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21:49:40

칼레 해전

칼레 해전
영어: Naval Battle of Calais
스페인어: Batalla de Calais
파일:attachment/CalaisBattleArmada.png
아르마다의 패배. 루터버그 作
날짜
1588년 8월 8일
장소
도버 해협, 칼레 앞바다
결과
스페인의 결정적인 패배, 무적함대의 허망한 패배.
교전국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왕국
파일:네덜란드 공화국 국기.svg 네덜란드 공화국
파일:스페인 제국 국기.svg 스페인 제국& 이베리아 연합
지휘관 노팅엄 백작 찰스 하워드(총사령관)
프랜시스 드레이크
존 호킨스
유스티누스 반 나사우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 후안 알론소 데 구스만(총사령관)
후안 마르티네스 데 레칼데
미구엘 데 오켄도
디에고 메드라노
페드로 데 발데스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육군 지휘관, 참전 안 함)
병력 군함 34척
무장상선 163척
(배수량 30~200톤)
평저선 30척
포르투갈과 카스티야의 갈레온
무장상선 104척
나폴리 갈레아스 4척
피해규모 전사: 50~100명
부상: 400명
화공선 8척 전소
질병: 6,000~8,000명
전사: 600명 이상
부상: 800명
포로 397명
군함 5척 침몰 또는 나포
총합
배 33척 손실
10척 자침
20,000명 사망
1. 개요2. 전투 원인3. 스페인의 허술한 작전4. 전투 경과5. 격파된 무적 함대. 그리고…6. 칼레 해전 그 후7. 창작물8. 둘러보기

1. 개요

하느님께서 스페인을 멸망시키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서인도에서 자행한 파괴 행위 때문이며, 스페인을 파괴하려는 하느님의 생각은 명백히 정당하고 그것은 40년이 지나면 분명해질 것이다.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1588년에 벌어진 스페인 무적함대 잉글랜드 왕국 함대의 해전. 영국-스페인 전쟁(1585~1604)의 주요 전투다. 영국의 해적이자 제독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활약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전투자체에서 입은 손실은 별로 크지 않았으나 스페인 함대는 북해에서 만난 두 번의 강한 태풍으로 인해, 퇴각하면서 81여 척의 배가 침몰되는 큰 손실을 보았고, 결과적으로 레판토 해전 이후 승승 장구하던 스페인 함대의 영국 침공은 좌절된다.

2. 전투 원인

해양 패권을 장악하고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부를 축적하던 스페인과 이를 뺏어먹으려던 잉글랜드는 1585년 충돌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잉글랜드인 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 사략선 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하며 스페인 선박을 공격해 약탈하였으며, 이 30만 파운드가량의 막대한 재화를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게 바쳤다.[1] 이에 엘리자베스는 드레이크에게 작위와 훈장을 수여하였다. 스페인은 드레이크의 처벌을 요구했으나 잉글랜드는 이를 무시하였으며, 해군까지 가세해 해적질에 열을 올렸다.
  • 헨리 8세부터 시작된 종교적 갈등. 특히 잉글랜드가 가톨릭교도들을 박해하는 것을 독실한 가톨릭 국가였던 스페인으로서는 방관하기 힘들었다. 스페인은 아일랜드의 가톨릭교도들의 반란(Second Desmond Rebellion)을 지원하기도 했었다.
  • 포르투갈 왕위를 둘러싼 전쟁(War of the Portuguese Succession)에서 스페인의 펠리페 2세의 경쟁자(António, Prior of Crato)를 잉글랜드가 지원하였다. 잉글랜드는 또한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독립 세력도 지원하였다.
이와 같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결국 스페인은 잉글랜드 침공을 결심하게 된다.

