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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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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1세
Mary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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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black> 왕호 메리 1세
(Mary I)
출생 1516년 2월 18일
그리니치 플라센티아 궁전
사망 1558년 11월 17일 (향년 42세)
런던 세인트 제임스 궁전
재위기간 잉글랜드, 아일랜드의 왕
1553년 7월 ~ 1558년 11월 17일
서명 파일:메리 1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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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fff> 이름 메리 튜더
(Mary Tudor)
배우자 펠리페 2세 (1554년 결혼)
아버지 헨리 8세
어머니 아라곤의 카탈리나
장례식 1558년 12월 14일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종교 가톨릭 }}}}}}}}}

1. 개요2. 생애
2.1. 즉위 전2.2. 즉위 후
2.2.1. 결혼2.2.2. 가톨릭 복귀 정책2.2.3. 승하
3. 개인사
3.1. 가계
4. 평가
4.1. 전통적 평가: 블러디 메리4.2. 현대의 평가
5. 사후6. 가족관계
6.1. 조상
7. 이야깃거리8. 현대 매체에서
8.1. < 튜더스>에서8.2. 영화 < 엘리자베스> (1998)8.3. 드라마 < 울프 홀>

[clearfix]

1. 개요

내가 죽으면 심장 칼레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을 것이다.[1][2]
16세기 잉글랜드 왕국 튜더 왕조의 제4대 국왕.

그녀 이전에 잉글랜드의 왕좌에 아주 짧은 기간이나마 앉았던 여성인 마틸다 제인 그레이의 경우, 군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기 때문에 보통 잉글랜드 왕국 최초의 여왕으로 인식된다. 또한, 당대에는 스튜어트 가문 출신의 메리 여왕 이전 시대이므로 당연히 메리 1세가 아니라 '퀸 메리'로만 불렸다.

헨리 8세의 적장녀로 그의 첫 번째 왕비인 아라곤의 카탈리나의 딸이며, 카스티야와 아라곤을 통치한 트라스타마라 왕가의 가톨릭 부부왕 이사벨 1세 페르난도 2세의 외손녀이다. 또한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카탈리나 사이에서 태어난 3남 3녀 중 유일하게 장성할 때까지 살아남은 자식으로 헨리 8세의 장녀이자 첫째 아이로 에드워드 6세의 이복 누나이자 엘리자베스 1세의 이복 언니이기도 하다.

블러디 메리(Bloody Mary)라는 별칭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잉글랜드의 국왕이다.

2. 생애

2.1. 즉위 전

헨리 8세 아라곤의 카탈리나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된 3남 3녀 중 다섯째이자 차녀로 태어났다. 위로 언니, 오빠들과 밑으로 여동생이 있었지만, 사산되거나 생후 몇 달을 못 넘기고 요절했다. 때문에 메리는 사실상 헨리 8세 아라곤의 카탈리나의 무남독녀로 자랐다. 비록 딸이었지만 헨리 8세의 유일한 적자녀였기 때문에, 헨리 8세는 메리를 어린 시절부터 매우 아끼고 사랑했다.

헨리 8세가 자신의 장녀인 메리 1세를 박대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앤 불린을 만나기 전까지는 아라곤의 카탈리나와 메리 모녀를 매우 총애했다. 애초에 형수였던 카탈리나와의 결혼도, 그녀를 사랑한 헨리 8세가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이다. 오죽했으면 메리가 태어나자마자 '프린세스 오브 웨일스'(Princess of Wales)로 봉했을 정도였다.[3] 하지만 헨리 8세와 카탈리나의 7년에 걸친 혼인무효[4] 소송 과정에서 꿋꿋히 어머니의 편을 들면서 아버지와의 사이가 틀어지고 말았다.

장기간의 혼인무효 소송 끝에, 헨리 8세는 교황청의 반대도 무시하고 아라곤의 카탈리나를 내친 후 앤 불린과 재혼했다. 이때 17세였던 메리의 처지도 위태롭게 되었다. 헨리 8세는 앤과의 결혼에서 태어난 자녀의 적법성 확보를 위해, 메리를 사생아로 선포하고 그녀가 가지고 있었던 공주 작위와 왕위계승권을 박탈해 버렸다. 이로 인해 메리는 '왕실의 하나뿐인 적통 공주'에서 '사생아'로 전락하여, 왕위계승 일선 밖으로 밀려났다.

그 뿐만 아니라 계모 앤 불린의 지시로 이복 여동생인 엘리자베스 시녀로 일하는 굴욕적인 대우를 받게 되었다. 이는 메리를 '잉글랜드의 적통 공주'가 아닌 '일개 사생아'로 확실하게 못박고, 계승권을 박탈하겠다는 의도를 아주 분명히 보이기 위해 내린 조치였다. 시종/시녀는 귀족이 왕족을 모시고 섬기는 일이지 적통 왕족이 하는 일이 아니었으며, 당연히 상식적으로는 같은 아버지를 둔 적자가 다른 적자의 시종/시녀가 되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메리를 엘리자베스의 시녀로 삼는 조치를 내렸으니, '메리를 헨리 8세의 적녀가 아닌 사생아로, 적통 공주인 엘리자베스보다 낮은 신분으로 취급하겠다'는 의도를 만천하에 드러내 보인 것이었다.[5]

다만 헨리 8세가 처음부터 이러려던 것은 아니었고, 아라곤의 카탈리나에게 자식인 메리를 적통으로 인정하고 계승권도 부여하는 등 괜찮은 대가를 제시하며 평화롭게 이혼하고 싶어했다. 왕의 성격상 카탈리나가 순순히 이혼하거나 한동안 버티면서 옵션 걸며 딜을 했다면, 헨리 8세도 그 이상으로 퍼주고 그렇게 비참하게 쫓겨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대 최강대국 스페인 왕실의 로열 블러드로서 자부심도 강하고, 신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잉글랜드의 왕비가 되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던 카탈리나는 배신한 남편의 사탕발림에 굴복하여 정당한 잉글랜드의 왕비 자격을 놓을 생각이 당연히 없었기 때문에, 교황청 대사와 토머스 울지 추기경이 제시한 혼인적법성 재판조차 거부해 버리고[6] "남편이 다른 여자랑 바람이 나서 조강지처를 버리고 새 장가를 가려고 한다"는 주장을 절대 굽히지 않았다. 이 과정이 7년을 끌었으니 온 유럽에 이 소식은 전부 중계되었고 그 때문에 헨리 8세는 카탈리나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딸 메리를 박대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헨리 8세의 행위는 정당화되기 힘들며, 아라곤의 카탈리나가 잘못한 것도 아니다. 어쨌든 겉으로라도 앤 불린을 더 예뻐한 게 사실인데다, 당연히 카탈리나의 입장에선 남편이 바람났다고 볼 수밖에 없다. 카탈리나에게 아들이 없는 게 문제라지만, 객관적 및 도덕적으로 보면 어쨌든 카탈리나는 아무 잘못도 없이 어이없게 이혼당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평화로운 제안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거기다 딸 메리가 심하게 박대당하고 카탈리나 본인도 병에 걸려 사경을 헤메자 어쩔 수 없이 뒤늦게 메리만을 위한 타협이라도 하려 했지만, 성격이 원체 개차반이었던 헨리 8세는 받아주지 않았다.

헨리 8세가 딸 메리를 견제한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종교 때문이었다. 당시 헨리 8세는 '잉글랜드 내'의 교회 수장을 '잉글랜드의 군주가 임명'할 수 있는 종교개혁을 선포한 걸 제외하곤 가톨릭 교리를 바꾸지 않아, 잉글랜드의 주교들과 가톨릭 성향 신하들도 심하게 반대하지 않았다. 반면 대륙식의 완전한 교리개혁을 주장한 복음주의자들은 서로를 공격하며 국왕의 신임을 차지하려고 숙청-화형 병림픽을 벌였는데, 이 중에서 친 가톨릭 성향 신하[7]들이 메리 공주를 구심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헨리 8세는 잉글랜드 내 가톨릭 복귀파 세력이 메리를 구심점으로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했고, 외부 가톨릭 세력이 잉글랜드에 영향을 미칠까 두려워 물 건너서 들어오는 메리의 혼사 제안을 모두 거절해 버렸다. 그래서 메리는 헨리 8세가 죽을 때까지 노처녀로 남아 있어야 했다.[8]

하지만 상황은 계속 급박하게 바뀌었다. 아라곤의 카탈리나에게서 왕비의 자리를 빼앗고 메리를 학대한, 모녀의 철천지 원수 앤 불린은 결혼 전 "왕자를 낳아주겠다"던 자신만만한 태도와는 다르게 딸 엘리자베스 공주만 낳고 계속 유산을 했다. 결국 헨리 8세는 앤 불린에게 불륜, 근친상간 등 별의별 죄목을 갖다 붙여서 참수해버리고, 당연히 앤 불린의 딸 엘리자베스도 사생아로 전락해 메리와 똑같은 전철을 밟게 되었다. 앤 불린 다음으로 들어온 새 왕비 제인 시모어는 아들 에드워드 6세를 낳은 지 얼마 안 되어 산욕열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망하고 말았다.

유아사망률이 높은 시대에 아들이 하나인 것에 불안해진 헨리 8세는, 아들 에드워드가 일찍 죽거나 후사를 못 남길 경우에 대비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메리와 엘리자베스의 왕위계승권을 복권시켰으나 적녀로는 인정하지 않았다. 제인 시모어는 메리를 아껴서 "부왕의 심기를 맞춰주라"고 살살 달랬고, 이에 메리는 흔들리며 여태의 주장을 철회하고 "아버지께 복종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헨리 8세는 딸이 굴복하자 곧장 메리를 불러 공개적으로 껴안고 방방 뛰다가 갑자기 신하들에게 매섭게 쏘아붙였다.
"니들 중 누구는 내가 이 보석을 죽이길 원했지?!"
파일:잉글랜드 국장(1554-1558).svg.png
메리 1세의 문장(紋章)[9][10]

이렇게 고달픈 생활은 마쳤으나, 메리는 이 결정을 죽을 때까지 후회했다. 헨리 8세가 승하하고, 메리의 이복 남동생이 에드워드 6세로 즉위하자, 메리의 지위는 더욱 위태로워졌다. 에드워드 6세가 어린 탓에 에드워드 치세 초반에는 에드워드의 외삼촌 시모어가[11] 섭정을 맡고, 시모어가 실각한 후에는 노섬벌랜드 공작이 정권을 잡아 섭정을 맡았다. 문제는 시모어와 노섬벌랜드 둘 다 개신교(그것도 칼뱅주의) 성향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가톨릭 세력의 구심점인 메리는 경계 대상 1호가 되었다.[12] 에드워드 6세도 어린 시절부터 개신교 신자로 교육을 받았기에, 이복누나 메리와 사적으로 친밀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 그래서 다음 왕위계승권자인 메리가 왕위에 올라 가톨릭 회귀 정책을 펼칠 것을 우려한 나머지, 16세의 나이에 친척이자 개신교도인 제인 그레이를 왕위계승자로 지명하고 중병으로 승하했다. 제인 그레이는 노섬밸랜드 공작의 아들인 길포드 더들리와 결혼했기 때문에, 노섬벌랜드 공작은 며느리를 여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메리를 제거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정황을 미리 알아차린 메리는 일찌감치 지지자들 사이에 숨어서 가톨릭 신자들이 뭉쳐있는 서퍽의 요새로 피신해버렸고, 에드워드 6세의 사후 본격적으로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다. 노섬벌랜드 공작도 반격을 시도했으나 애초에 정통성 문제에서 심각하게 밀렸기 때문에[13], 이탈자들이 속출하면서 반 메리 전선은 금방 와해되었다. 이 기세를 타고 승기를 잡은 메리는 37세에 잉글랜드 여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2.2. 즉위 후

