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0 18:14:24

마거릿 튜더

<colbgcolor=#FFD8BB><colcolor=#000> 스코틀랜드 왕국 제임스 4세의 왕비
마거릿 튜더
Margaret Tudor
파일:마거릿 튜더.jpg
이름 마거릿 튜더
(Margaret Tudor)
출생 1489년 11월 28일
잉글랜드 왕국 미들섹스 런던 웨스트민스터 궁전
사망 1541년 10월 18일 (향년 51세)
스코틀랜드 왕국 퍼스셔 메스번 성
배우자 제임스 4세 (1503년 결혼 / 1513년 사망)
제6대 앵거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라스
(1514년 결혼 / 1527년 이혼)
제1대 메스번 영주 헨리 스튜어트 (1528년 결혼)
자녀 제임스, 아서, 제임스 5세, 알렉산더, 마거릿
아버지 헨리 7세
어머니 요크의 엘리자베스
형제 아서, 헨리 8세, 엘리자베스, 메리, 에드먼드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스코틀랜드의 왕비2.3. 섭정과 재혼2.4. 탈출2.5. 이혼과 삼혼2.6. 사망
3. 가족관계
3.1. 조상3.2.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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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헨리 7세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2남 2녀 중 장녀로 아서 튜더의 여동생이며 헨리 8세의 누나, 메리 튜더[1]의 언니다. 스코틀랜드의 국왕 제임스 4세의 아내이자 제임스 5세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제임스 4세 사후 앵거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라스와 재혼하였는데, 둘 사이에서 낳은 딸이 제임스 6세의 친할머니 마거릿 더글라스다.[2]

2. 생애

2.1.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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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튜더, 아서 튜더와 마거릿 튜더
1489년 11월 28일 런던 웨스트민스터 궁전에서 헨리 7세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장녀로 태어났다. 이름은 할머니 마거릿 보퍼트로부터 따와 '마거릿'으로 지어졌다. 위로는 오빠 아서가 있었고, 밑으로는 훗날 헨리 8세가 되는 헨리 튜더와, 프랑스 왕국의 왕비가 되는 메리 튜더를 포함한 3명의 동생들이 태어났다.

2.2. 스코틀랜드의 왕비

1497년, 스코틀랜드 왕국 잉글랜드 왕국과 휴전을 고려하게 되었다. 20대 중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혼이었던 스코틀랜드의 국왕 제임스 4세는 잉글랜드의 공주와 결혼하고자 했다. 잉글랜드 왕실에서는 왕위 계승권이 스코틀랜드로 넘어갈 수 있다며 반대했지만, 결국 1502년 평화 조약이 체결되면서 제임스 4세와 마거릿의 결혼 또한 확정되었다. 제임스 4세는 마거릿보다 16살이나 연상이었다.
파일:Margaret and James.jpg
제임스 4세와 마거릿
두 사람은 1503년 1월 25일 잉글랜드 왕국 리치몬드 궁전에서 대리인을 통한 결혼식을 올렸고, 마거릿은 스코틀랜드 왕국의 왕비가 되었다. 1503년 2월에 어머니 요크의 엘리자베스가 사망한 후 마거릿은 스코틀랜드로 떠났다. 마거릿과 제임스 4세는 4남 2녀를 낳았지만 성인으로 장성한 아이는 단 한명, 제임스 뿐이었다.

그러나 1509년, 마거릿의 남동생 헨리 8세가 즉위하면서 스코틀랜드 왕국 잉글랜드 왕국의 관계는 다시 악화됐다. 잉글랜드 왕국은 스코틀랜드 왕국과 동맹인 프랑스 왕국을 침략했고, 스코틀랜드는 프랑스를 돕기로 결정했다. 제임스 4세는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잉글랜드를 침공했지만 결국 플로든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2.3. 섭정과 재혼

제임스 4세가 사망했을 당시 유일한 후계자였던 제임스 5세는 고작 1살 5개월이었기 때문에 스코틀랜드 의회는 마거릿을 섭정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마거릿은 적국인 잉글랜드 왕국의 공주였던데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정치적 지지를 얻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귀족들 사이에서 친프랑스를 지지하는 분위기가 형성됐고, 섭정의 자리도 제임스 5세의 당숙이자 왕위 계승 서열 3위인 제2대 올버니 공작 존 스튜어트[3]가 임명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생겼다.