3. 스페인의 허술한 작전

당시 스페인군의 전략은 '적의 주력을 피해 네덜란드 쪽에 집결해둔 스페인 육군 전력을 단숨에 런던으로 폭탄 드랍하여 잉글랜드를 공격하자'라는 상당히 위협적인 것이었다. 일단 당시의 잉글랜드는 백년 전쟁의 패전 이후로 대륙의 비옥한 알짜배기 영토를 모조리 잃고 왕권이 약하고 정정도 불안한 3류 변방 섬나라로 전락한 상태라 해군이고 육군이고 전력 자체가 시원찮았다. 반면에 스페인 육군이라면 레콩키스타를 통해 수백 년간 실전경험을 쌓은 최정예로 당시 유럽에서 야전 최강으로 명성이 높았다. 당시 플랑드르(네덜란드) 방면 스페인 육군 사령관은 16세기 유럽 최고의 명장 중 한 명인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였다. 게다가 해군 사령관은, 최소한 스페인 사람들의 시각에서는 레판토 해전의 영웅인 산타 크루즈 후작 알바로 데 바산이었다. 당시 찰스 하워드가 이끄는 잉글랜드 해군의 방해를 물리치고, 칼레에서 지상군을 탑승시킨 뒤 런던 앞마당에 상륙할 계획이었다. 어차피 스페인 무적함대의 전략 목표는 한 줌도 안되는 잉글랜드 해군의 괴멸이 아니라 잉글랜드에 지상군을 상륙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 자체가 자세히 보면 너무 허술하고 위험했다.
  • 첫째, 펠리페 2세가 승리를 과신했는지 이 작전 계획서를 출판해서 팔았다.(...) 덕분에 잉글랜드는 스페인군의 작전과 물자, 장비, 병력 현황을 미리 알 수 있었다. 심리전의 일환이라는 주장도 있긴 하지만, 엄연한 최고 기밀인 작전 계획서를 출판해서 팔았다는 것을 최악의 뻘짓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 둘째로, 당시 영국으로 건너갈 스페인 원정육군이 주둔한 플랑드르 일대(오늘날 벨기에 저지대)는 수심이 얕아서 흘수가 깊은 대형 선박이 안심하고 정박할 만한 시설이 없었다. 따라서 스페인 해군은 멀리 떨어진 칼레 항구 부근에 정박한 후, 육군의 합류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네덜란드 독립군의 해상 유격대, 일명 '바다의 거지단(Watergeuzen)'이 30척의 소형 선박으로 소함대를 구성해 이들을 봉쇄하고 있었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같은 소형 선박으로 더 강한 소함대를 구성해야 하는데, 이런 선박은 원양항해에 적합하지 않았고, 스페인으로부터 올라온 무적함대에는 이런 선박이 부족했다. 따라서 파르마 공작이 네덜란드에서 흘수가 얕은 소형 수송선박을 준비하도록 되었지만, 안그래도 네덜란드 독립군이 활개치고 다니는 지역에서 다수의 선박을 징발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그리고 그나마 파르마가 몇 척 모은 평저선은 상태가 영 좋지 않아서, 시험삼아 병사와 물자를 싣자 갑판이 수면 아래로 잠길 정도였다고 한다. 설령 제대로 된 수송선을 충분히 모을 수 있었다고 해도, 칼레가 엄연히 중립국인 프랑스의 영역인 이상, 스페인 육군은 해군의 지원없이 수송선을 타고 바다로 내려가 해안을 따라 해군이 정박한 지역까지 항해해야 하는데, 물론 바다의 거지단이 이를 가만히 내버려 둘 리 없었다.

    • 육군: 먼저 댁들이 우릴 엄호해줘야, 우리가 평저선을 타고 거기로 가지?
      해군: 먼저 평저선을 이리로 보내줘야, 우리가 그걸 타고 댁들을 엄호해주지?
  • 셋째로, 작전은 지상군과 해군이 정확한 타이밍에 작전지역에 도착해야 효과를 볼 수 있는데 지상군은 여러 사보추어 게릴라들의 방해 때문에 해군의 타이밍에 맞출 수가 없었고, 해군은 기동을 포기하고 지상군을 기다려야만 했다.
  • 넷째로, 이 작전이 성공해서 지상군이 잉글랜드 상륙에 성공한다고 해도, 잉글랜드 정복이 가능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물론 위에 언급했듯이 스페인 육군에 비해 잉글랜드의 지상군 병력이 형편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상륙할 예정인 스페인 육군의 총 병력은 고작 16,000여 명. 물론, 작전 찬성파들은 스페인 육군이 일단 상륙만 하면, 잉글랜드 내 가톨릭 교도들이 일제히 봉기해서 이들을 지원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당시는 엘리자베스의 치세가 이미 30년에 이르렀던지라 영국 내 가톨릭 교도들은 씨가 마르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톨릭 교도들에게 군사적 의미를 크게 부여하기는 어려웠다. 즉 상륙 병력만으로 잉글랜드라는 한 나라를 정복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2][3]
  • 설상가상으로, 함대 총지휘관 산타크루즈 후작이 1588년 초에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산타크루즈 후작은 레판토 해전에 참전했다는 이유로 전설적인 명성과 권위를 누리고 있었다. 반면에 후임으로 선정된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은 현명한 군인이자 훌륭한 인격자이기는 했지만, 해전에는 문외한이었다(심지어 배멀미까지 했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인건 시도니아 공작은 본인의 약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부하 제독들의 의견을 참고하여 대체로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는 했다. 그러나 정작 부하들은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의 명령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그를 이용하여 파벌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리더는 현명했지만 반대로 그 밑은 완전히 오합지졸인 상태로 출발해버린 것.
  • 마지막으로, 병참이 시원치 않았다. 비록 스페인이 대항해 시대에 손꼽히는 해양강국이기는 했지만, 대규모 상비 함대를 갖출 정도의 재력을 보유하지는 못했고 이미 재정적자가 위험한 상태였다.[4] 결국 원정 함대는 자국의 무역선은 물론, 심지어 타국의 선박까지 징발하여 채워넣어야 했다. 소모품인 보급물자의 경우는 더 심각한 상태여서, 심지어는 공식적으로는 환영식을 치르며 출항한 후, 다시 항구로 돌아와서 재보급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스페인 영토를 벗어난 이후에는 이마저도 불가능해져서, 결국 칼레에 도달할 무렵에는 포탄과 화약이 떨어져 전투를 못할 지경에 이른다. 시도니아 공작은 출항 전부터 이 위험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지적을 했지만 펠리페 2세는 이마저도 무시했다.
몇 년 전에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잉글랜드 본토에서 싸우기보다는 적의 영역에서 싸우자는 선공파의 주장으로 스페인을 공격했지만, 그때에도 스페인 함대와 싸우지는 않았다. 아마 제대로 된 지휘관이라면 도저히 상대할 엄두를 못낼 정도의 전력차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여기 저기 스페인의 항구들을 털고 다녔는데, 상륙까지 해 해안포 요새를 파괴하기도 했으며 금화를 실은 갈레온도 나포했다. 그의 활약 때문에 스페인은 1년 이상 말려서 방부처리를 해야하는 식수통 제작용 목재가 통째로 망실되었고, 이는 이후 무적함대 수병들의 폭풍설사 및 수인성 전염병 감염의 원인이 되어 간접적으로 무적함대 패배의 원인이 된다. 물론 칼레 해전은 무적함대 원정 초기에 발생했으며, 이때까지는 아직 물이나 식량 부족에 크게 시달리지 않았기 때문에 패배의 '원인'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다만, 패전 후 귀환 과정에서 발생한 손실[5]에는 큰 영향을 미쳤다. 결국 잉글랜드가 전투로 직접 입힌 피해보다 전투 후 해상재난으로 인해 스페인이 입은 피해가 막대하기 때문에 무승부가 아닌 무적함대의 패배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패배의 간접적 원인이라는 것이다.

