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000000 0%, #33414A 20%, #33414A 80%, #000000); color: #40E0D0"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초대 | 제2대 | 제3대 | ||
스벤 트베스케그 | 크누트 대왕 | 하레크누드 | |||
}}}}}}}}}}}} |
북해 제국 제2대 국왕
크누트 대왕 Cnut the Great |
||||
|
||||
<colbgcolor=#33414A><colcolor=#40E0D0> 본명 |
크누트 Cnut[1], 혹은 Canute |
|||
출생 | 990년 | |||
덴마크 왕국 | ||||
사망 | 1035년 11월 12일 (향년 45세) | |||
잉글랜드 도싯 샤프츠베리 | ||||
재위 기간 | 잉글랜드 국왕 | |||
1016년 ~ 1035년 (약 20년) | ||||
덴마크 국왕 | ||||
1018년 ~ 1035년 (약 17년) | ||||
노르웨이 국왕 | ||||
1028년 ~ 1035년 (약 8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33414A><colcolor=#40E0D0> 아버지 | 스벤 트베스케그 | ||
배우자 | 노샘프턴의 엘프기푸(Ælfgifu) | |||
노르망디의 엠마 (1017년 결혼) | ||||
자녀 | 하레크누드, 해럴드 1세, 스베인 크누트손 | }}}}}}}}} |
[clearfix]
1. 개요
덴마크 크누트 왕조의 제5대 국왕, 노르웨이 크누트 왕조의 제3대 국왕, 잉글랜드 크누트 왕조의 제2대 국왕이다.덴마크, 노르웨이, 잉글랜드를 하나로 통합함으로서 앵글로-스칸디나비아 제국을 세운 대왕이었다.
2. 표기
언어별 명칭 | |
고대 노르드어 | Knútr inn ríki |
고대 영어 | Cnut se Micela |
덴마크어 | Knud den Store |
노르웨이어 | Knut den mektige |
아이슬란드어 | Knútur ríki |
영어 | Cnut the Great |
3. 일생
3.1. 즉위 이전
덴마크의 왕 스벤 1세 트베스캐그와 폴란드 공작 미에슈코 1세의 딸 시비엥토스와바의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크누트는 아버지 스벤 1세와 함께 잉글랜드 정복전에서 맹활약했다. 1014년 2월 아버지가 승하하자 1015년에 옛 덴마크 바이킹( 데인족)이 상당 부분을 지배했던 것( 데인로)을 명분으로 삼으며, 잉글랜드를 다시 침공하여 에드먼드 2세를 몰아내고 왕위를 손에 넣었다.3.2. 치세
[2]
뒤를 이어 형 하랄 2세가 승하하자 덴마크 왕위도 물려받아 덴마크 국왕 '크누드 2세'로 즉위했다. '크누드 1세'가 아닌 이유는 고름 왕 이전의 전설속 군주들 중 '하르다크누드'(또는 크누드)[3]라는 왕이 이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 1028년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일부, 스코틀랜드의 일부도 정복했다. 이로써 크누트는 당대 영국에서 스칸디나비아 반도까지 걸쳐 있고, 북해를 마레 노스트룸[4]으로 삼다시피 한 앵글로-스칸디나비아 대제국[5]을 건설했다.
3.3. 사망
1035년 잉글랜드 도싯의 샤프츠베리에서 승하했다. 시신은 올드민스터 사원에 묻혔으나 노르만 정복 이후에 임명된 첫 번째 윈체스터 주교였던 왈켈린(Walkelin)이 철거해버렸다. 대신 옆에 새 성당을 지은 뒤 크누트를 포함해 묻혀있는 유해들을 수습해 이장했다.중세라고는 하나 국왕으로서는 꽤 이른 45세로 사망했기에 대제국이 분열되면서 크누트의 영광은 당대에 그치고 말았다. 슬하에 아들이 세 명 있었으나 세 아들 모두 20대를 넘기지 못하고 요절했기 때문에 막내 아들인 하레크누드가 덴마크와 잉글랜드의 왕위를 물려받았지만 하레크누드 역시 자식 없이 사망하며 크누트 왕조는 단절되었고, 덴마크 왕위는 외조카 스벤[6]이 물려받았다.