2.2.1. 결혼

한 때 메리는 미소녀로 부모 양쪽의 금발을 물려받은 공주님이었다. 그러나 계모 앤 불린의 무지막지한 구박으로 얻은 상흔은 그녀의 외모에 고스란히 나타났다. 당대 최고의 미인으로 평가받던 어머니 아라곤의 카탈리나 왕비와 달리, 어렵게 즉위한 메리는 불행한 인생을 산 탓인지 이미 오래 전부터 외모나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이미 30대 후반이라 당시 기준으로 젊은 나이도 아니었고, 특히 작고 깡마른 몸매, 오랫동안 고생했기 때문인지 얼굴에는 주름이 많은데다 근시까지 겹쳐 항상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볼품없는 외모를 지닌 데다가 왕의 딸인데도 17세에 사생아로 내쳐진 탓에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학식도 높지 못했다. 또한 어머니가 이혼당하고 자신은 아버지에게 버림받는 등 파란만장하게 살아서 가톨릭 신앙에만 매달리며 자신은 물론이고 남에게도 엄격한 생활양식을 요구하는 등, 인간적인 매력은 별로 없었다.[14]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리는 튜더 왕조의 정통성있는 후손이기도 하고, 즉위 전 그녀의 불행했던 인생에 대한 백성들의 연민 때문에, 즉위 당시에는 거의 모든 세력의 지지를 받아서 한동안 왕권에 걸림돌이 될 문제는 없었다. 메리는 일단 왕권 확립을 위한 시범 케이스로 즉위 1주일 만에 자신의 왕위 계승을 방해하고 살해하려고 한 노섬벌랜드 공작을 반역죄로 처형했다. 레이디 제인(제인 그레이)과 남편 길포드 더들리는 일단 런던 탑에 감금했다가 이듬해 초 헨리 그레이[15]가 가담한 토마스 와이엇의 반란을 진압한 뒤 처형했다.

사실 메리는 신하들의 빗발치는 처형 요구에도 불구하고[16] 가까운 친척이자 나이도 어린 제인 그레이의 처형만은 피하며 보호하고 있었다.[17] 그러나 원래도 자식의 안위에 별 관심이 없었던 도셋 후작 헨리 그레이가 딸 제인 그레이가 감금되어 있는 와중에도 반란에 가담한 탓에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한편 메리가 미혼인 상태로 즉위하자 신랑감들이 많이 거론되었다. 상술한 것처럼 부친 헨리 8세가 정치적 이유로 딸의 결혼을 탐탁지 않아 했고, 에드워드 6세 시대에도 섭정들이 견제했기 때문에, 메리는 37세 때까지 노처녀로 지내고 있었다. 메리 입장에서는 자신이 후사 없이 죽으면 잉글랜드 국교회( 성공회) 성향의 이복 여동생 엘리자베스가 후계자가 되기 때문에, 어렵게 회복한 가톨릭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후사를 목적으로 한 결혼을 하려고 했다.

첫 번째로 신하들이 추천한 사람은 레지널드 폴 추기경이었다.[18] 추기경이라는 직책이 말해주듯 이 사람은 사제였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결혼할 수 없었지만, 교황청에서 특별 허가만 해주면 바로 환속할 수 있었기 때문에 추기경이라는 신분이 걸림돌이 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신분적인 문제와 별도로 레지널드 폴 추기경은 이미 나이가 50대였으며, 스타일도 완전히 학자 타입의 샌님이었기 때문에 여왕의 마음에 차지 않았다.

두 번째로 여왕이 관심을 보인 사람은 그녀가 직접 데본셔 백작으로 봉한 에드워드 코트니[19]였다. 코트니는 플랜태저넷 왕가의 마지막 후손이라 왕가의 혈통이긴 했으나 신하들에게 별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스페인에서 비밀리에 청혼이 들어왔다. 청혼자는 나폴리 왕이며 밀라노의 공작이고, 스페인의 왕세자이기도 한 5촌 조카[20] 펠리페( 펠리페 2세)였다. 펠리페는 무엇보다 자신의 외가 친척이며 가톨릭 군주 중에 가장 강력한 세력이기 때문에 고려된 것이었으나, 1553년 여왕의 혼인 계획이 발표되자 큰 반발이 일어났다. 심지어 여왕의 골수 지지층마저 반발했다. 왜냐하면 많은 이들이 "조국인 잉글랜드 왕국이 스페인에게 혼수품으로 팔려간다"고 느꼈기 때문이다.[21] 추밀원, 의회, 가톨릭 성향 신하들과 심지어 여왕의 최고 심복 스티브 가드너까지 모두 반대했다.

당연히 이런 반발을 배경으로 하는 음모도 생겨났다. 먼저 한때 여왕의 결혼 상대로 거론된 데본셔 백작 에드워드 코트니와 유력한 왕위계승 후보자 엘리자베스를 결혼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토마스 와이엇이 여왕의 결혼에 반대하여 병력 4,000명을 데리고 런던으로 쳐들어오기도 했다. 와이엇의 반란은 반란군이 막상 런던까지 오자 스스로 겁을 먹기도 했고, 여왕을 몰아내기엔 명분이 딸리기도 해서, 기껏 "여왕님을 잘못 보필한 추밀원 간신배를 척결" 드립이나 치고 진입을 머뭇거리다가 가차없이 진압당했다. 이때부터 여왕은 자신의 결혼에 극렬 반대한 세력들, 특히 개신교 세력들을 찍어누르기 시작했다. 훗날
블러디 메리
란 소리를 듣게 될 행동을 취하는데, 와이엇의 반란이 종결되고 펠리페와 결혼하기 전 사전 준비 작업으로 국교회( 성공회) 성향 사제와 복음주의자를 약 300명씩 화형 시켰다. 5년 치세 중 이 시기 6개월 간의 처형자가 대부분이었고, 탄압을 피해서 숨거나 외국으로 도망가거나 해서 표면적으로는 메리의 반대 세력이 없어졌다.

하지만 메리도 모든 신하들이 우려하는 상황을 무시할 순 없어서,
"펠리페는 메리 1세가 살아있을 때까지만 잉글랜드의 왕으로 재위하고, 둘 사이에 합법적 후사가 없이 다음 세대로 넘어갈 경우, 펠리페와 그 후계는 잉글랜드에 대한 권리가 없으며, 동군연합은 그대로 해소된다."
는 여러 조건에 동의한 끝에 결혼하게 되었다. 이때 메리는 38세, 펠리페 2세는 27세였다.[22]

만약에 이들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었다면 펠리페의 장자 돈 카를로스는 스페인과 나폴리를 물려받고, 메리의 아들은 잉글랜드와 펠리페의 대륙 영토인 플랑드르를 비롯한 저지대를 물려받을 예정이었지만,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2.2.2. 가톨릭 복귀 정책

한편 결혼은 했으나 아직 자식이 없었기에, 유력한 후계자 후보인 엘리자베스 제인 그레이의 회유 시도가 이어졌다. 그러나 제인 그레이는 어쨌거나 왕위를 참칭한 반역도였기 때문에, 그녀의 운명은 개종과 상관없이 노섬밸랜드 공작 일가가 처형당할 때부터 정해졌다. 특히 제인은 끝까지 개종과 회유를 거부하여 16세의 꽃다운 나이에 처형된다.[23] 시골에 있으면서 병석에 누워 있던 엘리자베스는 메리가 병력 500명을 동원하여 끌어내 런던으로 압송하여, 런던탑 '반역자의 문'(Traitors Gate) 뒤에 감금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처형만은 매우 어려웠다. 엘리자베스는 그다지 종교에 열성적인 편이 아닌데다, 겉으로나마 잉글랜드 교회가 가톨릭으로 복귀한 걸 받아들인 상태라 종교를 빌미로 처형할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튜더 왕조의 후손은 메리와 엘리자베스 자매밖에 남지 않았는데, 나이가 40세에 가까워진 메리는 아직 후사가 없었고, 아무 대책 없이 엘리자베스를 죽이고 나면 후계자가 전무한 상황에서 귀족들끼리 차기 왕위 계승과 관련한 분쟁이 벌어질 게 뻔했다. 한마디로 몇 세대 전에 잉글랜드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장미 전쟁 시즌 2가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생긴 것이다. 가톨릭화를 추진하던 메리 여왕의 심복인 윈체스터 주교 스티븐 가디너가 공공연히 "엘리자베스를 죽여야 된다"고 선동했지만 이러한 이유로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엘리자베스는 4개월 동안 감금되었던 시기에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척하여 런던탑에서 해방되었고, 토마스 포프 경의 감독하에 해트필트로 거주지를 이전했다.

그리고 나서 메리는 일생의 숙원을 펴는데, 1520년대 이후 헨리 8세 시기와 에드워드 6세 시대 반포한 종교관련 법률을 모두 무효화시키면서 선대왕의 반 가톨릭적 종교 정책을 바꾸려고 했다. 우선 로마 가톨릭에서 독립한 잉글랜드 국교회( 성공회의 전신)를 다시 가톨릭으로 복귀했다. 헨리 8세 시대의 종교개혁은 교회 수장을 로마 교황 대신 잉글랜드 국왕으로 대체한 것일 뿐 교회 조직은 기존의 가톨릭 조직을 그대로 준용했기 때문에 교회 조직 자체는 남아있었으나, 헨리 8세 시절과 에드워드 6세 시기에 들어 새로운 종교개혁 세력들이 많이 성장한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메리가 가톨릭의 복권을 선언했으니, 큰 소요사태가 벌어질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여왕의 결혼과 더불어 20년간 교황청에서 생활한 레지널드 폴[24] 추기경이 교황청 대사 자격으로 귀국했는데[25], 교황청에서는 잉글랜드가 가톨릭 품으로 돌아온 것에 감격해서 기존에 강탈된 교회와 수도원 재산에 대한 현재 소유권을 그대로 인정하며 귀족 젠트리들의 민심을 사려고 했다.

그러나 여왕의 심복이던 스티브 가드너가 그간 쌓여왔던 한풀이를 하려고 신교도들을 계속 공격했다. 일단 사제 2,000명을 쫓아냈는데, 당시 잉글랜드 전체 사제의 1/4에 달하는 수치였다. 또한 주교 중에서 가장 개신교 성향이 뚜렷한 글로스터 주교 존 후퍼와 세인트 폴 성당 사제 로저스를 체포했다. 후퍼와 로저스는 예상대로
"가톨릭 미사는 사기다!"
라며 죽기를 자처했고 이들은 곧 화형에 처해졌다.

이제 표적은 기존 잉글랜드 교회 수뇌부로 옮겨갔다. 런던과 웨스트민스터 주교 니콜라스 리들리, 로체스터 주교 휴 라티머를 체포하여 배교를 권유했으나 거부했다. 이들 역시 화형을 당했는데, 리들리와 라티머 두 사람은 같이 처형되어 죽기 전에
"까짓 거 남자답게 화끈하게 죽읍시다"
라고 외치면서 장렬히 사망했다고 한다.