4. 전투 경과

1588년 8월 8일, 어쨌든 우에상 섬을 돌파한 무적함대와 실리 섬에서 발진한 잉글랜드 초계함대의 조우를 시작으로 전쟁이 개시되었다. 곧이어 양측 주력 함대의 전투이 벌어지자 격렬한 함포전을 벌였지만, 서로 피해를 주는 데는 실패하고 이때 입은 유일한 무적함대의 손실은 갤리온 1척과 카락 1척, 그것도 신호 오인과 돌풍으로 인한 충돌에 의한 것뿐이었다.

당시 잉글랜드 해군의 함선 대포들이 긴 사정거리를 갖고 있어서 스페인 함대를 원거리에서 농락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설은 외국 다큐멘터리 필름들에서도 확인되는 것으로, 인양된 스페인 함선의 포들은 포 규격이 제각각이고 근접전투용 소형 포들도 다수 실려있어서 원거리 전투용 함포의 숫자에서 밀렸다는 것. 다만, 잉글랜드의 '신형포'가 스페인보다 사정거리가 길어서 전투에서 이겼다는 이야기는 이원복 만화 먼나라 이웃나라》가 퍼뜨린 대표적 오해이다. 사실, 양측이 사용한 대포는 모두 독일이나 이탈리아산이었다. 대구경의 대포를 생산해도 사용하기 힘들었고, 그에 따라 작은 구경 대포를 쓰다 보니 그만큼 탄환의 크기가 줄어들어 같은 양의 화약을 넣었을 시에 '상대적으로' 사정거리가 길긴 하다. 또 아무래도 상선 출신이 많았던 스페인 해군보단 해적선(…) 출신이 많았던 잉글랜드 해군이 대포의 장전속도만큼은 더 빨랐다고 한다. 잉글랜드 해군이 원거리에서 알짱거리며 포격을 실시한 것은 잉글랜드 해군의 대포가 사정거리가 긴 하이테크 비밀무기라서 그런 게 아니고 당시 시도니아 공작이 외곽에 강력한 갤리온 포격함을 배치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스페인은 잉글랜드 본토를 참교육할 지상군을 상륙시키는게 목적이었지, 만만찮은 잉글랜드 해군과 일대 결전을 벌이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메디나 시도니아는 포격함을 외곽에 배치하여 수송 선단을 보호하는 전형적인 진형으로 전진했고, 따라서 이를 정면으로 상대하기에는 전력이 부족한 해적놈들은 천상 원래 하던 대로(...) 가볍고 빠른 배에 사거리가 긴 대포를 싣고 멀리서 깔짝대어 혈압을 올리면서 진형이 무너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양측 모두 포탄과 화약이 부족하긴 했지만, 그나마 자국해안에서 싸우는 영국군은 본토에서 징발이라도 가능한 반면, 스페인 군은 그것도 불가능했다.

물론 메디나 시도니아도 무조건 결전을 피한 것은 아니었다. 메디나 시도니아가 볼 때, 병력이 우세한 스페인 해군이 항해술이 뛰어난 잉글랜드 해군을 이기기 위해선, 잉글랜드 함선들에 중무장한 검병들을 도선시켜 백병전으로 압도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따라서 그는 잉글랜드 해군을 최대한 최대한 유인하기 위해 노력했고, 잉글랜드 해군이 대담한 돌격을 해왔다면 맹렬한 전투가 벌어졌겠지만, 시종일관 잉글랜드 해군은 추격해서 따라잡기에는 성가신 거리에서 기동했다.

