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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353b4><colcolor=#fff> 스튜어트 왕조
House of Stuar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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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일 | 1371년 |
창립자 | 월터 피츠앨런 |
現 수장 | 프란츠 폰 바이에른 |
국가 |
스코틀랜드 왕국 잉글랜드 왕국 아일랜드 왕국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
[clearfix]
1. 개요
스튜어트 가문의 문장 |
제임스 1세의 아들인 찰스 1세는 잉글랜드 내전으로 의회파의 크롬웰에게 죽고 찰스 2세가 왕으로 선언된다. 찰스 2세 때 왕정이 복구되자 친카톨릭 정책을 펼쳤으며, 제임스 2세로 이어졌으나 명예혁명으로 딸인 메리 2세와 사위 윌리엄 3세가 공동으로 왕이 되어 직계가 끊긴다. 왕권은 메리 2세의 여동생 앤 여왕을 끝으로 스튜어트 왕조는 물러난다. 그리고 다음 왕위계승권자인 조지 1세를 독일에서 데려오며, 하노버 왕조로 넘어감과 동시에 내각책임제가 시행된다.
2. 상세
스튜어트 가문의 시조는 프랑스 서부 브르타뉴의 귀족 출신으로 11세기 노르만 왕조의 시조인 윌리엄 1세의 잉글랜드 침략 때 브리튼 섬으로 건너온 앨런 피츠플래드(플래드의 아들 앨런)였다. 앨런은 잉글랜드의 헨리 1세에 의해 영지를 수여받아 잉글랜드의 귀족이 되었다. 11세기 브르타뉴는 인접한 노르망디와의 교류가 잦았고, 일부 귀족들이[1] 노르만 침공에서 공을 세워 영지를 수여받기도 했는데 앨런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이렇듯 앨런의 후손들은 잉글랜드를 기반으로 삼고 있었으나, 12세기 스티븐 왕과 마틸다 공주 사이에서 일어난 내전( 무정부시대) 시기에 마틸다를 지지했다가 스티븐이 1차적으로 승리하자 위기감을 느끼고 스코틀랜드로 망명하게 되었다. 이후 스코틀랜드 던켈드 왕조의 국왕 데이비드 1세와 친분을 맺은 앨런의 증손자 월터(Walter)가 스코틀랜드의 세습 최고시종장[2]으로 임명되면서 비로소 스튜어트 가문이 성립하게 되었다. 스튜어트라는 이름의 유래는 월터가 수여받은 직위에서 따 왔다.
스튜어트 가문은 최종적으로 스코틀랜드에 정착했고, 왕실과의 혈연으로 유력 귀족가문 중 하나가 되었다. 스튜어트 가문은 원래 왕실의 친척이긴 해도 왕위계승서열이 그리 높지는 않았는데, 더 높은 순위의 왕위계승권자들이 연달아 후사가 끊기거나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전사하면서 유력한 국왕 후보로 올라서게 되었다. 독립영웅이자 브루스 왕조의 시조였던 로버트 1세의 뒤를 이은 데이비드 2세가 1371년 끝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로버트 1세의 외손자이자 월터 스튜어트의 아들이었던 로버트 스튜어트가 로버트 2세[3]로 왕위에 오름으로써 스튜어트 왕조가 개창되었다.
잉글랜드와는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잉글랜드의 전통적인 숙적인 프랑스와 유대관계를 맺어 잉글랜드를 견제했다.[4]
그 뒤로 로버트 3세, 제임스 1세, 제임스 2세, 제임스 3세, 제임스 4세, 제임스 5세까지 부자계승으로 이어졌다. 이 도중에 잉글랜드 튜더 왕조의 시조인 헨리 7세의 장녀 마거릿 튜더가 제임스 4세에게 시집가서 제임스 5세를 낳았다. 모후를 통해 튜더 왕가의 피가 흐르는 제임스 5세는 프랑스의 기즈 가문 출신인 마리 드 기즈와 결혼해 메리 여왕를 낳았다. 그러나 제임스 5세가 메리가 태어난지 불과 6일 뒤에 사망하면서, 메리는 고작 신생아 때 스코틀랜드의 여왕으로 즉위했다.