4. 가족
아직 북유럽의 기독교화가 완전히 되지 않은 시대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일부다처제의 전통에 따라 왕비가 두 명이었다. 첫 번째 왕비는 잉글랜드 귀족인 노샘프턴의 엘프기푸(Ælfgifu)로 장남인 잉글랜드의 해럴드 1세와 차남인 노르웨이의 스베인[7]을 낳았다.두 번째 왕비는 애설레드 2세의 왕비였던 노르망디의 엠마로 3남인 덴마크의 하레크누드를 낳았다. 엠마와 애설레드 2세의 아들인 참회왕 에드워드는 이부동생인 하레크누드가 승하한 후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5. 기타
그의 영어 이름 Canute에서 온 단어인 Canutism은 변화에 대해 끝까지 저항하려는 완고한 태도를 뜻하는데, 유래가 된 일화가 있다. 크누트가 신하들을 데리고 어느 바닷가에 갔는데, 파도가 밀려오는 곳에 작은 의자를 놓고 앉아 파도에게 자신의 땅을 깎아내는 것을 꾸짖었고, 내 발과 옷을 적시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래도 파도는 계속 밀려왔고, 크누트는 파도조차 멈출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을 깨달으며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한다.다만 크누트는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이미 기독교도였다. 이는 조부인 하랄 1세 블로탄의 기독교 개종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하랄 1세가 아들인 스벤 트베스케그에게 패배해 독일로 망명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스벤이 북유럽 이교 신앙을 부활시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6. 대중매체에서
6.1. 빈란드 사가
|
|
|
|
실존인물로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스벤 왕의 차남이자 덴마크 제2왕자. 래그널이 양육을 전담했으며 바이킹들의 왕인 덴마크 왕의 자식답지 않게 여리고 소심하게 자랐다. 적어도 왕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덴마크 제2왕위계승권을 가진 그의 존재자체가 덴마크의 국론을 분열시켰으며 부왕인 스벤 왕은 크누트보다 더 왕위에 어울리는 장남 해럴드의 후계구도를 안정시키기 위해 차남인 크누트를 제거하려 한다. 이 때문에 승부가 나지 않는 런던 공략의 지휘관으로 임명,
4천의 군세를 맡겼으나 이 군대는 토르켈 부대에 의해 궤멸되었고 크누트는 후견인인 래그널과 가정교사인 빌바르도 신부와 함께 포로가 된다. 이후 그의 신병을 둘러싸고 각자 목적을 가진 세력들의 다툼에 휘말려 든다. 아셰라드는 토르켈에게 잡혀있던 크누트를 빼앗아와 스벤 왕에게 데려가려고 한다. 래그널의 과보호 때문에 타인과 제대로 말도 못하고 왕족의 위엄도 전혀 없었는데, 이 혼란 중에 각성하여 진정한 왕자로 거듭난다. 오히려 자신을 서로 갖기 위해 다투는 두 세력, 아셰라드와[8] 토르켈 세력을 모두 자신의 휘하에 거두고는 부왕을 찾아간다.
아셰라드의 계책[9]에 의해 부왕 사후 잉글랜드 통치대행을 선언하며 군권을 장악, 3년 만에 잉글랜드 정복을 완료한다.
덤으로 아셰라드의 죽음에 이성을 잃고 자신에게 칼을 휘둘러 뺨에 상처를 남긴 토르핀 카를세프니를 노예로 파는 것으로 그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원래는 왕자 살해미수죄[10]로 바로 죽일 수도 있고 갖은 고문 끝에 공개처형을 당할 만한 상황에서 토르핀을 살려준 셈.
