%28Order_of_the_Garter%29.jpg
왕호 에드워드 3세
(Edward III)
이름 윈저의 에드워드
(Edward of Windsor)
출생 1312년 11월 13일
잉글랜드 왕국 버크셔 윈저 성
사망 1377년 6월 21일 (향년 64세)
잉글랜드 왕국 런던 리치몬드 쉰 성
장례식 1377년 7월 5일
잉글랜드 왕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재위 잉글랜드 왕국의 왕
1327년 2월 1일 ~ 1377년 6월 21일
배우자 에노의 필리파 (1328년 결혼 / 1369년 사망)
자녀 흑태자 에드워드, 이사벨라, 조앤, 라이오넬, [1], 에드먼드[2], 메리, 마거릿, 토머스
아버지 에드워드 2세
어머니 프랑스의 이자벨
형제 존, 엘레노어, 조앤
종교 가톨릭
1. 개요2. 즉위와 친정3. 스코틀랜드 정벌4. 백년전쟁5. 말년6. 평가7. 가족관계
7.1. 자녀

[clearfix]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100년 전쟁의 단초가 되는 인물이자. 에드워드 2세 이사벨라 장남. 친조부는 에드워드 1세이고 외조부는 필리프 4세이며, 필리프 4세의 손자들 중 유일하게 장성한 사람이기도 하다.[3]

2. 즉위와 친정

에드워드 3세의 아버지였던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는 왕위에 오른 이후로 의회와 반목을 일삼았을 뿐 아니라 실정을 숱하게 저질러 귀족들이나 다른 왕족들, 주교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못한 상황이었다. 결국 1314년에 배넉번 전투에서 패배하여 스코틀랜드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자 위기를 만회하기 위해 사촌인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등을 비롯한 의회의 주요인물들을 체포하여 처형하는 등의 강수를 두었지만 결국 아내인 이사벨라와 그의 가신인 모티머 등이 정변을 일으켜 에드워드 2세를 끌어내리고 대신에 그 아들인 에드워드 3세가 즉위하게 되었다.

에드워드 3세가 즉위했을 당시에는 나이가 어려 어머니 이사벨라 섭정을 받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에든버러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 조약으로 스코틀랜드의 국왕 로버트 1세는 정식으로 왕위를 인정받았으며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모든 권리를 무상으로 포기하였다.[4] 그리고 1328년 조인된 노샘프턴 조약으로 로버트 1세와 정략 결혼을 맺어 양국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일설에 에드워드는 조부인 에드워드 1세의 유언을 생각하여 이러한 조치들을 못마땅해하였으나, 당시 세력이 강했던 그의 어머니의 압력을 받고 굴복하였다고 한다.

그는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1330년 모후 이사벨라의 정부(情夫) 로저 모티머를 체포하여 처형하고 이사벨라를 수도원에 유폐하였다. 특히 모티머가 에드워드 3세의 숙부인 켄트 백작 우드스톡의 에드먼드[5]를 무고해, 처형한 뒤 스스로 켄트 백작이 되었고 이사벨라는 이를 감싸면서 귀족들이 반발하게 되었다. 그래서 에드워드 3세는 모티머와 이사벨라를 숙청할 때 귀족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모티머의 증손자인 3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는 에드워드 3세의 손녀사위(차남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외동딸 필리파와 결혼한다)가 된다. 그것도 에드워드 3세 생전에. 그리고 그 후손인 요크의 리처드는 훗날 이 핏줄을 근거로 장미 전쟁을 일으킨다.

3. 스코틀랜드 정벌

왕권을 강화시키는 데 성공한 그의 첫 번째 목표는 스코틀랜드였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로버트 1세가 죽고 그의 아들이자 에드워드의 매제 데이비드 2세가 즉위했는데 그의 나이가 아직 어린 데다 정치적으로 불안한 상황이었다. 이를 이용한 에드워드 3세는 로버트 1세가 추방한 친잉글랜드 귀족들의 쿠데타를 지원하여 그들과 함께 더플린 무어 전투와 할리던 힐 전투에서 스코클랜드군을 격파해, 그들의 우두머리 에드워드 밸리올을 왕위에 앉히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로 망명하였던 데이비드 2세가 1341년 다시 스코틀랜드 왕위를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으므로 에드워드 3세의 야망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에게 상당한 타격을 주어 한동안 잉글랜드를 넘보지 못하게 했다. 데이비드 2세는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포로가 되어 막대한 몸값을 내기로 약속하고 풀려날 때까지 11년간이나 잉글랜드에서 죄수 생활을 할 정도로 굴욕을 당했다. 특히 잉글랜드의 공격으로 스코틀랜드는 국토가 초토화되면서 재정이 심하게 악화되었는데 데이비드 2세의 몸값을 낼 엄두가 안 나 잉글랜드에게 사정하여 깎아야 했고 이를 에드워드 3세가 죽을 때까지 갚지 못할 정도였다.