다음 표적은 기존 잉글랜드 교회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였다. 캔터베리 대주교 크랜머는 헨리 8세 시절 왕의 폭주를 방지하는 회유책으로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임명장을 수여받았기 때문에 다른 주교들처럼 강압적으로 탄압할 수 없었다. 이에 미리 포섭된 지인들을 이용한 지속적인 회유책과 협박을 병행한 끝에, 토머스 크랜머는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크랜머가 성공회를 포기한다는 서명을 여러 차례 한 것을 보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그를 강론대에 올렸는데… 크랜머는 조용하게 기도문을 읽고 미사를 진행하다 돌연 라며
"나는 협박에 넘어가 배교했고, 큰 죄를 지었다. 화형당하면 이 손모가지를 가장 먼저 태우겠다! 교황은 적그리스도다!"
를 외쳐서 도중에 끌려나가고 말았다. 나중에는 곧 평사제로 강등당하며 화형에 처해졌는데, 불길이 일어나자 역시 오른손을 내밀어 먼저 태웠다고 한다.

2.2.3. 승하

상황이 이러니 민심이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즉위 초기에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메리의 인기는 고작 3~4년 만에 나날이 떨어졌다. 더군다나 아래 서술된 일련의 삽질로 대외정책까지 실패하며 여론의 비판을 받았다.

메리의 대외정책 기준은 유럽의 전통적인 부부 동군연합 개념에 가까웠는데, 남편인 펠리페 2세를 위해 친스페인 정책을 펼쳤다. 잉글랜드가 1556년 스페인-프랑스 전쟁에 스페인편으로 참전한 것도 펠리페 2세를 위해서였다. 물론 부부 동군연합이 전통적인 유럽의 개념이기는 하지만, 잉글랜드의 이익보다는 스페인의 이익을 위한 전쟁에 갑작스럽게 참여하기 위해 백성에게서 돈을 긁어 모으자 그녀의 평판은 끝을 모르고 추락했다. 특히 신하들과 의회에서도 전쟁에 참전하는 것을 반대했으나 메리는 이를 무시하고 참전을 강행했다. 그나마 전쟁에 승리해서 뭘 얻기라도 했으면 모르겠지만 전세는 계속 불리하게 돌아갔고, 오히려 스페인-잉글랜드 연합군이 1558년 프랑스의 기즈 공작[26]에게 참패하고 칼레를 빼앗기고 말아 잉글랜드의 마지막 대륙 거점을 잃는 처참한 결과만 초래했다.

게다가 펠리페 2세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부인 메리의 의사도 묻지 않고, 잉글랜드가 잃은 칼레를 되찾으려는 시도도 전혀 하지 않은채, 전쟁을 끝내려고 프랑스와 단독으로 강화해버렸다.[27] 결국 잉글랜드는 스페인 때문에 괜히 전쟁에 끼어들어 병사들을 잃었을 뿐 아니라, 당시 잉글랜드 세수의 30%나 차지하는[28] 중요한 영토까지 잃었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전쟁에서 지며 피해만 본 충격 탓인지[29] 메리는 1558년 여름부터 건강이 급속하게 악화되었으며, 결국 같은 해 11월, 치세 5년 만에 향년 42세의 나이로 몇몇 시녀들만이 임종을 지키는 가운데 쓸쓸히 승하했다. 사인은 난소암으로 추정된다. 하단에 서술된 상상임신 소동도 이 때문이 아니었겠냐는 추측이 있다.

3. 개인사

개인으로서는 신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어머니 아라곤의 카탈리나에 대한 효심이 대단했다. 이는 메리 자신이 아들이 아니라는 핑계로 부친 헨리 8세가 어머니를 축출하려고 잉글랜드의 가톨릭 교회를 박살내는 불행하기 짝이 없는 일을 겪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메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의 성별이 간접적 원인을 제공하여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강제로 이혼당해 불행하게 생을 마감하고 잉글랜드의 가톨릭이 박살나며 무너지는 멘붕을 겪은 것이다. 물론 직접 원인은 수백 년의 종교까지 뜯어버릴 정도로 요란하게 바람이 난 아버지.

사실 단순히 ' 헨리 8세의 왕으로서의 자식 욕심 때문에'라고 합리화해 주기도 뭣한 게, 앤 불린을 만나기 이전에도 왕비 아라곤의 카탈리나를 두고 바람을 피워 낳은 사생아들이 이미 여럿 있었다. 앤 불린의 언니인 메리 불린도 헨리 8세와의 사이에서 최소 2명의 아이를 낳았고, 또 다른 사생아 헨리 피츠로이 등은 왕실에 나름 자리도 버젓이 마련해주었다. 왕위계승은 강력한 스페인 왕가의 혈연이자 스스로도 '프린세스 오브 웨일즈'로 일찌감치 지정해 놓은 맏딸 메리를 그냥 그대로 여왕으로 세우면 되긴 하는 거였다.[30] 잉글랜드는 < 살리카법>도 적용하지 않았으며 메리 공주의 모계인 스페인-카스티야에도 이미 여왕이 존재했다. 헨리 8세는 자식들을 아낀다기엔 사생아들과 그 어머니인 애인들에 대한 처우도 자기 변덕에 따라 제각기 달랐고, 너무나도 간단히 2명이나 되는 적통 왕녀인 딸들을 사생아로 내렸다가 올렸다가, 어머니도 평생 못 만나게 하고 왕위계승권도 줬다 뺐는 등의 가혹한 변덕을 수시로 부렸다.[31]

펠리페 2세와 결혼했지만 어디까지나 잉글랜드의 여왕인지라 조국을 떠날 수 없었던 메리는, 스페인에 있는 남편에게 "잉글랜드로 좀 오라"[32]고 애원하는 편지를 썼다. 하지만 펠리페는 온갖 핑계를 대며 요청을 묵살했다. 가뭄에 콩 나듯이 오는 남편 마음을 얻으려고 온갖 마음고생을 하던 메리는 펠리페를 위해 프랑스와의 전쟁에도 가담했지만, 패전하여 칼레를 잃고 민심을 잃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렇게 애를 태우다가 상상임신까지 하는 바람에 전 유럽에서 비웃음거리가 되는 망신까지 당했다.

워낙 심한 근시라 늘 눈살을 찌푸렸기 때문에, 얼굴에 주름이 많았다고 한다.[33] 건강이 전반적으로 좋지 못했는데, 특히 자궁이 고질적으로 안 좋아서 늘 고생했다고 한다. 자궁근종이 심해서 월경을 거르는 증상이 나타났는데, 이걸 임신으로 착각했다는 주장이 있다.

사실상 불임인데도, 자신의 어머니 아라곤의 카탈리나를 내치게 한 원흉 앤 불린의 딸이자 자신의 이복 여동생인 엘리자베스 1세에게 왕위를 주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든 자녀를 낳아 자신의 자녀로 하여금 왕위를 이어받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당시 임신하기엔 나이가 상당히 많았던 데다가 자궁이 좋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남편 펠리페도 아이를 갖는 데 적극적이지 않았다. 때문에 결국 그렇게 바라던 아이는 낳지 못했다. 그래서 임종을 맞던 순간에 엘리자베스 1세를 왕위계승자로 지명해야 했다. 사실 지명하지 않았더라도 적법한 계승자나 튜더 왕조 혈통은 엘리자베스가 유일했기 때문에, 가톨릭 세력이 밀던 인물을 지명해도 성공 확률은 낮았다.

역사적 기록으로도 두 차례나 상상임신을 했다곤 한다. 첫 번째는 남편 펠리페 2세와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실까지 왕자의 탄생을 기대했으나, 10개월이 지나도 출산 소식이 없었다. 산실과 필요한 아기용품까지 다 마련해 놓았는데도 출산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상태에서, '왕자가 태어났다'는 잘못된 소식이 런던에 퍼졌고, 이에 백성들이 크게 환호하며 축제를 벌이는 소동이 벌어지자 왕실 사람이 나와 시정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출산 예정일을 2개월이나 넘기고도 진통이 일어나지 않고, 메리가 다시 월경을 하자, 그제서야 상상임신이라는 게 밝혀졌다고 한다.
상상임신인 게 드러나자, 펠리페는 미련없이 스페인으로 돌아갔다가 한참 뒤에야 돌아와 잉글랜드에 잠시 머물렀다. 이때 아이를 가지기 위해 노력은 했지만, 그새 더 늙고 약해진 메리가 정말로 임신할 리는 없다는 걸 알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나중에 메리가 임신했다고 편지를 보냈음에도 펠리페는 '또 상상임신일 거야'라고 생각하며, 메리가 그렇게나 애원했는데도 잉글랜드에 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번에도 20개월이 지날 때까지 출산의 기미가 없어서, ' 폐경을 임신으로 착각했다'는 조롱을 받았다고 한다. 펠리페 2세는 이후 임신이 거의 불가능하다 생각했고, 메리가 자신을 2차례나 망신시켰다고 생각해서 절대로 잉글랜드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메리는 남편도 없이 상상임신으로 인한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게다가 당시 메리가 펠리페를 위해 프랑스와의 전쟁에 끼어드는 바람에 전비 부담이 가중되어 국가 재정이 파탄난 상태였다. 그렇게 끼어든 전쟁에서 잉글랜드군은 스페인군과 연합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에 주구장창 깨지기만 하여 칼레까지 상실하게 되었다. 칼레는 위에 서술되어 있다시피 당시 잉글랜드 세입의 35%를 차지하고 있었던 지역이라 가뜩이나 헨리 8세가 나쁘게 만든 국가 재정이 더욱더 나빠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메리 곁에 있어야 할 시녀나 시종도 제대로 고용하지 못해 거의 메리 혼자 절망하고 있었다고.

3.1. 가계

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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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전통적 평가: 블러디 메리

메리 1세는 개신교에 대한 박해 때문에 전통적으로 '블러디 메리'라는 별칭으로 잘 알려져있다. 이 설명에 의하면, 메리가 국교를 가톨릭으로 되돌린 것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스른 것이며, 또한 펠리페 2세와의 부부동군연합은 스페인의 광신적 신앙에 잉글랜드를 무방비로 노출시켰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해석은 전통적으로 영국 사학계를 지배한 휘그 사관(Whig history)에 기반해있다. 휘그 사관은 입헌군주제, 의회민주주의, 개인의 자유를 위한 결정론적 세계관에서 영국 역사를 바라보며 이의 원동력을 영국의 프로테스탄트화로 해석한다. 스페인이 종교적 광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는 점, 메리 1세가 종교를 이유로 사형시킨 개신교 신자의 숫자(284명 처형, 34명 옥사)가 1534~1680년 사이에 종교를 이유로 사형당한 가톨릭 신자의 숫자보다 많다는 점 정도가 그 근거로 제시될 수 있겠다. 휘그 사관에 기반한 메리 1세에 대한 평가를 조금 예로 들면 헨리 8세를 악당으로, 엘리자베스 1세를 운이 좋은 군주 정도로 평가한 찰스 디킨스마저 메리 1세를 폭군으로 평가했다. 1970년대에 쓰인 폴 존슨(Paul Johnson)의 명저 《기독교의 역사》에서는
"메리 여왕의 의지는 반 가톨릭적 국민정서에 부딪혀 무너지고 말았다."
고 하였다.