이 4일간의 전투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드레이크는 야간 기동에서 선두를 맡아 자신의 함대를 이끌고 있었다. 선두에서 미등으로 휘하 함대를 유도하며 전진하던 중 왠지 금화가 많이 실려있을 것 같은 화려한 배를 발견, 이를 나포하고 싶은 욕심에 미등을 끄고 기함 혼자서 그 배를 추격했는데, 상대는 의외로 크게 저항하지 않아 결국 나포에 성공했다. 드레이크의 귀신같은 촉이 틀리지 않아 많은 황을 노획하긴 했으나, 결국 함대는 지휘관의 실종으로 혼란에 빠졌고 드레이크 자신도 자기 함대를 잃어버린 꼴이 되었다. 이 기간 동안 해당 전력은 전열에서 제외되게 되니 하워드 제독은 꽤나 속이 뒤집어졌을 것이다. 사실 이 사건은 스페인 쪽에도 뒷 이야기가 있는데, 포획된 스페인 함선의 선장은 페드로 발데스라는 인물로, 단순한 함장이 아닌 무적함대의 분함대 사령관 중 한사람이었다. 이전 해전에서 그의 배가 손상을 입어 속도가 떨어지자, 다른 분함대 사령관이 시도니아에게 "일정이 촉박해, 전체 함대가 저걸 기다려 줄 여유가 없거든요? 일단 혼자 내버려두고 알아서 수리해 쫒아오면 되죠."라고 건의해 받아들여졌던 것. 후대 역사가는 이를 분함대 사령관들 사이의 알력다툼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새옹지마라고, 결국 시도니아를 따라간 분함대 사령관 세 명이 모두 원정에서 사망한 반면[6], 뒤쳐져서 나포된 발데스만 생존에 성공했다.

칼레 화공 이후 일이지만, 하워드 제독은 자꾸 적선을 격침하라는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굳이 나포를 하려고 적선에 올라타 불리한 백병전을 감행하거나 공격명령을 무시하고 좌초한 배들에 실려있던 물품부터 약탈하는 것에 열중하는 드레이크를 결국 보직해임했다. 그러나 드레이크는 까짓 거 짤린 김에 먼저 왕궁으로 가서 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게 지금까지 약탈해온 막대한 황금을 바치며 언플을 해서 오히려 여왕의 환심과 시민들의 인기를 얻게 되었다. 사실 당시 잉글랜드 왕실은 헨리 8세가 너무나 돈을 많이 쓴 낭비와 그에 따른 재정난이 있었기에 해군에 대한 비용이나 징집 인원에 대한 보수는 고사하고 징발한 상선에 보상해줄 만한 재정도 부족했다. 그런데 드레이크가 앞서 약탈해둔 엄청난 양의 황금을 여왕에게 바친 덕에 여왕은 근심을 날려버리게 되었다. 이 때문에 신임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결국은 돈인가?

일단 무적함대는 4일간 네 번의 싸움을 모두 물리치고 사소한 흠집만 입은 상태로 도버 해협에 이르렀다. 지상군의 준비가 늦어지는 바람에[7] 스페인 함대는 칼레 앞바다에 정박했다. 이를 쫒아온 영국 함대도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정박한 채로 대치했다.
보급이 떨어져가고 육군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사태에 스페인의 시도니아 제독도 고심이 많았지만, 영국의 하워드 제독 역시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교환비에서 우세했지만, 엄연히 주 목표는 스페인 함대의 북상을 저지하는 것인데 이에는 명백히 실패하고 있었다. 문제는 포격전으로는 이를 달성할 수 없었는데다가 포탄과 화약도 떨어져간 반면, 백병전을 벌이자니 상대가 더 유리했다.

이제 남은 방법은 화공이었는데 이 당시의 화공선은 단순히 불을 붙인 배를 상대 배에 충돌시키는 것이 아니라, 배에 화약을 비롯한 인화성 물질을 가득 실어서 보내는 것이었기 때문에 근처에서 폭발만 해도 치명적일 수 있었다.
스페인군 역시 이를 매우 우려했다. 따라서 일단 전체 함대를 외곽의 소형 선박들은 화공선이 접할 경우, 갈고리를 걸어 함대 바깥쪽으로 예인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만일 이것이 실패하면 전 함대는 닻줄을 끊고 먼바다쪽으로 회피기동을 한 후 재집결는 계획을 세웠다.
본래 이 시기는 남풍이 부는 시기라, 남쪽이 육지로 보호되고 있는 스페인 함대에게 화공을 펼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갑자기 바람이 북풍으로 바뀌자,[8] 하워드 제독은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판단, 상선값을 후하게 물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여러척의 대형 상선을 동원해 화공을 펼친다.