1558년 메리는 훗날 프랑수아 2세가 되는 프랑수아 왕세자와 결혼했고, 이로써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의 결합이 완성되는 듯 했다. 하지만 유달리 병약했던 프랑수아 2세는 즉위 18개월 만인 1560년 12월에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요절했고, 프랑수아 2세와 사별한 메리는 스코틀랜드로 돌아가게 되면서 두 나라의 동군연합은 무산되었다. 메리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유명하지만 《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알려진 이야기는 현대에는 엘리자베스 1세나 성공회 교도의 입장만을 대변한다며 비판을 받는 관점이고 의외로 본토에선 메리에게 호의적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대중적인 차원에서 메리의 비극적인 삶과 화려한 개인사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은 거지 역사적으로 진지하게 평가하자면 본토인 스코틀랜드에서 오히려 잉글랜드보다 더 악평가를 하면 악평가를 했지 좋게 봐주진 않는다. 실제로 메리 1세의 생애와 행적을 보면 비운의 군주는 커녕 스스로 분란을 자초한 암군에 가깝다. 차라리 잉글랜드 입장에서는 "남의 나라의 문제 많은 비극의 여군주" 수준으로 담담하게 볼 수 있지만, 스코틀랜드 본토 입장에서는 기본적으로 문화적, 가치관적 차이도 굉장히 컸고, 실질적으로는 외국인이나 마찬가지인 주제에 종교적 문제로 사사건건 충돌했으며 거듭된 실정으로 인하여 대내외적 정치적 혼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메리 여왕 시대를 기점으로 해서 스코틀랜드의 정치적 핵심 계층은 예전부터 약했던 왕실에서 클랜 대귀족- 개신교 성직자-자치 도시민 중심의 과두정으로 확실하게 넘어가게 되었다.
프랑수아 2세와 사별한 이후 메리는 친족이자 4세 연하의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와 결혼했다. 단리 경은 스튜어트 왕가의 분가인 "단리의 스튜어트 가문"의 당주 제4대 레녹스 백작 매튜 스튜어트와 마가렛 더글라스의 아들이었다. 마가렛 더글라스는 제6대 앵거스 백작 아치볼트 더글라스와 마거릿 튜더의 딸로 이 마거릿 튜더는 위에서 나온 제임스 4세의 왕비로 메리의 할머니인 그 사람이었다. 마거릿 튜더는 1513년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4세가 사망한 후 아치볼트 더글라스와 재혼했고, 1527년 아치볼트 더글라스가 사망하자 다시 메스번 경 헨리 스튜어트와 재혼했다. 그러니까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의 어머니 마가렛 더글라스는 메리 1세의 아버지 제임스 5세의 이부 여동생으로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는 결국 메리 1세와는 사촌지간이 되었다. 즉 단리 경 역시 엘리자베스 1세의 친척으로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사실 엘리자베스 1세 이후 튜더 왕가의 혈족은 거의 남지 않았고, 헨리 8세의 핏줄은 명맥이 끊길 예정이었기 때문에, 시조인 헨리 7세의 혈통에서 계승자를 찾아야할 처지라서 단리 경은 잉글랜드 왕위 유력 계승자였다. 메리 1세는 프랑스 발루아-앙굴렘 궁정에서 자란 데다가 외가인 기즈 가문은 프랑스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골수 가톨릭이어서 가톨릭 교육을 받았고, 이에 따라 당연히 친프랑스 성향이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 1세를 찬탈자로 보며 자신을 적법한 잉글랜드 계승자로 주장했다. 당연히 잉글랜드에선 두 사람의 결혼을 처음엔 반대했다.
한편 스튜어트 집안끼리의 결혼이었지만 왕조의 이름이 살짝 바뀌었다. 단리 경의 가문이 비록 스튜어트 혈족이었지만 스튜어트 가문이 스코틀랜드 왕가가 되기 전에 분가한 집안이라 친가로는 거리가 있었다.[5] 또한 단리의 가문은 한때 조상이 프랑스 궁정에 머물 때 철자를 Stuart 라 고쳐서 기존 스코틀랜드 왕실 이름(Stewart)과 좀 달랐다. 따라서 단리 경과 메리 1세의 아들인 제임스 6세[6] 즉위 이후 스튜어트 왕가는 가문의 철자를 Stuart로 고쳤다. 단리 경은 스튜어트 왕가의 혈통이었기 때문에 King Consort 직위를 하사받았다.