4.2. 현대의 평가

The total import of the evidence of both rebellion and will-making is that Mary's Catholicism attracted more spontaneous support from the English than Edwardian Protestantism or that of the early reign of Elizabeth.
전체적인 반란과 유언서들의 증거들을 종합해볼때 메리의 가톨릭 신앙은 에드워드의 개신교 신앙이나 엘리자베스 치세 초기의 그것보다 더욱 자발적인 지원을 잉글랜드인들로부터 이끌어내었다.[36]
- 《A Brief History of Britain 1485-1660: The Tudor and Stuart Dynasties》. Ronald Hutton
the overall conclusion must still be that it was Mary’s Catholic Church that was the most popular among the English as a whole, and that had she reigned for even half as long as Elizabeth did – let alone had she ruled for as long, and produced a Catholic heir – then England would have been a Roman Catholic nation ever since.
전체적인 결론은, 잉글랜드인에게 전체적으로 가장 인기 있던 건 메리의 가톨릭 교회라는 것이며, 만약 그녀가 엘리자베스의 절반 기간만 다스렸어도 ㅡ 그녀가 치세 동안 가톨릭 상속자를 낳았을지를 논외로 하더라도 ㅡ 잉글랜드는 계속해서 로마 가톨릭 국가로 남았으리라는 것이다.
- 《A Brief History of Britain 1485-1660: The Tudor and Stuart Dynasties》. Ronald Hutton

그러나 오늘날 사학계에서 메리 1세에 대한 휘그 사관적 해석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러한 해석의 기반이 된 휘그 사관은 1950년대부터 시작된 일련의 비판으로 사실상 학계에서 퇴출되었으며, 현재 학계에서 결정론적 사관을 조롱하는 의미로까지 쓰이는 실정이다. 물론 학계를 벗어난다면 메리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나 폴 존슨은 대중 역사가이지 역사학자가 아니며, 소설가 찰스 디킨스 역시도 역사학자는 아니다.
학자들은 각자의 문화적 편견을 부지불식간에 객관화하여 잉글랜드에서 종교개혁의 승리는 불가피했고, 1550년대에 반전을 꾀한 메리 튜더의 시도는 역사의 조류를 거슬러 헤엄치는, 실패하기 마련인 시도였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메리의 치세에 장기적으로 가톨릭교회를 되살릴 토대가 놓였다는 주장, 잉글랜드가 훗날 신교 국가가 된 것은 잉글랜드인의 종교적 DNA가 아니라 여왕의 때 이른 죽음 때문이었다는 주장이 널리 인정받고 있다.
피터 마셜[37], 《종교개혁》中

메리가 엘리자베스보다 더 광신적이었다고 볼 근거는 없으며, 메리를 역사 앞의 반동으로 보는 시각은 근래의 사학계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심지어 Susan Doran&Thomas S. Freeman가 공동으로 편집하고 여러 학자들이[38] 공동으로 저술한 《Mary Tudor: Old and New Perspectives》의 소개글에서도 Bloody Mary는 신화임을 명시하고 있다.
Mary Tudor, England's first sovereign queen, is arguably also England's most vilified and misrepresented monarch. For centuries, she has been branded in popular and academic works as a vicious failure and superstitious tyrant. Infamous for burning hundreds of her subjects at the stake in a futile attempt to undo the English Reformation and restore Catholicism in England, she is widely remembered today as 'Bloody Mary'. In this volume, an outstanding team of international scholars trace and analyse the growth of the Bloody Mary myth, from the time of Elizabeth I through to the present day. Detailing the political, religious and gender assumptions on which the myth is based, they also attempt to recover the 'real' Mary - an educated, pragmatic and resourceful queen - underneath the myth of the villainous tyrant. Based on the very latest research, this book offers a truly revisionist and uniquely balanced portrait of Mary Tudor.
잉글랜드의 첫 여왕 메리 튜더는 또한 확실히 가장 비난받고 잘못 표현되는 잉글랜드 군주일 것이다. 지난 수세기동안, 그녀는 대중 서적에서도 학술 서적에서도 사악한 실패와 미신적 폭군으로 낙인찍혔다.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을 철회하고 잉글랜드의 가톨릭 신앙을 복구하려는 헛된 시도에서 수백의 신민을 화형시킨 것으로 악명이 높은 그녀는 '블러디 메리'로 오늘날 널리 기억된다. 이 책은, 세계적인 학자들의 훌륭한 언어로 블러디 메리 신화의 성장을 추적하고 분석한다. 엘리자베스 1세의 시대에서 오늘날까지. 이 신화가 근거하고 있는 정치적 종교적 성(gender)적 억측을 설명하면서, 그들(학자들)은 악랄한 폭군 이면에 있는 교양 있고 실리적이며 영리한 여왕인 "진짜 메리"를 복구하려 시도한다. 최신 연구에 근거하여, 이 책은 진실로 재평가되고 전례없이 균형잡힌 메리 튜더의 그림을 제공한다.

엘리자베스가 즉위했을 때는 곧바로 개신교화를 추구할 만큼 개신교의 기반이 튼튼하지가 않았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메리 1세가 즉위했을 때, 잉글랜드에서 스스로를 프로테스탄트라고 여기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심지어 프로테스탄트 비율이 가장 높은 런던과 남부 잉글랜드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메리 1세 치세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고, 따라서 메리와 달리 엘리자베스는 타협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근대 초의 종파 국가(confessional state)는 본질적으로 한 국가에서 두 종파가 공존하는 것이 대단히 어려웠고,[39] 엘리자베스의 궁극적인 목표가 잉글랜드 국교회의 프로테스탄트화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엘리자베스 즉위 이후, 메리 1세가 임명한 신학 교수들과 각 사목구 사제들을 점차 프로테스탄트로 교체했는데, 이것 자체가 장기적인 프로테스탄트화 정책이었다.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에 대해 대중들의 최초 반응은 냉담한 편이었다. Peter Cunich 교수가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수도원 폐쇄 및 옛 전례의 변화[40]는 대중들에게 상당한 상실감을 남겼다. 이 영적 공허감을 새로운 프로테스탄트 교리가 대체하기까지는 수십년의 긴 세월이 걸렸다. 1,000년 가까이 믿어온 종교를 하루아침에 바꾸라고 한다면 그게 그 시대에 될 리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자베스가 다소 온건한 방향으로 종교정책을 세운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고, 특별히 그가 관용적인 성격이어서라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이 '온건한 방향'이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즉위 초창기'에 그랬다는 것이다. 재위 10년쯤이 넘었을 때, 가톨릭 세력이 강했던 잉글랜드 북부 지역에서 가톨릭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엘리자베스는 대대적인 학살로 답했다. 문제는 반란을 주도한 귀족들과 그 지지자들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던 그 지역 민중들에게까지 가혹한 학살을 자행했다는 것인데, 최소한 700명 이상이 처형당했고, 당시 북부 잉글랜드에서는 ' 교수형당한 시체가 걸리지 않은 마을이 없었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엘리자베스가 메리보다 종교적 이유로 사형을 덜 시켰다'는 주장은 이런 학살의 희생자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주장이다(K. Kesserling, 《Northern Rebellion》, 2007). 또한 엘리자베스는 라틴어 미사를 드렸다는 이유만으로 교수척장분지형을 허가하고, 가톨릭 사제를 숨겨줬다는 이유로 요크의 가톨릭 신자 여성의 허리뼈를 부러뜨려 죽이는 등[41] 처형의 잔인성 면에서는 메리 시대의 화형보다 하등 나을 게 없었다. 블러디 엘리자베스

메리 1세의 종교 정책의 '잔인성'이나, 당대 잉글랜드인들이 불만을 가졌다는 후대 개신교 사가들의 서술이 크게 과장되었다는 지적은 현재 학계에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제프리 파커 교수를 비롯한 많은 현대 학자들은 메리 1세의 가톨릭 부흥책은 많은 호응을 받은 정책이었고, 그것이 장기적으로 실패한 것은 오로지 여왕의 때이른 죽음 때문이었다고 보고 있다. 종교 다툼을 넘어 반역행위는 왕이 명군이나 성군이었어도 반역자에게는 가혹하게 다루었으며, 반역자에 대한 가혹한 숙청행위는 꼭 메리 1세만 비난받을 일도 아니다. 헨리 8세 시대에도 수도원 해체에 반발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났고,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도 반가톨릭 정책에 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지만, 대신 많은 개신교도들이 대륙( 유럽)으로 망명을 했는데 헨리 8세 시절 정치적으로만 헨리 8세를 인정하면 그다지 이견이 없었던 가톨릭교회와는 대비된다(물론 헨리 8세 이후에는 에드워드 6세나 엘리자베스 1세가 강경한 개신교 노선을 취하면서,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대륙으로 망명해야 했다).

또한 눈에 띄는 치적이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우선 재정 확대를 위해 교역을 장려했으며, 화폐 개혁 정책을 입안했다(짧은 치세로 인해 그녀의 죽음 이전에 시행되지는 못했다). 흔히 영국이 세계 곳곳에 탐험가들을 보내 교역로를 개척하기 시작한 것이 엘리자베스 1세 때로 알려져 있으나, 이 역시 메리 1세 때 시작된 정책이었다. 또한 헨리 8세 이후로 자금 부족으로 인해 쇠락해가던 잉글랜드 해군을 재건한 것도 메리 1세의 업적이다. 제프리 파커 교수에 따르면, 이 정책은 부군이던 펠리페 2세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추진되었다고 한다.

또한 잉글랜드가 이후 개신교 국가가 된 탓에, 헨리 8세 엘리자베스 1세가 저지른 대량 학살(특히 아일랜드에서의)이 메리의 처형보다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또한 마을 공동체 단위로 이루어지는 사적 제재와, 군대를 동원한 대규모 학살[42]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도 억지다.

현대 역사학계는 메리 1세에 대해서 이전보다 훨씬 더 중립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Susan Doran and Thomas S. Freeman (eds.) 《Mary Tudor: Old and New Perspectives》 (London, 2011)와 같은 책들에서 메리 1세에 대한 최근 역사학계의 관점 변화를 찾아볼 수 있다. 메리 1세에 대해 현대 역사학자들은, "흔히 생각하던 것보다 덜 광신적이었고, 더 유능한 군주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메리는 신하나 시녀들, 인민(people, 라틴어로는 Populus)들에게 매우 관대하고 자비롭게 대했다고 전해진다. 즉위할 당시만 해도 살해 위협을 피해 런던에서 도망쳤다가 다시 민중의 지지로 런던으로 재입성한 걸 보면, 일반 대중들의 충성도도 엄청나게 높았다. 즉위 이후 다시 터진 반란 때도 펠리페 2세와의 결혼 문제로 냉담했던 런던 시민들 앞에서 호소하여 수비대를 구축해 반란을 진압하는 등 민심이 그녀를 외면하지는 않았고, 많은 가톨릭 신자들과 보수적 성공회 신자들(반쯤은 가톨릭 신자)은 그녀에게 최소한 미온적 지지를 보내기도 했다.

윌리엄 세실을 비롯한 소수의 극렬 개신교도들만이 메리를 적극적으로 비토했으나, 그 세력도 미약해서 반란은 계속 진압되었다. 이는 메리가 헨리 8세의 적장녀이자 모계 역시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트라스타마라 왕가 출신으로, 헨리 8세의 자식들 중 가장 고귀한 혈통의 소유자라서 정통성이 강했던 점도 있었다. 아무리 봐도 당시 메리를 제외하면 더 나은 왕위계승 후보도 없었다. 메리가 아니면 다음 순위 계승자로 엘리자베스가 있었는데, 그녀는 어머니 앤 불린이 (누명이나마) 간통죄를 짓고 사형당했다는 정통성 문제가 있었다.