5. 격파된 무적 함대. 그리고…

잉글랜드군이 화공을 펼치자 스페인 함대는 계획대로 소형함선으로 이를 예인하려는 시도를 펼쳤다. 몇 척은 이에 성공했으나, 예인 도중 일부 화공선이 폭발해버렸으며, 이로 인해 예인선들이 겁을 먹고 주저하는 사이 나머지 화공선들이 스페인 해군의 외부 저지선을 통과했다. 예인작전이 실패하자 무적함대는 급히 닻을 끊고 진형을 풀어서 넓은 북해로 분산 회피한다. 시도니아 제독의 이 대응으로 함대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지 않고 전장에서의 회피에 성공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진형이 무너지고 화약이 고갈된 스페인 함선들은 이제 대담하게 근접해서 포격을 펼치는 잉글랜드 함선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기 시작했다. 게다가 몇몇 함선들은, 화공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시도니아 제독에 대한 불신 때문인지 몰라도, 시도니아의 명령을 무시하고 도주하다 좌초되거나 나포되기도 했다.[9]

어쨌든 시도니아 제독은 다시 함대를 모아 진형을 재건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때 바람이 제정신을 차려 남풍으로 바뀌었고 바로 곧이어 태풍이 덮쳤다. 닻이 없는 함선들은 속절없이 난파될 수밖에 없었다. 태풍은 잉글랜드 함선의 공격 역시 중단시켰고 스페인은 태풍속으로, 잉글랜드는 태풍 밖으로 나오는 상황을 맞게 된다. 스페인군은 태풍이라는 전투보다 더 큰 적을 만나버렸다. 다만 잉글랜드 함선들도 이 무렵에는 포탄과 화약이 떨어져가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공격을 지속했더라도 결정적인 피해를 주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사실 더 큰 문제는 더 이상 잉글랜드와 근접한 대륙의 네덜란드 지역의 항구는 안전하지가 않고 하룻밤도 편히 정박할 사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무적함대는 네덜란드의 스페인 육군으로부터 무기, 화약, 군수품을 지원받기로 되어 있었으나 이것이 기약 없는 일이 된 상태에서 맨몸으로 대양으로부터의 공격에 노출된 상태라는 것이다. 중립국이었던 프랑스[10]는 물과 식량의 거래는 허용했으나 포탄이나 화약은 거래대상이 아니었고, 네덜란드에 주둔하던 스페인 원정군은 네덜란드 해군에 의해 봉쇄된 상태였다.

그 후 잉글랜드 해군은 화약 고갈[11] 때문에 회항하지만, 이미 계절풍이 바뀌고 전력이 약화된 무적함대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연해를 빙 돌아서 본국으로 귀환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파르마의 병력과 합류하여 작전을 계속해야 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앞에서 썼듯이 바람이 강한 남풍으로 바뀐데다 영불해협에선 잉글랜드 해적들이 날뛰고 있으니 차라리 북해를 거쳐 항해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한 것.

하지만 이건 북해를 잘 몰랐던 무적함대의 심대한 판단착오였다. 무적함대는 북해에 진입하자마자, 지중해나 대서양 연해와는 상대도 안 되는, 차갑고 거친 북해 바다 특유의 본좌급 태풍을 두 번이나 만나서 완전히 박살났다. 실제로 영불해협에서 인양된 무적함대 선박은 대포가 단단히 묶여진 상태였다. 전투 중에 침몰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스페인 해군은 이 전쟁으로 81척의 함선을 잃었는데 전투 중에 침몰한 배는 단 3척에 불과했다.

또한 멕시코 만류 역시 스페인의 귀환과정을 어렵게 만들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귀환 루트가 멕시코 만 부근에서 시작되어 북유럽 방향으로 강하게 흐르는 이 해류를 거슬러가야 했는데, 당시 스페인 사람들은 멕시코 만류가 멕시코 부근을 흐른다는 것은 알았지만, 아일랜드 앞바다에까 흐르는 지는 몰랐다고 한다. 이로인해 스페인 군은 당초 복귀 계획보다 훨씬 오랜기간 항해해야 했고, 그 결과로 보급부족과 전염병으로 인한 피해가 증폭되었다는 것이다.

파일:external/www.emersonkent.com/armada.jpg
스페인 무적함대의 위엄찬 귀국 루트와 좌초·침몰지. 아일랜드 연해에서 거의 모든 배를 잃고 말았다.