그러나 메리 1세가 이탈리아 출신 남자 시종 다비드 리치오를 총애하면서 추문이 생기자 부부는 곧 별거하게 되었다. 결국 추문을 참지못한 단리 경이 메리의 면전에서 다비드 리치오를 끌어내서는 칼을 빼들어 무려 56차례나 찔러 죽이고 말았다. 이로 인해 메리는 큰 충격을 받았고, 남편과의 사이는 확실히 틀어졌다. 그러다 1567년 봄에 화해하여 메리 1세가 단리 경을 별장으로 불러 오붓한 시간을 보냈는데, 여왕이 공교롭게 외출한 사이 별장이 폭파되고 단리 경은 교살당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이 끔찍한 사건의 진상은 자신이 총애하던 리치오가 살해당한 것에 대해 원한을 품은 메리 1세가 야심만만한 보스웰 백작을 새로운 정부(情夫)로 삼고, 여왕의 복수와 국서(King Consort)를 살해하여 그 자리를 자신이 차지해 실권을 쥐고 싶어한 보스웰 백작의 합작이었다. 단리 경의 살해 배후자인 보스웰 백작 제임스 햅번은 이후 메리 1세와 납치나 다름없는 동거에 들어간 뒤, 기어코 메리 1세와의 결혼을 감행했고, 그녀는 곧 보스웰의 아이까지 임신했다. 더 웃긴 건 당시 메리는 말할 것도 없고 보스웰 백작도 아내가 있는 유부남이었다는 것.[7]
아무리 여왕이라고 해도 아내가 정부와 간통하여 남편을 모살한 건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질만큼의 충격적인 파급력이었다. 게다가 당시 존 녹스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도덕적으로 엄숙한 청교도 신앙이 이미 스코틀랜드에 깊게 퍼졌기 때문에 가뜩이나 남편 단리 경의 살인을 공모했다고 의심받고 있던 차에, 남편을 살해한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보스웰 백작과 결혼까지 하며 도덕적으로 완전히 무너져버린 메리 1세는 자신의 지지자인 가톨릭 교도들에게까지 해명을 요구받으며 버림받았다. 결국 메리는 반란을 일으킨 신하들에게 붙잡혀 감금된 뒤 양위를 강요당했고, 당시 생후 10개월밖에 안된 아들 제임스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폐위당했다. 감금 중에 보스웰의 아이를 유산한 메리는 조력자들의 도움으로 탈출하고, 군사들을 끌어 모아 반란을 일으킨 신하들에게 맞서 다시 왕위를 되찾으려 했다. 그러나 결국 패배하고 스코틀랜드를 떠날 처지가 된다. 메리는 그나마 왕래가 있던 엘리자베스 1세의 잉글랜드로 망명했으나, 죄수 신분으로 전락해 약 19년간 감금 생활을 하다 결국 1587년 처형되었다.
메리의 아들 제임스 6세는 어머니의 양위로 생후 10개월 만에 스코틀랜드 왕으로 즉위했는데, 1603년에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하자 그 후계자로 지정되어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했다. 이는 엘리자베스 1세의 사망으로 헨리 8세의 직계가 모두 단절되었기 때문에 시조인 헨리 7세의 후손을 찾아야 했고, 헨리 7세의 딸 마거릿 튜더가 제임스 4세와 결혼하여 스코틀랜드 왕비가 되어 그 후손이 제임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엘리자베스 1세가 죽기 수십 년전부터 엘리자베스 여왕은 후계 지명 이야기만 나오면 벌컥 화를 냈지만 혈통상으로 제임스가 가장 우선인 건 그당시 신하들이 매우 잘 알고 있었고, 현실적으로 개신교 군주 중 잉글랜드와 가장 밀접하고, 종교개혁을 잉글랜드보다 더 철저히 한 곳이 스코틀랜드라 잉글랜드의 신하들도 납득을 했다.
이렇게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왕위까지 얻게 되면서 스튜어트 왕조는 영국 역사상 최초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양국의 통합 왕조가 되었는데 그가 영국의 제임스 1세이다.
찰스 1세 때는 올리버 크롬웰의 청교도 혁명으로 일시적으로 영국에서 쫓겨나기도 했으나, 찰스 2세 시대에 복위하였다.