전왕 헨리 8세나, 후임 엘리자베스 1세나 당시 가톨릭 vs 개신교 양극화의 구도로 치닫는 유럽의 국제 관계에서 로마 스페인, 독일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국익을 챙긴 반면, 그 사이에 낀 메리 혼자 가톨릭으로 돌아서 친가톨릭의 외교 정책을 추구했다. 이 점이 후대 역사학자들과 개신교인들에게는 영국 외교사의 '정상적' 흐름에서 이탈한 것으로 보여져 까였다. 이것은 20세기 초반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휘그 사관의 영향인데, 이 관점은 영국의 개신교화를 역사의 정상적인 흐름으로 보았다. 그러나 현대 역사학에서 이런 결정론적 사관은 통하지 않고, 이 휘그 사관의 극복이 메리 1세 치세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열었다.

메리 1세는 그렇게 나쁜 군주도 아니었고, 정치적으로도 외교적인 측면만 제외하면 딱히 처참하게 실패한 것도 아니다. '블러디 메리'라고 할 만큼 잔학하고 사람을 많이 죽인 무시무시한 폭군은 확실히 아니었으며, 보수적이었던 가톨릭을 따르긴 했지만 그렇게 비평받아 마땅한 인물도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의 국왕 치고는 너그러웠으며 백성들에게도 관대하고 자비롭게 대했다. '찬탈자' 제인 그레이를 살려주려고 한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형에 소극적인 편이었으며, 고문을 많이 활용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헨리 8세나 엘리자베스 1세 시대처럼 고문이 횡행했거나 귀족들이 음모에 말려 희생되는 일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백성에게 관대했던 면모는 동생이자 후계자인 엘리자베스 1세도 마찬가지였는데 아마 메리 1세의 이런 통치 면모를 보고 배웠을 가능성은 있어보인다.

제인 그레이는 불과 16세의 어린 소녀였고 메리 자신의 가까운 친척이었으며(5촌 조카), 권력에 눈이 먼 막장 부모에게 이용당해 강제로 왕으로 옹립된 입장이었다.[43] 메리 역시 막장 아버지 헨리 8세 때문에 불행한 시절을 보냈던 만큼 제인에게 동정심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메리는 제인을 살려주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했는데,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살려주겠다"고 권하거나 임산부를 처형하지 않도록 되어 있는 법을 이용해 보려고 임신 여부를 확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개종 제안은 신실한 개신교도였던 제인 자신이 거절했고, 남편과 사이가 나빴는데다 오랫동안 따로 수감되어 있었던 만큼 임신한 상태도 아니었으며, '살려두면 반란의 불씨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끊임없이 제기되어 결국은 제인을 처형할 수밖에 없었다. 워낙 처지가 안쓰러웠던지라 메리가 제인의 처형을 감독하도록 보낸 신하들마저 제인을 안타깝게 여겼다고.[44]

역사적 연구 성과들이 보다 축적되면서 헨리 8세 엘리자베스 1세의 위상에 대해서도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다. 표면적으로 강력해 보이는 왕권은 항구적인 재정적 기반이나 인적 기반이 허약했고, 외교 정책에 있어서도 무모하거나 과잉 반응으로 전란 및 재정 소모를 자초했다는 비판들이다.

메리의 숙청을 '케케묵은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자행된 한풀이'라고 보는 견해는 16~17세기의 유럽 정치역학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다. 17세기까지도 종교적 이데올로기는 반란 세력과 국가 양쪽 모두에게 이용된, 막강한 것이었고, 종교적 탄압은 정치에 뗄 수 없는 것이었다.

메리 1세의 여왕 즉위 당시 아일랜드 가톨릭, 잉글랜드 런던 성공회로 칼같이 나뉘지 않았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메리 1세 즉위시 잉글랜드 인구는 여전히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였으며, 프로테스탄트 인구는 가장 강성한 런던에서도 대략 3분의 1로 추정되며[45], 켄트 지역에서도 개신교의 위치는 잘해야 상당한 규모의 소수파(significant minority)였다. 아직 성공회는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고 헨리 8세가 국가 재정 마련을 위해 매각한 수도원 토지를 구입한 귀족들은 잉글랜드의 국가교회인 성공회를 지지했지만, 인클로저 운동의 고급기술인 섬유산업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발전하면서 양모 생산을 위한 토지로 용도가 변경되는 산업 변화의 진행[46]으로 농사를 짓던 땅을 잃고 수도원으로부터 구빈 등의 혜택을 받던 민중들 입장[47]에서는 전혀 아니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메리 1세 즉위 당시의 잉글랜드는 가톨릭 국가였다는게 현 학계의 중론이라는 점이다. 헨리 8세 말년에 벌어진 '은총의 순례' 같은 대규모 반란은 당시 전반적인 민심이 헨리 8세의 개혁에 그닥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증거다. 최근의 연구들은 중세 말 잉글랜드의 가톨릭 교회가 종교 개혁이 일어날 정도로 부패하지는 않았다고 보고 있다[48].

그리고 블러디 메리론을 미는 쪽에서는 종교를 이유로 처형당한 숫자가 엘리자베스 쪽이 훨씬 적다면서 옹호하는데, 당대 잉글랜드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평가이다.
잉글랜드, 아일랜드, 네덜란드에서 개신교도들은 가톨릭 신자들, 특히 사제들을 사형에 처했다. 다만 신앙 때문에 고통받는 신교도들의 도덕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이단'보다는 '반역죄'를 공식적인 처형 이유로 들곤 했다.
피터 마셜(Peter Marshall), 《종교개혁》 中[49]

즉 공식적으로 이단 혐의에 의해 처형받은 숫자를 가지고 메리가 엘리자베스보다 더 광신적이라고 보는 것은 말도 안되는 혐의이다. 이 논리를 똑같이 적용시킨다면, Ronald Hutton 선생이 지적하듯, 메리 1세는 그 치세 중 종교를 정면에 내건 민중봉기가 일어나지 않았던 유일한 튜더 군주였다.[50] 즉 '공식적인' 이단혐의로 몇명이 처형받았는지, '공식적인' 종교 슬로건으로 몇건의 반란이 일어났는지를 거론하며, 군주의 광신성을 논하기는 어렵다. 실질적으로 군주들의 신앙에 의해 몇명이 이단 혐의로 처형되었는지는 여러 논란이 있으나, 메리가 엘리자베스보다 더 광신적이라는 평가를 들을 근거는 없다. 오히러 Hutton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처형당한 가톨릭 신자의 대다수는 단지 가톨릭 신앙을 지속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음을 지적한다.[51]
The regimes of Henry VIII, Edward VI, Elizabeth and James I all put Protestants to death as well, for beliefs that were more radical than those permitted by the established Church of the time. In addition, Elizabeth executed almost 200 Catholics, in theory for treason but actually just for attempting to practise their religion. The executions that followed the rebellion of the northern earls add another couple of hundred to that figure. In the following century, the government of Charles II engaged in spurts of persecution in which anybody who met to worship outside the Church of England could be imprisoned. Over 400 Quakers, let alone Presbyterians, Baptists, Independents and other kinds of Protestant dissenter died in confinement, most because of the conditions in which they were held. It is a matter for personal taste whether readers would prefer this squalid and lingering end to a few minutes of agony in the middle of a bonfire; to those who do, it is Charles, the so-called Merry Monarch, who should perhaps be remembered as the greatest religious persecutor in English history.
헨리 8세, 에드워드 6세,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1세 또한 개신교 신자들을 죽음으로 몰고갔다. 당대 국교회가 허용하던 것보다 더 급진적인 믿음을 이유로. 게다가 엘리자베스는 200명의 가톨릭 신자들을 처형했는데, 이론상으론 반역죄이지만 실제로는 단지 가톨릭 신심 행위를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별개로 북부 백작들의 반란에 이어 일어난 처형 건수 수백명이 있다. 이후의 세기에, 찰스 2세의 정부는 누구든지 잉글랜드 국교회 외부의 예배에 참석하면 구금했다. 장로교회, 침례교회, 독립교회, 기타 개신교 내부의 [국교회] 반대자를 논외로 하더라도 400명을 넘는 퀘이커 신자들이 옥사했다. 주로 그들이 구금된 환경 때문이었다. 독자들이 더럽고 질질 끄는 최후가 모닥불에서의 몇분보다 더 괜찮다고 여길지는 선호의 문제다. 그렇다는 사람들에게는, 소위 'Merry Monarch'라 불리는 찰스 2세야말로 아마도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종교박해자로 기억될 것이다.
->- 《A Brief History of Britain 1485-1660: The Tudor and Stuart Dynasties》. Ronald Hutton

제프리 파커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메리 1세와 펠리페 2세의 가톨릭 부흥 계획은 상당히 성공적이어서, 메리 1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잉글랜드는 가톨릭으로 돌아왔을 가능성도 높았다고 보고 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 이후 가톨릭에 대해 잔혹한 탄압을 가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주장은 헨리 8세 시기와 엘리자베스 시기 종교개혁으로 순식간에 잉글랜드 교회가 가톨릭에서 벗어난 근거가 되기도 한다. Peter Cunich는 [52] 대중들이 느낀 상실감과 옛 전례에 대한 향수, 영적 공허감이 프로테스탄트의 이신칭의 교리와 예정설 등으로 채워지기까지는 수십 년 세월이 걸렸음을 지적한다. 잉글랜드의 개신교화는 대단히 점진적으로 진행되었으며, 메리는 단명하고 엘리자베스는 장수해서 잉글랜드에 성공회 정책을 오랫동안 펼 수 있었다.[53]

종교 외의 영역에서 메리의 가장 큰 업적은 헨리 8세 말년과 에드워드 6세 시대를 거치면서 엉망진창이 된 재정의 건전성을 회복한 것이다. 헨리 8세의 경우 수도원을 털어서 자금을 확보하기는 했지만 이를 대외전쟁에서 탕진했고, 에드워드 6세 치세에 서머셋 공작은 이러한 정책 기조를 그대로 유지했다. 메리는 재정기구의 간소화를 실시하여, 헨리 8세가 남겨놓은 정부 부처들을 통합하고 재조직했다. 잉글랜드 왕실의 재정기구는 장미전쟁 당시 만들어진 임시 체제의 상설화가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메리는 이 상황을 종식시켰고, 관세를 올려 수입원을 얻었으며 의회의 동의까지 얻어냈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 메리는 엘리자베스에게 늘어난 수입과 개선된 신용을 물려주는데 성공했다.

또한 부부 동군연합에 대한 무지 때문에 마치 메리가 펠리페를 위해 국익이고 뭐고 다 포기했다는 식으로 인식되고는 하지만, 메리의 결혼협상은 오히려 철저히 잉글랜드에 유리한 쪽으로 마무리되었다[54].

또한 메리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런던 시민들은 횃불을 들고 나와 축제를 벌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메리 사후 잉글랜드인들은
"저 양반이 잉글랜드에 자주 오지 않는 바람에, 폐하께서 상심하여 일찍 돌아가시게 되었다."
라며 펠리페 2세를 원망하기도 했다. 메리 역시도 현실을 살아간 정치가이고, 지지자와 비판자가 모두 있었다. 단편적인 일화만을 가지고 이야기를 짜깁기를 한다면, 1603년 엘리자베스의 사망 당시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55] 등만 짜깁기해도 '블러디 메리' 이야기와 비슷하게 '블러디 엘리자베스'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또한 메리의 시대에 스페인의 신앙이 광신적이었다는 말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반박이 가능하다.