이 도중에 많은 스페인 군함들이 좌초, 난파, 또는 선원들의 탈진으로 아일랜드 해안에 표착하였고, 잉글랜드 사람들은 아일랜드 사람들이 스페인 사람들과 결탁하거나 스페인 사람을 숨겨주지 않나 의심하였기 때문에[12] 스페인 병사의 목을 가져오면 상금을 주었다. 그리하여 아일랜드 농민들은 아침마다 해머를 들고 바다로 나가서 표류한 스페인 사람들의 머리를 부수고는 상금을 타러 가는 일이 일상사였다고 한다. 스페인 사람들은 탈진 상태였기 때문에 대항도 못 하고 죽어갔다고 전해진다.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잉글랜드 사람들의 의심증은 가시지 않았다. 즉 아일랜드 사람들이 스페인 사람들을 도피시키려고 시도하고, 갈 곳 없는 스페인 사람들을 아일랜드 사람들이 그들 사이에서 숨어서 살게 했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들의 아일랜드 봉쇄가 치밀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아일랜드 해안에서 인양된 무적함대 소속의 갤리스 지로나호[13]의 경우에서 보듯 잉글랜드는 제 앞가림도 힘들었던 때였던 고로 원하는 만큼 치밀하게 통제할 수는 없었다. 지로나호는 아일랜드 지도자의 지원으로 킬리베그스항에서 수리를 마치고 1300명이 승선한 채로 출항하였지만 포일석호 인근에서 강풍에 휩쓸렸고 결국 안트림 던루스 해안에 좌초 후 침몰하여 1300명 중 6명만이 살아남는 참사를 겪었다. 결과적으로 아일랜드에서 도움을 받아 귀환한 스페인 함선이나 상금에 눈이 먼 아일랜드 농민, 어부들에게 살해된 스페인 수병은 많았지만 아일랜드에 고립돼서 뿌리박고 살게 된 스페인 사람들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의심증 때문에 이후 잉글랜드 사람들에게는 "아일랜드 사람들은 스페인의 종자가 많아서 게으르고 열등하다"라는 속설이 진실인양 퍼져서 오랜 기간 널리 믿어지게 된다. 이는 이후 영국-아일랜드 관계에서 영국이 아일랜드인을 비하하고 차별하는 원인 중 하나로 이어진다.

설령 침몰하지 않고 스페인 앞바다까지 돌아온 함선일 경우라도 인명피해는 만만치 않았다. 형편없는 보급과 질병으로 많은 선원이 죽거나 탈진상태에 빠진 상황이었다. 기껏 항구에 돌아왔는데 배를 정박시킬만한 기력이 남은 선원이 없어, 항구 앞에서 떠다니다 육지를 바라보며 배위에서 죽은 선원들도 많았다고 한다. 메디나 시도니아 역시 항해중에 중태에 빠졌으며, 돌아와서는 왕을 알현할 기력조차 없어 장기간 요양해야 했으나, 다행히도 목숨을 건졌다.

한편 잉글랜드 해군 역시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 물론 전투 중 손실한 선박은 없었으며, 전투 사상자 역시 스페인군의 절반 수준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행적을 감춘 스페인 함대가 돌아와 기습적인 수송 작전을 실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영국과 네델란드 해안을 감시해야 했다. 특히 네델란드 해안 감시를 명령받은 지휘관들은 총사령관 하워드가 자신들이 '최후의 일격'을 날릴 기회를 뺏으려고 한다며 심하게 반발하기도 했다. 물론 아르마다에는 그러한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지만…결국 장기간 육지에 상륙하지 못하자 결국 잉글랜드 함대에도 전염병이 퍼졌고, 이로 인해 상당한 비전투 손실을 본 것으로 추정된다. 손실이 추정인 이유는, 당시 지휘관들은 사망한 부하들의 사망신고를 누락한 후, 죽은 사람의 임금을 착복하는 것이 일상적이었기 때문이다.

6. 칼레 해전 그 후

무적함대의 괴멸을 계기로 잉글랜드가 대서양의 제해권을 쥐었다고 아는 사람이 많으나, 사실과 차이가 있다. 칼레 해전 이후로도 전쟁은 계속되었고, 스페인에겐 지중해함대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무적함대를 격파한 다음날인 8월 9일, 엘리자베스 1세는 틸버리 항에 주둔한 영국 육군을 친히 찾아가 그들을 격려했다.( 틸버리 연설 참조) 다음 해인 1589년, 잉글랜드는 훗날 '잉글리쉬 아르마다(English Armada)'라 불리는 대규모 원정군을 스페인 갈리시아의 라 코루냐 항에 보내 남은 스페인 함대를 파멸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스페인의 성공적인 방어로 인해 1만 2천에 달하는 병력만 잃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스페인과 잉글랜드의 국력 차이를 생각하면 스페인이 칼레해전에서 무적함대를 잃은 것보다 훨씬 큰 피해다. 이 원정의 실패로 잉글랜드 역시 스페인과 전면적인 해상 교전을 벌일 능력을 상실했다. 아르마다란 이름에 마가 끼었던 모양이다

한편 스페인은 프랑스와도 전쟁을 벌였고, 스페인과 싸우던 잉글랜드는 네덜란드,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1596년).

그리고 스페인 함대는 재건되어 다시 1596년과 1597년 잉글랜드를 공격했지만 폭풍 등으로 인해 패배했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1598년에,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는 1603년에 사망하였으며, 두 나라 모두 전쟁으로 인한 재정 문제는 가중되는데, 그 해결책의 전개는 영 신통치 않았기에 1604년에 평화 협정을 맺는다. (1604년 런던 조약) 잉글랜드는 스페인으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이 사라졌고 종교적 자유를 얻었으며 가톨릭 신앙을 계속 박해할 수 있었다. 스페인도 잉글랜드 해협과 항구들의 개방, 잉글랜드의 사략질 및 네덜란드 독립군에 대한 지원의 전면 중단이라는 결과를 얻는다. 이것이 잉글랜드-스페인 전쟁(1585~1604)의 끝이었다. 이후 잉글랜드와 스페인은 1625년까지 평화를 유지했다(이후는 30년 전쟁 참고할 것).