하지만 제임스 2세가 딸 메리 2세와 사위 윌리엄 3세에 의한 명예혁명으로 쫓겨나면서 직계가 단절되었고, 메리 2세의 뒤를 이은 앤 여왕이 죽으면서 영국에서의 스튜어트 왕조는 역사에서 퇴장하게 되었다. 그 뒤를 이은 왕조는 독일계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왕조였다.
사실 프랑스로 망명한 제임스 2세의 후손들이 루이 14세의 지지하에 영국의 왕위를 요구하며 자코바이트 운동을 일으켰지만 이쪽도 결국 1807년을 끝으로 후계사 단절되면서 애매모호하게 끝났다. 다만 스튜어트 왕가가 단절됐을 뿐 이와 별개로 찰스 2세의 서자들은 공작 작위를 받아 현재도 그 후손들이 영국 스튜어트 가문의 맥을 잇고 있다. 단지 서자의 후손인 관계로 왕위계승권이 없어서 자코바이트 왕위 요구자로 간주되지 않을 뿐이다.
또한 스튜어트 왕조는 단절되었더라도 스코틀랜드 클랜의 특성상 분가가 매우 많아 가문의 혈통은 적•서 모두 포함해서 계속해서 내려오고 있다. 왕조 단절 이후 스튜어트 가문을 대표하는 수장은 따로 존재하지 않지만 갤러웨이의 스튜어트 가문이 최선임으로(수장이 아니라 원로격) 여겨진다. 아니면 스튜어트 성 자작이 최선임을 주장하고 있다.
3. 특징
스튜어트 왕가는 전통적으로 프랑스와 매우 친밀했다. 스코틀랜드 왕조 때부터 잉글랜드 견제용으로 프랑스와 깊은 관계를 맺었고, 국혼은 물론이고 청교도 혁명, 명예 혁명 때는 도피처로 프랑스를 택했다. 문제는 반가톨릭을 국시로 삼은 잉글랜드에서 이러한 친프랑스 성향은 계속 '왕이 프랑스와 내통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낳을 수밖에 없었던 것.[8] 결국 이러한 왕가에 대한 불신은 명예 혁명으로까지 이어졌고, 오늘날까지 스튜어트 왕조에 대한 영국인들의 인식이 좋지 않은 것도 이러한 친프랑스 기조도 한몫하고 있다.굉장히 많은 왕들이 반란 및 전사에 시달렸다. 제임스 1세(신하들의 음모로 암살)[9], 제임스 2세(잉글랜드와의 전투에서 전사), 제임스 3세(귀족들의 반란으로 살해), 제임스 4세(잉글랜드와의 전투에서 전사), 제임스 5세(잉글랜드와의 전투에서 지고 돌아와 곧 신경쇠약으로 병사), 메리 1세(귀족들의 반란으로 쫒겨남), 찰스 1세( 반란으로 참수형), 제임스 2세( 귀족들의 반란으로 쫓겨남).
로버트 2세부터 제임스 2세까지 12명의 왕이 있었는데 신경쇠약으로 사망한 제임스 5세와 나름 천수를 누린 제임스 6세=제임스 1세, 찰스 2세를 제외하면 9명의 왕이 쫒겨나거나 내외적인 이유로 죽음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가 안 끊기고 꽤나 오래 이어진 것이 신기할 정도다.
이렇게 험난한 역사가 이어진 가장 큰 이유는 잉글랜드와의 전쟁이었지만, 또 다른 이유는 본질적으로 여러 스코틀랜드 귀족들 가운데서 옹립된 왕인 스튜어트 왕조는 권위나 세력 면에서 다른 귀족 가문들을 압도할 정도로 대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임스 6세, 즉 제임스 1세에 이르기까지 스튜어트 왕가는 절대군주가 될 수 없었고, 그저 대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봉건적인 권위를 가진 왕이었을 뿐이었다.[10] 애초에 중세 스코틀랜드 자체가 봉건적 관계에 기반한 스코트어권 로우랜드, 씨족 중심의 정치 사회구조를 유지한 게일어권 하이랜드와 서부 제도로 나누어져, 나라 안에 나라가 공존하는[11] 나라였다.
