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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1세 드 몽모랑시

성명 샤를 1세 드 몽모랑시
Charles Ier de Montmorency
생몰년도 1307년 ~ 1381년 9월 11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몽모랑시
사망지 프랑스 왕국 몽모랑시
아버지 장 1세 드 몽모랑시
어머니 칼레토의 잔
형제 장, 마티외 1세, 이자벨
배우자 보주의 마르그리트, 루시의 잔, 페트로니유 드 빌리에
자녀 장, 마르그리트, 잔, 마리, 샤를, 자크, 필리프, 데니스
직위 몽모랑시 영주, 프랑스 원수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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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프랑스 원수. 백년전쟁에서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맞서 싸웠다.

2. 생애

1307년경 몽모랑시 영주 장 1세 드 몽모랑시와 베르네발 앙 코의 남작 기욤 드 칼레토의 딸인 잔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장[1], 마티외 1세[2], 이자벨[3]이 있었다. 1326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직위를 물려받았고, 1336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에 의해 프랑스 왕실대제빵장(Grand panetier de France)에 선임되었다. 1337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의 속국인 플란데런 백국을 침공하자, 왕의 명령에 따라 플란데런으로 가서 그곳의 도시들이 프랑스를 계속 따르도록 설득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339년, 노르망디 공작이자 왕위 계승권자인 장 왕자의 군대에 복무해 투르네 공방전에 참여했다. 1340년 퐁타트레센(Pont-à-Tressen)에서 잉글랜드를 돕던 독일 용병대를 추격하다가 매복 공격을 받았다. 프루아사르 연대기에 따르면, 다른 기사들은 도망쳤지만 그는 적에게 등을 보이고 깃발을 잃은 채 도망치려는 수모를 겪지 않으려고 수적으로 우세한 적과 끝까지 맞서 싸우다가 생포되었다고 한다. 이후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그는 1344년 3월 로베르 8세 베르트랑 드 브릭퀘벡이 노령으로 사임한 뒤 필리프 6세에 의해 프랑스 원수로 선임되었다.

1341년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샤를 드 블루아의 군대에 가담했고, 1342년 반 공방전을 감행한 잉글랜드군을 압박해 포위를 풀고 퇴각하게 했다. 1345년 장 왕자와 함께 가스코뉴에서 더비 백작 그로스몬트의 헨리에 맞서 싸웠다. 1346년 미르몽, 빌프랑슈 요새에 무혈 입성했고, 며칠간 공방전을 치른 끝에 앙굴렘을 탈환했다. 이후 에기용 공방전을 치르던 식량과 물자를 수송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잉글랜드 장군 월터 매니의 기습 공격을 받았지만 격퇴했다. 그러나 에기용 공략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고, 도중에 에드워드 3세가 파리를 위협하는 것에 위협을 느낀 필리프 6세의 부름을 받고 파리로 이동했다.

1346년 8월 26일 크레시 전투에 참전했으나 패배를 막지 못했고, 다른 4명의 귀족과 함께 필리프 6세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다. 그 공으로 8명의 왕실 지종 중 한 명으로 선임되었지만, 왕을 잘못 보좌해서 참패를 초래했다는 비난에 시달리다가 1347년 사임했다. 이후 플란데런 국경과 피카르디 전역을 따라 바다를 담당하는 사령관에 선임되었다. 이후 케누아에서 우다르 1세 드 렌티가 이끄는 플란데런 반란군을 격파하고 200명을 사살했다.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장 2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완패했을 때, 그는 플란데런 국경을 경비하고 있었다. 이 전투가 끝난 후, 그가 다스리던 몽모랑시 성이 잉글랜드군에게 심한 약탈과 방화를 당했다. 1358년 나바라 왕국의 국왕이자 에브뢰 백작 카를로스 2세를 찾아가 파리에서 봉기한 에티엔 마르셀에 맞서 싸우는 도팽 샤를을 도우라고 설득했으며, 1360년 5월 8일 프랑스 사절단의 일원으로서 브레티니 평화 협약에 서명했다. 그는 장 2세의 몸값 지불에 대한 보중으로 에드워드 3세가 선택한 40명의 고귀한 인질 중 한 명이 되어 잉글랜드로 향했다.

그가 언제 귀국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364년에 이미 샤를 5세의 고문을 맡았다. 1368년 12월 11일 미래의 샤를 6세가 될 왕자의 대부가 되었다. 1371년 카를로스 2세와 샤를 5세의 협상을 중재해 카를로스 2세가 몽펠리에를 다스릴 권한을 부여받는 대가로 샤를 5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다. 1381년 9월 11일에 몽모랑시에서 사망했다.

3. 가족

  • 보주의 마르그리트(? ~ 1336): 보주와 몽펜시에의 영주 기샤르 6세의 딸.
  • 루시의 잔(? ~ 1361): 루시 백작 장 5세의 딸.
    • 잔: 1352년 7월 24일에 출생 직후 사망.
    • 마르그리트 드 몽모랑시(? ~ 1406): 발몽의 영주 로베르 7세 드 에스토트빌의 부인.
    • 잔 드 몽모랑시(1364년 또는 1368년 이후 사망): 샬루야우의 영자 브루모르 드 라발의 부인.
    • 마리 드 몽모랑시(1372년 이후 사망): 우서리와 생파투 영주인 기욤 드 아이브리와 초혼, 장 2세 드 샤티옹 쉬르 마른과 재혼.
  • 페트로니유 드 빌리에(? ~ 1400): 빌리에 영주 아담 2세 자이카의 딸.
    • 샤를: 1369년 출생 직후 사망.
    • 자크 드 몽모랑시(? ~ 1414): 몽모랑시 영주.
    • 필리프 드 몽모랑시(? ~ 1425): 기사.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의 군대에서 복무하다가 지에리체에서 플란데런군과 전투를 벌이던 중 전사함.
    • 데니스 드 몽모랑시(? ~ 1452년 이후): 랜슬로 터팽 드 크리세(Lancelot Turpin de Crissé)의 부인.


[1] ? ~ 1316: 오를레앙의 주교 [2] ? ~ ?, 아브레메닐과 구생빌의 영주 [3] 1310 ~ 1341, 블루아와 뒤누아 백작 장 2세 드 샤티옹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