파일:Helen_Rawlings_The_Spanish_Inquisition.jpg

여기서는 Helen Rawlings의 《The Spanish Inquisition》에서 표를 인용했다. <1540~1700 종교재판 통계>를 보면, 루터교, 이슬람교, 유대교, 유혹, 중혼, 교사죄, 미신 등등 다 합쳐서 1,604명이 종교재판으로 죽었고, 그 중 778명이 인형이었으며 826명이 사람이었다. 물론 스페인 종교재판이 처음에는 중구난방이었고 그래서 사형 건수가 상당히 발생했으며, Rawlings는 같은 저서에서 (재판이 처음 시작된 1481년부터) 1530년까지 사망자를 많게 잡아 2,000명이라고 추산했다. 그리고 사망자가 급격히 줄어든 것은 유대인 출신 개종자에 대한 의심이 줄어들고 재판이 체계화된 시기, 그러니까 표에서 보는 통계의 시기이다. 그러나 최소한 메리와 엘리자베스의 시대의 에스파냐가 "그 나라 군주와 부부동군연합을 맺으면 광신도가 되는 나라"로 취급될 이유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역사학자가 아니라 대중역사가이긴 하지만, 폴 존슨(Paul Johnson)의 《기독교의 역사》에 의하면 1590년부터 90년간 스코틀랜드에서 마녀로 지목되어 처형당한 사람은 4,400명으로 에스파냐보다 훨씬 심했다.[56]

5. 사후

한편 죽으면서 자신의 장지에 대해 피터버러에 있는 어머니 아라곤의 카탈리나의 무덤 곁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정말 남달랐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사실 아버지에 의해 어머니가 버림받는 경험과 자신까지도 버림받아 혼담이 깨지고 여러 고생하다가 복권된 후, 결국 숱한 위기 끝에 왕위에 오르나, 사랑하는 사람도 무관심했던 메리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유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유언은 실현되지 못한 채 결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됐는데, 그 옆자리가 다름 아닌 그녀가 그토록 애증의 대상으로 삼아왔던 여동생 엘리자베스 1세였다. 외나무다리에서 다시 만난 자매.

현재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메리 1세와 엘리자베스 1세 묘에 가보면, 두 자매의 애증이 드러나면서도 뭔가 초월한 것 같은 비문을 발견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 사후에 제임스 1세가 세우도록 한 이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Regno consortes et urna, hic obdormimus Elizabetha et Maria sorores, in spe resurrectionis
왕권과 무덤을 함께 공유한, 엘리자베스와 메리 두 자매가 여기 부활의 희망 속에 잠들었노라

웨스트민스터 측에서 현대에 부착한 안내문도 찾아볼 수 있다.
"메리와 엘리자베스의 묘 앞에서, 종교개혁 당시 서로 다른 신념에 의해 갈라져서 그리스도와 양심을 위해 목숨을 버린 이들을 기억합시다."
종교개혁 당시의 혼란스러운 역사속에서 굳이 어느 한 쪽이 더 도덕적 우위에 있지 않았음을 인정하고, 모두를 기억하려고 하는 오늘날의 영국 교회와 학계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한다.

6. 가족관계

6.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메리 1세
(Mary I)
<colbgcolor=#fff3e4,#331c00> 헨리 8세
(Henry VIII)
<colbgcolor=#ffffe4,#323300> 헨리 7세
(Henry VII)
제1대 리치먼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
(Edmund Tudor, 1st Earl of Richmond)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
(Lady Margaret Beaufort)
요크의 엘리자베스
(Elizabeth of York)
에드워드 4세
(Edward IV)
엘리자베스 우드빌
(Elizabeth Woodville)
아라곤의 카탈리나
(Catherine of Aragon)
페르난도 2세
(Ferdinand II)
추안 2세
(John II)
후아나 엔리케스
(Joanna EnrÍquez)
이사벨 1세
(Isabella I)
후안 2세
(John II)
포르투갈의 이자벨[57]
(Isabella of Portugal)

7. 이야깃거리

  • 흔히 " 메리 스튜어트"라 불리는 스튜어트 왕조의 여왕 메리도 스코틀랜드 여왕으로 부를 때는 "메리 1세"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묘하게도 두 명의 메리 1세는 재위 기간이 약간 겹치며 친척 관계이다.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는 메리 1세(메리 튜더)의 큰 고모(헨리 8세의 누나)인 마거릿 튜더가 스코틀랜드의 국왕 제임스 4세와 혼인해서 낳은 아들이 제임스 5세이고, 그 제임스 5세의 딸이 바로 메리 스튜어트이다. 즉, 메리 스튜어트는 메리 1세(메리 튜더)-엘리자베스 1세의 5촌 조카였다.
  • 참고로 메리 1세의 본명은 메리 튜더인데, 작은 고모(헨리 8세의 여동생)의 이름도 메리 튜더[58](1496~1533)이다. 헨리 8세가 여동생과 사이가 좋아서 딸에게 '메리'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하는데, 헷갈릴 수 있으니 주의.
  • 조선의 경종과 비슷한 점이 많다. 어머니의 출신이 이복동생의 어머니의 출신보다 좋았던 점, 어릴 적 잠깐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으나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이가 틀어지면서 박대받게 된 점, 이복 동생에 대한 애증, 재위 기간이 짧으며 자식을 남기지 못해 이복 동생이 왕위를 물려받았다는 점이 주로 거론된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아버지 헨리 8세 숙종에, 이복 여동생 엘리자베스 1세 영조에 자주 비유된다. 각 나라별 재위 기간도 비슷한 편이다.
  • 자신의 남동생보다도 짧은 재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남동생보다 훨씬 인지도가 높으며 역사적으로도 중요하게 받아들여진다. 반(反)종교개혁의 수장으로서 영국 역사의 방향을 영구히 돌려놓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로마 제국의 율리아누스 황제가 2년도 안 되는 재위기간에도 불구하고 역사가들에게 비중 있게 다뤄지는 것과 비슷하다.

8. 현대 매체에서

  • 스퀘어 에닉스의 RPG < 천지창조>에서도 '블러디 메리'라는 이름의 보스 몬스터가 등장한다. 단, 이쪽은 잉글랜드의 여왕이 아니라 스페인의 여왕이었다고. 작중에서는 아들 3명이 탐험을 위해 떠났다 차례로 죽자 미쳐버렸다고 한다.
  • 카카오페이지 로맨스 판타지??! 웹툰 《 렐름 오브 퀸 -여왕의 영역-》의 시즌2 주연이다. 시즌 2표지에서 거울 앞에 넘어져 있는 여성이 메리 1세, 거울 안에 비치는 당근색 머리의 여성이 엘리자베스 1세로 추정된다. 엘리자베스 1세의 이야기인 시즌 1이 로맨스를 위한 온갖 역사왜곡과 판타지적 요소 범벅이었던 것에 비해 시즌 2 메리 1세의 이야기는 의외로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 40화에 걸친 시즌 1에 비해 출하 당하느라 10화만에 완결내야해서 그랬을지도 전체연령가인데다 장르가 로맨스 판타지인 만큼 역사 타임라인 왜곡 요소가 있지만, 매 화별 삽입되는 역사 토막 상식 코너에서의 디테일한 고증은 오히려 잘 지켜졌다는 편. 댓글 또한 역사에 관한 토론이 주류를 이룬다.

8.1. < 튜더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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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인 배우 세라 볼거가 연기한 메리 튜더.

시즌 전체에 걸쳐 등장, 시즌 4에서는 주인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드라마의 한 축은 메리 튜더의 성장기이고, 그간의 블러디 메리의 이미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동생 엘리자베스보다 비중이 크고 아름답고 영민한 공주로 묘사된다. 시즌 4에서는 본격적으로 오프닝 크레딧까지 차지하는데, 이 오프닝 크레딧에서 묘하게 어머니 아라곤의 카탈리나와 겹치는 분위기다. 사실 오프닝 크레딧에서 메리가 들고 있는 묵주는 극중 어머니가 남긴 유품.

독실한 가톨릭 교도로, 어머니 카탈리나가 쫓겨난 후 어머니가 죽을 때까지 다시 보지 못하고 어머니의 유품을 받아들었을 때도 홀로 울다가 다시 자신을 다잡았고, 자신이 헨리 8세의 사생아라는 것을 끝까지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가 결국 서명을 하게 된다. 서명을 요구하러 온 프랜시스 브라이언이 "만약 저의 경우 제 자식이 이런 식으로 고집을 피우면 머리를 으깨버렸을 겁니다"라는 폭언을 할 정도였지만, 그 말에 떨면서도 굴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숨을 걱정한 스페인 대사 차푸이스의 충고에 끝내 고집을 꺾고 서명을 한 뒤엔 "평생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거에요"라고 중얼거린다.

이런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무슨 일이 있어도 당당하고 강단 있는 성격으로 그려지고, 극 중 왕비들과의 관계에서도 할 말은 하고 사는 공주. 특히 자신의 어머니를 내쫓은 왕비 앤 불린을 서녀 취급 받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그녀와 신경전을 벌였으며, 4번째 왕비인 클레베의 앤과는 종교가 다른 것 때문에 탐탁지 않아 했지만 앤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앤의 후임자이자 5번째 왕비인 캐서린 하워드가 왕비답지 않게 경박하다고 여겨 그녀에게 차갑게 대한다. 게다가 클레베의 앤을 밀어내고 캐서린 하워드와 결혼한 것은 자신의 어머니 아라곤의 카탈리나와 유사한 상황이였기 때문에 캐서린을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캐서린 하워드가 메리는 이제 자신의 의붓딸이니 서로를 존중하고 아껴주는 관계가 되길 원한다며 먼저 살갑게 다가갔음에도 그녀를 무시한다. 클레베의 앤이 궁에 방문했을 때에도 캐서린은 메리를 반갑게 맞이해주나 역시나 또 무시하고 이에 캐서린도 완전히 태도가 돌변하며 메리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음에도 결혼을 못했으므로 자신을 질투하는 것이며 평생 노처녀로 살게 될 것이라 폭언하며 메리의 하인 2명을 해고해버린다. 여러가지 이유로 캐서린이 탐탁지 않을 수 있지만 우선은 왕비 - 공주의 관계이므로 겉으로 위해주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옳은 대처였다. 캐서린 하워드를 살갑게 대해준 엘리자베스와는 대조적인 태도.

아버지인 헨리 8세의 애정을 되찾은 뒤에도 고난은 여전해서, 여러 번 혼담이 오가지만 프랑스 스페인간의 국제관계와 헨리의 변덕 때문에 줄줄이 엎어진다. 그 중에서도 클레베의 앤의 사촌 바이에른 공 필리프가 메리에게 구혼하러 오고 서로 첫눈에 반하지만, 필리프의 종교( 루터교)에 갈등하고 이미 앤과의 혼인을 무효화시키려고 마음 먹었던 헨리가 그를 돌려보내고 만다. 그래서 자신과 필리프는 이어질 수 없을 것이라고 안나에게 못박으면서도 슬퍼했다.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내심 결혼을 하고 싶은 소녀 같은 면모도 있는데, 위와 같이 계속 혼담이 파기되는 등 20대에 접어들어서도 결혼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상황에 초조함을 느끼며, 이것을 가지고 캐서린 하워드가 막말을 퍼붓자 끝내 참지 못하고 차푸이스 대사에게 털어놓고 울어버리는 여린 모습도 있다.