대체적으로 양 측 다 만족할 만한 협정이었지만, 잉글랜드에서는 스페인과 전쟁 중인 동맹 네덜란드를 버린 굴욕적인 협정이라는 여론이 있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1607년 지브롤터 해전에서 스페인 함대를 격파하였고, 1609년 휴전 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이후 30년 전쟁을 거치며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완전히 독립하게 된다.

스페인은 통념과 달리 이 전쟁으로 크게 몰락한 것은 아니었으며, 한동안은 유럽의 군사 강국으로 남았지만, 30년 전쟁 등을 거치면서 네덜란드를 잃어버리고 국력이 추락하는 등 전성기의 위상을 잃게 된다. 반면 잉글랜드는 전쟁 중 자금 조달을 위해 동인도 회사 주식회사란 것을 개발하여 상업에 대한 힘을 키웠으며, 해양 개척에 힘을 쏟아 1607년에 동인도 회사가 북아메리카 제임스타운을 세우는 등 해양 강국의 기틀을 쌓아가게 된다. 그래서 대영제국의 시발점을 이 시기(1607년)로 꼽는다. 세간의 인식과 달리 1588년에 무적함대를 격파한 직후의 잉글랜드 상황은 극적인 변화가 그다지 많지 않았으며, 이전 만큼이 아니었을 뿐 아직 건재한 스페인의 존재로 인해 여전히 쉽지않은 상황이었다.

오히려 한동안 해양 강국으로서 위세를 떨친 것은 독립한 네덜란드였으며, 영국이 바다의 패권을 공고히 가지게 된 것은 영국-네덜란드 전쟁에서 영국이 최종적으로 승리한 18세기부터였다.

이 전쟁에서의 승리는 엘리자베스1세의 업적이기도 하다. 또한 전반적인 경위를 살펴보았을 때 스페인의 망상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어처구니없이 허술한 전략과 부실에 부실을 거듭한 준비로 스페인이 자발적으로 패배를 향해 돌진한 것과 다를 바 없기도 하다. 결국 잉글랜드의 화공이 성공하여 무적함대를 격파했지만, 남미대륙 등 거대 식민지들에서 막대한 재보를 끌어올 수 있는 스페인은 얼마 안 가 무적함대와 비슷한 규모의 해군력을 재건해 불과 10년도 안 되는 기간 만에 두 차례의 잉글랜드 원정을 시도할 정도로 국력을 회복했고, 전쟁 이후로도 수십 년이 지나고 한 세기가 바뀔 동안 양국의 적지 체급 차이는 여전했다.

한국사의 여요전쟁 때, 고려원정의 대실패로 큰 손해를 입은 요나라가 이를 극복하고 이후 반세기 이상 동아시아 최강국의 위상을 유지했던것과 흡사하다.

조심스레 가정해보자면 스페인이 통상적인 수준으로 전쟁을 준비한 뒤 싸웠더라면 오히려 잉글랜드가 심각한 타격[14]을 입었을 것이다. 이러한 국력 격차와 상대의 침공력, 아국의 빈약함을 모두 무시하고 도발을 날린 건 어찌보면 그리 현명한 행동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7. 창작물

" 엘리자베스 1세가 암살되어 무적함대의 상륙작전이 성공했다면 개신교는 박멸되었을 것"이라는 발상에서 출발하는 것이 키스 로버츠의 대체역사소설 파반(Pavane)이다.

엘리자베스 1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인 골든 에이지( 케이트 블란쳇 주연)에서 이 해전을 짤막하게 묘사한다. 폭풍으로 인해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하는 스페인 함대에 화공을 가해서 그 자리에서 괴멸했다는 묘사로 나온다. 하지만 영화 자체가 전쟁 영화는 아닌 관계로 비중은 크지 않다.

근육조선 2부에서 조선산 비격진천뢰를 받은 스페인이 적극적으로 사용해 영국은 승전국이면서도 전함의 40%를 잃는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카카오페이지 웹툰 렐름 오브 퀸이 칼레 해전 시기를 다루고 있다.