4. 백년전쟁

그의 할아버지인 에드워드 1세는 13세기 초부터 아서 왕 로망스가 전 유럽에서 대유행하면서 기사도의 상징으로 확고히 자리잡은 전설적 영웅 아서 왕의 후계자를 자처하고 그에 걸맞는 행동을 연기함으로써 외교적 위신과 도덕적 권위를 강화하는 동시에 내부적으로는 헨리 3세의 치세 말기에 이미 완성된 잉글랜드 민족의식을 자극해서 왕권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내는 정책을 펼쳤다. 에드워드 3세는 할아버지의 이러한 대외홍보 전략들을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켰으며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에서 유럽 최강국인 프랑스를 상대로 연달아 승리하면서 한때 아서 왕의 후계자인 기사도 군주이자 잉글랜드 민족의 수호자로서의 이미지를 공고히 했다.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 대승하였고 같은 해 칼레를 점령하여 프랑스 침공의 발판을 마련했다.( 1차 칼레 공방전) 1355년 재차 개전, 이듬해의 푸아티에 전투에서 승리하고 점령지의 주권을 인정받는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맺었다. 이후 1369년 재차 개전하지만 군사원정의 실패만 거듭되면서 점령지를 대부분 빼앗겼다.

1341년 프랑스 침공을 두고 손수 잉글랜드 해군함을 사전 검열했는데 이것이 세계 첫 관함식이다.

5. 말년

말년에는 의회의 반대에 시달리고 정부 앨리스 페러즈와 열애하는 가운데 4남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에게 정권을 농단당했다. 흑사병의 만연은 그의 치세기에 해당되며 또 정치의식의 앙양으로서는 1376년의 선량 의회가 있었고 존 위클리프의 개혁도 이 시대에 발단하였다. 거기다 웨일스 지방에서 1372년 부터 흐웰린의 조카 오와인이 반란을 일으켜 그의 손자인 리처드 2세의 시기까지 날뛰었고 재위 기간 동안 전쟁 비용을 많이 써왔기 때문에 국가 재정에 대한 의회의 힘이 강해지게 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장남 흑태자 에드워드가 자기보다 먼저 사망하자 아들을 뒤따르듯 다음해인 1377년 쉰 궁에서 사망하였다.

6. 평가

에드워드 2세 치세의 흑역사를 극복하고 잉글랜드의 재기를 이끌어낸 명군으로 평가된다. 잉글랜드에서는 위인 대접을 받으며, 프랑스에서도 노르망디와 칼레의 일부 분리주의자들[6]은 에드워드 3세에 대한 평가가 나쁘지 않은 편이다. 반면 대다수 프랑스인들과 스코틀랜드인들에게는 자신들의 땅을 침공한 침략자로 취급된다.

7. 가족관계

7.1.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흑태자 에드워드
(Edward, The Black Prince)
1330년 6월 15일 1376년 6월 8일 켄트의 조앤
슬하 2남[7]
1녀 베드포드 백작부인 이사벨라
(Isabella, Countess of Bedford)
1332년 6월 15일 1382년 10월 5일 코시 영주 앙게랑 7세
슬하 2녀
2녀 조앤 공주
(Princess Joan)
1333년 12월 19일 또는
1334년 1월 28일
1348년 9월 2일
2남 클래런스 공작 앤트워프의 라이오넬
(Lionel of Antwerp, Duke of Clarence)
1338년 11월 29일 1368년 10월 7일 얼스터 여백작 엘리자베스 드 버그
슬하 1녀
비올란테 비스콘티
3남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
(John of Gaunt, Duke of Lancaster)
1340년 3월 6일 1399년 2월 3일 랭커스터의 블란체
슬하 1남 2녀[8]
카스티야의 콘스탄사
슬하 1녀[9]
캐서린 스윈포드
슬하 3남 1녀[10]
4남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
(Edmund of Langley, Duke of York)
1341년 6월 5일 1402년 8월 1일 카스티야의 이사벨
슬하 2남 1녀[11]
조앤 홀랜드
3녀 브르타뉴 공작부인 메리
(Mary, Duchess of Brittany)
1344년 10월 10일 1361년 9월 브르타뉴 공작 장 4세
4녀 펨브로크 백작부인 마거릿
(Margaret, Countess of Pembroke)
1346년 7월 20일 1361년 10월 1일 또는 12월 25일 펨브로크 백작 존 헤이스팅스
5남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
(Thomas of Woodstock, Duke of Gloucester)
1355년 1월 7일 1397년 9월 8일 또는 9월 9일 엘리노어 드 보훈
슬하 1남 3녀

왕비 에노의 필리파와의 사이에서 5남 4녀의 적자녀들을 낳았다.