이후의 행보는, 반대 세력에 대한 잔혹한 숙청과 원정을 다니면서, 이전의 유약한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는 냉혹한 군주의 모습을 보여주며, 왕권을 강화해 나가고 있다. 자신에게 반대하지 않거나 항복하는 자에게는 나름 넓은 관용을 베풀지만, 반항하는 자에게는 가차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득을 위해서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이도 가차없이 제거하는데, 하물며 자신의 친형까지도 제거해 자식없는 형으로부터 영토를 물려받았고, 형에 이어 자신에게도 충성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케틸의 막대한 재산을 노리고 어거지 누명을 씌워 제거하려고 했다. 육체적으로도 상당히 갈고 닦아서 근위대 출신인 토르길 같은 강력한 전사의 기습공격도 막아낼 정도의 검술 실력을 갖추었다.
참고로 크누트를 죽은 척하려는 작전을 짤 때 그의 외모가 여성스러워서 그를 닮은 여자 노예를 이용했다. 하지만 3년이 지났을 때 모습은 짧은 머리에 수염을 길러서 여성스러운 면이 확 사라졌다.
왕이니 만큼 토르켈을 부하로 부리고 있지만, 둘의 관계는 살짝 묘하다. 토르켈이 크누트를 따르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진정한 왕의 길을 지켜보기 위함이다. 토르켈이 다들 보는 앞에서 아직 왕도 아닌 애송이라고 꾸짖는 장면은 단순한 상하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도 있음을 알려준다. 크누트도 저런 토르켈을 인정하면서 한편으로 토르켈을 최대한 이용하려고 한다.
6.1.1. 사랑에 대한 깨달음과 그에 따른 각성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 왕다운 모습의 인격을 각성하는 부분이 좀 난해한데, 사실 깊이 생각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부분이다.일단 기독교적 관점에서 사랑이란 나 아닌 다른 존재의 입장을 내 입장과 같은 가치를 갖고 대하는 것이다. 이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네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잘 드러난다. 이것이 어째서 가치 있는 가르침인가 하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동물이어서 한정된 자원을 두고 경쟁이 일어나거나 입장이 다른 상대를 만났을 때 힘과 싸움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싸움은 비효율과 비극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며, 관련된 모든 사람을 매우 불행하게 만든다. 크누트가 보는 세상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상태로써 끊임없이 싸움이 지속되고 있다. 모든 상황에서 싸움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으며, 모두가 각자의 이득만을 추구한다.
사랑은 이러한 싸움을 피하기 위한 매우 효율적인 대안이다. 상대가 나의 득실을 존중해주고 나 또한 상대의 득실을 존중한다는 상호 신뢰가 있을 때, 두 사람은 서로 싸우기보단 협력하여 더 나은 대안을 선택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죄수의 딜레마가 적용되지 않는다. 이것이 사회 전체 규모에서 실현되면 사회는 끝없는 파괴 대신 끝없는 번영을 이루어 급속도로 발전을 이룬다.
작중에서 크누트 왕자와 빌바르도 신부가 말하는 진정한 사랑이란 차별없이, 싸우거나 빼앗지 않고, 아낌없이 주는 것을 말한다. 그들은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를 짓밟거나 희생하는 행위는 사랑이 아닌 차별이라고 본다. 하지만 이는 무생물이나 가능한 것으로,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차별은 가능하지만 사랑은 불가능한 존재이다. 그래서 끝없이 서로 싸우고 빼앗는다. 그래서 그가 본 세상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이는 크나큰 비극이므로, 크누트 왕자는 모든 싸움에서 이겨 절대자의 힘을 갖춤으로써 무의미한 싸움의 종결을 강제하고자 마음먹는다. 이것이 그가 생각하는 지상낙원의 실현이다.