월식도의 마물에서는 칼레 해전에서 패배한 뒤 스페인으로 철수하던 무적함대 군함 중 한 척이 북극에서 풀려난 괴물에게 습격당해 빙산 속에 갇혀버리고, 300년 뒤 한 포경선이 월식도 주변에서 빙산에 갇힌 범선을 발견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대항해 아티팩트 에이지'는 스페인에 맞서는 네덜란드인이 주인공이며, 칼레 해전도 중요하게 다루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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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액수는 드레이크가 약탈한 액수의 거의 전액이었으며 잉글랜드 왕실의 1년 수입보다도 많았다. 16세기 당시 잉글랜드는 아직까지는 부유함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 1세 입장에서는 완전 횡재했고 땡잡은 것,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드레이크의 사형을 요구하는 스페인 사신 앞에서 오히려 드레이크를 귀족으로 봉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만화적 과장이 있을지언정 이때의 공로로 작위, 훈장, 명예 해군제독의 지위를 받은 건 사실이다. 바로 앞에서 하지 않았든 안 했든 스페인 입장에서는 복창이 터질 수밖에 없는 일 [2] 다만, 중세 시대 기준으로 단독으로 16,000명은 대군 수준이다. 이보다 많은 병력을 잉글랜드가 모으려면 귀족들이 일심단결해서 징집병을 끌고 나와야 했다. 거기에 런던은 바다와 강으로 이어져 있는 데다 위치도 가까운 반쯤 해안도시나 다를 바 없는 입지이기에 잘 풀렸다면 무적함대가 강에서 포격지원까지 해줬을 거다. 계획대로만 되었다면 아마 런던 함락은 기정사실이었을 거다. [3] 정말 계획대로 풀리면 스페인이 런던을 딸 수 있었을까? 물론 파르마 공작은 명지휘관이었고, 공성전에도 조예가 깊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공성전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어서, 이전 네덜란드·벨기에 지역에서도 공성전은 짧아도 수 개월 이상의 시간과 수많은 병력을 잡아먹는 난관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강한 적군이 바로 영국군이었다. 영국군은 그 이전에나 이후에나, 규모면에서는 보잘 것 없을지 모르지만, 질적으로는 대륙에서는 가장 정예의 병력을 자랑했다. 바다만 잘 방어할 뿐 육상방어는 형편없을 것이라는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그들은 내전(…)과 약탈질(…) 그리고 용병의 경험을 통해 육상전에도 능통했다. 결정적으로 보급이 문제다. 칼레까지 가는 것만으로도 포탄과 화약이 바닥나고, 식량과 물이 변질되는 마당에 스페인 해군이 런던에서 육군을 지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보급을 하기는커녕 현지에서 보급을 받아야 할 형편인데, 목표가 섬나라여서 보급받을 방법이 없다. 스코틀랜드의 개신교 국왕은 잉글랜드의 왕위 후계자여서 스페인을 도울 리 만무하고, 아일랜드는 반대쪽 바다를 건너야 하는 데다가 이미 수탈당해 물자가 없다. 내전 중인 프랑스는 무기거래를 금지했고, 네덜란드·벨기에는 파르마 공작이 영국으로 건너간 이상, 해상은 물론 육상도 보급선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마디로 스페인이 칼레 해전을 이겼더라도 런던 공략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이 사실은 당대 사람들, 특히 파르마 공작도 모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후세 역사가들 중에는 스페인 육군이 해군과 합류하지 못한 이유를 파르마 공작이 성공 가능성이 별로 없는 잉글랜드로 가기 싫어서 태업을 했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4] 카를 5세 시절부터 틈만 나면 뻔질나게 대외원정을 하는 바람에 식민지에서 그렇게 보물이 들어오는데도 국고가 틈만 나면 텅텅 비어서 펠리페 2세는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 파산 선언을 내렸고 그 이후 죽을 때까지 3번이나 더 파산 선언을 했다. [5] 본문에도 언급되지만 해전 자체보다는 이때 발생한 손실이 압도적으로 크다. [6] 두 명은 귀환 과정에서 항해 중 사망. 한 명은 빈사상태로 항구로 돌아와 며칠 후 사망. [7] 사실 이 지상군은 네덜란드 독립군의 함대에 봉쇄당하는 바람에 늦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합류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8] 그래서 이 우연한 바람을 '프로테스탄트의 바람', 혹은 '신의 바람'이라고도 한다. [9] 전투 중의 항명과 적전도주는 즉결처형감의 중범죄였다. 때문에 시도니아 제독은 이후 귀환 과정에서 명령에 불응한 함선의 선장을 교수형에 처하고 시체를 돛대에 매달아 본보기로 삼아 평소보다도 대단히 엄격한 처벌을 내리게 된다. [10] 당시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로 개신교 국가인 나바르와 전쟁 중이었으며, 실권자였던 기즈 공작은 펠리페로부터 뒷돈(…)을 받는 상태였다. 하지만 국왕인 앙리 3세는 이 시점에 기즈가 스페인을 뒤에 업고 프랑스 왕위를 노리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따라서 프랑스는 개신교 국가인 잉글랜드에게 우호적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스페인에게 협력하는 상태도 아니었다. 결국 앙리 3세는 기즈를 암살하고 나바르 왕 앙리와 화친하여 왕위를 물려주게 된다. [11] 이게 얼마나 심각한 수준이었냐 하면, 함포전 한 번 간단하게 벌이고 나서 화약과 탄환이 바닥이 날 정도였다. [12]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아일랜드는 스페인과 같은 가톨릭이었다. [13] 1968년 인양 결과 엄청난 보물이 나온 배이다. [14] 사략질로 얻은 재정적 이득보다 훨씬 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