이에 마거릿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의 귀족가문인 더글라스 가문과 협력하려 했는데, 이 과정에서 제6대 앵거스 백작인 아치볼드 더글라스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결국 두 사람은 1514년 8월 6일 비밀 결혼식을 올렸고, 이는 친프랑스파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재혼을 하면 더이상 섭정직을 유지할 수 없다는 제임스 4세의 유언에 따라 마거릿은 섭정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파일:Angus and Margaret.jpg
아치볼드 더글라스와 마거릿

2.4. 탈출

새로운 섭정이 된 올버니 공작 존 스튜어트는 마거릿으로부터 제임스 5세와 알렉산더 왕자의 양육권을 빼앗으려 했다. 마거릿은 반발했지만 이내 항복했고, 아이들을 존 스튜어트에게 맏긴 채 에든버러에 은거했다. 남동생 헨리 8세는 마거릿에게 아이들과 함께 잉글랜드 왕국으로 도망치라고 조언했지만 마거릿은 제임스 5세가 스코틀랜드 왕위를 빼앗길까봐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아들들이 이제 존 스튜어트의 보살핌을 받게 되자 마거릿은 잉글랜드로 달아날 계획을 세웠고, 출산한다는 핑계로 스코틀랜드를 탈출했다. 당시 아치볼드 더글라스의 아이를 임신중이었던 마거릿은 잉글랜드에 도착한 후 딸을 낳았다. 이 아이가 바로 훗날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4]의 어머니가 되는 마거릿 더글라스다.

2.5. 이혼과 삼혼

1517년, 존 스튜어트와 헨리 8세 토머스 울지와의 화해 조약이 체결되고 마거릿은 1년만에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

한편 아치볼드 더글라스는 잉글랜드 왕국에 머무르는 동안 마거릿의 돈을 쓰면서 예전 연인인 레이디 제인 스튜어트와 동거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마거릿은 이혼을 결심하게 되었지만, 당시 이혼에 부정적이었던 헨리 8세는 이 문제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미래를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또 아치볼드는 스코틀랜드와 연결된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혼은 더욱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문제였다. 분노한 마거릿은 스코틀랜드의 존 스튜어트와 화해할 방법을 모색했다.

당시 프랑스 왕국에 머물고 있던 존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 왕국으로 돌아왔고, 마거릿은 그를 기쁘게 맞이했다. 존 스튜어트는 마거릿이 이혼할 수 있도록 로마에 압력을 행사했다. 이에 아치볼드는 다른 나라로 망명했고, 존 스튜어트와 마거릿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며 제임스 5세를 살해하고 국왕이 될 야망을 품고 있다는 헛소문을 퍼뜨렸다. 하지만 소문과는 다르게 존 스튜어트와 마거릿은 정치적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고 한다.

1524년, 마거릿은 존 스튜어트가 스코틀랜드를 비운 틈을 타 쿠데타를 일으켜 섭정의 자리를 되찾았다.[5] 그러나 의회는 섭정 기간이 종료되었음과 함께 제임스 5세가 친정을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한편 남편 아치볼드가 스코틀랜드에 돌아올 수 있게 되자, 마거릿은 여러 귀족 가문과 연합했고 그 중 제1대 메스번 영주인 헨리 스튜어트와도 가까워지게 된다. 마거릿은 점점 더 이혼에 집착하게 되었고, 결국 1527년 3월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이혼을 허락함에 따라 비로소 두 번째 남편인 아치볼드와 길고 긴 싸움을 끝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528년 3월에 헨리 스튜어트와 세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마거릿과 헨리는 아들 제임스 5세의 정치적 조언자가 되어주었고 제임스 5세 또한 새아버지인 헨리를 잘 따랐다고 한다.