당시에는 영아 사망률이 매우 높아 왕족으로 태어나도 어린 나이에 사망하는 게 당연시 되는 시대였고 이로 인해 후계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은 많은 왕족들과는 다르게, 에드워드 3세는 왕비 에노의 필리파와의 사이에서 많은 자녀를 낳았고 성인으로 장성하고 혼인하여 후손을 남긴 아들만 해도 5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그의 장남 흑태자 에드워드는 부왕보다 먼저 병사했고, 흑태자의 아들이자 에드워드 3세의 손자였던 리처드 2세가 왕권을 이어받아 즉위했다. 하지만 어린 리처드 2세가 즉위한 틈을 타 에드워드 3세의 나머지 자녀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왕위 계승 분쟁을 벌였다. 특히 2남 클라렌스 공작 앤트워프의 라이오넬[12], 3남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 4남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의 후손들 사이에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을 놓고 분쟁이 터졌으며 이는 결국 백년전쟁 종전 후 장미 전쟁으로 표출된다.

에드워드 3세의 세째 아들인 제1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John of Gaunt, 1340∼1399)의 후손으로 코난 도일[13], 베네딕트 컴버배치[14]가 있다. 즉 이 둘은 32촌 관계인 것. 이쯤되면 그냥 남이다.[15]


[1] 이 사람이 곤트의 존이다. 이 곤트의 존의 증손녀가 튜더 왕조의 시조 헨리 7세의 어머니인 마거릿 보퍼트이며 또 곤트의 존의 3녀인 캐서린은 카스티야 왕국의 왕비가 되었으며 3녀 캐서린의 친손녀는 이사벨 1세이다. [2] 이 사람의 증손자인 에드워드 4세의 장녀가 헨리 7세의 왕비 요크의 엘리자베스다. [3] 필리프 4세의 장남 루이 10세는 외아들이자 유복자인 장 1세를 낳았지만 그도 태어난지 고작 5일만에 사망했고, 차남 필리프 5세는 어거지로 살리카법을 확대해석하며 즉위했지만 정작 본인도 아들없이 딸만 두었으며, 삼남 샤를 4세마저 딸만 낳고 남성 상속자없이 사망하면서 일어난 결과. 그나마 필리프 4세의 살아남은 손는 에드워드 3세 뿐이지만, 손들은( 루이 10세의 딸이자 나바라의 여왕 잔느, 필리프 5세의 딸 마르그리트) 결혼도 하고 후손도 남겼다. [4] 사실 모티머도 스코틀랜드를 멸망시키려고 원정을 시도했지만 웨어데일 전투에서 패하는 바람에 포기해야 했다. [5] 에드먼드의 딸이 훗날 에드워드 3세의 맏며느리가 되는 켄트의 조앤이다. [6] 노르망디는 프랑스화된 바이킹의 후손이고 윌리엄 1세의 주도 하에 잉글랜드를 정복한 노르만족의 영향으로 프랑스 본토와 달리 문화적으로 북유럽 및 잉글랜드에 가까우며(워낙 북쪽이라 북쪽에서는 잘 자라기 힘든 포도로 담그는 와인 대신, 칼바도스라는 프랑스 타 지방에는 없는 독특한 술 종류가 있다), 칼레 또한 원래는 플랑드르, 즉 네덜란드ㆍ벨기에 쪽의 영역이었고, 프랑스에서 독자세력화를 시도했던 부르고뉴국의 역사도 있는데다가, 북해 연안이라 바다 건너 영국령이었던 세월도 그리 짧지 않은 관계로, 서프랑크부터 이어지는 오늘날 프랑스 및 그 전신에 속해 있던 세월이 생각보다 길지 않기 때문에, 두 지역의 주민들은 스코틀랜드, 카탈루냐, 바스크 등처럼 진지하게 분리주의를 획책하고 있지는 않아도 프랑스 본토 내에서는 독자적인 지역색이 상당히 있는 편이다. 그래서 이들은 오히려 잔 다르크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다. [7] 리처드 2세 등. [8] 포르투갈의 왕비 필리파, 헨리 4세 등. [9] 카스티야의 왕비 카탈리나 [10] 서머셋 백작 존 보퍼트, 윈체스터 주교 헨리 보퍼트, 엑서터 공작 토머스 보퍼트 [11] 2대 요크 공작 노리치의 에드워드 [12]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은 사실 서른살도 되기 전에 요절했고, 아들은 없고 외동딸 필리파만 있어서 그의 자손들은 이용당하고 휘둘리기만 하는 입장이었다. [13] 곤트의 존의 15대손 [14] 곤트의 존의 17대손 [15] 실제로 7촌이 넘어가면 유전적으로도 남이라고 한다. 본관 같은 할아버지-손자뻘 항렬의 남남인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