왕실의 상징적 권력보단 로우랜드의 귀족 가문이든, 하이랜드의 클랜이든 씨족 집단 간 연합과 대립 관계가 훨씬 더 정치적으로 중요했고, 이런 문맥에서 스튜어트 왕조는 나머지 유럽 왕가들처럼 대외 전쟁을 통한 권력 신장을 노리다가 하필이면 상대가 잉글랜드란 훨씬 덩치 큰 놈이다 보니 어쨌든 결과만 보자면 실패인 도박에 실컷 꼬라박았던 것이고, 자연스럽게 로우랜드, 하이랜드를 불문한 스코틀랜드 전반에서 클랜, 귀족, 종교개혁 전후의 교회, 도시 의회의 영향력은 더 강해졌다. 권력의 기반인 스코틀랜드 자체가 정치적으로 중앙 집권제가 발달하지 못한 수평적 계약-연맹 관계에 기반한 곳이었으니 결혼을 통해 잉글랜드의 왕관도 물려 받았다 한들 현지 토착 엘리트를 찍어 누를 힘이 없었던 것이 자연스러웠다.
스튜어트 가문의 군주들이 딱히 특출나게 무능했다기보단 태생적인 조건 자체가 워낙 빡빡하게 수평적이고, 강력한 중앙 권력이 출몰하기 힘든 정치적 환경이었던지라 소위 ' 절대 왕정'이라 부를 만한 권력을 발전시키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애초에 기반은 중세 유럽 전체 평균으로 봐도 왕권이 유난히 불안정했던 스코틀랜드 출신 왕실인데, 막상 가문의 운명을 바꾼 로또 한방으로 상속 받은 잉글랜드는 반대로 근세 유럽 국가 치곤 정치 제도도 복잡하고, 중앙집권의 역사도 깊으며, 피지배층의 역량도 강했는데 하필이면 타이밍은 또 유럽 사회 전역이 개신교다 카톨릭이다 치열하게 분열되었던 종교개혁 시기였다. 근본적인 조건 자체가 이러하니 세습을 통해 잉글랜드, 아일랜드의 왕관을 물려받은 것도 권력을 키워주기보단 오히려 정치적 불안정 요소를 키우기만 했다. 관념적으론 영국식 민주주의, 자유주의의 기원이라 여겨진 잉글랜드 내전과 명예 혁명이라는 두 차례의 거대한 정변의 패자다 보니 잉글랜드에서도 당연히 대중적 인식은 꿔다놓은 호구 왕실 내지는 민주주의의 적, 독재자 등등 부정적인 평가가 많으나, 오늘날 사학계에선 이런 식의 캐리커처식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12] 제임스 6세/1세, 찰스 1세 재위 초기나마 양국의 강력한 청교도들을 정치적으로 제압했던 것만 하더라도 스코틀랜드 시절에 비하면 잉글랜드에선 어찌보면 평타라도 친 셈이었다.
계속해서 이사를 다닌 가문이기도 한데, 브르타뉴-> 잉글랜드-> 스코틀랜드->다시 잉글랜드로 계속해서 거점이 바뀌었다.