그러나 세 번째 남편인 헨리 스튜어트마저 마거릿의 재산을 탕진하면서 다른 여자들과 바람을 피우고 다녔다. 마거릿은 다시 한번 이혼하고 싶었지만 헨리와 가까웠던 아들 제임스 5세가 반대하여 이혼하지 못했다. 스코틀랜드에서의 삶에 답답함을 느낀 마거릿은 도망치려고도 하였으나 다시 에든버러로 돌아와야 했다.

2.6. 사망

말년에 뇌졸중으로 인한 여러 마비증상을 겪었던 마거릿은 1541년 10월 18일에 51세의 나이로 메스번 성에서 사망했다. 제임스 5세가 어머니의 유언을 들으러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장례식은 4년 전 세상을 떠난 며느리 마들렌 드 발루아와 비슷한 예우로 치러졌으며, 유해는 퍼스의 차터하우스에 안장되었다.

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마거릿 튜더
(Margaret Tudor)
<colbgcolor=#fff3e4,#331c00> 헨리 7세
(Henry VII)
<colbgcolor=#ffffe4,#323300> 제1대 리치몬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
(Edmund Tudor, 1st Earl of Richmond)
오웬 튜더
(Owen Tudor)
발루아의 카트린[6]
(Catherine of Valois)
마거릿 보퍼트
(Margaret Beaufort)
제1대 서머셋 공작 존 보퍼트
(John Beaufort, 1st Duke of Somerset)
블렛소의 마거릿 뷰챔프
(Margaret Beauchamp of Bletso)
요크의 엘리자베스
(Elizabeth of York)
에드워드 4세
(Edward IV)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 플랜태저넷
(Richard Plantagenet, 3rd Duke of York)
세실리 네빌
(Cecily Neville)
엘리자베스 우드빌
(Elizabeth Woodville)
제1대 리버스 백작 리처드 우드빌
(Richard Woodville, 1st Earl Rivers)
룩셈부르크의 자퀘타
(Jacquetta of Luxembourg)

3.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제임스 4세
(James IV)
1남 로스시 공작 제임스 스튜어트
(James Stewart, Duke of Rothesay)
1507년 2월 21일 1508년 2월 27일
2남 로스시 공작 아서 스튜어트
(Arthur Stewart, Duke of Rothesay)
1509년 10월 20일 1510년 7월 14일
3남 제임스 5세
(James V)
1512년 4월 10일 1542년 12월 14일 마들렌 드 발루아[7]
마리 드 기즈
슬하 1남 1녀[8]
4남 로스 공작 알렉산더 스튜어트
(Alexander Stewart, Duke of Ross)
1514년 4월 30일 1515년 12월 18일
제6대 앵거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라스
(Archibald Douglas, 6th Earl of Angus)
1녀 레녹스 백작부인 마거릿 더글라스
(Margaret Douglas, Countess of Lennox)
1515년 10월 8일 1578년 3월 7일 제4대 레녹스 백작 매튜 스튜어트
슬하 2남[9]

[1] 메리 1세와는 동명이인 [2] 마거릿 더글라스의 아들이 메리 여왕의 두번째 남편이자 제임스 6세의 생부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다. [3] 제임스 2세의 손자이며, 프랑스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4] 스코틀랜드 왕국 메리 여왕의 남편이며 제임스 1세의 아버지다. [5] 그와는 별개로 존 스튜어트와는 우호적으로 지냈다고 한다. [6] 샤를 6세의 4녀다. [7] 프랑수아 1세의 장녀이자 루이 12세의 외손녀다. [8] 메리 여왕 [9]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