하지만 만화 내에서 너무 간략하게 설명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 후 크누트가 자신의 지상낙원을 이룩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모략과 권모술수들에 의해서 그 자신도 점점 피곤하고 힘들어지는 상태. 자신의 형을 독살하였고, 겉으로는 사람들을 죽이면서도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였지만 내면은 점점 썩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자신과는 다른 방식으로 같은 이상을 이루고자 떠나는 토르핀을 보고 오랜만에 한번 시원하게 웃는다. 이후 잉글랜드에 주둔 중인 덴마크군을 일부만 남기고 해산, 올바른 통치를 하면서 잉글랜드인들에게도 진정한 왕으로 인정 받아 충성을 받는다.[11][12]
6.2. 바이킹스 : 발할라
영국 웨일스 출신 배우 브래들리 프리가드가 맡았다. 시즌 1의 바이킹 대군세를 이끈 왕으로서, 본인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지만, 기독교 바이킹과 북구 신앙 바이킹의 공존을 추구하며 내부의 신앙적 충돌을 막고 " 바이킹"이란 정체성으로 통합하여 잉글랜드 정벌을 주도한다.6.3. 문명 시리즈
문명 2에서는 군느힐드 코눙가모디르와 함께 바이킹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문명 3에서는 바이킹 문명의 군사 지도자로 등장하며, 문명 6에서는 정규 게임은 아니고 시나리오《 바이킹, 상인과 침략자!》에서 덴마크 팩션 지도자로 등장한다. 아쉽게도 덴마크 팩션은 본편에선 노르웨이, 스웨덴에게 밀려서 등장하지 않는다.
[1]
덴마크어로는 Knud,
노르웨이어 /
스웨덴어로는 Knut
[2]
북해 제국이라 불리기도 한 그의 광활한 영토이다. 붉은색이 직할 영토이며, 주황색은
조공국, 노란색은
동맹국이다.
[3]
크누드 왕조의 첫 번째 왕인 고름의 아버지라고 한다.
[4]
우리들의 바다라는 뜻의
라틴어이다. 원래는
지중해를 의미하는 단어로,
로마 제국이 존재하던 시절엔 지중해에 맞닿은 모든 영토가 로마의 땅이었기에 지중해를 이렇게 불렀다.
[5]
북해 제국이라고 불린다.
[6]
여동생
에스트리드 스벤스다테르의 아들.
[7]
스베인 크누트손. 1030년에 아버지 크누트 대왕에 의해 노르웨이 국왕으로 임명되었으나 폭정을 펼쳐 금방 쫓겨났고, 망누스 1세가 노르웨이의 왕위를 차지했다.
[8]
당시 아셰라드 군단은 자멸하여, 모두 전멸하고,
아셰라드,
토르핀,
비요른만 남았다. 비요른도 중상을 입었고 얼마 안가 사망하였다. 애니메이션 판에선 아셰라드가 비요른의 요청을 받아 그를 죽인다.
[9]
처음부터 스벤 왕의 암살을 계획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며 때를 기다리다가 스벤 왕이 자신을 궁지로 몰자 미친 척하고 직접 스벤 왕을 죽인 뒤 크누트에게 죽임을 당해 크누트의 왕위계승에 더욱 명분을 실어준다.
[10]
그것도 직전에 국왕이 살해당한 바로 그 현장에서다.
[11]
원래 크누트 왕이 많은 군대를 데려온 것은 잉글랜드인들을 찍어누르기 위해서였으나 결과적으로는 이로 인해 오히려 잉글랜드인들은 크누트 왕을 침략자로 보고 있었다. 거기다 크누트 왕은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케틸 같은 유력한 부자들을 꼬투리를 잡아 턴 다음 그 재산을 몰수하는 방법을 사용하려고 했었다. 즉, 부자들을 털어서 군사비를 충당하고 거기에 본보기를 보이겠다는 일석이조(?)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토르핀을 보고 느낀 바가 있었는지 군대를 해산하고 그만큼 세금을 낮추게 되자 오히려 잉글랜드인들에게 환영을 받게 된 것. 그 대신 군축의 일환으로 바이킹들을 본격적으로 토사구팽할 계획을 세운다.
[12]
다만 최측근인 토르켈에게는 섭섭치 않게 보상을 내렸다. 토르켈이 싸움만을 인생의 낙으로 삼는 전투광이라 문제였지.