그녀의 어머니가 스페인 공주 출신이며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는 점 때문에 정치적으로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도 진정한 친구라 할 만한 사람은 잉글랜드 주재 스페인의 차푸이스 대사다. 어머니 캐서린이 살아있을 때부터 이 모녀를 도우려고 동분서주했고, 여러 가지에 힘들어하는 메리를 아버지처럼 따뜻하게 감싸주는 사람이다. 하지만 시즌 4에서 건강 악화로 대사직에서 물러나 스페인으로 돌아가고 얼마 후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60]

그런데 차푸이스가 스페인으로 돌아간다고 하자 메리가 말리면서 하는 말 중에 "만약 제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아이였다면 이런 일들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잉글랜드는 여전히 신심이 두터웠을 텐데"가 있다. 훗날 메리가 즉위한 후 행한 가톨릭 복권과 개신교 탄압, 즉 블러디 메리가 되는 복선이라고 할 수있다. 메리는 헨리 8세의 종교개혁자신이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자신 때문에 일어난 모든 것을 되돌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것. 차푸이스의 앞에서 '잉글랜드를 다시 신앙심이 강하게 만들겠다'라고 맹세한다.

이후 잉글랜드를 떠난 차푸이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뒤, 자신이 완전히 홀로 남았다고 생각한 메리는 스티븐 가드너 주교 등의 조력자들을 만나게 되지만 이 때부터 이전보다 차가운 인상이 되어버린다. 한가지 예로 비교적 친하게 지냈던 헨리의 6번째 왕비 캐서린 파가 개신교도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안 뒤로는 냉랭한 기류가 감돈다.

하지만 여동생 엘리자베스와 남동생 에드워드에게는 계속 다정한 누이이자 언니인 면도 있다. 앤 불린의 핍박으로 엘리자베스의 시녀가 되었을 때에도 어린 아기인 그녀를 살뜰히 챙겨주었던 것을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인 엘리자베스를 앤 불린과 연관지어 증오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듯 하다. 대인배 그리고 시즌 4에서 어린 에드워드 6세가 갑자기 고열에 시달리자 울며 '제 남동생을 살려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였다.[61] 그러나 차푸이스와 가톨릭 사제가 은밀하게 남동생 에드워드를 제치고 메리의 계승을 시도한다고 하자 묘한 웃음을 지으며 지지한다.[62]

개신교 성향의 캐서린 파 덕분에 헨리 8세에 의해 계승권을 다시 회복했을 때는, 미묘하지만 엘리자베스에게 자신과 마찬가지로 "너 역시 여왕이 될 것"이라고 농담조로 다정히 말하기도 했다. 다만 결혼을 간절히 원하는 자신과는 반대로 엘리자베스는 '캐서린 하워드에게 있었던 일 때문에 결혼하지 않기로 했어요'라고 진지하게 고백했는데, 이 고백을 듣고 상당히 복잡한 심경이 담긴 표정을 짓는다.

8.2. 영화 < 엘리자베스>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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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배우 캐시 버크가 연기한 메리 튜더.

여기서는 '블러디 메리' 설을 차용해서인지 과대망상증 신경쇠약에 시달리는 중증의 살인광으로 그려진다. 덤으로 초상화처럼 주름투성이로 나온다. 본래 이 영화가 처음 개봉했을 때도 지나친 반가톨릭주의적 묘사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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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펠리페 2세를 열렬히 사랑하여 결혼한 뒤 그의 아이를 갖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나, 펠리페의 사랑을 얻지 못하여 정신병에 걸려버린 측은한 사정의 여왕으로 나온다. 독실한 로마 가톨릭 교도로, 개신교를 믿는 백성들을 마구잡이로 탄압하고 이복동생인 엘리자베스까지 처형대에 매달려고 한다.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간곡하게 용서를 빌어 차마 사형 집행장에 서명을 하지는 못한다. 이후 엘리자베스에게 "내가 죽고 난 뒤 잉글랜드에서 가톨릭을 말살하지 말라"고 부탁하는 인간적인 면모도 보인다. 엘리자베스를 견제하는 노퍽 공작 세력은 메리 여왕에게 엘리자베스를 처형할 것을 강력히 청원하나, 이를 기각하고는 엘리자베스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사망하면서 엘리자베스에게 마지막 자비를 베푼다.

이 영화가 처음 개봉했을 때도 지나친 반가톨릭주의적 묘사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감독은 처음에는 "역사를 충실히 재현한 것"이라고 강변하다가, 학자들의 비판까지 받자 "재미를 위해 각색한 면이 있다"며 슬쩍 빠져나갔다. 튜더 시대사 전공자들은 2009년에 역사의 영화화를 다룬 책에서 다시 이 영화의 역사왜곡을 강력하게 비판한바 있다.

8.3. 드라마 < 울프 홀>

3화에서 어머니와 딱 한 장면 등장한다. 젊은 배우 릴리 레서가 맡았는데 본 드라마에서 토마스 모어를 맡고 <왕좌의 게임>에서 콰이번을 맡은 앤턴 레서의 딸이다. 실제 역사처럼 생리불순이 심해서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교회의 지도자로서 교황의 위치를 믿어 의심치 않는 가톨릭 신자로서의 모습을 잘 묘사했다. 생리불순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꼿꼿이 서있는 메리를 위해서 주인공인 토마스 크롬웰이 의자를 권하고 메리는 그런 크롬웰을 좋게 보는 묘사, 그리고 이후 에피소드에서 메리가 토마스 크롬웰을 괜찮게 생각한다는 앤 불린의 대사가 나오는데 아마 실제 역사에서 토마스 크롬웰이 사형당할 때 메리를 유혹했다는 죄목의 복선이 아닐까 한다.