딱 보면 알지만 제임스라는 이름을 좋아했다.[13]
4. 역대 왕
4.1. 스코틀랜드 왕
- 로버트 2세 (1316 ~ 1390): 재위 1371 ~ 1390
- 로버트 3세 (1337/1340 ~ 1406): 재위 1390 ~ 1406
- 제임스 1세 (1394 ~ 1437): 재위 1406 ~ 1437
- 제임스 2세 (1430 ~ 1460): 재위 1437 ~ 1460
- 제임스 3세 (1451/1452 ~ 1488): 재위 1460 ~ 1488
- 제임스 4세 (1473 ~ 1513): 재위 1488 ~ 1513
- 제임스 5세 (1512 ~ 1542): 재위 1513 ~ 1542
- 메리 여왕 (1542 ~ 1587): 재위 1542 ~ 1567
- 제임스 6세 (1566 ~ 1625): 재위 1567 ~ 1603
4.2. 잉글랜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
- 제임스 6세/1세 (1566 ~ 1625): 재위 1603 ~ 1625
- 찰스 1세 (1600 ~ 1649): 재위 1625 ~ 1649
- 찰스 2세 (1630 ~ 1685): 재위 1660 ~ 1685[14]
- 제임스 7세/2세 (1633 ~ 1701): 재위 1685 ~ 1688
- 메리 2세 (1662 ~ 1694): 재위 1688 ~ 1694
- 윌리엄 3세 (1650 ~ 1702): 재위 1688 ~ 1702
- 앤 (1665 ~ 1714): 재위 1702 ~ 1707
4.3. 그레이트브리튼과 아일랜드의 왕
- 앤 (1665 ~ 1714): 재위 1707 ~ 1714
4.4. 계보
스코틀랜드 |
로버트 2세 (1316 ~ 1390) |
로버트 3세 (1337/1340 ~ 1406) |
제임스 1세 (1394 ~ 1437) |
제임스 2세 (1430 ~ 1460) |
제임스 3세 (1451/1452 ~ 1488) |
제임스 4세 (1473 ~ 1513) |
제임스 5세 (1512 ~ 1542) |
메리 여왕 (1542 ~ 1587) |
제임스 6세 (1566 ~ 1625) |
잉글랜드+스코틀랜드 | ||||
제임스 1세 (1566 ~ 1625) |
||||
엘리자베스 (1596 ~ 1662) |
찰스 1세 (1600 ~ 1649) |
|||
팔츠의 조피 (1630 ~ 1714) |
찰스 2세 (1630 ~ 1685) |
메리 헨리에타 (1631 ~ 1660) |
제임스 2세 (1633 ~ 1701) |
|
조지 1세 (1660 ~ 1727) ( 하노버 왕조) |
윌리엄 3세 (1650 ~ 1702) |
메리 2세 (1662 ~ 1694) |
앤 (1665 ~ 1714) |
[1]
주로 영지를 상속받지 못하는 차남 이하의 아들들이었다.
[2]
Lord High Steward. 높은 영예를 갖는 명예직이다.
[3]
월터 스튜어트가 로버트 1세의 딸 마조리 브루스와 결혼해서 낳은 아들이었다.
[4]
셰익스피어의 희곡 《
맥베스》에서 그의
친구이자 살해당했던 뱅코우가 바로 그
시조였다. 다만 그의 후손이 왕이 된다는 예언을 받는 부분은 셰익스피어 시대
잉글랜드 국왕이었던
제임스 1세를 시작으로 하는 스튜어트 왕가를 띄워주기 위한 작가의 가필로 보인다.
[5]
다만 단리 경의 증조모인 엘리자베스 해밀턴이 제임스 2세의 손녀였기 때문에 부계로도 어느 정도 가까운 혈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6]
이후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로 즉위한다.
[7]
메리와 결혼하기 20일 전에
이혼했다고 한다.
[8]
특히
찰스 2세의 경우 거의 사실이었다.
[9]
참고로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제임스 1세가 아니라 이 제임스 1세(= 제임스 6세)보다 훨씬 오래 전에 즉위했었던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1세를 말하는거니 혼동하지않도록 주의하자.
[10]
제임스 6·1세 스스로도 직접
베네치아 도제만도 못하다고 할 정도로 권력이 보잘것 없었다.
[11]
이렇게 근대적 관점에서 보자면 '나라 안에 나라'가 속한 경우는 사실 나머지 유럽, 아니 전 세계적으로도 흔했지만, 스코틀랜드와 달리 이웃나라 잉글랜드를 비롯한 외부 유럽에서는 소위 근세라 부르는 15~17세기에 걸쳐 대규모 전쟁을 통해 중앙에서 다스리는 왕실의
권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사례들이 늘어났고, 결국 근대적 의미로 국가라는 통치 조직 형성 과정을 주도했다.
[12]
다만 스튜어트 왕실을 민주주의의 적으로 설정하면 근대 영국사가 굉장히 깔끔한 줄거리를 가지기에, 아직도 교양서적이나 대중매체에선 이렇게 적는 걍우가 많다.
[13]
이는 흔한 현상인데 이름을 아버지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는 사례가 동아시아를 제외하면 흔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랑스는
루이 18세의 사례에서 보듯
루이라는 왕이 (실제로 재위하지는 못한
루이 17세 빼고) 17명이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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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스코틀랜드 왕위를 뺏기기 전까지는 1649년부터 1651년까지 추가로 재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