[1] 칼레는 백년전쟁 당시 잉글랜드에 의해 함락된 프랑스의 항구로, 백년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잉글랜드 국왕이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메리 1세 시절, 남편이던 스페인 펠리페 2세가 프랑스와의 전쟁을 시작하자 메리 1세 역시 남편을 위해 프랑스와 전쟁을 개시했는데, 결국 잉글랜드군이 패배하여 1558년 1월 7일, 211년 만에 칼레는 도로 프랑스에 돌아갔다. 칼레는 당시 잉글랜드의 마지막 대륙 영토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주력 수출품인 양모의 집산지로서 걷히는 관세가 왕실 재정 수입의 35%를 차지했기에, 경제적 의미가 더 컸다. 당시 별명이 잉글랜드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일 정도였다. 함락으로 충격에 빠진 메리 1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고, 그해 말에 사망했다. [2] 하지만 위키피디아 영어판엔 칼레가 영국에 재정적으로 부담이 되었고, 자존심의 문제였다고 쓰여있다. 이 말도 허위일 가능성이 있다고. [3] 프린세스 오브 웨일스는 대개 영국의 왕세자비에게 부여하는 칭호이지만, 왕위를 물려받을 왕세녀라는 뜻도 된다. 영국을 비롯해 유럽 대부분의 입헌군주국에서 왕위 계승의 법칙이 절대적 맏이 상속제로 바뀐 요즘에는 왕의 맏이라면 딸이어도 왕세녀가 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저 당시에는 잉글랜드에 단 한 번도 여왕이 즉위한 적이 없었다. (위에서 나온 마틸다의 경우, 정식 대관식을 치르지 않았기에 군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 메리와 그녀의 이복 여동생인 엘리자베스 1세를 제외하면 이후 지금까지 그 어떤 영국의 여왕도, 심지어 엘리자베스 2세조차 왕위 추정상속인이었기에, '프린세스 오브 웨일스'의 칭호를 받지 못했다. [4] 가톨릭에서는 이혼을 인정하지 않고, 다만 몇 가지 경우 '혼인무효'는 가능하다. 혼인성사 참조. [5] 실제 메리 1세의 혈통만은 당대 유럽 공주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화려했다. 메리의 아버지는 잉글랜드의 왕이요, 어머니는 카스티야-레온 왕국 여왕의 딸이자 아라곤 국왕의 딸이었으니, 말 그대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으로 국왕 바로 아래로 대우받는 초호화 로열 블러드였다. [6] 이는 결정적으로 토머스 울지 추기경의 실각 사유가 된다. [7] 헨리 8세 시절에 가톨릭 교리대로 <수장령>을 부인하면 이단죄가 아닌 반역죄 명분으로 진작에 처형당하니, 가톨릭 신자라기보다는 친 가톨릭 성향이라 붙인다. [8] 한참 미래의 일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스튜어트 왕조의 제임스 2세는 종교 문제로 신하들과 갈등을 겪다가 자신의 장녀인 메리 2세를 내세운 신하들에 인해 폐위당했다(명예혁명). 이 경우 제임스 2세 쪽이 가톨릭, 메리 2세 쪽이 개신교였기는 하지만. [9] 문장에 스페인 제국의 문장과 독수리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다름 아닌 남편 때문이다. [10] 중간에 있는 라틴어 문구 “Veritas Temporis Filla”는 ‘진실은 시간의 딸’이란 뜻이다. [11] 제인 시모어의 오빠. [12] 다만 노섬벌랜드 공작은 시모어를 실각시키기 위해 가톨릭 세력과 손을 잡았었다. [13] 메리는 선왕 헨리 8세의 적장녀이자 튜더 왕조의 몇 남지 않은 직계 후손이었고, 제인 그레이는 그저 헨리 8세의 여동생 메리 튜더의 외손녀인 방계 왕족일 뿐이'었'다. [14] 아이러니하게도 이복 언니 못지않게 불행하게 지냈던 엘리자베스 1세는 정반대로 생기가 넘치고 상냥한 성격으로 주변을 밝게 하여 호감을 샀으며, 언니와 달리 잘생긴 여장부 외모이긴 했어도 본인이 외모 관리에 무지 신경 쓰며 아름답게 보이려고 노력했다. 나중에는 이게 지나쳐 허영으로 도지지만. 특히 언니처럼 뒤늦게 교육을 받긴 했으나 본인이 워낙 공부를 좋아하고 열중하여, 각종 고전을 섭렵하는 것은 물론 6개 국어에 통달할 정도였다. [15] 도싯 후작이자 제인 그레이의 아버지. [16] 제인 그레이의 옹립에 앞장섰다가 상황이 불리해지자 메리 진영으로 탈주했던 귀족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제인의 처형을 주장했다(…). [17] 사실 단순히 혈연이라서 보호했다기보다는 제인 그레이 항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제인은 여왕으로 옹립되었을 때 고작 16세였고 자기가 원해서 여왕이 된 것도 아니었다. 일설에 의하면 자기가 왕이 되었다는 소식에 실신했다가 "정당한 왕위 계승자는 내가 아니라 메리다"라고 외쳐대며 울고 불고 하는 걸 막장 부모가 끌고 가서 승낙할 때까지 두들겨 패서(!) 억지로 즉위시켰다는 기록까지 있을 정도다. 다만 당연하게도 제인 그레이를 왕위에 올린건 막장 부모가 아니라 전대 왕인 에드워드 6세다. 원인은 메리 1세의 종교가 가톨릭이기 때문. [18] 참고로 레지널드 폴은 메리와 각별한 관계였던 가정교사 마거릿 폴의 둘째 아들이었다. 메리의 아버지 헨리 8세는 마거릿 폴의 가문이 플랜태저넷 왕조의 혈통을 잇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경계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거릿 폴과 그 가족 모두가 메리 만큼이나 가톨릭 신앙에 열성적이었고, 레지널드 폴이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카탈리나(메리 1세의 생모)의 이혼에 적극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에, 레지널드 폴을 제외한 마거릿 폴 일가를 모두 반역 죄인으로 몰아 처형했다. 당시 레지널드 폴은 해외에 망명 중이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19] 헨리 8세의 어머니이자 에드워드 4세의 장녀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여동생의 손자로, 헨리 8세의 5촌 조카이자 메리 1세의 6촌이기도 하다. 종교 문제로 인해 집안이 10세때부터 런던탑에 15년이나 감금된 적도 있었다. [20] 메리의 어머니인 아라곤의 카탈리나의 바로 윗 언니가 펠리페의 친할머니인 후아나였다. [21] 특히 펠리페 2세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결혼을 이용해서 차지한 영토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스페인 왕위만 해도 펠리페 2세의 할아버지인 펠리페 1세가 카스티야 왕국의 왕녀 후아나와 결혼해서 합스부르크 왕가로 넘어온 것이었다. [22] 정작 펠리페 2세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했으나, 메리가 어릴 때 스페인 출신인 어머니 아라곤의 카탈리나에게서 받은 교육으로 스페인어를 잘해서 남편과는 스페인어로 얘기한 터라, 부부간의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특히 메리는 스페인어 뿐만 아니라 프랑스어 라틴어도 자유롭게 구사할 줄 알았다. 앞에서는 학식이 높지 못하다고 다만 왕, 즉 정치인으로서의 학식과 외국어에 능통한 것은 다른 일이다. 안 가르쳤다며 [23] 메리는 어떻게든 제인을 살려보려고 노력했지만, 신하들의 반발로 처형하는 걸 보게 된다. [24] 가톨릭의 복녀 마거릿 폴의 차남이다. 솔즈베리 백작부인 마거릿 폴은 과거 메리 1세의 가정교사였는데, 헨리 8세의 이혼 및 반 가톨릭 기조에 반대하다가 미움을 사서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참수당했다. [25] 이후에 가톨릭으로서 마지막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다. [26] 기즈 공작은 스코틀랜드의 국왕 제임스 5세의 왕비이자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의 생모인 마리 드 기즈의 남동생이었다. [27] 사실 이는 펠리페 2세가 벌인 전쟁으로 스페인의 재정이 파산 상태에 직면한 터라, 펠리페 2세로서는 강화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28] 당시 칼레는 잉글랜드의 주요 수출품인 양모 거래의 중심지였다. [29] 칼레를 잃은 것이 어지간히 충격이었던지, 이미 이전부터 병상에 누워 있던 메리 1세는 신하들에게 "짐이 죽어서 해부된다면, 그대들은 짐의 심장에 펠리페칼레라는 두 단어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메리 1세가 승하한 것은 칼레 함락 소식이 그녀에게 전해지고 10개월 뒤의 일이었다. [30] 다만 영국 왕위 계승 법칙이 이로부터 400년이 훨씬 지난 21세기에야 절대적 맏이 상속으로 바뀐 걸 생각하면, 그 시대에는 그래도 기왕이면 아들을 낳아서 왕위를 잇게 한단 생각이 너무도 당연했을 것이다. [31] 이와 비슷하게 한때는 교황으로부터 ' 가톨릭의 수호자'라는 별명까지 받을 정도로 가톨릭 신앙에 매우 열심이다가 수틀리자 아예 자기 자신을 수장으로 하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내 국내외의 종교적 혼란을 더욱 극대화하는 등, 한마디로 뭐든 자기 마음대로 되어야만 하는 다혈질이면서도 냉혹하고 지극히 변덕이 심한 성격이었다. 결국 '새 애인 앤 불린을 정식 왕비로 앉히고 장차 앤이 낳을 아들을 왕위계승자로 만들어야겠다'란 헨리 8세 개인의 사사로운 욕망에서 이 사달까지 난 것이다. 그래놓고 이것도 자기 뜻대로 안 풀리는 듯하자 앤 불린이 엘리자베스 다음으로 아들을 낳긴 했지만 사산, 즉 죽어서 태어났다고 한다 역시나 또 변심의 왕답게, 한 때는 그토록 사랑했던 앤 불린을 왕비로 만든 지 고작 3년도 안 돼서(!) 온갖 죄목을 붙여 처형한다. [32] 펠리페 2세가 정식으로 스페인 왕이 된 건 메리와 결혼한 후 2년 뒤인데, 왕이 되어 바쁘기 전에도 메리에게 마음이 없었던 탓에 잉글랜드에 잘 오지 않았다. [33] 이로 인해 안 그래도 이쁘지 않던 외모에 인상까지 나빠지는 바람에 못생겼다는 인상을 주어, 본인의 이미지를 깎아 먹었다. 이 때문에 아주 뛰어난 미인은 아니었으나 나름대로 외모 관리를 하는 편에다 스타일이 좋고 활달하며 자신감이 넘치는 성격으로 주변의 호감을 산 이복여동생인 엘리자베스 1세와도 대조됐다고 한다. 오죽하면 메리 1세의 남편이던 시절에 엘리자베스 1세를 형부와 처제 사이로 처음 만난 펠리페 2세는 그녀의 당당함에 끌렸고, 그래서 훗날 정치적, 외교적인 이유 뿐만 아니라 사심으로도 옛 처제인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청혼했다는 야사가 있을 정도이다. 물론 엘리자베스 1세는 거절했다. [34] 의외로 메리 1세와 나이 차이가 꽤 난다. 대략 17살 차이. 메리는 헨리 8세의 치세 초기에 태어난 장녀이고, 엘리자베스는 헨리 8세가 앤 불린과 정을 통한 후에도 한참 지나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35] 메리 1세와 나이 차이는 대략 21살. [36] 엘리자베스 치세를 초기로 한정한 이유는 에드워드(6년)나 메리(5년)에 비해 훨씬 오래 재위(45년)했기 때문이다. 한편 유언장을 조사한 이유가 의아할 수 있는데, 튜더 시대 잉글랜드는 소수의 열렬한 특정 교단 신자들과 대다수의 방관자들로 구성되어있기에 정확한 종교 통계를 위해선 당대인들이 남긴 유언장에 어떤 신심이 들어가있는지를 조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37] 워릭 대학교 역사학 교수. 근세 초기의 영국 및 유럽의 종교적인 믿음과 관습의 변화, 그 중에서도 특히 잉글랜드 종교개혁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다. [38] Susan Doran, Thomas Betteridge, Thomas S. Freeman, Tresa Grant, Victor Houliston, Paulina Kewes, Aysha Pollnitz, Judith M. Rechards, Andrew W. Taylor, William Wiseman SJ [39] 그 결과 프랑스에서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 벌어졌고, 독일에서는 30년 전쟁이 벌어졌다. [40] 가톨릭 전례를 상당부분 유지했다고 해도 대중의 신심 행위 상당부분이 폐지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고, 헨리 8세 이후 에드워드 6세 치하의 짧지만 급진적인 개신교화 정책의 영향도 컸다. [41] 이 여성의 집은 현재 ' 순교자의 집'으로 지정되어 있어, 요크에 갈 경우 방문이 가능하다. [42] 엘리자베스 1세의 군대가 아일랜드 수도자들을 학살한 것과 같다. [43] 자신을 왕위에 옹립하려는 음모를 전해듣고 기겁하며 "적법한 계승자는 메리 왕녀"라고 외치는 것을, 모친 프랜시스 브랜든이 방에 감금하고 즉위에 동의할 때까지 매질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44] 한편 제인의 아버지 헨리 그레이는 반역죄로 처형되었고 메리 1세의 고종사촌이기도 한 제인의 어머니 프랜시스 그레이(혼전명 프랜시스 브랜든)는 결국 사면을 받고 재혼해서 잘 먹고 잘 살았다. 그래도 재산을 몰수당하는 벌을 받기는 했고 재혼한 남편과의 사이에서 가진 자식들은 모두 사산되거나 요절했으며 제인의 동생들인 나머지 두 딸들 캐서린 메리로부터도 의절을 당했다. [45] 즉 식자층 또는 학식이 깊은 지식인이든 도시인이든 프로테스탄트는 분명히 소수였다. [46] 잉글랜드의 섬유산업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발전한 역사는 장하준, 나쁜 사마리아인, 부키 참조 [47] 이를 말한 문학작품이 잉글랜드의 석학중 한 분인 토머스 모어가 쓴 《 유토피아》(주경철 옮김, 을유문화사)이다. 토머스 모어는 인클로저 운동으로 농민들이 땅을 잃고 도시빈곤층이 된 역사를 "순한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라고 비판했다. [48] J.J. Scarisbrick, 《Henry VIII》 (1997) [49] 영국 워릭 대학 역사학과 교수. 주 분야는 종교개혁시기의 잉글랜드로, 저서로는 《Reformation England 1480-1642》, 《Religious Identities in Henrry VIII's England》, 편저로 《The Oxford Illustrated History of the Reformation》, 《Angels in the Early Modern World》 등이 있다. [50] 와이어트 반란은 프로테스탄트가 중심이 되었으나, 종교를 직접적인 명분으로 내걸지는 않았다. [51] Ronald Hutton, 《A Brief History of Britain 1485-1660》 (London, 2010). [52] Peter Cunich, 《The Dissolutions and their Aftermath, in A Companion to Tudor Britain》 [53] 단, 설령 메리가 엘리자베스처럼 장수해서 아들을 낳았더라도 잉글랜드가 가톨릭 국가로 남았을지는 단언할 수 없다. 일단 메리 시대까지만 해도 런던의 성공회 신자 비율이 반도 못 채울 정도였기 때문에 단기적으로는 가톨릭이 부흥했을지라도, 장기적으로는 여전히 잉글랜드 신학자들과 대중들 사이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라틴어 가톨릭 교리에 대한 회의감으로 서서히, 그러나 꾸준히 프로테스탄트 사상이 퍼지고 있었고, 메리 사후에는 종교 개혁이 재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54] 《Ronald Hutton, A Brief History of Britain 1485-1660》 (London, 2010) [55] 출처: Barry Coward and Peter Gaunt, 《The Stuart Age England 1603-1714》 (London, 2017) [56] 참고로 스코틀랜드는 개신교 국가 중에서 마녀사냥으로 인한 피해가 가장 큰 국가이다. 가톨릭 국가 중에서는 독일 남부가 가장 심했다. [57] 주앙 1세의 손녀이다. [58] 제인 그레이의 외조모, 즉 제인의 막장 모친 프랜시스 브랜든의 어머니가 바로 이 사람이다. [59] 만약 그녀가 머글 태생이라면 튜더 왕조에도 마법사 조상이 하나쯤은 있다는 뜻이 되고, 혼혈이라면 그녀의 어머니 아라곤의 카탈리나는 마법사라는 말이 된다. [60] 실제로는 스페인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10년 후에나 죽었다고 한다. 마가렛 공주에 이어 또다른 커다란 옥의 티(…) [61] 여담이지만 이때 당시 왕비였던 캐서린 하워드는 시종인 컬페퍼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 [62] 에드워드 왕자의 친모 제인 시모어가 왕비로서의 대관식을 거행하지 않은 채, '국왕의 배우자' 자격만을 가진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죽었기 때문에, 법적으로 에드워드의 왕위 계승에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